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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의 등장 인물들
가규(賈逵)?-228년
위의 문신. 자는 양도. 하동 양릉 사람. 홍농군태수로 있다가 조조에게 인정을 받아 간의관으로 작전에 임했다. 문제 때는 예주를 다스려 명자사로 이름을 날렸고, 다시 명제를 섬기면서 오나라 토벌에 공을 세웠으나 중도에 병으로 죽었다.
가충(賈充) 217-282년
가규의 아들. 자는 공려(公閭). 양릉 사람. 위, 진 교체기에 사마씨의 심복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후에 오나라에 대한 대응책으로 화평을 주장했다. 딸은 혜제의 황후가 되었다.
가후(賈珝) 147-223년
조조의 모사. 자는 문화(文和). 고장 사람. 어려서부터 장량, 진평 등에게 재사로 인정받았다. 동탁(동탁)이 살해되었을 때 이각에게 장안 공격을 진언하여 여포(呂布)를 몰아내게 했다. 후에 장수의 참모가 되고 관도싸움에서 장수를 조조 진영에 참가하게 했다.
감녕(甘寧)
오나라의 용장. 자는 흥패(興覇). 임강 사람. 양자강을 오르내리며 도적질을 하다 손권에게로 항복했다. 손권이 가장 아끼고 자랑하는 용장으로 조조의 남침을 유수구에서 맞이했을 때는 불과 백명의 기병으로 기습하여 위의 진중을 휩쓸어 강좌호신이라고들 불렀다. 유비가 관우, 장비의 원수를 갚으려 출병하였을 때 병을 무릅쓰고 종군하였다가 남만의 사마가가 쏜 화살을 맞고 죽었다.
감부인(鑑夫人)
유비의 정실 부인. 패국 사람. 유비가 소패에 있을 때 측실이 되었다가 후에 정실이 되었다. 신야에서 맏아들 유선(劉禪)을 낳았다.
감택(闞澤)
손권의 모사. 자는 덕윤(德潤). 산음 사람. 효렴으로 추천받아 전당현장으로 있다가 그의 막하에 들어갔다. 대장 황개와는 서로 뜻이 잘 통하여 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거짓 항복 문서를 가지고 위나라를 왔다갔다하면서 조조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아 결국 조조로 하여금 황개의 항복을 믿고 적벽의 대패전을 맛보게 만들었다.
강유(姜維) 202-264년
촉한의 장수. 자는 백약(伯約). 기 사람. 원래 위나라 장수였으나 제갈량에게 투항하여 크게 신임을 얻었다. 제갈량이 죽은 후 철수중에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물리쳤다."는 업적을 이룩했다. 소극파인 비위가 죽은 뒤 위와 치열하게 싸웠으나 항복한 주군 유선의 명령에 따라 위의 장군 종회에게 항복했다. 264년, 종회가 위를 배반하자 그와 행동을 같이 하다가 살해되었다.
고순(高順) ?-198년
여포의 휘하의 장수. 여포가 조조, 유비와 서주에서 싸울 때 유비가 근거한 패성을 급습하고, 조조가 구원하기 위해 보낸 하후돈을 패배시켰다. 그러나 뒤에 여포가 하비성에서 조조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조조측으로 배신한 후성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공손연(公孫淵) ?-238년
요동의 호걸. 228년, 위나라 명제로부터 요동태수에 임명되었으나 오의 손권과도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위나라는 그 배신에 문책의 사신을 파견했으나 공손연은 무력으로 이를 격퇴하고 연왕을 자칭하며 자립했다. 이에 위나라가 사마의를 총대장으로 삼아 토벌군을 파견하자 공손연도 요수를 따라 방위선을 구축했으나 사마의의 양동작전으로 패하고 본거지인 양평으로 물러갔다. 한때는 위의 포위공격을 막아냈으나 마침내 총공격을 받고 항복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도망하다가 목베여 죽임을 당했다.
공손찬(公孫瓚) ?-199년
후한말의 군웅의 한 사람. 요서 출신. 효렴으로 기용되었다. 184-189년에 오환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으며, 191년에는 황건적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원소의 죄상을 들추어 그와 싸웠으며, 유우를 쳐서 유주를 손에 넣고 근거지로 삼았다. 그러나 그 후로 유우의 아들 유화, 원소, 오환의 연합군과 싸워 패배하였으며, 이어 199년에는 원소의 대군에 대패, 불을 지르고 자살했다.
공융(孔融) 153-208년
후한의 중신. 자는 문거(文擧). 노국 사람. 공자의 20대손이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후한의 명사 이응의 인정을 받은 것을 계기로 대장군 하진의 초청을 받고 벼슬이 북해태수에 이르렀다. 그는 부임후 황건적의 난으로 파괴된 마을의 부흥에 노력하고 교육을 진흥케 하는 한편 많은 인재를 대우하여 크게 칭송을 받았다. 후에 유비의 천거로 청주자사가 되어 한나라의 부흥을 꾀했으나 황건적에게 본거지를 빼앗겨 실패했다. 후에 중앙 정계에 복귀하여 요직을 역임했으나, 조조에게 미움을 받던 양표를 위기에서 구하여 한나라 왕실의 웅도를 도모하고 많은 저명 인사들과 교유하는 등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끝까지 조조에 반대하는 자세를 취하다가 옥에 갇혀 참형을 당했다. 곽사 동탁의 부하. 항상 동료인 이각과 행동을 같이하다가 동탁이 죽은 후 장안을 지배하여 후장군이 되고 군정을 마음대로 움직였다. 후에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관영(管寧) 162-245년
후한의 명사. 자는 유안(幼安), 주허 사람. 화흠 등과 동문 수학한 사이로서 요동의 공손도 밑에서 30여년동안 은둔 생활을 계속했다. 조조, 문제, 명제 등이 초청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관우(關羽) ?-219년
삼국시대 촉나라의 무장. 지금의 산서성 하동군 해현 사람. 자는 운장(雲長). 후한말의 동란기에 탁군에서 유비를 만나, 장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어, 팽생토록 그 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200년에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였을 때, 관우는 사로잡혀 조조의 귀순 종용을 받았으나 원소의 부하 안량을 베어 조조의 후대에 보답한 다음, 기어이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적벽대전때에는 수군을 인솔하여 큰공을 세우고, 유비의 익주 공략때에는 형주에 머물러, 그 무력과 위풍은 조조와 손권을 두렵게 하였다. 그러나 형주에서 촉나라 세력의 확립을 위하여 전력하다가 조조와 손권의 협력을 받아, 마침내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관우는 '소설 삼국지'에서 충신의 전형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송나라 때 이후로 관제묘를 세워 그를 무신 또는 재신으로 모시는 등 중국 민중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관평(關平) ?-219년
관우의 아들. 정사에는 아버지와 같이 오나라 마충에게 체포되었다는 기록밖에 없으나, 소설에서는 아버지를 따라 크게 활약하다 같이 목이 잘렸다고 한다.
관흥(關興)
유비의 장수. 관우의 아들로 자는 안국(安國). 유비가 그의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러 출별하였을때 장비의 아들 장포와 함께 종군하여 그를 도왔다. 난군중에서 아버지의 원수인 동오의 반장을 찾아내어 죽이고 아버지가 쓰던 청룡도를 도로 찾아 평생 사용했다. 활도 잘 쏘고 무용이 절륜하여 아버지 못지않다는 평을 들었다. 괴월 유표의 모사. 형인 괴량과 함께 유표의 형주 진공을 돕고, 그후 호족 세력을 집결시켜 형주의 실권을 장악했다. 유표가 죽은 뒤 조조가 남하하자 유표의 아들 유종에게 항복을 진언했다.
기령(紀靈)
원술의 장수. 패성에 근거한 유비를 공격하다가 유비를 도우러 온 여포에게 살해되었다.
고옹(顧擁)
오의 문신. 자를 원탄(元嘆)이라 하였으며, 중랑장 채옹의 제자. 말이 적고 술을 가까이 않으며 매우 엄격하여 손권이 그를 발탁하였다. 유비가 서촉에 진군하였을 때를 노려서 형주를 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승상으로 19년간 재직하였는데, 그의 천거로 벼슬한 사람은 모두 쓸만한 인물이었다.
곽가(郭嘉) 170-207년
조조의 모사(謀士). 순욱과는 동향인 영주 영음 사람으로 정욱의 천거로 조조 휘하에 가담하여 원소 격파에 공을 세우는 등 크게 활약했으나 뛰어난 계책을 써보지 못하고 38세에 병사했다.
곽도(郭圖)
원소의 모사. 그의 패사후 아들들이 서로 싸울때는 큰아들 원담을 도왔다. 원담이 아우 원상과 싸우다 지쳐 일단 조조에게 항복하였다가 다시 항전할 때, 남피성 밖에서 조조의 장수 악진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관구검 위의 장수. 하동 문희 사람. 자는 중공(仲恭). 유주자사로 있을 당시 공손연의 모반을 중앙에 알려 이를 멸하고 자신은 고구려를 침범했다. 당시 동천왕은 예봉을 피하여 동해 바닷가까지 피신했다. 후에 사마사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관삭(關索)
관우의 아들로 전해지는데 형주가 함락된 뒤 상처를 치료하며 숨어 있다가 제갈량이 남만을 토벌할 때 찾아왔으므로 전부선봉(前部先鋒)으로 삼았다.
공손강(公孫康)
요동(遼東)태수. 양평사람으로 무위장군 공손탁의 아들. 원소의 아들 원희와 원상이 조조에게 쫓겨 의지해 왔을때, 조조는 곽가의 유탁으로 공격하지 않고 대치만 하고 있었더니 과연 두 사람의 목을 베어보내고 귀순하였다.
관정(官定)
관우가 유비를 찾아 헤맬때 만난 노인. 아들 둘이 있었는데 큰아들 관영은 학문에 뜻을 두었고 작은아들 관평은 무예를 좋아했다. 관우는 그 중 관평을 양자로 받아들여 평생을 같이하였다.
견부인(甄夫人)
중산군 무극현 사람. 미녀이고 총명하여 주위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심지어 조조가 원소를 토벌하고 기주 업성에 들어갈 때 아들 조비와 견부인을 차지하려고 다툰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다. 원래 그녀는 원소의 아들 원희의 부인이었는데, 원소가 패전하여 기주를 잃었을때 관례대로 승리자 조비의 여인이 되었다. 그녀는 어렸을때부터 대단히 영리하였는데 그녀 나이 열살때 전국적으로 기근이 겹쳤고 백성들도 모두 보물이나 가재도구를 팔아야 먹고살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녀의 친정은 저장된 곡식이 많아서 보물 등을 많이 사들였다. 이때 그녀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지금 세상이 혼란스러운데도 보물을 사들이고 있으니 이는 올바른 일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주위에 있는 백성들이 모두 굶주리고 식량도 다 떨어져가니 어머니께서는 보물보다는 친지들과 이웃 사람들에게 곡물을 나누어주어 널리 은혜를 베푸십시오." 집안의 어른들은 옳은 말이라고 여겨 그녀의 말대로 했다. 이렇듯 마음씨는 물론이고 그 생김새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얼굴에 흙칠을 하고 산발을 했는데도 미색이 완연했다고 한다.
곽회(郭淮)
자는 백제(伯濟). 태원군 양곡현 사람. 건안 연간에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평원부승으로 임명되었다. 조비가 오관중랑장이 되었을때 중앙부서에 임명되었다. 이후 서북 방면의 전투에서 큰 공로를 세웠는데 황초 원년(220) 곽회는 조비가 제위에 오른 것을 축하하는 사자로서 허도로 향했다. 도중 병이 나서 제시간에 도착할 수가 없었다. 도착하였을때는 신하들이 즐겁게 연회를 열고 있었으므로 조비가 곽회를 꾸짖으며, "옛날 우가 제후들을 모이게 했을때, 방풍이 뒤에 도착하자 사형에 처했고 지금 하늘이 함께 축하하고 있는데 그대는 오히려 가장 늦게 왔소, 무엇 때문이오?" 곽회가 대답했다. "이제 성군을 맞이했는데 방풍인들 죽겠습니까." 조비는 그의 말을 듣고 칭찬하고 옹주자사를 겸임하도록 하였으며 사양정후로 봉하였고 나중에 실제로 옹주자사로 임명됐다. 변방을 다스리는데 강족과 오랑캐가 투항해오면 곽회는 항상 먼저 사람을 보내 그들의 천척관계나 남녀의 수효를 탐문하도록 했다. 회견할때 한두가지 일로부터 그들의 사정을 하나하나 이야기해줘서 그들을 감탄시켰다. 하는일이 상세하여 제갈량의 북벌을 저지하는 데 큰 몫을 했다.
공손탁(公孫度)
자가 승제. 본래 요동 양평 사람. 공손탁의 어린시절 이름은 표였는데 당시 현도태수 공손역의 죽은 아들과 이름이 같아 공손역은 그를 친자식 이상으로 잘 대해 주었다. 공손탁은 영제시대에 유도과에 천거되어 상서랑에 임명되었으며 기주자사로도 승진하였다. 그러나 당시 환관이 득세하는 문란한 정치 현실에서 공손탁은 모함을 당해 파면당했다. 나중에 동탁의 중랑장이 된 서영 장군이 그를 추천하여 요동태수가 되었다. 이후 요동지역은 그의 집안 소유지처럼 되어다. 공손탁이 요동태수가 되고나서 동쪽으로 고구려를 치고 서쪽으로 오환을 공격하여 위세를 떨쳤다. 그리고 왕업을 세우고자 했다. 기주자사에서 파면당한 앙갚음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의와 양의를 불러, "이제 한실도 끝나려 하므로 나는 이곳에서 왕업을 세우기로 정했다." 하고 스스로 왕처럼 행동했는데 얼마후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고 그의 아들 공손강과 공손공이 뒤를 이었다. 그후 공손강이 일찍 죽고 그의 두 아들이 나이가 어려 공손강의 동생 공손공이 요동태수가 되었다. 나중에 공손공을 밀어낸 공손연은 바로 공손탁의 손자.
국태부인(國泰夫人)
유비와 혼인한 손부인의 어머니 국태부인은 손권에게 있어서는 친이모이기도 하면서 선친 손견의 후처로 손권의 계모이기도 하다. 손권의 친어머니 오부인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동생과 함께 살았다. 그때 손견으로부터 청혼을 받아 혼인하게 되었는데 당시 자매가 한 남자에게 시집가는 관례도 있었고 자신이 시집을 가면 동생은 혈혈단신이 되므로 손견에게 함께 출가했던 것이다. 이 오부인에게서 손책과 손권 등이 태어났고 여동생 국태부인에게서는 딸이 하나 태어났는데 이 딸이 유비와 결혼한 손부인이다. 오부인은 202년에 남편 손견이 묻힌 고릉에 합장되었다. 죽을 당시 유언은 "국난을 당했을때 외침이면 주유에게 묻고 국내에서 일어난 일이면 장소에게 물어라. 그리고 내 동생(국태부인)은 시집와 고생을 많이 했으니 꼭 나 보듯이 섬겨야 한다."의 세가지였다고 한다.
[나]
노숙(魯肅) 172-217년
손권의 장수. 자는 자경(子敬). 동성 사람.
