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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0) 펠리체 자니의 ‘연맹 축제를 위해 성 베드로 광장에 차려진 조국의 제단’
로마까지 삼켜버린 프랑스 혁명의 불길
- 펠리체 자니, ‘연맹 축제를 위해 성 베드로 광장에 차려진 조국의 제단’, 1798년, 로마 박물관 소장.
프랑스 대혁명(1789년)의 중요한 타도 대상이 된 가톨릭교회와 프랑스의 혁명 정부 간 분위기는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여태껏 맏딸로 여겼던 프랑스의 반항을 견뎌야 했다. 많은 가톨릭 신자가 폭도들의 괴롭힘과 위협을 받았고, 생명의 위험을 느낀 프랑스 귀족들은 로마로 피신했다. 프랑스에서 교황청으로 피신한 가톨릭 신자는 약 6000명에 이르렀다.
혁명 정부, 가톨릭 탄압
1790년 7월 12일, 프랑스 의회는 새 혁명 정부에 ‘성직자를 포함한’ 모든 시민에게 충성 서약을 의무적으로 하도록 했고, 충성 서약을 하지 않은 성직자들을 범법자로 내몰았다. 혁명 정부는 가톨릭을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한 축으로 여겼고, 교회와 수도원을 파괴하며, 교회 재산을 몰수해 국유화했다. 그뿐만 아니라, 십일조를 폐지하고 가톨릭 신앙을 국교가 아니라고 선포하며, 수도자들의 수도서원을 금했다.
당시 프랑스 교회의 주교 160명 중 7명만 혁명 정부에 충성 맹세를 했다. 그것은 반대로 그만큼 정부의 엄청난 탄압을 받아야 했다는 걸 의미했다. 혁명 세력은 그때까지도 교황령이던 아비뇽을 침공해 혁명 정부(그들은 ‘공화국’이라고 불렀다)에 귀속시켰고, 교황에게 충성 맹세를 한 60명을 아비뇽의 교황궁에 있는 탑에서 즉결 처형을 했다. 로마 교황청은 ‘대학살’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했고, 1791년 프랑스는 교황청과 외교 관계를 끊었다.
혁명은 계속 진행됐고, 짧은 시간에 무신론이 우위를 차지하면서 교회와 수도회들은 지속해서 탄압을 받았다. 1792년 9월 2일과 5일 사이에도 유혈사태는 일어났고, 사제 223명이 학살됐다. 프랑스 교계는 교황청을 향해 엑소더스를 시작했다. 1792년에 2000명, 1793년에는 3000명의 성직자가 로마로 이주했다. 사제 4만 명이 강제 추방돼 아프리카 가이아나 등지로 떠났다. 그해(1793년) 루이 16세는 참수형을 당했고, 공화국에 맹세하지 않고 프랑스에 남아 있던 사제들은 모두 사형됐다. 그때부터 프랑스는 전국적으로 탈-그리스도교화의 물결이 일었고, 1794년에도 20여 명의 사제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1795~1796년은 비교적 조용했지만, 1797년에 교회를 향한 칼날은 다시 시작돼 충성 맹세를 요구했고, 거부한 1701명의 성직자는 추방되고, 41명은 사살되었다.
나폴레옹의 로마 침공, 로마 공화국 선언
비오 6세 교황은 유럽의 다른 여러 제후국과 외교 관계를 통해 프랑스 상황을 호전시켜 보려고 노력하는 한편, 로마로 밀려온 프랑스 교계와 프랑스 신자들을 위해 시설을 확충하고 시스템을 개선했다. 당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가톨릭 예술인들도 힘을 보탰다. 그러나 이런 모든 노력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사건이 터졌는데, 그것이 ‘나폴레옹의 로마 침공’이었다.
1797년 12월 28일, 로마에서 활동하던 자코뱅 당원들과 교황청 군인들 간의 충돌로 교황청 주재 프랑스 대사의 손님으로 와 있던 프랑스인 사령관 뒤포가 살해됐다. 그의 죽음은 교황청에 대한 나폴레옹의 침공에 당위성을 부여했고, 이듬해인 1798년 2월 10일 베르티에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로마를 손쉽게 제압했다. 프랑스군은 바티칸의 예술품들을 약탈했고, 교황의 세속 권력의 소멸을 선포하며, 프랑스식 ‘로마 공화국(1798. 2. 15~1799. 9. 30)’을 선언했다.
