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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4월 5일 주일
[(백) 주님 부활 대축일 - 낮 미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주일이 한 주간의 절정이듯, 주님 부활 대축일은 전례주년의 절정을 이룬다. 죽음과 악의 세력을 이겨 내신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큰 기쁨이고 희망이며,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주님 부활 대축일은 하느님의 권능과 주님 부활의 은총에 감사드리는 날이다.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으니, 이제는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맙시다. 부활의 첫 증인인 마리아 막달레나와 함께 벅찬 기쁨을 노래합시다. “그리스도 나의 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 알렐루야, 알렐루야.”
말씀의 초대
베드로는 입을 열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고 말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라고 한다(제2독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간 베드로와 다른 제자도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믿는다(복음).
제1독서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0,34ㄱ.37ㄴ-43
그 무렵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여러분은 37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39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40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41 그러나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42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43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3,1-4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5,6ㄴ-8
형제 여러분, 6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린다는 것을 모릅니까?
7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8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예수님께서는 되살아나셨고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입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8,1-10
1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2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는 것이었다.
3 그의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처럼 희었다.
4 무덤을 경비하던 자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다.
5 그때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6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
7 그러니 서둘러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일러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알리는 말이다.”
8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9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모두에게 참된 기쁨과 희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시간을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과 “아직도 어두울 때”(요한 20,1)입니다. 부활은 이미 일어났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직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같은 때이지만, 부활을 믿는 이는 새 아침을 맞았고, 믿지 못하는 이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묻게 됩니다. “내 마음은 ‘지금’ 어느 시간에 있는가?”
부활은 죽음 뒤의 일만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을 새롭게 하는 사건입니다. 여전히 우리 삶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부활의 기쁨이 헛된 것은 아닙니다. 이 길에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걸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할 때, 우리 삶은 어둠 속에서도 빛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절망을 넘어서는 희망을 줍니다. 이 희망이 있기에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부활을 기념한다는 것은 제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던 그 부활의 힘을, 오늘 우리 삶으로 불러오는 일입니다. 이기심과 절망을 무너뜨리고, 서로 평화를 건네는 순간마다 부활은 우리 안에 새롭게 일어납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일상을 부활의 자녀답게 살아감으로써, 우리 모두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주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매년, 그리고 수십 번도 더 부활절을 맞이하지만, 물에 물탄 듯 술에 술 탄 듯 특별한 감흥이 없이 밋밋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약간의 성찰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내 삶에 과연 어떤 의미인지? 내 안에서 죽음 체험과 부활 체험이 있었는지?
지난 세월 돌아보니, 주님께서 제게 각별한 은총을 베푸셨던지, 제 신앙 여정 안에 이런저런 작은 죽음 체험, 그리고 작은 부활 체험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생각들입니다. “이렇게 벌써 내가 시드는구나, 아직 채 피어나지도 못했는데, 청춘을 즐기지도 못했는데, 억울해서 어떡하지?” 사실 당시 저는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하느님 참 묘하시더군요. 죽어가는 저를 이렇게 그냥 두시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구나, 싶었는데, 그 절박하던 순간 주님께서는 제게 누군가 한 존재를 보내주시더군요.그분을 통해 세상 따뜻하고 자상한 주님의 손길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따스한 손길이 저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오게 하더군요.
우리네 인생이 그런 것 같습니다. 삶 속에 죽음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병고, 상처, 실패, 시련... 일종의 작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작은 죽음에서 헤어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또 하느님께 간절히 매달릴 때, 어느 순간 하느님께서 작은 부활 체험을 하게 해주십니다.
하느님, 참 묘한 분이십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사방이 가로막힌 극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성금요일 오후 골고타 언덕 체험을 하게 됩니다. 고통이 너무 극심해 도대체 하느님이 어디 계시는가? 당신이 계시다면, 어찌 이리 큰 시련을 주시냐고 울부짖습니다.
