어제(2006년 6월 27일) 아침 조선일보 2면에 르뽀 기사 하나가 실렸다. 프로 골퍼 장정이 바로 6.25전쟁 56돌 날 미국 뉴욕 인근에서 있은 LPGA 웨그먼스대회 마지막 라운드에서 우승컵을 차지한 다음, 6.25한국잔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이 지방의 165명의 영령들이 잠들어있는 한국전참전용사 묘역에 참배하였다는 뉴스가 사진과 함께 윤희영기자의 취재 기사로 큼직하게 실렸다.
기사의 제목은 6월25일 LPGA 2번째 제패한 장정, 그녀의 우승세러모니는 ‘묵념’이고, 부제로 - 뉴욕대회 후 인근 한국戰 참전용사 묘역참배, “당신들의 희생 있었기에… 내년에도 올 것” - 이라 붙었다.
그제 6월 25일 날 하루 종일 TV나 라디오 틀어봐도 ‘6.25’란 단어 한마디도 들어 보지 못해 ‘정말 이렇게 잊어도, 아니 파묻어도 되는 건가?’ 하고 몹시 언짢았는데, 오늘아침 장정선수의 참전용사 묘역 참배 기사는 참으로 상큼한 뉴스가 아닐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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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선수가 6.25전쟁 참전용사묘역에 참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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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루어진 일이라 운동복 차림 그대로 참배하고 있다. |
기사 내용에 따르면 그녀는 “젊은 시절 희생을 무릅쓰고 도와주신 덕분에 지금 우리는 평화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감사하다는 것 외엔 뭐라고 다른 말씀을--- ”하면서 말 끝을 맺지 못했고, “갑자기 오게 돼서 아무 준비도 못하고---부끄럽지만, 작은 성의로 생각해 주시면---” 함께 참배한 참전용사 보겔씨 손에 봉투 하나를 쥐어 드리며 “내년 대회에 참가하러 올 때 다시 정식으로 인사하러 오겠습니다”고 하였다고 한다. |
첨부#1 <프로골퍼 장정의 한국전참전용사 묘역 참배 기사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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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에 든 나이에 배웠다는 지식인, 강정구는 ‘남의 집안 싸움(내전)에 미국이 개입해서 통일을 막았다’고 했는데,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애띤 아가씨 장정 선수는 ‘덕분에 우리의 오늘이 있다’고 말 한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어른과 아이가 뒤바뀌었을까?
이념에 미치면 부모 자식도 없고, 친구도 없고, 은인도 없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이라는 것을 어릴 때부터 보고, 듣기는 많이 했지만 ‘세계 10위의 경제국’로 꼽히고, 구쏘련을 비롯한 공산주의를 신봉했던 나라들이 제물에 허물어진 이 시점에서 똑 같은 소리를 들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또 그들 친북좌익세력들이 지금 정치권력을 휘어잡고, 제세상 만난 듯 날뛰며 하는 몰골이 눈꼴 사납고, 나라의 앞날이 참으로 걱정스러웠는데 오늘 장정선수에 관한 기사는 ‘아직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구나, 포기해서는 안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이 정권의 바탕을 이루는 친북좌경세력들은 6.25전쟁을 ‘통일내전’이라고 말하면서 미군의 개입이 이 나라의 통일을 막았다고 한다. 올해는 쏘련을 종주국으로 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세계 공산적화전략의 일환으로 북한에 김일성을 앞세워 공산주의 괴뢰정권을 만든 다음 중국을 공산화 하고, 이어서 남한을 공산적화 하려고 쏘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물밀듯이 밀고 내려온 것이 6.25전쟁이고, 그제가 그 56번째 돌이다.
6.25전쟁으로 입은 우리 민족의 아픔과 마음의 상처가 그 얼마인데, 그 때 엄마 손잡고 줄인 배를 움켜쥐고 징징거리며 피난 갔을 나이에 든 사람이 좌익 이념에 미쳐 6.25전쟁을 “남의 집안싸움인 통일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달 이내에 끝났을 것”, “맥아더는 (한국민)의 생명을 앗아간 원수” 운운하면서 국민을 호도하는 강정구라는 얼치기 학자가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고도 집행유예로 풀려나 계속 헛소리를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에 비하면 아직 20대를 벗어나지 못한 장정선수가 56년 전 외국의 참전용사들의 고마움을 알고, 전몰용사 묘역을 참배하고, 생존한 참전 용사들과 나눈 몇 마디는 설사 미국 땅에서 프로 골퍼로 활약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정권과 이를 뒷받침하는 친북 좌경세력들의 허튼 생각과는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나는 반가운 소식이다.
