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회 『詩하늘』 詩 낭송회 및 구상 시인 추모의 밤에 다녀와서
구상 시인이 돌아가시자 어느 신문지상에서는 많은 시인들이 그 분을 '시인이자 구도자’,
'인격과 시가 일치한 우리 시대의 어른'이 시다 라고 하였다는 보도의 글을 읽은적 있었
습니다. 한 번도 만나 뵙지 못하였지만 그 분의 시와 그 분의 행적으로 그러한 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인천교구 사목연구소 소장이신 차동엽 신부님 글의 일부분을 읽어보면 그 분의 심성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글은 거짓말을 못한다. 글에는 그 사람의 삶과 마음이 배어있다. 누구고 삶이 스며있지 않은
글은 금새 알아챈다. 마음이 담겨있지 않은 글은 왠지 모르게 티가 난다. 꾸민 글은 이내 드
러난다. 그런데 구상 시인의 글을 읽으면 정직하고 진솔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느껴져 온다.
사실 시인의 글에는 어렵고 생경한 단어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쓸 수 있는데
굳이 어려운 단어를 선택해서가 아니다. 현학적인 의도에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사태와 사실
에 부합하는 보다 적확한 용어를 찾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시인의
글은 곧잘 읽는 이에게 알 듯 말 듯 했던 것을 터트려 줘 ‘바로 그거야’라고 무릎을 치게
해준다.
한마디로 구상 시인은 국내보다 국외에서, 교회 안에서 보다 교회 밖에서 더 인정받으신 분
이다. 그런데 그분은 누구보다 민족성이 투철한 시인이시고 누구보다 가톨릭 신앙을 공공연
하게 고백한 시인이시다. 죄책감과 동시에 자긍심을 갖게 해주는 아이러니이다.
그 날 시낭송회에 참석하신 김주완 님의 말씀에서도
' 그 분은 자상하고 자애로운 분' 이시라며 개인적인 사례를 들어 얘기해 주셨고, 그 분의 시론
은 존재론적인 시, 시 전체가 명상을 바탕으로 한 철학시라 하였습니다.
표상과 실재가 일치하는 시를 쓰신 분이시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시하늘> 계간지의 심의위원이셨으며 늘 많은 격려를 해주셨고 늘 걱정해 주셨으며
시하늘 책을 보내드리면 잊지 않으시고 편지를 주셨다는 가우 님의 말씀으로 그 분의 남다른
<시하늘>에 관한 사랑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2004년 9월 <시하늘> 가을호에는 그 분의 시를 특집으로 다루었을 뿐만아니라 낭송회 또한
그 분을 추모하는 뜻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죽순문학회 회장이신 윤장근 시인을 비롯하여 그 분의 양아드님 서예가 이길상 님과 대구의
여러 시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우 님의 인사말씀과 제4막 님의 사회로 낭송회가 시작되었습
니다.
낭송회는 언제나 음악으로 그 문을 열었으며 낭송회가 계속되는 동안 '주여 임하소서',
'주여, 당신 종이 여기', 'Amazing Grace' 음악을 박소진 양의 피아노와 김문영 양의 첼로로
고맙게 들었습니다.
낭송책자에 올려진 시들을 참석하신 분들이 한 편 한 편 낭송하였으며, 제가 제일 먼저 '내 안의
영원이' 시를 낭송하였습니다. 그리고 김태은 님이 '어느 친구' 박상희 님이 '추풍령' 시를 낭송
하셨습니다. 김은숙 님이 '은행-우리 부부의 노래' 시를 낭송해주셨고 낭송 중간 윤장근 선생님
께서 대구에서의 구상 시인과의 인연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집중하여 들으며 기록할 수 없어서 낭송회가 끝나고 원고를 주시면 시하늘 카폐에 올려 많은
분들이 읽을 수 있게 하고 싶다고 하였더니 원고가 제가 잘 읽을수 없을거라 하셨습니다.
그 분이 영남일보에 싣은 원고를 대신하여 올려봅니다.
추모사..구상 시인 영원으로 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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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대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48년 상화시비 제막식에 참석하면서부터다. 선생은 이날 박종화 문총회장 대리로 추모사를 읽었으며 대구의 문인들과 만난 것도 이 자리에서였다. 50년대, 60년대로 이어지는 대구생활 중 두번이나 입원을 했고, 이런 사연으로 부인이 선생의 병 요양을 위해 왜관에 순심의원을 개업함으로써 인연은 더욱 깊어졌다. 낙동강이 유장히 흐르는 왜관시절 선생은 방 두칸의 사랑채를 지어 서재로 삼았다. 관수재(觀水齋)의 시작이다. 이곳을 근거지로 선생은 영남일보 주필과 효성여대 교수로서 강의를 하면서 친구들이 생각나면 향촌동으로 나와 음주행각을 벌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자란 성장지를 잊지 못하듯 30대를 고스란히 보낸 대구는 고향땅 원산과 마찬가지로 쉽게 잊어질 곳이 아니다.
46년 시집 '응향' 필화사건으로 월남한 후 6·25전쟁이 나자 대구로 와서는 육군종군작가단 창설에 주동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53년부터 57년까지는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역임하는 등 언론창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한편 시작에도 큰 의욕을 보여 51년 시집 '구상'을 비롯, 53년에는 사화평론집 '민주고발'에 이어 56년에는 시집 '초토의 시'와 '전선문학'을 간행하였다.
