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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묵상글 들 (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 복음의 홀씨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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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복음의 홀씨들
오늘 주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주고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 주시고 이에
사람들을 피해 외딴곳에 가서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곳까지 찾아가 자기들과 함께 머물러 달라고 주님을
붙잡는데 이에 주님께서는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콜로새서를 시작하며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복음은 여러분에게 다다라
여러분이 그 진리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듣고 깨달은 날부터,
온 세상에서 그러하듯이 여러분에게서도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오로 사도는 복음이 여러분에게 다다랐다고 하는데
한곳에 머물라고 붙잡는 것을 뿌리치며 주님께서 선포하신
그 복음이 마침내 콜로새까지 다다른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이 이 먼 곳까지 다다른 것과
주님께 대한 믿음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있어서 콜로새 신자들이
열매를 맺고 있음에 매우 흐믓이 여기며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면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오로 사도의 이 기분이랄까 느낌을 압니다.
30여 년 전 저는 프란치스칸 전통에 충실한 복음 선포를,
곧 순회 선교 공동체를 시작하기 위해 신안군 자은도에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안군 자은도로 가게 된 것은 알고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당이 없는 곳 그러니까 복음에서 가장 먼 곳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당시 목포 북교당 성당 신부님께 전화하여 한 곳을 소개해달라고 해 갔지요.
그런데 목포에서 배를 타고 네 시간 가는 그곳에 도착해 보니
그 멀고도 외딴 곳에도 신자들이 이미 있는 것이 감격이었습니다.
이곳에까지 복음이 전해져 있다니!
누가 언제 민들레 홀씨처럼 이곳에 복음을 가져왔는지!
그렇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것은 복음의 홀씨였습니다.
그런데 홀씨는 자기가 목적하는 곳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자기 목적지가 따로 없고 바람 부는 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바람이 부는 대로 가는데 이때 홀씨가 지녀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든지 가겠다는 의지와 열매를 맺고자 하는 원의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복음의 홀씨들이어야 합니다.
어디에 떨어지든지 거기서 복음의 열매를 맺는 홀씨들 말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의 홀씨들에게 또한 필요한 것은 순응성입니다.
순응성은 순종과 적응이 합친 말입니다.
더 붙어 있으려 하지 않고 바람이 불면 미련없이 떠나는 순응성,
어디에 떨어지든 거기에 적응하고자 하는 순응성과 적응하는 순응성입니다.
그러니 안주는 금물이고,
편견과 고집도 금물입니다.
아무튼, 순례자와 나그네들인 프란치스칸은
복음의 홀씨들임을 묵상하고 마음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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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언제나 깨어있어서
“사랑을 받게 되면 버림받을 때를 생각하고 편안하게 있을 때는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명심보감).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의 때를 알고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연연해하고 집착하면 결국은 버림을 받게 됩니다. 버림을 받기 전에 떠나면 그를 기리고 아쉬움도 남는 법인데 그때를 못 맞춰서 결국 명예도 잃고 추하게 됩니다. 아쉬움이 남을 때 그때야말로 떠나야 할 때입니다. 칭찬을 받을 때, 그때가 떠나야 할 때입니다. 칭찬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 쉽습니다. 영국 속담에는 “바보를 칭찬해 보라. 그러면 훌륭하게 쓸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칭찬을 받은 사람은 하나같이 바보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떠나야 할 사람은 안 떠나고 떠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 떠나서 희망이 없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붙들었습니다”(루가4,42). 치유와 말씀에 사로잡혀 예수님과 오래도록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가4,33).하시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성인은 언제나 깨어있어서, 하늘이 명하는 바를 알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다”(이현주). 주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 안에 계셨습니다. 밥을 드실 시간이 없이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한적한 곳을 찾고, 이른 아침 고요한 곳을 찾아 기도한 덕분입니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할 때, ‘네가 꼭 필요하다고 할 때’ 주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 얘기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떠난 자리가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어디에든 연연해하지 말고 단순하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을 즐기고 싶은 유혹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요한 세례자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인기가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합니다. ‘나는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주제파악을 하고 있었습니다. 분수를 알고 뒤에 오실 분을 위해 자리를 뜨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드러내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재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삶의 모범과 표양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많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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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는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
오늘 <복음>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신 다음, “시몬의 집”(루카 4,38)에 가시어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앞 장면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실 때와 뒤 장면에서 소리치는 마귀를 쫓아내실 때와 같이, 마치 마귀에게 하듯이 열을 “꾸짖으시어” 열을 몰아내십니다.
<둘째 부분>은 “해질 무렵에”(루카 4,40), 곧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몰려든 많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루카 4,41)이라고 소리 지르는 마귀들을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를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루카 4,41)
우리는 여기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믿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으니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을 알고 고백은 할지라도, 믿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알기에 배척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되고, 그 아는 바를 믿고 그 믿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부분>은 “날이 새자”(루카 4,42), 곧 안식일 다음 날에 예수님께서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나서, “복음 선포”를 위해 다른 이웃 고을들로 찾아가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 새벽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당신이 파견되어 오신 이유를 밝히십니다.
“나는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여기서,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임을 밝히십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이 사명을 바로 우리의 사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니‘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1고린 9,16) 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주님!