지금부터 45년 전 1961년 우리가 육사 4학년 때 가장 흥미진진하게 공부했던 과목이 전사(戰史)인데, 그 때 개인에게 배포된 전사부도(戰史附圖)에 요약된 6.25한국전쟁사의 초기작전 페이지를 넘겨보면 바로 6.25전쟁을 두고 이 정부를 뒷받침하는 친북좌파세력들이 ‘통일내전’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억지이고, 허구이고,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임을 쉽게 알 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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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한국전쟁사 초기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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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발발 직전 피아 전력
▶ 북한 인민군
사단: 16개사단 (38선지구: 16개사단, 후방: 10개사단)
병력: 174,000명(이 중 25,000명은 과거 중국에서 참전)
지휘체계: 총사령관: 김일성, 민족보위상: 최용건, 포병사령관: 김무정
인민군은 비밀리에 남침 준비를 하여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무기로 장비되었다.
육군은 약 100대의 T-34중전차와 TSU-76자주포 50문, 각종야포 1,643문,
공군은 Yak-9/ IL-10 등 소제 항공기 112대로 장비된 비행사단
해군은 30척의 경비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 한국군
사단: 8개사단와 1개 독립연대(38선 경비: 4개사단과 1개연대, 후방치안담당: 4개사단)
병력: 10만명
지휘체계: 국방잔관: 신성모, 참모총장: 채병덕 소장,
38선경비사단장: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 제8사단장 이정일 대령, 제17연대장 백인엽 대령,
후방치안담당: 수도경비사령관 이종찬 대령, 제2사단장 이형근 준장, 제3사단장 우승렬 대령, 제5사단장 이응중 소장
육군은 전차, 중포 등 중장비는 없었고, 8개사단 중 6개사단만 105미리 곡사포 1개 대대씩 편성]
해군은 소수의 경비정
공군은 육군항공대로서 김정렬 대위 하에 L4/L5 등 경비행기 2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 공산군의 남침
1950. 6. 25. 일요일 04:00시 최용건 지휘하의 공산군은 포천-의정부 방면에 주공을 두고, 춘천과 개성-문산 방면으로 조공을 두어 기습으로 남침을 감행했다. 서해안은 옹진반도를 신속히 제압하고, 동해안은 강능으로 상륙하였다.
중포의 지원하에 T-34 중전차를 선두로 8개사단(제1사단 최광, 제2사단 이청송, 제3사단 김광협, 제4사단 이건무, 제5사단 마상철, 제6사단 방호산, 제12사단 최충국, 제105전차사단 유경수)과 수개 여단(제3여단 최현, 제1여단 오백룡, 제766부대 오진우)은 경무장한 국군 4개사단에 비교할 수 없는 강한 전력이었다.
공산군 제1, 3, 4, 6사단과 105전차사단 병력 55,000은 국군 제1, 7, 2, 3, 5사단 및 수도경비사령부 병력 41,000을 격파하고,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7월 1일 한강을 도하하여 임시 편성한 시흥지구전투사령부(김홍일 소장 지휘하 2,000명)를 격파하였다.
◆ UN군의 참전
UN(국제연합)의 신속한 결의에 따라 6월 27일 미 해,공군은 작전을 개시하고,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7월 2일 미육군 제24사단(William F. Dean 소장)이 부산에 상륙하였다.
* 6월 29일 일본에 있던 미 극동군 사령관 McArthur 원수가 수원 비행장으로 날아와 영등포의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면서 진지에 배치되어 적을 노려보고 있는 한국군 병사(일등병)와 나눈 짤막한 대화가 UN군이 6.25한국전에 참전을 결심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그 일등병이 지금은 77새의 다리 절단 상이용사로 살고 있다는 기사가 2006년 6월 24일자 조선일보에 실렸다. |
첨부# 2 <그는 다리 절단된 ‘77세 영웅’ 기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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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일 McArthur 원수가 UN군총사령관에 임명되고, Wilton H. Walker 중장이 주한미군사령관으로 취임함과 동시에 미제8군 주력을 한국에 투입하게 되었다.
한편 6월 30일부로 참모총장이 된 정일권소장 휘하의 국군은 7월 7일 평택에서 제1, 2, 수도사단을 기간으로 제1군단(김홍일 소장)을 창설하였으며, 7월 16일 미제8군의 작전개시와 동시에 국군의 통할권이 미제8군사령관에게 이양되었다.