많은 재산을 가진 호족으로서 주유가 우백의 부하를 이끌고 와서 협력을 부탁하자 저장미의 반이나 되는 3천석을 희사했다. 이윽고 주유의 천거로 손권과 회견하여 천하 통일의 대계를 개진함으로써 그의 신뢰를 얻어 그의 오른팔이 되었다. 조조의 남하 때는 재빨리 유비와 공동 전선을 펴도록 제창하고 스스로 유비를 방문하여 동맹을 맺었다. 그 역시 제갈량, 주유와 함께 적벽대전에서 조조군을 물리친 주역의 한 사람이다. 주유가 죽자 그의 유연에 따라 군세를 인계받고 적벽대전 후 유비와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던 형주 분할 문제를 해결하여 상수를 경계로 분할하는데 성공했다.
노식(盧植) ?-192년
후한의 대신. 자는 자간(者幹). 탁군 사람.
유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유비와 공손찬의 스승이기도 하다. 황건적의 난때 관군을 이끌고 나가 연전 연승했으나, 전선 시찰을 나왔던 환관 좌풍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 무고로 귀양을 갔다. 후에 황보숭의 힘으로 복직되어 황제 측근에서 정무를 담당했다. 159년, 원소 등이 환관을 몰아내려 하자 장양 등 환관이 하태후, 소제, 진류왕 등을 납치하여 도망치려는 것을 꾸짖어 하태후를 구출했다. 그 후 동탁이 소제를 폐하고 진류왕을 즉위시키려 했을 때 홀로 반대하다가 파직되어 고향을 낙향하고 말았다.
나관중(羅貫中)
삼국연의의 저자. 전해지는 바로 원나라 말기와 명나라 초기의 소설가로서 수호전도 그가 지었다고 한다.
뇌동(雷同)
서촉 유장의 장수.장임을 도와 낙성을 지켰으나 포위망에 빠져 유비에게 항복하였다. 한중에서 조조의 침입을 막을때 장비를 도와 싸우다가 장합의 손에 죽었다.
능조(凌操)
오의 장수.여항 사람으로 손책의 수하에 들었다. 건안 8년 손권이 황조를 칠 때 작은배로 맨앞에서 돌진하여 하구까지 이르렀다가 황조 휘하의 감녕이 쏜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능통(凌統)
오의 장수. 자는 공정.15세에 황조를 치는 전투에 종군하였다가 아비 능조가 적장 감녕의 화살에 맞아 죽자 분전하여 아비의 시체를 찾아 돌아왔다. 뒤에 손권이 합비에서 위의 장료와 맞싸울때 그를 위험에서 구해냈고 감녕을 늘 부친을 죽인 원수로 대했으나 죽을 고비에 그의 덕으로 살아난 후에 원한을 풀고 지냈다.
[다]
단규(段珪)
후한의 환관. 십상시중의 한 사람.
하진 살해에 참가했으나, 그 직후 원술, 원소, 노식 등의 궁정 입성 때 소제 및 진류왕을 데리고 도망치다 소평진에서 살해되었다.
도겸(陶謙) 132-194년
후한말 군웅의 한 사람. 자는 공조(恭祖). 단양 사람.
황건적 토벌 때 서주자사가 되었다. 193년, 서주의 하비에서 관선이 천자를 참칭하고 난을 일으키자 이를 치다가 당시 조조가 근거하고 있던 제성 공격했다. 이에 조조는 토벌군을 일으켜 팽성에서 도겸군을 대파했다. 이듬해 조조의 공격을 받고 서주로 도망쳐 유비에게 의탁했다가 병으로 죽었다.
동소(董昭)
위나라의 중신. 자는 공인(共仁). 정도 사람.
허도로 천도할 것을 진언하고 조조를 위공, 이어서 위왕으로 승진시킬 것을 추진했으며, 군사적으로는 형주의 관우 공략책을 진언하는 등 중요한 헌책을 행하였다. 조조가 죽은 뒤에는 조비, 조예 등을 받들어 크게 공헌했다.
동소에 대한 일화로는 허도 천도를 건의하기 위해 칙사로서 조조를 찾은적이 있는데, 이때 조조는 동소의 혈색이 아주 좋은것을 보고서 그 비결을 묻자 채식밖에 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동소에 대한 유명한 일화이다.
동승(董承) ?-200년
헌제의 장인.
196년, 헌제를 맞기 위해 안읍에 온 조홍의 군사를 물리쳤다. 후에 헌제를 따라 허도에 들어가 헌제의 명으로 유비 등과 함께 조조 암살을 시도했으나, 유비가 서주 정벌을 나간 사이에 계획이 발각되어 살해당했다.
동탁(董卓) ?-192년
후한말의 군웅의 한 사람. 임조 출신.
처음 강족의 추장을 회유하여 세력을 길렀다. 189년에 외척 하진이 환관을 토멸하고자 할 때 이에 호응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낙양으로 향하였으나, 하진은 도리어 환관에게 죽고, 환관들은 또 원소의 군대에게 몰살당하였다. 동탁은 그대로 낙양에 입성하여 헌제를 옹립하여 정권을 잡았다. 이에 대해 원소를 맹주로 하는 동탁 토벌군이 조직되자, 190년, 동탁은 낙양성을 소각하고 장안으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횡포가 심했고 그 때문에 사도 왕윤의 모략에 걸려 부장 여포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의 사후, 장안은 부장들의 다툼으로 혼란이 거듭되어 헌제는 장안을 탈출, 조조에게 보호되어 조조가 제패하는 하나의 원인을 만들었다.
등애(鄧艾) ?-264년
위나라의 명장. 자는 사재(士載). 극양 사람.
사마의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농정, 통운에 업적을 올리고 오나라에 대한 전략으로 둔전책을 성공시켰다. 255년, 관구검, 문흠 등의 반사마씨 거병때 연주자사였던 그는 기동대를 이끌고 진압 작전에 참가하여 승리의 계기를 만들었다. 263년, 촉을 정벌하는데 있어서는 서쪽 방면의 침공대를 지휘하여 산을 깎고 하천에 다리를 놓는 등 험한 길을 개척하여 대번에 성도에 육박했다. 10월에 들어 사찬과 아들 등충을 격려하며 제갈첨, 장준 등의 목을 베고 유선의 항복을 받아 드디어 성도 입성을 성취했다. 그러나 이듬해 반란의 기색이 보인다는 사찬, 종회 등의 무고로 자식과 함께 처형되었다.
등지(鄧芝)
촉한의 문신. 자는 백묘(伯苗). 신야 사람.
유비를 받들어 정무를 담당하고, 그가 죽었을 때는 오에 수호 사절로 가서 대임을 완수했다. 제갈량의 북정에 참가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중직을 역임하며 국정을 맡아보았다.
단복(單福)
서서의 별칭.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여 유표에게 의지해 있을때 신야에서 수경선생 사마휘를 만난뒤 유비를 도와 공을 세웠으나 조조가 보낸 가짜 서찰에 속아 그에게로 갔다.
동귀비(董貴妃)
헌제의 후궁.
오라버니 동승이 의대조서를 받아 조조를 치려던 계획이 탄로나 임신 5개월의 몸으로 무참히 죽임을 당했다.
두예(杜預)
진의 장수. 두릉 사람으로 자는 원가(元凱).
장군 양호의 천거로 진남대장군이 되어 사마염의 명을 받아 양양에서 군사를 길러 오에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 10만대군을 거느리고 동오를 정벌하였다. 자신은 말도 탈 줄 모르고 활도 잡을 줄 모르면서도 군사를 움직여 싸워 이기는데는 어떠한 장수도 당할 이가 없었다.
동윤(董允)
자가 휴소(休昭)이고 남군 지강현 사람.
촉의 명신 동화의 아들이다. 부자 2대에 걸쳐 제갈량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고 그 신임이 두터웠으며 사심없이 충성을 다한 명신이자 충신이었다. 출사표에서 '만일 덕을 일으키는 말이 없다면 동윤 등을 처형하여 그들의 직무태만을 밝히십시오.' 하는 문구가 나온다. 이는 제갈량이 얼마나 동윤을 믿고 그에게 기대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동윤이 있는 한 충언하는 일이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동윤은 제갈량이 북벌에 나서고 있는 동안에 성도에서 황제를 모시고 내치에 크게 이바지하여 장완도 동윤에게 깍듯이 대할 정도로 어긋남이 없었다. 황호를 비롯한 궁중의 간신배들이 가장 두려워한 사람이 바로 동윤으로서 그는 아랫사람에게도 겸허하게 대하여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촉의 선비들은 제갈량과 장완, 비의, 동윤을 일컬어 네 사람의 뛰어난 인재라 하여 사영(四英)이라 했고 또한 뛰어난 재상이라 하여 사상(四相)이라고 높여 부르기도 했다. 그의 부친 동화 역시 관원으로 재직시 청렴결백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잘 보살펴 그의 유임을 원하는 자가 수천명이 될 정도였다.
두습
자가 자서(子緖). 영천 정릉현 사람.
세상을 보는 안목이 매우 정확했다. 한번은 친구 번흠이 유표휘하에 들어가려 하자 충고하기를 "우리가 유표의 형주로 피난온 것은 물속에 용처럼 숨어 있다가 봉처럼 비상하기 위함인데 어찌 유표따위에 의탁하려 하오?"하고 질타했다. 번흠이 그의 말대로 유표와 멀어졌음은 물론이다. 그후 그는 조조휘하에 가담하여 모사로서 계책을 내놓기보다는 원칙을 진언하는 참모로서 소임을 다했다. 조조는 그의 재능에 크게 의존했고 위제 조비는 그의 말이라면 곰곰히 되씹어 생각할 정도였다. 조예가 황제에 오른후 승진하여 평양향후로 봉해져다. 제갈량이 북벌에 나서 진천으로 출격할 때 제갈량에 맞서 위의 병력을 통솔하던 대장군 조진은 두습을 대장군 군사로 임명하였고 식읍중에서 1백호를 나누어 그의 형 두기에게 주었으며 관내후의 작위를 주었다. 조진이 죽은 후 사마의가 그의 직무를 대행했고 두습은 또 군사로 임명되었다. 그후 질병으로 인해 군사 일을 그만두고 중앙으로 불러들어가 태중태부로 임명되었다. 죽은 후에는 소부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를 정후라고 했다. 아들 두회가 후사를 이었다.
[바]
방통(龐統) 178-213년
유비의 모사. 자는 사원(士元). 양양 사람.
사마휘가 와룡과 함께 천거한 봉추(鳳雛)가 바로 방통이다. 유비의 지혜주머니로서 법정 등과 함께 촉 공략을 추진했으나, 성도 진격 도중 낙성 공방전 때 화살에 맞아 젊은 나이로 죽었다.
비위(費褘) ?-253년
촉의 중신. 자는 문위(問偉). 강동군 사람.
제갈량은 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 그의 출사표에서 내정을 맡길 사람으로 그와 곽유지, 동윤 등을 지적했다. 그는 남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서류를 읽고 도 일단 읽은 것은 절대로 잊지 않았다. 제갈량이 본 대로 그의 능력은 내정면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제갈량이 죽은 뒤에는 수성의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고 강경파인 강유를 억제하며 촉을 잘 유지했다. 그러나 253년, 연회석상에서 자객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반장(潘璋)
손권 휘하의 장수. 동군 사람으로 자는 문규(文珪).
관우가 형주를 빼앗기고 도망칠때 그를 추격하여 궁지에 몰아넣고 말째 넘어뜨려 사로잡았다. 손권은 그의 공을 찬양하여 관우가 쓰던 청룡도를 상으로 주었다. 뒷날 유비가 복수하기 위해 쳐들어 왔을때 산중에 헤매다가 마침 하룻밤 쉬려던 집에서 관우의 아들을 만나 그의 손에 죽었다.
방덕(龐德)
마초의 부하였다가 뒤에 조조에게 간 용장. 남안군 사람으로 자는 영명(令明).
용맹이 뛰어나 위교(渭橋) 싸움에서 조조를 위기에 몰아넣은 적도 있었고, 마초가 패하여 장노에게 의지했을 때도 행동을 같이 했다. 마침 병이 들어 그가 유비에게 항복할때는 따로 떨어져 남아 있다가 조조의 한중 침공때 또다시 용감하게 항전하였다. 조조는 그의 용맹을 아껴 장노의 모사 양송을 뇌물로 매수하여 반간계로 고립시킨뒤 꾀로 사로잡았다. 조조가 관우와 양양성을 두고 싸울때 자원하여 관(棺)을 짜 가지고 나가 싸우다 주창에게 사로잡혔으나 굽히지 않고 마침내 죽었다.
배송지(裵松之)
삼국지에 주석을 달았다.
법정(法正)
유비의 모사.
익주 유장의 수하였으나 주인이 약하여 섬길 만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장송, 맹달과 함께 외부에서 주군을 불러들일 것을 획책하였다. 자는 효직(孝直). 우부풍 미현 사람으로 명사로 알려진 법진(法眞)의 아들. 유비의 서촉 진공을 위하여 크게 애썼다. 성사된 뒤 촉군 태수가 되었고, 성품이 각박하여 논란하는 이도 있었으나 제갈량은 공로를 생각해 크게 탓하지 않았다.
변부인(卞夫人)
조조의 후처. 조비, 조식의 생모.
원래는 기녀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검소하고 덕성이 있어 조조의 본처 노릇을 했다.
부사인(傅士仁)
유비의 장수.
형주에서 관우의 막하에 있었는데, 양양성을 칠때 선봉을 맡았다가 출전에 앞서 실화(失火)한 죄로 매를 맞고 공안의 수비로 좌천되었다. 형주가 함락되자 손권에게 항복하여 관우의 패망을 도왔다.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위해 군대를 일으키자 미방과 함께 마충의 목을 베어가지고 돌아왔으나 용서받지 못하고 죽었다.
보즐
자가 자산(子山). 임회군 회음사람.
세상이 혼란스러워지자 난을 피해 강동으로 갔다. 광릉의 위정과 동갑으로 친하게 지냈으며 주경야독하면서 자기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회계에 초정강이란 호족이 있었는데 무례한 자였다. 그래서 보즐과 위정은 그들이 침범할까 두려워했다. 한번은 오이를 진상하려고 했는데 초정강이 마침 잠을 자고 있었으므로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위정은 돌아가려고 했다. 보즐은, "본래 우리들이 여기에 온 이유는 강성함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오. 그런데 지금 떠나가서 고상함을 나타내려고 했다면 단지 원수만을 맺게 될 뿐이오." 하며 그를 제지했다. 그후 손권에게 발탁되어 건안 15년에는 파양태수를 겸임하는 등 크게 활약했다. 손권이 제위에 오른후 보즐은 표기장군에 올랐고 많은 사람들을 탄핵하는 상소를 자주 올렸는데 보즐에 대한 세평은 자신을 완고하게 주장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며 명리를 다투지도 않았고 당파를 이루지 않았으며 언제나 덕을 가까이 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덕과 더불어 규범적인 생활을 한 모범적인 관리로서 엄준, 제갈근과 더불어 오의 세군자로 꼽혔다.
반은(潘隱)
역사책에 의하면 영제(靈帝)는 중평 5년에 친위대격인 서원 팔교(西園 八校)를 설치하고 환관 건석(蹇碩)으로 상군교위(上軍校尉)를 삼아 팔교를 통솔하게 했다. 반은은 그 팔교의 한 대장(隊長)이었으나 하진(하진)과 친했기 때문에 눈짓으로 위급을 알렸다고 한다.
[사]
사마염(司馬炎) 236-290년
진 왕조의 초대 황제. 재위 265-290년. 시호는 무제(武帝).
