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 7월 7일 노구교 사변을 시작으로 8년간의 중일전쟁이 시작됩니다. 뒤이어 8월 13일부터 3개월간 이어진 상해전역은 중국군 70만에 일본군 20만이 참가하여 1차대전 베르뎅전역 이래 단일전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중국군은 큰 희생을 치루며 열심히 싸웠으나 화력과 제공권, 제해권의 압도적인 열세로 참담한 실패로 끝납니다.
※ 상해전투에 관한 글 : http://blog.naver.com/atena02/100118200946
북중국에서 일본이 침공했을때 장개석은 중일 양국간의 경제적, 군사적 격차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항일전략의 기본 원칙으로 중국의 거대한 영토와 인력, 지형적 특성을 최대한 활용한 "지구소모전"을 제창합니다. 소위 "공간을 버림으로서 시간을 번다"라는 전략이었죠. 이는 백숭희, 이종인 등 광서계 고위 참모들과 독일 군사고문인 팔켄하우젠의 건의에 의한 것으로, 설령 중국 전토의 대부분을 빼앗긴다쳐도 사천, 귀주, 운남 3개성만 확보한다면 결국에는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악의 경우 가장 오지인 신장성으로 후퇴하는 것도 각오하죠.
모택동 역시 유사한 "지구전 전략"을 구상하죠.
이를 위해서는 최대한 조기 결전을 회피하여 주력을 철저히 보존하면서 적 정면, 측면에서의 기동전과 후방에서의 유격전을 구사하여 공간을 내주면서도 적의 희생과 병참에 대한 부담을 최대한 강요하여 적이 한계에 다닿았을때 반격하여 영토를 조금씩 회복해 나가는 형태가 되어야 했습니다. 국내사정상 장기전 대비가 되어 있지 못하고 조기결전을 노리는 일본으로서는 가장 두려운 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장개석은 근본적으로 이 지구전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상해, 남경전역에서 강력한 일본군에 맞서 최정예부대를 비롯해 주력을 투입하여 일대 결전을 벌임으로서 초장부터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됩니다. 사상자를 고려하지말고 무조건 밀어붙이라는 명령으로 처음 1주일은 우세를 유지하지만 일본이 증원군을 투입하자 단숨에 수세에 몰립니다.
그는 기동전이 아닌 진지전을 통한 "지구전"을 구상했는데, 문제는 장개석 직속의 8개 독일식사단을 제외하고 300만에 달하는 대다수 중국군은 전혀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으며 해공군에서도 압도적으로 열세했습니다. 상해와 남경 사이의 요새지대 역시 아직 건설중이었습니다.
중국의 근대공업은 훨씬 낙후된데다 정치적 분열로 인해 중앙정부가 사용할 수 있는 재원과 자원은 5%미만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장개석이 생각했던 장기적인 소모전은 불가능했죠.
전략적 미비함뿐만 아니라, 전술 레벨에서는 더욱 실수와 아마추어적 오판의 연속이었습니다.
첫째로, 피아간의 전력차이와 아군의 열세함을 뻔히 알면서도 좁은 지역에 무리하게 많은 병력을 몰아넣고 화력에서 월등히 우세한 적의 전면에 병력을 축차 투입함으로서 성과없이 병력만 소모시켰습니다.
둘째로, 3개월이나 질질 끌면서 적이 후방에 상륙할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적이 1차 상해전처럼 전장을 상해 일대로만 제한할 것으로 막연히 낙관했습니다. 구원군도 상해에 투입하리라 생각했지 훨씬 후방인 항주만에 우회하여 상륙하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후퇴나 종심방어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수십만에 달하는 병력을 적의 추격과 포위를 피해 체계적으로 철수시킬 계획도 없이 병력만 몰아넣었다가 무계획적으로 "철수"명령을 내렸고 그 과정에서 군 조직 자체가 완전히 와해되어 버립니다. 모든 차량과 중장비가 버려졌고 1만이상이 철수과정에서 희생되었습니다. 이러다보니 상해-남경 사이에는 그동안 막대한 비용을 들여 다수의 견고한 토치카를 구축했음에도 방어작전에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방어군까지 휩쓸리는 바람에)
이런 점은 그 스스로도 나중에 "자아비판"과 "자기반성"으로 실수를 인정합니다. 투입된 병력의 1/3이상을 잃은데다 거의 모든 중장비와 차량을 상실했으며 지휘계통자체가 무너져 사단들 대부분이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치명타였습니다. 전쟁끝날때까지도 회복하지 못하죠.
이 점은 남경에서도 다시 한번 반복됩니다. 남경수비사령관 당생지는 무능하게도 종심 방어나 외곽의 유리한 거점방어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모든 병력을 남경성 안에 집어넣습니다. 구호로는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자"라면서 후퇴는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 자신은 도주해 버리죠. 10만명의 수비군은 포위된채 제대로 된 시가전조차 해보지 못한채 섬멸당합니다.
상해-남경에서 장개석은 중앙군의 60%이상을 상실했는데, 팔켄하우젠은 장개석이 여기서 무리한 결전을 고집하지 않고 당초 계획대로 주력을 보존했다면 이후의 전쟁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 라고 말했고 장개석 역시 동의합니다. 장개석은 더이상 대규모 진지전을 고집하지 않았고 서주에서는 재빨리 철수함으로서 주력을 보존하는데 그런대로 성공합니다.
한편, 전략적 오판과 실수라는 측면에서는 일본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전시동원체제도, 장기적인 전쟁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무택대고 개전을 결정하였습니다. 육군대신 스기야마는 천황 히로히토에게 "한달안에 중국을 끝장내겠다"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이는 어떤 근거가 있어서도 아니며 단지 막연한 적에 대한 경시였죠.
일본 대본영은 계획 자체가 전무했고 중국군이 무너지자 이를 추격해 전략적으로 전과 확대를 하지 못합니다. 단지 현지부대들이 상층부의 명령을 무시한채 독단적으로 추격 경쟁을 벌임으로서 병참이 마비되죠. 일본군은 중국군을 얕보고 정찰과 사전 준비를 매우 게을리 했고 쉽게 측면을 노출했으며 지휘관끼리의 경쟁으로 우군 부대간 협조도 제대로 되지 않아 우세한 기동력으로 중국군을 포위 섬멸할 수 있음에도 기회를 놓치고 내지 않아도 될 희생을 치루기 일쑤였죠. 대도시는 중국군에 의해 포기되어 쉽게 함락할 수 있었지만 중소도시나 농촌에서는 이를 지켜낼 병력과 자원이 부족해 중국군의 반격으로 금새 탈환되거나 큰 희생을 치루며 고전하게 됩니다.
군대도 개전당시 겨우 17개 사단에 불과했고 전쟁이 장기화되고 확대되면서 군대 역시 급속도로 증강됩니다. 그러나 잘 훈련된 지휘관과 하사관의 태부족으로 군대의 질 또한 급속도로 낮아지죠. "한달만에 끝날거"라는 전쟁이 8년이나 끌게 된 것은 바로 이때문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