제가 태어난 이유,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제 뼈 속에 새긴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뜻을 증거 하는 일, 그 일을 하도록 제가 파견된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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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들, 선교와 생태계 보호 그리고 순교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선언에서 천명하신 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병고에 시달리며 마귀들려 고생하는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시느라고 여러 고을들을 부지런히 다니셨습니다. 그분으로부터 질병이 치유되고 마귀가 쫓겨나가는 신적인 권능을 확인한 군중은 그분을 붙잡으려고 기도하시는 곳까지 따라왔지만 그분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한 고을에서만 전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와 함께 콜로새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쓴 편지를 통해서 그들의 사목자로 임명된 에파프라스가 그 공동체는 물론 인근 라오디케이아와 히에라폴리스의 교우들을 위해서도 수고를 많이 하고 있으니 그를 잘 따라 달라는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콜로 4,12-13).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느 한 고을만을 위해서 파견되신 것이 아니며,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해서 복음선포를 하시러 오신 분도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인류 모두를 위한 복음을 선포하러 오셨고, 또 부활하신 후에는 성령으로 모든 이들을 위해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메시아로서 그분이 발휘하신 기적의 능력만을 쫓아다니던 이스라엘 백성은 끝내 그분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그 결과 2천 년 동안 전 세계에서 떠돌아다니면서도 배타적인 선민의식을 내세우던 그들은 서양 여러 나라에서 퍼진 반유다주의 풍조로 혐오당하는 신세를 자초하였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도로 자처했던 바오로는 콜로새를 비롯한 소아시아 지방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를 세웠으며, 그런 다음에는 그 공동체 출신 교우 중에서 지도자를 세워놓고 자신은 또 다른 곳으로 선교하러 갔기 때문에 지도력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현지 지도자를 돕기 위해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사실은 교회의 성장과 사목에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 그는 자신이 건설한 공동체에 눌러앉아 지배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과, 둘째로 떠나가서도 모른 처 외면하지 않았으며 비록 자신은 비주류로서 기성 사도단의 도움을 받지 못했지만, 자신이 내세운 이들을 돕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은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 생태계를 돌보는 일은 결국 우리 자신을 돌보는 것이며, 창조 질서를 보전하기 위하여 에너지를 절약하고 쓰레기를 줄이는 일도 엄연한 복음선포 행위입니다. 또한 9월의 첫날인 오늘, 순교자 성월을 시작하면서 불과 2백여 년 전에 우리 선조들이 박해 속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교우촌을 세워 가족들이 기도로써 신앙을 지키고 애덕 실천으로 신앙을 증거했던 그 역사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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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1789년 7월 14일부터 1794년 7월 28일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의 시민혁명을 아실 것입니다. 불평등한 사회체제를 전복시켜 민중의 사회 개혁을 이루게 되었지요. 그런데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는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 루이 16세 왕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무지였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파리의 빵값 폭등으로 “빵을 달라.”고 외치는 시민을 향해 “빵이 없으면 케이크 먹으면 되지.”라고 말했다고 사람들은 더욱 화가 나서 들고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녀가 이 말을 직접 한 것은 아니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합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왕비의 무지를 부풀려 혁명의 당위성을 펼친 것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가난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남을 이해하는 것은 그를 알고 그의 뜻을 실천할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또 그 뜻을 실천할 것처럼 말하는 것은 거짓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의 왕족과 귀족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은 시민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 분노가 세상에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말로만 이해한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또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실천하기보다는 나의 욕심을 채우는 데 더 집중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서 시몬의 장모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마귀들이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전혀 거짓이 없는 완벽한 진실입니다. 이렇게 진실을 말하는 마귀에 대해 예수님의 행동은 이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의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하면서 마치 마귀가 예수님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예수님을 이해하고 함께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단지 이렇게 말함으로 인해 마귀와 예수님이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오지 못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함께 하지 않고, 그 뜻을 실천도 하지 않는 사람은 마귀와 같은 모습입니다. 서로를 이해하는 세상이 될 때,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으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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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데이비드 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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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할 일이 너무 많아요.
신부로 살아서 다행스러운 점은 비싼 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사제관에 상주하고 있는 데다가, 엄격한 복장 규정이 요구되는 곳에 가더라도 별걱정이 없습니다. 사제들이 입는 클러지셔츠에 검은 양복만 걸치면 최고의 정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검정 양복에 어떤 장식을 할 수도 없으니 늘 똑같습니다. 그래서 옷 입는 감각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아니 일부러 옷 입는 감각을 키워서 차려입으면 이상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옷뿐이 아닙니다. 지금을 사는데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기보다는 불평불만에만 집중했을 때가 더 많았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걱정할 것도 아니고 또 신경을 많이 쓴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불평거리만 계속 만들며 힘들게 사는 우리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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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방을 정리하면서 좋은 것도 있었고, 나쁜 것도 있었습니다. 좋은 것은 잃어버린 줄 알았던 책을 찾았습니다. 나쁜 것은 버린 줄 알았던 음식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지퍼 백에 있어서 별 문제는 없었지만 서두르는 저의 성격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한글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독일어가 풍요로워진 것은 루터가 라틴어로 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때부터라고 합니다. 영어의 멋은 셰익스피어가 좋은 작품을 쓸 때부터라고 합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당시에는 ‘언문’이라는 냉대를 받았습니다. 글을 배운 양반들은 한글을 무시했습니다. 한글이 풍요로워지고, 멋스러워질 수 있기 위해서는 한글을 사용하는 작가의 작품이 있어야 했는데 우리는 그 시간을 일본의 식민지로 지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에는 일본식 문장이 많고, 영어의 번역 투의 문장이 많다고 합니다. 가방을 정리하면서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 기뻤고, 버려야 할 것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속이 상했습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우리의 아름다운 한글을 잘 가꾸고, 풍요롭게 만들면 좋겠습니다.
원래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는 띄어쓰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한글의 띄어쓰기는 1877년 영국의 선교사 존 로스가 한글을 배우면서 띄어쓰기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래야 한글을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입니다. 한글을 이해하기 위해서 제안한 띄어쓰기는 오히려 한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띄어쓰기의 원칙과 기준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도 매일 신문의 기사를 교정하면서 띄어쓰기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안식일은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넘지 못할 벽이 되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죄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국인이 한글을 이해하기 위해서 제안한 띄어쓰기가 오히려 한글을 쓰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면 띄어쓰기에 대한 규정과 원칙도 새롭게 변해야 합니다. 말이 먼저 있고, 문법은 나중에 그 말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글을 쓰는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기준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 삶의 중심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합니다. 이 희망은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통하여 이미 들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의 중심은 진리의 말씀 곧 복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쁜 소식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는 나라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입니다. 기쁜 소식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말씀과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고, 아픈 이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기쁜 소식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면 우리 또한 죽더라도 살 것이고, 살아서 믿으면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자아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자아의 틀에서 벗어나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우리 몸의 세포는 바로 그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들어온 영양분을 주위에 있는 세포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줄 때, 우리의 몸은 건강하게 자라납니다. 자신에게 들어온 영양분을 나누어 주지 않고 자신만 소유하는 세포가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암세포’라고 부릅니다. 자신이 커지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신도 죽고 건강했던 몸도 죽이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모두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이웃과 동화되는 것, 그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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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중심
- 주님과의 만남인 기도 -
오늘은 순교자 성월인 9월의 첫날입니다. 바야흐로 기도의 계절이 시작되었습니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찬미받으소서’ 회칙을 반포하면서 매해 9월1일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지내기로 하였고 바로 오늘은 제7차 기도의 날이 됩니다. 이제는 사랑의 이중 계명에 자연 사랑까지 포함되는 사람의 삼중 계명을 요구하는 절박한 시점에 와 있습니다.
요즘 기업 경영에 ESG가 화두라 합니다. 위기를 뛰어넘는 힘인 ESG는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의 앞 글자를 따서 기업의 사회적, 환경적 가치를 반영하는 개념입니다. 기후위기에 호응하여 기업이 발벗고 나선 긍정적 상황을 보여 줍니다. 이젠 환경 보호가 최대의 화두로 자리 잡고 있는 긴박한 현실입니다.
