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기억은 영화와 같은 시각 매체에 크게 영향받는다. 영화의 스펙터클을 즐기는 사이, 영화 속에 숨겨진 정치관이나 세계관이 관객들에게 스며들게 된다. 사람들은 그런 지식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가, 세상사를 판단하는 데 잣대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런 무의식적인 과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영화 속 주장이 관객에게 이식되는 과정은, 영화 관람과 함께 자동적으로 발생하게 마련이다.
영화 관람으로 굳어진 우리의 기억은 여러 가지가 있겠는데, 이번 장에서는 그 중 한 가지를 주목하려 한다. 유태인과 아랍인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그것이다. 우리는 유태인을 가련한 민족으로 생각하며, 반면에 아랍인에게는 웬지 모를 적대감을 느낀다. 그런 감상들이 미국영화의 묘사 방식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에, 역사 교과서보다는 영화가 유태인과 아랍인에 대한 이상을 결정했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아랍인과 유태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
먼저, 아랍인들은 무지하고 과격한가? 많은 영화들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레이더스>(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1981년)의 주인공 인디애나 존스(해리슨 포드)는 카이로의 시장 바닥에서 아랍인과 대결을 벌인다. 능숙한 솜씨로 칼을 휘두르는 그 아랍인의 모습에 관객들은 잠시 긴장하지만, 인디애나 존스는 전혀 주눅들지 않고 심드렁할 뿐이다. 칼솜씨 자랑이 클라이맥스에 이를 즈음에 인디애나는 총탄 한 발을 날리고 아랍인 검객은 피식 쓰러진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데이비드 린 감독, 1962년)에서 아랍인들은 더욱 답답한 모습이다. 자신들의 독립을 위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아랍인들은 미숙하기 짝이 없다. 아마도 로렌스의 헌신이 없었다면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치르지 못했을 종족으로 보인다.
아랍인들에 대한 모든 편견을 가장 노골적으로 그리고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영화는 <트루 라이즈>(제임스 카메론 감독, 1994년)이다. 이 영화에서 아랍인들은 어리석고 우스꽝스럽고 잔인무도하고 비열한 테러분자들이다.
크림슨 지하드를 이끄는 아지즈라는 인물이 다음과 같이 비장한 연설을 하는 장면이 있다. “부녀자들을 살해하고 우리들의 고향을 파괴한 미국이 어떻게 우리를 테러 분자라 부를 수 있는가. 미군이 페르시아만에서 즉각 완전 철수하지 않으면 핵탄두로 미국의 대도시를 파괴하고 말겠다.”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거대 강국 미국에 선전 포고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비장한 연설 장면을 열심히 촬영하던 부하의 캠코더는 건전지가 이미 다 방전되어 깡통에 불과할 뿐이다.
이렇듯 할리우드 영화에서 아랍인들은 난폭하고 바보스러운 불한당이거나 이해 못 할 종교에 젖어 있는 군상들로 묘사된다.
그러면 유태인들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영화는 그들에게 대단히 우호적이어서, 유태인들은 주로 가련한 피해 당사자로 그려진다.
유태인 영화의 전형은 주로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이전의 시대가 배경인 영화에서도 고통받는 유태인을 발견할 수 있다. 고대 로마 시대의 예루살렘에서 유태인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보여 주는 영화 <벤허>(윌리엄 와일드 감독, 1959년), 20세기 초반 러시아에 살던 유태인의 고난을 그린 <지붕 위의 바이올린>(노먼 주이슨 감독, 1971년) 등이 그것들이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배경으로 유태인의 수난을 가장 끔찍하게 묘사한 영화로 <소피의 선택>(앨런 J. 파큘라 감독, 1982년)과 <쉰들러 리스트>(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1992년)을 들 수 있다. 특히 실화를 영화화한 <쉰들러 리스트>는 가스실에서의 참혹한 학살 장면, 유태인 시신이 집단 소각되는 모습, 아이들이 죽음을 피해 화장실 분뇨통에 몸을 숨기는 모습 등을 대단히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현실에 근거한 역사를 살펴보아야 할 때이다. 진정한 가해자와 피해자는 누구이며, 그들의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갈등의 매듭은 어디서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 것일까?
선택된 민족의 장구한 수난
민족은 국가와 운명을 같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민족과 국가가 완전히 운명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민족의 외피로 여겨질 수 있다. 한 민족은 역사 속에서 여러 국가를 세울 수도 있고, 동시대에도 같은 민족이 여러 국가의 국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민족이 국가라는 그릇을 여럿 만들고, 그 그릇들 중 몇 개는 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점에서 유태인은 여간 독특하지 않다. 역사를 통해 유태인이 건설한 나라는 이스라엘이며, 고대 이스라엘이 몰락하자 수천 년 동안 유태인들은 나라 없는 민족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마침내 20세기 중반 이스라엘이 (재)건국되었을 때에야 유태 민족은 국가를 얻은 것이다. 유태 민족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와 부침을 함께 했다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곧 유태인의 역사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은 기원전 11세기경 현재의 팔레스타인, 즉 이스라엘 지역에 세워졌다. 기원전 13세기 모세가 등장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건국은 가능해졌다. 그는 약 400년 동안이나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던 유태인들을 이끌고 출애급을 감행한다. 모세가 유태인들을 이끌고 간 곳은 현재의 이스라엘 지역으로, 가나안 또는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모세가 위험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으로 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신의 지시에 의한 것이며 또한 신과의 약속에 의한 것이다. 유태교에 따르면 우주 만물의 창조자는 유태인과 계약
을 맺는데, 신은 유태인에게 위대한 나라를 제공할 것이며 유태인의 영원한 믿음이 그 반대 급부로 설정되었다. 유태인 특유의 사상인 선민 사상, 즉 자신들은 절대자가 선택한 민족이라는 믿음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가나안 땅에 뿌리를 내린 이스라엘은 곧 번성하고 , 특히 사울, 다윗, 솔로몬 왕이 지배할 시기에 그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스라엘의 부와 영광의 상징인 거대한 성전을 건립하고, 아프리카, 아시아, 아라비아를 잇는 무역로를 열어 무역과 산업 발전을 이루는 등 황금기를 일군 군주가 지혜의 왕 솔로몬이다. 그러나 그의 사망(기원전 931년) 이후 이스라엘은 두 개의 국가로 양분된다.
