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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종교
진실
에고의 팽창
에고의 해체
05. 과학과 종교 : 진실수준
들어가며
과학과 종교의 갈등은
미국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이며,
심지어 지난 수십년간
사법계의 정점이었다.
가령 1930년대 우생학 논쟁과 그와 유사하게 벌어지는 오늘날의 줄기세포나 다윈 이론을 둘러싼 갈등도 여전하다. 이러한 이슈의 다양한 요소에 의식연구를 적용하면 그 본질에 대한 귀중한 분류작업을 할 수 있다.
우생학(優生學)은 종의 개량을 목적으로 인간의 선발육종을 찬성하는 생각이다. 인류를 유전학적으로 개량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여러 가지 조건과 인자 등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1883년 영국의 프랜시스 골턴이 처음으로 창시
본질적으로
비개인적인 의식수준은(비선형적 역학장에서)
에너지 끌개장으로 불렀던
바로 그것이다.
끌개장은
모든 생명의 무한하고
비선형적인 에너지 근원을 지배하고
표출한다.
연구 조사의 편의상, 분류와 설명의 목적에 맞게 의식수준은 여러 일반적 범주로 나뉜다.
앞에서 보았듯이
진실의 중요한 분기점은
의식수준 200이다.
300대는 긍정적 영향을 나타내고,
400대는 논리와 이성, 그리고 화학, 의학, 물리학, 천문학, 수학, 천체물리학 등
일반적 과학영역 일반을 나타낸다.
또한 지난 수세기 동안 위대한 과학천재들과 브리태니커 "서양의 위대한 고전" 저자들도 400대 상위에서 측정된다. 단 여기서 마르크스 엥겔스는 예외에 속한다. 편의상 그 내용을 "진실대 거짓"에서 가져와 여기 다시 수록한다.
서양의 위대한 책들에 대한 측정치
J.S. 밀 465 | 라부아지에 425 | 밀턴 470 |
갈렌 450 | 라블레 435 | 버클리 470 |
갈릴레오 485 | 로크 470 | 베르길리우스 445 |
괴테 465 | 루소 465 | 보즈웰 460 |
기번 445 | 루크레티우스 420 | 세르반테스 430 |
길버트 450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445 | 셰익스피어 465 |
뉴턴 499 | 소포클레스 465 | |
니코마코스 435 | 마르크스 130 | 스위프트 445 |
다윈 450 | 마키아벨리 440 | 스턴 430 |
단테 505 | 멜빌 460 | 스피노자 480 |
데카르트 490 | 몽테뉴 440 | 아담 스미스 455 |
도스토예프스키 465 | 몽테스키외 435 | 아르키메데스 455 |
아리스토포네스 445 | 케플러 470 | 플라톤 485 |
아리스토텔레스 498 | 코페르니쿠스 455 | 플로티누스 503 |
아우구스티누스 503 | 타키투스 420 | 플루타크 460 |
아폴로니우스 420 | 토마스 아퀴나스 460 | 필딩 440 |
에우리피데스 470 | 톨스토이 420 | 하비 470 |
에픽테토스 430 | 파스칼 465 | 헤로도투스 440 |
아이스킬로스 425 | 투키디데스 420 | 헤겔 470 |
엥겔스 200 | 패러데이 415 | 호머 455 |
윌리엄 제임스 490 | 푸리에 405 | 호이헨스 465 |
유클리드 440 | 프란시스 베이컨 485 | 홉스 435 |
초서 480 | 프로이트 499 | 흄 445 |
칸트 460 | 프톨레마이오스 435 | 히포크라테스 485 |
의식수준이
400대로 측정되는 것은
선형적 영역에 대해 신뢰할 만하고,
진실하며, 확인 가능한 지성적 해석을 표출한다.
이것은
인간지성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담고 있다.
이것은
이성, 논리, 선형적 실재의
패러다임이다.
이성, 논리, 선형적 논리는
인간 지성과 이해에 있어서
과학적/합리적/논리적 패러다임의 특성이다.
이 영역에서는
논리의 규칙과 변증법이 적용되며
칸트의 추상화 범주도 적용된다.
의식수준 400대의 특성은 다음에 나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들의 측정도표에서 다시금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닐스보어 | 450 | 에드워드 제너 | 450 |
데이비드 봄 | 505 | 에른스트 마흐 | 460 |
로드 캘빈 | 450 | 요하네스 케플러 | 465 |
루서 버뱅크 | 450 | 이그나즈 젬멜바이스 | 460 |
루이 파스퇴르 | 465 | 제임스 맥스웰 | 460 |
루이지 길바니 | 450 | 지그문트 프로이트 | 499 |
리처드 버드 | 420 | 찰스 스타인메츠 | 460 |
막스 플랑크 | 460 | 클로드 베르나르 | 460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 460 | 토마스 멜서스 | 480 |
스티븐 호킹 | 499 | 토마스 에디슨 | 490 |
아서 에딩턴 | 460 | 토마스 헉슬리 | 460 |
아이작 뉴턴 | 499 | 프리드리히 케쿨레 | 440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499 |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뎅 | 450 |
알렉산더 플레밍 | 460 | 헤르만 폴 헬름홀츠 | 460 |
앙리 푸엥카레 | 430 |
과학은
그 자체 선형적 패러다임안에서
타당하다.