가을 장마가 시작된 듯 어제 오후 부터는 쉼없이 비가 내렸고 빗소리를 듣고자 창문을 활짝 열고 하느님 생음악을 감상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업무를 하며 지냈습니다. 문득 예전에 써놨던 ‘대화’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바라봄의 관상만으로는 부족하다
때로는 둘만의 긴 대화가 필요하다
하늘님과 땅
멀리서 보기만 했지
못다한 이야기들 너무 많았다
하루종일
두런두런 소리내며 내리는 비
나눠도 나눠도 끝없이 이어지는
하늘님과 땅의 침묵과 조화된 참 정다운 대화
사랑의 일치
아, 때로 나누고 싶다
임과의 끝없는 기도의 대화를!”-2001.7.5
기도가 답입니다. 정말 영혼의 건강을 위해, 영혼이 살기 위해, 삶의 깊이를 위해 기도가 답입니다. 상황이 힘들수록 삶의 중심을 분명히 하는 데는 주님과의 만남인 기도가 절대적입니다. 어제 독서중 마음에 남아있는 구절입니다.
-장 폴 사르트르가 말하지 않았는가. “인생은 ‘B’ birth와 ‘D’ death사이의 ‘C’ choice다. 그래,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걸 붙들고 불평하지 말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걸 심사숙고하여 그 택한 일에 후회하지 말자. 나의 행복을 스스로 지켜나가자-(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장명숙 안젤라 메리치 지음)
소주제도 멋집니다. ‘하나뿐인 나에게 예의를 갖출 것’, 바로 이에 대한 최선, 최고의 선택이 주님과의 만남인 기도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한 두 번의 만남이 아니라 평생 매일 끊임없이 기도중에 만나야 하는 주님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지 않으며 멀어지듯 주님도 기도를 통해 매일 평생 끊임없이 만나지 않으면 멀어집니다. 어제 글라라 조카로부터 받은 ‘불 성경의 말씀(THE WORD ON FIRE BIBLE)’ 책선물과 더불어 친필 편지의 앞부분도 고마웠습니다.
“프란치스코 신부님! 건강하시지요? 항상 그 자리에 계시다는 것이 저희들 한테는 큰 위안이 되지요.”
‘안주安住’가 아닌 늘 거기 그 자리에서 맑게 흐르는 강물같은 내적여정의 ‘정주定住’를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 도움이 바로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입니다. 화답송 시편, “나는 하느님 집에서 자라는, 푸른 올리브 나무, 길이길이 하느님 자애에 의지하리라.”(시편52,10) 성구가 정주 수도승들은 물론 주님 안에 정주의 삶을 사는 분들에게 참 잘 어울립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세활동으로 이루어졌음을 봅니다.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다,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전도여행을 떠나시다 세부분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분주한 일상의 하루를 압축한 듯 합니다. 바로 이 분주한 일상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예수님의 외딴곳에서의 아버지와의 깊은 관상적 만남의 기도였음을 다음 대목이 입증합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루카4,42ㄱ).
시몬의 병든 장모는 물론 많은 병자를 고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아버지와의 만남이 기도에 있었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단체를 상대하시면서도 하나하나 눈길을 맞추십니다. 예수님은 병을 앓는 이들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고 마귀들은 혼비백산 달아나며 예수님의 정체를 고백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러니 아드님과 아버지와의 끊임없는 관상적 만남의 기도는 필수였습니다. 자기들을 떠나지 말라 붙들며 집착하는 군중들에 대한 예수님의 단호한 분별력의 처신 이 또한 기도의 효력效力입니다. 예수님은 모두에 열려 있는 우리 모두의 주님이심을 천명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분명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관상적 만남의 기도중 자신의 사명을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따라 곳곳에 생명의 기쁜 소식을 전하니 이 또한 기도의 분별력이자 기도의 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콜로새서의 바오로의 감사기도도 우리에게 깊은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놀라운 사실은 에페소서, 필리비서, 필레몬서와 함께 콜로새서 역시 바오로 사도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썼던 옥중서간이라는 것입니다. 옥중에서 평온平穩, 펴정平靜의 마음으로 이런 서간을 쓸 수 있었던 바오로 사도의 기도의 내공은 얼마나 깊은지요!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느낌이 드는 사도의 아름다운 감사기도 앞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면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들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합니다.”
우리의 궁극의 희망은 하늘에 있으며, 바로 희망에 근거한 믿음과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신망애信望愛의 향주삼덕向主三德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희망의 덕임을 봅니다. 과연 예수님을 닮은 기도의 달인이자 기도의 대가인 바오로 사도입니다. 주님과의 끊임없는 만남의 기도와 더불어 분명해지는 삶의 중심에 날로 깊어지는 신망애 향주삼덕임을 깨닫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요, 기도에는 늘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영육의 아픔과 질병을 치유해주시며 새하늘과 새땅을 살게 하십니다. 제 좋아하는 고백의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의 선물이옵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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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제2의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개인소명을 돌아보게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루카 4,40)
오늘 복음 안에는 예수님의 활동이 숨가쁘게 느껴질 정도로 집약되어 있습니다. 치유와 구마, 기도와 가르침, 복음 선포 등이 톱니바퀴 맞물리듯 이어지며 예수님의 일상을 선명히 보여줍니다.
질병과 마귀에 시달리던 이들,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으며 소외되었던 이들, 구원의 기쁜 소식을 목말라 하던 이들이 한 젊은 예언자의 등장에 놀라며 새로운 공기를 접합니다. 꿈에도 기다리던 메시아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자기들이 밀려난 변두리에 친히 나타나셨으니 이제는 어쩌면 희망을 꿈꾸어도 될 것 같았을 겁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이 구절에서 치유와 구마, 기도와 가르침, 복음 선포 전반에 깔린 예수님의 마음을 읽습니다. 예수님은 상대가 누구이건 경계를 허물고 다가가, 눈높이를 맞추시며 인격적으로 소통하십니다. 짧은 순간이라도 그에게 정성을 다하시며 진심으로 대하시지요. 그분 앞에 선 이는 그 누구라도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분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아시고 사랑하시고 어루만지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은혜를 입은 이들은 예수님을 붙잡고 싶어했지만 그분은 당신께서 파견되신 목적을 분명히 하십니다. 바로 온 세상의 구원입니다. 어느 특정 지역이나 특정 신분이 예수님을 독점할 수 없지요. 예수님은 성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보편적 구원의 선물이시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 신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인의 기본 사명을 읽어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콜로 1,4)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합니다."(콜로 1,5)
주님께 대한 믿음, 이웃에 대한 사랑,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고 근본 소명이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불리운 개인 소명은 바로 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토양에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웁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우리는 그분의 소명을 나누어 받습니다. 그분처럼 혼자 모든 걸 다 해낼 수는 없지만, 어떤 이는 치유로, 어떤 이는 구마로, 어떤 이는 가르침으로, 어떤 이는 기도로, 어떤 이는 선교로 예수님의 사명을 이 세상에서 이어갑니다.