울부짖는 가운데서도 우리가 취해야 할 중요한 태도 하나가 있습니다. 울부짖는 가운데서도 우리의 시선을 이쪽저쪽으로 돌리고 또 돌려야 합니다. 더 큰 고통 겪고 계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 삶 이쪽저쪽을 살펴 봐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열어두신 새로운 문 하나가 어디에 있는지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 전례도 그렇게, 우리네 삶도 그런 것 같습니다. 때로 우리 삶이 사순시기의 연속인 듯하지만, 잘 견뎌내다 보면 반드시 부활시기가 찾아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삶이 마냥 기쁨의 연속만이 아닙니다.
부활 시기에 이어 연중시기가 따라옵니다.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이 계속됩니다. 그 일상도 지극히 소중합니다. 충실히 하루 하루 살아가다보면 어느새 또 다시 대림시기가 찾아오고, 기쁨 충만한 성탄시기를 맞이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 전례력입니다.
기쁨과 환희의 시기에는 겸손하게 고통과 십자가의 때를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과 십자가의 시기가 다가오면 반대로 영광과 축제의 시기를 희망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이 무한 반복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고 우리 가톨릭 전례인 것입니다.
부활의 아침입니다. 낙담한 얼굴로 엠마오를 향해 걸어가던 제자들 사이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슬그머니 끼어드십니다. 함께 길을 걸으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십니다. 차근차근 설명해주시고, 자극도 주시고, 동반해 주십니다.
오늘 이런저런 고통과 시련 속에 휘청거리며 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끼어드실 것입니다. 힘을 주시고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자극도 주시고 격려도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주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활하신 분은 갈릴래아에서 기다리신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할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이 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역설의 현장에 서 있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긴 줄 알았고, 죽음이 생명을 삼킨 줄 알았는데, 오히려 생명이 죽음을 집어삼켜 버린 승리의 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천사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핵심적인 지시가 있습니다. 바로 "갈릴래아로 가라"는 명령입니다.
"서둘러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일러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마태 28,7)
왜 하필 갈릴래아일까요? 예루살렘의 화려한 성전도 아니고, 빌라도의 총독관저도 아닙니다. 왜 그 비천하고 가난한 변방으로 가라고 하실까요? 여기에 부활의 생명을 만나는 ‘방향의 법칙’이 숨어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 내어주어야 근원(헤르몬)을 만난다 이스라엘의 지형을 보면 하느님이 설계하신 기막힌 영적 교훈이 보입니다. 이스라엘 북쪽에는 해발 2,814미터의 거대한 헤르몬 산이 우뚝 서 있습니다. 그 꼭대기에는 1년 내내 녹지 않는 만년설이 덮여 있지요. 이 차갑고 맑은 눈물이 녹아 내려와 고이는 곳이 바로 갈릴래아 호수입니다.
여기서 신비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헤르몬 산으로부터 받은 물을 잠시 머금었다가, 즉시 요르단강을 통해 남쪽으로 흘려보냅니다. ‘내어주는 일’을 쉬지 않습니다. 호수 입장에서 물을 내보내는 것은 일종의 ‘죽음’이고 ‘손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물을 비워내기에, 헤르몬 산은 비워진 만큼 다시 새로운 만년설의 물을 갈릴래아로 끊임없이 쏟아붓습니다. 쉼 없는 순환, 이것이 갈릴래아를 물고기가 넘쳐나고 수많은 생명이 숨 쉬는 ‘생명의 호수’로 만드는 비결입니다. 갈릴래아는 살리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 곳입니다.
반면, 그 물이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사해(Dead Sea)입니다. 사해는 갈릴래아로부터 내려온 물을 ‘모으기만’ 합니다. 나가는 통로가 없습니다. ‘이건 다 내 거야!’라며 움켜쥐는 순간, 뜨거운 태양 아래 물은 증발하고 독한 염분만 남습니다. 결국 그곳은 어떤 생명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생명은 흐르는 에너지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사해처럼 모으고 쌓아두려는 방향으로 가는 사람에게는 당신을 드러내실 수가 없습니다. 빛이 어둠에 삼켜지기 위해 어둠 속으로 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갈릴래아처럼 내어주고 나누려는 방향으로 뛰는 이들에게만 부활의 주님은 마중 나오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가르침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가야 태양을 볼 수 있다는 우주적 자연 법칙입니다. 이제 빛을 만나려면 내가 빛을 향해 움직여야 합니다.
