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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13
요단을 건너라 / 한서노회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땅에서 가나안땅에 이주해서 살기까지 그들이 넘어서야 할 뚜렷한 두개의 난관이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하기위해서 건너야했던 홍해 바다와 요단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바다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습니다. 홍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승리의 바다요 생명의 바다였습니다.그러나 애굽 군대들에게는 홍해는 사망의 바다요 패배의 바다였습니다. 추격하던 애굽 군대들은 이제 독안에 든 쥐였습니다. 애굽의 추격은 이제틀림없는 사실로 부상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뜻밖에 이스라엘은 애굽의 추격을 받고 도저히 건너지 못할 바다를 건너도록 이스라앨 백성을 죽음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넌 것은 마치 죄의 나라에서 우리가 하나님나라로 건너가는 구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출애굽한 것으로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출애굽은 구원에 대한 출발이며 시작일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아직남아 있습니다.애굽에서 탈출을 시도하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그분이 지시한 곳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오늘 본문의 내용은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서 이제 정복할 땅 가나안을 두정탐꾼을 보내어 살피게 하였고 이제 싯딤을 떠나 바로 요단 강에서 건너지 않고 요단에 이르러 저들이 삼일을 유숙합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지대로 가는 첫관문입니다. 그래서 찬송가에는 이 요단강을 육신의 죽음과연관된 그런 가사들이 많이있습니다.그것은 우리가 성화되어가는 과정을통하여 마침내 영화의 단계에 이르는 그단계가 우리가 육신의 몸을 벗는 날이기때문입니다.찬송가 534장 가사 후렴에도 보면요단강가에 섰는데 내 친구가 건너가네 저건너편에 빛난곳 내 눈에 희미하네
찬송가291장 후렴가사에도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거너가 만나리
천국이 마치 요단강을 거너 편에 있는 그런 장소로 오해 될만한 가사입니다. 가나안지역은 갈릴리 호수에서 사해로 내려오는 요단강 건너편의 땅입니다. 사실은 우리나라 가물때에 개천같은 그런 이름뿐인 강입니다.이스라엘에 여행하면서 다리를 못보았습니다. 강이 없다는 이야기이겠지요 그러나 여호수아때에는 이 요단강을 건너지않고는 가나안땅을 정복할수 없는 그런 큰 장애 였던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홍해를 건널때에는 하나님께서 바다를 말리워 육지 같이 만드시고 건너게 하셨고 요단을 건너게 하실때에는 백성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셨습니다.의롭다 하심에는 우리의 공로나 선행이 없는 절대 은총입니다.그러나 가나안을 정복하는 일에는 행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태여나는 것은 나의 공로가 없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를 닮아가는 노력도 필요하고 결단도 필요하고 각오들이 필요합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출생도 있고 성장도 있습니다. 태여나자 마자 죽은 사람에게는 성장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장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것입니다.
그래서 약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2:26절 말씀에
영혼이 없는 몸이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것이니라 이 말씀을 우리의 말로 표현하면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성장하는 움직임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3:28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바울의 복음과 야곱의 복음이 서로 다른 복음입니까? 바울은 어떻게 생명을 얻게 되었는가를 이야기 하는 것이라면 이 생명이 반드시 성장하는 행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태여 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너는 너의 출생을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였는가? 이세상에 아무도 자기의 출생을 위하여 수고하고 노력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은혜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출생도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의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에 태여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믿음으로 태여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장성한 자녀는 만들어지고 자라나야 합니다.먹어야 하고 운동도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다는 말에는 애굽에서 탈출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나안땅에 들어갔다는 말도 중요합니다. 완전한 출애굽은 애굽에서 탈출로 끝이난 것이 아니고 가나안땅을 정복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의 구원속에는 예수의 거룩을 이루워야하는 신앙의 성숙이 있어야 합니다.
죄악의 포로에서 탈출한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요 바울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것이 큰은혜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큰사랑으로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는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가운데 행하게 하심이니라
예수안에서 선한일을 예비하시고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안에서 선한 일을 쉬고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분명히 하나님게서 우리를 예수안에서 살리실때에 예수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위하여 우리를 살리셨고 이 일을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안에서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처럼 영화롭게 되는 일입니다.거룩하지않고 영화에 자리에 이럴수가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거룩의 자리자리 마다 요단강의 준비하시고 그 강을 건너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신앙의 고비는 여러 차례 우리 성도들에게 닥아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거룩의 요단강을 어떻게 건널까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받고자합니다.
1.나태한 구습에서 떠나 예수의 뒤를 쫑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앙의 더나은자리로 우리를 부르실때에 우리는 현재의 모습대로 구습을유지하려고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싯딤에서 요단 강변에서 3일을 유숙하였습니다.지금 백성들의 마음에는 요단 이 강변에 자리 잡고 지냈으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강을 건너는 이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기 보다는 그냥 제자리에 주저 앉고 싶은생각이 인간의 부패한 모습입니다. 새로워지고 개혁하기를 싫어하고 그냥 기득권이나 지켜나가고 현상이나 유지하려고 합니다.생명체의 정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주저않고 싶은 백성들에게 유사들이 진중을 두루 다니면서 명령합니다.
