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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장은 에데스다라는 한 연못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1절과 2절 내용에서 보면 이 베데스다라는 이 연못은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있었다고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면 문들을 통과해서 들어가야 하는데 그 많은 문 중에 양문이라는 문이 있는데 그 양문 곁에 이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다는 거예요.
근데 이 베데스다라는 이 연못은 히브리말로 하면 어떤 뜻이냐 하면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벳은 집을 말하고 뒤에 뒤에 붙어 나오는 데스 이게 뭐냐 하면 히브리말로 헤세드라는 단어거든요. 그래서 헤세드가 붙어서 베데스다가 된 것입니다. 헤세드는 히브리말로 자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비의 지라고 우리가 기억하면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데스다라는 연못은 어떻게 불려졌냐 하면 우리가 말하면 자비의 집으로 불려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불려지고 있었냐 하면 이 연못가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거의 이 연못가에 누워 있었습니다.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연못 씨였습니다.
지금 여기에 나열되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다시 말해서 세상적인 의술로는 고침 받을 수도 없고 그리고 자의적으로 자기 힘으로는 거동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이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있었습니다.
왜 모여 있었냐 하면 가끔 가다가 1년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2년에 한 번 이렇게 정해져 있는 것도 없어요. 가끔 이게 정말 가끔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무책임한 시간적인 개념이거든요.
언제 일지를 모르는 거죠. 오늘일지 내일일지 알 수 없어요. 분명 어떠한 시간에 사건이 일어나기는 하는데 그 시간이 명확하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닥컴이라는 단어로밖에 설명이 안 되는데 이 베데스다 연못에 가끔 천사들이 내려와서 이 천사 베데스다 멋 안에 갇혀 있는 물들을 움직여요. 이 움직일 때에 가장 먼저 그 연못에 들어가는 한 사람 두 사람 안 됩니다. 2등은 안 돼요. 가장 먼저 내려가는 한 사람에게 그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는 기적을 베푸는 능력을 이 베데스다의 멋이 가지고 있다. 사실 이것도 설화로 존재하지 명확한지 진짜 있었던 일인지는 정확하지는 않다고 해요.
어쨌든 이러한 자신의 힘으로는 그리고 세상적인 의술로는 고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베데스다 연못에서 자비를 구하며 모여 있는 거예요.
여러분 베데스다 연못의 광경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켠에는 예루살렘 성이 있어요. 오늘 보니까 예수님께서 언제 올라가셨냐 하면 명절에 올라갔다고 되어져 있어요. 명절이 유월절인지 초막절인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명절에 올라갔다는 거예요. 이 유대인들에게는 이 이 명절이 되면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거든요.
모두가 예루살렘으로 모여와서 마치 축제 축제처럼 그런 아주 행복한 시간들을 보낸다고 합니다. 이 예루살렘에는 그런 무리들이 건강하고 성실하고 튼튼한 무리들이 모여서 축제를 벌이고 있는 거죠.
그리고 그걸 통과하는 양문 곁에 이 베데스타는 연문 곁에는 연못에는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요?
많은 병자들이 여기에 모여 있는 거예요. 같은 공간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황적으로나 볼 때 차이가 너무 많이 납니다. 이 베데스다라는 르못은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무자비한 장소였습니다.
자비가 없는 왜 그러냐 하면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이는 그 순간을 우리가 한번 상상해 볼 필요가 있어요.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많은 병자들이 이 베다스다 연못이 천사가 내려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그 시간에 드디어 천사가 내려오고 물이 움직이기 시작한 거죠.
이 주변에 있던 병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몇 명이 나음을 얻는다고요?
한 사람
거동이 불편한 이들이 서로 치열한 전투와 같은 다툼을 벌일 것입니다. 나보다 먼저 가려 하는 사람들을 가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도 있겠죠. 왜 내가 그 한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 자비의 집이라는 그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에는 자비가 없습니다.
세상 속에 경쟁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게 되면 이 경쟁 안에는 뭐가 빠지냐 하면 자이라는 개념이 빠져요. 운동 선수들이 시합을 합니다. 시합을 하는데 자비를 베풀면 할 수 있나요?
야 오늘은 내가 2등 할 테니까 네가 1등 해라
하면서 먼저 보내줄 수 있나요?
경쟁이라는 단어는 오직 이기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는 자기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우리 한국 사회는 어떻습니까?
자비가 많은 사회인가요? 경쟁이 많은 사회인가요?
치열한 경쟁 구도 속에 살아가고 있죠. 그래서 우리 청년들이 너무 힘들어요.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너무나 좁고 정말 세상에 한 사람만 찾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그 한 사람이 되기가 너무나 버겁고 힘든 거죠. 마치 여기에 자신의 힘으로는 거동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베데스다 연못에 모여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그것도 거기에서 내가 유일한 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간절히 몸부림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경쟁 구도 속에 우리가 살아가지만 우리가 어떤 우리의 어떤 모습을 우리가 늘 느낍니까?