죽음으로 향하는 사람들: 움켜쥐는 손이 곧 나의 무덤이 됩니다 죽음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집착’과 ‘모음’입니다. 그렇게 다른 이들은 더 부족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주위에는 죽음의 기운이 맴돕니다. 더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자가 빛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인도에서 원숭이를 잡는 방법은 참으로 비극적입니다. 좁은 입구를 가진 단지 안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견과류를 가득 넣어둡니다. 원숭이는 손을 넣어 음식을 한 움큼 쥡니다. 그러면 주먹이 커져서 단지 밖으로 손을 뺄 수 없게 되지요. 이때 사냥꾼이 다가옵니다.
원숭이는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려 하지만, 절대 쥔 손을 펴지는 않습니다. ‘이걸 놓으면 굶주릴 거야’라는 집착 때문입니다. 결국 원숭이는 그 작은 먹이 한 줌을 지키려다 자신의 전 생명을 사냥꾼에게 넘겨주고 맙니다. 사냥꾼은 그에게 죽음 자체입니다. 원숭이는 살려고 함으로써 죽음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1947년 뉴욕 맨해튼, 거대한 악취가 진동하는 한 저택에서 형 호머와 동생 랭리 콜리어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은 명문 대학을 나온 수재들이었고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지독한 저장 강박증(Hoarding)과 불신에 빠져 있었습니다.
'세상은 우리 것을 뺏으려 한다. 오직 모으는 것만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믿음으로 30년 동안 모든 쓰레기를 보물이라 믿고 집안에 쌓아 올렸습니다.
그들은 도둑을 막기 위해 신문지 더미와 고철 사이에 정교한 부비트랩(덫)을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 랭리가 눈먼 형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다 자신이 만든 신문지 더미 덫을 건드렸습니다. 순식간에 수 톤의 쓰레기가 쏟아져 내렸고, 그는 자신이 ‘보물’이라 믿으며 모았던 그 무게에 짓눌려 질식사했습니다. 곁에 있던 눈먼 형 호머는 동생이 죽어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쓰레기 벽에 가로막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굶어 죽었습니다.
경찰이 집을 수색했을 때 나온 쓰레기는 무려 140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살리겠다고 모은 것들에 의해 가장 비참하게 살해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이려(모으려) 하면 죽음을 만난다’는 영적 법칙의 실체입니다. (출처: 뉴욕 타임스 1947년 3월 26일 자 기사 재구성)
나의 갈릴래아: 소유의 무덤을 떠나 만난 부활의 예수님 사실 저 역시 한때는 늘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까’,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더 높이 올라갈까’ 하는 사해의 방향을 향해 있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소유가 저를 살려줄 생명줄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길 끝에는 안식이 없었습니다. 모으면 모을수록 더 허기졌고, 움켜쥐면 쥘수록 영혼은 메말라갔습니다. 저는 살고 싶어서 모았지만, 생명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께서 제 영혼의 내비게이션을 강제로 꺾어놓으셨습니다. ‘나를 위해 모으는 삶’이 아니라 ‘그분을 위해 전하는 삶’, 즉 사제의 길로 저를 부르신 것입니다. 저는 처음엔 두려웠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다 내어놓고, 결혼도 포기하고, 세속적인 성공도 내려놓으면 내 인생이 통째로 사라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 자아에게는 ‘죽음’과 같은 선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두려움을 뚫고 갈릴래아를 향해, 즉 ‘전하는 삶’을 향해 첫 발을 떼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신학교에서, 그리고 제대 위에서 성체를 거행하며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네게 다~ 주었다."
소유를 통해 죽음으로 가던 제가, 전함을 통해 사제가 되었을 때 비로소 ‘진짜 생명’이 무엇인지 맛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기쁨을 누리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갈릴래아에서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움직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의 지혜들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경주 최부잣집의 거름(똥) 철학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300년 동안 부를 유지하며 존경받았던 ‘경주 최부잣집’의 사례는 이 생명의 원리를 기가 막히게 보여줍니다. 최부잣집에는 내려오는 ‘육훈(六訓)’ 중 이런 정신이 있습니다. "돈은 똥(거름)과 같다. 한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지만, 사방에 흩뿌리면 땅을 살리는 거름이 된다."
