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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여수금오산과답사여행〕
1.일시:'20.12.25.26.(1박2일)
2.코스:
*첫째날:집-향일암·금오산-율림치주차장-향일암-금수강산사우나(문수동).(산행거리 약7km.4시간)
*둘쨋날:금수강산사우나-여수수산시장-오뚜기식당-여수수산시장-(여수해양공원․이순신광장․낭만포차거리․하멜기념관)-돌산공원-금수강산사우나
대한민국 美港의 항구들.
麗水를 낭만의 도시라 하고 統營을 한국의 나폴리라 한다.
서쪽에 목포와 동쪽에 부산이 있으니 남해에 두 도시가 마주하고 있다.
겨울철 산행과 답사여행 온솨한 날씨로 나쁘지 않다.
여수에서 2박3일 일정.
첫날은 남해의 해돋이 명소 여수 향일암이 있는 금오산 산행이고,
둘쨋날은 낭만포차 거리에서 답사여행 가지며
셋째날은 남도 가보고 싶은 섬이라는 강진의 가우도를 둘러보는 일정이다.
신안 지도 집에서 여수엑스포역까지 2시간 36분이 찍힌다.
흘러간 옛 가요를 들으며 남해고속도로 달리는 기분이 좋다.
한적한 풍경이지만 지루하지 않게 해준다.
USB의 옛가요가 흥을 돋구기도 한고,
남도에서는 서두르지 않고 편안하게 가리다.
【첫째날 여정】
여수 시가지에 접어들어 돌산대교 건너서 해변 길 드라이브하고 향일암 들러서 금오산에 오르며 율림치 마을 등산로 입구에서 임도를 따라서 다시 향일암 주차장으로 오는 과정이다.
4시간 소요 되었다.
--돌산도 드라이브--
돌산도는 우리나라에서 아홉 번 째로 큰 섬.
돌산 대교를 지나니 짙푸른 물 위 하얀 점으로 줄지어 서 있는 양식장의 부표들이 펼쳐 보인다.
해송과 아담한 백사장을 끼고 오목하게 들어가 있는 곳이 방죽포 해수욕장이다.
방죽포를 지나면서부터는 해안도로가 산등성이를 타고 돈다.
바로 돌산도 끄트머리에 돌출한 임포마을이요 그 위에 향일암 오르는 상가길이다.
-- 向日庵에서--
向日庵은 해돋이를 보며 소원을 말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向日庵에서 낙조를 보면 저무는 인생의 무상함도 아름답게 느끼는 곳이라 한다.
돌산도의 끝 금오산 중턱에 자리잡은 向日庵은 신라 선덕여왕 13년(644) 원효대사가 창건했을 당시에는 ‘원통암’으로 불렸으며, 고려시대‘금오암’이라 불렸다가 언제부터인지 영구암(靈龜庵)이 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돌산도가 거북이를 닮은 지형적인 특징에서 나왔다.
담장위에도 바위벽에도 거북이 상들을 곳곳에 두었다.
向日庵은 남해보리암,강화보문사,낙산사 홍련암과 함께 해수의 관음성지 4대 관음기도처로 알려진다.
向日庵 오르는 임포마을의 골목상가에 아주머니들이 갓김치를 맛보게 한다.
『돌산갓김치는 돌산에서 자란 푸른 빛의 갓으로 담그는데 다른 지방의 갓김치에 비해 매운 맛이 덜한 반면 고유의 향이 있고, 섬유질이 적어 사근사근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돌산갓의 씨를 가져다 육지에서 재배해도 돌산갓 원래의 맛이 나지 않는다는데 이유는 돌산의 비옥한 토양과 해풍 때문이라고 한다. 돌산도의 식당 대부분에서 돌산갓김치를 내놓아 어렵지 않게 맛볼 수 있으며, 돌산대교를 넘어 영구암으로 가다보면 나오는 돌산농협죽포지소이나 돌산농협갓김치 공장에서 구입할 수 있다』.
향일암 오르는 길 가운데 돌부처님 셋이서 속세인들에게 교훈을 하고 있다.
不言:나쁜말 하지 말라.
不聞:비방과 칭찬의 소리에도 평정을 잃지 않는다.