사마소의 맏아들로 사마의의 손자에 해당된다. 265년, 사마소의 죽음과 함께 진왕을 물려받았다. 이보다 앞서 사마씨는 이미 3대에 걸쳐 위왕조에서 확고한 기반을 쌓고 있었는데, 사마염은 그 기세를 몰아 위의 황제 조환을 강요하여 황제위를 물려받고 진 왕조를 일으켰다. 사마염의 과제는 아버지 때 이미 촉을 평정했기 때문에 남은 오를 멸하여 천하 통일을 이루는 일이었다. 그는 즉위 후 스스로 검약에 힘쓰는 한편 일족을 각지의 왕으로 봉하여 병력을 배치하는 등 내부 결속을 도모했다. 267년, 드디어 중신인 양호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형주의 오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어서 왕준에게는 장강 상류의 익주에서 수군을 정비하게 했다. 그러나 오나라도 명장인 육항이 장강 일대에서 방어에 힘써 두 나라 군사는 일진 일퇴를 거듭했다. 이 대치는 10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279년에 드디어 수륙 20만의 대군이 일제히 남하하여 이듬해에 결국은 오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했다. 사마염이 황제로 재위한 것은 전후 24년이었다. 치세의 전반기에는 검약을 주로 하고 내치에 주력하였으나, 오를 멸망시킨 뒤에는 긴장이 풀려 벌써부터 왕조 쇠퇴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마의(司馬懿) 179-251년
위나라의 권신이며, 서진 왕조의 시조. 자는 중달(仲達). 하남성 온현 출신.
처음에 조조의 청으로 그의 부하가 되고, 조조의 아들 조비가 위나라를 세운 뒤로 명제, 제왕 등 3대 황제를 섬겼다. 그동안 대도독이 되어, 위나라 왕조의 군사를 통솔하고 위나라와 진나라 유일의 권신이 되어, 그의 손자 사마염때에 제위를 배앗아 진나라를 일으키는 터전을 닦았다. 그가 남긴 주요한 업적은 조비의 유언을 받아 명제 및 제왕을 보좌한 일뿐만 아니라, 삼국 정립의 위기에 처하여 외적을 물리친 일이다. 특히 촉한의 제갈공명을 오장원에서 막아, 그의 의도를 꺾은 일은 유명하다. 도 요동을 정벌하여 요동태수 공손연을 멸망시키고 위나라의 영토로 삼았다. 그 밖에 남방의 오나라에 대처하여 회하 유역에 광대한 군둔전을 설치하여 국방을 튼튼히 한 일도 큰 업적이다.
서서(徐庶)
유비의 막료. 자는 원직(元直). 영천 사람.
원래의 이름은 복(福)이었다. 가난하게 자랐으나 어려서부터 검술을 익혔다. 의협심이 강해 친구의 원수를 갚아 주고 형리에게 체포되었으나, 친구의 구출로 도망쳤다. 그 후 느끼는 바가 있어 이름을 서(庶)로 바꾸고 무예 대신 학문에 힘썼다. 하남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형주로 난을 피했다가 거기서 제갈량을 알게 되었다. 이어 형주에 있던 유비의 막료가 되어 제갈량을 강력히 추천했다. 유비가 장판에서 대패했을 때, 그는 모친이 인질로 잡혔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조조에게 투항했다. 조조는 그에게 과분한 벼슬을 주어 우대했다.
서영(徐榮)
동탁의 장수.
성고를 목표로 한 조조군을 변수에서 맞아 싸워 크게 무찔렀다. 이 싸움에서 조조는 화살에 맞고 사랑하는 말을 잃었다.
서황(徐晃) ?-227년
조조의 장수. 자는 공명(公明). 양 사람.
관도 싸움때는 사환과 함께 원소의 병량 수송대를 급습했다. 적벽대전 후 패배한 조조가 허도로 후퇴하자 조인과 함께 강릉을 지키며 추격군에 대비했다. 219년, 조인이 지키던 번성이 관우에게 포위되자 구원병을 이끌고 가서 관우군을 패세로 몰아넣었다.
손건(孫乾)
유비의 심복.
199년, 유비가 서주에 근거하여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원소와 손을 잡기 위해 사절로 갔다. 또 201년에는 여남에 있던 유비가 조조의 공격을 받아 유표에게 의지하려 했을 때에도 가서 그 정지 작업을 했다.
손견(孫堅) 156-192년
후한말의 무장.
삼국시대의 오나라 군주 손권의 아버지이다. 절강성의 오군 사람으로 지방의 호족 출신이며, 시호는 무열황제(武烈皇帝)이다. 17세 때, 해적을 퇴치하여 용맹을 날렸고, 184년, 황건의 난에 사공 장온의 부하로서 토벌에 공을 세워 오정후로 봉해졌다. 이어서 동탁 토벌의 군사를 일으키자 원술의 부하 장수로서 낙양으로 진격하여 동탁이 약탈한 후한 황제의 제릉을 수복하여 우물 속에서 전국새를 얻었다. 192년 형주목 유표와 싸워 크게 이겼으나 자기의 용맹을 믿고 단기로 현산에 출진하였다가 전사했다.
손권(孫權) 182-252년
삼국시대 오나라의 초대 황제. 재위 222-252년.
손견의 둘째 아들로 시호는 태황제(太皇帝). 200년에 형 손책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주유 등의 보좌를 받아 강남의 경영에 힘썼다. 당시 형주에는 유표가 세력을 떨치고 화북에는 조조가 있어 남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에 손권은 촉나라 유비와 결탁하여 남하한 조조의 대군을 적벽에서 격파함으로써 강남에서의 그의 지위는 확립되었다. 그 후 형주의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유비와 대립하였으나, 219년 조조와 결탁하여 유비의 용장 관우를 격파하고 형주를 공략하였다. 그 결과 위, 오, 촉 3국의 영토가 거의 확정되었다. 221년 조조가 죽고 그의 아들 조비가 한나라의 제위를 찬탈하여 황제로 즉위하자 이것을 들은 유비도 촉나라에서 한제(漢帝)를 칭하였다. 손권도 이에 맞서서 황제위에 올라 연호를 황무라 정하고 도읍을 건업으로 정하였다. 그 후는 대체로 촉한과 결합하여 위나라에 대항하는 한편 국내의 발전에 힘썼다.
손부인(孫夫人)
유비의 후취 부인.
손권의 누이로 유비와 동거한 지 몇 해 후, 그가 서촉을 치러 간 사이 손권의 모략으로 본국에 돌아가 있었다. 나중에 유비가 패하여 죽었다는 소문을 곧이듣고, 능운정에서 장강에 몸을 던겨 죽었다.
손소(孫韶)
손권의 대장.
본시 유씨였으나 손책에게 총애를 받아 주인의 성을 일컫게 되었다. 자는 공례(公禮). 조비가 남침했을 때 수장 서성의 명령을 어기도 뛰쳐나가, 조비의 본진을 습격하여 공을 세웠다. 손권이 대위에 오르자 진북장군 유주목이 되었다.
손책(孫策) 175-200년
후한말의 무장. 손권의 형.
아버지인 손견이 죽은 뒤에 원술의 휘하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군대를 이어받아 강남을 평정, 일족과 측근을 태수로 임명하여 진무와 개발에 힘썼다. 마침 원술이 제위에 오르려 하자 손책은 이를 격렬하게 반대 비난하였다. 조조는 이를 알고 손책과 손을 잡는 편이 이롭다 하여 그를 오후에 봉하고 혼인 관계를 맺었다. 200년,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손책은 허도에 있는 한나라 헌제를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기 전에 죽었다.
순욱(筍彧) 163-212년
조조의 모사.
본시 원소의 부하였으나 조조가 청주의 황건적을 칠 때 그의 막하에 참여하였다. 조조를 위하여 평생을 바쳤으나 그가 위공이 되어 권세를 누리려 하자, 이를 반대한 이유로 노여움을 사, 화가 두려워 자결했다.
순유(筍攸)
조조의 모사. 순욱의 조카.
일찌기 황문시랑을 지냈으나 낙향해 있다가 숙부와 함께 조조의 막하에 들어갔다. 조조가 적벽대전의 보복을 계획할 때 서량의 마등을 높은 벼슬로 불러다가 죽여, 후환을 없앴다. 뒤에 조조가 위왕이 되려 하자 이를 간하다가 그의 노여움을 사, 그로 인해 병들어 죽었다.
신비(辛毗)
조조의 부하. 자는 좌치(佐治). 영천 사람.
처음에는 원소를 따랐으나 나중에 조조 휘하에 들어가 건의관이 되고, 이어 조비, 조예를 섬겼다. 사마의가 오장원에서 제갈량의 군사와 대치했을 때는 조예의 군사로 가서 촉의 도발에 응하지 말도록 조칙을 전해 출격을 억제했다.
사마가(沙摩柯)
유비를 도와 함께 동오를 친 만왕.
삐죽삐죽 가시가 사방에 돋혀 있는 쇠몽둥이를 무기로 썼다. 무술이 뛰어나 첫 전투에서 동오의 명장 감녕을 죽였으나, 육손의 반격으로 패주하는 도중 주태에게 죽었다.
사마부(司馬孚)
사마의의 아우. 자는 숙달(叔達).
상서령으로 있으면서 형을 위해 조상을 치는 표문을 닦았으나 황제 폐립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뒤에 사마염이 진을 세우고 안평왕으로 봉해 예의를 다했으나 받지않고 위의 구신으로 살았다.
사마사(司馬師)
사마의의 장자로 자는 자원(者元).
얼굴이 둥글고 키가 크며 입은 모나고 입술이 두꺼웠다. 왼쪽 눈밑에 검은 혹이 돋쳤는데 그 위에 털이 숭숭 나 있었다. 침착하고 병서에 통달하여 아비의 대를 이었는데 관구검의 반란을 토벌하러 남정하였다가 혹을 짼 자리가 터져 진중에서 죽었다.
사마소(司馬昭)
사마의의 둘째아들. 자는 자상(子尙).
권모에 뛰어났으며 간특하고 오만하기가 그 부형들보다 더하였다. 군사의 지휘에도 역량이 있어 형 사마사가 죽은 뒤 대장군이 되어 국정을 손아귀에 넣었다.
사마휘(司馬徽)
유비가 유표에게 의지하여 신야에 있는 동안 만난 은사.
자를 덕조(德操)라 하고 흔히들 수경선생이라 불렀다. 유비가 그와의 대화에서 와룡과 봉추 중 하나만 얻어도 왕업을 이루리라는 말을 들었다.
서성(徐盛)
손권의 장수. 낭야 사람으로 자는 문향(文嚮).
제갈량이 남병산에서 동남풍을 빌고 난 뒤 정봉과 함께 뒤를 쫓았다 하여 적벽가에 이름이 올라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용맹이 뛰어났고 특히 수전에 능하였다. 손권을 위해 여러차례 큰공을 세웠으며 강 한복판에 거짓 성루를 만들고 배를 정렬하여 하룻밤 사이의 이변에 놀란 조비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물러나게 한것도 그였다.
석광원(石廣元)
남양의 숨은 인재.
영천 사람으로 제갈량이나 최주평, 맹공위, 서서 등과는 함께 공부한 사이. 난세에 세상에 나오기를 꺼려 술과 글로 세월을 보냈다.
소교(小喬)
오 교공(喬公)의 딸로써 언니 대교와 함께 절세의 미인. 언니는 손책의 부인이 되었고, 그녀는 주유의 아내가 되었다.
손량(孫亮)
손권의 막내아들로 반씨(潘氏) 소생. 자는 자명(子明).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간사한 무리의 얕은 꾀를 알아낼 정도였다. 손권이 죽은 뒤를 이어 위(位)에 올랐으나 대장군 손침이 권력을 남용하여 이것을 분하게 여겨 국구인 황문시랑 전기(戰紀)에게 심정을 얘기하고 밀조를 내려 일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일은 탄로나고 제위에서 쫓겨나니 재위 7년이었다. 회계왕으로 봉해졌다가 나중 울분에 못이겨 자살했다.
[아]
안량(顔良) ?-200년
원소의 장수.
문추와 함께 지략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백마싸움에서 조조군에 가담해 있던 관우에게 일격에 죽고 말았다.
양수(楊修) 175-219년
위나라의 재사. 자는 덕조(德祖). 화음 사람.
청렴과 덕망을 겸한 명문 출신으로서 재기가 발랄하고 두뇌 회전이 매우 빨랐다. 조조에게 발탁되어 식량의 관리, 공급 등에 수완을 발휘했다. 조조는 자기도 기지에 뛰어난 재사였기 때문에 자기가 출제한 계륵(鷄肋) 등 수수께끼를 양수가 쉽게 푸는 것을 보고 놀라는 한편, 질투가 섞인 경계심을 품게 되었다. 양수가 조식의 참모로 활발히 일한 것이 그것을 더욱 조장시켰다. 더구나 그는 원술이 조카에 해당된다는 조건도 있었다. 이미 조비를 후계자로 정한 이상 양수의 존재는 장차 화근이 될 근원이다라고 판단한 조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양표(楊彪) 142-225년
양수의 아버지. 자는 문선(文先). 화음 사람.
유명한 학자로서 '관서의 공자'라 불리던 양진의 증손이다. 사도 벼슬에 있으면서 동탁의 천도에 혼자 반대하다 파면당했다. 또 조조의 미움을 받아 살해당할 뻔했으나 공융의 항의로 목숨을 건진 일도 있었다. 후에 한황실이 종말에 가까왔다는 것을 알고 발병을 핑계로 은퇴했다.
여몽(呂蒙) 178-219년
오나라의 명장. 자는 자명(子明). 부피 사람.
15,6세 때부터 종군하여 정보 등과 함께 오나라의 중진이 되었으나, 언젠가 손권에게 학문에 대한 설명을 듣고 발분하여, 유학자도 따르지 못할 학식을 지니게 되었다. 강적 관우와 형주에서 대결했을 때는 젊은 육손을 앞세워 상대를 방심하게 하고 그 틈에 후방을 급습하여 관우를 고립 무원의 상태에 빠뜨렸다. 인간의 심리를 역이용한 이 작전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포(如布) ?-198년
후한말의 무장. 구원 사람으로 자는 봉선(奉先).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여 병주자사 정원을 따라 낙양으로 가서 동탁과 싸우다가 마침내 정원을 죽이고 동탁에게로 귀순, 그의 심북이 되어 장안으로 갔다. 그러나 얼마 후, 동탁에게 소외당하였기 때문에 사도 왕윤과 결탁하여 192년에 동탁을 살해했다. 동탁의 부장 이각에게 공격을 당하고 장안을 빠져나와 남양의 원술에게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원소에게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원소가 죽이려 하자 이번에는 진류의 장막에게로 도피, 원주목으로 임명되어 조조와 싸웠지만 패하여 유비에게로 도피하였다. 그는 한숨을 돌린 후 원술을 공격, 하비를 점령하고 스스로 서주자사라 칭하고, 곧이어 원술과 결탁하여 하비에서 유비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조조가 유비를 도와 여포를 공격하여 마침내 붙잡혀 살해당하고 말았다.
염포(閻圃)
조조의 막료.
원래 오두미도의 장노의 부하로서, 그에게 적절한 조언을 하여 도왔다. 나중에 조조한테 귀순하여 열후에 올랐다.
왕보(王甫)
환관.
조절과 함께 청류파 타도에 앞장서서, 2차에 걸친 당고 사건을 직접 지휘했다. 두무, 진심 등의 환관 주멸 계획에 역쿠데타를 일으켜 이를 막은 뒤부터 영화를 누렸으나, 뒤에 탄핵을 받고 옥사했다.