그들은 돈을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 절대적인 목적(사해)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비옥하게 만드는 ‘거름’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똥처럼 여겨 기쁘게 뿌렸을 때, 그들은 죽음을 만난 것이 아니라 온 백성의 존경과 가문의 보존이라는 ‘더 큰 생명과 영광’을 얻었습니다. (출처: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한국의 갈릴래아: 죽음의 방향을 거부하고 생명을 낳은 이요한 씨와 대건이 이런 지혜를 가진 이들은 항상 죽음을 선택하고 생명을 만납니다. 여기, 죽음의 벼랑 끝에서 생명의 갈릴래아를 선택하여 온 세상을 울린 기적 같은 실화가 있습니다. 바로 이요한 씨와 그의 아들 대건이의 이야기입니다.
이요한 씨는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아내마저 떠난 차가운 방에서 그는 갓난아기였던 아들 대건이를 홀로 키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대건이마저 아빠와 같은 유전성 질환인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극심한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 하나 어둠 속에 가두어지는 것도 지옥인데, 이 예쁜 핏덩이까지 빛을 잃어야 한다니... 차라리 같이 죽는 게 낫지 않을까?' 그것은 사해의 어두운 유혹이 그를 덮치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음 대신 '생명'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대건이의 '눈'이 되어주기로 결단합니다.
이요한 씨가 절망이라는 탯줄을 끊고 생명을 향해 뛰어갔을 때, 온 세상이 그들의 편이 되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헤르몬 산의 만년설'처럼 무려 1억 3천만 원이라는 거액의 성금을 모아 전달했습니다. 또한 가톨릭 대학교 성모병원은 이요한 씨의 아들에게 수술을 지원하여 한쪽 눈이라도 완전히 실명되지 않게 해 주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름 모를 수많은 봉사자가 달려와 그들이 머물 쾌적한 새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었고, 대건이가 특수 교육을 받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매달 후원금을 보내왔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죽여 아들을 살리려 하자, 세상이라는 생명체가 그들을 껴안은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장성한 대건이는 아버지를 가장 존경하며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청년으로 자라났습니다. 아버지가 생명의 방향인 갈릴래아를 선택했을 때, 죽음의 골방은 생명의 잔칫집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출처: KBS 「인간극장 - 내 사랑 대건아」 2003년 5월 방영분 재구성)
생명으로 향하는 사람들: 심부름하는 자가 기적을 만납니다 오늘 복음의 여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무덤가에서 슬픔을 움켜쥐고 있지 않았습니다.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습니다." (마태 28,8)
이 ‘달려감’이 부활의 핵심 동력입니다. 여인들은 전하는 ‘심부름꾼’이 되었기에, 그 길목에서 마주 오시는 예수님을 뵙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부활 축하드립니다. 오늘, 어제 세례받은 15명의 새 신자가 이 미사에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힘찬 박수로 환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4행시를 만들곤 했습니다. 오늘 ‘예수 부활’로 4행시를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부활’이라고 운을 떼시면 제가 말하겠습니다.
예 – 예수님, 정말 살아나셨습니다! 무덤이 텅 비었습니다!