◆ 지연작전
7월 5일 오산에서 공산군에게 격파된 미 Smith혼성부대의 작전을 시초로 UN군은 미제8군 주력이 투입될 때까지 지연작전을 전개하였다. 7월 12일 주한 UN군의 지휘권을 인수한 미제8군은 금강을 따른 방어선을 펴고, 7월 12일 창설된 한국군 제2군단(유재흥 준장, 6, 8사단 기간)을 중부 단양 정면에 배치하였다.
경부가도로 주공을 둔 공산군 제3, 6, 4사단은 7월 15일 금강을 도하하여 UN군의 금강방어선을 격파하고, 대전을 공격하였다. 대전 시가전에 들어간 미제24사단은 최초로 3.5”바주카포를 사용하여 공산군 T-34전차를 격파하면서 저항했지만 7월 20일 사단은 격파되고, 사단장 Dean 소장은 실종되었다.
금강선과 대전전투에서 UN군은 많은 손실을 입었으나 ‘1주일간의 적 진출을 지연’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얻었다. 그간 7월 18일-19일 양일간에 미제25사단(William B. Kean 소장)과 미제1기갑사단(Hobart R. Gay 소장)이 포항으로 상륙하여 제1기갑사단은 제24사단과 교대하고, 제25사단은 그 우측에 한국군 제1, 2사단 정면인 황간-함창 간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지형상 불리와 공산군의 우회 및 게릴라전에 패하여 낙동강선까지 계속 후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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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남침경로(1950. 6.12-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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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부도(戰史附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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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lker선의 형성
6월 27일 UN의 참전 결의와 함께 한국 전선에 투입된 Smith부대, 미제24, 25, 기갑사단과 미8군사령관 지휘하에 들어간 한국군이 마지막 보루로 삼아 펼친 방어선이 서측은 낙동강, 북쪽은 대구-포항을 확보하는 그 북쪽의 선을 미군측에서는 ‘부산교두보’ 또는 ‘Walker Line’이라고 불렀다.
Walker선 작전은 UN군이 처음으로 연결된 방어선을 책정한 전투이다. 왜관 이동 지역을 담당한 국군은 제1사단(백선엽 준장), 제6사단(김종오 대령), 제8사단(이정일 대령), 수도사단(김석원 준장), 제3사단(이주식 준장) 등 5개 사단이었다.
왜관에서 남쪽으로 낙동강 동안과 마산 서측을 연한 선에는 미제1기갑사단(Hobart R. Gay 소장), 미제25사단(William B. Kean 소장), 미제24사단(?), 미제1해병여단(?) 등 3개사단, 1개 여단이 배치되었다.
공산군은 8월 3일 낙동강선에 도달하여 대구와 부산 점령을 최종 목표로 총공세 준비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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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두보(Walker선) 작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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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부도(戰史附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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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8/26 간의 작전
미8군사령관 Walker 중장은 미제25사단과 미해병여단으로 ‘Kean 특수임무부대(TF)’를 편성하여 8월 7일 아침, 진주방면에서 마산을 위협하는 공산군 제6사단을 공격게 하여 격파하고, 진주 동측 고지군을 점령하였다.
(낙동강 서부) 낙동강 서부을 담당한 공산 제2, 4사단은 제10사단이 증원되어 8월 6일-15일 간에 UN군의 주병참선인 대구-부산 가도를 차단코자 남강지역 낙동강 동안에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동부해안지역) 공산군 제5사단은 포항을 점령코자 게릴라부대를 영덕 남방으로 상륙시켜 영덕 일대의 국군 제3사단의 후방을 차단하였으나 제3사단은 해상으로 철수하여 공산군이 구룡으로 상륙하여 8월 12일에 점령한 포항을 8월 18일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왜관-대구정면) 8월 중순부터 왜관-대구 정면에 대한 공산군의 공격은 김무정의 제2군단 휘하의 제1, 3, 7, 8, 13, 15사단으로 군위-대구와 다부동-대구 2개 축선으로 공격하였다. Walker 장군은 한국군 제1, 6사단과 예비인 미제27, 23 RCT(연대전투단)로써 다부동 남방에서 돌파를 저지하였다.
▶ 8/27-9/16 간의 작전
공산군의 Walker선에 대한 제2차 총공세는 8월 26일 강력한 조공으로 포항을 향해 개시되었다. 주공은 8월 31일 밤 서부 미제2, 25사단 정면으로 총공세를 취하였으나 9월 15일까지 마산 서측 원진지로 격퇴되었다.