각자의 개인 소명이 무엇이든 믿음과 희망과 사랑,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하는 정성어린 현존으로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에 임할 때 우리는 언제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든 제2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정성으로 대하시고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과 눈을 맞추며 그분을 흡수하고 그분께 물드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죄인이지만, 이 세상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도록 불리운 소중한 도구랍니다.
또한 창조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모든 피조물에게 감사하며 그들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과도 진정어린 형제애를 나누며 살아갑시다. 10월 4일까지 자연을 친구삼아 멋지고 아름다운 가을을 만끽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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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4,43)
오늘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15년 공동의 집인 지구를 위한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반포하면서, 해마다 9월 1일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지내기로 한 날'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창조주 하느님의 멋진 걸작품들'입니다.
생태계의 주보성인이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노래한 '피조물의 찬가'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확인시키는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 찬미가'입니다.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인 오늘은,
창조주 하느님을 기억하고, 창조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소명, 곧 당신의 피조물들을 잘 다스리라는 소명,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잘 보존시켜나가라는 소명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 소명에 충실해 왔는지를 성찰해 보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라고 말씀하신 피조물들을 파괴한 우리의 잘못에 대해 하느님께 '자비와 용서를 청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생태계를 보호하면서 창조주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잘 보존해 나갈 것을 다시금 다짐하는 '회개의 날'입니다.
그리고 지구를 살리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들을 찾아보고 작은 것부터라도 실천해 나갈 것을 다짐하는 '실천의 날'입니다.
지구 온난화와 그로 인한 자연재해의 주범인 온실가스 줄이기와 쓰레기 줄이기, 특히 플라스틱과 같은 생활 쓰레기 줄이기에 관심을 갖고 실천하도록 합시다!
온실가스 줄이기로 전기 아껴 쓰기, 냉난방기 적정 온도로 사용하기, 자동차 급제동.급출발 안하기, 신호대기 시 기어중립으로 놓기, 규정 속도 유지하기 등등 작은 것부터라도 실천합시다!
등산을 하거나 산책을 하다보면 산과 길가와 바닷가에 마구 버려진 쓰레기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썩지 않고 분해되지 않은 쓰레기들이 많습니다. 그런 쓰레기들을 절대로 버리지 말고, 보이면 줍도록 합시다!
오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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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열병을 앓는 시몬의 장모를 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끝나는 저녁부터 많은 병자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주시고, 마귀 들린 사람들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시어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라고 전합니다. 예수님께 ‘외딴곳’은 지친 몸을 쉬게 하는 장소이고, 소외가 아닌 고독의 공간이며, 하느님 아버지를 찾아 만나시는 기도의 장소입니다. 인간의 구원사 안에 계신 성자께서는 ‘외딴곳’에서 성부와 사랑의 일치를 이루시며 성령과 함께 하나가 되십니다(루카 5,16; 마르 1,45 참조).
우리는 살면서 ‘좀 더 잘 할 걸.’이라며 스스로 책망하기도 하고, 인간 관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에 쉽게 후회하며,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인 ‘외딴곳’이 아닌 ‘어두운 동굴’로 숨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걱정과 고민으로 어두운 동굴에 숨어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곳은 빛도 하느님도 없는 막다른 골목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인 우리는 어려울 때일수록, 지칠 때일수록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를 찾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을 찾는 시간을 만들고, 하느님 안에서 숨 쉬고자 노력한다면,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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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시몬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심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도 병고에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하고 육신의 병고를 완치시켜 줌으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알게 해주는 영적인 자유가 무엇인지를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통해서 알게 된다. 병 치유의 의미는 바로 하늘나라의 삶을 이 지상에서 이미 조금 체험하게 하여 주시고, 궁극적인 의미는 당신이 바로 참된 구원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임을 알려주시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예수께서는 시몬의 집에 가셔서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는 것을 보셨다. 예수께서는 가까이 가셔서 열을 꾸짖으시자 열이 가셨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느님으로서 모든 것을 주재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증거이다. 우리도 모두 죄의 열병을 앓고 있다. 이 열의 종류도 다양하다. 성을 내는 열, 죄악과 불륜이라는 열병의 종류도 많이 있다. 우리의 영적 생명을 해치는 이러한 여러 가지 열병들을 주님을 가까이하면서 치유 받을 수 있다.
예수님을 모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십사고 간청하자. 그러면 우리의 열병이 곧 가실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치유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가 머리와 가슴으로 그분을 모시면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쾌락의 열을 식혀주실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당신을 기쁘게 해드릴 일을 할 수 있도록 영적인 것들도 강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손을 잡도록 하자. 그래서 그분 손이 우리를 마음의 병과 마귀의 사나운 공격에서 해방해 주시기를 바라자.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의 명으로 자신의 병이 완치되었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39절) 즉 자신의 병이 예수께서 베푸신 은혜로 낫게 되자 즉시 일어나 예수님과 주위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우리가 더욱 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부인은 건강의 회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자신이 쓰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다. 부인은 즉시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부인의 행동은 참으로 우리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이것을 배워야 한다. 자신이 역경을 딛고 지난날의 처지보다 더 나은 생활의 처지, 학식이나 재능, 지위에 있어 더 나은 상태가 되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편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크게 봉사하기 위해서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두어야 한다. 베드로의 장모에게서 우리는 그 표양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며, 우리의 신앙이다. 우리의 삶이 이웃을 생각하고 또 더 나은 처지가 되었을 때 진심으로 봉사하며,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신앙인,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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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루카 4, 43)
기쁨과 슬픔이
어우러지는
우리들 삶이다.
어우러지기에
아름다운
계절의 변화이며
새로운 첫날의
시작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오늘이다.
기쁜 소식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오늘이다.
주님께서
복음의 씨앗을
먼저 뿌리시고
기쁨으로 열매를
거두어들이신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쁘게
봉사하신다.
기쁘게
봉사하시는
오늘을 만난다.
만남과 봉사는
예수님의
빛나는
일상이다.
예수님께서는
있어야 할 자리
가셔야 할 자리와
하셔야 할 일들을
너무나 잘 아신다.
버림받은
우리들
삶속으로
들어오신다.
우리의
마음을
읽어주신다.
