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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저자는 이제 믿음의 분량에 따른 각 신자의 직분의 한계에 관해 신자들의 소명과 관련시켜 말하려고 한다. 본문이 기록될 당시나 고대에서 인체의 비유는 자주 쓰이는 표현으로서 바울 서신에 종종 나온다(고전 12:12;엡 1:22;4:16).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
모든 지체는 곧 많은 지체이다. '같은 직분'의 '직분'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랖시스'는 '행함', '활동', '기능' 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마 16:27에서는 '행함'으로 나온다. '직분을 갖다'라는 말은 6절에 나오는 '은사를 받다'라는 표현과 같다. 모든 지체는 특별한 기능들과 다양한 능력들을 지녔다.
곧 3절에 나오는 바, 각 사람들의 받은 바 '분량'들이 모두 다른것이다(엡 4:7). 이는 자신에게 할당된 기능의 한계를 인식하게 하며 한 몸에 있는 많은 지체들의 독특성을 인정하게 하는 문구이다.
[롬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이와 같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는 '이리하여', '이런 식으로'를 의미하는데 4절에 나오는 '카다페르'와 함께 '이와 같이'의 뜻을 나타낸다. 앞절에서 예를 든 것처럼 인간의 유기적 조직을 통해 신자 각 사람에게 할당된 기능의 필요성과 한계를 인식시키려는 것이다.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 '한 몸'이라는 표현은 통일성을 가리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우리'는 신자들의 공동체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룬다). '많은 사람'을 나타내는 헬라어 '호이 폴로이'는 셈어투의 형태로 3절에 나오는 '너희 중 각 사람'과 같은 의미이다. '한 몸'이란 인간의 혈통으로나 사람의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연합의 기반을 이루시고 믿는 자들이 믿음으로 그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연결된 그의 몸된 유기체는 오직 교회이다.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데 칼 헤이스 알렐론 멜레'에서 '칼헤이스'(주격)는 부사로 사용되어 '개인적으로', '하나씩', '각각'으로 해석된다. 이런 표현은 막 14:19;요 8:9;고전 14:31;엡 5:33에 나오는 것으로서 각각의 성도가 교회 전체와 서로 관계를 가지므로 각 지체는 다른 모든 지체들에게 속한다는 뜻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러므로 이는 특히 교회론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본문으로 보기도 한다. 즉,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 없는 연합을 생각할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다라서 4, 5절의 내용을 종합하여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 몸의 통일성, (2) 각 지체들의 다양성과 이에 상응하는 기능의 다양성, (3) 여러 지체들의 상호성이다. 이처럼 사람의 몸에 나타난 유기적인 원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성도들의 사회, 거룩한 공동체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가르친다. 이는 성도들 사이에서 존재할 수 있는 개인주의적인 정신을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다.
[롬 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이제 앞서 말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봉사를 위해 쓰일 수 있도록 적용시킨다. 즉 각 지체의 기능에 관해 말한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 본 구절은 은사의 근거가 되는데, 어느 누구도 자기의 받은 바 은사에 대해 자만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은혜대로'(카타 텐카린)를 문자대로 번역하면 '은혜에 따라'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선물을 나눠 주시는 원리가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 안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은사들이 주어지는 것은 각각 다른 기능과 직분을 유기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이다.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 '받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콘테스'는 '가지고 있는', '소유하고 있는'이라는 뜻으로 은혜로 받은 것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은사'는 그 은혜가 구체적으로 몸의 지체들에게 반영되어 실제 행함으로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각각 다르니' 즉 '은사가 다르다'는 것은 5절에 나오는 '서로 지체'라는 말을 더 자연스럽게 이끈다. 신자들이 각각의 은사들을 받은 것은 이 은사들이 개별적으로 주어진 목적대로 사용되기 위해서 이다.