왕필(王弼) 226-249년
후한말의 학자. 자는 보사(輔嗣). 고평 사람.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10세경에 '노자'에 경도했다. 뒤에 벼슬하여 조상밑에 있었으나, 출세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노장학에 심취하여 '노자', '역'의 주석을 달았다. 청담에 있어서는 당시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금(于禁) ?-222년
위나라의 명장. 자는 문측(文側). 거평 사람.
원소와의 싸움에 맹위를 떨쳐 호위장군에 임명되었다. 219년, 번성에서 관우의 군대와 싸우다 홍수를 만나 투항했다. 그 후 손권이 관우를 무찔렀을 때 구출되어 위나라에 귀환했으나, 조조의 무덤에 자기가 투항하는 그림이 그려진 것을 보고 굴욕감 끝에 병을 얻어 죽었다.
우길(于吉) ?-200년
오나라의 도사.
손책이 조조의 본거지인 허도를 공격할 때 기도를 드려 비를 내리게 했으나 손책의 분노를 사서 살해당했다. 그 직후 부상한 손책의 거울 속에 우길의 망령이 나타나 손책을 죽게 했다고 한다.
원담(袁譚) ?-205년
원소의 장남. 관도의 싸움에서 군대를 지휘했으나 조조군에게 패했다.
원소(袁紹) ?-202년
후한말의 군웅의 한 사람. 자는 본초(本初).
여남 출신으로 4대에 걸쳐 삼공의 지위에 있었던 명문 귀족이었다. 영제가 죽자 대장군 하진의 명을 받아 조조와 함께 강력한 군대를 편성하고 동탁을 초대하여 당시 정치적 부패의 요인이었던 환관들을 일소하려 하였으나,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어 하진이 살해당했다. 이 계획이 실패하자 독자적으로 환관 2천여명을 살해하였으며, 동탁은 먼저 수도 낙양에 들어가 황제를 옹립하였다. 그는 하북에서 동탁 토벌군을 일으켜 그 맹주가 되어 동탁을 공격, 장안까지 패주시키는 데 성공하고 하북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한편 조조는 처음에는 원소와 제휴하였으나, 그 후 허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들 두 사람은 화북의 세력을 양분하고 상호 견제하던 중, 200년에 관도에서 대결전을 벌인 결과 원소는 대패하고 분사했다. 또한, 그의 뒤를 이은 원담은 동생 원상과 반목이 극심한 가운데 조조에게 모두 살해당하였다.
원술(袁術) ?-199년
원소의 사촌 동생. 일설에는 친동생이라고도 한다. 자는 공로(公路). 여양 사람.
황건적 토벌로 공을 세워 대장군 하진의 신임을 얻었다. 하진이 환관에게 살해되자 원소와 함께 환관 대학살을 감행했다. 그 후 동탁에 의해 후장군에 임명되었으나 탈출하여 남양군에 근거했다. 마침 북상해 온 손견을 황제에게 상주하여 파로장군에 임명케 하여 손견이 낙양을 함락시키자, 동탁은 장안으로 도주했다. 원래 원술은 원씨 일가에 의한 제위 찬탈을 뜻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소가 황족인 유우를 제위에 올리려 하자 양자는 대립하게 되었다. 원술은 원소측에 가담한 조조에게 꾀하여 양주에 들어가서, 197년 드디어 수춘을 수도로 하여 즉위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사치와 음탕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근본적으로 통치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마침내 원소와 조조에게 잇달아 패배하고, 원소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그 도중에 병을 얻어 피를 토하고 죽었다.
원외(袁畏) ?-190년
원소 및 원술의 숙부.
소제의 태부로서 환관 주멸에 활약했다. 후에 동탁의 장안 천도때 동반하여, 원소가 반 동탁군을 일으키자 미성에서 일족이 모두 동탁에게 살해되었다.
원희(袁熙) ?-207년
원소의 차남.
조조이 북정 때 오환으로 도망쳤으나 나중에 공손강에게 살해되었다. 아내 진씨는 조비의 아내가 되었다가 나중에 황후로 승격했다.
위연(魏延) ?-234년
유비의 용장. 자는 문장(文長).
유비를 따라 촉에 들어가 장비를 제치고 한중군태수에 임명되었다. 제갈량의 북정 때는 장안 급습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갈량이 죽은 뒤 부장관인 양의와 다투던 중 마대에게 살해당했다.
유대(劉岱) ?-192년
후한말의 군웅의 한 사람.
189년, 동탁에게 발탁되어 연주자사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임지에 도착하자 반동탁군을 일으켜 원소 등고 연합군을 형성했다. 192년 4월, 청주의 황건적 백만이 연주에 침임했을 때, 지구전으로 싸우라는 포신의 헌책을 듣지 않고 공격하다가 전사했다.
유벽(劉壁)
황건적의 장수.
하의, 황소 등과 함께 여남, 영천에서 세력을 떨치다가 조조의 공격을 받고 항복했다. 관도에서 조조가 원소와 싸울 때 원소측으로 전향하여 허도를 남쪽에서 위협했다.
유비(劉備) 161-223년
촉한의 초대 황제. 자는 현덕(玄德). 전한 경제의 황자 중산정왕의 후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발과 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이었으나, 15세 때 노식에게 사사하여 동문 공손찬과 교의를 맺고 호혐들과 교유하는 한편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도당을 모아 그 토벌에 참가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그 후 공손찬에게 의탁하여 원소와의 대전에서 공을 세웠다. 196년, 원술로부터의 공격을 물리치고 진동장군 의성정후에 임명되어 조조에게 의탁하고 있었으나, 조조 살해 계획에 참가했다가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자 하비로 탈주하였다. 원소, 조조의 관도대전에서는 원소와 동맹하고, 이에 패하자 형주목 유표에게로 갔다. 이 무렵, 삼고지례로 제갈량을 맞아들여 그의 계략으로 형주에서 기반을 구축하던 중, 유표가 죽고 그의 아들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형주를 공격해 왔다. 유비는 손권과 동맹하여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대파하고 형주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형주의 영유 문제를 놓고 손권과 대립하여 명장 관우가 죽고 형주는 손권이 영유하게 되었다. 유비는 이 사이 한중을 공격하여 한중왕이 되었으며, 220년 조비가 한헌제의 양위로 위의 황제가 되자, 221년 유비도 제위에 올라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한이라 하니, 이른바 삼국의 촉한이다. 다음해 형주의 탈환과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이릉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백제성에서 후하를 제갈량에게 위탁하고 병사하였다.
유선(劉禪) 207-271년
촉의 2대 황제. 자는 공사(公嗣). 유비의 아들. 재위 223-263년. 감황후 태생.
무능한 인물로서, 제갈량에 이어 장완, 비위가 보좌하고 있는 동안은 나라가 평안했으나, 그들이 잇달아 죽은 뒤 유선은 환관 황호를 신임하여 국정의 부패를 초래했다. 이어서 위나라의 침임을 받아 성도가 함락됨으로써 3국 정립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위나라는 유선을 안락현공에 봉했는데 그는 이것을 만족해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조소를 받았다 한다. 그 후 중국에서는 그의 아명인 '아두'가 무능한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유엽(劉曄)
위의 모사. 자는 자양(子陽). 성덕 사람.
조조에게 인정을 받아 항상 측근에 있으면서 참모 역할을 했다. 관도 싸움에서는 원소의 군사를 벽력거를 만들어 격퇴하고, 원소군이 터널을 파고 들어오자 깊은 도랑을 파서 막았다.
유요(劉繇)
후한의 관리로 자는 정례(正禮). 모평 사람.
양주자사로 있었으나 주도 수춘이 원술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곡아에 주도를 두고, 근처에서 세력 확장을 도모하는 손책일족을 격퇴했으나 후에 그들에 의해 쫓겨났다.
유장(劉璋) ?-219년
후한말의 군웅의 한 사람. 자는 계옥(季玉). 경릉 사람.
아버지 유언의 뒤를 이어 익주의 목이 되었다. 그는 조조가 원정군을 이끌고 온다는 말을 듣자 동요한 나머지 법정, 장송 등 친유비파의 진언을 들어 유비를 촉에 맞아들였다. 촉에 들어온 유비는 한중 방위에 나서는 체 하면서 군사를 동원하여 유장이 있는 성도로 향했다. 전장병은 결상 항전할 태세를 취했으나, 유장은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여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고 한다. 그 후 손권이 형주를 탈취한 뒤 유장은 그에 의해 익주목에 임명되었다.
유파(劉巴) ?-222년
후한말의 무장. 자는 자초(子初). 승양 사람.
유표 휘하에 있다가 조조의 형주 공격때 그에게 항복하여 장사, 영릉, 계양 등으로 귀순 권고를 하러 다녔다. 적벽 대전 후 유비가 그 3군을 손에 넣자 멀리 안남 지방으로 망명했다가 유비에게 사죄하고 촉으로 들어갔다.
유표(劉表) 142-208년
전한 경제의 아들. 자는 경승(景升). 고평 사람.
어려서부터 유학자로 알려졌으며, 당고 사건때는 몸을 피하여 위기를 면했다. 그 후 하진의 속관이 되었다가 형주자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형주에는 군소 호족들이 할거하고 회남의 원술도 이곳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무력을 갖지 못한 유표는 그 지방 출신 호족으로 학자로서의 명망도 높던 채모 등과 손을 잡고 그들의 협력을 얻어 군소 호족들을 평정하는 동시에 192년에는 원술의 선봉장으로 침공한 손견을 무찔러 반석 같은 기반을 닦았다. 무장군 10만의 수비를 받는 형주는 중원의 전란에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고 잠정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으므로 이름난 유학자들이 난을 피해 모여 왔다. 유표는 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경전의 교정 작업 등을 하게 했다. 그러나 조조, 원소의 관도 싸움 때 캐스팅 보우트를 쥐고 있으면서도 우유 부단한 성격으로 망설이고만 있었으므로 천하 웅비의 기회를 놓쳤다. 유비가 조조에게 쫓겨 기탁해 왔을 때도 쾌히 받아들였으나, 내심으로는 경계하여 중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 형주는 조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육손(陸遜) 183-245년
오나라의 공신. 자는 백언(伯言). 오 사람.
그는 일족을 이끌고 손권의 휘하에 들어가 회계산과 파양호에 근거하던 도적을 무찔러 명성을 얻었다. 219년에는 여몽을 대신하여 형주에 주둔, 탁월한 전략으로 관우를 무찔러 형주를 오나라의 영유로 삼았다. 그 공으로 진서장군이 되고 누후에 봉해졌다. 촉나라의 유비는 관우가 죽고 형주를 빼앗긴 일로 손권에게 원한을 품고 221년에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진격해 왔다. 이때 육손은 방위군 총사령관으로서 이릉에서 맞아 싸웠다. 이것이 유명한 '이릉의 싸움'으로서 그 결과 육손이 대승했다. 그 후 육손은 보국장군 형주목으로 승진하고 강릉후가 되었다. 그 뒤에도 계속 형주에 남아 위, 촉의 동향을 살피며 손권에 대해 자주 헌책했다. 손권 역시 내정, 외교면에서 중대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리하여 244년, 형주에 주재한 채로 정승에 임명되는 등 오의 중신으로 군림했다. 이에 앞서 손권은 왕부인 사이에서 난 손화를 태자로 삼았으나, 한편으로는 그 동생 손패를 사랑하여 노왕으로 봉하고 태자와 같이 대우하고 있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태자파와 노왕파가 대두되어 서로 다툼을 벌였다. 형주에서 이 소문을 들은 육손은 상서를 올려 태자에게 더 비중을 두도록 요구했다. 이에 겁을 먹은 노왕파는 21개군에 달하는 육손의 죄상을 들어 손권에게 제출했다. 이에 손권이 일부러 형주에가지 문책의 사신을 보내자 육손은 분노 끝에 죽고 말았다. 나중에야 손권도 그 무죄를 알고 후회했다.
이각 ?-198년
동탁의 부하.
전선에 나가 있을 때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되자 가후의 진언을 받아들여 장안을 공략키로 했다. 이에 군사를 동원하여 여포를 몰아내고 왕윤을 처형한 뒤 동료인 곽사와 함께 조정을 마음대로 움직였다. 그 후 장안에서 곽사와 내분을 일으켜 혼란한 틈을 타서 헌제가 장안을 탈출하자 이각은 다시 곽사와 화해하고 도주중인 헌제를 쫓아 괴롭혔다. 후에 헌제가 파견한 토벌군에 잡혀 효수당했다.
이숙(李肅) ?-192년
후한말의 무장.
왕윤의 부하로서 여포에 호응하여 동탁을 죽였다. 후에 동탁의 사위 우보를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여포에게 추궁당해 살해되었다.
이엄(李嚴) ?-234년
촉한의 장수. 자는 정방(正方). 남양 사람.
원래 유장 휘하에 있었으나 유비의 촉 입성때 그에게 전향했다. 그 후 촉에서 요직을 역임했고, 유비가 죽음에 임하여 후사를 제갈량과 함께 당부할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제갈량이 4번째 위 정벌에 나섰을 때, 군량 보급의 임무를 소홀히 하여 제갈량에게 책임 추궁을 받고 평민으로 강등되어 유배를 갔다. 3년 후, 제갈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에 걸려 자신도 죽었다.
이풍(李豊) ?-254년
위나라의 중신.
254년, 위나라 황제 조방의 명으로 장즙 등과 함께 사마사 타도를 모의했다. 그러나 이 모의가 사마사에게 알려져 자백을 강요당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누가 미칠 것이 두려워 고의로 악담을 퍼부어 사마사의 분노를 사서 죽임을 당했다.
악진(樂進)
위의 장수. 양평 위국 사람으로 자는 문겸(文謙).
조조가 진류에서 의병을 일으켰을때 맨 먼저 참여하였다. 적벽대전후 오와 대결하게 되자 대장으로 출전하여 단기로 손권에게 달려들어 송겸, 가화가 가로막는 창을 단칼에 베어 떨구고 덤벼 용맹을 떨쳤다. 몸집은 작았으나 담력이 있었다.
여백사
조조의 아비 조숭과 친하게 지내던 사람. 조조가 동탁을 찌르려다 실패하고 도피할 때 옛정을 믿고 의탁하였다가, 자기를 대접하기위해 돼지를 잡으려 칼을 가는 것을 오해하여 가족들을 몰살시켰다. 나중 이를 알고 조조가 '아차 잘못을 저질렀구나!' 후회를 하나 별수없이 몸을 빼쳐 달아나는데, 도중에서 술을 사가지고 오는 여백사와 만났다. 몇마디 인사끝에 다시 돌아서 마저 죽여버리니 여백사의 집안은 이래서 멸족이 되었다.
영포
서촉 유장의 휘하 장수.
유장이 장노를 막고자 유비를 불러들일때 극력 반대하였고, 다시 유비가 부수관을 뱃고 낙성을 칠때도 용감하게 항전하였다. 그러다가 위연에게 사로잡혀 항복하곤 곧 성에 돌아가 성도로 구원병을 청하였다. 오의가 군사를 이끌고 오자 물을 대어서 부성을 칠 것을 건의하고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였다가 위연에게 패하여 죽었다.
오태부인(吳太夫人)
손견의 둘째부인.
자매가 함께 손견에게 시집와서 언니는 손책, 손권을 낳고, 동생은 딸 하나를 낳았을 뿐이건만 손권은 그를 어머니로 섬기어 말 한마디에도 허술하지 않게 모셨다. 적벽대전 후 형주를 빼앗긴 데 애를 태운 주유가 그의 소생인 손권의 누이를 미끼로 유비를 유인하여 죽일 계교를 세웠으나, 제갈량이 전후의 사정을 먼저 오태부인에게 전하게 함으로써 무사히 혼사를 진행하게 만들었다.
