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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30.-11.1일간 남도여행기 1부(강진군 영랑생가,다산의 사의제,갈대축제장,마량항,고금도,신지도,완도및진도 솔비치호텔1박)
(2022.10.30.일자 여행경로 이야기)
(공주시 정안알밤휴게소에서 조식)
10월30일 새벽 05시48분에 아파트 단지를 출발했다. 조수석에는 집사람을 태웠다. 조식으로 준비해간 것은 김밥 2줄이었다. 정안알밤휴게소에 도착하니 시간은 07시46분이었다. 서울에서 공주시 정안휴게소까지 소요된 시간은 1시간58분이고 주행거리는 145km다. 우리는 차속에서 김밥으로 조식을 때우고 화장실에 들렸다가 다시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여기서부터 핸들은 집사람이 잡았다.
(새만금 방조제상의 해넘이 휴게소 )
서해안고속도로의 동군산ic를 빠져나와 새만금방조제 도로로 향했다. 새만금 방조제의 해넘이 휴게소에 도착하니 시간은 10시15분이고 서울에서 여기까지의 주행거리는 265km다.
(새만금방조제상의 새만금해넘이휴게소에서 본 동쪽휴게소 모습 1)
(새만금방조제상의 새만금해넘이휴게소에서 본 서쪽휴게소 모습 2)
(새만금방조상의 해넘이서쪽휴게소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서해바다 모습 )
(새만금방조제상의 해넘이 서쪽휴게소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모습 2)
(새만금방조제상의 해넘이동쪽휴게소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동쪽 담수호 모습)
(부안군 변산반도의 곰소항 풍경)
새만금 방조제 부안군쪽 끝자락에서 변산반도국립공원쪽 도로를 달리다가 곰소항에 도착했다.
새만금 해넘이 휴게소를 출발한 시간이 10시28분이고 곰소항 도착시간을 보니 11시37분이다. 해넘이 휴게소에서 곰소항까지는 약 1시간9분이 걸린 거리고 서울에서 곰소항까지의 금일 누적 주행거리는 322km다.
곰소항 일대는 대부분의 상가들이 젓갈집 가게다. 곰소항 종가집 젓갈 가게앞에는 대형 주차장이다. (곰소항 젓갈집 주소:“부안군 진서면 곰소리 980번지”/전화:063.584.4984/핸드폰:010.9265.3504). 주차장에는 외지에서 들어온 대형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종가집 가게에는 관광객이 쇼핑에 정신이 없는 모습이다.
우리 딸이 곰소항 종갓집 갈치속젖을 1통 사다줬는데 그 맛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이번 여행길에 꼭 한번 들려보고 싶어서 찾았다. 여기서 나는 갈치속젓 2통을 샀다. 1통에 1만원씩해서 2통을 샀다. 이번 여행길에 고향마을 죽마고우에게 선물하려고 1통을 더 샀다. 앞으로는 택배로 사 먹을 생각이다. 집사람도 여기서 젓갈 등 몇가지를 쇼핑했다.
(부안군 진서면 곰소항 종갓집 젓갈가게 모습 1)
(부안군 진서면 곰소항 종갓집 젓갈가게 모습 2)
(고창군 아산면 인천가든식당의 보리새우탕과 점심이야기)
곰소항을 12시01분에 출발해서 고창군 아산면 인천가든식당으로 향했다.(인천가든식당 주소:고창군아사면용계리372-8번지). 인천가든식당은 보리새우탕이 유명한 곳이다. 이 보리새우탕을 점심으로 먹으려고 찾았다.
그런데 와서 보니 오늘은 식재료가 동이나서 요리가 불가능하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영광군 홍능읍의 중원이라는 중국집으로 이동해서 간짜장으로 점심을 때워야 했다. 이렇게 간짜장으로 점심을 먹고 14시25분에 고향 친척들이 살고있는 무안군 청계면 영우식당으로 향했다.
(무안군 청계면 영우식당에서 생낙지와 낙지염포탕으로 석식)
고향 친척들이 사는 무안군 청계면 영우식당에 도착하니 시간은 16시55분이다. 그리고 서울에서 이곳까지의 금일 누적 주행거리는 481km다. 이곳 영우식당에서 친척들과 함께 낙지 염포탕에다 돌솥밥 및 생낙지회로 석식을 잘 먹었다. 그리고 금일 1박할 목포 친척집으로 이동했다. 친척집 아파트에 도착하니 시간은 19시56분이고 서울에서 목포 친척집 아파트까지의 금일 누적주행거리는 493km다.