교회에서의 특별한 직분이나 기능들은 서열(序列)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은사의 다양함과 그에 따른 능력들을 나타낸다. 혹 예언이면 - 예언을 나타내는 헬라어 '프로페테이안'의 동사 '프로페튜오'는 '예언하다', '미리 말하다'의 뜻을 가졌다. '예언'은 주로 선지자들에 의해 행해졌는데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기관이었고 계시의 내용은 여호와의 말씀 바로 그것이었다
한편 성경의 기록이 끝난 시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완성되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사도들에게서 완성되었으며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완성된 이후에는 새로운 계시를 위한 예언자도 필요없게 되었다. 신약 시대에 와서 예언은 경고와 권면, 교훈과 판단, 그 마음의 비밀을 나타내며, 영감을 받아 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 기능을 가진자 중에는 여자도 있다. 예언을 시험하거나 고려해 봐야 할 때에는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와 그 척도를 두어야하며 이에서 벗어나면 무가치한 것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말씀 계시 이상의 예언은 없다. 즉 여기서의 예언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여 백성을 가르치는 설교나 말씀 선포등과 연관되는 직분으로 본다.
이 예언하는 직분이 다른 곳에서도 사도직에 이어 곧바로 나오는 이유는 이런 중요성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나 선지자들이 교회에서 우선권을 갖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외의 은사들은 그 중요도에 있어서 특별하게 우선권을 갖지는 않았다. 믿음의 분수대로 - '분수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카타 텐 아날로기안'인데 '아날로기아'는 수학 용어로 '바른 관계' 혹은 '조화, 비례'라는 뜻을 가졌다. 따라서 '칼 아날로기안'은 '적당하게', '..
.에 비례하여'라는 의미가 있다. 어쨌든 본 구절은 예 시행될 때 염두에 두어야 하는 증거가 있어야 함을 보여주는데 혹자는 '아날로기아'를 '유비'라고 직역하여 본절의 '믿음', '교회가 객관적으로 가지고 있는 계시 체계로서의 믿음이나 규범'을 의미한다고 했다. 따라서 이에 의하면 '믿음의 분수대로'는 하나님께 받은 바 은혜대로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정해놓은 규범에 따라 예언을 해야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본문의 '믿음'은 객관적 규범이나 교리의 믿음을 나타내는 일반적 의미의 믿음이 아니다. '믿음의 분수대로'는 3절의 '믿음의 분량대로'를 나타내는 헬라어 '메트론 피스테오스'와 6절의 '은혜대로'를 표현한 헬라어 '카타 텐 카린'과 병형구로 그 뜻하는 바가 같다
[롬 12: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섬기는 일이면 - '섬기는 일'은 매우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용어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한 가지로 정하기는 어렵다. 이의 헬라어 '디아코니아'는 종종 비신자에게 말씀을 전하는 직분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 구절의 '섬기는 일'은 그 행사에 있어서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필요한 '집사의 직분' '디아코니아'를 이러한 의미로 사용하지 않은 것은 의미 심장함에 제한된 것 같다.
그러므로 이 은사가 예언과 가르침 사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섬기는 일'이란 신자의 물질적 요구를 관장하는 보다 좁은 의미의 봉사를 뜻하는 것 같다. 영역 성경 NEB와 JB는 그 낱말을 '관리' 말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궁핍한 자를 돕는 일이 감독, 특히 집사의 직분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해 준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성도의 곤경을 도와 줄 수 있는 여러 직분에 종사할 수 있었다. 섬기는 일로 - 이는 '믿음의 분수대로'의 원리에 적용하여 실제적으로 섬김의 은사를 받은 자들은 마음을 다하여 그 직분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혹은 바른 섬김을 하며 전적으로 그것에 종사하거나 실제로 섬김을 실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가르치는 자 - 이에 예언하는 것과 구별되며 섬기는 것과도 다르다. 예언은 계시와 관계되어 있는 반면에 가르침은 지식과 관련하여 지혜와 지식의 말씀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을 조화롭게 나타내는 것이다. 즉 진리의 말씀으로 교회를 형성케 하고 훈계를 통해) 신자들의 삶에 도움을 주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가르침이다.