우리를
기쁘게
위할 줄
아시는
주님이시다.
가까운 이웃이
되시어 마음을
나누시고 지혜를
나누어 주신다.
나눔이
참된
복음이다.
아픈 현실을
함께 나누시며
견디어주신다.
함께하시는
복음을 통해
우리 생활 속에
진리가 있음을
깨닫게된다.
어우러지는 것이
우리들 삶이고
참된 기쁨이다.
우리들또한
누군가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마음이길
기도드린다.
우리의
만남은
어떠한가?
만남은
복음이 되는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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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루카 4,38-39).”
여기서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처럼 ‘병’을 쫓아내셨다는 뜻이고,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는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바로 이 믿음을 처음으로 고백한 사람은 어떤 백인대장입니다.
“......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루카 7,7-8).”
이 말은, 예수님께서 ‘병이라는 것’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면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떠날 것이라고 믿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시는 분”이라는 믿음과는
차원이 다른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시는 의사가 아니라, 병을 지배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루카 4,40).”
여기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라는 말은, 예수님의 구원 사업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동시에 예수님의 ‘자비’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베풀어지는 자비라는 것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똑같이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구세주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면서
동시에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존재입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백인대장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말씀만으로, 또는 당신의 의지만으로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 주셨습니다(루카 7,10).
그런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많은 병자들이 몰려들었을 때,
말씀만으로 병자들을 한 번에 다 고쳐 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기를 바라셨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을 것이고, 시간을 많이 절약하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기를 바라시지 않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비효율적인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종교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자비’ 라는 것 자체가
비효율적인 일, 또 시간을 낭비하는 일로만 생각될 것입니다.)
‘손을 얹으시어’ 라는 말은, ‘안수’를 뜻합니다.
(‘안수 기도’가 아니라, 당신의 권능으로 직접 병을 고쳐 주시는 ‘안수’입니다.)
우리가 하는 ‘안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은총을 청하는 ‘안수 기도’입니다.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4,41).”
여기서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도 많이 하셨는데, 그 마귀들이 쫓겨나면서”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신 분이라는 것을 마귀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은, 그것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의 ‘신원’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는 ‘마귀들의 말’은, 믿음을 고백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말입니다.
마귀는 원래 거짓말만 하는 존재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 진실을 가리기 위한 전술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들이 말하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으신 것은, 그것들은
거짓말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고, 또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신 분’이라는 말은 믿음으로 고백해야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믿지도 않으면서 그 말을 하는 것은, 예수님을 모독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루카 4,42-44).”
사람들이 예수님께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요청한 일은,
‘기적의 빵’을 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일과 비슷합니다(요한 6,15).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은, ‘몸의 배부름’만 원했기 때문이고,
구세주를 원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살게 해 줄 임금만 원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몸의 치유’만 바라지 말고,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든 것은, 병을 잘 고치는 의사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병을 고쳐서 건강하게 사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또 필요한 일이지만,
건강한 영혼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실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치유가 곧 구원입니다(마태 9,21).
그러나 치유는 구원의 시작일 뿐입니다.
구원의 완성은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병고(病苦)에 시달릴 때, 억울하기도 하고, 하느님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병고는 신앙인들이 극복해야 할 수수께끼(고통의 신비)입니다.
병고 자체를 은총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병고를 통해서 하느님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된다면, 더 큰 은총을 얻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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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
사랑은 인간의 본질이자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법을 잘 모르고, 자기 유익이나 출세를 위한 가장된 사랑, 육신의 감각에 집중한 쾌락적 사랑, 왜곡된 사랑, 무지한 사랑, 피상적 사랑을 하며 살아간다. 물질과 이성, 그리고 정보가 사람 위에서 강력한 힘을 떨치고 있는 이 시대에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할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선교 근거지로 삼았던 가파르나움에 있는 시몬의 집에 가셨다. 그 집에서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침으로써 해방시켜주신다. 그분은 치유를 통하여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려주신다.
사랑의 치유는 해방을 불러오고 바로 그 사람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된다. 사랑이신 분의 사랑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사랑만이 사랑을 낳는데 사랑을 받아보지도 주어보지도 못한 이들은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모른다. 사랑하는 방법은 기술 차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고 하느님을 닮아가는 불가결한 길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방식을 본받도록 하자.
먼저 그분께서는 모두를 사랑하셨다. 남녀, 정신병자와 육신의 병고에 시달리는 이, 가난한 이와 부자, 권력자와 힘없는 이, 이스라엘 사람과 이교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치유해주셨다. 나아가 어디서든 함께하면서 치유와 해방을 불러일으키셨다. 이스라엘 땅과 이교인의 땅, 길가와 집안, 회당 안과 밖, 호숫가와 내륙 할 것 없이 어디서든 사랑을 보여주셨다.어디 그뿐인가!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든 평일이든 가리지 않고 사랑을 행하셨다.
또한 그분은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실 때처럼 치유와 해방이 필요한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셨다.’(4,39) 상대방이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사랑의 열정을 품고 자발적으로 다가가신 것이다. 그분은 관망자가 아니라 사랑을 발생시키는데 걸림돌이 되는 시간적, 공간적, 심리적인 ‘거리’를 좁히신 것이다.
치유를 베푸실 때에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얹으시어 고쳐주셨다.”(4,40)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에 마음을 집중하고 각 사람을 친밀하고 따뜻한 애정으로 환대하고 정성을 다해 사랑해주신 것이다. 그분은 섬세하고 친밀한 하느님의 마음으로 해방을 가져다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야말로 안식일법이나 정결례의 관습에 비할 수 없이 중요함을 온몸으로 보여주셨다. 그분은 인간을 향한 사랑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중요하며 때와 장소, 대상을 뛰어넘는 지고의 가치임을 실행하시고 가르쳐주셨다.
나는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 지금은 할 일이 많고 바빠서 ‘다음에’라고 말하며 사랑하기를 미루고 있지는 않는가? 내가 없어져야 사랑할 수 있는데 나를 비우고 버리고, 낮추기가 싫어서 관념 속에서만 맴도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랑의 지름길은 하느님 때문에, 자신이 아니라 타자를 위해 바보가 되는 것인데도 말이다.
얼마나 자주 나는 때를 가리고 장소를 가리고, 마음에 드는 사람들과 가까운 이들에게만 잘해주는 ‘울타리 안에 갇힌 사랑’을 하고 있는지! 우리 모두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울타리 없는 사랑’, ‘차별 없는 사랑’, ‘인간의 조건에 상관없는 사랑’, ‘다가가는 사랑’, ‘친밀하고 섬세하며 속깊은 사랑, 온 존재로 하는 사랑’을 혼에 새기고 기쁘게 사랑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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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사실 나는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 2019년 9월 4일
에페소서, 필립비서, 필레몬서와 함께 ‘옥중 서간’으로 분류되는 콜로새 서간은 사도 바오로가 옥에 갇혀있는 동안에 (4,3.10.18) 썼던 것입니다. 사도 바오른 그의 곁에 있던 티모테와 함께 공동체 교우들에게 인사하며 서간을 보냅니다.