왕경(王經)
위의 문신.
조모가 사마소에게 핍박당하여 무모하게 근위병만을 이끌고 이를 친다고 나섰을때 일은 찬찬히 도모해야 된다고 간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끝내 사마소에 잡혀 저자에 끌려나가 죽기 직전인데 늙은 어머니가 잡혀와서는 태연히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이요, 죽을 만한 일에 죽는 것이 떳떳하지 않느냐"고 자식을 달래며 함께 죽어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숙연케했다.
왕관(王瓘)
위의 장수.
사마소가 폐립을 감행한 뒤 등애를 따라 촉한과 싸울때, 거짓 항복하고 내응하려 했으나 이를 간파한 강유에게 역이용당해 등애는 참패당했다.
왕랑(王朗)
위의 문신. 동해 사람으로 자는 경흥(景興).
헌제 때 효렴에 발탁되어 벼슬하였는데, 조조의 아들 조비가 황제가 된 뒤에도 그를 섬겨 벼슬이 사공에 이르렀다. 제갈량의 침공을 맞아 하후무가 대패한 뒤 당시 이미 76세였으나 조진을 도와 출전하였다가 제갈량과 전장에서 만나 토론하다가 그의 조리 있는 변설에 화가 치밀어 낙마했고 후송 도중에 죽었다.
왕윤(王允)
후한의 중신.
항시 조정일을 근심하던 중 자기집 가기 초선의 충성에 감격, 그의 몸을 희생시켜 연환계로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갈라 결국 동탁을 죽이는데 성공하고 장안의 봄을 맞이 하였으나 결국 자신도 멸족을 당하였다.
왕평(王平)
촉한의 장수. 파서 암거 사람으로 자는 자균(子均).
조조밑에서 아문장군으로 있었는데, 한중지방의 지리에 밝아 서황을 도와 부선봉이 되어 유비의 군대와 맞섰다. 서황이 배수진을 쳤다가 패하고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므로 조운에게 투항하였다. 제갈량의 남만 정벌에도 부장으로 출전하였고 성격이 신중하였으므로 제갈량은 제1차로 기산에 출병하였을 때 마속을 도와서 나가게 하였는데, 마속은 그의 충고를 듣지 않다가 가정에서 패하고 말았다. 얼굴도 못생겼고, 또 글을 몰랐다고 하며, 그런때문에 모든 문서를 입으로 불러서 작성했지만 사리가 분명했다 한다.
요화(寥化)
촉한의 장수.
산적으로 있다가 관우가 오관을 독파할때 도중에서 가족을 납치한 두원을 죽이고 귀순하였다. 관우를 따라가려다가 이루지 못하더니 뒤에 형주를 차지하였을때 찾아와 그의 수하에 들어 활약하였다. 나중 제갈량을 도와 많은 싸움에 공을 세웠다. 상박곡에서는 단기로 도망하는 사마의와 마주쳐 그를 쫓았는데 사마의가 나무를 싸고도는 것을 찍었다가 칼날이 나무에 박히는 바람에 아까운 기회를 놓쳤다. 그 뒤 계속 살아남은 유일한 구장으로 강유와 함께 잘 싸웠는데, 결국 촉이 망해 버리자 울분에 심장이 터져 죽었다.
우전(于詮)
오의 장수.
제갈탄이 사마씨를 치고자 반기를 들었을때 구원차 파견되었으나, 수춘싸움때 위의 장수 왕기와 맞부딪쳤다. 왕기는 그에게 항복하라고 하였으나 "싸움터에서 죽는다는 건 남아로서 당연하다"고 맞붙어 싸우다가 죽었다.
원담(袁譚)
원소의 큰아들. 자는 현사(顯思).
청주자사로 있을 당시 서주에서 패하여 의지해 온 유비를 평소부터 숭배하고 있는 터라 반갑게 맞아들여 의탁해 있게 하였다. 나중 아우 원상과 싸우다 지쳐 조조에게 항복했다.
원상(袁尙)
원소의 셋째아들. 자는 현보(顯甫).
후처 유씨의 소생으로 유씨가 그의 재덕을 찬양하였고, 원소 자신도 특별히 귀여워했다. 모사 심배와 봉기가 그를 도왔다. 원소가 관도에서 패하고 다시 세력을 규합하여 창정에서 반격하였을때, 제일진에서 조조의 장수 사환을 쏘아죽였다. 나중 형 원담과 싸우다가 흉노에게 의지하고 요동으로 갔다가 공손씨에게 죽었다.
유종(劉琮)
유표의 작은아들.
후처 채씨 소생으로 아비가 죽은뒤 외가 일족에게 옹립되어 열네살에 형주의 주인이 되었고 조조에게 항복하였으나 곧 멸족당했다.
유파(劉巴)
서촉 유장 휘하의 장수. 영릉 승양 사람으로 자는 자초(子初).
유비가 양식과 군사를 빌려달라고 하자 이에 적극 반대하였고 후에 유장이 항복한뒤 유비가 몸소 찾아 권하는데 감복하여 다시 벼슬을 하게 되었다. 유비가 황제를 칭하였을때 모든 문서와 고명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육손(陸遜)
손권 휘하의 지장. 오군 오현 사람으로 자는 백언(佰言). 소패왕의 사위.
어린 나이로 뛰어난 지략을 지녀 관우의 배후를 습격한 꾀도 그에게서 나왔고, 훗날 유비가 복수를 위해 군사를 동원했을때도 노장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침착하게 작전하여 촉의 40여 진지를 불살라 승리를 이끈것이 모두 그의 지모에서 나온 것이다. 유비를 추격할때 어복포에 이르렀을때는 제갈량이 남긴 돌로 쌓은 팔진도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죽게 된것을 제갈량의 장인 황승언이 구해 주어서 살아났다.
육적(陸籍)
손권의 모사. 자는 공기(公紀).
여섯살때 구강에서 원술을 만났는데, 그때 먹으라고 준 귤 세개를 안 먹고 품에 간직하였다가 물러나려고 인사할때 떨어뜨렸다. 원술이 "육랑은 왜 그것을 먹지 않고 가지고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돌아가 어머님께 드리려 하였습니다"하여 그의 효심을 칭찬받았다.
이적
유비의 막빈. 산양 사람으로 자는 기백(機伯).
본래 유표의 식객으로 유비에게 남다른 호의를 베풀어 채모가 여러차례에 걸쳐 그를 해치려 할 때마다 일러주어 위기를 모면하게 해주었다. 적벽대전 후 유비가 형주를 차지하였을때 마량, 마속 형제를 천거하였다.
이전(李典)
위의 장수. 산양 거록 사람으로 자는 만성(曼成).
조조가 처음 진류에서 의병을 일으켰을때 악진과 함께 맨 먼저 참여하였다.
이응(李膺)
이응은 천하의 모범으로 불린 청류파의 거두였다. 후한 11대 환제때 단초 등 내시의 전횡으로 태학(국가교육의 최고기관으로 관료양성기관)의 학생 3만여명을 배경으로 하는 정의파 관료의 저항이 일어나 '청류운동'이 활발해졌다. 이 운동에 가담한 이응은 단연 발군이었다고 한다.
당시 태위 진번의 천거로 사례교위가 된 이응은 정의파 관료의 대표적 인물로 바른 품행과 청빈한 자세를 지키고 있었다. 이 당시 학생들은 '천하의 모범은 이원례(이응의 자), 강적을 두려워하지 않는것은 진중거(진번의 자), 천하의 수재는 왕숙무'라고 평했다. 이렇듯 이응의 명성은 높아져 이응의 집 바깥 대청에 오르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은 그를 보고 용문에 올랐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용문에 오른다' 할때의 용문은 황허의 상류에 있는 산 이름으로 계곡물의 흐름이 가장 급하여 큰강이나 바다에서 온 대어 수천이 군집하는데 만일 이 급류를 끝까지 오를 수 있는 물고기는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었다.
결국 등용문에 올랐다는 말은 이 전설을 빗대어 이응과 만날수 있는것과 결부되어 생겼다. 바꾸어 말하면 저명한 인물과 면접할 수 있는것, 영달하게 되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악환
고정의 부하로 신장이 9척에 방천극을 사용했다고 한다.
장각(張角) ?-184년
황건적의 난의 지도자. 거록 출신.
후한 말기의 종교 결사로서 후대의 도교의 원류의 하나로 치는 태평도의 창시자이다. 후한은 순제때부터 내정이 문란해져서 천재지변이 계속 일어나고 세상이 어지러웠다. 그런 속에서 장각은 주술을 행하고 부적이나 영수를 마시게 하여 병을 고친다는 요법으로 민심을 모아 태평도를 일으켰다. 이어 대현량사라 자칭하고 제자를 각지에 파견하여 수십만에 달하는 대중을 조직화한 후, 184년 한조 타도를 목표로 거병하였다. 반란군은 새 왕조의 출현을 표방하는 황색 천을 매고 있었으므로 황건적이라 불렀고, 장각은 천공장군이라 칭하여 두 동생과 함께 농민을 규합하였다. 그러나 그 해 병사함으로써, 반란군도 황보숭 등의 군세에 패하여, 장각의 관은 파헤쳐져서 그 목은 낙양으로 보내졌다.
장노(張魯)
한중의 군웅의 한 사람. 자는 공기(公期). 패국 사람.
조부인 장릉이 창시한 오두미도를 계승하고, 익주목 유언의 명으로 한중을 토벌할 때 오두미도에 입각한 독립국을 세웠다. 215년, 조조가 토벌군을 이끌고 오자 저항하지 않고 투항하려 했으나 동생의 반대로 대항하여 싸웠다. 요새인 양평관이 뜻밖에 함락된 뒤 소수 민족 지역으로 도망쳐 저항을 계속했으나 마침내 조조의 설득으로 귀순하여 진남장군에 봉해졌다.
장막(張邈) ?-195년
후한말의 명사. 자는 맹탁(孟卓). 수장 사람.
원소, 조조 등의 친구로서 190년 1월, 반동탁 연합군의 일익을 담당했다. 그 후 원소가 오만해지자 이를 간하다가 미움을 받았다. 원소가 조조에게 장막의 암살을 명했으나 조조가 이를 거절한 것을 알고는 조조에 대한 신뢰를 깊이 했다. 그 후 조조가 봉기할 때 영지를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맹우로 삼았다. 194년, 조조가 서주의 도겸을 공격하고 있는 동안, 진궁, 장초 등의 모략을 받아들여 여포와 동맹하고 조조를 배반했다. 이듬해 조조에게 패하여 여포와 함께 유비 휘하로 들어가 원소에게 구원을 청하러 가는 도중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장비(張飛) ?-221년
중국 삼국 시대의 촉의 무장. 자는 익덕(翼德). 하북성 탁군 출신.
유비, 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어 평생 그 의를 저버리지 않았으며, 후한말 동란기의 수많은 전쟁터에서 절세의 용맹을 떨쳤다. 유비의 익주 공략 때는 주력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워 파서태수가 되었다. 위의 명장 장합이 장노를 무찌르고 파서로 밀고 들어오자 역전 끝에 이를 격퇴하였다.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 사례교위에 임명되었다. 그 후 유비가 죽은 후 관우의 복수를 위하여 오를 치려는 동정에 종군할 준비를 하던 중 부하에게 암살되었다. 관우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용장으로 일컬어지며, 특히 형주에 있던 유비가 조조의 대군에 쫓겨 형세가 아주 급박하게 되었을 때 장판교 위에서 '내가 장익덕이다'하고 일갈하여 위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장소(張昭) 156-236년
오나라의 건국 공신. 자는 자포(子布). 팽성 사람.
어려서부터 박식하기로 이름나 서주자사 도겸의 부름을 받았으나 거절하여 감금된 일이 있다. 그 뒤 황건적의 난을 피해 강남으로 이주했다가, 197년에 손책이 강동에 발판을 마련했을 때 그 참모가 되었다. 200년, 손책의 유촉을 받은 그는 비탄에 잠긴 손권을 꾸짖어 상복을 군복으로 갈아입게 하고 전군을 순찰시켰다. 그 후 주유 등과 협력하여 젊은 손권을 잘 보좌했다. '춘추좌씨전해', '논어주' 등의 명저를 저술하기도 했다.
장송(張松) ?-212년
유장의 모사.
208년 7월, 형주를 빼앗은 조조에게 전승을 축하하러 갔으나 풍채가 좋지 못해 무시당하고는 그 자리에서 유비를 찾아가 예우를 받고 또 유장에게 냉대를 받던 법정과도 친교를 맺었다. 211년, 한중의 장노 토벌에 나선 조비에 대한 대비책으로 유비와 함께 한중을 치도록 유장에게 진언하고 그 사신으로 법정을 추천했다. 이어서 법정과 함께 유비의 촉 탈취 계획을 추진시켰으나 형인 장숙의 밀고로 유장에게 살해되었다.
장수(張繡)
후한말의 군웅의 한 사람. 장제의 조카.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변장, 한수의 군사를 무찔러 이름을 날렸다. 장제가 죽은 뒤 그 군대를 인계받아 일단 조조에게 투항했으나, 아내를 빼앗긴 원한으로 다시 반하여 원에서 조조를 패주시키고 조조의 장남 조앙을 죽였다. 이어서 유표와 동맹하여 조조를 괴롭혔으나 178년 5월에 조조군에게 패했다. 다시 이듬해 11월, 관도의 싸움 때 모사 가후의 진언에 따라 조조 휘하에 들어가 큰 공을 세웠다.
장숙(張肅)
장송의 형.
장송과는 달리 풍채가 좋아 조조로부터 광한태수에 임명되었다. 장송의 유비 입촉 밀계를 유장에게 알려 동생을 죽게 만들었다.
장연(裝燕)
황건적의 일파인 흑산적의 지도자. 진평 사람.
원래의 성은 저였으나 동료인 장우각이 죽은 뒤 장씨로 고쳤다. 황하 이북에서 맹위를 떨쳐 한때 그 휘하에 백만 군사를 거느렸다. 후에 영제에게 귀순하여 벼슬했으나, 동탁의 장안 천도 후에 다시 독립 세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공손찬을 돕다가 원소에게 패하고, 조조에게 귀순하여 업에 들어가 벼슬했다.
장온(張溫)
후한의 중신.
조등의 천거로 출세한 인재의 한 사람이다. 황건적 토벌군 사령관 주준의 경질을 영제에게 상서하여 철회시키고, 184년말 양주에서 변장, 한수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동탁의 작용으로 반란군을 미양에서 격파했는데, 이를 추격한 6개군 중 5개군이 패배하고 동탁의 군사만이 무사히 귀환했다. 그 후 명령 위반으로 동탁의 처형을 주장하는 손견의 진언을 물리쳤으나, 장안 천도 후 동탁에게 살해되었다.
장완(蔣琬) ?-245년
촉의 중신. 자는 공담(公啖). 상향 사람.
제갈량의 출전중 성도에 머물면서 원정군의 식량 보급에 만전을 기해 제갈량으로부터 나의 오른팔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234년,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중태에 빠지자 그 후계자로 지명되어 국정의 전반을 맡았다. 그는 제갈량과 같은 위엄은 갖지 못했으나, 침착한 집무 태도로 제갈량이 없는 촉의 동요를 막고 피폐된 국력 회복에 전력했으나, 병이 들어 전권을 비위에게 넘겨 주고 죽었다.
장요(張療) 171-221년
위의 장수. 자는 문원(文遠). 마읍 사람.