북부 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할되는 것이다. 그리고 급격히 쇠하기 시작하여 결국 북부는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남유다는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로니아에 의해 함락되고 만다. 이후에도 유태인들은 가나안으로 되돌아갈 기회를 얻었고,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한 마카바이오스 전쟁에서와 같이 외세에 맞서 항쟁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리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니지 못다. 남유다가 몰락함으로써 `유태인의 분산`이라는 역사적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유태인은 2,000년 이상 나라 잃은 민족으로서 전세계에 흩어져 고난과 역경의 세월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유태인의 대표적인 수난 장면을 중세와 현대에서 각각 한 가지씩 꼽을 수 있는데, 중세 때의 악역은 유럽의 국가들이며 현대의 악한은 당연히 독일 나치이다.
중세 교회 세력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악행에 가담한 집단이라는 명분으로 유태인을 탄압했다. 20세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아파르트헤이트의 원형을 중세 교회의 유태인 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1215년 카톨릭 공의회는 반유태주의를 천명하는데, 이 결정은 유태인 차별에 머물지 않고 유태인의 격리와 고립을 제도화한 것이다. 앞서 이슬람 세력이 유태인에게 노란 표식을 옷깃에 달도록 의무화했던 것처럼, 카톨릭 교회가 지배하던 유럽에서도 유태인은 각 국가가 지정하는 표식을 달아야 했다. 그리고 많은 유럽 국가들은 게토라는 구역에 유태인의 거주를 제한하였고, 유태인의 경제 활동도 기독교적 윤리에 위배되는 직종, 예를 들어 고리 대금업 등에 한정되었다.
유태인에 대한 서유럽의 적개심은 14세기에 더욱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표출된다. 그시기에 유럽 인구의 30% 이상이 흑사병으로 숨지는 끔찍한 상황이 닥쳤는데, 유럽 국가들은 이 재난을 유태인의 음모 탓으로 돌린다. 즉 유태인들이 기독교도들의 우물에 독극물을 타서 일어난 재앙이라고 믿고 집단적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것이다. 유럽 시민들은 가족이 흑사병으로 숨질 때마다 유태인에 대한 분노를 키웠고, 그런 분노는 유태인에 대한 무차별 테러와 학살을 불러왔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편견이 개인들만을 결박한 것은 아니다. 유태인에 대한 악감정은 법제화되어 14세기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은 유태인의 강제 추방을 명령하기에 이른다.
독일, 영국, 프랑스, 스위스 등 서유럽에서 추방된 유태인들이 정착한 곳은 폴란드와 러시아 등지였다. 17세기 중반 폴란드에는 약 50만 명의 유태인이 살았다. 그런데 18세기 말엽에 들어서면 사정이 역전된다. 이번엔 동유럽 국가들이 유태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이 시기 서유럽에서는 유태인에 대한 관용의 분위기가 일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자유와 인권과 평등 같은 민주주의적 개념을 시민의 무력으로 표현하고 현실화한 사건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은 부근 유럽 국가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는데, 유태인에 대한 관용적 태도를 낳은 주요한 정치적 원인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었다. 유태인들은 이제 영국과 프랑스 등으로의 이주를 허락받을 수 있었고, 또한 유태인이 좀더 자유로운 기회의 땅을 찾아 아메리카 대륙 등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로 진출한 것도 이 시기이다.
유태인이 제도적 박해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태인에 대한 편견과 증오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런 악감정들은 은밀히 잠재되어 있다가 20세기 초반 한 정치 집단의 만행을 통해 가장 잔혹한 형태로 표면화된다. 홀로코스트라 불리는 나치의 대학살의 칼날은 집시, 동성애자, 사회주의자, 슬라브 민족 등 여러 집단을 향했지만 유태인도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입었다.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어원상 `완전히 불태우다`라는 의미로, 본래는 제물을 불태우는 종교적 의식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집단 살상 그리고 좁은 의미에서는 나치에 의한 조직적인 살상 행위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홀로코스트의 주동자는 나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이다. 히틀러가 독일을 통치하던 10년 남짓의 기간 동안 1,0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조직적으로 학살되었는데 그 중 600만 명이 유태인이었다.