본서의 구조 자체도 그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즉 진리의 해석인 교리 교육을 기초로 하여(1-11장) 성도들의 실제적인 삶을(12-16장)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에서 바울은 구약성경을 상당히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초대 교회 교사들이 '가르치는 일'을 함에 있어서 구약성경에 크게 의존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가르치는 일로 -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섬길 것을 의미하여 아울러 6절에서 제시한대로 자기 '믿음의 분수대로' 그 임무를 수행하는데 힘써야 한다는 원리를 다시 언급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사사로이 풀거나 억지로 해석하지 말며 성령의 도움을 받아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롬 12: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권위(權慰)하는 자 - '권위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레오'는 '권면하다'(고전 4:16;16:12;고후 10:1;12:18), '요청하다', '위로하다'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과 명백하게 다른 말로서 문맥을 살펴볼 때 형제를 위로하고 권면한다는 뜻이 지배적이다. '가르치는 자'는 복음 진리를 선포하는 반면 '권위하는 자'는 진리를 들은 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 속에서 복음에 순종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마음과 의지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권위하는 일로 - 권위하는 자는 권위 받을 일을 당한 자의 상황을 지혜롭게 파악하고 권위하는 일에 대한 책임감과 소명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해야 한다 구제하는 자 - 구제에 대해서는 (1) 자신의 소유를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재물을 공적으로 재분배하는 것이라고도 하며, 공적인 재산이 아닌 개인의 재산을 나눠주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떤 형식을 취해 구제를 하느냐를 따지지 않고 다만 구제의 원리를 따라, 즉 성실함으로 하는 것의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개인적 구제와 공적인 구제를 다같이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실함으로 - '성실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플로테티'는 '단순함', '순전함', '섞이지 않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실함'은 감추어진 목적이나 뜻이 없는 순수한 마음을 말하며 동시에 관대한 마음으로 후히 주는 것을 일컫는다. 새번역, 공동번역, 표준신약전서는 '순수한 마음'으로,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후하게'로 번역했다. 또한 영역 성경 흠정역은 '순수함으로', RSV, NASB는 '관대하게', NEB는 '마음을 다해'로 번역했다.
다스리는 자 - '다스리는'의 헬라어 '프로이스테미'는 '선두에 서다', '통치하다', '지도하다'의 뜻이 있다. 이는 성경에서 주로 교회에서 다스리는 것과 가정에서 다스리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된 어휘이다. 그래서 혹자는 '다스리는 자'를 '감독과 장로'로 보기도 하며 혹자는 이보다 더 넓은 의미로 보기도 한다
여기서는 문맥을 볼 때 교회에서 교인들을 지도하고 통솔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에 대한 표현이다. 부지런함으로 - '부지런함'을 나타내는 헬라어 '스푸데'는 '부지런함', '간절함' '급히', '빨리' 등으로 번역되었고, 대체로 '종교적인 열심'을 뜻한다 '다스리는 자'는 맡겨진 일에 열의를 가지고 세월을 아끼며 충성해야 한다
바울은 부지런함을 잘 실행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주신 직분을 확신하여 열심을 품고 복음을 전파했으며 충성을 다했다. 사도가 여기서 '다스리는 자'의 은사를 받은 자에게 '부지런함으로'라는 단서를 첨가한 것은 다스리는 직무를 봉사의 수단으로 활용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내세우는 방편으로 사용하는 경향을 경계하면서 근면에게 직무 수행에 임할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긍휼을 베푸는 자 - '긍휼을 베푸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레에오'가 인간이 베푼 자비를 나타낸 경우는 바울 서신 중 본문에만 유일하다. 다른 곳에서는 모두 하나님의 자비를 가리킨다. 본절의 '긍휼'은 일반적 의미의 '긍휼'이다. 즉 병든 자와 환난 중에 있는 자, 무력한 자, 노인들을 돌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 단락이 성도가 하나님께 받은 은사와 그 은사의 바른 사용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거룩하게 세우는 일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즐거움으로 - 고통받는 곳에 도움을 주며 즐거워 하라는 것이다. 어두운 곳에 즐거움으로 나아가는 그들은 위로와 용기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궂은 일이란 마지 못하여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소극적인 자세가 아닌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자세로 직무를 수행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즐거움으로 긍휼을 베풀라는 말씀은 신자들의 공동체가 한 몸인 것을 강하게 부각시킨 말이다. '성실함으로', '부지런함으로', '즐거움으로'는 하나님께 받은 은사들을 가지고 남을 섬길 때 취해야 할 마음 자세와 그 태도를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