이는 수세기 동안
여러 과학자들의 측정수준을
문서화함으로써 밝혀졌다.
과학자들의 진실수준을 확인하는 성과와 더불어,
과학이론 자체의 측정을 통해
이성, 논리의 타당성 정도와
400대의 선형적 실재의 패러다임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스콥스 재판에서 클래런스 대로의 입장의 기본은 확고하지만 한정된 것이었다. 이는 앞선 장에서 논의한 바 있다.
DNA이중나선 이론 | 460 | 드레이크 방정식 | 350 |
E=MC2 | 455 | 디렉 방정식 | 455 |
M이론 | 460 | 마음장들은 신성과 얽혀있다 | 진실 |
S매트릭스 이론 | 455 | 마음장들은 다른 마음들과 얽혀있다 | 거짓 |
2004 개정 블랙홀이론(호킹) | 455 | ||
공룡멸종이론 | 200 | ||
구두끈 이론 | 455 | 미국 우주계획 | 400 |
기도는 치유를 증진시킨다 | 진실 | 비선형 동역학 | 460 |
끌개장 | 460 | 생체장 | 460 |
뉴턴식 인과율 | 460 | 소립자 물리학 | 455 |
다수의 우주 | 진실 | 슈뢰딩거 방정식 | 455 |
다윈의 진화론 | 450 | 신 유전자 | 거짓 |
양자 결맞음 | 460 | 지구온난화의 원인은 태양자기의 표면사이클이다 | 455 |
양자 상태의 공간이동 | 400 | 지성적 설계 | 480 |
양자 얽힘(양자이론) | 거짓 | 집단무의식 | 455 |
양자역학 | 460 | 줄기세포 연구 | 245 |
양자 중력 | 460 | 카오스 이론 | 455 |
염동력 telekinesis | 진실 | 특이점 | 455 |
영적체험은 뉴런활동의 귀결이다 | 125 | 틀끌림 | 460 |
온실가스가 지구온난화를 일으킨다는 이론 | 거짓 | 평행 우주론 | 거짓 |
우주의 근원이 빅뱅이라는 이론 | 거짓 | 폰 노이먼 과정 | 450 |
원격치유 | 거짓 | 핵분열이론 | 455 |
의식이 뉴런활동의 귀결이라는 이론 | 140 | 형태 발생장(셀드레이크) | 460 |
의식측정 | 605 | 홀로그램 우주 | 395 |
지구자기장은 약화되고 있다 | 진실 | 화성표면에 물이 있다 | 진실 |
지구의 자기축은 서서히 역전되고 있다 | 460 | 화성 표면의 미생물 | 진실 |
지구 온난화의 원인은 오염이다 | 거짓 | 화성표면에 유기체가 있다 | 진실 |
우주의 근원은 신성이다 | 무한 | 호르메시스 | 180 |
최근에 산타크루즈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흥미로운 보고서 하나가 나왔다. 성경에 기록된 홍수와 기타 종교적 역사들이 기원전 2807년에 일어났으며, 이는 당시 인도양에 떨어진 거대한 혜성때문이라고 한다.(이 점은 진실로 측정되었다).
과학이
인간문명에 기여한 바는
확실히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현대 생활의 모든 양상에
그 손길이 미치고 있다.
사실 클래런스 대로의 이성과 논리에 대한 신념도 증명가능한 실재위에서 세워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오류는 종교가 과학적 실재와 동일한 패러다임에 속하며, 그렇기 때문에 논리 정연한 과학적 증명과 동일한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순진하게 추정한 것이었다. 따라서 클래런스 대로는 "더이상 다른 건 없다"는 패러다임 맹목을 대표한다.
패러다임 맹목은
세속주의(의식수준 165)나
회의적 과학주의(의식수준 190)의 정치적 관점으로
사회에 널리 퍼져 있으며,
단조로운 환원론적 물질주의로 한정되는
낮은 정신의 산물이다.
과학대 신앙논쟁은
타임의 주요기사에 기술되고
대중적 논쟁이 반복되는 등
수그러들 기미가 없다.