(2022.10.31.일 전남 강진군 영랑생가 관광경로와 조감도)
남도 여행 둘째날인 10.31일 08시59분에 목포시 석현동 친척집을 출발해서 강진군 강진읍 영랑생가를 향해서 달렸다.(주소:강진군강진읍영랑생가길15/강진군강진읍남성리산1-39번지)
도로 경로는 서해안고속목포ic-죽림ic-남해고속도로-강진무위사ic-영랑생가 순으로 달렸다. 영랑생가에 도착하니 시간은 10.31일 10시09분이었다. 목포시 친척집에서 영랑생가까지 걸린 시간은 1시간10분이 걸린 거리였고 금일 주행거리는(10.31일) 48km였다.
영랑생가는 강진읍내 뒤산 기슭의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반집 모습이다. 문간채 안채 사랑채의 한옥이다. 조선시대 후기의 양반집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그런 시골집이다. 안채 뒤로는 울창한 대나무숲이다. 이 대나무숲 뒤로는 모란공원이 위치해 있다. 이 모란공원을 세계모란공원이라 했다.
(강진군 강진읍의 영랑생가 조감도 모습)
(강진읍 영랑생가의 왼쪽 문간채와 그 문안으로 보이는 안채 ,오른쪽의 사랑채 입구 모습)
(강진읍 영랑생가의 안채 마당에 있는 우물과 장독대 모습)
(강진읍 영랑생가의 사랑채 입구와 그 오른쪽 은행나무 모습)
(영랑생가의 안내표지판 내용)
사랑채 입구 우측 담벼락 밑에는 영랑생가의 안내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그 안내표지판 기록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 영랑생가 ” 안내표지판 내용
“ 이곳은 우리나라의 대표 서정시인이자 항일민족지사였던 영랑 김윤식 선생의 생가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1903년 1월16일 부친 김종호와 모친 김 경우 사이에 2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3월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이듬해 상경하여 기독청년회관에서 영어를 수학한 후 휘문의숙에 진학하였다. 휘문의숙 재학시절이던 1919년 3월1일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자신의 구두 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겨 넣고 강진에 내려와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등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에서 수학한 선생은 용아 박용철 선생 등과 친교를 맺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후에는 시 창작활동에 몰두하였다.
영랑은 1930년 3월 창간한 시문학지를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 등 당대 최고의 작가들과 더불어 우리 현대시의 새 장을 열었다.
1934년 4월 문학지 제3호에 불후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발표하였으며 1935년 영랑시집을 1949년에는 영랑시선을 출간하였다. 선생은 조국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및 삭발령을 거부한 채 흠결없는 대조선인으로 외롭고 의롭게 살았다.
광복후 신생조국 정부에 참여했던 선생은 1950년 한국전쟁 때 부상당하여 9월29일 서울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선생은 생애 87편의 시를 남겼다.
영랑생가는 1948년 선생이 서울로 이사한 후 몇차례 전매되었으나 1985년12월 강진군이 매입하였고 1986년 2월 전라남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 10월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되었다. 정부는 2008년 선생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
(영랑시인과 미당선생의 비교)
영랑 김윤식선생은 1903년생이고 미당 서정주선생은 1915년생이다. 영랑이 12년 선배다. 영랑이나 미당은 다 같이 한국문단의 대 시인이다. 영랑의 대표작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고 미당의 대표작은 “국화옆에서”이다.
영랑은 조국독립을 위해 옥고를 치렀지만 미당 선생은 일본제국주의에 부역을 한 인물이다. 미당기념관에는 내가 친일한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나는 일본이 그렇게 빨리 패망할 줄은 몰랐다.라는 기록을 미당기념관 벽면에 남기고 있다.
그런데 미필적 고의라는 말이 있다. 법률용어다. 나의 행위의 결과가 범죄가 된다는 것을 미리서 알고 그 범죄 행위를 했을 때는 미필적 고의의 죄로 처벌을 받는다.