不見:스스로 돌아보고 옳고 그름을 살펴야 하리.
바위 사이 좁은 문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 나오는 명문이다.
向日庵 작은 암자다. 정면으로 大雄殿 대신 圓通寶展이라고 되어있는 건물이 있다.
물결하나 일지 않는 잔잔한 청색갈의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다.
‘원효스님 수도도량 관음전 가는 길’이라는 팻말이 있는 좁은 길을 따라 좀더 올라가니 관음전이 나온다
관음전 옆에는 바다를 향해 해맑은 미소를 던지는 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영구암은 남해 금산의 보리암과 함께 남해의 관음도량으로 유명하다.
--金鰲山에서--
登龍門을 지나니 解脫門이 나온다.
금오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따로 나 있다.
전설처럼 전해오는 향일암의 해돋이는 정상에 오르면 더 환상적이라고ᆢ.
동해가 아닌 남해에서 보는 해돋이고 서해가 아닌 곳에서 보는 낙조이기에 더 귀하게 여겨진다 추천하고 있다.
사진작가라는 분이 사진을 찍어주며
"멋지십니다"고 한다.
이런 말 처음 듣는데, 칭찬이 사람을 춤추게 한다 ᆢㅎㅎ^^
산등성이에서 보는 임포 마을이 거북이가 불경을 등에 지고 바다로 헤엄쳐 들어가는 형세를 취하고 있다.
바다로 튀어 나온 마을이 돌산이 만들어낸 명물이다.
주차문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금오산 정상에서 되돌아간다.
주민의 권유가 있기도하여서 율림치주차장으로 하산하여 임도따라 임포마을 해변을 걷는다.
‘멋있게 보입니다’.
오늘도 늦어진 오찬은 고구마.오메기떡.계란.베지밀.곶감과 귤이다.
10개의 귤이 다 소화가 되기는 되는기여...^^.
향일암 주차장 1일 요금이 200원이며 현찰은 받지 않고 있는데,
200원주차료도 반드시 카드로 결제를 해야 하니 웃음이 나온다.
숙소를 어떻게 정할까 매우 망설였다.
‘24시사우나’에서는 목욕과 찜질을 할 수 있고 숙면실에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을 알고만 있었다.
펜션과 게스트하우스 대신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다.
앞으로도 이용경험이 필요하다.
여수 신시가지 문수동 아파트 촌 산 아래 ‘금수강산사우나’는 건물 전체가 체육시설과 사우나로 되어 있다.
넓어서 아무곳에서나 선택하여 잠 잘 수 있어 좋다.
하루 피로회복을 사우나 찜질로 풀고 인근의 아침 식사로 허문정보리밥집을 소개 받았으나 오늘 넷째주 토요일은 휴일이어서 아쉬움 뒤로 한다.
인터넷 검색하여 찾아간 여수 수산시장 건너편 오뚜기식당에서 돌솟게장백반도 괜찮았다는 것 덧 붙인다.
집에서는 산책하고나면 아침 식사는 9시가 넘게뎐다.
하루 두끼로 생활이 소화부담이 덜한 것 같아서 괜찮다고 생각된다.
가끔 포식 할 때도 있기는 한다.
생선요리들 때문이다 ...^^
【둘쨋날 여정】
--여수항 해변에서--
이제 여수의 낭만을 경험해 볼거나?
여수는 그동안 하루 잠간 들렀다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처음 맞이하는 긴 시간이다. 기다렸던 만큼 기대감 또한 크다.
오늘 일정은 수산시장 방문하고 이순신광장과 해양공원 그리고 하멜전시관을 관람하며 오후에 돌산공원가는 코스다.
오뚜기 식당을 나와 수산시장에 주차하니 해변 서쪽 끝에서 동쪽 하멜등대까지의 걸어야 한다.
수산시장 '동식이네 가게'에 들러 대갈치 10마리가 10만냥이다.
이틀 만에 서울에 도착한다.
고등어 큰 것 3마리 1만냥 싱싱해서 좋다.
마루녀석 줄려고 생선 대가리 한박스는 덤이네.
시장에 사람들이 매우 많다.
코로나 청정지역이어서 왔나보다.
이곳 사람들은 같은 말들을 하고 있다.