클래런스 대로의 입장은 이제 무신론자를 자인한 "만들어진 신"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의 논증으로 주장된다. 그 책은 의식측정수준 190이다. 종교 제일주의적 입장은 프랜시스 콜린스에서 나타난다. 콜린스는 미국국립 인간 게놈 연구소의 소장이자 "신의 언어 : 과학자가 믿음의 증거를 제시하다"의 저자다. 이 책의 의식수준은 400으로 측정된다.
다윈의 진화론은
의식수준 450,
지적 창조설계론은 480,
창조론은 245,
창세기는 600을 측정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생명의 근원으로서
신성과 우주는
무한대 수준으로 측정되며
역사상 위대한 현자들은 1000으로 측정된다.
그러므로 위에 반복된 모든 담론으로부터 명백한 결론이 나온다. 물론 현재 이 책을 통해 계속 진술되고 있는 바로 그 사실이다. 비선형적 영역은 환원론자의 선형적 지성수준의 선형적 패러다임으로는 결코 입증할 수도, 논쟁할 수도 없다.
선형적 영역은
메커니즘만 기술하고
맥락을 무시한다.
모든 과학적 관점은
데카르트의 사유실체 혹은
외관(지각)을 나타내며,
반면 영적 실재는 외부실체 혹은
본질(실재)를 나타낸다.
신성을
생명과 창조의 근원으로서 깨닫는 일은
측정수준 600에서 나타나며,
그 깨달음 자체는
상당히 주관적이며
자아의 정신작용을 넘어선다.
그 수준은
의식의 장 덕분에 경험하게 되며,
여기에 이르면
모든 생각자체가 없어진다.
격렬한 논쟁으로 나타나는 진실의 한계, 그 조짐은 그것을 감정본위로 설득하려는 시도에서 잘 드러난다. (가령 과학자들은 종교와 믿음에 부여된 그 어떤 신빙성에 대해서도 격분한다). 진짜 진실한 진실추구는 논쟁이나 감정이라는 특질을 갖고 있지 않다.
진실은
강압이나 홍보성 전도를 통해
드러나지 않는다.
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연구자(질문자)가 지닌 의도의 순수성과
의식수준의 결과로 발생한다.
마르코폴로의 동방 발견은 회의론자들에게 조롱을 받았지만 객관적인 의식 연구자에게는 잠정적이며 가치있는 조사로 받아들여졌다.
개종은
에고가 지닌
허영심의 표출이다.
에고는
동의나 지배를 통해
지위를 얻으려 한다.
진실은
그 자체안에서 완벽하고 총체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요구가 없다.
예를들면 E=mc2의 경우 개인의 견해는 필요하지 않으며, 아인슈타인의 사생활에 적대적인 태도로 인신공격을 할 필요도 없는, 하나의 사실이다. 회의론적 공격은 대개 질투가 깔린 반감의 표출에 불과하며, 시기하는 것은 영혼이 인색하다는 표시다.
인색한 영혼은
위대함 앞에서
스스로 초라하다고 느낀다.
따라서 닥터 수스의 그린치는 크리스마스를 싫어하며 무신론자의 에고는 은밀하게 신의 무한한 은총을 증오한다. 궁색한 방식으로 에고는 절대성을 부정하려고 애쓴다. 그 절대성을 통해 신격의 잠재성에서 나온 모든 창조의 에너지는 결코 끝나지 않는 창조의 현시로 나타난다.
진화심리학(의식수준 210)은 대니얼 데네트의 연구논문과 저서(의식수준 250)에서 밝힌 것처럼, 인지기제를 통하여 다른 이론을 뒷받침한다. 이런 주장들은 훨씬 더 높은 차원에 있는 실재를 이해하려는 인지(인식)의 자체적인 노력을 나타낸다.
대니얼 대닛 ; 미국의 철학자이자 무신론자로 1942년 3월 28일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교의 철학과를 거쳐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철학자이지만 과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과학철학(그중 생물철학)과 인지과학분야에서 유명하다. 미국 터프츠 대학의 인지연구소에서 장대익 교수를 가르치기도 했다. 콰인으로부터 교수지도를 받았으며, 그의 인식론, 의미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비트겐슈타인을 자신의 대학 시절의 영웅이라 여겼으나, 진화론이나 뇌과학에 대한 무지로부터 벗어나고자 이후에 터프츠 대학교에서 과학자들과 함께 독자적인 연구를 이어나가게 된다. 이후 터프츠 대학의 인지연구센터 소장과 철학교수를 겸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들은
의식의 선형적 내용과
의식자체의 비선형적 장을 혼동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구를 우주와 혼동하거나
구름을 하늘과 혼동하는 것과 같다.
(의식수준 165로 측정되는)
무신론은
지금 학계에서 인기가 많고,
매우 정통하며,
유행의 첨단을 달리며, 멋지고 세련된,
현대적 상식이 되고 있다.
이제 신은
구닥다리
고루한 존재일 뿐이다.
