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1;1-13. 묵시와 이상과 꿈과 목표라는 비전은 무엇이며 그 원칙은? 2023. 8. 6.
먼저 오늘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무엇을 말씀합니까? 여러분, 로마에 가면 로마 외곽에 있는 지하 묘지 카타콤이 있습니다. 공동묘지이지요? 초창기 초대 로마 교인들은 핍박이 심해지자 예배를 편하게 드리기 위해서 장소를 물색한 곳이 카타콤입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 뿐 아니라 군인들까지 꺼리는 곳이 카타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공동묘지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외곽에 있는 이곳은 응회암이란 토질로 좀 특이합니다. 이 토질은 무르고 부드러워서 파기가 편하지만 일단 판 후에 집을 만들어 놓으면 아주 딱딱하게 굳어지고, 아주 견고해 집니다. 그러니까 로마 교인들로서는 더 이상 좋을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지하 5층까지 파 놓고 살았는데, 모두 120개의 카타콤이 있었고 그 총 길이를 합하면 900 km 나 됐습니다. 대단하지요? 그런데 2000년 동안 드러나지 않다가 1854년에 어떤 고고학자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굴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무려 600만구에 해당하는 시신과 유골이 발견됐습니다. 콘스탄틴황제에 의해서 A.D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이 되니까 그 지하 동굴에서 무려 300년 동안 아이를 낳고 할아버지, 아들, 손자로 대를 이어갔습니다. 사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비참했던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한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고 하니까,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그 오랜 시간 동안 견디게 했을까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로마서가 로마 교회에 전달된 시점과 초대 교인들이 카타콤에서 생활하게 된 시점이 거의 일치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암울한 곳에서 그들을 버티게 했던 것은 주님을 향한 믿음이고 또 하나는 사도 바울이 보냈던 로마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로마서를 수도 없이 베껴서 너나 할 것 없이 읽고, 거기서 구원의 진리를 발견하고 예배드리고 찬양하며 세상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1-1. 견고함입니다. 11절에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고, 그것으로 교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고, 은사를 견고케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은사와 은혜가 있습니다. 은혜는 사람마다 다 똑같이 받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심령과 마음에 받은 자아 인식과 거기에서 오는 기쁨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구원의 확신에서 오는 감격이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는 사람마다 그 강도에 있어서는 좀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내용은 다 똑같겠지요? 그런데 은사는 무엇이냐? 기능적인 것입니다. 기능이니까, 당연히 다원적이고,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여러분들 중에도 어떤 분은 가르치는 은사가 있고, 어떤 분은 전도 잘하는 은사가 있고, 어떤 분은 사람 잘 사귀는 은사가 있고, 어떤 분은 또 봉사 잘 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다 다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주신 은사를 소중히 여기되 내게 주신 은사는 더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내게 주신 은사는 소홀히 여기고 다른 사람의 은사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내게 주신 은사를 귀하게 생각하고 보고 이것을 최선을 다하여 최대한 활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12절에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주신 은사를 나눌 뿐 아니라, 교인들이 받은 은사도 자기와 함께 나누기를 바라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12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그래! 너희는 너희들대로 잘 믿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똑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이 정도로도 충분해. 그러므로 너희들이 받은 은사는 내게 나눠 주고 내게 주신 은사는 너희들에게 나눠 주겠다. 우리 같이 Sharing 하자! 나누자. 지금 이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 삶의 현장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은 나누는 것과 쉐어링 하는 것입니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고통과 걱정을 나누면 반으로 줄어듭니다. 행복과 기쁨도 나누면 두 배가 됩니다. 은사도 나누면 여러 가지 기능을 할 수가 있습니다.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령한 은사의 내용이 무엇인지 13절에.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바로 이것이 신령한 은사의 내용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라고 합니다. 즉 자기가 받은 은사는 예루살렘에서 받은 은사가 아니고 이방인에게 필요한 이방인의 신학이라는 거지요. 지금 로마 교회는 예루살렘에 있는 복음이 그대로 직수입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로마 문화권 속에서 복음이 어떻게 정립되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 로마 사람들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서구의 기독교 문화를 그냥 도입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본토의 정서와 문화를 고려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지금 내가 가서 이방인 속에서 복음이 어떻게 세워져야 하는가를 말하겠다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비롯한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그 신령한 은사를 이제부터 내가 당신들과 함께 나누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쭉 설명해 간 것이 로마서의 내용이고 복음입니다. 견고함을 위하여 은혜와 은사를 나누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히메지 비전교회도 나누시므로 주어진 삶에서 더욱 견고해지는 모든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2. 그러면 바울이 나누어 주려고 하는 은사가 무엇인가? 은사의 헬라어 원어가 카리스마입니다. 그러니까 카리스마는 리더십이 있는 사람에게 쓰는 표현이 아니고 자기 은사를 최대로 활용해서 다른 사람을 잘 섬길 줄 아는 사람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뒤집어 말씀을 드리면 은사를 잘 활용하는 사람을 카리스마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은사를 나누는 것 – 그러니까 로마서 전체를 배우고 깨닫는 것은 왜 필요한 걸까요? 바로 견고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무엇을 나눌까요? 