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월 27일,
베트남전 종식을 위한 파리평화협정 조인
프랑스 파리에서 1973년 1월 27일 남베트남(월남), 북베트남(월맹), 남베트남 해방전선(베트콩)의 외무장관과
미국무장관이 만나 베트남전 종식을 위한 파리평화협정에 조인했다. 파리평화협정은 1월 23일 북베트남 대표
스안 도이와 미국 대통령 보좌관 키신저가 가조인한 바 있다.
1973년 1월 27일, 파리평화협정에 서명하는 트린(Trinh) 북베트남 외상
파리평화협상 중에 협상 성사의 주인공인 북베트남의 레득토 수상(우)와 닉슨의 국가안보 자문이
헨리 키신저(좌)가 대회를 나누고 있다. 이 둘은 협상의 공로를 인정받아 1973년 Nobel평화상
수상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두 전쟁 당사자 간의 다분히 정치적인 협상에 노벨평화상이
수여된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경악했고, 전쟁상이라며 조롱했다.
한편 레득토는 아직 베트남에 평화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그 결과 그는 수상자로
지명된 최초의 아시아인이자, 최초의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이를 거부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영예(?)를
얻는다. 키신저는 수상을 허락했지만 시상식에 나타나지 않았고, 1975년 북베트남의 승리 이후
노벨평화상을 반납하고자 했으나, 거부당했다. 이 사건으로 노벨위원회 위원 2명이 위원직을 사임했다.
1964년 8월 2일,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고, 미국은 이 사건에 없던 사실을 끼워 넣고는 이것을 구실로 삼아서
전쟁을 시작한다. 일명 피어스 애로우 작전. 1964년 8월 5일. 미 해군 항공모함의 전폭기들이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 기지와 석유저장시설에 폭격을 실시한 것이다.
통킹만 사건
1965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쟁은 미 공군의 1966년 6월 29일의 하노이, 하이퐁 유류저장고 폭격으로
크게 확산된다. 7월 17일에 북베트남은 전 국민과 군대에 비상동원령을 선포하였고 중국은 각종 전쟁물자와
무기, 후방 기지를 본격적으로 제공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전에도 중국과 소련 등 공산권의 지원은 있었다. 한
편 8월에는 남베트남 주둔 미군이 30만여 명으로 엄청나게 늘어나 있었고, 미국은 10월에 발표한 월남참전
7개국 정상회담 공동성명발표를 통해 전쟁의 조기 종결을 계획하고 있었다.
미군의 화력이 워낙 압도적이었던 까닭에 아무 무리 없이 상황이 종료되리라 정치인들은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반대로 돌아갔다. 펜타곤은 전차와 비행기로 밀어붙이는 재래식 전쟁에는 익숙했으나, 베트남에서의
게릴라전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전투였다. 전투가 정글에서 펼쳐지는 탓에 전차 등 중장비는 제대로
활용할 방법이 없었고, 보병이 홀로 정글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한편 미국 본토에서는 반전시위가 한창이었고 베트남 전쟁 현자에서는 하극상 사건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내에서 반전여론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게 되고, 결국 196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베트남에서의 단계적인 철군을 발표하였다. 게다가
반전여론과 경제 인플레이션 및 재정적자로 인해 아시아에 주둔 미군을 대폭적으로 감축시키겠다는 요지의
‘닉슨 독트린’이 발표 된다.
영국 런던에서 벌어진 베트남전 반전 운동을 진압하고 있는 런던 경찰들
발표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지만 조금씩 미군의 철수는 시작되었다. 1971년이 끝날 무렵에는 지상전투
부대의 대부분은 떠나며 1972년 3월 북베트남의 춘계공세가 일어날 때 미국은 지상군 재파병이 아닌 공군과
해군의 항공력을 재소집하여 대응하고 지상군은 그대로 나가게 한다. 1972년에는 닉슨이 재선에 성공하게
되고, 단계적인 철군은 계속 이어진다.
한편 닉슨의 국가 안보 자문이었던 헨리 키신저와 북베트남의 레득토는 비밀리에 정전협상을 추진하고 있었다.
1972년 8월 키신저와 레득토는 합의에 도달하였지만 남베트남의 티에우 대통령은 평화협정 내용의 수정을
요청하였다. 그런 와중에 북베트남이 협정 내용을 공표하자 닉슨 행정부는 북베트남이 기만 전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비난과 함께 협상을 중단했다.
닉슨은 남베트남에 대한 계속적인 지지와 협상에서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1972년 12월 18일부터
29일까지 하노이와 하이퐁을 공격하였다. 이번 무차별 폭격에 사용된 폭탄은 12만 톤으로 히로시마 원자
폭탄의 5배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이 폭격으로 북베트남의 경제와 공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같은 시기 닉슨은
남베트남의 티에우 대통령을 압박하여 남북간의 평화 유지와 미군 철수를 골자로 하는 협정 조건을 승인하게
한다.
1973년 1월 15일 닉슨은 북베트남에 대한 공격을 중지한다는 발표를 하였고 1월 27일 파리평화협정에 조인
하면서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을 공식적으로 종결시켰다.
파리평화협정은 1) 조인 후 60일 이내에 미군 철수 2) 포로 상호석방 3) 남베트남의 사이공정부, 남베트남
해방전선과 제3세력의 3자에 의한 민족화해일치 전국평의회 설치 등을 결정했다. 이 휴전의 담보를 위해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20억 달러는 미국 직접원조, 20억 달러는 IBRD 차관)의 원조를 제공, 이것으로
피폐한 월맹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했다.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 이란, 헝가리, 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한편 월맹에서는 인질형식으로 하반라우 외무차관이
150명의 고문단과 함께 사이공에 체류했다. 이제까지 미국이 베트남전에 투입한 전비는 1300억 달러였고 사망
4만4천명, 중경상자 30만3천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