로마 공화국은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교황령이던 로마를 점령한 프랑스 장군 베르티에가 공화정을 선포하며 건국된 프랑스의 위성국이다. 이것은 교황령 일대에 있던 기존의 공화국들인 ‘안코나 공화국’과 ‘티베리나 공화국’을 감시하는 역할도 했다. 로마 공화국의 영토는 프랑스가 점령한 교황령 일대였고, 베르티에 장군은 비오 6세 교황에게 로마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교황은 중립국이던 토스카나 대공국인 시에나로 망명했다. 시에나에 있는 동안 교황은 안전한 차기 콘클라베 개최 장소에 관한 교서를 발표했다. 페르디난도 3세 대공은 로마로 가서 프랑스 군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교황은 시에나를 떠나야 했다. 거의 체포 상태로 피렌체 남쪽 3㎞ 지점에 있는 성 카쉬아노의 체르토사 수도원에 감금됐다. 2명의 프랑스 군인이 교황을 감시했고, 교황은 병이 깊어 걸을 수도 없었다.
1799년 3월, 프랑스는 이번에는 교황이 있는 토스카나 대공국을 침공했고 페르디난도 3세가 망명하는 시점에서 교황도 토스카나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교황은 81세의 노구에 걸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프랑스군은 그런 교황을 열 곳이 넘게 끌고 다녔고, 종종 교황을 백성에게 노출 시켜 백성들의 반응을 보았다. 백성들은 교황을 열렬히 지지하고 환호했다. 프랑스 정부는 교황을 반기지 않을 만한 도시로, 프랑스 중부의 디종까지 끌고 왔다. 교황은 디종에 도착한 지 열흘 만인 8월 29일에 숨을 거두었다.
신고전주의 대표 작가로 화가이며 장식가
소개하는 그림은 제목이 조금 긴 ‘연맹 축제를 위해 성 베드로 광장에 차려진 조국의 제단(Altare patrio a piazza San Pietro per la Festa della Federazione, 1798년)’이라는 작품이다. 신고전주의의 대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이탈리아 파비아 출신 화가이며 장식가 펠리체 자니(Felice Giani, 1758~1823)가 목판에 그린 유화다. 현재 로마 박물관(Museo di Roma)에 있다.
화가는 어릴 적부터 비안키와 다 비비에나 밑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고, 볼로냐에서 페드리니와 간돌피 지도로 숙련된 기술을 익혔다. 1780년 로마로 이주해 팜필리 공작의 도움으로 여러 유명한 작가들과 친분을 쌓고 중요한 작업에 참여했다. 대개 건물의 내부 장식이었고, 그를 이 분야의 대가로 만들어 주었다. 후에 그는 파엔자, 볼로냐, 다시 로마(1788~1794)에서 활동했고, 나폴리, 에르콜라노, 폼페이 등지를 여행하며 고전주의 스타일을 심화했다.
1803년, 나폴레옹 행정부의 건물 장식하기 위해 파리로 와 달라는 요청을 받고 잠시 파리에 다녀오기도 했다.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온 뒤 여러 지방을 다니다가, 1811년 로마의 성 루카 아카데미 명예 학자가 되고, 1819년에는 교황청 판테온 명인 아카데미 회원이 됐다. 1823년 볼로냐에서 돌아오는 길에 말에서 떨어져 그 후유증으로 로마에서 사망했다. 성 안드레아 델레 프라테 성당에 묻혔다.
