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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함양오씨 대종중 원문보기 글쓴이: 오대댁(병연)
학봉 김성일의 묘사(墓祀)를 위한 서지재사(西枝齎舍)는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에 있다.
사진: 구글 지도.
재사(齋舍)로 가는 길은 학봉의 산소부터 나온다.
산소는 야트막한 데 있는데 들어가는 길목에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신도(神道)는 신령의 길이니, 신도비는 산소 들어가는 입구,
산소에서 보면 왼쪽, 들어가는 사람이 볼 때 오른 쪽에 세운다.
조선 문종(文宗) 때 임금의 행적이야 세상이 다 아니 필요 없다 하여
왕릉에는 쓰지 않고 공신(功臣)이나 석학(碩學)만 그것도 왕명을 받아 세우게 했다.
그러나 문종 이후 왕들의 왕릉에도 신도비라고 부르지 않을 뿐 비석이 있고,
민간도 썩 잘 지킨 것 같지는 않다.
신도비는 보통 비각(碑閣)으로 보호하니 학봉(鶴峯)의 신도비도 마찬가지로,
비각 창살 틈으로 카메라 넣어 봐야 제대로 된 사진 얻기 힘들다.
비는 거북이 받침(龜趺) 위에 있는데, 비문은 퇴계 학파에서 학봉 다음 세대인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가 지었다. 정경세는 학봉의 친구인 서애의 제자다.
신도비 지나 잠깐 올라가면 학봉(鶴峯)과 그 부인의 묘가 나란히 있고
그 가운데 비석이 있는데, 비문 첫머리에 부인 권씨 부(示+付)가 나온다.
‘부’ 뒤에 별말 없어도 ‘부좌(左)’다.
옛날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좌, 우가 바뀐다고 생각하여
살아서는 부인 위치가 남자 오른 쪽이지만, 죽어서는 왼 쪽에 모셨다.
사진: 학봉 김성일의 산소 전경. 왼쪽이 학봉, 오른 쪽이 부인 권씨다.
이런 거 이야기 할 때는 묘주(墓主)-산소에 누운 분 중심이니,
마주 보면 좌(左) 가 오른 쪽이 되어 부인(夫人)인 것이다.
묘방석(墓傍石)
산소 앞 중앙에 상석이 있고 양 옆으로 망주석이 있는데
망주석과 상석 사이에 큰 북 같은 돌이 있는데 그 위로 글씨가 적혀 있고,
또 왼편 위에서 중간 아래까지 돌을 뜨려고 정을 친 흔적이 있다.
사진: 묘방석(墓傍石),
묘방석(墓傍石)이라는 말은 여기서 처음 들었는데,
광중(壙中)을 파다 나온 돌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선생을 장사 지낼 때 이상한 돌이 광중(壙中)에서 나왔는데
모양은 큰 북 같고 돌 결이 부드러워 조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굴려서
묘 왼편에 두어 선생의 행적 대강을 새겼는데 정(鄭) 한강(寒岡)이 지은 것이다.
돌이 이곳에 묻힌 것이 아득한 옛날일 텐데 선생을 모실 때 비로소 나와
그 사실을 기록하는 데 쓰였으니 조물주의 의도가 필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 기이한 일이로다.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이준(李埈)이 삼가 적다…
교리 이준이란 호가 창석(蒼石)인데 서애 유성룡의 제자로 신도비 지은
정경세와 친구다. 학봉의 신도비나 묘방석의 글, 모두 서애의 제자가
짓거나 썼으니 이때까지는 서애와 학봉의 문인들이 가까웠던 것이다.
풍수 쪽 사이트를 뒤지니 묘방석에 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학봉이 죽자 임금이 국풍을 시켜 묘소를 잡게 안동으로 내려 보냈는데,
의성 김 씨들이 원체 양반 행세를 하면서 풍수 대접을 소홀히 ..운운…
광중을 파다 둥근 돌이 나왔는데 그대로 두고 하관 하는 게 맞는데
파 내게 하였다… 정을 찍은 형태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운운..
비 맞은 중놈처럼 군정거려 무슨 말인지 요령부득이나, 학봉 죽은 해가
1593년 임진왜란 한참일 때, 국풍 내려 보낼 겨를이 있을 것 같지 않으나
‘의성 김씨가 양반 행세 하며 풍수 대접 소홀히’는 그럴 수 있겠다.
