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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홍랑(洪娘)과 매창(梅窓)의 이별시에는 헤어짐의 미학이 있다.
조선조 5백 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에는 내놓으라는 기생들이 많이 있었다.
시, 서. 화. 가, 무(詩. 書. 畵. 歌. 舞)를 갖춘 기생을 명기로 쳤는데,
그 중에도 시를 쓸 줄 아는 시기(詩妓)를 으뜸으로 쳤다.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사회여서 드러내놓고 기생이 사대부와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홍랑과 매창,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두 여성은 기생이라는 절망적인 신분의 한계를
뛰어 넘어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그 열정만큼 이들의 시에는 정과 한이 고스라니 담겨 있다.
홍랑은 함경도 홍원에서, 매창은 부안에서 필명을 날렸다.
매창은 선조 6년(1573)에 태어나 광해2년(1610)까지 산 것으로 기록이
분명하나 홍랑은 그 생몰연대가 불확실 하다. 다만 고죽(孤竹) 최경창
(崔慶昌,1539년~1583년)이 함경 북평사(北評事)로 부임한 1573년에
홍랑을 처음 만난 것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십 오륙 세 정도 홍랑이
연상일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뛰어난 미모와 글재주를 지닌 홍랑은
12세에 어머니를 잃고 함경도 관북지방 홍원(洪原)의 관기로 들어간다.
홍랑은 1573년, 경성 북평사에 임명되어 가던 고죽 최경창을 만나
사랑을 나눈다. 당시 고죽은 백광훈(白光勳), 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불렸는데, 평소 시문에 능한 홍랑은 고죽의 시를 특히
좋아했다.
고죽 역시 시를 아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홍랑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 후 경성으로 부임한 최경창을 찾아 홍랑은 남장을 하고 천리 길을 걸어
경성으로 간다. 군중 막사에서 지내며 홍랑은 거문고와 노래, 시를 들려
주며 고죽의 외로움을 달래 주었고 고죽은 홍랑의 뛰어난 재기와 맑은
성품을 사랑하였다. 두 사람은 단순히 남, 여의 육체적 사랑뿐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으로 깊이 사모하게 되었다. 어느덧 임기가 되어 최경창이
한양으로 떠나게 되자 홍랑은 쌍성(雙城)까지 따라가며 함관령 고개
위에서 버들가지를 꺾어 이별시를 읊는다.
묏버들 갈혀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 밖에 심거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묏버들이 주는 이미지는 감상적이고 여리다.
버드나무는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로 비유되기도 하고, 이별의 슬픔을
간직한 나무로 상징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미인을 유요(柳腰)라 하고
애교어린 몸짓을 유태(柳態)라하고 아름다운 눈썹을 유엽(柳葉)이라 했다.
예로부터 남녀가 이별할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주는 풍습이 있었다.
버들은 세찬 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오직 바람에 몸을 맡긴다.
사람들은 이런 버들을 지조가 없다고 비웃지만 때로는 버들을 통하여
중용의 도를 깨치기도 한다.
이런 묏버들을 통해 작가는 이별을 노래한다. 꺽은 가지에서 어찌 다시
새 잎이 나겠냐마는, 사랑이 하늘을 감동시키면 밤새 비를 내려 파릇파릇
새 잎이 돋도록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묏버들을 보며 사랑하는 임을
그리워하겠다는 소극적 표현이 아니라 꺾은 가지를 살려서 계속해서
사랑해 달라는 적극적인 메시지가 담겨진 시다. 이 시 어디에서도
홍랑의 가녀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최경창은 이 시를 후일
<飜方曲>이라는 제목으로 한역을 하여 그 감동을 간직한다.
절양유기여천리인(折楊柳寄與千里人)
위아시문정전종(爲我試門廷前種)
수지일야신생엽(須知一夜新生葉)
초췌수미시첩신(憔悴愁眉是妾身)
다시 만날 날만 기약하며 3년의 세월이 흐른 후, 고죽이 중병을 얻어
병석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홍랑은 밤낮 7일을 걸어 한양에
당도하여 정성을 다해 병구완을 하였다. 당시에는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이 한양에 들어오는 것을 법으로 금하였는데,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고죽은 1576년(선조9년) 영광(靈光)군수로 좌천되었다가
사직하였다. 홍랑은 그 때 고죽과 봉성(鳳城)에서 작별하고,
고죽은 贈別(떠나는 이에게)이라는 한시를 남긴다.
