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진(尹福鎭)의 그리운 "고향 하늘" (1927)
류지미 2023. 5. 2. 03:46
윤복진(尹福鎭,1907~1991)의 1936년 당시 모습. /대구시
1. 먼산에 진달래 울긋불긋 피었고 2. 이내몸도 구름같이 떠도는 신세임에
보리밭 종달새 우지우지 노래하면 내 쉬일곳 어디련가 고향집 그리워라
아득한 저산너머 고향집 그리워라 새는 종일 지저귀고 행복은 깃들었네
버들피리 소리나는 고향집 그리워라 내고향 남쪽바다 고향집 그리워라
---윤복진의 그리운 고향 전문---
동요작가 윤복진은 1907년 대구 출생, 84세를 살았다.
향리에서 학교를 다니고 일본 호세이대학 영문과를 졸업.
동요작가 이원수,서덕출과 사귀고 많은 동요를 집필해 윤석중이 발행을 하던 아동문학지에 발표를 하였고
급진 좌파의 모임인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아동분과위원장으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서울에 살다가 몸이 약해지자 향리에 돌아가서 카프의 경북지회장을 역임 하였으며
동요를 쓰고 활동 하던 중에 한국전쟁이 나고, 그때 월북하여 북한에서 왕성하게 문확활동을 하였습니다.
동요집 "꽃초롱 별초롱"이 있고 봄편지의 동요작가인 서덕출과 공저로 아동문집을 발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는 이념이 매우 혼란하던 시절이었는데 왜인의 강압 때문에 자유를 목말라하던 국민들이 해외
에서 활동 하던 독립지사들이 묻혀 들여온, 이론적으로 같이 벌어 같이 나누고 사는 공산주의나 정부가 없어도 운용이 가능한 사회의 아나키스트 즉 무정부주의를 동경하며 이념이 급진적으로 향해가던 시절이었지요.
문인들도 거의가 무산계급의 프로레탈리아 작가동맹에 가입을 해 활동하였는데, 윤복진도 예외는 아니어서
공산성향의 남노당 박헌영이나 임화 등을 따라서 고려공산회나 조선공산당을 표방하는 대열에 섰고 전쟁중
월북을 하였지요.
심지어는 총대를 메고 북한군에 가담한 지식인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북에서 문학활동을 할때 많은 문인들이 숙청이 되었는데, 윤복진 작가는 용케도 적응을 잘 하였고,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작품을 많이 남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 울밑에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 2. 오동잎 우수수 지는 달밤에
길을 잃은 기러기 날아갑니다 아들 찾는 기러기 울며 갑니다
가도가도 끝없는 넓은 하늘에 엄마엄마 울고 간 잠든 하늘에
엄마엄마 찾으며 날아갑니다 기럭기럭 부르며 날아갑니다
---윤복진의 기러기 전문---
윤복진은 위의 동요와 주옥같은 많은 작품을 모두 작곡가 박태준과 짝을 이루어 곡을 붙였고,많은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되었지요. 기러기는 개화되지 않는 왜정때이고, 한 동안 교과서에 게재 되었으며 아이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이기도 하였습니다.
사회적으로 이념의 혼란과 왜인들에게 삶이 유린되고 한편 가난에서 헤어나려는 국민들의 몸부림도 극렬하던 어지러운 시절이었지요.
급진 좌익의 성향을 가진 이들이 우리국민의 70%라는 사람도 있었지요.
어른들은 관의 눈을 피해 산속으로 피해다니고, 어린이들도 어른들을 따라다니며 피해 다니던....
말이 월북이지 문인들의 작품을 보면 열렬히 북한을 찬양하였고,
한편으론 총대를메고 북한군에 동조를 하던 문인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무질서하던 때이고, 그 사상적 시원은 왜정과 왜인들의 탄압 때문이었습니다.
월북한 이들이 북에서 숙청 될때 억울하게도 많이 희생 되었고, 남쪽에 남은 이들도 잘못 없이
보도연맹이나 좌익의 이름으로 많이 희생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전쟁시에 남과 북으로 전선이 오르내리던 때에 이쪽과 저쪽으로 갈려서 얼마나 많이 비참하게
희생 되었는지... 또 젊은이들은 군과 의용군에 징발이 되어서 싸우다가 많이 희생 되었는데,
이런 비극이 모두가 나라 없는 식민통치 일제에서 부터 비롯된 것인가 합니다.
윤복진 작가도 멋모르고 북행을 해서
얼마나 간절하게 고향을 그리워 했을지.
"고"고향 하늘" (1927) - 윤복진 작사, 박태준 작곡
고향하늘
https://www.youtube.com/watch?v=vjlzYMFX1Oc
H.G. Ryu3 years ago
윤 시인의 눈길 머물었을 푸른 고향 하늘이 그립습니다.