정통 유학자 눈에는 술사(術師)들이 요망하게 보였을 테니.
‘큰 돌이 나왔는데 그대로 두고 하관하는 게 맞다’는 무슨 말인지 모르나
저렇게 큰 돌 나왔는데 그걸 그냥 어떻게 놔 두나?
쪼개 없애려 한 듯 돌을 뜨기 위하여 정을 찍은 형태는 분명하다.
사진: 망주석의 세호
조선 초기 세호는 두리뭉실하고, 저렇게 뚜렷한 조각은 조선 후기 가야
나오던데 그러고 보면 석물은 학봉 당년이 아니라 훨씬 후대에 세웠을 수도.
산소 뒤로 돌아가 용맥이 들어 오는 곳에서 조망을 본다.
사진: 산소 뒤에서 조망
산소 앞 좁은 들에 철길이 지나가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1930년대 중앙선 설계 할 때 학봉 묘소의 내룡(來龍)이 끊어지게 되어
있었다. 이를 안 학봉의 제자, 후손에 영남 유림 수백 명이 들고 일어나
조선 총독부에 진정서를 내니 일본인들도 학봉이 영남에서 존경 받는
큰선비임을 알고 기꺼이 철도 노선을 우회하도록 설계 변경을 했다.
이 때문에 원래 계획에 없던 터널 5개를 새로 뚫어야 했다.
청량리에서 안동까지 기차 타면 유난히 터널을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학봉의 명성 때문이다. 일제의 강압 시절 터널 5개 뚫으면서
중앙선의 철로를 바꾸었던 것은 학봉이 영남 유림들에게 어떤 인물로
인식되었는가를 단적으로 잘 보여 주는 일화라 할 수 있다…. 운운
기본은 사실에 바탕을 두었겠으나, 신화화(神話化)된 부분도 꽤 있는 듯,
일본 애들이 터널 5개 뚫는 비용을 기꺼이 감수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약간 우회하는 정도였겠지. 중앙선에 터널이 아주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내 옛날 세어 보니 50개가 넘은 것 같다-대부분 청량리-영주 사이에 있다.
그러니 학봉 산소 때문에 유난히 많아 진 것은 아닐 것이다.
사진: daum 지도-학봉 산소와 서지재사
이제 산소를 떠나 재사(齋舍)로 가는데, 모퉁이 돌면 바로다.
서지재사(西枝齎舍)
서지(西枝)에 별 의미는 없고 마을 이름-‘서지리’에서 딴 듯 하다.
차마 들이라 할 수는 없고 간신히 몇 떼기 펼쳐 진 밭이 끝나고
산이 시작되기 직전, 아직은 평평한 곳에 재사(齋舍)가 있다.
사진: 서지재사 전경
앞선 글들에서 능동재사가 서원, 금계가 절, 수동이 살림 집 형태를
원용했다고 한 바, 이곳 서지재사도 살림집 형태다.
사진: 서지재사 3D 이미지. 이런 걸 3D 로 띄워 놓은 데가 다 있다.
클릭 클릭하면 사이버로 체험도 할 수 있는데 그걸 어떻게 퍼 오는 지는
모르겠고 그냥 이미지만 펐다.
하여튼 측면을 보면 층이 졌다. 원래 땅은 평평한데 일부러 그렇게 했다.
경북 북부는 산이 많다-정도가 아니라 맨 산이다.
산비탈에 집을 짓다 보면 들어가면서 자꾸 올라 가기 마련이다.
대문에서 내정이 한단 높고, 거기서 한단 높이 안채가 나오고 이런 식이다.
그런 데서 살다 보니 평지에도 집을 그렇게 지어야 마음이 놓이는 것일까?
하여간 일부러 층을 져 올렸다.
사진: 내정에서 축대를 두 단이나 쌓은 곳에 안채 대청이다.
인터넷에 사진 보다 좋은 스케치가 있어 퍼 왔다.
스케치: 대청에서 바라 본 누마루와 내정.
사진으로는 저렇게 앵글 잡기 쉽지 않고 또 사람이 거치적거린다.
사진: 재사 측면.
구불구불한 나무로 면 분할된 파스텔 톤 흙벽이 묘한 정조를 자아 낸다.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학봉 인물론 길게 할 수는 없고, 그냥 몇 자 써 본다.
안동하면 통상 안동 김씨를 떠올리나, 관향이 안동일 뿐 조선 말기 세도
부리던 김씨의 본거지는 서울 장동(壯洞)으로 지금 효자동, 청운동 일대다.