미당은 자신의 친일행위가 선량한 당대 국민들에게는 피해가 되고 죽을 수도 있는 일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일본천황에게 헌신을 독려하는 글을 썼다.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가. 나의 이익을 얻고자 다른 자국국민에게 일본을 위해 징집되고 전쟁물자를 지원하라고 독려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일명 친일파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반면에 영랑선생은 조국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및 삭발령을 거부한 채 흠결없는 대조선인으로 외롭고 의롭게 살았다. 이렇게 일본식민정책에 반대한 사람은 얼마나 외롭게 살아야 했는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강진읍 영랑생가의 안내표지판 모습 )
(영랑시인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표지석 )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래요
(나는 아직 조국의 독립을 기다리고 있을래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조국의 독립이 무참히 사라져버린 날)
비로소 봄을 여흰 서름에 잠길테요.
(비로소 조국의 독립을 잃어버린 서름에 잠길래요)
5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5월 어느날 특히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님마져 시드러버리고는
(사라져 없어져버린 조국의 독립은 재생의 기운이 없고)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천지에 조국독립은 자취도 없어지고 )
뻗혀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힘차게 끌어오르던 나의 조국독립의욕은 서운게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조국독립의지가 사라지고 말면 그것으로 끝나고)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나의 한 해는 다 지나가버리고 마니)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삼백예순날 많이 섭섭해서 우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조국의 독립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나는 아직 조국의 독립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유구한 조국의 독립을 잃어버려 슬픈 조국의 독립을)
(강진읍 영랑생가 앞에 세워진 대표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란 시비의 모습)
(영랑생가 뒤의 모란공원 모습)
영랑생가 뒤로는 모란공원 산책로가 있다. 이 산책로는 영랑생가집 뒤의 담벼락을 따라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이 산책로의 산비탈쪽으로는 억새풀 공원이 조성된 모습이다.
이 공원 정상부에는 전망대가 있고 이 전망대 앞에는 영랑 조각상과 잎이 다 떨어진 모란꽃 줄기대가 흙속에 묻혀있다. 모란이란 꽃을 나는 거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생소하게 느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란꽃이 곧 목단꽃이라는 것을 알고는 금방 친숙해졌다. 우리가 화투놀이할 때 화투속의 목단꽃은 무척 화려한 꽃이다. 장미꽃처럼 화려한 붉은꽃이다. 이 목단꽃이 바로 모란꽃이라니 금방 친숙한 꽃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실물의 목단꽃은(모란꽃은) 아직 구경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모란공원 전망대에 서서 남쪽으로 바라보는 강진만 바닷물과 강진읍내의 시가지 모습들이 무척 아름답다.
(강진읍 영랑생가의 집 뒤편으로 있는 모란공원전망대까지의 산책로 모습 )
(강진읍 모란공원 전망대앞의 영랑조각상과 흙속에 뿌리내린 모란꽃 줄기대 모습.오른쪽 대나무에 묶여있는 줄기가 모란꽃 줄기대임.)
(강진읍 모란공원 전망대에서 바라본 강진만 바닷물과 강진읍내 시가지 모습들)
(강진읍 모란공원조감도에서 15번이 모란공원전망대임.전망대 바로 앞에 영랑 조각상이 있음.;조각상 뒤켠으로 모란꽃 줄기대)
(모란공원에 소개된 모란꽃 안내표지판내용)
“안내표지판내용”
“이 모란은 폭과 키가 약2미터에 이르는 나무로 수령은 50년쯤 되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모란으로 추정된다.
대구광역시의 경주김씨 고택에서 이곳 세계 모란공원으로 옮겨왔다. 한국의 모든 모란을 대표한다는 의미로 모란왕이라고 불리고 있다. (모란공원은 세계모란공원이라고도 한다.)
모란은 설총의 화왕계에서 모(란)는 꽃들을 대표하는 왕으로 등장한다. (모는 모란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됨)
모란은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으로 목단이라고도 한다. 모란꽃은 4월말에서 5월초에 피며 약 1주일정도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할 수 있다.”
(모란공원의 모란꽃 줄기대 앞에 세워진 안내표지판모습. 페인트가 낡아서 표지판글을 해독하기가 어려움.) (내나무에 묶여있는 것이 모란꽃 줄기대임.)
(영랑 시문학 기념관 모습)
이렇게 영랑생가와 모란공원을 둘러보고 영랑생가 입구쪽으로 내려오면 바로 20여미터 앞의 왼쪽에 영랑시문학 기념관이 있다. 시문학기념관은 구조가 2층이다. 1층은 관리사무소와 강의실 등이다. 2층에는 시문학 활동의 각종 자료와 발간물이 전시된 진열관이다.
