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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갤러리 한명희, 이 노을은 어딘가 익숙하다
이영숙 추천 0 조회 42 25.02.14 11:43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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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5.02.14 11:45

    첫댓글 익숙함 때문에 “당황한 내가 이국처럼 서 있”는 이 시는 낯설다. 익숙함과 낯섦을 동시에 배반한다. “어딘가 익숙”한 “노을”과 “바람”, “온도와 더 익숙한 습기”는 지금 여기의 것이고, “그때의 그 어스름”과 “그 자리”는 지금 여기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의 것이 아닌 것이 지금 여기를 관장한다. “이 저녁”은 새로 찾아온 저녁이지만 “이미 겪은 듯”한 저녁이 되고, “바람이 가는 곳”은 예측 불가한데도 마치 “나는 이미 다 거쳐 온 듯하다”. “그때”라는 시간과 “그 자리”라는 공간, “그 어스름”이라는 정황에서 세 번이나 강조된 ‘그’ 극점을 반복해 살고 있었으므로, “나”의 모든 나날은 경험되어진 것으로 실재한다.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므로 미래 역시 현재의 연장선에 있을 뿐이다.

  • 작성자 25.02.14 11:45

    ‘그’ 극점에 속한 것이 아닌 일상, 일테면 “지붕과 첨탑과 오래된 나무들이/ 가장 먼저 어둠에 물들 것”이고, “땅강아지들은 불빛을 피해/ 어디로든 숨어들 것”이며, “어둠은 차츰/ 몸을 낮”추는 평범한 저녁이 문득 낯설어지는 현장에 “당황한 내가 이국처럼 서 있”는 풍경이 그려지는가. “이 노을”도, “이 저녁”도, “이 바람도” ‘그’의 자장에 속하여 지금 여기에는 지금 여기가 부재한다. 이 낯섦 앞에서 사물처럼 외로운 “나”와 함께 어떤 강한 인상, 어떤 충만, 어떤 격렬한 사건이 결부되었을 ‘그’로 거슬러 오르는 우리의 시적 탐험이 시작된다.

  • 작성자 25.02.14 11:50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누군가>가 그들을 불렀기 때문이다."

    보르헤스가 「죽은 자들의 대화」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맺었을 때, “그들”의 “얘기”는 닫히지 않고 오히려 무한히 열린다. 작가가 “누군가”에 대한 정보나 “누군가”의 개입으로 인한 서사의 방향성을 보여주지 않아도 그 지분을 자유롭게 이월 받은 독자의 상상력이 각자의 서사로 만들어나가기 때문이다. 천 명이 읽으면 천 개의 이야기가 ‘발생’한다.

  • 작성자 25.02.14 11:52

    이미지로 말하는 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서사가 해피엔딩과 세드엔딩을 독자의 가슴까지 배달하지 않는 게 현대적 감각이라면, 현대시는 시공간의 어긋남을 통해 감각을 갱신한다. 있음과 없음, 차 있음과 비어있음, 유와 무, 존재와 비존재와 같은 개념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의 주요 테마이지만, 시는 주로 후자 쪽에 매료되어왔다. 이들은 암반을 떠받치는 지하수 같고 달의 뒷면 같으며 앞면이라고 해도 크레이터에 가깝고 평원보다는 절벽이며 눈보다는 비이거나 햇빛보다는 바람이다. 있어도 있지 않음과 없어도 없지 않음의 아득한 기원이고 미래이며,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이라는 노래 가사의 주제이거나 각주이며, 한편 부재로 말하는 존재이다. 익숙함이 낯설어지고, 익숙하지 않은 것이 익숙해지는 세계. 한명희의 시는 ‘부재’의 시공간을 거쳐 그곳에 도착한다. 천 명이 읽으면 천 개의 이미지가 ‘발생’한다.
    -이영숙, <이렇게 절실한 말> 중 부분, <<미네르바>> 202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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