1933년 집권과 동시에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사회적 지위나 종교 등 모든 후천적 조건과는 관계없이 혈통이 유일한 기준이었는데, 일단 유태인임이 확인되면 모든 사회적 기회가 박탈되었다. 유태인들은 직장에서 쫓겨났고 의사직과 변호사직도 잃었으며 대학에서도 퇴학당했다. 1939년에 이르면, 유태인은 독일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상실한다. 재산권 상실은 물론이고 게르만족과의 접촉도 금지되며 도서관이나 공원 등 공공 장소에 발을 디딜 수 없었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게토에 수용되어야 했다. 게토에서는 유태인들이 물품을 생산하여 밖으로 내면 나치가 식료품을 반입하는 형식이었지만 기근에 의한 죽음이 빈발했다. 1941년에는 유태인이 전화나 공공 운송 수단을 이용하는 것도 금지되고, 6세 이상의 아이들은 모두 노란별 모양의 배지를 달아야 했으며, 12세 이상의 아이들은 군수품 생산공장에서 노동을 해야 했다.
히틀러는 대중 선동과 대중 심리 조작에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특유의 선동 능력으로 독일인들의 가슴 속에 있던 자유와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소망을 일시에 몰아 낸다.
대신 국가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지도자에 대한 맹종을 설득해 냈다. 히틀러를 정점으로 광신적으로 단결한 독일의 목표는 게르만 민족의 세계 패권 장악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패권 장악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목표라기보다 당의였다. 히틀러의 선동, 그 기저에는 강자의 약자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깔려 있었다. 유전학과 우생학을 근거로 볼 때 게르만 민족이 생래적으로 우월한 존재이니 게르만의 세계 제패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은 국경을 넘어 인접 국가들을 정복하고, 내부적으로는 결속과 응집을 저해할 열등한 집단들을 근본적으로 격리하는 일이 필요했다.
나치의 탄압 대상에 정치적 반대 세력이 포함된 것은 당연하겠지만, 왜 하필 유태인이었을까.
여기에는 앞에서 보았던 유태인에 대한 유럽인의 뿌리 깊은 편견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 나치가 채택한 프랑스 학자 조제프 아르튀르 드 고비노(Joseph Arthur de Gobineau, 1816~1882)의 인종 이론이 그 사실을 입증해 보인다. 고비노는 백인, 특히 독일 국민이 인류 문명의 정점을 이루고
있는 반면에 유태인은 생래적으로 열등하고 비열하기 때문에 유럽 문화를 훼손할 위험을 지닌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논리는 과학이라기보다는 편견에 불과하지만, 유태인 학살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유태인에 대한 일반의 악감정이 깊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유태인 학살의 또 다른 원인은 정치적 측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유태인뿐 아니라 여러 소수 집단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는 가공의 적을 창조함으로써 내부의 단결을 기하는 고전적 정치 전략임을 알 수 있다. 위험한 무리의 존재 사실은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하게 마련이고, 적에 대한 응징 과정은 출정 직전의 축제와도 같은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나치는 유태인 등을 배척하고 학살하면서 자국 내의 전체주의적 단결력을 높였던 것이다. 이렇게 유태인의 학살 배후에는 유럽인들의 편견과 나치의 정치적 음모가 숨어 있었다.
히틀러는 유태인을 격리하고 차별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것이 그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그래서 유태인들을 마다가스카르 섬에 이주, 격리시키려던 이전의 계획은 백지화되고, `최종 조치`를 위해 살인 캠프를 준비한다. 유태인을 분류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며 최종적으로 학살하는 장소가 된 이 수용소는 독일이 점령한 유럽 각지, 특히 폴란드에 여럿 세워졌고,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각 수용소 근처의 게토에서 유태인들이 대거 옮겨진다.
여성, 노인, 어린이 등 노동력이 없는 유태인들은 곧 살해되었고, 노동력이 있는 유태인들은 공장이나 농장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가 결국에는 죽음을 맞게 된다.
나치는 샤워 시설이 갖추어진 가스실에 유태인들을 몰아넣고 가스를 주입하는 방법으로 아주 손쉽게 학살을 저질렀다. 그리고 희생자들을 즉시 집단 화장하여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 했다. 나치의 눈에는 인간이 철저하게 노동력으로 계산, 치환되고, 육신도 일정 공간을 점유하는 골치 아픈 물건에 불과했기에 아무 죄책감 없이 소각해 버릴 수 있었다.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진행된 범죄였다. 독일이 점령한 유럽 지역에 거주하던 830만 명 중에서 600만 명이 살해되었다는 통계가 있는데, 이런 수치에서 유태인에 대한 학살이 얼마나 치밀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비이성적 폭력이 유태인에게 가해졌고, 유태인들은 현대 문명의 야만적 광기에 의해 무력하게 희생되어야 했다.
그런데 이 즈음 유태인은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엄청난 수의 동족이 희생된 2차 대전이 종결된 직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2,000년만에 부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나라를 세운 땅이 공터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곳은 아랍인들의 고향이었다. 유태인들은 남의 터전을 점령하고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비극적인 희생자의 모습에서 침략자로 일순간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유태인들의 건국은 아랍인들의 희생만을 낳은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아랍은 미국과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고, 그 결과 미국 영화에서 아랍인은 악한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아랍인의 저항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이 진행될 동안 유태인들은 천우신조의 기회를 맞고 있었다. 이스라엘 건국의 조건들이 하나씩 마련된 것인데, 유태인의 건국 열망은 시오니즘(Zionism)으로 구체화되었다. 시온은 종교적 믿음이 견실한 자들이 도달하게 되는 유태교의 이상향이고, 과거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의 언덕 명칭이기도 하다. 시오니즘은 고향이자 성지인 예루살렘, 즉 팔레스타인 땅으로 되돌아가 조국을 건설하려던 유태인의 열망이 이념화된 것이다.