정원, 하진, 동탁, 여포 등을 섬기다가 조조의 막하에 들어갔다. 여러 차례의 전공 가운데서도, 합비를 에워싼 손권의 군대를 8백의 돌격대로 격퇴한 무공이 가장 빛난다. 그 후에도 자주 손권의 군대를 무찔러 오나라 군사를 두렵게 했다.
장윤(張允)
조조의 장수.
원래 유표의 휘하에 있으면서 채모와 함께 유표의 작은 아들 유종을 비호하다가 조조에게 항복했다. 조조는 그의 경솔함을 싫어하여 죽이려다 잠시 수하에 두고 조련의 책임을 맡겼다. 오의 장수 주유가 조조군의 진영을 둘러볼 기회가 생겼을 때 장윤의 유능함을 보자 오나라에 위협이 되리란 것을 알고 빈객 장간을 계교로서 속여 조조로 하여금 그를 죽이게 했다.
장익(張翼)
유비의 장수. 자는 백공(伯恭).
원래 유장의 수하에 있었으나 낙성에서 유비에게 항복해 그의 장수가 되었다. 제갈량의 남만 정벌 때 부장으로 출전했고, 제갈량이 죽은 후 강유와 함께 대장군이 되어 활약을 했다. 뒤에 종회가 성도 탈환을 위해 공격해 오자 이를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장제(張濟)
동탁의 부하.
동탁이 죽은 후 이각, 곽사 등과 함께 동탁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장안에 들어와 횡포를 부렸다. 이각, 곽사의 난 후 장안에서 군사를 모아 형주, 양성을 공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장포(張苞)
장비의 아들.
아버지가 죽은 뒤 관우의 아들 관흥과 함께 유비의 총애를 받으며 크고 작은 싸움에 공을 세웠다. 후에 사마의의 선봉 곽회를 공격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고 그 상처가 도져 병으로 죽었다.
장합(張哈)
조조의 명장. 자는 준개. 막 사람.
원래 한복 휘하에 있었으나 그가 죽은 뒤 원소에게 투항하여 그의 공손찬 격멸에 큰 공을 세웠다. 관도의 싸움 때 원소와 의견이 맞지 않아 조조에게 투항한 후 각지를 전전하면서 잇달아 승리를 거두었다. 215년, 한중의 장노 토벌에 선봉대의 역할을 하고 하후연과 함께 한중을 수비했으나, 217년 유비, 법정에게 패하여 한중을 잃었다. 231년, 사마의가 총대장으로 부임하자 그와 자주 충돌했고, 이 해 제갈량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해 사마의의 명령으로 약양으로 후퇴하는 제갈량을 몰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장훈
원술의 장수.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고 7로의 군사를 동원하여 중원을 공략할 때 전군을 통솔하였으나, 한섬, 양봉의 배반으로 실패했다.
장흠(張欽)
오의 장수. 자는 공덕. 수춘 사람.
손책, 손권의 2대를 섬긴 장수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여몽과 함께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으나 후에 관우를 공격하다가 전사했다.
저수(沮授)
원소의 모사.
원소의 조조 공격을 반대하다가 진중에 감금되어 있으면서도 천문을 보아 적의 야습을 예견하고 대책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이 싸움에서 대패하여 달아나다가 끝내 붙잡혀 죽었다.
전위(全韋)
동오의 장수.
위의 제갈탄이 사마씨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동오의 군대를 이끌고 이를 도우러 나갔다. 그러나 수춘성에 이르다가 사마소의 포위군에게 패하여 항복했다.
전주(田疇)
조조의 장수.
원래 원소의 부하였으나 조조에게 귀부하였다. 조조의 사막 지대 공격 때 노릉구에서 백단의 산길을 넘어 유성을 치도록 건의하여 이 일이 성공하자 그 공으로 높은 벼슬이 주어졌으나 사양했다.
전풍(田豊)
원소의 모사.
조조와의 관도 싸움 때 저수와 같이 지구전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전투 준비에 분망하고 있던 조조가 원소와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킨 유비를 공격할 때, 그 배후를 치도록 건의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소가 남진을 개시하기 직전에도 다시 간언했다가 옥에 갇혔다. 원소의 패배가 결정적으로 확실해지자 그만 원소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정보(程普)
오나라의 장수. 자는 덕모(德謀). 토은 사람.
오나라 장수중에서 가장 연로하고 인물 등용이 뛰어나 존경을 받았다. 손견을 따라 황건적을 무찌른 후 더욱 신임을 받고, 그가 죽자 손책과 함께 거의 모든 전투에 참가했다. 또 손책이 죽자 그의 아들 손견을 잘 보좌했다.
정욱(程昱)
위나라의 모사. 자는 중덕(仲德). 동아 사람.
194년 조조가 두번째 서주 공격에 나섰을 때 장막과 진궁이 배반하여 근거지인 연주를 여포에게 넘겨 주었다. 이때 정욱은 순욱과 함께 진성과 다른 두 현을 확보하고 조조를 맞아들였다. 귀환한 조조는 사기가 떨어져 원소의 제의를 받아들여 인질을 보내 손잡으려 했으나 정욱은 이를 꾸짖으며 조조를 격려했다. 196년, 헌제를 맞아들이자는 조조의 제안에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순욱과 함께 적극 찬성했다. 또 유비를 경계해 그에게 군사를 맡기는 데 반대하고 그를 죽이자고 진언했다.
정원(丁原)
여포의 상관.
병주자사 시대에 여포를 발견하고 부관으로 삼았다. 하진이 환관을 없애고자 군웅을 낙양으로 불러들일 때 그의 명에 따라 낙양 교외의 맹진에 불을 지르고 혼란에 빠진 낙양의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 그러나 동탁의 꼬임에 빠진 여포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제갈각(諸葛恪) 203-253년
제갈량의 형인 근의 장남. 자는 원손(元遜). 양도 사람.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어 오의 손권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252년, 손권이 병으로 쓰러지자 국정의 전반을 맡았다. 어린 황제 손양의 즉위와 함께 부채의 면제, 물품세의 철폐 등 내정면에서 인심을 수습하는 한편 위가 손권의 상중을 기회로 대군을 이끌고 오자 이를 대파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253년,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위에 대한 침공군을 일으켰다가 작전의 실패와 병으로 대패하고 손준의 손에 살해되었다.
제갈근(諸葛瑾) 174-241년
오나라 손권의 막료. 자는 자유(子瑜). 양도 사람. 제갈량의 형.
동생이 촉을 받들고 있어 의심을 받기도 했으나 손권으로부터는 절대적 신임을 받고 가끔 촉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215년에 오와 촉이 형주를 둘러싸고 공방전을 되풀이하는 동안 조조가 한중에 침입했다. 이에 유비가 손권에게 강화를 제의하여 회담이 열렸을 때 쌍방의 대표로서 만난것이 제갈 형제였다. 두 사람은 공식 석상에서는 만났으나 개인적으로 만난 일은 없었다.
제갈량(諸葛亮) 181-234년
자는 공명(孔明). 양도 사람으로 촉의 승상.
처사인 서서의 추천으로 유비에게 알려졌다. '삼고의 예'로써 유비가 그를 찾았을 때 '천하 3분의 계'를 유비에게 올렸다. 그 후 유비와 수어의 사귐을 맺었다. 208년, 적벽에서 조조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214년, 유비가 촉으로 들어가 교전을 하자 장비, 조운 등과 함께 성도를 공격했다. 220년, 조조가 위나라를 세우자, 다음해에 유비도 한나라 제왕이라 칭함고 동시에 승상이 되었다. 223년, 유비가 병으로 죽자 후주 유선을 받들어 촉나라를 다스리는 데 전념했다. 225년, 남쪽 변방을 치러 갔다가 남방의 수령 맹획을 일곱번 잡아 일곱번 놓아주어 남방 사람들의 환심을 샀다. 227년,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유선에게 출사표를 바쳤다. 228년, 군대를 이끌고 기산으로 나아가 위나라 군사와 접전을 했으나 참모인 마속의 실수로 첫번째 위나라 정벌은 실패로 끝났다. 이 해에 손권과 위나라 대사마인 조휴의 군사를 크게 무찌르고, 진창을 공략했으나 적의 단단한 수비로 인해 후퇴했다. 다음해, 위나라의 3군과 싸우는 전과를 낳았으나, 그 후 두 번에 걸친 정벌에서는 사마중달이 편 지구전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234년 오장원에서 대패하여 병으로 죽었다.
제갈첨(諸葛瞻) 227-263년
제갈량의 아들. 자는 사원(思遠). 양도 사람.
촉의 위장군으로서, 263년 위군이 대거 촉에 침공하여 성도에까지 이르렀을 때 면죽에서 방어선을 쳤으나 등애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조비(曹丕) 186-226년
위의 첫번째 황제인 문제. 재위 기간은 220-226년. 자는 자환(子桓)이고 조조의 둘째 아들.
아버지 조조와 동생 조식과 함께 건안 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이며 문인. 조조의 임종을 지켜 위의 왕이 되었고 후한의 헌제에게 선양받는 식으로 위나라를 세웠다. 그의 치세 동안에 제정된 9품관인법은 6조 시대의 귀족 사회 제도의 기초를 이룬 것으로 중국 역사상 중요시 되었다. 그는 정치가라기보다는 문학자로서 그의 시(특히 악부시)는 알기 쉬운 어휘와 치밀한 묘사로 이루어졌다. 문학을 논한 그의 '전론논문'은 후에 건안 칠자라 불리는 그와 동시대의 문학자 7명의 사람됨과 문학을 논하여 중국의 문예 비평의 선구가 되었다.
조숭(曹嵩) ?-193년
조조의 아버지.
환관 조등의 양자로 들어가 그가 죽자 많은 재산을 물려받고 1억전을 영제에게 바쳐 태위 벼슬을 얻었다. 퇴직 후 고향으로 은퇴했다가 동탁의 난 때 낭야국으로 피난했으나 조조와 적대하고 있던 도겸에게 살해되었다.
조식(曹植) 192-232년
위나라의 시인. 자는 자건(子建). 안휘성 사람. 조조의 세째 아들이며, 문제 조비의 아우이다.
그들 세 사람을 삼조라 하며, 함께 건안 문학의 중심적 존재로서 중국 문학사상의 주공, 공자라 칭송되었다. 맏형 조비와 태자 계승 문제로 암투를 하다가 29세 때 아버지가 죽고 형이 위의 초대 황제로 즉위한 뒤 시인 정의 등 그의 측근자들은 죽임을 당했고, 그도 평생 정치적 위치가 불우하게 되었다. 그의 재우와 인품을 싫어한 문제에 의하여 그는 거의 해마다 새 봉지로 옮겨 살도록 강요당하였고 엄격한 감시하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며 불우한 나날을 보내다가, 마지막 봉지인 진에서 죽었다. 그는 공융, 진임 등 건안 칠자들과 사귀어 당시의 문학적 중심을 이루었고 오언시를 서정시로서 완성시켜 문학사상 후세에 끼친 영향이 크다. 위, 진을 거쳐 당나라의 두보가 나오기까지 그는 시인의 이상상이기도 하였다.
조앙(曹昻) ?-197년
조조의 맏아들. 자는 자수(子脩).
생모인 유부인이 일찍 죽어 정부인에게 양육되었다. 197년, 조조를 따라 남양의 장수 정벌에 참가하여 항복받았으나, 이 해 장수의 두번째 반란때 살해되었다.
조예(曹叡) 205?-239년
위의 제 2대 황제. 자는 원중(元仲).
문제의 태자로 226년에 즉위하고 명제가 되었다. 아버지의 유조에 의해 조진, 조휴, 사마의, 진군 등이 보좌했다. 그는 침착과단한 인품으로 부화의 무리를 물리치고 스스로 정치를 행하였다. 즉위초, 오와 촉이 연합하여 위를 공략했으나 사마의 등 무장을 파견하고 자신도 전투에 출신하여 오를 격퇴했다. 그러나 만년에는 사치에 빠졌고, 그가 죽자 양자로 삼았던 제왕인 방을 보좌하던 자들의 내분으로 사마씨가 실권을 쥐게 되었다.
조운(趙雲) ?-229년
유비의 맹장. 자는 자룡(子龍). 진정 사람.
처음에는 공손찬 휘하에 있다가 나중에 유비의 신하가 되어 용맹을 떨쳤다. 유비가 장판에서 조조에게 쫓겨 유아였던 아들 선과 감부인을 버리고 도망갔을 때 조운이 단신으로 이를 구출했다. 214년에는 성도 공격의 일익을 담당하여 출전했고, 219년에는 한중 공방전에서 정찰 도중 위의 주력 부대를 만났으나 뛰어난 전술로 후퇴에 성공하여 유비의 찬탄을 받았다. 221년, 유비가 손권을 공격할 때 반대를 무릅쓰고 강주 수비에 나서 공을 세웠고, 228년에는 제갈량이 기산에 출전할 때 등지와 함께 양동 작전으로 기곡에 진주했다가 조조의 대군을 만나 소수의 군대로 잘 싸웠다.
조인(曹仁) 168-223년
조조의 종제. 자는 자효(子孝).
관도 싸움때, 유비가 허도 남쪽에서 반란을 선동하자 이를 진압하고 적벽대전 후 서황과 함께 강릉에 머물러 추격군을 막았다. 그 후 번선에 근거하여 관우의 공격을 잘 막았으나, 220년 손권이 공격해 오자 성에 불을 지르고 철수했다.
조조(曹操) 155-220년
삼국시대 위왕조를 세운 인물. 자는 맹덕(孟德). 묘호는 태조. 시호는 무황제. 패국의 초 사람.
환관의 양자의 아들인데, 황건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두각을 나타내어 마침내 헌제를 옹립하고 종횡으로 무략을 휘두르게 되었다. 화북을 거의 평정하고 나서 남하를 꾀했는데, 건안 13년 손권, 유비의 연합군과 적벽에서 싸워 대패, 이후로 그 세력이 강남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같은 해 승상, 동 18년 위공, 동 21년 위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정치상의 실권은 잡았으나 스스로는 제위에 오르지 않았고, 220년 정월 낙양에서 죽었다. 조조는 또한 문학을 사랑하여 많은 문인들을 불러들였으며, 자신도 그 아들 조비, 조식과 함께 시부의 재능이 뛰어나, 이른바 건안문학의 흥륭을 가져오게 하였다. 후세에 조조는 간신의 전형처럼 여겨져 왔는데, 근년에 이르러 중국 사학계에서는 그의 재평가를 둘러싼 논쟁이 일기도 하였다.
조진(曹眞) ?-231년
조조의 조카. 자는 자단(子丹).
일찌기 고아가 되어 조조에게 양육되었다. 중군 대장군 때 조비의 유언을 받고 조예의 후견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228년, 제갈량의 침공 때 군대를 이끌고 선전했고, 230년에는 촉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 제갈량이 다시 침입하자 이를 막다가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조창(曹彰) ?-222년
조조의 아들. 자는 자문(子文).
조비, 조식이 아버지의 문재를 이어받았다면, 그는 무재를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형인 조비가 제위를 물려받자 음으로 양으로 박해를 받다가 불우하게 죽었다.
조홍(曹洪) ?-232년
조조의 사촌 동생. 자는 자렴(子廉).
조조가 형양에서 동탁의 부하 서영에게 패했을 때, 부상당한 조조를 자기 말에 태우고 자신은 걸어갔다. 195년, 헌제가 안읍에 피난했을 때 조조로부터 헌제를 맞이하라는 명령을 받고 안읍으로 향했으나 도중에 방해를 받아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관도싸움에서 조조가 오소로 출격하자 본영을 잘 지켜 적장 장합, 고람의 공격을 방어했다.