그림 속으로
그림은 1798년 2월 10일 프랑스가 로마를 점령하고, 3월 20일 혁명 정부의 수립을 기념하는 축제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개최한 것이 배경이다. 화가는 교황을 상징하는 성 베드로 광장 한복판에 종교와는 무관한 제단을 만들고, 백성을 동원하고 군사 행렬을 하는 등 혁명 정부가 교회를 어떻게 유린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행사는 한 달 전에 탄생한 로마 공화국을 기념하고, 자유 획득을 축하하는 세속 행사였다. 그 자리에서 헌법이 공표되고, 구체제의 상징들이라며 반-혁명주의 책과 귀족 증명서 및 종교재판 목록과 로마 귀족의 「황금의 서(書)」가 모두 불 속에 던져졌다. 로마 백성이 바로크 시대에 즐기던 웅장하게 묘사된 무대 장식에 종이로 만든 기둥과 동상, 거기에 불꽃놀이를 하던 전통을 빌려 공화국의 기묘한 행사를 연 것이다. 시민들은 성별, 나이별로 4개 그룹으로 나누어 제단을 향해 올라가고, 오른쪽 끝에는 구체제를 정화한다며 불이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왼쪽에는 제단을 향해 전진하는 기마 부대가 도착했고, 나폴레옹 내각의 의원들과 대표들이 북을 치며 그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림은 역사 기록의 측면과 풍부한 세부 묘사를 통해, 그림 속 장면에 화가가 참여했다는 걸 말해준다. 화가는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며 혁명 정부를 호의적으로 선전하는 데 앞장선 작가였다. 같은 시기에 같은 작가가 ‘천사의 성 다리’에 세운 ‘개선문’을 그린, 비슷한 또 하나의 작품도 로마 박물관에 있다.
그러나 이런 선전과 강요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부재와 사망에 대한 반감으로 프랑스의 점령에 대한 로마와 이탈리아인들의 저항은 날로 커졌고, 혁명 정부는 결국 1799년 9월 30일 로마 공화국의 철폐를 선언했다.
교황은 다시 로마로 복귀했지만, 여전히 프랑스의 반 인질 상태로 있었다. 그 시기,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카를 마크 폰 라이베리히(Karl Mack von Leiberich) 장군이 이끄는 7만여 병력이 나폴리 왕국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교황권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1) 조셉 셀레스틴 프랑수아의 ‘1801년의 종교협약 비유’
프랑스 혁명 정부의 기세에 밀려 불리한 조약을 맺는 교황청
- 조셉 셀레스틴 프랑수아, ‘1801년의 종교협약 비유(Allegory of the Concordat of 1801)’, 1802년, 프랑스 말메종 성(城) 국립박물관.
1799년 8월 29일 비오 6세 교황이 프랑스 디종에서 선종한 후, 추기경회의 의장 주세페 알바니 추기경이 소집한 콘클라베는 로마에서 열리지 못했다. 프랑스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고 있었고, 오스트리아가 지원해 주겠다고 하는 바람에 베네치아에서 열렸다. 그러나 콘클라베가 열리기도 전에 로마의 정치적 상황이 바뀌어 그해 9월 19일 프랑스군은 로마를 떠났고, 그달 30일 ‘로마 공화국’이 있던 자리에 나폴리 군인들이 주둔했다.
콘클라베가 예정됐던 베네치아에서 11월 30일 35명에 불과한 추기경들이 성 조르조 대수도원에 모였다. 대부분 이탈리아인 추기경들이었다. 즉시 두 명의 추기경이 후보에 올랐다. 반프랑스파에 속하는 페라라의 대주교 알렉산드로 마테이(Alessandro Mattei)와 중도파에 속하는 체세나의 주교 카를로 벨리소미(Carlo Bellisomi)였다. 두 사람에 대한 이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고, 이런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콘클라베 총무 에르콜레 콘살비(Ercole Consalvi) 몬시뇰은 세 번째 후보로 이몰라의 주교 바르나바 키아라몬티(Barnaba Chiaramonti)를 제안했다. 투표 결과는 신속하게 세 번째 후보에게 전달되었다. 프랑스인 장 시프랭 모리(Jean-Siffrein Maury) 추기경도 선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비오 7세 교황, 교회 행정 개혁 나서
1800년 3월 14일, 키아라몬티는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외가 쪽으로는 전임 비오 6세와 친척 간이었고, 프랑스에서 서거한 그를 기리기 위해 이름을 ‘비오 7세’로 결정했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체스코 2세는 새 교황에게 볼로냐, 페라라, 이몰라, 라벤나 동맹을 양도하라고 했고, 비오 7세는 거절했다. 실망한 황제는 교황의 대관식을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대성당에서 하는 것을 금했고, 비오 7세는 성 조르조 대수도원의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새 교황은 몇 달간 베네토 지방에 머물며, 거의 모든 성당을 사목 방문했고, 모든 수도회의 순명 서약을 받는 동시에 백성의 지지를 받았다. 그 사이에, 젊은 시절 머물렀던 파도바의 성녀 유스티나 대수도원도 방문했다. 오스트리아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로 갔다.