지금 현재 로마에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거기에도 이미 복음이 들어갔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아는데 그렇다면 왜 바울의 편지가 또 필요했을까요? 여러분, 신앙과 믿음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가고 같은 것이 계속되면 감격이 무디어집니다. 여러분,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의 그 감격이 아직도 생생한가요? 그런 분도 계시겠지만 대부분은 굴곡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감격과 열정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감격과 열정을 회복할까요? 자주 복음을 되풀이해서 들어야 하고, 십자가의 도를 반복해서 들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그래야 합니까? 음이 견고해 질 때까지입니다. 그렇다면 견고하게 하기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 믿음이 견고해야 되는 이유는 평탄할 때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파야 약이 필요하듯이, 고난이 오고 시험거리가 많을 때를 대비해서 견고한 신앙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평탄할 때에는 어느 누구인들 목회를 못하겠어요? 그러나 어려움이 오고 위기가 올 때야 비로소 능력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믿음이 견고하십니까? 다른 부분보다 그 관심이 좀 약하지요? 그러니까 위기가 오면 여지없이 흔들리게 됩니다. 결론도 이상하게 내립니다. 사람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공동체의 일을 통해서도 시험 당합니다. 먼저 믿은 사람이나 직분 높은 사람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자라고 견고해지면 이전에 시험 들었던 문제까지 자유하게 됩니다. 여러분, 자녀가 어릴 때는 부모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 받지요. 그러면 이해를 위해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해보아라. 사회생활을 해 보거라. 그런데 아이가 자라면 어떻습니까? 부모를 이해하게 됩니다. 부모가 변한 게 아니라 아이들이 자라면서, 성숙해지면서 자연히 깨닫고 알게 되지요. 믿음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사람들 때문에 자꾸 넘어지는 것은 그것을 통합적으로 받아들일 능력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물론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자라면 문제가 있는 성도나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시험 들기 보다는 중보기도로, 섬기는 사람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받아들이고 영적으로 견고해지고, 자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간단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단계들이 있고 그 단계마다 대가를 지불 해야만 믿음이 견고해 집니다. 교회에는 완전한 사람들만 모인 것이 아니고, 믿음이 좋은 사람과 연약한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차만별입니다. 이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영적으로 성장해야 알 수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한데 그렇지 못하니까 흔들리고 시험이 듭니다. 그러므로 먼저 인정해야 될 것은 내 자신을 비롯한 모두가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계속 주지시키는 것은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우리 안에 있는 죄 성을 다 극복한 것이 아니고, 여전히 죄 성을 가지고 있고, 말씀의 법도를 따라 사는 것보다는 과거의 습관이 더 익숙하다고 합니다. 이 점을 인정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잘못은 또 되풀이 됩니다. 특별히 믿음이 견고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말씀이든지 말씀으로 받으면 장성한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어떻습니까?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말씀이 따로 있습니다. 원하는 부분에서만 은혜를 받고, 순종과 행위를 요하는 말씀에는 귀를 닫습니다. 원하는 것에만 집중하니까 히브리서 기자도 젖을 먹는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히5;13-14,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결국 영적 성장은 말씀에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골고루 알아야 합니다. 특정 영역의 말씀만 받으면 믿음과 신앙의 영양이 골고루 가지 않습니다. 신앙이 건강할 수 없지요. 신앙의 세계는 굉장히 심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고 부담스러운 것까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2. 그러면 신앙과 믿음의 견고함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2-1. 시간이 필요합니다. 집을 지을 때도 조립식 건물 세우는 것과 높은 빌딩을 올리는 것은 전혀 다르지요? 견고한 집은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여정도 그렇습니다. 조급함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여러분, 개인의 영혼을 세워가는 일은 정말로 힘이 듭니다. 계속해서 신앙의 깊이를 반복 합니다. 예수님의 12제자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라는 최고의 선생님을 모셨지요? 3년 동안이나 주옥같은 말씀을 들으면서, 엄청난 기적을 보면서 동고동락, 합숙훈련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마지막 시험에서 전원 낙방을 했습니다. 결정적 순간에 너무나 허약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과정은 속성이 없습니다. 물론 빨리 쌓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무너지는 것도 빨라집니다. 그래서 너무 서두르지 말아야하고 너무 쉽게 권해서도 아니 됩니다. 믿음이 웬만큼 자랄 때까지, 말씀을 비롯한 신앙과 영적인 면에 관심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넘어졌다면 너무 실망하지 마시고, 일어나서 다음 단계로 가면 되고, 머무르지 않으면 은혜 받을 때와 견고하게 세워질 그 때가 옵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견고해질 때까지 애쓰고 기다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영적으로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열심과 노력이 필요 합니다. 여러분, 처음 믿음을 가졌을 때 어떻게 하셨나요? 교회출입만 하면 말씀의 퍼즐이 잘 맞춰집니까? 주일에 예배 한 번 드리고 말씀 한 번 듣는 것만으로 구원의 확신이 뿌리를 내렸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십 년이 지나도 진도가 안 나갑니다. 구원을 받은 것인지, 죽으면 천국엔 갈 수 있는 지, 믿고 있는 사실에 대해 잘 확신이 없습니다. 문제 아닙니까요? 일본에 있다는 것이 부자 되는 것도 아니고 일본어가 느는 것도 아닙니다. 집중하지 않으면 절대로 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자라는 것도 본인이 해야 할 몫입니다. 