대구정면에 대한 공산군의 공격은 9월3일-10일 간에 6-8Km를 진출하고, 미제1군단장 Frank W. Milburn 소장이 9월 13일 대구에 도착하여 미제1기갑사단, 한국군제1사단, 영국군제27여단을 통활 지휘하여 공산군의 공세를 저지하였다.
포항정면의 한국군제1군단 지역으로 공격해완 공산군 제5, 7, 12, 15사단 등 4사단은 포항을 점령하고, 대구-경주-부산을 연결하는 UN군의 병참선을 위협하는 돌출부를 형성하자 Walker 장군은 예비인 미제24사단을 동, 한국군제2군단을 서로 하여 역습을 감행하여 공산군을 격퇴하고 포항을 탈환하였다.
◆ 6.25전쟁 초기 작전의 결산
▶ 초기전투에서 한국군이 실패한 원인
1. 병력과 장비의 열세
2. 경계의 태만
3. 교육훈련의 미비
4. 작전지휘의 졸렬
5. 지형의 불리
▶ Walker선에서의 공산군 실패 원인
1. 제공, 제해권의 피탈
2. 병참선 신장
3. 병참수단 열등으로 초기 성공을 전과확대 실패
4. UN군의 신속한 기동과 대비
▶ 공산군의 남침작전이 실패한 원인
1. 열세했던 UN군의 계획적인 지연전 성공
2. 병참지원의 실패
3. 서울 점령 후 지체함으로써 전과확대 기회 실기
Walker선에서 공산군의 총공세를 저지한 UN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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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1. <장정선수 한국전 참전용사 묘역 참배 기사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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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5일 LPGA 2번째 제패한 장정, 그녀의 우승세러모니는 ‘묵념’ 뉴욕대회 후 인근 한국戰 참전용사 묘역참배, “당신들의 희생 있었기에… 내년에도 올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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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선수가 높이 치켜 든 LPGA 웨그먼스대회 우승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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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이 17번 홀에서 버디를 잡아 우승을 확신하고 있을 때였다. 딸을 따라다니며 경기를 지켜보던 장정의 아버지 장석중(62)씨 곁으로 단아한 차림의 한 아주머니가 다가섰다.
“근처에 한국전쟁 참전용사 묘역이 있는데 오늘이 한국전쟁 56주년 되는 날이어서 기념행사가 있었어요. 마침 오늘 따님이 이 미국 땅에서 자랑스럽게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50대 후반쯤 돼 보이는 교민 아주머니였다.
장씨는 딸의 경기가 끝나는 대로 함께 묘역을 참배하고 싶다고 했다. 생존 참전용사들에게 인사도 드리고 싶다며 만남을 주선해 주도록 부탁했고, 그 아주머니는 흔쾌히 그 뜻을 받아들였다.
장정이 25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주 로커스트힐 골프장에서 열린 미LPGA 투어 웨그먼스대회에서 우승한 직후 인근 로체스터 국립묘지 내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묘역을 찾았다.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잃고 돌아온 이 지역 출신 참전용사 165명의 영령 앞에 머리를 숙였다. “당신들께서 우리나라를 위해 싸워주셨기에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됐습니다.”
장정은 생존 참전용사 대표로 나온 조 보겔(77·참전 당시 상병), 돈 코프스키(72·당시 병장)씨와 함께 165명 전몰 장병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기념비 앞에 나란히 서서 묵념을 올렸다. “경찰이었던 제 큰아버지도 한국전쟁 당시 전사하셨습니다. 어쩌면 당신들과 멀지 않은 곳에 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정 부녀가 도착한 묘역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나란히 반기(半旗)로 걸려 있었다. 매년 6월 25일 기념행사를 하며 반기를 게양하고, 7월 27일까지 그 상태로 놓아 둔다고 했다. 전쟁 발발 이후 유엔이 한국전쟁 참전 결정을 내린 날짜까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40~50명의 참전용사가 기념식에 참가했으나, 최근엔 해가 다르게 그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고 했다. 장정 부녀는 아주머니께 “이 말은 꼭 좀 통역을 해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젊은 시절 희생을 무릅쓰고 도와주신 덕분에 지금 우리는 평화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감사하다는 것 외엔 뭐라고 다른 말씀을….”
보겔씨는 딴소리를 했다. “우리가 도와줬다고는 하지만, 많은 한국 사람들이 같이 싸워서 얻은 평화이고요. 이제 와서 보니 한국전에 참전한 것이 우리에게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오늘이 한국전쟁 기념일이어서 한국에서 온 이 ‘꼬마 아가씨’가 우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하는 덕담도 건넸다.