조휴(曹休)
조조의 조카. 자는 문열(文烈). 조조의 아들.
조비를 섬겨 정동대장군이 되고, 조비가 죽을 때 그 아들 조예의 보필을 부탁받았다. 228년, 대사마로서 오나라 방위를 담당하다가 손권의 유인 작전에 말려 대패하고 도망했으나, 등에 생긴 악성 종양으로 죽었다.
종요(種繇) 151-230년
위의 중신. 자는 원상(元常). 장사 사람.
이각, 곽사 지배하의 장안에서 헌제를 도와 그의 장안 탈출을 위해 노력하고 후에 조조 휘하로 들어갔다. 관중에 세력을 떨친 한수, 마초 등을 내몰고, 관도싸움때는 관중에서 말 2천여 두를 공급하여 조조를 감격케 했다. 위 건국 후 태위에 올라 명제때가지 중신으로 있었다. 서예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좌자(左慈)
조조를 받든 요술사. 갖은 요술로 기적을 보였으나, 조조가 그의 도술이 두려워 해치려 하자 도망치고 말았다.
주령(朱靈)
조조의 장수.
조조가 유비를 총대장으로 삼아 원술 정벌을 하게 했을 때 부장으로 종군했다. 뒤에 조조가 장노 토벌의 군사를 일으켰을 때 장합과 함께 선봉장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주방
오의 장수. 자는 자어(子魚). 양선 사람.
파양태수로 있었다. 오가 위에 점거되어 있던 회남을 공략할 때, 손권의 명령으로 위의 장수 조휴를 지략으로써 끌어들여 대승을 거두었다.
주연(朱然)
손권의 장수.
형주 공방전 때 반장과 함께 맥성에서의 탈출을 시도한 관우의 퇴로를 차단했다.
주유(周瑜) 175-210년
오의 장수. 자는 공근(公瑾). 서성 사람.
손책과 같은 나이로, 어렸을 때부터 그와 둘도 없는 친구였다. 또 손책이 부친 손견을 잃은 뒤부터는 장소와 함께 손책을 보좌하여 오나라의 기초를 공고히 했다. 200년에 손책이 죽고, 19세의 손권이 뒤를 이었을 때, 그는 장소, 정보 등 문무관과 함께 손권을 보좌했다. 208년에 조조가 형주를 공략하고 남하했을 때는, 조조와의 강화를 주장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가운데 노숙과 함께 단호히 싸울 것을 주장하고 필승의 이유를 들어 손권으로 하여금 싸움에 나서도록 했다. 적벽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후 남군태수가 되었다. 그는 익주의 유장이 한중의 장노 공격에 고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익주를 쳐서 장노를 평정하고 이어서 마초와 동맹하여 조조를 멸할 계획을 세웠으나 원정 도중에 병사했다.
주이(朱異)
오의 장군.
253년, 제갈각의 대위 작전에 종군했으나 제갈각의 작전을 비판하다 지휘권이 박탈되었다. 257년에 위의 제갈탄이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켜 오의 구원을 요청하자 대군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여장수에서 위군에게 격퇴당하고 군법으로 처형되었다.
주전 ?-195년
후한의 장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황보숭과 함께 영천, 여남, 진국의 3군을 평정하고, 남양으로 군대를 몰아 완성을 점거한 황건적 10여만을 1만 8천의 군대로 섬멸했다.
진궁(陳宮) ?-198년
여포의 참모.
원래 조조의 심복으로서 연주 공략을 성공시켰으나, 얼마 후 장막을 유인하여 연주를 여포에게 넘겨주게 했다. 198년 10월, 하비성에서 조조군의 포위를 받고 여포에게 재삼 작전을 헌책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국 항복하여 여포와 함께 살해되었다.
진규(陳珪)
후한말의 명사. 자는 한유(漢瑜). 회포 사람.
어려서부터 명문이었던 관계로 원술과 친했다. 패국의 집정관으로 있을 때 같이 천하를 도모하자는 원술의 청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민심이 조조에게 쏠려 있다고 충고했다. 197년, 원술이 여포와 연합하려는 것을 알자 여포를 설득하여 조조에게 합류하도록 했다. 그 공으로 조조의 영접을 받고 원술군을 격퇴했다. 명제때는 사마의를 따라 양평에서 반란을 일으킨 공손연 토벌에 종군했다.
진등(陳登)
진규의 아들. 자는 원룡(元龍).
진규가 여포를 조조측에 이끌어들일 때 아버지 대신 조조에게 가서 여포 주멸을 권했다. 돌아온 뒤 조조에게서 은상이 없다고 격노한 여포를 비유를 들어 진정시켰다. 198년, 여포가 다시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하비성 공격의 선봉을 맡았다.
진랑(秦朗)
위나라의 중신. 아명은 아소.
모친이 조조의 측실이 되었기 때문에 적자들과 마찬가지로 조조의 사랑을 받았다. 후에 명제의 눈에 들어 요기장군, 시종장 등을 지냈다.
진림(陳琳) ?-217년
건안 칠자의 한 사람. 자는 공장(孔障). 광릉 사람.
하진 휘하에서 벼슬하다가, 그가 환관 주멸을 도모하여 제국의 호걸들에게 낙양 집결을 명했을 때 이를 극렬반대했다. 하진이 죽은 후 기주로 난을 피했다가 원소의 막료가 되었다. 200년, 원소가 전국에 보낸 조조 타도의 격문은 그가 쓴 것이다. 원소 멸망 후 조조에게 귀순했으나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진식(陳式)
촉의 대장.
222년, 이릉의 싸움에서 오반과 함께 수군을 이끌고 장강을 내려가 오군과 대치했다. 229년, 제갈량의 명을 받아 위의 세력하에 있는 성도와 음평을 함락시켰다.
진진(陳震)
촉나라의 중신.
제갈량으로부터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신하의 한 사람으로 추천받았다. 손권이 황제를 칭했을 때 제갈량의 뜻을 받들어, 위나라에 대한 공동전선을 펴기 위해 축하 사절로 오나라에 갔다.
장홍(藏洪)
자는 자원이고, 광릉 사람.
체격과 용모가 위풍당당하여 다른 사람을 압도했으며 효렴에 추천되어 낭이라는 관직을 받아 벼슬길에 나갔으나 영제 말년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중 장막의 동생 장초에게 추천되어 반동탁연합군에 가담했는데 그때 맹세식에서의 개막 연설이 유명하다
"한나라 제실은 불행하게도 기강이 해이해져 법통을 잃었으며 역신 동탁이 이 기회를 틈타 나라를 어지럽혀 화가 제왕에까지 미쳤고, 그 잔혹함이 백성들에게까지 번져 마침내는 천하가 전복되었습니다. 여러 제후들이 정의로운 군대를 규합하여 나라를 구하려 뭉쳤습니다. 이제 마음을 일치시켜 협력함으로써 신하로서의 충성과 절개를 바칠 것이며 목숨을 바칠지라도 절대로 두 마음을 갖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늘이시여! 황실과 선조의 영령이시여! 이를 온전하게 실현하게 해주소서."
이 말을 듣고 모두들 비장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유우 옹립 논의시에 사자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후 장초와 원소가 불화했을 때 장초 편을 들다 붙잡혀 죽게 되었는데 원소에게 귀순할 것을 권했으나 듣지 않았다. 사람들 모두 '의인이 죽는다'고 크게 탄식해 마지않았다.
잠혼(岑昏)
오의 환관이자 간신.
손호에게 빌붙어 그의 흉포한 행동에 부채질을 했다. 진나라 군사가 쳐들어와 사세가 위급해졌을때 여러 장수들이 일제히 몰려들어가 그를 끌어내어 배를 갈라 죽였다.
장간(蔣幹)
조조의 막빈으로 자는 자익(子翼).
구강 사람으로 주유와 동문수학했던 그는 옛날 정리를 이용하여 그를 꾀려 파견되었으나, 도리어 주유의 수단에 넘어가 채모와 장윤 두 장수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방통을 데리고 건너와 연환계를 성공시켜 적벽의 패전을 맛보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장당(張當)
위의 환관.
간신으로 조상이 어린 군주 조방을 보호하여 권세를 잡자, 앞서 조예의 시첩이었던 궁녀를 7,8인이나 골라 조상의 저택에 보내 환심을 샀고, 사마의가 쿠데타에 성공한 후 모반하려 하였다는 무고를 하여 조상의 일당이 모조리 처형당하였다.
장무(張茂)
위의 중신.
조에가 사치를 일삼고 크게 토목공사를 벌이는 것을 보고 스스로 머리를 풀고 나와 표를 올리며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 죽임을 당하였다. "무도한 암군. 머지않아 망하리라."고 목숨이 끊길때까지 소리쳤다.
장임(張任)
서촉 유장의 휘하 장수.
유장이 장노를 막고자 유비를 불러들이려 할때 극력 반대하였다. 방통이 유비와 첫대면 연회에서 위연을 시켜 칼춤을 추게하고 기회를 보아 유장을 죽이려 하였을때, 마주 나가 춤추며 막았다. 유비가 낙성을 치러 나왔을때는 성 동편 작은 길을 막고 화살을 쏘아 방통을 죽였다. 낙성을 지키다가 제갈량의 꾀에 빠져 사로잡혔으나 의를 내세워 굴하지 않았으며, 제갈량도 굳이 권하지 않아 죽음을 내렸다.
장제(張悌)
오의 마지막 승상.
진의 침공을 받았을때, 몇번 항전에 실패하자 도망하라는 권유를 물리치고 "머지않아 망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국난을 당하여 어찌 편안히 있겠느냐"고 나가 싸우다 죽었다.
정봉(丁奉)
오의 장수. 여강 안풍 사람으로 자는 승연(承淵).
제갈량이 남병산에서 동남풍을 빌고 떠나는 것을 서성과 함께 추격한 때문에 적벽가에 나오는 이름이다. 계략이 있어 능히 대사를 처단하고 전투에 용감하여 여러차례 공을 세웠다.
정의(丁儀)
위의 문신. 패 사람으로 자는 정체(正體).
용모가 추하고 한눈이 멀었으나 민첩하고 글을 잘하였다. 조식과 사이좋게 지냈으므로 조조의 물음에 조식을 좋게 말한 때문에 조비에게 밉게 보여 조비가 즉위하자 처형당했다.
정현(鄭玄)
후한의 학자. 자는 강성(康成).
마융이 가장 아끼던 제자로서 환제때 상서벼슬을 하였으나 십상시의 난 후 고향에 돌아가 서주에서 살았다. 유비는 탁군에 있을때 그를 스승으로 섬겼으므로 서주에 자리를 잡은 후에도 자주 찾아 교시를 받았다.
제갈상(諸葛尙)
촉한의 장수. 제갈량의 손자. 첨의 아들.
불과 열아홉살로 아버지를 따라 선봉으로 출전하여 잘 싸웠고,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돌격하여 장렬하게 죽었다.
조만(曹瞞)
조조의 아명이 아만(阿瞞)이었기 때문에 얕잡아서 그렇게 불렀다.
조안민(曹安民)
조조의 형의 아들.
조조가 완성으로 동탁의 잔당 장수를 쳤을때 장제의 처에게 수청케 하였다가 야습으로 큰 피해를 당하게 되었는데 이때 죽었다.
조웅(曹熊)
조조의 넷째아들.
몸이 약하여 아비도 큰 기대를 걸지 않았었는데, 형이 즉위하자 자기에게 위해가 올까 미리 겁내어 자살했다.
조충(曹忠)
조조에게는 아들이 25명이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 하나가 환(環)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충이었다. 충은 천성이 영특하여 이미 5,6세에 어른도 무색할 정도의 지혜와 재주를 보여 신동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충이 태어난 해는 건안 원년(AD. 196)이니, 조비보다는 9살이 어리고 조식보다는 4살이 아래가 된다. 조충이 얼마나 영특했는지는 코끼리의 무게를 잰 일이 유명하다. 그대는 충이 아직 10세도 되기 전이었다. 정도장군 회계태수에 임명된 오의 손권이 조조에게 진사 예물을 보냈는데 그것은 엄청나게 큰 코끼리였다. 조조가 놀라 코끼리의 몸무게를 알고 싶다고 하여 좌우 신하들에게 그 방법을 알아오라고 했다. 누구도 코끼리의 몸무게를 알 수 없었다. 대략 어느 정도일 것이라는 추측만 무성했다. 그때 조충이 앞으로 나서서 그 방법을 말했다. "먼저 코끼리를 큰 배에 태우고 흘수(吃水)를 측정하여 배에도 표시를 하였다가 나중에 그 표시까지 적당한 크기의 돌을 싣고 그 돌의 무게를 하나하나 재어 합하면 됩니다." 조조는 대단히 기뻐하며 그 방법을 써서 코끼리의 무게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종회(鍾會)
위의 장수. 영천 장사 사람으로 자는 사계(士季).
태부 종요의 아들로 장재가 있었다. 등애와 함께 촉한을 쳤는데, 거짓으로 항복한 강유와 힘을 합쳐 뒷날 등애를 쳐 없앤 뒤 한을 회복하려 했으나 중앙에서 자신마저 멸하려는 것을 알자 강유의 권고로 모반하였다가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주창(周倉)
관우 휘하의 장군.
황건 장보의 부하였으나 그가 죽은 뒤 와우산에 웅거하여 산적질을 하다가 관우를 섬겨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충성을 다하였다. 수영을 잘하여 형주를 지킬때는 조조의 장수 방덕을 물속에 끌어들여 사로잡아 공을 세웠다. 최후까지 행동을 같이하고 죽었다.
[차]
채모(菜瑁)
형주의 호족.
유표의 형주 입성에 협력한 외에 누이를 유표의 후처로, 조카를 유표의 아들 유종에게로 시집보냇다. 이처럼 유씨와 굳은 인척 관계를 맺고, 유표의 전처의 소생 유기를 배척하여 유종으로 대를 잇게 했다.
채옹(蔡邕) 133-192년
후한의 문신.
의랑직에 있으면서 십상시들의 행패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려 모함을 받고 쫓겨난 것을 동탁은 그가 명망이 높은 것을 이용하려고 불러들여 등용하였다. 동탁이 패해 죽자 의군 지도자 왕윤의 손에 죽었다.
채염(蔡琰)
일명 채문희.
후한의 문신 채옹의 딸 위중도(衛仲道)의 아내가 되어 있는데 북쪽에 잡혀가 오랑캐의 아내가 되었다가 조조가 몸값을 치러주고 구해 내 동기(董紀)의 아내가 되어 남전에 살았다.
초선(貂蟬)
사도 왕윤의 집 가기(街伎).
절세의 미인으로 동탁의 횡포와 나라의 어지러움을 한탄하다 왕윤의 눈에 띄어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기로 결심하고 동탁과 여포의 틈에서 그들을 농락하여 결국 여포로 하여금 동탁을 죽이게 했다.
최염(崔琰)
하북의 명사로 조조의 모신. 자는 계규(癸珪). 청하군 동무성 사람.
후한의 기도위를 지냈으며 여러차례 원소에게 간했으나 들어주지 않자 병이라 칭탁하고 집에 박혀 있다가 조조가 원소를 멸한 후 불러내어 별가종사로 삼았다. 조조가 문무의 전권을 쥐자 그의 내정을 도왔다. 벼슬이 상서에 이르렀는데, 뒤에 조조가 위왕이 되려는 것을 욕했기 때문에 맞아죽었다.