절대주의와 실재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엘레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든 관점은 똑같이 타당하다는 상대주의 나르시즘적 위치성에 의해 조롱받는다. 사실상 상대주의는 아이들의 강팍하고 에고중심적이며 소망 충족적인 사고와 판타지를 나타낸다. (가령, 그게 바로 내가 말하고 있는 거라고!와 같은 말이다).
세부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환원론자의 소위 상향식 논법은 단순한 사람들에게 대단히 박학다식해 보이지만, 교육받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단조롭고 평범하게 들린다. 진실로 자유로운 교육을 받은 사람의 정신은 서구 문명의 위대한 고전이 안겨 준 박학다식함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서구 문명의 고전은 사고의 추상화와 범주화 수준을 분명하게 규정한다.
일반적으로
더 위대한 존재가
더 미약한 존재에 의해서 부정당할 수는 없다.
이 말을
의식수준으로 바꿔놓으면,
200이하 사람들은
더 높은 수준의 패러다임을 이해할 수 없다.
그와 유사한 예로
산수, 기하학, 삼각법, 차등방정식,
양자역학 등이 있다.
한마디로 수준이 다르다. 따라서 기계적 환원론(185로 측정되는)은 자신이 부인하고자 하는 그 영역에 도달하지 못한다. 심지어 인과론 자체도 오직 400대 중반 측정수준과 관련이 있다.
창조, 신성, 영적진실의 실재는
600으로부터 그 이상으로 측정되므로
190-250수준의 위치에서는
아예 반박할 수가 없다.
이런 진실하지 못한 편견은
창조론에 분노하고,
혼란스러워하고, 격분한
최근 반종교주의자들의 표현에서 드러난다.
이와 반대로
진실을 추구하는 참된 사람은
객관적이고 하나의 입장을 고수하지 않으며
확증 가능한 확실성에 관심을 둔다.
이 확실성이란
감정이 아니라
경험에 기초한
확인을 뜻한다.
(의식수준 190으로 측정되는)
에고의 허영은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다는
과대망상속에서
끝을 모르고 자만심을 부린다.
지각은
선형적 상징, 정신 작용의 제한적 내용에 갇힌
언어적 추측에 불과하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실체가 있는 객관적 실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순전히 주관적 가정일 뿐이다.
언어는
기껏해야 묘사적 외양에 불과하며
본질과 똑같은 범주에 들어있지도 않다.
경험은
상징과 다른 수준에 있다.
이 때문에 오페라나 교항곡의 악보는
미학적 즐거움을 창조하지 않고,
오직 음악만이 즐거움을 낳는다.
음악은
음악적 상징을 써넣은 악보와 다른,
더 높은 패러다임 수준에 있기 때문이다.
정신은
신성을 대체하기 위해
왜 그처럼 용맹하게 투쟁하는 것일까?
정신은
자신이 아닌 여타 다른
자율 통제권을
정말로 부인하고 남몰래 증오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나르시시즘의
자기 영속적인 핵심이다.
정신은
우주에 대한 견해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우주나 생명은 물론이고
하물며 의식조차 창조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결정된
창세기(무한대로 측정된 서술)에 따른
창조의 빛이었다.
신을 비평하는 자는
그 빛(하느님) 자체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 빛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정신작용의 한정된 영역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400대 의식수준에 의해서 재현된
실재의 객관적인 선형적 패러다임과는 반대로,
비선형적 영적 실재는
400대에서 표현되기 시작하여
그 다음 500(사랑) 수준에서
우세하며,
최대 1000까지 올라간다.
의식수준 1000은
인간의 영역에서 가능한
에너지의 최대치다.
전세계 종교, 영적스승들,
그리고 그 교리 도표는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그 패러다임에서
지배적 실재는
객관적이고 증명가능하기 보다는
오히려 주관적이며 경험적이다.
객관적이고 증명가능한 실재는
400대 수준의 한계로
특징지어진다.
다음은 편의상 진실대 거짓에서 수록한 것이다.