“갑자기 오게 돼서 아무 준비도 못 하고…. 부끄럽지만, 작은 성의로 생각해 주시면….” 장정은 보겔씨 손에 봉투 하나를 쥐어드리며 “내년 대회에 참가하러 올 때 다시 정식으로 인사하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할아버지한테 1000달러밖에 못 넣어드렸어요. 어쩌면 좋아요.” 장정은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 했다.(윤희영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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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2. <그는 다리 절단된 ‘77세 영웅’기사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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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 한강방어선에서 맥아더 장군을 만난 병사, 신동수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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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한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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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 다른 부대는 다 후퇴했는데, 자네는 왜 여기를 지키고 있나?” “저는 군인입니다. 상관의 명령 없이는 절대 후퇴하지 않는 게 군인입니다. 철수 명령이 있기 전까지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살 겁니다.”
1950년 6월 29일, 당시 스무 살의 한 일등병은 서울 영등포에 있던 진지(陣地)에서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 전쟁이 터진 지 나흘째, 이미 한강 이북은 인민군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다. 그곳은 남한의 부대가 마지막까지 버티던 한강방어선이었고 맥아더 장군은 도쿄에서 날아와 상황을 돌아보던 참이었다.
“정말 훌륭한 군인이다. 내가 일본으로 건너가면 즉시 지원군을 보내주겠다.”이 군인에게 감동 받은 맥아더 장군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이렇게 말했다. 약속대로 곧바로 한국전 참전은 실행에 옮겨졌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관계자는 “맥아더 장군이 당시 한국군 병사의 말에 감동을 받아 참전을 결심했다는 사실은 참전 장성 회고록 등 여러 문서에서 확인된다”고 말했다.
수십 년째 묻혀져 있던 이 일등병의 존재가 최근 밝혀졌다. 신동수(辛東秀·77)옹이다. 그를 찾아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으로 향했다.
“이렇게 멀리 오게 해서 어쩌나. 다리가 이래서….” 그는 왼쪽다리를 절었다. 양말에 가려졌지만, 한눈에도 의족(義足)임을 알 수 있었다. 기쁨인지, 고통인지 모를 옛 전투 이야기를 시작하자, 신옹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했다.
그가 속한 부대는 백골부대 18연대 1대대 3중대였다. 6월29일 이들은 영등포구 양화동의 인공폭포공원 인근에 진지를 편성해놓고 있었다. 다른 대대는 물론 같은 대대 다른 중대도 후퇴해버린 외로운 싸움이었다. 사흘째 굶고 있던 그때였다.
“4명이 지프에서 내리더라고. 처음에는 소련군인줄 알고 쏘아 죽이려고 쫓아나갔어요. 하지만 정모 마크가 소련군 것과 다르더라고. 사령관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고 한다. 대화가 끝난 후 맥아더 장군은 그에게 연막탄 2개와 대공표지판을 선물로 줬다. 그리곤 곧 그를 잊어버렸다고 한다. 노량진과 영등포까지 진격한 인민군의 총포가 시시각각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 “우리 머릿속에는 오로지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뿐이었어요.”
맥아더 장군이 돌아간 이후에도 그는 사흘을 더 버텼다.
“결국 후퇴 명령을 받았습니다. 중대원들에게 명령을 전달하며 미친 듯이 돌아다니고 있었죠. 갑자기 다리가 오그라들더니 펴지질 않더라고요. 그러고도 150m를 뛰었어요. 살기 위해 아무 집이나 찾아가 부뚜막 아궁이에 숨었는데, 착한 주인이 온몸을 닦아주고 빨간 헝겊을 찢어서 인민군 치료소에 데리고 가주더군요.”
하지만 3개월이 지나도록 총탄에 맞은 다리를 치료받지 못했다. 무릎에선 구더기까지 나왔다. 결국 다리를 절단했다. 다리를 절며 절며 찾아간 강원도 춘천. 하지만 남동생은 형을 찾으러 가겠다며 인민군에 합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못 만난 세월이 무려 56년이 됐다.
당시 100여 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7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7일 동안의 처절한 혈전 덕분에 인민군의 서울 함락은 늦어졌고, 지연전을 위한 재편성, 유엔군의 조기 전선투입이 이뤄졌다고 한다. 그의 잘린 다리가 나라를 구한 것이다. “6월 25일만 가까워오면 내가 묻어준 동료들, 내 앞에서 죽어간 동료들이 떠올라요. 군번도 없이 죽어간 전우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어떻게 지킨 나라인데…. 지금 우리 젊은이들이 그걸 알고 있나요?” 그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충주=박란희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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