직접 읽기 전에는 말씀을 알 수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 세월이 흐른다는 것은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견고해 지는 것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고 오로지 본인이 감당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든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 참여해야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영감을 주십니다. 영적으로 자라는 것은 자발적인 노력과 대가지불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견고함을 위하여 스스로의 노력과 자기 몫을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3. 영적인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운동도 해 보고 악기를 다루어 보지만 스스로 자라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바울도 자기가 직접 가서 전하지는 못하지만 로마서를 통해서 논리적이고도 명확한 복음을 로마 교회에 전하려고 했잖아요? 사실 혼자 성경 전체를 꿰뚫는 것은 어렵습니다. 말씀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들이 있는데, 그런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둔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책들을 참고하시는 것도 좋고, 그것이 불편하시다면 신앙의 선배에게 물어 보시면 도움이 됩니다. 토마스 아 케피스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 라는 신앙서적과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같은 책들이 있습니다. 이런 거장들의 도움을 받고, 함께 믿음생활을 하는 교회 공동체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는다면 믿음은 더 견고해 질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결국 이 세 가지를 다 아우르는 요소는, 영적으로 견고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정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외적으로 보여 지는 것이 아니라, 나만이 가진 영적인 비밀입니다. 나와 주님만이 아는 세계입니다. 믿음의 뿌리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견고함은 외형이 아니라, 내면의 싸움입니다. 핍박과 비난이 있고, 곤고한 인생이요,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에도, 내가 가진 진리가 분명하다는 확신 위에 걸어갈 수 있는 바로 견고함입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상관없이, 영적인 은혜 아래 살아가는 묵직함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되는 것도 아닙니다. 혼자만의 힘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주님과 나의 영적인 비밀을 가지고 매일 조금씩 나아갈 때야 가능합니다. 빌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에게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그 깊은 영적 세계에 있었던 사도 바울도 여전히 달려갑니다. 믿음의 견고함에 이르도록 갈망하고, 힘쓰고, 애씀과 기도함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때까지 계속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비전입니다. 비전이 무엇입니까? 코로나 이후, 요즘 들어 비전, 리바이벌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비전을 가져라. 비전을 세워라.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 그런가하면 교회 이름도 비전이란 타이틀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 지역을 나타내는 접두사를 사용해서 무슨 예수비전교회. 저희 교회도 히메지 비전교회입니다. 오사카 비전교회, 선교비전교회, 이런 용어들이 많습니다. 잠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욜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묵시와 이상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묵시나 이상이 바로 비전(vision)입니다. 비전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가지는 소망이고 꿈이고 목표입니다. 그런데 꿈과 목표는 어떠해야 합니까? 견고해야지요. 흔들리지 말아야지요. 원칙입니다. 그래서 묵시와 이상인 비전과 꿈과 목표인 비전은 사실 견고함의 다른 표현입니다. 여러분, 묵시나 이상이 없으면 백성이 흔들리고 믿음의 사람이 흔들립니다. 꿈과 목표가 없으면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비전이 없으면 지금의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현실에서 견고해질 수가 없습니다. 왜요? 늘 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늘 가변적이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회와 문화와 정치의 기준이 시대마다 다르고 때마다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조건들에 맞게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견고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묵시의 히브리어는 하존(ןוֹז)으로서 보는 것과 꿈과 계시와 신탁과 이상을 의미합니다. 묵시의 헬라어는 옵타시아(ὀπτασία)인데 어떤 영적인 것이 나타나는 환영과 영적인 것이 보이는 환상과 기이한 영적인 나타남의 이상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영어성경에서 비전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요엘2;28,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에서 나오는 이상은 히자욘(ןוֹי)으로서 묵시를 말하지만 여기에 특히 꿈을 통해 보여주는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묵시란 하나님께서 신탁(神託)을 위해 꿈이나 환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시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묵시와 비전은 선지자와 예언자에게 어떠한 상황에서도 견고함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선지자와 예언자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비전이 없으면 방자히 행합니다. 흔들리고 위기 때에 방향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주어진 상황을 돌파할 그 무엇이 없습니다. 용기도 없고 열정도 없습니다. 여러분, 물을 꼭 건너보아야 압니까? 인생을 살아보아야 터득이 됩니까? 예, 경험과 체험의 입장에서는 일부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건너지 않고, 살아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꿈과 목표인 비전이 있으면, 묵시와 이상인 비전이 있으면 상황과 조건과 환경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건너지 않고 살아보지 않아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비전이 있고 꿈과 환상이 있고 묵시와 이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비전을 무엇으로 생각합니까? 야망을 비전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야망은 헛된 망상에 불과합니다. 망상을 좇으면 패가망신하고, 야망의 노예가 되며,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비전은 야망이 아니고 어떤 견고함의 원칙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올바른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됩니다. 상하ᅟᅩᆼ과 조건에 메이지 않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다 열려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비전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의 비전은 오직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아야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 드리는 비전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는 사람이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몇 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 것이 무엇입니까?