영적 스승들
C, W. 리드비터 | 485 | 람첸 갈포 린포체 | 460 |
G 맨리 홀 | 485 | 로렌스 수사 | 575 |
가덴 샤르체 | 470 | 로버트 먼로 | 485 |
간테 풀쿠 린포체 | 499 | 로버트 파웰 | 525 |
강가지 | 475 | 루돌프 슈타이너 | 475 |
공자 | 590 | 로돌프 오토 | 485 |
고피 크리슈나 | 545 | 루드비히 폰 버타란피 | 485 |
그라나다의 모세스, 랍비 | 720 | 루미 | 550 |
나낙 | 495 | 리 사넬라 | 505 |
노자 | 610 | 리처드 M, 버크 | 505 |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 720 | 마더 테레사 | 710 |
달라이라마(텐진 갸초) | 570 | 마르틴 루터 | 580 |
도겐 선사 | 740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705 |
드룩첸 린포체 | 495 | 마하가섭 | 695 |
딜고 키엔체 린포체 | 575 | 마하트마 간디 | 760 |
떼야르 드 샤르뎅 | 500 | 라헨드라나스 굽타 | 505 |
랃하마칼 무케르지 | 475 | 막데부르크의 메히틸트 | 640 |
라마나 마하르시 | 720 | 머틀 필모어 | 505 |
라마크리슈나 | 620 | 묵타난다 | 655 |
라메쉬 발세카 | 760 | 바가반 니티아난다 | 500 |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 475 | 백색 형제단 | 560 |
람 찬드라 | 540 | 보리달마 | 795 |
비베키난다 | 610 | 앨렌 워츠 | 485 |
산카라 | 710 | 어네스트 홈스 | 485 |
성 어거스틴 | 550 | 에라스무스 | 500 |
성 패트릭 | 590 | 에릭 버터워스 | 495 |
소크라테스 | 540 | 에마 커티스 홉킨스 | 485 |
소태산 박중빈 | 510 | 에메트 팍스 | 470 |
쉬르디 사이바바 | 485 | 에벌린 언더힐 | 460 |
스리 라마누자 차리아 | 530 | 엠마누엘 스웨덴보그 | 480 |
스리 오로빈도 | 605 | 오리게네스 | 515 |
스리 유크라테스와르 | 535 | 올더스 헉슬리 | 485 |
스와미 람다스 | 570 | 요한 바오로 2세(교황 | 570 |
스와미 붓다난다 | 485 | 요한 칼빈 580 | 580 |
스와미 사치다난다 | 605 | 요한타울러 | 640 |
스와미 프리바난다 | 550 | 윌러스 블랙엘크 | 499 |
스와미 프레즈네파드 | 505 | 잠양 칸챠 | 495 |
스즈키 로쉬선사 | 565 | 장자 | 595 |
십자가의 성 요한 | 605 | 제아콥 봄 | 500 |
아레오파고의의 디오니시우스 | 490 | 제임스 앨런 | 505 |
아비나 굽타 | 655 | 조셉 스미스 | 510 |
아빌라의 성 테레사 | 715 | 조엘 골드스미스 | 480 |
아차리야 | 480 | 족첸 린포체 | 510 |
애니 베전트 530 | 530 | 진클라인 | 510 |
충량 알 황 | 485 | 파탄잘리 | 715 |
카르마파 | 630 | 찰스 필모어 | 515 |
켐포푼촉 | 510 | 폴 틸리히 | 480 |
쿠숨 린파 | 475 | 푼자지 | 520 |
크로디오나란조 | 465 | 플로티누스 | 730 |
텐진 팔모 | 510 | 피오 신부 | 585 |
토머스 머튼 | 515 | 아쿠유 타이잔 마에즈미 | 505 |
파드마 삼바바 | 595 | 화이트 플럼 아상가 | 505 |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 540 | 황벽선사 | 960 |
흥미롭게도 스콥스 재판자체는 인위적으로 어떻게든 만들어낸 것이지만, 재판의 주요 참가자들은 각자의 위치성을 진정으로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의 발표는 의식수준 505, 클래런스 대로의 변호는 450으로 측정된다. 이렇듯 각자 서로 다른 실재의 패러다임을 대변했기 때문에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성적 측면에서 볼때, 클래런스 대로는 세속주의자인 반면 브라이언은 종교적이고 영적 신념을 갖춘 인물이었다.
의식수준 400대의 과학 패러다임과
500대 이상의
영적신앙과 종교적 실재 패러다임을 대조시키면,
자체 수준안에서는
그 이슈가 해결될 수 없다.
그 둘이
서로 다른 실재의 패러다임을 담은 관점을
대변한다는 인식을
명백하게 해야만
비로소 해결가능하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상자안에 존재한다"
선형적 세계는
잠정적이며,
특정한 환경에 국한되고
논리적이고 입증가능하고 객관적이다.
비선형적 세계는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주관적이고, 경험적이며, 제약이 없고,
입증이 불가능하며, 맥락의 의거한다.
의식수준 200이하는
사실상 파괴적이지만
400대 수준은 건설적이다.
의식수준 500대부터
그 위로는 희망과 영감과
힘을 준다.
따라서
가장 이로운 것은
사랑과 신앙이 결합하고
여기에 이성이 더해지는 조합일 것이다.
그 조합안에서
논리와 이성은
자아와 타자들에게
사랑과 아울러 신성을 제공하는 역할로 도입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좋은 본보기이다).
이 조합의 특징은
연민이다.
이는
인간의 순진함, 한계,
그리고 인간정신의 본질이 지닌
맹목적 무지라는
치명적 약점까지도 감안하고 받아들인다.