고운 뺨에 두 줄 눈물로 봉성을 나서는데 [玉頰雙啼出鳳城]
새벽 꾀꼬리 수없이 울어대니 이별 정 때문이라 [曉鸎千囀爲離情]
비단 적삼 좋은 말로 물가 저편 떠나 갈 때 [羅衫寶馬汀關外]
풀빛만 아득히 혼자 가는 것 전송하겠지 [草色迢迢送獨行]
하염없이 바라보다 그윽한 유란을 주노니 [相看脉脉贈幽蘭]
이번 가면 하늘 저편 어느 날에 돌아올까? [此去天涯幾日還]
함관에서 불러주던 옛 노래는 하지마오 [莫唱咸關舊時曲]
지금 구름과 비가 푸른 산에 드리우니 [至今雲雨暗靑山]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별의 길을 떠나는데, 꾀꼬리마저 수없이
울어댄다. 홀로 떠나는 길을 풀빛만 전송하니 이별이 더욱 쓸쓸하다.
유란(幽蘭)은 사랑의 정표다. 유란을 건네주며 하염없이 바라보다
고죽은 홍랑과 같이 지냈던 애틋한 정(雲雨之情)에 못 이겨, 지난 날
부르던 이별의 노래(묏버들 갈혀것거..)는 부르지 말자고 말한다.
운우가 청산에 드리운 것이 지금 이들의 처지와 같다. 인물이 처한
상황을 잘 표현하려면 적절한 비유와 제재가 사용되어야 한다.
꾀꼬리나, 유란은 이별을 상징하는 제재로, 풀빛과 구름과 비는
아쉬운 이별의 정황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고죽은 다시 경성부사(鏡城府使)로 부임하여 홍랑과 재회했으나
45세의 젊은 나이에 아깝게 병사한다. 홍랑은 상여를 따라와
파주 월롱(영태리) 묘소에서 3년 간 시묘를 산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랑은 고죽의 시고(詩稿)를 늘 품속에 지녀, 온전하게
후손에게 전한다. 낭군 곁에 묻어 달라는 홍랑의 유언은 고죽의
후손들에 의해 이루어져 고죽의 묘 아래에 묻혔다. 지금은
파주 교하에 묘소가 있지만 원래는 월롱(영태리)에 있었다,
미군기지가 있던 이 자리에는 이화여대가 자리 잡는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너무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
신분을 초월하여 목숨이 다할 때까지, 순수한 사랑과 아픈 이별의
순간을 함께한 홍랑의 지조를 젊은이들은 알아야 한다. 홍랑이
이렇듯 열정적인 사랑과 극적인 이별을 넘나드는 삶을 살았다면,
매창은 안으로, 안으로 자신을 학대하며 인고하는 소극적 삶을
살았다. 매창(梅窓)의 본명은 향금(香今)이고 자는 천향(天香)이다.
계유년에 태어나 계생(癸生)이라고도 하였다.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로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났으며 <매창집>을 남겼다.
뛰어난 재주를 지닌 만큼 자부심도 대단했던 것 같다.
'贈醉客(취한 손님에게 드림)'이라는 제목의 오언절구가 이를
짐작케 한다.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醉客執羅衫]
손길을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어라 [羅衫隨手裂]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 게 없지만 [不惜一羅衫]
임이 주신 정까지 찢어졌을까 두려워라 [但恐恩情絶]
매창은 1590년 무렵 부안을 찾은 촌은(村隱) 유희경(柳希慶,
1545~1636))과 만난다. <촌은집>에 이런 기록이 있다.
“젊었을 때 부안에 놀러갔는데, 계생이라는 이름난 기생이 있었다.