4장으로 되어 있는 비교적 대부분의 다른 서간들에 비해 짧은 서간이지만 인사(1,1-2)와 끝인사(4,7-18)로 되어 있는 서간형식을 갖추고 짜임새가 있고 내용이 풍부하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공동에 간 적은 없지만(1,4; 2.1) 그가 에페소에 머무는 동안 그의 제자 에파프라스가 그의 고향인 이곳에 공동체를 세웁니다.(4,12)
수인이 된 바오로는 에파프라스 편에 골로새 공동체의 어려운 처지의 소식을 전해 듣고 티키코와 오네시모스를 그곳으로 보냅니다. 여기에서 보듯 바오로는 콜로새 공동체를 직접 세우지는 않았지만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의 처지를 알리며 두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가르치고 격려를 하려고 편지를 쓴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공동체가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습니다. 다만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이단, 유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예수님의 메시아를 부인하는 가르침과 천사들에 대한 갖가지 상상, 금욕주의, 계율실천 강조고 있었습니다.
또 다르게는, 당시 이미 체계화 되고 만연되어 있던 그리스도의 육체를 부인하는 영지주의 (그노시스)의 주장들을 미루어 보아 콜로새 공동체도 흔들어 놓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비록 자신이 수인의 몸으로 그 공동체에 가지는 못해도 어려움에 처해있는 공동체를 위해서 특별한 애정과 함께 그 공동체를 위해서 하느님께 기도하며 자신이 제자 에파프라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그 은총을 우리가 사랑하는 동료 종 에파프라스에게 배웠습니다. 그는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일꾼이며,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준 사람입니다.“(콜로 1,7-8)
예수님의 복음선포가 갈릴래아 지방에서 시작 됩니다. 오늘은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그리고 시몬의 집에서 치유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베드로 가정에 대해서 심지어는 그의 부인과 가족에 대해서 알 수는 없지만 루카는 시몬의 장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열병에 걸려 시달리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 열을 가시게 해주십니다. 그녀는 일어나 예수님 일행을 위해 시중을 드십니다. 예수님 한 분도 아니고 그 일행을 위해 식사 준비에서부터 시중을 든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소문을 듣고 사람들은 주위의 아픈 사람이나 마귀들린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지요.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 그들을 고쳐주십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 외딴 곳으로 가십니다. 소문을 듣고 몰려온 군중은 주님을 찾아 다니다가 그분이 계시는 곳을 찾아내어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주님을 붙잡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선포를 위해서 비록 그곳이 정 들고 편안하기에 한 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주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을 다니시며 그곳에서 복음을 선포하며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복음의 씨가 뿌려진 공동체를 생각하며 애정의 마음으로 편지를 쓰는 사도 바오로의 복음선포에 대한 열정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는 그의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로마에서 ‘달릴 길을 다 달린 사도’였습니다. 그가 여러번 고백했듯이 예수님이 그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분에 대한 사랑과 희망이 그렇게 무한한 열정을 주었으리라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외딴 곳까지 찾아 온 군중을 보시고도 그곳에 머무르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소명이 한 곳에 있지 않고 세상을 향하는 것입니다. 복음선포의 가장 큰 걸림돌은 아무래도 한 곳에 정착하고 그곳에서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이겠지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으로 철저하게 실행한 분들 중에 사도 바오로가 꼽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저 앉고 세상과 타혐하려는 나약함을 딛고 복음선포의 소명을 매일 새롭게 하며 우리도 나의 가정 뿐 아니라 공동체, 그리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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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자상함과 부드러움 앞에 부인의 굳게 닫혀있는 영혼의 물꼬가 활짝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수제자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마침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시몬의 장모’ ㅋㅋ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참으로 특별합니다.
시몬의 장모 입장에서 예수님은 미운 사람이었습니다. 사위 시몬을 빼앗아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멀쩡한 딸을 ‘생과부’가 되게 한 원인제공자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사위 시몬과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으니 장모 입장에서 ‘열 받게’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에게 가까이 다가가시어 특별한 작업을 하십니다. 열을 꾸짖으십니다. 참으로 기이한 모습입니다. 그러자 즉시 열이 가셨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즉시 일어났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조금 웃기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루카복음사가는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데, 사실 ‘화병’이 아니었을까요?
갑작스레 혜성처럼 등장한 예수란 존재, 그리고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멀쩡히 잘 지내던 사위 시몬의 가출, 그로 인해 생과부가 된 딸, 정말로 무책임한 사위 시몬! 장모 입장에서 보면 정말이지 열불 나는 일, 화가 머리끝까지 나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열이 머리끝까지 뻗지 않을 수 없는 시몬의 장모였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십니다. 고열로 인한 혼수상태에서 헛소리까지 하고 있는 부인의 모습에 예수님의 마음은 미안함과 안타까움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당신 어머니에게 하듯이 아무 말 없이 부인에게 다가가 그저 손을 꽉 잡았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손과 장모의 손 사이에 무언의 대화가 오갔을 것입니다. ‘죄송해요. 부인. 제게 시몬이 필요합니다. 부인에게 참으로 소중한 시몬이겠지만 더 큰 일을 위해 시몬이 꼭 필요합니다. 부디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는 부인의 몸을 앞으로 당겨 그 자리에서 일으키셨습니다. 그것이 다였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부인의 열이 내렸습니다. 열에서 해방된 부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의 자상함과 부드러움 앞에 부인의 굳게 닫혀있는 영혼의 물꼬가 활짝 열린 것입니다. 꽉 막혀있던 흐름이 열리니 그간의 분노와 걱정, 원망과 화도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이제 일말의 미움이나 적개심도 없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가 예수님 일행의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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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아침기도의 기적: 나는 아침마다 인생을 리셋 한다.>
예수님께서는 온종일 병자를 치유하시고 악령을 쫓아내시는 복음선포를 하십니다. 이는 영적으로는 죄의 상처를 낫게 하시고 자아의 압제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는 삶입니다.
그런데 새벽에는 밖으로 나가 외딴곳에서 혼자 머무십니다. 아침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지만, 예수님은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기도란 나를 주님께 봉헌하고 주님의 뜻을 받아 파견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얻고 싶은 것을 청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이 아닙니다. 기도는 나의 뜻을 십자가에 봉헌하여 주님의 뜻대로 파견받는 시간입니다.