교황은 베네치아에서 페사로까지 오스트리아의 프리깃 호위 함대를 타고 가서, 거기서부터 육로로 플라미니아 가(街)를 따라 로마로 향했다. 1800년 7월, 교황은 로마의 귀족과 백성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마침내 로마에 당도했다.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갔을 때 목자 없이 살았던 경험 탓인지, 로마의 백성은 눈물로 교황을 맞았다. 그러나 교황청의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 프랑스인들이 남겨둔 약간의 돈은 나폴리 군대가 주둔하면서 모두 쓰고 없었다. 8월, 에르콜레 콘살비 추기경을 교황청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 교황이 새로운 비서관을 임명할 때 통상 외세의 압력, 이 경우 오스트리아 제국의 압력을 받곤 했는데, 비오 7세는 그 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교황은 더는 연기할 수 없게 된 교회의 행정 개혁을 서둘렀다. 즉위 첫해인 1801년, 자의 교서 「가장 교양있는(Le pi colte)」을 통해 농업 부문과 오래된 일부 체제의 자유를 선언했다. 이것은 프랑스의 침공으로 빈곤해진 백성들의 물질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고, 유럽의 변화를 촉구하던 진보주의자들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다음으로 집중한 것은, 프랑스 교회가 처한 행정상의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상황을 타개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 정부, 가톨릭을 장악
1790년 7월 12일 프랑스의 혁명 정부는 프랑스 내 가톨릭교회를 정부에 종속시키고자 ‘성직자 기본법(Constitution civile du clerg)’을 발의, 시행했다. 그로 인해 교회는 분열되고, 무질서해져 어떤 교구는 주교가 없는 반면에 어떤 교구는 두 명 이상 되는 곳이 속출했다. 주교의 수를 135명에서 83명으로 줄이고, 각 교구를 데파르트망(혁명 정부가 정한 기본적인 행정 단위)에 맞추도록 하여 선거권을 가진 시민들이 주교와 교구 사제들을 선출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또 국가 재정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성직자의 생활을 보장해 주겠다며, 교회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교회 조직을 프랑스의 통치기구의 하나로 삼아 새로운 행정적ㆍ재정적 구조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또 성직자들에게 로마 교회의 뜻을 따를 게 아니라, 혁명 정부의 명령에 따를 것을 강요했다. 성직자들을 국가가 통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얀센주의와 성직자의 결혼 관행이 퍼지고, 교회 내부적으로는 신자들 간 무관심 주의가 팽배해지며, 정부 입장에서는 독실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혁명 정부에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교황이 뽑혔다는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정교 협약’이라는 이름으로 비오 7세에게 제안했다. 그즈음 나폴레옹은 혁명으로 인해 황폐해진 프랑스의 질서를 바로잡고, 국민 정서를 일치시키기 위해 교황의 힘이 필요했다. 하지만 조건이 모두 교황청에 불리한 것 천지였다. 교회 재산 몰수, 교황이 임명한 주교 파직, 성직자 기본법에 따라 충성 서약을 한 자만 주교로 임명하는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비오 7세는 프랑스에서 가톨릭교회의 명성을 회복하려는 보나파르트의 열망을 굳게 믿고, 많은 사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영적 유익을 앞세워 1801년 7월 15일 파리에서 소위 ‘1801년 종교협약’에 서명하고, 그해 8월 14일 비준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을 기해, 칙령 「그리스도의 교회(Ecclesia Christi)」로 이 사실을 전 세계에 알렸다.
