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전통과 변화, 여성...베를린영화제의 키워드
1951년 첫 베를린 영화제부터 지금까지 이 국제영화제의 백미는 경쟁부문이다. 디터 코슬릭(Dieter Kosslik) 영화제 총감독이 최종결정하는 이 경쟁부문에서 상영될 작품은 모두 25편이다. 메릴 스트립을 위원장으로 하는 경쟁부문 심사위원회에는 독일의 연극배우이자 영화배우인 라스 아이딩어, 프랑스 출신 사진작가 브리짓 랑콤브 등이 포함돼있다.
한국 영화는 올해 한편도 초청되지 않았다. 한국 영화가 경쟁부문에서 상을 받은 것은 1961년 강대진 감독이 <마부>로 특별 은곰상을 받은 이후 뜸하다가 1994년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이 알프레드 바우어 상을 받고 2004년 김기덕 감독이 <사마리아>로 최고감독상을, 2005년 임권택 감독이 명예금곰상을, 2007년 박찬욱 감독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로 알프레드 바우어 상을 받은 이래 없었다.
그 대신 2010년 이후에는 제너레이션 부문, 파노라마 부문, 단편영화 부문, 포럼 부문 등에서 젊은 감독들이 수상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 장편영화들이 베를린 영화제 주경쟁부문에서 수상을 한 시대가 1990년대 중반부터 2007년까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대에 국한된다는 점은 영화제작에 전제되는 지원구조라든가 사회흐름과 관련하여 연구해 볼 만한 흥미로운 일이다.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한국 영화는 모두 세 편이다.
제너레이션 부문에 초청을 받은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한국 2016, 95분)이 주목을 받고 있다. 윤 감독은 2014년 64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단편 <콩나물>(2013)로 유리곰상을 받은 바 있다. 제너레이션 초청작 선정위원회 마리안트 레드파트 위원장은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의 관계와 어린 주인공들의 심리 변화를 섬세하게 추적하는 이 작품에 대해 청소년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이 특별히 관심이 간다고 한다.
이동하 감독의 <위켄즈>(Weekends, 한국 2016, 98분)는 동성애자들로 구성된 합창단을 소개로 만든 단편영화로 파노라마 도큐멘트 부분에 초청되었다. 이지영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는 공원에서 박카스를 팔며 몸도 파는 중년여성들 이야기가 소재이다.
마르지 않는 소재 ‘히틀러 독일’
한국인들은 문화라든가 예술의 문제를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 또는 소비상품으로 보는 경향이 크지만 영화는 사실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조건과 함께 바라볼 때 역동적인 사건으로 보이곤 한다. 미국에서 반공주의자 매카시 의원이 공산주의자 사냥을 하였을 때 찰리 채플린, 아서 밀러 등의 영화인과 연극인들이 대거 조사를 받게 된 사실은 당시 미국의 영화계와 연극계가 사회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Alone in Berlin(JEDER STIRBT ALLEIN IN BERLIN), Competition 2016ⓒX Filme Creative Pool
특히 독일 영화에서 히틀러 치하의 탄압과 저항은 여전히 끝나지 않는 소재이다. 경쟁 부문에 초청된 <누구나 베를린에서는 홀로 죽는다>(JEDER STIRBT ALLEIN IN BERLIN 빈센트 페레츠 감독, 스위스 2016, 103분)은 독일이 패전하기 전에 교수형을 당한 오토 함펠과 엘리제 함펠 부부의 이야기로,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은 부모가 반(反)히틀러 저항운동에 나선다는 이야기이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시간에 저항을 할 수 있는 용기란 거대한 이데올로기에서 출발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극히 소박한 개인사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40년 여름 독일이 이길 것이라고 선전하던 그 시간에 들이닥친 아들의 전사 소식. 그 때까지만 해도 히틀러를 믿었던 이들은 반 히틀러 운동을 시작하였고 나치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했다. 1946년 가을에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한스 팔라다(1893-1947)가 쓴 소설을 바탕으로 하여 만든 영화이다.
네덜란드에 가족과 함께 피신해 있다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프랑크푸르트 소녀 안네 프랑크가 피신처에서 쓴 일기를 바탕으로 한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독일인들에게 역사를 잊지 않게 하는 문화유산이다. 이번 베를린 영화제에서 선보이는 영화 <안네 프랑크의 일기>(DAS TAGEBUCH DER ANNE FRANK 한스 슈타인비흘러 감독, 독일 2016, 128분)는 오늘날 청소년들이 과거의 공포시대에 대해 인식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 한다. 출연진도 화려하다.
한편 회고전에서 상영되는 세계적인 감독 폴커 슐렌도르프의 <젋은 퇴를레스>(1965/1966)는 로베르트 무질(1880-1942)의 소설 <젊은 퇴를레스>를 소재로 한 것으로 오스트리아 k. u. k 전제군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히틀러 시대처럼 독재자에 맹신하는 자들의 집단심리와 책임의 문제를 다루는 비유로 읽혔다.
전통 혹은 오래된 가치
영화 속 이야기는 오래된 것들을 파괴하기도 하고 오래된 가치를 다시 상기하기도 한다.
이번 주경쟁부문에 초청된 모하메트 벤 아티아 감독의 <인헤베크 헤디>란 영화는 어머니가 정해 준 여성과의 결혼식을 앞두고 출장 나왔다가 만단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이다. 이슬람 문화권의 전통을 붕괴하는 욕망이 내장되어 있다.
24 Weeks (Competition 2016)ⓒFriede Clausz
독일의 안네 초라 베라셰트 감독이 내놓은 <24주>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주인공 아스트리드가 태어날 아이의 상태를 알게 되면서 ‘도덕적 갈등’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안정된 사회에서는 다시 오래된 가치를 돌아보게 되고 붕괴되고 위협 받는 사회에서는 전통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려는 충동이 강한 법이다. 그렇다면 <죽여 주는 여자>에서처럼 박카스 아줌마들이 오가는 곳은 전통이라든가 오래된 가치와의 관계로 볼 때 어디에 있는 것일까? 김수영 시인이 <거대한 뿌리>에서 “전통(傳統)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傳統)이라도 좋다”고 할 때 이처럼 고민스러운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