시오니즘은 유태교에서 말하는 신과 유태인의 약속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그 뿌리는 오래 된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정치 운동으로서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이고 이 시기 시오니즘을 주도한 인물이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이다. 그는 1896년 <유태인 국가>라는 문건을 통해 전세계 유태인 문제는 곧 유태인 국가를 건설할 때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전세계 유태인을 열광시킨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시오니스트 회의를 바젤에서 개최한다. 유태인의 조국 건설을 향한 소망이 최초로 조직화된 것이다. 헤르츨은 단명했기에 오랫동안 시오니즘을 지휘하지는 못했지만 이스라엘 건국에 그의 노력이 크게 기여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오니즘의 최초의 공식적 성과는 1903년 가시화된다. 영국이 아프리카 우간다의 비거주지를 유태인의 나라로 제의한 것인데, 물론 시오니스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영국이 이처럼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은 시오니즘의 밝은 미래를 예고했다. 유태인들은 과거 자신들의 왕국이 건설되었던 지역인 팔레스타인 지역을 고집했고, 이런 시오니즘의 주장은 1917년 관철되기에 이른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국내외 유태인의 지원을 필요로 했던 영국이, 벨푸어 선언을 통해 최초로 유태인의 건국을 공식화한 것이다. 당시 영국 외상이던 벨푸어는,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태인 국가를 세우는 것에 동의하며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내용의 선언을 발표하였다.
1922년부터 국제 연맹의 위임 아래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한 후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는 본격화된다. 팔레스타인에 들어선 유태인들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동족들의 자금 지원을 받아 아랍인들에게서 토지를 사들이고 공업 및 거주 시설을 세운다. 1925년에는 팔레스타인의 유태인 수가 10만 명이고 1933년에는 24만 명 정도였으니, 이주민 증가 속도가 그리 빠른 것은 아니었다. 팔레스타인으로의 유태인 이주를 가속화한 것은 히틀러의 유태인 탄압과 학살 정책이었다.
히틀러의 유태인 탄압 정책이 시작된 직후인 1935년 한 해에만도 6만 2,000명의 유태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대거 밀입국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나치의 만행은 유태인과 시오니즘에 대한 전세계적인 동정을 불러일으켰다. 유태인들이 독립 국가 건설을 천명한 1942년 빌트모어 회의는 미국 정치 지도자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는데, 이는 미국 내 유태인의 영향력 정도를 방증하는 사례만은 아니다. 유태인에 대한 전세계적인 동정 여론도 큰 몫을 했던 것이다.
경제력의 우위와 뜨거운 열망 그리고 국제적 지지를 업고 밀려오는 유태인에 대한 현지 거주 아랍인들의 저항은 점차 거세진다. 유엔은 1948년 초 유태인과 아랍인 국가의 분리 건립을 제의했지만 아랍인들은 당연히 거부했다. 그런데 영국이 유태인과 아랍인 사이의 분쟁 조정에 실패했음을 자인하고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한 그 다음 날, 즉 1948년 5월 14일 유태인들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포한다. 이는 2,000년 동안 유태인들에게 가해졌던 숱한 박해의 원인인 유태인 국가의 부재를 씻는 역사적 쾌거였고, 전대미문의 기적과 같은 드라마가 창조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은 아랍인들이 점유한 땅이었다. 유태인들의 주장처럼 이스라엘 왕국이 앞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이 붕괴된 이후, 팔레스타인 땅은 여러 국가의 영토가 되었다. 로마, 그리스, 시리아, 페르시아 등이 이 땅의 점령자였는데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638년부터 지배하기 시작했고, 16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터키 제국이 지배하는 동안에도 아랍인들이 수십만 명 살고 있었다. 게다가 20세기 초반에 시작된 영국의 위임 통치도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의 자치를 위한 준비 단계였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인들은 곧 독립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지만, 영국과 유태인의 결탁이 밸푸어 선언을 낳았고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의 기대는 점차 무너지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그 땅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곳은 그들의 고향이었고 수백 년간 일구어 온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유태교의 성지인 예수살렘도 이미 이슬람화되어 제3의 성지로 여겨진 지 오래였다. 당연히 이슬람의 발생지 메카가 제1성지이고 무하마드의 무덤이 있는 메디나가 두 번째 성지이다. 예루살렘은 초기 이슬람 교도들이 기도할 때 얼굴을 향했던 곳이고 무하마드가 승천한 곳이기에 성지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아랍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유태인들이 막무가내로 밀려와 이스라엘을 세우고 거주민을 몰아 냈으니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그래서 팔레스타인 거주민 뿐만 아니라 주위의 아랍 국가들도 집단적으로 거센 저항을 펼치게 된다. 이스라엘 건국 직후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그리고 트란스요르단(현재의 요르단) 등 5개국의 군대가 이슬람의 이름으로 유태교 국가 이스라엘을 향해 진격한 것이다.
중세에나 어울릴 `종교전쟁`이 20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것인데, 이 전쟁은 이슬람의 기본적 속성 중 하나를 드러내는 사례이다. 그런데 잠시 지면을 할애해서 확인할 그 기본 속성은 서양인들의 통념, 즉 이슬람의 생래적 호전성은 아니다. 그런 통념은 보기에 따라서는 조작된 것이며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의 전쟁을 이해하는 데 도리어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보다는 집단적인 무력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이슬람의 종교적 특징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개괄할 필요가 있다.