신고전주의 작가이며 초상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남부 네덜란드 출신의 역사 주제 또는 미니어처 화가이며 에칭가였던 피에르 조셉 셀레스틴 프랑수아(Pierre Joseph Clestin Franois, 1759~1851)가 그린 ‘1801년의 종교협약 비유(Allegory of the Concordat of 1801)’(1802년 작)이다. 프랑스 말메종 성(城) 국립박물관(Muse National du Chteau de Malmaison)에 소장되어 있다.
조셉 프랑수아는 신고전주의 양식에 따른 종교ㆍ신화 주제의 그림은 물론 초상화가로 알려져있다. 담배공장을 경영하던 부친은 아들을 샤를루아에 보내 처음으로 드로잉을 공부하도록 했고, 조셉 프랑수아는 거기서 피에르 발타사르 드 블로크(Pierre Balthasar de Blocq)를 만났다. 11살에 안트베르펜(Antwerp) 미술아카데미로 진학하여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거기서 신고전주의 양식과 루벤스를 배웠다. 그곳에서 8년간 공부한 뒤, 1778년부터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1781년까지 로마에 머물렀다. 이후 독일을 여행하고 6개월간 비엔나에 있다가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왔다. 1789년에 다시 로마로 가서 3년간 더 공부한 뒤, 브뤼셀로 돌아와 아카데미와 그 지역 아테네움의 교수가 되었다. 1851년 브뤼셀에서 사망했다.
그림 속으로
작품은 ‘정교분리(政敎分離)’를 비유하고 있다. 국가가 교회 재산, 성직자 임명 등 교회의 핵심 권한을 모두 갖겠다는 의미의 정교분리다. 그것은 ‘1801년의 종교협약’ 내용을 들여다보면 된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 선언문으로 집약되는데, 우선 공화국 정부는 대다수 프랑스 백성이 믿는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로마 교회를 인정한다고 천명한다. 언뜻 보기에 대혁명으로 이루고자 한 탈그리스도교화의 실패와 국가교회를 세우고자 한 것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국가가 국민의 종교인 가톨릭 신앙을 인정하는 대신, 교황이 임명한 주교는 모두 사임하고, ‘성직자 기본법’에 따라 정부가 성직자 임명 개입권을 가지며, 빼앗은 교회 재산은 현 상태를 유지하는 대신, 정부는 주교와 본당 사제들의 생활비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교황은 가톨릭 전례의 완전한 자유를 희망했으나, 이것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교황은 몰수된 교회 재산에 대한 모든 청구를 포기하고, ‘1801년의 종교협약’에 서명했지만, 나폴레옹은 이후 77개의 부속 법령(Articuli Organici)을 만들어 교황을 유린하고 교회를 짓밟았다.
그림 속 배경은 제단 앞이다. 가톨릭이 프랑스 국민 대부분이 믿는 종교임을 인정하듯 위에는 성모 마리아가 있고, 아래 양쪽에 비오 7세 교황과 나폴레옹이 있다. 교황은 제단에 의지한 채 상대방을 묵묵히 응시하고, 나폴레옹은 성령으로 인도된 거룩한 사람으로 비유했다. 이곳이 제단이라는 것은, 아래 오른쪽 시종이 든 향로가 말해준다. 왼쪽 끝에 콘살비 추기경으로 보이는 붉은 옷을 입은 사람 뒤에 맹수로 보이는 짐승이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교황과 추기경의 망토 아래에서만 평화가 있다는 듯 여인이 평화롭게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2)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
대관식에서 직접 왕관을 쓰는 나폴레옹, 교황은 허수아비일뿐
-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의 대관식’(1805~1807년), 프랑스 루브르.
이번에는 잘 알려진 작품을 소개한다.
여전히 나폴레옹과 비오 7세 교황의 관계는 긴장 국면에 있었다. 지난 회에서 살펴본 ‘1801년의 종교협약’은 나폴레옹의 일방적인 파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1803년 4월 8일 프랑스 정부의 ‘부속 법령’으로 결국 무효로 끝났다.
그러고도 나폴레옹은 1804년부터 자신의 공식 황제 즉위식을 위해 교황과 협상하기 시작했다. 비오 7세 교황은 망설였다. 그러나 파리 시민들을 생각하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있을 즉위식 이후 파리 방문을 4개월 한다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황제의 즉위식은 예측했던 대로 교황청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황제의 정치적인 계획에 최대한 이용당한 모양새가 되었다.