안동에도 안동 김씨 있으나 숫자도 작고, 남인(南人) 일색인 곳에서
노론(老論)이라고 설음 당한 면조차 있다.
이 지역에선 의성 김씨가 제일 번성했다고 해도 별 무리 없을 것이다.
의성 김씨는 본관 그대로 의성 살다가 안동으로 이주했는데,
이 지역 유력 집안들이 대개 그렇듯 고려 때는 호장(戶長)을 지냈다.
학봉은 그 의성 김씨 집안으로 퇴계 밑에서 배운 바, 퇴계 문인 중 좌장
(座長) 격이었다. 그런데 학봉 김성일의 이름을 일반인들이 기억하는 것은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와 조정에 보고한 사건(?)이다.
정사(正使) 황윤길은 일본 풍신수길이 곧 침략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부사(副使) 학봉 김성일은 그럴 위인이 못 된다고 하였다.
서인 황윤길 주장을 동인 학봉이 당파심에서 무조건 반대로 말하여
일을 크게 그르치고 말았다는 것이 이제까지 통용되는 주류 역사 해석이다.
이 내용이 중, 고등 학교 역사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학봉은 욕을 먹고 있다.
그런데 요즘 새로운 해석이 나오는 바, 학봉이 그랬던 것은
황윤길이 너무 쉽게 말하여, 나라 전체가 자칫 패닉 상태에 빠질까?
우려했기 때문이지, 당파심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친구인
서애가 ‘자네 그러다 정말 전쟁 나면 어쩌려 그러나?’ 하며 걱정하자,
‘내가 언제 왜(倭)가 영원히 오지 않는다 했나? 다만 조야(朝野)가 너무
놀랄까? 걱정해서 그랬지’ 했다는 것이다.
외관상 구차한 변명 같이 들리고, 학봉 문중이 조상의 신원(伸寃) 운동에
발 벗고 나선 결과 아닌가? 하는 심증(心症)도 있지만, 학봉의 글이나 행장을
보면 인품이 대단히 중후(重厚)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두고 그렇게 편협하게
당파심에 눈이 어두울 인물로 보이지 않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일본 통신사 갔을 때, 정사 황윤길은 갈피를 못 잡는데 중심 잡은 인물은
부사 학봉이었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학봉 김성일을 무척 어려워했다.
오늘날 개념으로는 정사, 부사 위계가 확실하지만 조선 시대 사신단 보면
정사, 부사, 서장관을 삼사(三使)라고 하여 크게 차이 없이 거의 합의체로
운영된 듯 하다.
또 임란(壬亂)이 터지자 경상도의 수령들이 다 도망가 버려 국가의 장악력이
무너지자, 선조(宣祖)가 학봉을 처벌 대신 경상도 초유사(招諭使)로 보낸 것도,
경상도 수습을 위해서는 학봉의 인망(人望)에 기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는 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여간 다시 생각해 볼 만한 점은 있다.
병호시비(屛虎是非)
영남 안에서만 벌어진 갈등이라 타 지역에 그다지 알려 지지 않았지만,
병호시비(屛虎是非)라는 것이 있다.
병(屛)은 병산서원(屛山書院)이니 서애(西厓) 유성룡의 후손과 문인을 뜻하고,
호(虎)는 호계서원(虎溪書院)으로 처음에는 퇴계 학파 전체를 위한 서원이나
우여곡절 끝에 서애 계통이 방(?)을 빼니, 학봉 계통을 말하게 되었다.
따라서 병호시비(屛虎是非)란 같은 퇴계 학파 안에서, 학봉과 서애 문인 간에
벌어진 길항(拮抗), 대립을 말하는데, 학봉과 서애에서 한 글자씩 따서
학애시비(鶴崖是非), 애학시비(崖鶴是非)라고도 부른다.
퇴계 문파의 양대 계열
퇴계 제자야 많지만, 세월이 흐르며 서애와 학봉의 후인(後人)들로 양대 산맥을 이룬다.
서애, 학봉, 둘 다 퇴계의 고제(高弟)로서 절친한 사이고,
위에서 말한 대로 서애 제자 정경세가 학봉의 신도비를 짓고
이준이 묘방석 글씨를 쓰는 등 처음에는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1620년 광해군 12년, 여강서원(廬江書院), 나중 이름 바꿔 호계서원(虎溪書院) 사당에
주벽(主壁)은 퇴계지만, 학봉과 서애 중 누가 퇴계의 왼쪽에 오느냐? 로 다툼이 생겼다.