내가 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보다는 이길 수 없겠다는 확신이 더 많이 들지 않나요?
세상이 원하는 천사가 선택하는 그 한 사람이 내가 될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좌절감이 더 많이 들지 않나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던가요?
경쟁 사회 속에는 자비는 없습니다. 생존과 살아남음만 있을 뿐입니다. 이 베데스타 연못에 소망을 품고 그래도 혹시나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일 때에 혹 내가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 그래도 모르잖아요 라는 그 기대를 가지고 모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자리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한 사람이 될 수 없구나 소외감을 느끼게 되죠. 패배감을 느끼게 됩니다. 좌절, 절망, 그러한 것들을 이 자비의 집에서 이들은 경험하고 느끼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편에서 일어나는 한 마음이 있어요.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 하면 정말 가능성 없는 질병에 걸려 있는데 어떤 마음일까요?
살고 싶다.
미치도록 살고 싶어 안 됐는 줄 아는데 안 됐는 줄 아는데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걸 아는데, 그래도 너무너무 살고 싶다.
이 베데스타 연못에서 이 병자들이 느끼는 감정이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느끼는 감정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늘 실패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인생 세상 속에 나아가서 끊임없이 도전해 보고 도전해보지만 그때마다 패배자가 되어져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내 능력치를 보면 좌절스럽고 절망스럽고 내가 가진 능력이 무능함을 느낄 때 내 속에 일어나는 신시 한탄들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속에 일어나는 한 마음을 살고 싶다. 그래도 정말 내가 살고 싶다. 이대로 끝나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일 것입니다.
이런 베데스타 연못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이 한 사람을 주목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셨는데, 이 요한은 마치 오늘 이 38년 된 이 병자 한 사람 때문에 이 예루살렘에 찾아온 것처럼 묘사하고 있어요. 그만큼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죠. 주목하십니다. 그렇게 찾아오십니다. 6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낳고자 하느냐
여기에 보면 우리가 주목해야 될 단어가 뭐냐 하면 누운 것을 보셨다라는 단어와 벌써 오래된 줄 아셨다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면서 그에게 어떠한 설명을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벌써 예수님은 38년 동안 이 사람이 병에 걸려 있었고 누워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오신 거예요.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38년 된 병자를 찾아올 때에 이 38년 된 병자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계셨고 모든 것을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이 병자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계셨고 모든 걸 보고 계셨음을 믿으십니까?
이렇게 보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도 알고 계시고 우리의 모든 것도 보고 계심도 믿으십니까?
아멘 이렇게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이 38년 동안 누워 있던 이 병자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질문을 던지십니다.
무슨 질문입니까? 같이 한번 해볼까요? 시작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때 이 38년 된 병자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7절 말씀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이거예요.
너 낫고자 원하니
그럼 어떻게 대답해야 돼요?
예스 올 로저 네 낳고 싶습니다라고 해야 되는데 이 병자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아요 어떻게 대답합니까?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갑니다. 이 병자의 이 답변에는 앞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던 두 개를 다 포함하고 있어요. 수요 여기에서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다고 할 때 여기에 사람은 한 사람을 이야기해요. 주요 나를 못에 넣어주는 한 사람이 없어서 그 한 사람이 없어서 내가 치유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신세 한탄, 신세 한탄이 포함되어져 있어요.
다시 말하면 예수 이 38년 된 병자에게 어떤 마음이 있냐면 자기 능력으로 안 되는 걸 알아요. 이제 안 거예요. 인정했습니다. 내 능력으로는 저 모세 내가 가장 먼저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안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생각이 드냐 하면 나를 도와줄 한 사람이 없나 천사가 물을 움직일 때에 나를 안아 가장 먼저 저 연못에 넣어줄 한 사람만 있다면 그게 내 인생의 소망이 되지 않을까 돌아보니까 그 한 사람이 없는 거죠. 그래서 항상 다른 사람들이 먼저 지나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요. 항상 다른 사람이 1등 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누가 나를 좀 도와주면 좋겠는데 그리고 두 번째로 이 고백에서 드러나는 것이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거는 나도 정말 살고 싶은데
그렇죠 절박하게 진심으로 나도 살고 싶은데 누군가가 자꾸 먼저 간다는 거예요. 여기에는 38년 된 병자의 절박함이 있어요. 나도 정말 살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 연못가에 있던 많은 사람들 중에 왜 38년 된 이 병자에게 주목하셨을까?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며 묵상하며 왜 38년 된 병자일까?
저는 이 한 문장에서 두 가지를 찾았습니다. 첫 번째로는 뭐냐 하면 자신을 도와줄 한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거예요. 두 번째로는 살고 싶다는 절박함이 있다는 거 주님은 이 두 가지에 주목하셨다고 생각을 해요.