수 – 수난과 고통을 끝났습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부 – 부활은 ‘과거 사건’이 아니라, 오늘 내 삶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활 – 활짝 열린 무덤처럼 활짝 웃으며 외칩니다. 주님은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2026년 부활입니다. 부활은 축하해야 할 사건이고, 기뻐해야 할 사건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리스어로 부활은 ‘일어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일어나야 할까요?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불평과 원망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부활은 죽음을 넘어서 있을 미래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활은 2000년 전에 있었던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은 지금 이곳에서 삶으로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났습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났습니다. 불평과 원망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일어났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숨어 있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우리들 또한 불평과 원망이 있다면 가사와 기쁨으로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입니다. 어머님은 저를 ‘주산학원’에 보냈습니다. 지금은 먼 추억 속의 ‘물건’이지만 ‘주판’은 했던 당시에는 계산 능력을 키워주고, 머리를 좋게 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러던 주산학원은 ‘전자계산기’가 나오면서 조금씩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주산학원의 자리는 ‘컴퓨터 학원’으로 채워졌습니다. 저도 컴퓨터 학원을 조금 다녔습니다. 그러던 컴퓨터 학원은 ‘PC(Personal Computer)’가 나오면서 조금씩 사라졌습니다.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검색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궁금한 것은 검색하면 찾을 수 있었습니다. 2022년 12월 1일 ‘인공지능 챗지피티’가 등장했습니다. 인공지능은 ‘무엇이든지 물어 보세요?’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인공지능과 대화하면서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인공지능은 철학, 문학, 건축, 예술, 음악, 종교에 관한 것까지 우리가 질문하는 모든 것에 관해서 전문가 수준으로 대답해 줍니다. 저는 주판, 전자계산기, 컴퓨터, 초고속 인터넷, 인공지능의 시대를 경험하였습니다. 인공지능은 이제 저와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저는 더 이상 ‘주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저는 더 이상 ‘검색’으로 정보를 찾지 않습니다. 인공지능은 제게 이정표와 같습니다. 인공지능은 제게 유능한 비서와 같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세상의 것을 추구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저 위의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저 위의 것”을 추구한 사람들은 세상의 높은 자리를 선택한 이들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간 이들이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안정된 의사의 길을 내려놓고 아프리카 남수단으로 가서 병자를 돌보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신의 생을 내어주었습니다. 오웅진 신부님은 거리의 아이들과 노숙인들 곁에서 가족이 되어 주며 ‘꽃동네’라는 사랑의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분들은 성공과 명예의 바벨탑을 쌓지 않았습니다. 겸손과 나눔과 봉사의 사랑탑을 하늘 높이 쌓았습니다.
우리는 곧 본당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어떤 탑을 쌓아 왔느냐?” 혹시 우리는 성공과 규모와 숫자로 바벨탑을 쌓으려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50주년을 준비하는 지금, 우리가 쌓아야 할 탑은 더 크고 더 높은 건물이 아니라, 더 깊고 더 단단한 사랑의 탑입니다. 겸손으로 서로를 품어 주는 탑, 나눔으로 이웃을 살리는 탑, 봉사로 공동체를 세워 가는 탑입니다. 이름 없이 제대를 닦는 손길, 주방에서 묵묵히 음식을 준비하는 손길, 아픈 교우를 찾아가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바로 사랑의 벽돌입니다. 그런 벽돌이 모일 때 우리 본당의 50년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닿아 있는 사랑의 역사로 완성될 것입니다. 저 위의 것을 추구하는 공동체는 더 높아지려는 공동체가 아니라, 더 낮아지려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는 삶은 결국 더 많이 가지는 삶이 아니라, 더 많이 내어주는 삶임을 그분들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오늘의 성인
성 빈첸시오 페레리오(Vincent Ferrer)
신분 : 신부, 설교가
활동연도 : 1350-1419년
같은이름 : 뱅상, 빈센트, 빈첸시우스, 빈첸티오, 빈첸티우스, 빈켄티오, 빈켄티우스, 페레르, 페레리우스
에스파냐의 발렌시아(Valencia) 태생인 성 빈첸시오 페레리우스(Vincentius Ferrerius, 또는 빈첸시오 페레리오)는 귀족인 빌리암 페레리우스와 콘스탄스 미구엘의 아들로 태어났고, 1367년에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다. 그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바르셀로나(Barcelona)로 갔으며, 불과 20세의 나이로 레리다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특히 그의 설교가 뛰어났는데, 유대인과 모슬렘 사이에서도 좋은 평판을 들었다.
1378년부터 서방교회를 진동시킨 교황 논쟁에서 성 빈첸시오는 아비뇽(Avignon)으로 가서 루나의 베드로(Petrus, 베네딕투스 13세) 추기경을 적극 지원하고 그의 고문 겸 고해신부가 되었다. 1399년 성 빈첸시오는 아비뇽을 떠나 10여 년 동안이나 프랑스, 에스파냐 등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큰 감명을 받았고 개종자의 무리가 마치 군대의 행진처럼 무리지어 나왔다고 한다.