사당에서 주벽-가운데 자리 다음 상석은 왼쪽이니 곧 학봉과 서애 중 누가 앞서느냐다.
여기서 왼쪽이란 조상 기준이니 마주 보면 뒤바뀐다.
위 학봉 산소 대목에서 말 했던 ‘부좌’와 같은 이치다.
여강서원-호계서원 원래 자리는 안동댐으로 수몰되었으나.
얼마 전 임하댐 앞에 복원해 놓았다.
좌(左)와 우(右)
성경 같은 데는 ‘하느님 우편’이란 구절에서 보듯 오른 쪽이 상석이다.
그런데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차서(次序)는 왼쪽이 위였다.
왜 이렇게 된 지? 는 정설이 없는 듯, 조선일보에 풍수 관련하여
글 자주 올리는 조용헌 씨 같은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좌(左) 자에는 '공(工)'이 들어간다. 우(右)에는 '구(口)'가 들어간다.
공(工)은 공부(工夫), 왼쪽 내지 왼손은 공부하는 기능이다.
구(口)는 입 구(口)다. 우뇌(右腦)와 좌뇌(左腦) 이론으로 보면
왼손은 우뇌와 연결된다. 오른손은 좌뇌와 연결된다…. 운운
기발한 이론이지만, 웃자고 하는 이야기 이상의 의미는 없다.
내 생각엔 좌, 우를 방위로 쓸 때는 좌가 동(東), 우(右)가 서(西)니
해 뜨는 동쪽-좌측을 해 지는 서쪽-우측보다 상위에 둔 것 아닐까 한다.
아님 말고.
누가 퇴계 좌측에 오느냐?는 학봉과 서애 간에 누가 앞이냐? 인 바,
이 부분 장난일 수 있지만, 학봉과 서애의 뒤를 이은 세력 중 누가 상위냐?
에 이르면, 결코 장난이 아니어, 어느 쪽도 양보하기를 꺼려 했다.
1620년 당시에는 우복 정경세가 퇴계 학파의 장로(長老) 격으로
서애(西厓)를 좌측에 모시는 것으로 재정(裁定)했고, 학봉 쪽에서는
비록 불만이 있지만 받아 들였다.
문묘 배향(文廟配享)
그러다가 근 200년 뒤 문묘배향(文廟配享) 때 해묵은 앙금이 불거져 나온다.
문묘(文廟)란 성균관과 향교이고, 배향(配享)은 제사를 받드는 것이지만,
제사 지낼 때 숟가락 하나 더 놓는다 보다는 휠씬 깊은 의미가 있다.
공산주의에 수많은 유파가 있지만 마르크스-레닌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그들의 ‘이른바 정통’인 것처럼, 문묘배향은 주자학 학통을 밝히는 것이고,
주자학은 조선 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였으니,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문묘배향은 국가 이념인 유학의 계통을 정하는 것이었다.
초기엔 공자, 맹자, 유가 십철(儒家十哲)에 주자(朱子) 같은 송나라 학자(宋儒)
등 중국 성현들만 문묘에 모셨다. 그러다 주자학에 자신감을 가지면서
조선의 성현도 모시는데 광해군 때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오현(五賢)을 배향한 것은 획기적 일이었다.
광해군 후로도 배향이 꾸준히 늘어나는데 모두 서인-노론과 인연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러다가 1805년 순조 5년, 영남 유림이 연명으로
상소 올리기를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 여헌 장현광, 한강 정구의 넷을
문묘에 배향해 달라는 내용인데, 4현(賢) 모두 퇴계의 제자이었다.
그 동안 서인 계통은 ‘끕’이 좀 떨어져도 넣고, 남인은 없었으니,
조정에서도 들어 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사단이 생겨 버렸다.
학봉, 서애, 여헌, 한강 중 누구 이름을 먼저 적느냐가 문제였다.
그냥 네 분으로 하자거니 하다가, 학봉의 이름을 먼저 써 올리니,
이에 발끈한 서애 계열이 그 순서가 잘못 되었다는 상소를 따로 올린다.
당시 조정이란 결국 노론인데 남인 계통 배향이 반가울 턱이 없으나,
안 들어 주기도 그렇던 차에 말이 갈리고 있다는 핑계로 기각해 버린다.