3절말씀에
백성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 언약궤를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쫑으라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로 여겨 왔습니다.그리고 이 언약궤는 임마누앨 하나님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도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고 우리가 거룩케 되는 것도 예수를 쫓아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라 가는데 성도의 생활에 대한 태도두가지 교훈을 얻을수 있습니다.
4절말씀을 읽어 봅시다.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규빗쯤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바짝 따라 가라하지 않고 1000m의 거리를 두고 쫑아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예수를 따라 갈때는 항상 긴장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방심은 금물입니다. 조금만 한눈 팔면 우리가 따라 가야할 언약궤를 잃어 버립니다.
내가 처지지는 않았을까 항상 예수님과 나의 거리를 점검해봐야 합니다.
(2)거리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능력은 역사하심을 맏어야 합니다.
1000m의 거리를 두고 따라 가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1000m 뒤 따라 오는 이백성들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나와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경건의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부하를 극진히사랑하는 백부장을 만나게 됩니다. 백부장이 감히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유대인의 장로들을 통하여 간접면담을 합니다.
유대인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청탁을 합니다. 그사람의 청을 들어 그 사람의 종의 병을 고쳐 주심이 합당한줄 아룁니다. 로마의 백부장이지만 그 사람은 우리 유대인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도 지었나이다. 예수님께서 이제 백부장의 집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아마 유대인의 친구를 에수님께로 급히 보내어 전갈합니다.눅7:6절에예수께서 함게 가실때에 이에 그집이 멀지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집에 들어 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리고 7절말씀을 유의 해서 살펴볼필요가 있습니다. 왜 백부장이 예수님게 직접나아오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못할 줄 알았나이다.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백부장은 에수님과 자신의 모습속에서 너무나 엄청난 거리를 생각해서 감히 그앞에도 설수 없는 존재이지만 말씀만으로도 하인을 낫게 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하인을 죽을 병에서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근접할수없는 상황이지만 말씀하시면 능력을 베플어 주실줄 믿는 믿음이 큰믿음이기에 예수님게서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늘 긴장하며 겸손히 예수를 따라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눅15장에 둘째아들이 탕진하고 돌이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때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거리는 멀고 멉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거리에 상관하지않고 우리를 찾아오셔서 안고 우리를 맞아 주십니다.
눅15:20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 주고있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거룩의 관문 요단강을 거너기전에 정신을 차리고 예수를 따라가야합니다.
예수님은 나와 거리가 먼곳에 계시지만 그분은 우리를 우리에게 달려와 언제나 영접하여 주십니다.
요단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요단강을 건너기전에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두번째 말씀은 무엇이였습니까?
2.너희는 스스로 성결케하라
5절 말씀에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거룩은 한마디로 성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깨끗함을 닮아 가는 것이 거룩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야하는 것은 지금보다 내일을 위하여 거룩해야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성결하라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하시던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 우리 대동로 교회 성도여러분에게 요청하십니다. 스스로 성결키를 원하십니다.
스스로 성결하라는 말은 예수의 공로 없이 거룩해 질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깨끗하게 살고저하는 의지를 가져라는 말씀입니다.우리가 거듭난것도 예수의 의를 힘입어 거듭났습니다. 그러나 성화의 생활은 칭의와 차이가 있다면 거룩한 일에는 우리의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거듭나는 일에는 나의 의지가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태여난 것이 그의 긍휼과 인자로 큰은헤를 입고 거듭났습니다.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한일을 위하여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성경공부 (엡4장 엡2장 ) 공부에서 우리가 왜 구습을 벗어버리지 못히고 새옷을 입지 못하는가?
하고 살펴보는 가운데 엡4:25-31에 다음 몇가지 문제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옛습성에 매여 있는 부분들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 거짓 (2)분노 (3)도적질 (4)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 (5)악독자신도모르게 참말을 하지않고 거짓을 행하는 경우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체면 때문에 이해관계때문에 우리는 어쩔수없는 거짓말이였다고 변명합니다.전화가 왔습니다. 없다 해라 아이에게 거짓말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분노그 자체는 감정이기 때문에 없이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노때문에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하루종일 해갖도록 분를 품으면 마귀가 틈이 탑니다.
도둑질 하지 않았다고 자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빈궁한자를 구제하지 않은 것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지 못한 것 도둑질 입니다.
하나님게서 나에게 건강과 믿음의 건강하고 강한자로 만드셨다면 강한자가 마땅히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기도의 도둑, 건강의 도둑, 회개하고 거룩의 요단강을 건너시기를 바랍니다.