계생은 내가 한양에서 이름난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유희경과
백대붕 가운데 어느 분이십니까? 라고 물었다.” 매창도 시인으로
이름 높던 유희경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유희경은 매창을
처음 만난 날 증계랑(贈癸娘)이란 시를 남겼다.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曾聞南國癸娘名]
글재주 노래 솜씨 서울에까지 울렸어라 [詩韻歌詞動洛城]
오늘에야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今日相看眞面目]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하여라 [却疑神女下三淸]
유희경은 40대 중반, 매창은 18세, 두 사람은 육체적 관계를 넘어
시를 통해 한 차원 높은 연정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유희경이
한양으로 돌아가고 임진왜란으로 소식이 끊기자, 매창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매창은 진심으로 유희경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곡원류>에 실려 전하는 시조 한 수가
이 당시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는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배꽃이 비처럼 흩날린다 해서 이화우(梨花雨)다.
얼마나 낭만적인가, 배꽃이 비처럼 쏟아지는 속에서 차마 떨어지지
않는 이별을 해야 했던 연인의 모습은 러브로망의 한 컷이다.
이화우와 추풍낙엽 사이에는 여백이 있다. 연인을 떠나보내고
밤마다 허전한 잠자리를 눈물로 달랬을 시간상의 여백이다.
이 여백에는 애타는 그리움으로 뜨거운 여름을 견뎠을 한 여인의
정과 한이 자리 잡고 있다. 속절없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은
작가 자신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임이기도 하다. 낙엽이 임이라면
이 시의 주제는 사모(思慕)다. 그러나 작가가 낙엽이라면 부질없는
원망이 주제다. 그래서 작가의 꿈이 오락가락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움인지 원망인지 모를 묘한 상념이다.
배꽃도 날리고 낙엽도 날린다. 이 세상에 날리는 것들은 모두
공허하고 삭막하다. 작가는 임과의 사랑이 혹여 한낱 낙엽처럼
날아가 버리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그래서 꿈을 꾼다. 천리를
잇는 꿈을 꾸며 두려운 밤을 보낸다. 꿈에서 나마 그토록 사랑하는
연인을 만날 때만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배꽃을 배경으로 만났다가 낙엽처럼 가버린 임, 길은 멀어도
꿈에서는 매일 밤 해후하는 임의 모습이 영화처럼 등장한다.
문학이 이처럼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누가 문학을 평면 예술이라 했던가?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길 떠났네 내 님은 나를 찾아서
그 후 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이 뒤엘랑 노중에서 만나를 지고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는 임을 꿈에서나 만나야 하는 기녀들의
처지는 황진이도 마찬가지다. 어떤 날은 꿈속에서 조차 만나지
못한 임을, 길이 어긋나 만나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달래줄 아는
문학적 기지가 있기에 더 안쓰럽다. 꿈은 이별 후의 그리움(情)과
아쉬움(恨)을 동시에 표출할 수 있어 좋다. 꿈이 있기에 불가능한
만남이지만 설렘이 있다.
시간은 인간에게 늘 아쉬움을 남긴다. 시간이 모자라 이루지 못한
꿈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많아도 진실로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회한(悔恨) 또한 많은 것이 삶이다. 유희경과의 헤어짐 이후
매창은 그리움과 원망사이를 꿈처럼 방황한다. 떠나간 임은
소식이 없는데 대나무 숲에는 새들이 지저귀고, 적막한 뜰에는
꽃잎이 휘날린다. 밤이면 거문고가 유일한 벗이다.
대숲에 봄이 깊어 새벽조차 더딘데
인적 없는 뜰에는 꽃잎만 휘날리네.
거문고로 이별 곡 타다 멈추고
가슴 벅찬 시름을 시로 달래오.
배꽃 피는 뒷동산에 두견이 울고
뜰에는 달빛 넘쳐 서러운 심사
꿈이나마 꾸자 건만 잠도 안와서
창가에 기대앉아 닭소리만 들으오.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구슬 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自恨, 허경진 譯)
시간이 가도 그리움은 식을 줄 모르고 외로움만 더해 갈 때,
잠시 허균을 만나 시와 거문고로 교유를 하며 생기를 찾지만
이내 허균도 떠난다. 허균은 이 당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계생은 부안의 기생이라. 시에 밝고 글을 알고 노래와 거문고를
잘 한다. 그러나 절개가 굳어서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고 정의가 막역하여 농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얘기도 하지만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아니하였다.”