소개하는 작품은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양식의 화가며 정치인이기도 했던,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가 그린 ‘나폴레옹의 대관식’(1805~1807년 작)이다. 루브르에 있다. 나폴레옹은 제정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하여 네 개의 초대작을 명했는데, 그중 다비드가 ‘생 드 마르스에서의 군기 수여식’과 이 작품을 완성했다. 작가에 대해서는 49회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본지 1625호 8월 15일 자)에서 언급한 바 있어, 여기선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나폴레옹은 반혁명 세력을 봉쇄하기 위해 스스로 황제가 되겠다는 계획을 국민투표에 부쳤고, 압도적인 찬성을 받았다. 국민은 10년 이상 지속된 혁명과 전쟁에 지쳐 있었고, 이럴 바에야 차라리 강력한 인물이 나와 하루빨리 안정을 찾아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나폴레옹이 합법적으로 프랑스 정치의 최고 수장으로 떠오르게 된 이유다. 그리고 1804년 12월 2일, 자신의 대관식을 위해 비오 7세 교황을 파리로 불렀다.
그림 속으로
대관식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교황은 많은 고민 끝에 힘들게 먼 길을 왔지만, 막상 대관식에서 교황이 할 일은 거의 없었다. 대관식에 앞서 교황은 나폴레옹에게 도유식을 했고, 황제는 자신을 ‘도유한 자(그리스도)’로, 신의 뜻을 이 땅에 펼치는 신성한 통치자라고 판단, 이후 예식을 직접 주도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손으로 관을 집어 머리에 쓰고, 이어서 조제핀에게 황후의 관을 씌어주었다. 교황은 나폴레옹 뒤에 앉아서 대관식을 축복할 뿐이었다. 황제는 교황의 권한을 철저하게 저지하는 동시에 자기 백성에게 교회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선전용으로 최대한 이용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교황이 집전하던 황제의 대관식을 스스로 함으로써, 교황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동시에 황제를 만드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임을 만천하에 천명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유럽의 최고 권력이 바뀌는 것을 의미했다.
다비드는 작품에서 그 순간을 잘 포착했다. 가운데 깊숙이 들어간 높은 곳에 황제의 어머니와 가족들이 모여 있고, 그 아래에 장군과 고관들이 줄지어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초상화처럼 모두 정확하게 그려 넣었다. 그림은 황제를 중심으로 가족과 제국의 지휘관들이 단합하여 새로운 체제에 봉사한다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
비오 7세 교황이 얻은 것은
비오 7세 교황이 대관식에 참여하고 얻은 소득은 성직자들을 위한 소액의 지원금과 유서 깊은 수도원 2~3개를 재건하고, 해외 선교를 위한 신학교를 건립하며, 일부 수도회의 활동을 인정하는 게 전부였다. 이런 빈약한 소득 중에도 프랑스 국민의 열렬한 지지와 환호를 받은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물론 나폴레옹은 그 점을 몹시 불편하게 여겼다. 이에 교황을 더 심술궂게 대하게 되었다. 비오 7세는 프랑스에서 신앙이 다시 싹트고 있다고 판단했고, 로마로 돌아와 이듬해 1805년 5월 16일, 추기경회의를 소집하여 프랑스 여행의 긍정적인 측면을 설명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통치 기간이 지속되면서 프랑스의 압박은 교황령을 모두 프랑스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고, 교황청에는 연 200만 프랑을 지급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비오 7세 교황은 강력히 항의했고, 나폴레옹은 1808년 2월 미올리스 장군을 보내 로마를 점령했다. 한 달 후 안코나, 마체라타, 페사로, 우르비노를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시켰다. 물론 1805년부터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공화국을 왕국으로 개편하고 스스로 왕이 된 상태였다.