이슬람 세계의 뿌리와 그들의 현실적 선택
서구인들은 중세부터 이슬람 교도를 호전적인 무리로 여겨 왔다. 이슬람 교도 또는 아랍인들에게 `한 손에는 코란, 다른 손에는 칼`이라는 묘사가 부여된 것처럼, 이슬람 세력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교세 확장을 기도하는 집단인 셈이다.
그렇지만 그런 통념은 자신들도 숱한 종교 전쟁을 도발했고 타종교를 탄압했던 서구인들의 주장이기 때문에 덜 미덥다. 게다가 의외로 이슬람 성서 코란이 개종의 강요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한다면 도리어 서구인들의 자기 성찰이 요구된다. 종교적 명분을 내세워 정치적 야심을 정당화한 이슬람 세력도 있었지만, 그런 사례는 원칙적으로 이슬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벌인 종교 전쟁에서 우리가 읽어 내야 할 것은 단순한 호전성이 아니라, 단일성을 강조하는 이슬람의 특징이다.
이슬람은 일상 생활과 경제, 정치 등 모든 사회 제도에 알라신의 가르침이 완벽히 표현되어야 하는 원칙을 세워 놓고 있다. 즉 생의 모든 측면들이 이슬람적 가치에 부합하는 분해 불가능한 단일체여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한시라도 종교적 실천을 소홀히 한다면 그는 이슬람 교도가 아니며, 마찬가지로 이슬람 정신을 사회의 모든 제도에 적용시키지 않는 국가는 이슬람의 이름을 내세울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이슬람 교도들의 일상 생활 구석구석은 종교적 실천으로 가득 메워져 있다. 이슬람 교도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들이 그 사실을 잘 보여 준다. 이슬람 교도들은 하루 5번씩 정해진 시간에 메카를 향해 절을 해야 한다. 그리고 라마단 단식이라는 이름으로 1년에 한 달은 식욕을 극도로 억제해야 하는 의무도 있다. 알라가 무하마드에게 코란을 작성하게 한 날을 기념해, 이슬람 교도는 한 달 동안 일몰까지는 모든 음식을 멀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성적 욕구도 욕의 대상이 된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화의 세금을 낸다든가 경제적, 신체적 여건이 허락한다면 메카로 성지 순례를 해야 하는 의무도 부여되는데, 이것은 라마단 단식에 비하면 수월한 일이라 하겠다.
코란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한없이 나약하다. 그런 인간들이 악의 유혹과 침투에서 자신을 지켜 나가고 신의 피조물로서 의무를 다하려면 끊임없는 자기 통제와 갱신이 필요하고, 그런 이유에서 위와 같은 엄격한 종교적 실천이 중시되는 것이다.
이슬람의 종교적 의무가 엄격히 부과되기는 사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에 적용되는 이슬람 원리 중에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특징적인 것은 이슬람이 차별에 단호히 반대하고 사회 정의를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정신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슬람처럼 정의의 실현을 개인적 의무를 넘어 중요한 사회적 의무로까지 분명히 명시한 종교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슬람 세력의 확장을 위해 무차별적 폭력을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무하마드도 실은 빈곤층이나 노예 그리고 고아 등 약자를 보호하는 데 크게 노력했다. 노예제를 예로 들어 보면, 노예 제도 자체가 폐지되지는 않았지만 노예 해방이 종교적으로 장려된 것은 사실이다. 그 결과 무하마드 시대의 노예들에게는 여러 사회적 권리가 주어졌다. 노예들은 일정 금액을 주인에게 지불함으로써 자유를 얻을 수 있었는데, 노예는 분할 지불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또한 노예의 노동의 대가도 주인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와 주인이 합의를 통해 결정하였다. 주인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 노예의 경우에는 주인의 사망과 함께 자유를 얻었다. 코란은 출신 부족이나 인종 그리고 빈부에 따른 모든 차별을 금지하였고 이런 평등 정신은 이슬람 사회에 반드시 적용되어야 했다.
현재 많은 이슬람 국가들도 사회적, 경제적 정의를 대단히 중요한 사회 원리로 여긴다. 사회 하층에 대한 지원은 사회의 엄격한 의무로 여겨지고 있으며, 가난한 자들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지는 부정한 부의 취득은 사회적, 종교적 범죄 행위로 간주되어 고리 대금업 등이 죄악시된다.
이처럼 사회적 평등과 정의를 강조하는 이슬람 사회의 모습은, 이슬람 사회를 백안시하는 우리의 습속에 반하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 정의의 요구가 종교적 원리에서 직접 솟아난 것이라 할 때, 우리는 이슬람 사회의 정교 일치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도 있다. 종교와 정치가 상당히 밀착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슬람 사회는 이슬람 종교의 정신을 구현하는 하나의 장이며 확장된 종교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의 소속감이나 연대감이 강할 수 밖에 없고 이슬람 사회의 결속력이 그 어떤 공동체보다 강고한 것이다.