이즈음에 그는 성 도미니코(Dominicus)와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를 대동하신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것은 자신이 더욱 설교에 열심하라는 뜻이라고 해석하였다. 그의 개종자 가운데에는 시에나(Siena)의 베르나디네와 사보이아(Savoia)의 마르가리타(Margarita, 11월 23일)가 매우 유명하다.
그는 그 나라말을 모르는 지역에서도 설교하여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말씀의 은혜’를 받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또 이에 따르는 수많은 기적들 때문에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란 별명도 얻었다. 1416년 그는 아라곤(Aragun)의 페르디난도 왕처럼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대한 지지를 철회함으로써 교황 논쟁의 종지부를 찍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성 빈첸시오는 사망하기 3년 전부터 프랑스 여러 지방을 순회하며 설교하던 중 브르타뉴(Bretagne)의 반(Vannes)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455년에 시성되었다.
성녀 가타리나 토마스(Catherine Thomas)
활동년도 : +1574년
신분 : 수녀
지역 : 팔마(Palma)
같은 이름 :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성녀 카타리나 토마스(Catharina Thomas, 또는 가타리나)는 일생동안 에스파냐 발레아레스 제도 마요르카(Mallorca) 섬에서 지냈다. 그녀의 양친은 막내딸인 카타리나가 일곱 살 되던 해에 모두 운명하여 어려서부터 슬픈 나날을 보내며 삼촌 집에서 자랐다. 그런데 그녀는 어려서부터 소량이지만 약물 상용 복용자였다. 이를 극복하라고 주위에서 야단이었지만 그녀는 이를 아예 무시해 버렸다. 그러므로 그녀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였다.
15세 되던 해에 그녀는 성 안토니우스(Antonius)와 자신의 수호성인인 성녀 카타리나의 환시를 보게 되었는데, 이때 그녀는 수도생활에 대한 열망이 치솟았고, 이 사실을 은수자로 지내던 안토니우스 카스타네다 신부에게 말씀드리고 판단을 기다렸다. 얼마 후에 그녀의 성소를 시험한 안토니우스 신부는 이를 허락하고 수도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팔마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회를 선택하고 입회하였는데, 이때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입회 초부터 그녀의 탁월한 성덕과 겸손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가 돋보이기 시작하여 장상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연간 13-15일 동안은 탈혼 상태에서 지냈으며, 어떤 때는 하루 종일 그런 상태에서 보내기도 하였다. 때때로 간경증 환자처럼 전혀 생기 없는 상태가 되었고, 또 예언의 은사도 받았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수녀원 내에서 맡은 소임을 게을리 한 적은 없다고 한다. 성녀 카타리나 토마스는 자신이 예언한 해(41세)에 운명하였으며, 1792년에 시복되고, 1930년에 시성되었다.
복녀 율리아나(Juliana)
활동년도 : 1192-1258년
신분 : 신비가
지역 : 코르닐롱산(Mount Cornillon)
같은 이름 : 율리안나, 줄리아나, 쥴리아나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 지방 리에주(Liege) 교외 러틴느(Retinnes)에서 태어난 율리아나는 5세 때에 고아가 되어 코르닐롱 산의 수녀들의 도움을 받고 성장하였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환시를 경험하였는데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성체를 공경하는 축일이 없다고 지적하셨다. 그 후 그녀는 수녀가 되었고, 1225년에는 원장으로 선출되면서부터 자신의 환시 내용을 기초로 축일을 만들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저런 오해도 많았고 제재를 당하기도 했지만 마침내 리에주의 주교가 1246년 교구 내에 '주님의 성체 축일'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그 주교가 사망하면서부터 그녀를 반대하는 기운이 일어나 율리아나는 자기 수녀원에서 쫓겨났다. 그 후 나무르(Namur)의 시토회 수도원에 피난처를 마련하였으나 그곳마저 헨리 2세의 군인들이 파괴하였다. 그녀는 일생 동안 성체 축일 제정과 성체 축일의 보급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1258년 4월 5일 포세스(Fosses)에서 선종하였다. 교황 비오 9세(Pius IX)는 1869년에 그녀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