머나먼 남녁 하늘 푸른 하늘 아래
박꽃 피는 고향 마을,
그리운 옛집 ...
"고향 하늘" (1927)
(윤복진 작사/ 박태준 작곡)
< 1 >
푸른 산 저 너머로 멀리 보이는
새파란 고향 하늘 그리운 하늘
언제나 고향 집이 그리울 제면
저 산 너머 하늘만 바라봅니다.
< 2 >
새파란 저 하늘 그 아래는
나서 자란 고향 집이 기다린다오
고향을 떠나온지 그 몇 해인가 ?
저 하늘만 바라보면 가고 싶어요.
< 3 >
궂은 비 내릴 때나 함박눈 올 때
고향 하늘 볼 수 없어 애를 태워요
울고 있는 저 하늘을 바라보면서
박꽃 피는 고향 집을 그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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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 깨나 잊지 못한 그리운 고향
그 언제나 다시 찾아 돌아들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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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곡가 박태준(1940년 대구 계성고보 재직시절)
◆ 박태준 (朴泰俊 1900~1986) 성악가·작곡가(동요)·합창지휘자. 연세대(延世大) 음대 교수. 평양 숭실전문(崇實專門) 졸업(1921). 경상북도 대구(大邱) 출생. 호는 금호(琴湖). 1900년 11월 22일 대구 제일교회의 세례교인이자 포목상을 운영하던 박순조(朴順祚)의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대구 계성(啓星)학교를 거쳐 1921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학부를 졸업하였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찬송가를 통해 자연스럽게 음악에 접했다. 계성중학 시절 영어웅변에도 나가는 등 음악보다는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숭실전문에 입학한 후부터 음악적 재능에 꽃을 피웠다. 숭실전문 재학 시절 선교사 말스배리를 만나 화성학 등을 배워 음악가의 기반을 다졌다. 같은 대구 출신으로 2년 후배인 현제명(玄濟明)과 함께 음악부에서 중요한 몫을 다했다. 1920년 6월에 열린 평양음악회에서 그의 독창은 만장의 갈채를 받았다.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요 "가을밤"(이태선 작사)·"꽃봉투"(윤석중 작사)·"가을"(박목월 작사)·"꼬부랑둔덕"(서덕출 작사)·"고기잡이 할아버지"(윤석중 작사)·"골목길"(김영일 작사)·"꽃밭"(장효섭 작사)·"나비와 잠자리"(윤석중 작사)·"내 방패 연"(윤석중 작사)·"눈꽃"(김영일 작사)·"눈이 오는 밤"(홍은순 작사)·"물새"(윤석중 작사)·"우리나라 기"(윤석중 작사) 이상 13편을 작곡하였다. 1922년 이은상의 시 4편을 가사로 가곡 "미풍" ·"동무생각"(일명 사우)·"님과 함께"·"소낙비" 및 1927년 자작시를 가사로 한 가곡 "금주가"는 초기 가곡작품이다. 1924년 "오빠생각"(최순애 작사)·"오뚜기"(윤석중 작사)·"맴맴"(윤석중 작사)을 작곡하였다.
1929년 박태준의 동요곡집 『중중 때때중』이 발간됐다. 빅타음반에 "오빠생각"·"사우"·"오뚝이"·"맴맴"이 취입됐다. 1931년 5월 두 번째 창작동요집 『양양 범벅궁』을 출간하였다. 숭실전문 재학시절 이미 "물새"를 비롯한 13곡의 동요를 작곡했다. 1921년 졸업하자 이듬해 마산(馬山)의 창신학교의 교사생활을 하면서 1922년 "동무생각"·"미풍"·"님과 함께"·"소낙비" 등 네 곡의 예술가곡을 작곡하였다. 1924년 대구 계성학교에서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고, 이 시기에 동요 "오빠 생각"·"맴맴," 가곡 "동무 생각"(일명 사우) 등을 작곡했다.
1929년부터 일본빅타축음기주식회사가 발매하기 시작한 조선음반에는 그의 "오빠생각"·"사우"·"맴맴" 등이 취입되었다. 1929년 출간된 『중중때때중』은 박태준의 동요집이다. 이 동요집에는 "가을밤"·"꽃봉투"·"가을"·"꼬부랑 둔덕"·"고기잡이 할아버지"·"골목길"·"꽃밭"·"나비와 잠자리"·"내 방패연"·"눈꽃"·"눈이 오는밤"·"물새"·"우리나라 기," 이상 열세 동요가 수록되었다. 1931년 동요곡집 『양양 범벅궁』을 발간했다. 1932년 도미(渡美)해 터스칼럼(Tusculum)대학에 입학했으나 작곡과가 없어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음대로 옮겨 교회음악과 작곡을 전공해 음악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도 "임생각"을 비롯한 몇 편의 가곡을 작곡했고, 해방 전까지 무려 70여 편의 동요를 작곡하였다.