이런 태도는 개별 국가를 넘어서 이슬람 세계 전체에도 적용된다. 물론 현대의 이슬람 세계는 현실적인 여러 요인으로 분열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슬람 세계의 분열상은, 632년 무하마드의 사망 직후 권력을 장악한 할리파의 초기 4대 권력자 중 3명이 암살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슬람 역사 초기부터 빈발했다. 이슬람 제국이 건설되던 중세에도 분열과 권력 쟁투가 끊이지 않았으며 오늘날에도 이슬람 세계는 수십 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고 다수파인 수니파, 이란 등의 시아파, 하와리즈 등 여러 종파가 혼재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슬람 세계만큼 공동체 정신이나 구심력이 강한 집단은 없다. 국적이나 종파의 차이에 관계없이 메카를 향한 성지 순례에는 매년 수백만 명이 참여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이 이슬람의 문화 전통을 유지하고 있어서 아직도 여러 나라의 이슬람 교도들이 하나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국경선으로 갈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교도들은 모두 이슬람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형제들이며, 국가명은 다르더라도 각지의 이슬람 국가들은 알라신의 뜻이 실현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하나이다.
정교 일치의 사회관이나 이슬람 공동체라는 개념이 성전, 즉 지하드를 가능하게 했다. 이슬람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전쟁을 뜻하는 지하드는, 세상을 개혁하기 위한 전쟁이며 이슬람 정신을 전파하기 위해 공식적 사회 제도, 즉 권력을 쟁취하는 싸움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코란은 강제에 의한 개종과 무력을 이용한 영토확장을 모두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서구인들의 비난처럼 지하드가 이슬람인들의 무자비함을 상징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슬람의 지하드도 역사상 빈발했던 다른 종교 전쟁이 그랬듯이 적지 않은 희생을 낳았고 정치적 강압을 초래했음이 사실이므로 공격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분명하다.
현대에 들어서는 지하드의 수동적인 의미가 부각되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하드의 목적이 세력권 확장에서 영토의 방위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그런 수동적인 의미의 지하드는 이스라엘 건국 직후의 전쟁에서 가장 분명히 볼 수 있다. 팔레스타인 주변의 이슬람 국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서구 열강의 지원 아래 건국된 이스라엘은 단지 영토의 일부분을 잠식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이슬람 공동체의 영토를 침탈하고 신의 뜻이 지배하는 이슬람의 땅을 공격한 셈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슬람 공동의 적이었으며, 주위의 국가들은 공동으로 이스라엘의 건국에 반기를 들고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태인들의 조국애와 지략 앞에서는 이슬람 공동체 정신도 무력했든지 1차 중동 전쟁에서 이슬람 세력은 완패했다. 전세계에 흩어진 유태인들의 지원과 이스라엘의 단결된 힘이 뜻밖의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 전쟁에서의 패배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사실상 인정하는 휴전 협정을 이끌어 냈다.
수에즈 운하를 둘러싼 1956년 2차 중동 전쟁의 승리자도 이스라엘이었다. 이 전쟁의 이슬람측 선봉은 이집트의 대통령 나세르였다. 그는 다시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는 민족주의적 조처를 단행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어 수에즈를 탈환하려 한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은 두 패로 나뉘어 군대를 진격시켰고 곧 이집트는 영토의 일부까지 잃어야 했다. 1967년의 6일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이 막강한 공군력으로 적
을 물리치고 국제적인 분쟁 지역인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지대를 점령한다. 1973년에도 전쟁이 발발했지만 기본 전세는 변화가 없었다. 이렇게 완패를 거듭했으니, 아랍 연맹의 무력 도발은 침략이라기보다는 저항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중동 전쟁에서 이슬람 세력이 일방적인 패배를 거듭한 결과, 이제 이스라엘의 존재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건국과 함께 팔레스타인인 78만 명 정도를 몰아 냈으니, 이스라엘은 출생부터 원죄를 지닌 존재이지만 이제는 국제 사회에서 입지가 크게 강화되었다. 하지만 모든 갈등이 잠들어 버린 것은 아니다. 1993년 기준으로 볼 때 550만 명의 이스라엘 인구 중에서 절대 다수가 유태인들이고, 약 14%가 이슬람을 신봉하는 아랍인들이다. 아랍인들은 대개 요르단 강 서안 지역이나 지중해 연안을 따라 펼쳐진 가자 지구에 살고 있는데, 이들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격렬한 저항은 일상사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자신들의 땅이며 이스라엘은 물리쳐야 할 극악한 점령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의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그에 따라 이스라엘도 자국 내의 아랍인은 물론이고 주위 아랍국을 향해 칼날을 뽑아들 태세가 항상 갖춰져 있다.
수십 년간 반목과 테러 그리고 전쟁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아랍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호전되기를 기대하는 일은 현재로서는 현실적이지 않다. 1993년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와 이스라엘이 서로를 인정하고 팔레스타인 난민의 부분적 자치를 인정한 평화 협정이 맺어졌을 때 세계는 잠시 흥분했다. 이 평화 협정이 중동에 평화를 정착시킬 역사적 사건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5년 11월 평화 협상의 이스라엘 대표인 라빈 총리가 암살되면서 평화의 길이 절대 순탄하지 않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지난 몇 년간의 사건들을 기초로 유태인과 아랍인의 관계를 정리하고 예측하는 작업이 무의미할 만큼, 수없는 변수가 지뢰처럼 깔려 있는 것이 현재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상황이다.