“여수가 좁아요”
목포에서도 “목포가 작아요”였다.
육지와 돌산도 사이에 깊숙이 들어오는 작은 항구에 육지와 섬 사이에 만을 형성하고 있는 바다도 작은 호수 같다.
커다란 함선이라도 들어온다면 바다에서 교통체증을 일으킬 것만 같다.
작은 것은 귀엽다고 항구는 바로 내 집 앞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친근감이 느껴진다.
여수연안여객선터미널에 승객들이 많다.
어디로들 가려나 궁금하다.
여수는 가까운 거리에 섬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돌산도 남쪽바다에,
신이내린천혜의巨文島. 아찔한절벽의매력에넋을놓는다․
숨겨진보물이열렸다金鰲島.
자연에서힐링安島 세 섬이 있고,
돌산도 서쪽바다에,
친환경 명품섬蓋島. 신비롭고아름다운비밀의섬下花島. 야생화향기그윽한上花島. 태고의신비를간직한공룡의섬沙島· 가고싶은낭만의섬狼島. 해넘이가아름다운노을의섬 汝自島다.
이 많은 섬들 중에서 꼭 가보아야 금오도비렁길과 거문도다.
봄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련다.
돌산도 끝 신기항에 주차하고 가면 좋다고 안내소 직원이 알려준다.
--이순신광장에서--
한손에는 검을 들고 한손에는 지휘봉을 들고 민족의 태양 충무공이순신장군이라고 세겨진 동상이 바다를 향해있다.
그 앞에 거북선이 위용도 당당하다.
삼도수군통제영 진남관은 이순신광장에서 멀지 않은 북쪽에 있다.
이순신 광장에 전시되어 있는 비석들의 글을 읽느라 시간가는 줄 모른다.
‘임진왜란 해전도’에는 옥포해전(1592.5.7.)에서 노량해전(1598.11.19.)까지 위치와 과정이 잘 그려져있다.
집에 돌아가면 7년 동안 바다에서 거둔 승리의 기록은 책을 다시 읽어보아야겠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손주 녀석들에게 학익진 전투장면을 멋지게 설명 할 줄 아는 할배가 되어야 하는데...^^.
-‘이순신과 여수 이야기’ 비석에
若無湖南是無國家(약무호남시무국가):만약에 호남이 없었다면 이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若無麗水是無國家(약무여수시무국가)가 보일 것이다는 문구가 있다.
수로에 철쇄방비시설을 설치하여 전쟁을 준비하고 동상뒤에 있는 종고산에 얽힌 한산도 대첩후의 이순신 장군의 어록도 승리에 대한 결의가 넘친다.
“바다에 맹세했더니 고기들이 감동했고, 산에 맹세했더니 초목들이 알았구나(誓海魚龍動盟山草木知)”.
-‘여수 웅천지구 송현마을’에서 5년간(1593-1597) 모친을 모셨다고 한다.
송현마을에서 쓴 난중일기를 옮긴다.
*갑오년(1594)1월12일 (신묘) 맑음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니께 돌아가겠다고 인사를 드리니“잘 가서 나라의 치욕을 속히 씻어라”.하고 몇 번이고 타이르셨지만 헤어짐에 대해서는 조금도 슬퍼하지 않으셨다.
*병신년(1596) 윤 8월12일(병자) 맑음
하루종일 급히 노를 저어 밤 10쯤에 어머니 앞에 엎드렸다. 백발이 부수수하신 어머니가 나를 보고 놀라 일어서시는데, 기온이 쇠약해져 아침저녘을 보존하시기 어렵다. 눈물울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새도록 어머니를 위로하여 마음을 풀어드렸다.
*병신년(1596) 윤 8월13일(정축) 맑음
몸소 옆에 앉아 아침 진지상을 드리니 대단히 기뻐하셨다. 늦게 하직 인사를 드리고 본영(여수)으로 돌아 왔다. 오후 6시쯤 작은 배를 타고 밤새 노를 재촉하였다.
역사의 현장 이순신장군 광장에서 감동의 시간을 가진다.
이순신장군을 도운 수군들의 활약상과 목슴을 잃은 충성심에서 가슴이 뭉클하다.
남자는 세 번 운다고 했다.