[타]
타사대왕
남만왕 맹획과 합세한 독룡동(禿龍洞)의 동주(洞主).
동중의 독천(毒泉)을 믿고 대항하였으나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맹획과 함께 여러차례 붙잡혔다간 풀려나곤 했는데 삼강성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태사자(太史慈)
손권 휘하의 맹장.
앞서 북해태수 공융을 도와 황건 잔당 관해의 무리를 물리치고 유비에게 연락하여 도겸을 돕게 했다. 그후 손권의 휘하 장수가 되어 뛰어난 용맹으로 여러차례 큰공을 세웠으나 적벽대전 후 손권을 따라 합비성을 치다가 장료에게 반격당하여 난전(亂箭)에 죽었다.
[파]
포신(鮑信) ?-192년
후한말의 무장. 자는 윤성(允誠). 평양 사람.
하진 휘하에 있으면서 동탁을 빨리 치도록 원소에게 진언했으나 용납되지 않자 고향인 태산으로 돌아갔다가 제북국의 집정관으로 반동탁 연합군의 일익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192년, 연주목 유대가 청주의 황건적과 싸워 죽은 두 사절로 온 진궁의 설득에 따라 조조를 연주목으로 받아들였다. 조조와 함께 황건적 토벌의 제 1선에 나서서 위기에 처한 조조를 구출했으나 자신은 전사했다.
[하]
하안(何晏) ?-249년
위나라의 학자. 자는 평숙(平叔). 완 사람.
어머니가 조조의 측실이 되었기 때문에 위나라 조정에서 자라났다. 문제, 명제 시대에는 냉대를 받았으나 조상이 실권을 잡자 황제 비서가 되어 궁정 문화의 중심 인물로서 현학을 창조하고 청담을 널리 폈다. 후에 사마의에게 살해당했다.
하진(何進) ?-189년
후한의 권신. 자는 수고(遂高). 원 사람.
생가는 도살업자였으나 이복 동생이 후궁으로 들어가 영제의 총애를 받고 황자 변을 낳자 급속도로 출세 가도를 달렸다. 184년 ,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 진압의 총수로서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황건적 진압에 공을 세운 무장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대두하자 그 우두머리로 추대되어 조정에서 전횡을 일삼던 환관에 대항했다. 후궁으로 들어간 동생은 영제의 죽음을 계기로 갑자기 첨예화되었다. 하진은 신세력의 대표격인 원소, 원술 등과 손을 잡고 은밀히 환관 주멸 계획을 짰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그의 성격과 하태후 등의 반대로 주멸 계획은 용이하게 실현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초조해진 원소 등 강경파의 독촉을 받고 하태후에게 압력을 가할 목적으로 동탁 등 지방의 무장, 호걸들의 상경을 명했다. 하진은 결국 환관의 손에 살해되었으나, 그의 죽음으로 격앙된 원소, 원술 등이 궁에 난입하여 환관 2천여 명을 죽임으로써 오랜 세월에 걸친 환관의 전횡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하후돈(夏侯惇) ?-220년
조조의 장수. 자는 원양(元讓). 초 사람.
조조의 거병에 참가하여 동군태수가 되었다. 여포와의 싸움에서 왼쪽 눈에 화살을 맞고 애꾸가 되었다. 조비가 위왕이 되었을 때 대장군에 임명되었으나 몇 달 후 병사했다.
한수(韓遂) ?-215년
후한말의 군웅의 한 사람. 자는 문약(文約).
영제 때 변장과 함께 서북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장온, 동탁 등의 토벌을 받고 양주로 근거지를 옮겼다. 헌제때 마초 등과 손을 잡고 조조와 싸우다 패하고, 수년 후 서평 금성 지방의 장수에게 살해되었다.
한윤(韓胤)
원술의 막료.
원술의 아들과 여포의 딸 사이에 혼담이 생기자 사신으로 여포한테 갔으나 원술과 손을 잡으면 조조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는 충고를 받은 여포에게 잡혀 조조에게 보내져 효수당했다.
한복(韓馥)
후한말의 장수. 자는 문절(文節). 영천군 사람.
동탁에 의해 기주자사에 임명된 후 원소 등의 반동탁군 거병에 할 수 없이 가담했다. 그 후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자는 원소의 계획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적극적으로 천하를 도모할 의사가 없어 원소에게 기주를 헌상하고, 공포심에 사로잡혀 죽었다.
허공(許貢)
후한말의 군웅의 한 사람.
오군태수로 있다가 손책에게 살해되었다. 후에 그의 아들과 식객이 손책을 암살했다.
허유(許攸)
원소의 막료.
188년, 기주자사 왕분 등과 함께 합비후 옹립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원소의 막료로서 활약했다. 관도싸움에서 원소에게 여러가지 헌책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조조에게 갔다. 조조는 기쁜 나머지 맨발로 뛰어나가 그를 맞이했다고 한다.
허저(許猪)
조조의 장수. 자는 중강(仲康). 초 사람.
조조의 측근에서 용맹을 떨쳐 무위장군이 되었다. 군중에서 그를 가리켜 "호치(虎癡)"라 불렀다.
화흠(華歆)
위나라의 중신. 자는 자어(子魚). 고당 사람.
하진에 의해 벼슬했으나 동탁이 전횡하자 일단 은퇴했다가 헌제때 예장태수로서 손책의 신임을 얻었다. 그 후 위나라에서 벼슬하여 대신이 되었다. 청렴 결백하기로 유명하다.
황보숭(皇甫嵩) ?-195년
후한말의 용장. 자는 의진(義眞). 조나 사람.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하진을 대장군에 임명하여 토벌을 명했다. 이때 북지군태수로 있던 황보숭은 군신 회의 석상에서 당고의 금지를 해제할 것과 황제의 사유 재산 및 마필을 방출하도록 주장했다. 이것이 용납되자 그는 좌장군으로 출전하여 장사, 여남, 영천, 진국 등지에서 대승을 거두고 평정했다. 188년, 서북에서 일어난 반란군에 의해 진창이 포위되자 좌장군으로 기용되어 전장군인 동탁과 함께 이를 물리치게 되었다. 이때 동탁과 두 번에 걸친 병법 논쟁이 전개되었는데, 실전에서 적에게 파괴적인 타격을 주어 자신의 옮음을 증명했다. 이로써 동탁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같은 해 조정이 동탁의 군권을 빼앗기 위해 전장병을 황보숭에게 인계할 것을 명했으나 동탁은 두 번이나 이를 거부했다. 이 사실은 동탁의 원한을 더욱 사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동탁이 실권을 잡자 황보숭을 죽이려고 장안 서쪽에 주둔하고 있던 그에게 낙양 출두를 명했다. 이때 부관인 양연이 동탁을 토벌하자고 했으나 듣지 않고 출두하여 그에게 사로잡혔다. 다행히 처형되기 직전 동탁과 친했던 아들 견수의 탄원으로 후에 공중 앞에서 동탁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고 말았다. 동탁이 죽은 후 태위가지 승진했다가 병으로 죽었다.
황승언(黃承彦)
제갈량의 장인.
양양의 명사로써 고결하기로 이름높았다. 같은 양양의 명사인 채모의 누이와 결혼하여 태어난 추녀인 딸을 '미인은 아니지만 머리가 비상하다'며 제갈량에게 출가시켰다.
황완(黃琬)
동탁의 막료.
동탁이 전횡할 때 태위로 있으면서 그의 장안 천도에 반대하여 파면당했다. 그러나 함께 간했던 오경, 주필 등이 처형당하는 것을 보고 무서운 나머지 동탁에게 복종을 맹세했다.
황조(黃祖)
유표의 장수.
원술의 명령을 받고 토벌하러 온 손견을 맞아 싸워 그를 현산에서 죽였다. 성질이 급한 사람이어서 강하태수로 있을 때 유표가 사신으로 보낸 미형의 불손한 태도에 화가 나서 그를 죽였다. 208년, 손권과 싸우다 죽었다.
황충(黃忠) ?-220년
유비의 장군. 자는 한승(漢升). 남양군 사람.
원래 유표 휘하에서 장사를 지키고 있었으나, 적벽대전 이후 유비에게로 가서 무공을 세워 토로장군이 되었다. 218년에 한중을 공격할 때는 정군산에서 조조이 장수 하후연을 죽여 정서장군이 되었다. 같은 해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후장군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노익장'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다.
하후연(夏候淵) ?-219년
조조의 장수. 자는 묘재(妙才). 초 사람.
조조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맞았다. 조조의 거병에 참가하여 원소 및 한수와의 싸움에서 용맹을 떨쳤다. 후에 서정장군으로서 한중을 지켰으나 유비의 공격을 받고 그 장수 황충에게 죽임을 당했다.
하후덕(夏候德)
조조 휘하의 장수.
하후연, 장합과 함께 한중에서 유비의 군대와 싸우다가 여러차례 패전을 거듭한 끝에 노장 엄안의 칼에 죽었다.
하후무(夏候楙)
위의 장수. 하후연의 양자로서 자는 자휴(子休).
박절한 사람이었는데 아비가 평생을 충의로 섬기다가 황충에게 죽은것을 불쌍히 여긴 조조가 자기 딸 청하공주(靑河公主)의 부마로 삼았다. 한번도 실전에 참가해 본 일 없이 황제의 매부라는 명목으로 장군이 되어 제갈량의 침입을 막았으나 도저히 그의 적수가 못되어 숱한 장수와 성을 잃고 사로잡혔다가 도망쳤다.
하후은(夏候恩)
조조의 신변을 지키던 장수.
조조는 원래 두 자루의 보검을 가지고 있어 의천(倚天), 청강(靑綱)이라 이름지어 의천은 자신이 차고, 청강은 하후은이 메고 측근에 있게 하였는데, 당양싸움에서 조운을 만나 죽고 조운은 그 칼을 얻었다.
하후패(夏候覇)
위의 장수. 하후연의 아들 4형제 중의 맏이. 자는 중권(仲權).
사마의의 천거로 그의 수하에 들어 촉한과의 대전에서 잘 싸우고 옹주의 수비를 맡았었다. 조상이 사마의에게 죽은 뒤 신변의 위험을 느껴 촉한에 항복하였다. 그곳에서 강유의 지우를 입어 여러차례 고락을 같이하며 위군을 막았으나 조양성을 치다가 등애의 계교에 빠져 난전에 죽었다.
학소
위의 장수. 태원 사람으로 자는 백도(伯道).
사마의의 신임이 두터워 가정의 싸움뒤 진창 어귀를 지키어 제갈량의 불의의 습격을 막는 중임을 위탁받았다. 제갈량이 제차 출병했을 때 작은 성이라고 얕잡았으나 불과 3천의 병력으로 잘 싸워 그의 운제(雲梯), 충차(衝車), 모두 쓸모없었다. 제갈량이 물러간 사이 병이 들어서 위독했는데, 그 소식을 안 촉병이 갑자기 들이닥쳐 불을 지르는 바람에 놀라 죽었다.
한당(韓當)
손권 휘하의 장수. 요서 영지 사람으로 자는 의공(義公).
유표를 칠때 등성 싸움에서 적장 장호를 한 칼에 베었고, 적벽대전에서는 격전중 화살을 맞고 물에 떨어졌던 황개를 건져내었다.
한현(韓玄)
장사 태수.
유비가 적벽대전 후 형주를 차지하고 귀순을 권하였을때 황충을 시켜 막아 싸우게 하였으나 관우와 서로 아끼는 눈치라 잡아 죽이려다가 몸을 의지해 와 있던 위연의 손에 죽었다.
헌제(獻帝)
영제의 둘째아들로 처음엔 진류왕에 봉함을 입어 십상시 난리에 소제와 같이 피신하였다. 동탁이 임금으로 세우니 그때 나이 아홉살. 연호를 초평이라 하였다. 이각, 곽사의 난을 맞아 갖은 신고를 겪고 다시 조조에게 의탁했다. 조조가 살았을때에는 빈자리나마 유지하더니, 그의 아들 조비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산양공(山陽公)이란 호칭으로 지내다가 54세로 죽었다.
형옹
위의 무신.
하간 막현사람으로 효렴에 천거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어지러운 세상을 걱정하여 선각자로 대접을 받기도 했다. 나중에 조조가 그를 모셔들어 크게 중용했고, 후계자로 조비와 조식을 놓고 고심할때, "서자로서 적자를 대신하는 것은 옛부터 경계했던 일입니다." 하고 조비편을 들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후에 태상의 지위까지 올랐다.
호반(胡班)
관우가 유비의 가족을 보호하여 조조의 곁을 떠나갈때 대접해 주던 호화 노인의 아들. 형양태수 왕식의 종사로 명령을 받아 그를 죽일 채비를 하였으나, 한번 대하자 인품에 놀라고 또 아비의 서신도 있어 왕식의 흉계를 일러 위기를 모면하게 해주었다. 관우가 형주를 지키고 있을때 찾아와서 유비 휘하에 들게 되었다.
화타(華陀)
역사상 최고의 의사. 패군 초군 사람으로 자는 원화(元化).
신의로 이름이 높아 오에서는 주태가 여러곳 상처를 입어 죽게된 것을 치료해 살렸고, 나중 형주로 관우가 화살을 맞아 고생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치료하였다. 조조가 말년에 두통이 심하다고 불렀을 때 골수술을 제안했다가 조조의 노여움을 사 그의 손에 죽었다.
황개(黃蓋)
오의 장수.
손견때부터 충성스런 대장으로 많은 공을 세웠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스스로 주유를 찾아 고육계를 쓸 것을 헌책. 항복하는 문서를 조조에게 보내 적벽전 승리의 계기를 만들었다. 싸움에는 선봉이 되어 싸우다가 장료가 쏜 화살에 맞아 물에 빠졌으나, 본시 헤엄의 명수라 엄동에 갑옷을 입은 채였건만 살아나 다시 활동하였다.
황권(黃權)
익주 유장 휘하에 있다가 유비에게 귀순하였으나 나중 위로 투항했다. 처음에 장노의 침입을 앞두고 법정, 맹달 등이 유비를 불러들이자는 의견을 냈을때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유장이 항복한 뒤로 버티다가 유비가 친히 찾아와 권하는 바람에 나와서 벼슬을 하게 되었다. 오에 출병하였을 때는 수군을 통솔하였는데, 육손의 반격으로 대패하자 위에 항복하였다. 조비는 그에게 벼슬을 주었으나 받지 않았으며, 제갈량도 그의 가족을 해치지 않았다.
황씨부인(黃氏夫人)
제갈량의 부인.
황승언의 딸로 얼굴이 몹시 추하여 보잘것없었으나 재주가 있어 천문과 지리에 통달했고 육도삼략과 둔갑병에도 능통하였다. 애초에 제갈량이 남양에 있을때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아내로 맞이한 것인데, 실상 내조에 힘입은 바 컸다.
황호(黃皓)
촉한의 환관이며 간신.
암우한 유선의 주변에 인의 장벽을 쌓고 그의 눈과 귀를 가려 간사하게 굴고 주색에 파묻히게 하였다. 강유가 위병과 싸워 연전연승하였을 때도 까닭없이 불러들여 시기를 놓치게 했고, 위군의 침입까지 속여서 알리지 않았다. 위장 등애도 그를 죽이려 했으나 뇌물과 간사한 말로써 목숨을 보전하였다. 그러나 유선을 따라 낙양으로 옮겼을 때 그를 보고 사마소는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치는 백해무익한 놈이라고 무사를 시켜 능지처참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