“그러면 나의 삶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냐?”라며 두려워하실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 나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나의 삶’입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학교에 갔다 오라고 했는데, 그러면 자기 삶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냐고 한탄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지만, 또 그들을 떠나는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하느님 뜻에 완전히 맡겨버리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죽이고 하느님의 뜻대로 하루를 리셋(초기화) 하는 것이 오히려 내 힘으로 사는 것보다 얼마나 행복한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 귀한 아침기도를 건너뛰게 만드는 것입니다.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의사 김범석 씨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서 ‘인생 리셋’이란 부분이 아침기도를 하고 나서 변화되는 것과 비슷해서 소개합니다.
김범석 의사는 롯데호텔로 빨리 가기 위해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 운전사는 백미러로 의사 선생님을 보더니 대번 “어? 김범석 선생님 아니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얼굴을 보니 이전에 자신의 환자였습니다.
5년 전 그는 폐암 4기인 환자의 보호자였고(아마 아버지?), 1년 뒤에는 자신이 ‘환자’가 되어 병원을 찾았습니다. 위암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고 흉선암 수술을 받았는데 그것이 재발하여 재수술과 항암을 했는데 다행히 완치되었던 것입니다.
택시 운전사는 차가 막히는 중에 자신이 죽는 줄 알았던 그때를 잘 통과하고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를 쉼 없이 이야기하였습니다.
첫째 친구가 정리된다.
암에 걸리니까 걱정하며 찾아와 고기를 사 주는 이도 있고 병원비에 보태라고 봉투를 건네는 이도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갑자기 연락이 안 되고 심지어 암 보험 작은 것을 들어놓았는데 그것을 어찌 알았는지 그 돈을 빌려달라는 놈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자녀에 대한 애착이 줄어든다.
아들이 둘이 있는데 품 안에 끼고 있을 때는 기대도 많았지만 이제는 결혼해서 아내에게 충실하라고 합니다. 결국, 아플 때 끝까지 지켜주는 사람은 아내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기대하지 않고, 오면 좋고 아니면 말고라는 생각으로 대했더니 오히려 애들이 아버지를 더 편하게 대한답니다.
셋째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된다.
“저는 이미 4년 전에 죽은 목숨이었어요. 그때 좋은 선생님들 만나서 수술받고 방사선 치료받고 항암 치료받아서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 거죠. 선생님들 아니었으면 이미 제삿밥 세 번은 먹었을 거예요. 저는 복이 많아서 좋은 선생님 많이 만났어요. 선생님들 시간 뺏을까 봐 외래에 가도 그냥 빨리 나와요. (중략) 저야 이제 특별히 아픈 데 없으니 검사 결과 괜찮다고 하면 ‘감사합니다.’ 하고 나와요. 밥 잘 먹고 안 아프고 검사 결과 괜찮다는데 더 물어볼 것도 없고요.”
넷째 삶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어차피 죽은 목숨인데 죽은 사람이 귀신처럼 다니는 거로 생각하니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끼어드는 차가 있어도 이전과는 다르게 “그래라!” 하고 그냥 보내줍니다. 운전한다고 하대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 나이까지 돈을 벌 수 있는 게 어딘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소풍 다니는 듯이 일을 나오니, 한 달에 200 정도 아내에게 가져다주고 절대 무리를 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빈둥대지 않고 삼식이를 면하고 아내에게 월급봉투 가져다주는 게 아내도 고맙다고 합니다.
제사도 없앴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들이 더 중요하니 아이들 부담 주지 않고 명절에는 가족여행을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이 명절 때 더 열심히 온다고 합니다.
“암 걸리고 나서 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죠. 선생님, 고맙습니다. 암 치료 잘해주셔서 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우리 아들놈이 그러더라고요, 아버지 인생이 리셋 된 것 같다고. 허허.”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김범석 선생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대한민국 최고라 불리는 대학을 졸업했고 나름 의사로서 인정받고 있으며 교수라는 안정된 지위를 가지고 있는데도, 지금 자신은 많이 배운 것 같지 않고 암 수술도 세 번을 한 택시 운전사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공부하느라 아버지 임종도 지키지 못했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씁니다.
“인생 리셋이라... 그와 인사를 나누고 택시에서 내려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전자제품에 리셋 버튼이 있듯이 가끔 우리 인생에도 리셋 버튼이 있으면 좋겠다고. 인생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이 버튼을 누르고 인생의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아주 잘 살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왜 사는지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덤으로 여기며 오늘 하루 타인을 더 배려하며 살려는 마음을 자주 되새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오늘의 삶이 덤이 되려면 나는 어제 죽었을 수도 있다고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아침기도 때 나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루가 새롭게 주어진 추가의 삶이 됩니다. 그러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달리는 삶이 아닌 사랑 하라고 파견받는 삶이 됩니다. 죽음을 잊으니 삶도 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적의 리셋이 매일 일어나야 하는 시간이 아침입니다. 새벽이면 더 좋습니다. 기도는 나 자신을 십자가에 봉헌하고 주님께서 나 대신 살라고 나를 내어드리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는 과정에 새벽 기도가 빠지지 않고 복음서에 등장하는 것은 아침기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기도로 30분 정도 나 자신을 봉헌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입니다.
정 시간이 안 된다면 출근하면서 해도 좋습니다. 아침기도의 인생 리셋의 행복을 모두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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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회당에서 예수님은 환영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멀리합니다.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쫓아냅니다.
시몬의 집에 간 예수님께
수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병에서 치유받고자 했고
마귀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함께 있어달라는 사람들로부터 떠났습니다.
기쁜 소식을 더 많은 고을에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회당 사람들과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하느님의 은총을 찾아왔다는 점입니다.
둘 사이의 차이점은
회당 사람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원했지만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은 치유를 원했다는 점입니다.
둘 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동참하기보다
내가 받고 싶은 선물만 원하거나
하느님의 선물을 독차지 하고 싶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떠나셨습니다.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더 많은 이가 구원을 받고 하느님과 함께 하도록
그분은 떠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하고 싶은가?
아니면 내가 바라는 것만 얻기를 원하는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은 무궁무진합니다.
하지만 회당 사람처럼 받고 싶은 선물만 고르려고 하거나
마을 사람처럼 나만 소유하고자 한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떠나게 됩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주어진 선물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는 자세이며
하느님의 여정에 동참하려는 의지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하는 참된 행복을 얻고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가 됨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
주어진 선물에 감사하며 주님과 함께 기쁨을 전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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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제1독서(콜로1,1~8)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 합니다.