롬15:1
우리 강한자들은 마땅히 연약한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것이라
내일 주님의 기적을 베픗고저 오늘 우리에게 성결을 요구하시면 요단을 건너라고 명령하십니다.
2)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성결해야할 두번째 이유는 성숙한 사람은 본을 보일책임이 있기때문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성결하라고 명령을 내린 여호수가 제사장에게 말합니다.
6절말씀에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에게 일러 가로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의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 가니라
제사장 에게만 주신 명령아닙니까? 이제 모든 사람이 제사장의시대에 살고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들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벧전 2:8-10)
오직 너희는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가운데서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자의 덕을 선전하게 하려하심이라
좋든 싫든 우리는 다른 사람의 본을 받을 권리와 또 본을 보야 주어야할 의무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책무를 예수님으로 부터 빚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좋은 본의 빚은 다른 사람에게 모범을 보일 임무가 우리에게 부여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밤에 만찬을 베프실 계획으로 다락방에 모였습니다.전부다 서로 눈치를 봅니다.에수님께서 수건을 두루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이건 종이 하는 일이였습니다. 그일을 다마치시고 너희가 이것을 아는냐 ㅎ시면 교훈하신 교훈이 요13:13-15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하니 너희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도다 내가 주와선생이 되어 너희발을 싯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13절에 너희 말이 옳도다는 뜻은 정답이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14절에 너희가 서로 발을 씻기는 빚을 너희에게 지운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선생이며 주인인 내가 너희에게 발을 씻기웠기에 너희는 서로에게 겸손해야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서로에 모범이 될 책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서로에게 좋은 본을 보일 책임이 있습니다. 상담전문가인 게리 콜린스가이런말을 했습니다.목회자는 에게 상담을 할것인가 말것인가하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다만 좋은 상담자가 될것인가 아니면 나쁜 상담자가 되는냐 하는 문제만 남아있다고했습니다. 성도들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것인가 아니면 영향을 끼치지말것인가 하는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다만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인가 아니면 나쁜영향을 끼칠 것인가는 선택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특히 자녀들은 부모의 본을 받고 자라나기 마련입니다.
3.요단강을 건너가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었던 명령은 무엇입니까? 9절 말씀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하고
말씀으로 영생을 얻은 사람이 이제 말씀으로 성숙한 자리로 나아갑니다. 말씀을 듣는 자세가달라져야 하리라 믿습니다.
10절 말씀에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 헷 족속 히위
족속 부리스 족속 가리가스 족속과 이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쫑아내실 줄을 이일로 너희가 알리라
말씀을 들어라 하는 것은 단순히 이해하라는 말이아닙니다. 우리 생활속에 예수의 말씀이 넘쳐 흘러야 합니다.
(1)눈귀로 말씀을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시형 말씀듣는 자입니다. 이런사람의 성경은 책꽂이에서 자주만나게 됩니다.
(2)생각과마음으로 말씀을 듣는사람 마귀는 이렇게 성경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잘이해하고 깊은뜻도 압니다. 그러나 말씀이 다른 사람에게 여호와하나님이살아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알게 하지 못합니다.
(3)요단강을 건너는 자가 말씀을 듣는 태도에 대해서 생활 속에 반응하는 성경이 되어야 합니다. 깨달았으면 바로 실천으로 나타내어야 하나님이 말씀으로 육신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2)말씀으로 기적의 증거를 가진 태도가 요단을 건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13절을 자세히 읽어보겠습니다.
온 땅의 주 여호와 의 궤를 멘 제사장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밝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 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서리라 모세를 통하여 홍해를 지날때하고 다른 성숙의 모습이있습니다. 홍해를 건널때에는 건느기전에 물이 갈라지고 갈라진 것을 보고 건너갔습니다. 그러나요단에서는 말씀을 듣고 물이 갈라 지지 않았는데 건너간 것이 갓믿은자의 믿음과 성숙한 믿음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야곱의 우물에 물을 길러러 왔다가 메시야 그리스도를 만나 사마리아 여인이 동내에 들어가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쳤습니다.기적을 듣고 곧 사람의 간증을 듣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동네에 들어가 같이유숙하는 가운데 그 동네 사람들의 믿음이 요단강을 건너는 믿음으로 성숙헤졌습니다.그때에 동네사람들이 사마리아여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 복음4: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기적과 이사에 만 매여있는 성도는 자라지못합니다. 오히려 말씀 속에 기적을 내가말씀으로 이루고 성취하려고 해야 합니다. 기적으로 말씀을 증거하려고 하지 마십시요 오히려 말씀으로 기적과 유지 하십시요 천지는 변해도 말씀만은 변하지 않음을 믿는 믿음이 바로 거룩한 요단강을 건너는 믿음입니다.
주님을 거리를 두고쫑아라고고하십니다.
스스로 깨끗하라고 합십니다 내일 기적을 베프실려고합니다.오늘 깨끗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고 외치십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홍해를 건너 우리앞에 놓인 거룩의 강을 너끈히 건너시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