(강진읍 영랑생가 부근에 있는 영랑 시문학 기념관 모습.)
시문학기념관 입구에는 시문학파 3인상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3인상 동상옆에는 1930년3월 시문학 창간을 주도했던 영랑 김윤식(왼쪽), 정지용(가운데), 용아 박용철(오른쪽) 시인상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들이 발행한 시문학은 당대를 풍미했던 프로문학과 낭만주의 문예사조에 휩쓸리지 않고 이 땅에 순수문학을 뿌리 내리게 한 모태가 됐다고 한다.
(영랑시문학 기념관 입구에 설치된 시문학3인 조각상.왼쪽은 김영랑.가운데 정지용.오른쪽 박용철님)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강진 귀양살이 18년간 체류지 행로와 업적에 대한 안내표지판 내용)
정약용선생은 (1)강진읍 “사의제”라는 초가집에서 귀양살이 초기 5년동안 기거했다. (2)두 번째 장소로 옮겨 1년간 기거한 곳은 “보은산방”이다. 보은산방은 강진읍 뒷산인 보은산의 고성사라는 사찰내의 기거장소가 보은산방이다. (3)세 번째 장소로 옮겨 약 2년간 기거한 곳은 강진읍내의 이학래라는 “다산 제자의 자택”이다. 그리고 (4)네 번째 장소로 옮겨 10년간 기거한 곳은 “다산초당”이다. 다산초당에서는 그 유명한 목민심서 등 600여권의 저술작업을 완결한 곳이다.
이렇게 다산은 강진군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현재 다산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고향땅에 고히 잠들어 있다. 이 능내리에는 다산의 무덤과 생가 및 기념관이 들어선 유명 관광지다. 그리고 청평호반의 양지바른 장소다. 다산이 젊었을 때는 청평댐이 없는 한강 상류의 산기슭이었지만 지금은 청평호반이 바다처럼 보이는 유명한 관광명소다.
한국사에서 실학은 학자들의 저술속에서 담론으로만 존재하고 이런 담론들은 위정척사론자들의 반대를 뛰어넘지 못해서 정책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그래서 부득이 강제적인 개혁개방,조선패망,일본식민지,남북분단,한국전쟁이란 역사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안내 표지판 기록 내용”
“ 사의제 ” (사의제라는 명칭이 붙은 초가집 한 채.)
“ 사의제는 다산 정약용이 1801년11월23일 낯선 땅 강진에 와서 처음 묵은 곳이다. 사의제는 이곳 주막집 주인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은 다산이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교육과 학문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하면서 붙인 이름으로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산은 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 이 네 가지를 바로 하도록 자신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언어)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할 것을 스스로 주문하였다.
사의제는 창조와 희망의 공간이다. 사려 깊은 주막 할머니의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얘기에 자신을 새로 추스른 다산이 1802년 10월부터 최초 제자 황상을 시작으로 강진읍 6제자에게 스스로 편찬한 아학편을 주교재로 교육을 베풀었으니 당대 최고 권위의 학당이 이곳에 창설된 셈이다.
한양 조정 권신사회의 잔혹함과 견딜 수 없는 기구함과 절망감으로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까지 했던 다산이 마침내 내가 강진에 귀양오기를 참 잘했다. 강진이 내 고향땅 아니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으리.라고 스스로 토로할 만큼 따뜻했던 강진지역의 인심에 마음과 몸을 열어 지역현실에 참여하면서 조선의 사회경제적 모순과 병리를 보다 생생이 목격하고 체험해 가던 시기였다. 경세유표와 애절양 등은 비좁은 이곳 사의재에서 광활한 희망의 세계를 꿈꾸며 집필되었다.
다산은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 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
“ 보은산방 ”
다산은 1805년 겨울부터 1년 가까이 강진읍 보은산 고성사내 보은산방에 머문다. 이곳에서의 다산은 강진읍 6제자를 교육하는 한편 총 52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으며 주역사전과 장례사전 등의 저작에 몰두하였다. 강진 차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는 무렵이었다.
큰 아들 학연이 강진에 내려와 때로는 스님들과 더불어 때로는 강진읍 6제자들과 함께 주역과 예기를 논하면서 밤이 새는 줄 몰랐던 시기이기도 하다.