뭐냐 하면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예수님께서 만나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라고 했을 때 도움이 자신이 인생에 도움이 필요함을 아는 인생 두 번째로는 정말 살고 싶어 하는 간절함과 절박함이 있는 인생 이들을 예수님은 찾아가시고 만나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병자가 원하는 모습은 아니지만 그를 살려주십니다.
11절 말씀에 8절 말씀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치유하여 주심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실 이 본문이 굉장히 좀 딥한 본문인데 제가 살짝 요것만 빼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자비가 있는 세상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우리 인생에 무언가를 이루어 줄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세상입니까?
우리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이 세상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가장 앞선 자리에서 항상 달려갈 수 있는 그러한 삶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항상 1위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마다 잘하는 부분도 있지만 부족한 부분들도 아마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연약함들이 때로는 우리의 모든 인생을 삼켜버리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주목하셨던 이유는 그가 그를 도와줄 한 사람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 이 자리에 모여 있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도님들 여러분들의 인생에 도움의 손길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내 인생에 나를 도와줄 한 사람이 있다면 이 38년 된 병자의 하소연과 같은 이 고백처럼 혹 그런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지는 않나요?
우리 인생을 도와줄 수 있는 그 한 사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앞에 절박한 심정으로 우리의 형편을 토설하시고 그 앞에 내놓으십시오. 우리 안에는 살고 싶어 하니 간절함이 예수님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삶으로 이끌어 오는 동력이 될 것입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갑니다마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한 사람의 인생 속에 그리고 한 가정 속에 한 교회 속에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제가 한 20여 년을 중고등부 청년부 사역만 했거든요. 어려워요. 사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지금까지 그래도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셨어요. 제 자랑은 아니고 그리고 교만스럽게 듣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제 사역 중에 있었던 하나의 일들을 얘기하고 마치겠습니다.
한 집사님이 한 집사님이 그날 그 교회 안에 교회 성도는 아닌데 머리가 너무 아프다 하면서 지나가면서 기도 받고 싶다고 이렇게 찾아오셨나 봐요. 집사님이 교육자실로 들어오셨죠?
여기는 부목사님들도 몇 분 계셨고 그때 저는 교육 전도사였습니다. 몇 분 계셨고 저도 있었고 이렇게 있었어요. 저를 불러요.
전도사님 왜요?
나가니까 기도해 주시라는 거예요.
저보고 왜요?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하는데 기도해 주시라.
제가 웃으면서 아니 목사님들께 많이 계신데 왜 나를 불러옵니까? 저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 집사님이 했던 말 한마디가 제게 남아 있어요.
에이 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얘기를 해요. 저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물론 그 자리에서 저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게 치유의 은사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되게 어떠한 성령의 강권적인 어떠한 언사가 내게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저는 방언도 못합니다. 그 정도로 그런 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 그렇게 이야기하시네요. 어떤 권사님은 손 전도사가 기도회를 인도하면 하늘 문이 열리는 것 같다 라고 표현하신 분도 있어요. 감사한 일이죠.
저는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냐 하면 저는 단언컨대 제가 학생들 청년들을 사역하면서 절박해 보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정말 저는 저 영혼들이 예수 만나기를 원하고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를 원한다는 절박한 마음, 그리고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저들을 만나주셔야 한다.
오늘 38년 된 병자를 주님이 찾아와 만나주셨던 것처럼 내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저들을 만나주셔야 한다는 거예요. 그 절박함이 제게 있어요. 하나님께서 내게 나중에 말씀해 주셨어요. 어떠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그 간절함이, 너희의 그 절박함이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면서 혹 우리가 우리 인생에 예수님이 마치 베드스다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 자비가 있다고 말하고 예수 안에 자비가 있다 말하고 예수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하는데 도저히 나와는 상관없는 것 같고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을 찾아서 치유하고 역사하시는데 그 사람들 속에 나는 포함되지 않는 것만 같은 나는 소외되고 외면되어지는 것처럼 교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지만 하나님으로 풍성하여지는 내 삶과 내 마음이 아니라 여기 안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좌절과 절망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이제는 무단 유대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종교 행위에 그치며 무언가를 하나님께 기대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고 그저 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인생에 필요한 한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38년 병자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자리를 들고 걸어가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여러분 때에 여러분들의 인생이 새겨지는 지금의 한 구절이 한 말씀이 여러분들의 10년 20년 뒤를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들었던 것처럼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라는 이 메시지가 우리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들려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붙드십시오. 그리고 절박하게 주님 앞에 메워 달리십시오. 내 인생에 나를 도와줄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살고 싶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이 마음으로 주님 앞에 우리가 나아갈 때에 전능하신 그분께서 우리 인생에 역사하셔서 우리를 살려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