편견을 증식하는 유태인의 영향력
우리는 유태인이 그 어떤 민족보다도 고단한 수난을 헤쳐 왔음을 확인했다. 기원전 6세기 이후 나라 없는 민족으로서 그들은 숱한 멸시와 탄압을 받아 왔다. 그러나 유태인들의 조국 재건 의지는 조금도 꺾이지 않고 2,500년 만에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데 성공한다. 이런 기적을 이룬 유태인의 강인한 생명력과 조국애는 감탄을 불러일으키고도 남는다. 그리고 홀로코스트 등 유태인에게 가해졌던 죄악은 역사가 지속되는 한 잊어서는 안 될 인류 전체의 상처이다. 그래서 많은 영화 속의 유태인들은 피해자의 모습이며, 현대 문명의 가장 잔인한 면모를 드러내 보이는 희생양 같은 존재들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유태인은 1948년부터는 침략자의 모습을 취하게 된다. 강대국과의 거래를 통해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을 몰아 낸 결과 그들의 나라가 세워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침략의 결과물이 곧 이스라엘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사실을 직시하는 영화가 제작되어야 온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최소한 아랍인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은 영화 속에서 사라져야 되는 것이 아닐까. 중동 전쟁은 유태인의 침략에 맞선 아랍인들의 저항이 그 기본내용이었다. 미국에 대한 테러 행위도 전혀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영화 <트루 라이즈>에서 아지즈가 미국을 비난한 내용은 완전한 허구가 아닌 것이다. 미국은 아랍인들의 적인 이스라엘을 공공연히 지원했고, 2차 대전 후에는 중동 지역에서 패권을 행사하고자 내정 간섭에 나섰으며, 세계 평화 유지라는 명분으로 무력을 행사해 왔다. 우리는 목격하지 못했지만 아지즈의 말처럼 아랍인들의 마을과 어린이와 부녀자들은 미국의 공격에 심각한 위기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니 영화 속에서의 아랍인들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은 그리 정확한 묘사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침략자로서의 면모와 피해자 아랍인의 모습을 극장에서 접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아랍인을 적대시하는 미국의 영화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미국 영화판이 유태인의 주도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한 영화 잡지의 글(<누가 할리우드를 지배하는가>, 이철민, <씨네21> 제82호)에 따르면 미국 할리우드의 주요 직책 중 60%를 유태인이 차지하고 있다. 유명 인사 몇몇을 꼽는다면 디즈니사의 사장 마이클 아이즈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파라마운트사의 셜리 랜싱 등이다. 미국 전체 인구의 2.5%에 불과한 유태인들이 어떤 경로로 미국 영화를 지배하게 되었는지는 모호하지만, 유태인과 아랍인을 사심없이 비평하는 영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는 비교적 분명하다. 아랍인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미국 내 유태인의 적의를 사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한 것이다.
유태인이 지배하는 영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밋밋하다 해서 역사서를 외면한다면 우리들은 중립적인 중동 역사 지식을 얻기 힘들 것 같다. 동일한 이유에서 아랍인은 미국 영화에 대해 다소 궁색한 대응 방식을 보일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쉰들러 리스트>는 유태인들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이집트를 비롯한 몇몇 아랍 국가에서 수입 금지되었다. 그리고 <인디펜던스 데이>를 두고 레바논의 한 이슬람 무장 조직은 유태인 과학자가 외계인을 물리치게 설정되어 있다고 해서 이슬람 교도에게 관람 거부를 촉구했다. 전자는 분명한 명화이고 후자는 정신 빼고 즐기면 될 오락 영화인데도, 이슬람 세력들이 그처럼 민감하고 경박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이스라엘이라면 아랍 국가들이 언젠가 무력으로 침략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미국 영화 세상은 아랍인들의 저항이나 공격이 전혀 무의미할 정도로 반아랍 세력, 즉 미국인과 미국 내 유태인의 지배가 완벽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슬람, 무슬림, 아랍인
이슬람의 발생 시기는 622년이다. 무하마드가 유일신 알라의 계시에 따라 신의 뜻을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이슬람은 성립되었다. `이슬람`은 (알라의 뜻에) 순종함`을 의미한다. 서구인들 중에서는 이슬람을 무하마드교라고 부르지만 이는 부정확한 표현이다. 무하마드는 예언자이지 신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신과 인간의 의사 소통을 매개하는 존재이고 신의 도구와 같은 성격을 띨 뿐이다. 사우디 아라비아 서부 도시 메카가 이슬람의 발생지로 여겨지고 있으며, 현재 전세계에는 10억 정도 그리고 우리 나라에도 10만여 명의 신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슬림은 이슬람에서 말하는 모든 피조물을 의미한다. 이슬람의 입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무슬림에 해당하겠지만, 이슬람 문화권 외부에서는 이슬람 신도를 가리킬 때 무슬림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흔히 아랍인을 이슬람 교도와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아랍인은 종교가 아니라 사용 언어를 기준으로 범주화하는 표현이므로 부정확한 이해이다. 아랍인은 아라비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아라비아어 사용자들은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아랍인에는 코카서스 인종 같은 흰 피부의 사람들과 아프리카 흑인계나 아시아의 몽고 인종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통념처럼 모든 아랍인이 이슬람 교도, 즉 무슬림인 것은 아니다. 현재 아라비아어 사용자 중 약 5%는 기독교, 유대교 등 다른 종교를 믿고 있다. 또한 `블랙 무슬림`이라 불리는 미국 흑인들처럼 아라비아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원칙적으로는 이슬람 교도를 지칭하려면 무슬림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무슬림 대신 아랍인이라는 단어를 쓰기로 한다. 이때의 아랍인은 통상의 용법대로 이슬람 세력을 지칭하며 또한 중동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 표현이 다소 부적합하지만, 여기서는 지역적 특성, 즉 중동의 영토 분쟁이 중시되기 때문에 아랍인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히틀러는 살아 있다?