오늘은 한 번 더 울어도 되겠다.
바로 이순신 광장에서 감동의 눈물이다...허허^^
--낭만포차거리에서--
태어날때와 부모님을 보냈을 때와 나라를 잃었을 때다.
낭만포차거리는 해양공원이라 불리는 것이 정식이다.
낭만포차거리를 통칭하여 비어로 쫑포라고 하는데 그 말도 종포라고 하는 것이 정식이며 쫑포 어원의 유래가 재미있다.
『'종포'는 여수 내에서도 굉장히 시골이던 곳입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배가 많은데, 예전에는 공원이나 관광지도 없이 그저 그런 배가 많은 어촌이었습니다. 그래서 '시골 종포' '깡촌 종포' 라는 의미로 '쫑포'라고 불렀습니다.
아무 맥락도 없어 보이지만 사실입니다. 마치 친구들에게 별명을 지어줄 때 '강철'이라는 친구에게 '깡철이'라고 지어주거나, '진철'이라는 아이에게 '짠철'이라는 별명을 지어줘 조금 촌스럽다는 느낌을 주는 것처럼, 종포도 역시 '쫑포'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하멜전시관에서--
빨간 등대 위치가 해양공원 동쪽 끝임을 보여주고 있다.
좁은 공원에 하멜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어서 답답함이 느껴지는 것을 등대가 커버해 준다.
제주도 한달살기 하면서 산방산 아래 용머리 해안 초입 하멜 일행이 표착했던 표지석을 보았는데,
벤취에 앉아서 바다를 본 사진을 들 추어 본다.
그들이 탈출하는 곳이 지금의 하멜등대자리라고 전해지고 있다고하니 도착점과 탈출점을 경험하게 된다.
17세기 하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로도 가치가 있지만 흥미롭고 재미있다.
전시관에 하멜 보고서에
13년 28일 (1653.8.15.~1666.9.4.) 하멜일행들의 3년간 여수생활에서 당시의 조선시대 사회상을 엿 볼 수 있었다.
하멜보고서는 동인도 회사에 임금지급을 요청하기 위해 기록한 것인데 유럽에 코리아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니 임금(돈)이 역사적 기록을 만들었네...^^.
돈을 사랑하세요...^^.
그래야 돈이 당신을 사랑할 것이다.
고상한척 하지만 돈 앞에 장사 없다.
사람이 먼저다.
아니다.돈이 먼저다.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돈을 벌어서 멋진 노후 인생을 펼쳐가기를 누구나 바란다.
하멜 교훈이다...허허^^
1663년 전라좌수영 진남관 부근에서 하멜과 11명이 살았으며 여수 이도빈 수사는 배가 있는데 왜 도망가지 않느냐며 조선을 떠날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다는 글을 읽고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남 딱한 사정에 정이 많은 민족이다.
헨드릭 하멜은 현실극복형 이상주의자였다고...
당시 북벌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던 효종 임금의 회유와 엄포에도, 같은 동인도 회사 소속 벨테브레이 박연의 우호적 설득에도 하멜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조국 네덜란드가 있었고 자신의 억류생활 14년 동안의 생생한 증언을‘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집념과‘자유를 향한 갈망’이 전라좌수영 여수를 탈출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곳이 바로 지금의 하멜등대자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감자 종주국은 네덜란드란다.
암스테르담 남쪽 80여km 쯤에 하멜의 고향 호르큄 시가 있다.
세계적인 감자연구소와 씨감자 공급 회사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라고..
제주도 감자 유래가 혹시나(?) 알 수 없겠다...
여기서 당시 하멜과 박연의 인연 소개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귀화인은 조선 인조 때‘박연’으로 기록되어 있다.
1627년 동인도회사 소속 네덜란드 배가 일본으로 향하던 중,
제주도 근해에서 표류하게 되고 식수를 구하기 위해 상륙했던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 일행 3명이 관헌에게 붙잡히게 된다.
벨테브레이 또한 하멜같이 적응력이 뛰어난 현실주의자였을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 훈련도감에서 군사훈련을 맡게 되고 조선인 신분으로 병자호란 전쟁에 출전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동료 2명은 전사하고 박연은 조선여자와 혼인하여 자녀 2명을 두었으나 그의 생몰(生沒)을 알 수 없는 불행한 귀화인으로 남게 된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1653년, 벨테브레이와 같은 항로를 항해하던 하멜 일행이 용머리 해안에 표착하게 된다.