보은산방은 선생이 정상에 올라 멀리 흑산도에 유배중인 약전 형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던 그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이학래의 집”(강진 6제자 중 한 사람)
“ 다산은 1806년 가을 강진읍 이학래의 자택으로 옮겨 교육과 연구에 더욱 정진하게 된다. 다산은 이학래 자택에서 2년 가까이 머문다. 여기에서의 다산은 강진지역 현실에 천착하면서 지역이 대변하는 조선적 모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실학연구 토대를 더욱 굳건히 하였다.
이학래는 다산의 강진읍 6제자 중 막내였다. 이학래는 다산의 방대한 문집 간행에 중심적으로 참여하였다. 예컨대 지리지인 대동수경주는 이학래가 엮고 다산이 감수한 것이다. 지리학에 관한 학문적 조예에 있어서는 첫째 다산, 둘째 이학래, 셋째 윤정기일 정도이다. 이학래는 이른바 다산학단의 일원이었다.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600여권에 이르는 엄청난 연구 저술과 실학집대성은 다산이라는 불세출 대학자의 집필과 지휘 그리고 강진의 24제자들의 (강진읍 6제자와 초당 16제자) 거룩한 공동연구지원이 이루어낸 금자탑이다. ”
“ 다산 초당 ”
“ 1808년 봄 다산은 이학래의 집에서 도암 귤동마을 초당으로 거쳐를 옮겨 유배해제될 때까지 (1818) 10여년을 머물게 된다. 다산초당은 원래 윤단의 산정으로 후손들을 가르치기 위해 1천여권의 장서까지 갖추어 놓은 가문의 도서관 같은 곳이었다.
다산은 여기에서 윤단의 손자 6명을 포함한 초당 18제자를 교육한다. 흑산도에 귀양중이던 형 정약전 선생의 사망소식을(1816) 듣게 되는 곳도 다산초당이었다.
1801년 유배길 나주 율정점에서 눈물로 헤어졌던 이들 형제는 끝내 한번 상봉하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하는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초당에서의 다산은 대한민국 학보 제1호인 불후불멸의 대저 목민심서를 비롯한 600여권의 저술을 완결짓는다. 당대의 조정으로부터 철저히 단죄받았던 대역죄인이 민족의 큰 스승으로 영원토록 부활하는 대서사시의 종장이 바로 다산초당이다. ”
(정약용선생 강진유배 18년간 체류지 경로와 업적 안내표지판 모습.)
(정약용선생이 귀양초에 강진에서 5년간 묶었던 사의제라는 초가집 모습. )
(정약용선생이 귀양초에 묶었던 사의제라는 초가집 앞 마당에 설치된 주모 조각상. 남도길의 주모상을 상징한 조각임.)
이렇게 강진읍내에서 영랑생가,모란공원,영랑시문학기념관, 다산의 사의제 초가집까지는 안내표지판을 따라 도보로 구경을 마쳤다. 그리고 주차된 차량으로 돌아와 다음 행선지인 강진만 생태공원의 갈대축제장으로 향했다.
-------1부 끝.(2부에서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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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간 비용 지출액.)
1.왕복 주행거리 : 1223km
2.평균연비 23.7km/리터당.(계기판에 표시된 내용이지만
정확성은 검증하지 못함)
3.휘발유값=1223km/23.7km*1615원=83,339원
4.고속도로 통행료=26,100원(장애인 할인적용)
5.점심 김밥값 : 1줄2인분*2000원=4,000원
6.고향집선물포도:2박스*17,800원=35,600원
7.곰소항빨간북새우:1통*25,000원=25,000원
8.중국집간짜장점심:2인*8,000원=16,000원
9.곰소항갈치속젓:2통*10,000원=20,000원
10.솔비치호텔부페식사:2인*65,000원=130,000원
11.집사람이 구매한 내용:60,000원
가.곰소항지포리멸치:17,000원
나.곰소항멸치액젓:25,000원
다.휴게소커피등:6,800원
라.김치및햇반:11,200원
집사람지출 소계 : 60,000원
지출비용총계(12건) : 400,039원.
(진도 솔 비치호텔숙박료는 서울시공무원인 딸이 자기명의로 예약함.)
(비용은 공무원할인금액지출액=공무원복지카드개인부담액+서울시지원금액인데 정확한 액수는 딸이 입을 열지 않아서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