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rre Bonnard 1867~1947
나는 사람들의 첫 인상을
굉장히 잘 믿는 편인데,
우습게도 남에게 보이는 내 첫인상은
참 믿을 게 못된다.
내성적이고 낯 가리는 성격을
채찍질하고 끌어내서
낯선 사람들 앞에 세워놓아야 하는 탓에
난 대체로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는다.
털털하고 시원시원한 사람이라는.
다행이 나쁜 오해는 아니지만,
나처럼 자신을 몰아부쳐야 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해 할 것이다.
내 속은 그렇지 못한데,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습에 맞춰나가는 것이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를.
오늘도 몇 번이나 나를 꿀꺽 삼키고
난 그렇게 사회 속을 헤매다 돌아왔다.
La Salle de Bain, 1932
아주 사적인 시간
친구를 필요로 하는 시간은
편안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나의 안팍의 차이를 감당해낼 필요가 없이,
가장 자연스러운 나로 있을 수 있는.
아주 사적인 시간들로 채워질 수 있는.
보나르의 그림을 보면
밝고, 따뜻하고, 친밀한 느낌들로 가득하다.
그를 앵티미스트 intimiste 라고 부른 것도
그의 작품에 가득한 친밀함 때문이다.
그림을 이해하려고 너무 애쓰다 보면
종종 그림을 감상하는 일이 즐거움 보다는
학문적 한계와 부담감을 가져오기도 하는데,
지금 보나르의 그림을 앞에 두고는
적어도 그러지 않아서 좋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보는 이로 하여금 쉽게 느낄 수 있게 하는
대가다운 타고난 자질을 갖춘 화가였기 때문이다.
그의 사적인 시간을 보며
나 역시 비로소 내 내면과 다시 일치되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Woman with Black Stockings, 1905
Model in Backlight, 1907
Mlle Andree Bonnard with Her Dogs
보는 법을 안다는 것은
아마도 보나르는 삶의 상당한 시간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고민했을 테지만,
내게 그는 정말 있는 대로 볼 줄 아는,
보는 만큼 그려낼 줄 아는 화가이다.
그 만큼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것,
그리고 그대로를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왜 그럴까?
인간은 모두 보고, 느끼고, 표현할 줄 아는데,
어쩌면 절대적으로 단 하나일 지 모를
본질이라는 것을 우리는
왜 모두 다르게 보고 다르게 표현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본질과 나 사이에
무수하게 존재하고 있을 성질 때문이 아닐까.
하나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성질들을
틀렸다고 말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성질들 가운데서 본질을 가려내기가 어렵다.
하지만 보나르는
그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표현하는 것이
결국은 그가 담아내고 싶어했던 주제를
굉장히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이것 조차도
내가 보는 보나르일지도 모른다.
당신의 보나르는 또한 다르게 보일지도.
어떻게 보아야 잘 볼 수 있는지,
완전하게 볼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사람들이 보는 법을 안다면 회화를 더 잘 이해할 것이다.
Pink Nude in the Bath c, 1924
Siesta, 1900
스스로에 갇힌 그녀, 그녀에게 갇힌 보나르
보나르의 작품에 등장하는 그녀,
마르트 부르쟁은
384점이나 되는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한다.
평생을 그는 그녀를 모델로 삼았는데,
모델로, 연인으로, 아내로 함께 하는 시간 동안
그는 마르트가 갇혀버린
그녀만의 세계를 충분히 사랑하고 지켜주었다.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았던 마르트는
자신의 본명 대신 마르트 드 멜리니라는 예명을 지어 부르길 즐겨했는데,
귀족들의 이름에 사용하는 de 를 이름에 넣어 부르며
자신이 귀족 신분이 되었다는 망상을 즐겼던 것 같다.
마르트의 이러한 성향은 그녀의 삶 전체에서도 나타나는데,
자폐적인 자아의 고립과 피해망상,
하루에도 몇 번이나 목욕을 즐길 정도의 결벽증과
강박증, 신경쇠약 등의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그녀는
철저히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평생을 그 세계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거나
자신을 표현하려 하지 않아,
무려 32년이 지난 후에야 결혼식을 올리면서
그는 비로소 그녀의 본명을 알게 되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장애조차도
보나르에겐 상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지켜주고 바라보는 그녀의 세계를
자신의 뛰어난 능력인 그림을 통해
더더욱 신비롭고 아름답게 표현해 냈던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연인을 수 없이 그리면서
본질적인 것에 도달하는 방법을 터득했을지도 모른다.
말로 표현하지 않고,
그와 어떠한 교감도 없는 상태의 그녀를 바라보며
오직 그녀가 행동하는 것,
그녀가 갇힌 좁은 세계를 지켜봐야 했기 때문에
차라리 다른 방해 없이 연인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 처럼.
The Mantelpiece
보나르적인 색체를 완성하다
각 사물이 갖는 정형적인 색체나
형태로부터의 탈피를 추구했던 나비파의 화가 답게
보나르의 색체는 상당히 독특하고
그만의 개성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색체에 대한 감각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더욱 깊어지고 다양해져
그의 독자적인 색체의 세계는 더더욱 견고해져 갔다.
부드러운 빛과 투명한 채색은
처음의 편안함과 부드러움을 넘어선
현란한 아름다움으로 가득찼고,
한 화가의 집념이 이루어낸
새로운 차원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The Window (La fenetre), 1925
The Red Cupboard (Le placard rouge), 1939
유대어 '예언자'라는 단어에서 따온 Nabi,
이들의 목적은 신과 사랑과 감정의
신비스러운 언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감히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그림을 통해 표현하려 했던 보나르,
하지만 그의 감정들을 나는
이렇게 느끼고 있다.
그는 어떻게 자신을 표현해야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내일 다시 사회 속으로 걸어나가며
아마도 몇 번이나 느껴야 할
내 속의 감춰진 나에 대한 연민과 부담을
나 역시 그렇게 잘 표현해 보고 싶다.
The Loge, 1908
written by mandara
첫댓글 차암 좋습니다...잘 읽고 감상도 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