1653년 H.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하였을 때 제주도로 내려가 통역을 맡았고 그들을 서울로 호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하멜이 도감군오(都監軍伍)에 소속되자 그를 감독하는 한편 조선의 풍속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박연은 조선여자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선에서 여생을 마쳤다. 박연의 고향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북쪽 드 레이프(De Rijp)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돌산공원에서--
돌산공원에서 오전에 돌아본 여수항구와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수 과연 美港이로다ᆢ!!'
이름 없는 탑뒤로 돌산대교가 장남감 같다.
짧고 예쁜 현수교 다리가 앙증 맞다.
다리아래 짙푸른 바닷물이 매우 깊다고 한다.
대교옆 동그란 장군도 넘어 산과 하얀 시가지와 해변 길과 푸르른 바다가 어우러저 美港을 이루고 있다.
폼 나는 곳이로다. 뽐내도 된다ᆢ^^
케이블카 쉴사이 없이 운행하고 있는데 돌산공원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달라는 프랭카드 글귀가 수긍이 간다.
여수는 항구이자 공업도시다.
시가지는 번잡하고 해변은 복잡하지만 여수산단에 활기가 넘친다.
갖추어야 할 것들 다 가지고 있다.
‘여수에서 잘난 체하지 말라’‘
‘여수 가서 돈 자랑 하지 말라’
‘여수에서 미모자랑하지 말라’ 선남선녀들이 밤바다를 누빈단다.
세계의 어느 미항 부럽지 않다는 여수사람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한 것 같다.
여수밤바다 코스 4구간이 2시간 정도라고 되어있으니 걸을만하다.
麗水 동백나무 사이로 갈매기 난다.
麗水는 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을 정도로 따뜻한 남쪽 나라다.
麗水는 ‘물이 좋다’는 뜻이다.
고려 왕건이 삼국을 통일한 뒤 전국을 순행할 때,
“이 지역은 인심이 좋고 여인들이 아름다운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물이 좋아서 인심이 좋고 여인들이 아름답습니다” 신하들이 답했다.
여수낭만을 가득담아야 할 봄이 기다려진다.
‘남도에서1년···’ 그 여정은 麗水가 더욱 빛내 줄 것이다.
나를 사랑하거든 그것도 매우 사랑하거든 麗水에 가야한다.....허허^^
【이순신장군 해전과 전과】
1.옥포해전(1592.5.7.).2.당포해전(1592.6.2.).3.한산도대첩(1592.7.8.).4.안골포해전(1592.7.10.).5.부산포해전(1592.9.1.).6.명량해전(1597.9.16.):울돌목.학익진전법.7.노량해전(1598/11/18):이순신장군 전사
¶옥포해전(1592.5)
전과 - 왜선 42척을 가앉히고 4천명의 왜군을 섬멸. 판옥선 1척 손실
이순신 장군의 기함을 선두로 하여 횡렬로 늘어서 한꺼번에 안 쪽을 향해 돌진. 그리고 왜군의 중심부로 돌격하여 지자포, 현자포를 마구 쏨. 순식간에 왜선 수 척이 불타고 침몰하기 시작함. 결국 왜적들은 배를 버리고 도망가거나 붙잡혀 격멸.
이순신 장군은 쉴 틈 없이 함대를 이끌고 합포(마산)까지 적을 추격하여, 왜선 5척을 불태우고 다음 날 고성의 적진포에 머물러 있는 왜선을 찾아내어 11척을 불태움. 1차 출동에서 이순신 장군이 싸워 이긴 옥포해전은 옥포, 합포, 적진포의 싸움을 합쳐서 말하는 것으로서 모두 왜선 42척을 격침.
¶사천포해전(1592.5.29)
전과 - 왜선 12척 모두 불태움.