이 희망은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통하여 이미 들은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인들이 지니고 있는 희망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향유하고 있는 구원의 미래적 양상이며, 이 희망은 부활 때 이루어지게 된다.
즉 여기서 말하는 희망은 믿음을 지닌 자와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자가 미래에 얻게 될 것에 대한 바람과 기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마련되어 있는'으로 번역된 '아포케이메넨'(apokeimenen; is laid up; is stored up)의 원형 '아포케이마이'(apokeimai)는 '간직해두다', '저축하다', '미래에 사용하기 위하여 비축하다'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현재 분사형으로 사용되어 미래에 받게 될 상급을 위해서 이 땅에서 삶을 계속적으로 지혜롭게 살아가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매우 의도적으로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것은 당시 콜로새의 세속적인 사람들이 추구했던 이 땅에서의 안락한 삶과 대조되는 단어이다.
그리고 '희망'으로 번역된 '엘피다'(elpida; hope)의 원형 '엘피스'(elpis)는 미래에 성도들이 성취하게 될 궁극적인 목표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땅에서 그 무엇을 얻는 삶이 아니라 미래에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영광스러운 삶이다.
당시 콜로새는 오로지 세상적 관심과 목표를 가지고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콜로새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들과 달리 하늘에 희망을 쌓아두고 살고 있었다.
사도 바오로는 바로 이러한 콜로새의 성도들이 가진 희망으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통하여 이미 들은 것입니다'
여기서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문법적으로 보면 '복음'에 해당하는 '유앙겔리우'(euanggelliu; of gospel)는 소유격 명사로서 '진리'를 수식한다.
또한 '진리의'에 해당하는 '알레테이아스'(elletheias; of truth) 역시 소유격 명사로서 '말씀'(토 로고; to logo; the word)를 수식한다.
따라서 이것은 여러분이 전에 들은 '말씀'이 바로 '진리'에 속한 것이며, 그 '진리'가 바로 '복음'에 속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사도 바오로는 성경에서 사용되는 주요 단어인 '복음'(euanggellion; 유앙겔리온), '진리'(alletheia; 알레테이아), '말씀'(logos; 로고스)이라는 세 단어를 사용해서 각각의 단어들 앞에 정관사를 붙임으로서 콜로새 성도들이 전에 들은 것이 바로 '그 복음'이며, '그 진리'이고, '그 말씀'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당시 콜로새 성도들이 신앙 생활의 유일한 기준이요 교과서인 그리스도의 복음에 입각해서 살고 있음을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2020년 9월 2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루카4,38-44)
38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 시몬(조약돌-물이 없다는 뜻) 곧 하느님의 말씀을 靈의 구원을 위한 생명의 말씀- 생명수(물)로 받지 못하고 앞37절(3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에서 보았듯 예수님의 뜻, 그 말씀(물)이 아닌 사람의 소문(말)으로 들어 예수님을 사람의 규정으로 열심히 섬겼던, 그래서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은 죄, 그 화(禍), 열이나 있는 시몬의 장모인 것이다.
39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열(熱) 곧 죄 의식을 꾸짖으시니 그 죄가 힘을 못 쓰게 된 것, 그래서 그 예수님을 생명수(물)로 시중드는, 하나가 된 것이다.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 시몬의 장모와 같이 물(말씀)이 없는 이들을 고쳐주신 것이다. 손을 얹으셔서, 곧 창조의 손을 얹으시어 재 창조, 새 창조로 고쳐 주시는 것, 죄인들의 구원을 맹세하신 하느님의 손이 하신 것이다.
(에제20,42) 42 내가 이렇게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그들에게 손을 들어 맹세한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시편18,17-18) 17 그분께서 높은 데에서 손을 뻗쳐 나를 붙잡으시고 깊은 물에서 나를 끌어내셨네. 18 나의 힘센 원수에게서, 나보다 강한 적들에게서 나를 구하셨네.
41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마귀들도 아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 곧 하느님의 뜻을 이루실 그리스도가 아닌 인간의 소원, 뜻을 들어주는 그 그리스도로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 것이다.
42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 예수님을 찾은, 믿겠다는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붙들고 있는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실, 곧 우리의 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 아니면 내 소원을 들어주실 그리스도?
부활하신 주님도 당신을 붙들지 말라 하셨는데 말입니다.~
(요한20,17)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형제로, 그리고 영으로 오실 성령으로 붙들어야 하는 것(1코린6,19참조)
(로마8,9-10) 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4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 유다인들 처럼 자기 의로움, 곧 사람의 규정과 교리에 열심한 그 헛된 신앙을 사는 우리들을 구원 하시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려 오를 찾아오심을 믿습니다.
(에페5,15-16) 15 그러므로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16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 잘 쓰십시오(엑사구라조- 건져 올리다), 허락된 시간을 잘 쓰는 것, 하느님의 건져 올리시는 일 곧 죄인들을 죽음의 세상에서하느님의 말씀으로 건져 올려지고, 올리는 그 일에 힘쓰라는 것이다.
(마르1,17)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십자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아멘.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복음(루카4,38~44)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40)
루카 복음 4장 40절은 고통과 질병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셔서 그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시고, 개별적으로 치유해 주신 예수님의 자상함을 잘 드러내 주는 부분이다.
특히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번역된 '헤니 헤카스토'(heni hekasto; each one; everyone)는 치유의 능력이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따뜻한 손이 병자 중 어느 한 사람도 지나치지 않고, 그들 각각의 머리를 감쌌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특히 '손'에 해당하는 '타스 케이라스'(tas cheiras; his hands)는 복수형이며, 이것은 예수님께서 한 손이 아닌, 두 손으로 병자들의 머리를 안수하셨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병자들은 두 손을 통해 전해오는 따뜻하고 자비가 많으신 예수님의 마음에 감동했을 것이다.
안식일 하루 종일 복음 선포에 힘쓰신 예수님께서는(루카4,31~39) 해가 져 피곤하셨을텐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신을 찾아 모여든 병자들의 무리 사이에 돌아다니면서 그들에게 일일이 안수하셨다.
구약 시대에는 통상 '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안수)가 자신의 죄악을 동물에게 전가시키거나(탈출29,15.19) 증인들이 죄인을 돌로 치기 전에 그 사람에게 죄를 확정하는 방법으로(레위24,14) 사용되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안수'를 하느님의 은총을 전가하는 방법, 치유의 역사(役事)를 일으키는 통로로 사용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안수'('타스 케이라스 에피티테이스'; tas cheiras epititheis; laying his hands on)를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이 흘러내린다는 사실을 강하게 심어 주고자 하셨으며, 그 안수 행위를 통해서 당신께서 병자들 개개인에게 자상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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