또한 60년대부터는 '밭일기' '강'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등의 연작시를 쓰기 시작하여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연작시 가운데서도 '강'의 경우는 선생에게 있어 육신과 영혼이 전생(轉生)을 거듭하면서 마침내 민족과 역사 안으로 다다르는 회향(回鄕)의 일터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강'은 실로오늘(순간)에서 내일(영원)로 흘러가 어떤 시대가 도래해도 결코 소멸하지 않는 생의 원형 그것을 상징한다고 할 것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선생의 시는 자연 서경보다는 인간 진실이나 현실에 대한 존재론적 추구에 더 중점을 두는, 즉 일상의 단순성을 지양한 시적 현상에 사회성, 역사성, 영원성을 부여하는, 결국 이것은 우리 시대가 절실히 요구하는 인간성의 회복으로 이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선생은 세상살이에 있어서도 좀 특이한 면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시인보다도 상식에서 벗어난 이른바 기인들을 좋아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허공에서 와서 허공으로 간 공초선사, 화가이기를 항상 부끄러워하며 유성처럼 꺼져버린 이중섭, 32세까지 독신으로 있다 어느날 홀연히 생을 끊은 조각가 차근호, 주먹계의 대부 박용주, 대구 남문시장에서 배추 사라고 외치던 포대령 이기련, 철저한 기인 김익진, 여기에 또 한 사람 유치찬란의 걸레스님 중광이 있다.
항간에서는 흔히 선생을 성인이라고도 하고 속인이라고도 말한다. 겸허하고 인정있는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런데도 이런 그에게서 위선의 냄새가 나지 않는 것도 한 특징이지만 정 있는 사람들이 갖기 쉬운 과잉친절, 귀찮을 정도로 남의 일에 용훼하는 그런 태도가 없는 것도 특이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작고 직전 중환자실에서 만져본 선생의 하얀 손은 혈압이 내려가서인지 얼음처럼 차거웠다. 평소 그렇게도 따듯하던 선생의 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선생을 대부로 모시게 된 사람으로선 지금도 그 손은 선생의 손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선생님의 명복을 마음으로부터 빈다.
2004년 5월 12일 영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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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도 다른 시들이 낭송되었는데, 김주완 님이 '독락의 장' 배문기 님이 '나는 알고 또한 믿
는다' 김미선 님이 '꽃자리' 시를 낭송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상 시인의 양아드님이신 서예가
이길상 님께서 짧게 말씀해 주셨으며, 이창주 님이 '그 분이 홀로 가듯' 손남주 선생님이 '임종
고백' 시를 낭송해 주셨으며 마지막으로 가우 님께서 구상시인의 추모시인 '아무나 어른이 아니
다' 시를 낭송해주셨습니다. 김주완 님은 구상시인과의 개인적인 친분과 그 분의 심성과
그 분의 시정신과 구상시인의 시의 본질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분의 정신은 많은 학자들과의 교류가 많았으며 시인이라기 보다 철학인이었으며 오염된 곳에
서도 곧은 정신 성자처럼 자애로운 분이시다. '기어'에 빠진 사람은 지옥에 가서 혀가 만발이나
빠지는 벌을 받게 된다, 그분의 시는 한 국가에 국한된 서정시가 아니라서 번역할 때 그 의미가
잘 전달되어 어느 나라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시다.
낭송회를 마치고 다른 분들은 돌아가시고 윤장근 선생님과 함께 시하늘 회원들은 제4막 님의
B N A 에 가서 둘러 앉아 또 다른 구상시인에 관한 얘기들을 들었습니다.
윤장근 선생님을 아끼시는 구상 시인은 돌아가시전 다른 사람에게 종교에 관해 권유하시는
분이 아니신데 윤장근 선생님에게는 하늘에 가서도 꼭 함께 하고 싶으니 영세를 받으라고 권하
셨답니다. 그래서 윤장근 선생님은 무신론자 이시면서 그 분을 위해 신앙을 갖기 전 영세를
받으셨답니다.
그 과정에서 가우 님께서는 신부님께 허락을 받고, 구상 시인댁으로 신부님과 윤장근 선생님을
모시고 가셔서 구상시인 앞에서 윤장근 선생님이 영세받을실 수 있도록 도와드렸답니다.
그런 따뜻한 얘기들을 주고 받는 사이 평일인데도 멀리에서 이곳까지 와 주신 폭군 님이 떠나
시고 무르익은 분위기를 뒤에 두고 저도 비가 또닥또닥 내리는 밤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습
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밤길에 내내 떠오르는 것은 '꽃자리' 시의 한 귀절이었습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이제 제 마음 떠나지 않을 싯귀 하나 되었습니다.
늘 높고 맑은 가을 하늘 같으시길 바라며
............................................전향드림
첫댓글 구 상님은 별이 되셨을 겁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별이 되셨을거라 믿습니다. 내일 작은 아이 운동회라 휴가를 냈더니 비가 와 연기되었다는군요. 그래서 마음놓고 늦도록 깨어 있답니다.^^ 이제 자야겠어요. 좋은 밤 되셔요.*^^*
전향님, 마지막 구상시인 말씀하신 분 '김주완 시인'입니다. 저도 첼로연주자 이름을 몰라서 여기서 가져갑니다
수정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