유인작전사용. 함대가 뱃머리를 돌려 10리도 못 나와 이순신 장군의 예상은 적중하여 왜적들이 모두 배에 옮겨 타고 우리 함대를 추격하기 시작. 이순신 장군은 급히 뱃머리를 돌려 적들을 향해 공격 명령을 내림. 거북선이 돌격의 임무를 띄고 적의 선단 깊숙이 쳐들어감. 뒤이어 판옥선들은 재빠르게 후미의 적선들을 봉쇄하고 화력을 퍼붓기 시작.
조선 수군은 왜적의 배 12척을 모조리 불태움. 거북선이 처음으로 이 전투에 참가하여 그 용맹을 떨치게됨. 이순신 장군은 이 전투에서 왼쪽 어깨에 총을 맞지만, 마친 후 부하를 시켜 칼끝으로 총탄을 파내게 하였다고 함.
¶당포해전(1592.6.2)
전과 - 왜선 21척 모두 격침.2천여명의 적병 무찌름.
당포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21척의 적선을 격침시키고 2천여 명으로 추정되는 적병들을 무찌름. 이 해전의 또 다른 의미는 왜적의 수군 선봉부대를 격파하였다는 것과 도요토미의 신임을 받던 왜장이 이 전투에서 죽었다는 것. 즉 당포해전을 통해 왜적의 서진 의도는 좌절.
¶한산대첩(경내량해전.1592.7.8)
전과 - 왜선 59척을 가앉히고 9천명의 왜군을 섬멸
왜장 와키자카 구사일생으로 도망.도요토미히데요시의 대륙정벌의 야망을 꺾음.
왜 : 76척의 대 함대
조선: 56척 [전라좌수군 24척, 전라우수군 25척, 원균의 경상우수군 7척]
넓은 바다에서 왜적의 배와 왜 수군들까지 모조리 잡을 계획을 세움.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긴 수로로서 길이는 약 4km이며 넓은 곳도 600m 를 넘지 않는 좁은 해협이라 전투하기에 매우 좁았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들의 행선에 지장을 줄 것이 분명했음.] 인출전포지계(引出全捕之計):넓은 바다 한가운데로 이끌어낸 뒤 완전히 봉쇄하다.
13척의 배로 적에게 소규모의 군세로 여겨지도록 하자 적장 와키자카는 이 13척이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전부라고 생각함. 유인작전으로 조선 수군은 조금씩 후퇴하고 왜적들은 한산도 앞 바다까지 뒤쫓아 옴. 이순신 장군의 공격명령이 떨어지자 지금까지 후퇴하던 조선 수군의 전 함선은 일제히 뱃머리를 돌리고 학익진을 형성하며 적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 모든 장졸들은 온 힘을 다하여 총포와 불화살을 쏘아대니 왜적들은 기가 꺾이어 전의를 잃고 도망가므로 전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결정됨. 적선 73척 중에서 대형 층각선 7척, 대형선 28척, 중형선 17척, 소형선 7척으로 도합 59척이 격파되거나 불태워졌고 왜장 와키자카는 도망쳤다고함. 왜군의 전사자는 무려 9천여 명이나 되었음.
한산대첩의 가장 큰 의미는 왜군들의 수륙병진작전에 제동을 걸었다는 것이고 또한 남해의 제해권을 확실히 장악하였음을 들 수 있음. 한산대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에 대한 사형선고이며, 그가 꿈꾸던 대륙정벌의 야망을 꺾어버린 해전임.
¶부산포해전(1592.9.1)
전과 - 왜선 100여척 침몰. 정운 전사
이순신 장군은 부산 포구를 향하여 총공격 명령을 내림. 양 함대의 전선수를 비교하면 약 3대 1의 비율로 조선 수군이 열세이었고 지리 조건도 왜군들은 언덕을 의지하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하여 공격하지만 조선 수군은 해상에서 완전히 노출되어 공격이 매우 불리하였음.
맨 먼저 포구를 향하여 곧장 들어가면서 밖으로 나오던 왜의 대선 4척을 격파. 그때 부산진 동쪽에서 약 1마일 정도 떨어진 언덕 밑의 3개소에 정박하고 있는 왜선들은 탐망선의 보고와 거의 같이 대·중·소선을 합하여 470여 척이었음. 이들 전선은 해상으로 나오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으나, 공격과 더불어 발사된 포환과 화살의 세례를 받게 되자, 왜군들은 제각기 배를 버리고 육상으로 올라가서, 언덕 위에 굴을 파고 있는 병사들과 함께 총통과 화살을 갖고 산 위에서 대응함.