인류의 전반적인 의식은 1980년 후반에 와서 겨우 200수준을 넘어섰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인간과 인간의 삶이 처한 난관은 서로 다른 의식수준을 가진 집단이 세상에 함께 내던졌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벌어지는 갈등에 있다.
앞에서도 인용했지만,
이 사실은 기록된 역사중에 93%의 기간동안
인간이 공공연하게 전쟁을 벌여왔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나머지 7%기간은
아마도 흑사병이나 기아 등
다른 재난때문에
잠시 전쟁이 멈추었을 뿐이라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위 분석을 통해
명백하게 알 수 있듯,
우주의 근원과 본질에 대한 설명은
서로 다른 의식수준에서 나온
개념화 과정을 나타낸다.
또한 말 그대로
단순히 길을 지나가는 일반인부터
역사상 위대한 영적스승들이 가르쳐준 깨달음과 계시라는
상위의식수준까지
진보적으로 진화하는
패러다임들도 보여준다.
창조의 내재적 자질은
생명의 유기적 표출에서 보이듯이
진화적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의 근원을
임의로 발생한
화학적 우연한 사건(상향식 이론)으로 고려하든,
아니면 신성의 작용(하향식 이론)으로 간주하든,
둘다 진화적이라는 사실은
수많은 증거기록을 제시할 수 있을만큼
자명한 것이다.
창조라는 용어는
일종의 추상적 작용(추상화)이다.
이 작용은
외부로의 표출, 등장,
복잡성과 효율성을 지니고
점진적으로 진화해 가는 존재를
암시한다.
인간 연구의 모든 분야는
예전부터 진보적이었다.
이와 동시에
우주는 빛의 속도로
무한히 계속 확장하고 있다.
그래서
조금만 생각해보면
진화론과 창조론 사이에는 정말로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둘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동일한 과장이기 때문이다.
(가령 창조는 진화와 마찬가지로 계속 진보적으로 진행중이며, 지속되고, 계속 새롭게 전개되고 발아된다).
클래런스 대로의 주장은 성경 문구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성경문구는 원시적 신화와 전설을 포괄하는데, 이 경우 신화와 전설은 입증가능한 과학적 진술이 아니라 알레고리와 문화적 도덕 가치를 내포한다. 이를 논리와 이성으로 비춰보면 잘못된 것처럼 보이지만, 믿음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로 믿을 수 있다. 사실 창조의 근원으로서 신성을 깨닫는 일이 알레고리로 이루어진 민속설화에 대한 문학적 신념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불교의 진실도 붓다가 실제로 보리수 아래 앉아 있었느냐에 대한 믿음에 좌우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고대 경전이
한데 모이던 시기에는
아직 과학적 타당성이
태동하지 않았다.
이미 드러난 기초적 진실은 사실 문명화된 정신에게, 홍해가 실제로 갈라졌는지, 혹은 요가나 고래 뱃속에 사흘간 들어있었는지와 아무 관련이 없다. 이렇게 기술된 고대 사건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본질을 보이고 인간정신은 바로 그 점에 매혹된다.
순진한 정신은
신화화 외견상 마법적인 것,
그리고 기적적인 사건의 선정성에 끌린다.
정신은
본질을 분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범한 사람들은 기적적인 이야기에 감동한다. 그런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신성한 힘과 현존을 물리적으로 증명하고 확인하는 본보기로 인지되곤 한다.
기적
평범한 사람들은
기적적인 일을 묘사한 것을 보면
크게 감동한다(아니면 오히려 의심스러워 한다).
왜냐하면
그 현상들은
의식수준 570이하에서는
좀처럼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570은
전세계 인구 중에
0.1% 미만의 극소수만이
도달하는 수준이다.
기적적인 사건의 대다수는
평범한 개념적 경험의 범위 바깥에 놓이기 때문에
대개는 인식되지 못하며 심지어 인지될 경우에도
단순히 운이 좋은 우연한 것이라고 간과되기 일쑤다.
이와 반대로 진짜 과학적으로 입증된 기적은 철저한 조사를 거친후 문서상으로 입증된 푸르드에서의 여러 기적과 종교적 성혼이나 죽은 성자들의 시진이 오랫동안 부패되지 않는 현상 등 기타 믿음에 기초한 기적적인 현상처럼 나타난다.
평범한 사람들은
때때로 기적적인 사건을 경험하더라도
실질적인 그 사건의 실재를
이해할 수 있는 적합한 내부맥락을
갖고 있지 않다.