1936년 귀국해 숭실전문 교수로 부임했고, 1938년까지 숭실전문학교 교수를 지냈다. 1938년 고향 대구로 내려가 공회당에서 독창회를 개최를 갖는 한편 다시 계성학교의 교사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의 동요곡집 『중중 때때중』(1929)과 『양양 범벅궁』(1931)을 출간한 후, 1939년 6월 8~9일 전조선작곡발표대음악제(全朝鮮作曲發表大音樂祭) 때 "산울림"·"호박타령"·"아 가을인가" 및 합창곡 "평화"·"부활"(復活)을 발표했다. 동요곡집 『물새발자욱』을 출간하였다. 윤복진이 작요(作謠)하고 그가 작곡한 "기러기"의 오선보는 『어린이』(1930) 8권 7호에 발표되었다.
『三千里』(1932) 4권 2호에 소개된 박태준의 약력은 같은 숭실전문학교 출신 양악인 현제명·차재일의 것과 함께 약술(略述)됐다. 그가 작곡한 "부끄러움"·"고향 하늘"이 김영길독창회에서 공연됐다는 소식은 『博文』(1939) 6호의 음악실에 소개됐다. 그는 조선일보사 주최 제4회 음악콩쿠르 성악부 심사위원으로 『朝光』(1939) 43호의 광고에 소개되었다. 일제강점기 그가 작곡한 "순례자"(巡禮者)는 일본 콜럼비아음반에 전하고, 그가 작곡한 "옵바(오빠)생각"·"오뚝이"는 일본 빅타음반에 전한다. 1939년 가곡집 『물새 발자욱』을 발간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오라토리오합창단을 창설하여 1973년까지 이끌었다. 1947년 30곡을 실은 『박태준 동요곡집』을 발간했다. 1946년 경성여의전(京城女醫專) 교수를 거쳐 1948년 연세대로 옮겨 1974년까지 26년간 교수로 있었다. 1952년 미국 우스터대학에서 명예음악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55년 연세대 종교음악과를 창설했다. 1957년 12월 17일 연세대음악회가 시공관에서 열렸을 때 출연했고, 1964년 음악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초대학장이 되었다. 1960년부터 1968년까지 한국음악협회(韓國音樂協會) 이사장, 예술원(藝術院)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62년 예술원회원과 연세대 교수를 지냈으며, 1969년 제1회 서울음악제 때 가곡 "연못가에서"·"너는 돋는 해"·"아침해"·"바다는"을 발표하였다. 1971년 제3회 서울음악제 때 가곡 "집 생각"을 출품했다. 1972년 12월 11일 오라토리오합창단 창립27주년기념 연주회를 개최했으며, 11월 21일 한국성가작곡가협회의 제5회 한국신작성가작곡발표회 때 출품하였다. 제6회 서울시 음악문화상(1957)·제6회 예술원 음악공로상(1960)·대통령상 문화훈장(1962)·국민훈장 무궁화장(1970)을 받았고, 1982년 MBC에서 제정한 제2회 가곡공로상을 수상하였다. 1983년 제7회 월남상(月南賞)을 수상했고, 1984년 한국아동음악 공로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 가곡 "미풍"(1922)·"집생각"(1970), 동요 "가을밤"(1920), 성가 "부활"(1935) 등이 있다. 현재도 애창되는 창작동요는 "가을밤"(윤복진 작사)·"고향하늘"(윤복진 작사)·"누나야 보슬보슬 봄비 내린다"(윤복진 작사)·"등대"(윤복진 작사)·"말 탄 놈도 꺼떡 소 탄 놈도 꺼떡"(윤복진 작사)·"스무하루 밤"(윤복진 작사)·"오빠 생각"(최순애 작사)·"종달새"(윤복진 작사) 등이 있다.
[참고문헌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 381~83쪽]
◆ 박태준 (朴泰俊, 1900년 11월 22일 ~ 1986년 10월 20일)
개화기 동요 작곡가이다. 본관은 밀양이고 종교는 장로교(통합)이다.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시 중구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터스컬럼 대학교와 웨스트민스터 대학교 음대 및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귀국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연세대학교 종교 음악과를 창설하였으며, 많은 작곡을 하여 한국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예술원 음악공로상과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1964년 연세대학교 음대 학장을 지냈다. 동요작품으로 <오빠 생각>, <고향 생각>, <사우 思友> 등 150여곡이 있고, 동요곡집으로<중중 때때중>, 가곡집으로 <박태준 가곡집> 등이 있다. <위키백과>
고향 하늘 - 리기복 노래(북한가수)
고향하늘(故郷の空)
https://www.youtube.com/watch?v=nYijPsPJELI&t=11s
1927年大邱で作られたこの童謡は、1930年には既に日本に住む人達の中で歌われてたと伝えられています。故郷を追われた幼き人達の情緒を真実に反映した歌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