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立春大吉(입춘대길)은 “입춘이 되어 크게 길하다.”는 뜻으로,
입춘(立春) 날에 ‘건양다경(建陽多慶:따스한 기운이 도니 경사가 많으리라)’과 함께
대문이나 대들보 및 마루기둥에 입춘첩(立春帖)을 써 붙인다.
입춘첩은 옛날 궁중에서 입춘을 맞아 문신들이 지어올린 연상시(延祥詩) 가운데
좋은 시구를 골라 대궐의 기둥과 난간에다 내건 것에서 유래한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등 춘첩(春帖)은 대표적인 입춘 행사의 하나다.
한자로 써서 대문의 좌우측에 여덟팔자 형태로 붙인다.
입춘첩이나 입춘축(立春祝) 또는 춘첩자(春帖子)라고도 하는데,
‘개문만복래 소지황금출(開門萬福來 掃地黃金出)’
‘우순풍조 시화연풍(雨順風調 時和年豊)’ ‘국태민안 가급인족(國泰民安 家給人足)’ 등
좋은 의미가 담긴 문구가 많다. 일반적으로 입춘대길이란 말은 조선 중기의 문신
우암 송시열(1607~1689)의 글에서 인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은 그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선조 26년(1593년) 승정원에서 ‘사변(임진왜란)이 안정되지 않아 춘첩자를 지어 바치지 못했으니
입춘대길이라는 넉자를 정성스럽게 써서 행궁(行宮) 안팎에 붙이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고,
임금이 수용함으로써 춘첩자로 나붙게 된 것이다.
이는 조선 왕실에서 입춘대길이란 문구를 춘첩으로 사용한 첫 기록이다.
그 시기 또한 송시열의 생몰 연대보다 100년 이상 앞선다.
‘새봄이 시작되니 경사스러운 일이 많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은 건양다경은 그 어원이 불분명하다.
두 가지의 유래설이 나돌고 있다.
1896∼1897년에 사용된 고종의 연호 ‘건양(建陽)’ 유래설은,
당시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뜻에서 집집마다 건양다경이라고 써붙인 것이 시초라고 본다.
하지만 송시열과 비슷한 시기의 문신 미수 허목(1595~1682)의 글에서 인용했다는 설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후자에 무게가 더 실리지만 고증 자료는 더 필요하다.
‘立’자에 ‘곧’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입춘은 ‘곧 봄’이라는 뜻.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머지않으리’라고 한
퍼시 B 셸리의 시를 연상케 한다. 봄을 대하는 마음에는 동서고금이 따로 없다.
바야흐로 동풍이 불어 언 땅이 녹고, 겨울잠을 자는 벌레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며,
물고기가 얼음 밑을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입춘절’이 시작됐다.
‘대길(大吉)’과 ‘다경(多慶)’을 크게 쓸 차례다.
참고 : 건양 建陽
조선 말 고종 32년인 1895년 음력 11월 17일에 조선이 자주국임을 선포하기위해 최초로 사용한 연호(年號)입니다.
김홍집 내각에 의해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한 연호(年號)인데,
그 후 이듬해인 1897년에는 다시 광무(光武)로 연호를 바꾸었습니다. -모셔온 글-
.................................................................................................................
겨울 그리고 봄
: 하루의 계획은 아침에 있고 한 해의 계획은 봄에 있다.
연휴인지라 일주일 가량 산중 암자로 가서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도심에 살다가 오랜만에 산으로 가니 정말 추웠다. 지난번에 내린 눈이 아직도 얼어 있는데 그 위로 다시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게다가 상수도마저 꽁꽁 얼어붙어 물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털모자를 눌러쓰고 잰걸음으로 밖으로 나가 물을 바가지로 통에 퍼 담아 와서 밥을 해먹고 세수를 해야 했다. 물을 길어 먹고 또 데워서 발을 씻으니, 문명의 혜택이 전혀 없는 오지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산 속으로 오니 진짜 겨울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래서 옛사람들이 참으로 봄을 기다렸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섣달그믐이라 마당의 비질은 평상시와 반대로 하였다. 즉 대문 쪽에서 집 안쪽으로 쓸면서 들어왔다. 복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바람을 행동으로 표현한 옛 어른들의 지혜를 본받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나서 방과 부엌,헛간 등 집 안 곳곳에 불을 밝혔다. 한 해가 바뀌는 것을 지켜본다는 수세守歲의 세시풍습을 이어가기 위한,어찌 보면 또 다른 역사적 계승 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경청선사가 말한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복을 여니 만물 모두가 새롭다’는 덕담으로 한 해를 열고 싶은 내 개인적 기원이기도 했다.
지금은 절집 말고는 음력을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양력으로 보신각 제야종 소리를 듣고 해맞이로 새해 다짐을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까치설날’이다. 진짜 ‘우리 우리 설날’은 음력 정월 초하루다. 하지만 달력은 이미 한 장이 넘어가버린 상태이다. 현실과 이상은 또 이렇게 다른 것이다.
어쨋거나 겨울이 없다면 봄의 귀함을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보리는 춘화春化처리를 하지 않으면 싹이 돋지 않는다고 한다. 얼리는 것을 춘화라고 하니 참으로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이름을 붙여놓은 것 같다.
사실 추위라고 하는 것은 더위가 모자라는 것일 뿐이다.
어둠은 밝음이 부족한 것일 뿐이다.
고구마는 가을에 거두어 들이면 열매이지만 봄이 되어 밭으로 나가게 되면 씨앗이 된다.
열매이면서 동시에 씨앗인 것이다. 씨앗 속에 열매가 포함되어 있고 열매 속에 씨앗이 들어 있다.
마찬가지로 겨울 속에는 봄이 내재되어 있고 어둠 속에는 이미 밝음이 들어 있다.
이 모든 것이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각각 분리되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설날이 지나면 평범한 사람들도 겨울 속에서 봄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생활에서는 시작의 약속된 출발점이 있어야 한다. 입춘도 거의 설날과 절기가 비슷하다. 모두가 시작의 의미이다. ‘입춘대길’이라는 큼직한 글씨를 대문에 써 붙이는 것도 한 해의 시작을 잘해보리라는 다짐을 밖으로 나타내는 또 다른 삶의 지혜라 할 것이다.
이제 봄이다. 모진 겨울이 길다고는 하지만 때가 되면 부드러운 봄기운에 밀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봄 역시 항상 봄일 수만은 없다. 그래서 당나라 때 지현후각선사는 이런 시를 남겼나 보다.
꽃 피니 가지 가득 붉은색이요
꽃 지니 가지마다 허공이네.
꽃 한 송이 가지 끝에 남아 있지만
내일이면 바람 따라 어디론지 가리라.
원철스님의 <아름다운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 에서
첫댓글 해마다 동생이 붓으로 써주는 입춘대길, 건양다경, 오늘은 대문에 붙여야겠습니다.
벌써 홍매 향기가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