가능성있는 합리적 설명을 하나 들자면,
유명한 정신의 학자 카를 융 박사는
"동시 발생성(synchronic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기적적인 사건의 보고는 중대한 재난 중에 생존한 사람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나오며, TV 날씨채널의 태풍 이야기같은 다큐멘터리에서 1인칭 시점으로 보도되곤 한다. 여기에 나오는 거의 모든 생존자들은 절실하게 기도했거나 토네이도에 떠밀려서도 무한한 평화와 고요(의식수준 600)의 상태로 올라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깊은 믿음과 순종은 기적의 출현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기적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맥락을 제공하기 위해 편의상 "의식수준을 넘어서" 6장에 덧붙여 설명한 내용을 아래에 다시 가져왔다.
영적 현상과 영적인 힘 : 싯디
의식수준 540부터
그 이상에는 이성, 관습적 논리의 개념화,
또는 인과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그런 현상은
영적 에너지(쿤달리니)가
진보적으로 지배하는 상황에서 동반되며
자유의지가 아니라
맥락이라는 장의 결과로서 일어난다.
또한
그런 현상은
목격되고 자체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가리켜 고전 산스크리어로 "싯디"라고 하며,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긴 하지만 외견상 초자연적이거나 기적적/신비로운 힘을 뜻한다.
싯디는
대략 의식수준 540에서 나타나기 시작해
570이 되면 현저해진다.
싯디의 출현 초기단계에서는
의식의 진전처럼
산발적으로 나타나지만
곧 빈번해지고
때로는 계속된다.
싯디는 자율적이며 의도하지 않는 것으로 의지와 무관하게 자발적으로 발생한다. 이런 현상은 천리안, 예지, 신통력, 투청력, 초감각적 지각, 사이코메트리(어떤 물건에 닿거나 다가감으로써 그 소유자에 대한 사정을 꿰뚫어 보는 능력), 동시에 두 지점에 존재하는 능력 등을 비롯해 즉각적 치료와 변형, 기대나 설명을 넘어서는 독특한 심리 조장 등 진짜 기적적인 사건까지 포함한다.
그 능력이나 현상은
개인의 통제안에 있지 않다.
인과관계의 결과도 아니다.
그런 현상이 발생하면, 학생들에게 그것은 당사자의 "나" 혹은 "자아"와 무관하게 발생한 부분이므로 개인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곤 한다. 따라서 앞서 말했듯이 어떤 개인이 기적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기적은 오로지 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정직과 겸손을 갖추고 이익을 쫒아가려는 유혹을 거부하면 영적 에고가 과장되거나 부풀려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개인적 경험에서 볼때,
그 현상은
오랜 기간에 걸쳐 나타나고
더욱 강렬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 다음에
어떤 현상은 사라지는 듯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두드러지지 않지만
나머지 현상은 영구적으로 계속된다.
영적인
쿤달리니 에너지 흐름은
그 자체가 특별하다.
주관적으로 볼때,
그 감각은
등을 타고
뇌 안으로 흐르기 때문에
매우 미묘하다고 기술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심장의 차크라를 통해 나타나고
그러고는 세상속으로
나가버릴 수도 있다.
그 세상속에서
쿤달리니의 존재는
진짜로 경이로운 것들이
눈앞에 펼쳐지도록 촉진한다.
그런 현상은
의도가 없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목격되곤 한다.
그것은 마치
신성의 자질이,
세속의 물리적 세상을 초월한
더 높은 영역을 통해
현시되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전 연구에서
그 유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32년간의 기적도
확실히 실제 현상이었으며
그 기적을
타자들이 관찰했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 기적은 "신 안에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점을
실증하는 사건이며,
예수 그리스도( 의식수준 1000)의
신성한 화신을 입증하고 확인하는
교리수단으로 쓰인
역사적 사례다.
최상급의 영적 신앙인은
수많은 기적이 펼쳐지는 상황을
자주 목격한다.
물론
이때 드러나는 기적은
그 수만큼 극적인 면모는
덜한 편이다.
그와같은 일은
더욱 더 많아지고
횟수도 더 잦아지면서
다른 목격자들의 눈에까지 띄어
확인된다.
그 기적적인 현상은
맥락의 힘에 영향을 받아서
잠재력의 출현이
물리적 현실성으로 나타난다.
(물론 위치적 조건도 호의적일때 가능하다).
기적적인 사건은
의도를 비롯한
비선형적 힘의 영향을 받았다는
현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의 의도는
선형적 잠재력을
활성화시킨다.
(그 예로 하이젠베르크 불확실성의 원리가 있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높은 힘(비선형적 맥락의 장)이
바로 믿음에 바탕을 둔
익명의 알콜 중독자 협회와
기적수업같은 치유그룹에 속한
수백만명의 회복을 촉진시킨 주인공이다.
더불어
성자와 근접한
매우 진화된 신앙인,
루르드 성지와 영적 스승들에게 발생하는
치유능력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이 기적적 치유는
역사를 통틀어
줄곧 보고되었으며
여러사람들이 목격하였을 뿐 아니라
그만큼 많은 문서로 기록되어 있다.