10여 년을 홀로 지내다 드디어 유희경이 찾아왔다.
그들은 한양으로 올라가 못다 핀 사랑을 다시 태웠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가슴앓이로 생긴 해수병이 심해, 한양에서
더 지내지 못하고 부안으로 내려와 쓸쓸하게 죽는다.
이 소식을 들은 허균은 슬퍼하며 애계랑(哀桂娘)이란 시를 지었다.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妙句土甚擒錦]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淸歌解駐雲]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兪桃來下界]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藥去人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燈暗芙蓉帳]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香殘翡翠裙]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明年小挑發]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誰過薛濤墳]
매창은 부안 봉덕리 공동묘지에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 후 부안 고을 아전들이 시 58편을 모아 <매창집>을 간행하였다.
기생 신분으로 시집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미천한 신분이면서도 사대부와 당당하게 사랑을 주고받은
홍랑과 매창, 그리고 이런 만능 탤런트들과 사랑을 나눈 고죽과
유희경 또한 멋진 사람들이다. 사랑에는 육체적 욕망인 에피트미아와
마음으로 서로를 위하는 에로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무조건적 사랑인 아가페가 있다.
홍랑과 매창의 사랑은 아가페다.
홍랑과 매창은 같은 시대를 산 비슷한 운명의 소유자다.
둘은 기생으로 태어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수동적으로 산 것이
아니라 비록 태어난 운명은 천했더라도, 그 굴레를 벗어 버리고
적극적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갔다. 이 둘에게는 목숨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사랑의 깊이 보다 큰 이별의 상처가 있다. 한 여인은
북방에서 또 한 여인은 남방에서, 좀처럼 이루기 어려운 사대부와의
사랑에 과감히 도전한다. 어렵게 얻은 사랑만큼 이별 또한 극적이다.
그러나 이별의 아픔과 외로움을 달래는 방식은 서로 달랐다.
홍랑의 묏버들 이나 매창의 이화우는 다 같이 버들과 배꽃을 빌려
이별의 아쉬움과 재회의 기약을 담고 있으나, 홍랑이 기다리지 않고
직접 낭군을 찾아 나섰다면 매창은 매일 매일을 거문고로 위안을
삼으며 오지 않는 임을 원망한다.
홍랑은 묏버들에 새닙이 돋을 수 있도록 봄비를 뿌리겠다는 희망을
표출하지만, 매창은 이화우를 뿌리며 추풍낙엽에 꿈만 오락가락
한다고 외로운 신세를 한탄한다. 홍랑이 스스로 남장을 하고
최경창을 찾아 나서는 용기와 배짱을 갖고 있었다면 매창은
뼛속까지 스미는 강렬한 외로움에 몸부림치면서도 정작 그 녀 자신은
상사병으로 몸져누울 정도로 소극적이다.
홍랑과 매창은 시인이다. 시인은 자신의 삶을 비하하지 않는다.
비루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 당당하게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산다.
단지 이별에서 만큼은 사자에 쫓기는 가젤같이 약하기만 하다.
비는 온다마는 임은 어이 못 오는고.
물은 간다마는 나는 어이 못 가는고.
오거나 가거나 하면 이대도록 설우랴
인간이 가고 싶은 대로 가고 오고 싶으면 언제든 올 수 있다면
서러울 까닭이 없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언제나 1% 부족하다.
비가 내리고 물이 흐르는 세상의 이치를 모르고 스스로를 학대 한다.
이것이 인간 삶이다. 시인의 나라에서는 사랑이 영원한 만남이
아니요, 이별이 영원한 단절이 아니다. 사랑과 이별이 인간의
숙명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우리는 홍랑과 매창의 시를 통해 읽을 수 있다.
글쓴이: 박재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