첫 째는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신앙인은 그 비전이 삶의 현장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하나님의 일꾼들은 책상머리 앞에 앉아 비전을 찾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이사야와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매일매일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던 중에, 그 삶의 현장에서 자신을 통하여 이루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을 깨달았습니다. 비전은 결코 삶과 괴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기 원한다면 누구보다 현재 주어진 삶의 현장에 충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허공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인간을 위한 비전이고, 인간의 삶을 위한 비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의 현실과 현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나의 비전으로 삼을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기 원하시는 뜻을 담을 수도 없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고, 선택함을 받았고,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는 복음, 복된 소식은 흔들리지 않는 예수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었고 파송이 되어 로마를 향하게 되고, 이방인의 사도로 존재한다고 말을 합니다. 이 표현이 무엇입니까? 비전을 이루고 비전을 향한 발걸음은 삶의 현장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신앙인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자신에게 주어진 영역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 언제나 자기 자신이 지닌 것만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방인의 사도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에베소와 빌립보와 고린도와 갈라디아와 데살로니가의 상황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 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세우고 관리를 하고 가르치고 섬겼습니다. 모든 눈물과 기도와 겸손으로 섬겼고 가르쳤습니다. 행20;17-24.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했을 정도로 주어진 상황을 소주하게 생각을 했고 소중히 여겼습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와 누가 복음에 나오는 므나 비유가 있습니다. 의미상 같은 내용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수건으로 감싸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때,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두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라고 말을 합니다. 그때 주인은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고 왔나이다. 마25;26-30, 그때 주인이 대답하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여러분, 무슨 말씀입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를 말씀하셨습니다. 능력의 차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상황과 영역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땅에 묻고 수건에 감싸두면 있는 것 까지 빼앗기고 어두움에 던져지고 이를 갈면서 후회하면서 울게 됩니다. 물론 여러분, 사람은 백인백색입니다, 주어진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주어진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 상황 자체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힘든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러한 현실과 상황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생각하면 답이 있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로 그 상황을 헤치고 지나가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손안에 있는 것과 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그것이 아무리 하찮게 보일지라도 절대적 그 가치를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비전은 바로 그것을 통하여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로마교인들에게 어떠하든지 갈 길을 구했습니다. 주어진 상황을 소중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에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는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이야기 하나합니다. 두 친구가 길을 가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쏟아 졌습니다. 할 수 없이 인근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데 시간이 꽤 지나도록 비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 친구가 중얼 거렸습니다. 대체 이 비가 언제 그치기는 하는 걸까? 그러자 다른 친구가 빙그레 웃었습니다. 자네 그치지 않는 비를 본적이 있는가? 여러분,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시련도 시간이 지나면 결말이 납니다. 그치지 않는 비는 없습니다. 상처를 받지 않으며 자라나는 꽃이 없습니다. 비바람을 맞지 않는 나무는 없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삶의 길에 수많은 비와 바람이 다가 옵니다. 때로는 비바람에 가지가 넘어지듯 아플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픔으로 인하여 나무는 더 단단해 집니다. 비와 바람을 견디고 핀 꽃이 아름답듯이 한 때의 아픔으로 인생은 더 깊어지고 더 단단하게 됩니다. 매번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한때입니다. 상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더 깊고 아름다운 믿음과 영적인 견고함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는 비전은 삶의 현장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그 주어진 현장과 상황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관리하여 여러분의 비전과 이상과 꿈과 목표가 이루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