의식측정 연구를 통해
그 기적은
하나의 실재로 확인가능하다.
그러한 현상은
역사적으로
인간의 경험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는
수많은 임사체험(의식수준 625) 보고에서
알수 있다.
임사체험은
종종 극적으로 삶을 바꾸고 탈바꿈 시켰다.
역사가 입증하듯,
벌어진 기적은
심대한 결과를 낳았고,
수천만명의 삶을 바꾸었다.
그뿐만 아니라
훗날 성 바오로가 되는
타르수스의 사울처럼
개종한 속세의 지도자에게
기적이 발생하면서
세계역사를 바꾸기도 했다.
고대 로마는
전통적으로
이교도의 로마신을 경배했다.
그러던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궁중에서 그리스도 신의 표징을 담은
기적의 환상을 보았다.
콘스탄티누스의
의식수준은
200에서 350으로 상승했다.
황제는
로마군인의 방패에
빛나는 십자가 표징을 새겼고,
이후 그들은 항상 승리하였다.
그 다음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종교로
공표하였으니,
이에 기독교는
마침내 전 유럽의 종교가 되었다.
역사적 관점에서
서구문명의 기저가 되는
전체맥락과 기본구조는
예수 그리스도, 성 바오로,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통해 출현한 기적과
그로 인한 결과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중요한 사건들이
지금의 시대와
너무 동떨어져 보일 수 있으나
그 유명한 익명의 알콜 중독자 협회의 창설자인 빌 윌슨의 사례는
보다 최근의 일이다.
빌 윌슨의 기적체험은
12단계 회복프로그램을
낳았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수백만명이 알콜 중독에서 벗어났으며,
그 외에 치료하기 어렵고
심각한 여러조건에서 회복되었다.
여기에 활용된
모든 자기계발 프로그램은
빌 윌슨의 계시에서 나왔다.
이 계시의 의식수준은
성자급 575로 측정된다.
기적이 출현하기에 앞서
에고의 지배권이 소멸하는 현상이
먼저 일어난다.
위기와 절망(바닥 최저점)이 닥치면
신을 향한 강렬한 기도와
순종이 나온다.
한편
신에 대한 열광적 기도와 순종은
진실한 의도와 헌신의 결과일 수도 있다.
1980년대에 등장한 "기적수업"은
평화롭고
질서정연한 훈련을 진행한다.
이는 통찰을 통해
그리고 12단계 회복프로그램을 준수하면서
에고가 소멸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 수업의 워크북은 의식수준 600,
교재는 550으로 측정된다.
이를 통해
많은 삶이 탈바꿈 할수 있었으며
심각한 질병에서 회복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1년 과정의
기적수업이 이름값에 맞게
그 타당성을 입증하게 되었다.
결국
외견상 특별하게 보이는 것이
하나의 새로운 실재가 된다.
누가봐도 불가능한 일이
마치 잘 조직된 것처럼
쉽게 나타나는
이전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살고 있는 듯 하다.
장의 힘은
조화롭게 전개되면서
카르마적 잠재력의 출현을 촉진시켜
명시적인 현실성을 만든다.
그 역학관계는
비선형적이며
따라서 지적능력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지적능력은
인과론이라는
뉴턴식의 선형적 모형이 아닌
한계를 추정할 수있지만
잠재력의 출현, 신적 질서 혹은
조화까지는 개념화할 수 없다.
이성과 논리는
강력한 수단이지만
구체적인 한계 역시 갖고 있다.
가령 번개에 맞을 확률은 대략 백만분의 1이다. 하지만 어느 삼림 근로자는 다섯번이나 번개에 맞았다. (다행히 그는 아직도 건재하다). 또하나 2007년 7월에 폭스뉴스에 보도된 어느 요양원의 고양이 기사는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이 고양이는 오스카(의식수준 250)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오스카는 요양원에 있으면서 노인들이 세상을 떠날 즈음을 알아차리고 그 옆에 가서 껴안아주곤 했다. 그렇게 오스카가 곁을 지키고 네시간이 안되어 노인들은 운명했다. 이런 경우가 정확하게 스물여섯 번이나 연속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보면 누구나 다 아는 금언이 새삼 떠오른다.
"진실은
소설보다
더 낯설다"
첫댓글 언어는 기껏해야 묘사적 외양에 불과하며 본질과 똑같은 범주에 들어있지도 않다. 경험은 상징과 다른 수준에 있다. 이 때문에 오페라나 교항곡의 악보는 미학적 즐거움을 창조하지 않고, 오직 음악만이 즐거움을 낳는다. 음악은 음악적 상징을 써넣은 악보와 다른, 더 높은 패러다임 수준에 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