히틀러는 패전을 확신한 직후 자살했다. 그는 죽기 전에 두 가지 일을 마지막으로 처리한다. 먼저 1945년 4월 28일 자정 즈음에 애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린다. 다음으로 남아 있는 심복들에게 국가 통수권을 위임한다. 부부는 4월 30일 자살했고 히틀러의 유지에 따라 불태워졌다.
히틀러가 연합군에 체포되지 않고 자살을 한데다가 시신이 이미 불태워졌다는 사실 때문에 후에 무수한 루머를 낳았다. 에바 브라운은 음독 자살한 것이 확인되었지만 히틀러의 사인이 권총 자살인지 아니면 음독 자살인지는 아직까지도 정확히 판명되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 히틀러가 살아 있지 않을까 하고 우려 또는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히틀러의 생존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끊임없이 들려왔다. 1956년 10월 히틀러의 유해를 분석하고 히틀러의 죽음을 재확인하는 해프닝이 불가피했을 정도로, 히틀러의 생사 여부는 중요한 사회적 이슈였다.
말장난이 허락된다면 현재도 히틀러는 살아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최소한 몇몇 독일인의 가슴 속에는 타민족에 대한 야만적 테러를 가하던 나치의 정신이 살아 있다는 말이다.
2차 대전 후 나치 정당은 금지되고 지도자들은 처벌받았지만 독일이나 미국 등에 소규모의 나치 조직이나 정당이 있었다. 독일에서는 1990년 통일 이후, 특히 옛 동독 지역에서 타민족에 대한 테러가 되살아나고 1992년 극에 달한다. 터키 출신의 한 여인과 두 소녀가 네오나치의 테러에 살해되었고 1992년 한 해 동안에도 방화 500건을 포함해 약 2,000건의 폭력 행위가 외국인을 향해 자행되었다. 1993년 의회는 독일을 피난처로 삼은 외국인의 권리를 제한하기 위한 헌법 수정에 동의하였다. 그만큼 신나치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컸던 것이다.
이렇게 히틀러는 독일인의 가슴 속에 네오나치즘이라는 이름으로 살아 있다. 불행하게도 타민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정신은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는 일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아파르트헤이트, 보스니아 내전에서의 인종 청소 그리고 현재 1만 명의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는 프로테스탄트 백인 집단인 KKK단 등이 그 예이다.
라빈과 아라파트
이츠하크 라빈(1922~1995)과 야세르 아라파트(1929~)는 중동 평화의 전기를 마련한 공으로 1994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하였다(이스라엘 정치가 시몬 페레스도 공동 수상자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들은 과거에는 각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난민을 대표하면서, 극단적인 무력 투쟁을 진두 지휘하며 평화를 위협했던 인물이라는 점이 재미있다.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의장 아라파트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났고 이집트의 카이로 대학에서 수학했다.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그는 팔레스타인 독립을 위한 투쟁에 투신한다. 그가 택한 방법은 폭력적인 게릴라 전술이었다. 1959년 알파라라는 게릴라 단체를 조직하고 지휘함으로써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1969년에는 PLO의 의장직을 맡게 된다. 뮌헨 올림픽에서 자행된 검은 구월단의 테러로 대표되는 60년대 말 이후의 무력 저항을 지휘한 사람이 바로 아라파트이다. 그러나 국제적 비난이 거세지자 70년대 중반 아라파트는 PLO가 이스라엘 이외 지역에서의 테러를 중단할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많은 국가들과 국제기구가 PLO를 인정하게 된다. PLO는 1988년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는 등 온건한 모습을 띠게 된다.
현재 PLO는 이스라엘 건국 이전부터 팔레스타인에 거주한 사람들과 그 자손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표한다. 영토는 없지만 명실상부한 국가 조직으로서 전세계 팔레스타인인들은 세금을 납부하고 있다.
라빈도 아라파트처럼 대단히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건국 당시 이슬람 국가들과의 전쟁에 참여하였고 1964년에 참모 총장이 되어 1967년 3차 중동 전쟁에서 승리를 얻는 데 기여한다. 그 이후에도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강경 진압할 것은 주장하는 등 매파에 속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영웅이었지만 모든 아랍 민족의 적이었다. 1992년 두 번째로 총리직에 오른 라빈은 훨씬 온건해졌다. 취임 직후부터 비밀 협상을 통해 PLO와 접촉하고 1993년 역사적인 평화 협정 체결을 선도했다. 그는 최초로 PLO를 대화를 파트너로 수용하고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자치를 인정함으로써 중동 평화의 길을 마련한다.
그러나 그는 1995년 11월 영토를 이민족에 넘긴다고 비난하는 이스라엘 청년 이갈 이마르가 쏜 3발의 총탄에 숨을 거둔다. 이스라엘 전역이 비통에 빠져들었지만 `배신자`의 죽음을 축하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묘소에 침을 뱉고 방뇨한 젊은이들도 있었고 라빈의 죽음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인터넷에 띄웠다가 퇴학당한 대학생도 있었다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