프랑스의 이런 행보에 주목한 주변국들 곧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는 반-프랑스 동맹을 맺었고, 나폴레옹은 18만 명 에 달하는 대군으로 오스트리아군을 울름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아우스터리츠에서 격파했다. 이런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파리 시내에 두 개의 개선문(카루젤과 에투알)을 건설하기도 했다. 이후 나폴리 왕국, 네덜란드, 베르크-클레브 공국, 신생 베스트팔렌 왕국, 프로이센, 이베리아반도 등도 침공해 족벌 정책으로 모두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은 대륙봉쇄령으로 압박했고, 러시아와는 힘겨운 전쟁을 계속했다.
그런 가운데 1809년 5월 11일 쇤부른에서 나폴레옹은 로마와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교황령의 모든 영토를 프랑스 제국에 합병시키겠다고 선언했다. 1809년 6월 10일 로마 ‘천사의 성’에는 프랑스 국기가 게양되었다.
프랑스군에 끌려간 교황
비오 7세 교황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은 황제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로마를 침범한 사람들에 대한 파문 교서를 발표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나폴레옹은 1809년 7월 5일과 6일 사이 밤, 퀴리날레 궁전의 문을 부수고 들어와 비오 7세를 납치했다. 야밤에 침입하여 교황령을 프랑스에 넘기라고 추궁하는 나폴레옹의 사절에게 비오 7세는 그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우리는 할 수 없고, 해선 안 되고, 하고 싶지 않습니다!(Non possiamo. Non dobbiamo. Non vogliamo!)”
결국, 교황령은 모두 프랑스에 합병되고, 로마는 다음날에야 교황이 로마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비오 6세 교황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프랑스군은 교황을 끌고 백성들 몰래 다니느라 라치오와 토스카나 지방을 거쳐 42일 만인 8월 17일에야 사보나에 도착했고, 후에 파리 근교 퐁텐블로에 감금했다.
나폴레옹의 쇠락과 교황의 로마 귀환
1813년 10월 19일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했다. 교황은 그때까지 퐁텐블로에 있었고, 나폴레옹은 교황을 지지하는 동맹군이 교황을 구하러 오기 전에 사보나 왕국으로 포로의 신분으로 넘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1814년 1월 23일 비오 7세는 주교 복장을 하고 사적인 형태로 퐁텐블로를 떠났다.
그는 반-보나파르트가 절정에 달한 론 계곡을 지나 니스로 인도되었다. 포로자의 긴 여정은 어느새 승자의 여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감격한 군중은 프랑스 남부를 통과하는 노(老) 교황에게 몰려들었다. 2월 16일, 비오 7세는 사보나에 도착했다. 사보나에 있는 동안 교황은 나폴레옹의 퇴위(3월 17일)와 로마가 프랑스의 통치에서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폴레옹은 퇴위하면서 마지막 명령으로 교황을 5년 간의 포로 생활에서 풀어주게 한 거로 보인다.
비오 7세는 3월 31일 볼로냐를 거쳐, 과거 주교 시절, 자신의 교구였던 이몰라에서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주례하고, 포를리로 향했다. 거기서 백성의 열렬한 환호와 안드레아 브라티 주교의 환대를 받았다. 브라티 주교는 한때 프랑스 정부 편에 서서 교황을 비판했던 인물이었다. 교황은 그 자리에서 주교를 용서하고, 라벤나를 거쳐 고향 체세나에서 잠시 머물렀다. 5월 24일 눈물로 맞이하는 로마 백성의 환호 속에 로마로 입성했다. 로마 백성이 하루아침에 목자를 잃은 지 4년 10개월 9일 만에 목자가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비오 7세가 로마로 귀환한 후, 우선으로 한 일은 8월 7일 칙령 「교회에 대한 모든 염려(Sollicitudo omnium Ecclesiarum)」를 통해 예수회를 복구했다. 나폴레옹이 강제로 빼앗았던 영지는 1815년 빈 회의에서 교황청 국무성 장관 콘살비(1757∼1824) 추기경이 되찾아 왔다.
비오 7세 교황은 나폴레옹에 의해 육체적, 도덕적으로 힘든 재임 시기를 보냈다. 선임 비오 6세 교황부터 그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 학대를 받은 셈이다. 그렇지만 그는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마지막 유배 생활을 할 때, 그의 노모를 보호하고 그의 가족들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돌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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