게도 구럭도 다 놓친 학봉과 서애 계열은 대판 싸움을 벌리는데,
날이 갈수록 치열해 지고, 또 모양새는 더러워 진다.
경상감사에게 솟장을 내기도 하는데, 당시 감사는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으로 노론의 핵심이다. 노론이니 남인들 싸움이 속으로 즐겁지만,
겉으로는 너희들 왜 싸우니? 사이 좋게 지내라! 는 말로 끝내 버린다.
노론이야 남인이 서로 싸우다 지치면 해롭잖으니, 기회 있으면 두들긴다.
남인 쪽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노론이 (치사하게) 남인의 서얼(庶孼)을 앞세워
공격하기도 했다 한다. 그랬다는 말만 전할 뿐, 뭘 어떤 식으로 했는지? 는
설명이 없어 모르지만 그랬을 개연성은 있다. 공격할 땐 상대방 약점을
쑤시는 게 좋고, 남인의 서자는 남인의 취약점일 테니 왜 이용하지 않았겠는가?
그렇다고 자기네 노론의 서자를 좋게 대접 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병호시비(屛虎是非) 와중에 영남 선비는 어느 한 편에 서야지 중립도 불가능 했다.
어느 사람이 ‘난 비병비호(非屛非虎)-병파도 아니고 호파도 아니요’ 했더니,
그럼 ‘당신은 비반비상(非班非常)-양반도 아니고 상놈도 아니냐?’ 하는 통에
할 수 없이 병파(屛派)에 섰다는 말도 전한다.
그렇게 6-70년 지내다 대원군이 집권하고 노론 견제에 남인을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궁리를 한바, 우선 남인을 결집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 병호시비를 가라 앉힐 대리인으로 낙파(洛坡)유후조(柳厚祚)를 내세운다.
낙동대감으로 불리는 낙파는 풍산 유씨 중 일찍이 상주로 옮겨 간
지파(支派) 출신이다. 유우익씨가 낙파 후손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인터넷을 뒤지니 과연 하회마을로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사진이 나온다.
풍산 유씨 낙파에 대해 학봉 계열에서 중립을 의심하는 게 당연하고,
지파(支派)로서 풍산 유씨 안에서 그리 말발도 있는 편이 아니어,
결과적으로 낙파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그 뒤 나라가 망하니 병호시비(屛虎是非) 류는 문제 축에 낄 수가 없었다.
뒤끝
그러다 얼마 전 호계서원을 임하댐 앞에 복원하며 퇴계와 학봉과 서애를
배향하기로 하니 차서 문제가 다시 나왔다. 이번엔 학봉의 종손이 양보하여
서애를 상석-좌측에 모시기로 하였다.
여러 신문에 400년 묵은 시비(是非)가 해결되었다, 참 미담(美談)이다,
하고 썼으니 웬만하면 읽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줄만 알았는데,
뒤끝이 있는 모양이다.
….두 가문의 종손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겠다…
…수백 년간 갑론을박하며 나름대로 자존심을 지켜 온 양측 유학자들에게는
모욕이 될 수 있다…
…….서원에서 위패의 소목(昭穆)은 학덕, 연령, 국가에 대한 공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지 단순히 벼슬 높낮이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운운
400년 동안 해결 되지 않던 것이 ‘종합적으로 고려’ 한다고 수가 날까?
그 싸움에 무슨 내용이 있었다고 ‘자존심 지킨 유학자’에게 모욕이 되나?
안동 국학 진흥원은 왜 이 문제에 입장을 밝히지 않느냐? 고 종주먹 대는
사람도 있는 듯 한데, 국학 진흥원이야 입 다물지, 미쳤다고 끼어 드나?
지금도 난 비병비호(非屛非虎)요! 하면 당신 비반비상(非班非常)이냐? 할 텐가?
1620년 당시 정경세가 재정(裁定)을 맡았을 때 자기가 서애 제자니까,
상대 손을 들어 준다던가, 그 후 1800년쯤 가면 학봉 세력이 월등했으니
서애에게 양보해도 학봉 쪽이 아래라고 할 사람이 없었을 텐데
그걸 하지 않아 노론에게 우세를 당하는 빌미를 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지나 놓고 보니 재미 있었으니 다시 400년 더 하자는 이야기인지?
뒤끝에 동조하는 사람 그리 많지 않을 테지만 답답한 기분이 든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