이 전투에서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함. 이순신 장군은 날이 어두워지기까지 정박해 있는 왜적의 배를 부수어 1백여 척을 침몰시키는 큰 전과를 거둠. 부산포해전으로 왜군의 바다에서의 활동은 잠잠해졌고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함.
¶명량해전(1597.9.16)
전과 - 12척으로 왜군의 133척 31척을 격침 시킴.
명량해협은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에 있는 좁은 수로로 조류는 국내의 수로 중에서 가장 빠른 곳임.
133척의 왜선들은 목포 쪽으로 흐르는 북서류를 타고 명량해협을 통과하려고 하였을 것이나, 뜻밖에도 여기에서 이순신 함대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고, 전투 중에는 동남류로 반전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반면 이순신 장군의 함대는 왜선을 맞아 처음에는 강력한 역류를 타고 전투 해역에 돌입하였을 것이며, 다음 조류가 바뀔 때까지 결사적으로 왜선들의 해협통과를 저지하였고 동남류가 흐르게 됨에 따라 유리한 위치에서 전투를 하게 됨.
12척으로 133척 중 31척을 격파한 명량해전은, 조선 수군으로서는 단 한 척의 손실도 없이 완벽한 승리로 막을 내림.명량해전은 칠천량해전 이후에 남해안을 휘젓고 다니던 왜군의 수륙병진계획을 송두리째 부수어 버리고, 정유재란의 전환점을 마련해 줌.
¶노량해전(1598.11.18.~19)
전과 - 왜선 200여척을 격침
이순신 장군 전사
11월 18일 저녁 6시경에는 무수한 왜선들이 노량에 집결하였으며, 그 척수는 무려 500여 척에 달하고 있었음. 이순신 함대는 왜선에 불을 지렀고 관음포로 물러선 왜선들은 최후의 발악을 하기 시작함. 전투 중 이순신 장군은 왜군의 층각선을 공격하여 그 중 1명을 사살함. 그들의 층각선이 공격당하는 것을 본 왜군들은 진린의 전선을 그냥 버린 채 층각선을 구출하려 함. 진린은 그 틈에 급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으며,이순신과 진인은 다시 합력하여 포를 발사하여 왜선을 불사르고 깨뜨림.이때 날아든 총탄은 이순신 장군을 쓰러뜨리고 맘. 곁의 회와 완은 울음을 참고 시체를 배 안으로 옮기고 그대로 독전기를 흔들면서 전투에 임하함. 때문에 어느누구도 알지 못했음. 이렇게 전투를 계속하는 동안, 그 날 12시경까지 200여 척의 왜선이 격파되었으며, 적의 사상자 수는 헤아릴 수 없었음.
【무패의 기록, 불멸의 이순신】
할아버지 이순신이 손주들에게 이야기를 한다.^^
임진왜란은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한산도 대첩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는데
옥포해전에서 적의 기를 눌러놓고 한산도 대첩에서 학익진 전법을 쓴다
명량 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노량진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인다.
1.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한산도 대첩에서도 승리를 거두다
옥포해전에서 적의 기를 눌러놓다
적의 배를 26척이나 격파했지요. 우리 쪽의 피해는 부상자 한 명뿐이었어요. 적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셈이었지요.
한산도 대첩에서 학익진 전법을 쓰다
저는 후퇴하는 척하며 경상남도의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했어요.
그 다음 학이 날개를 편 모양으로 적을 둘러싸 포위했습니다
이른바‘학익진 전술’인데요. 이렇게 적을 포위시켜 놓고 함포로 공격을 했지요.
우선 거북선이 갑자기 공격해 적을 혼란에 빠뜨린 사이, 나머지 배들이 포를 쏘았기 때문에 왜군은 당하기에 바빴어요.
이것은 세계 해전사에도 길이 남을 전법으로 평가받고 있지요. 제 입으로 말하기 좀 부끄럽지만 전 세계의 해군 사관 학교에서 제 전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허허.
2.명량 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두다
경상 우수사인 원균의 패배 이후 제가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을 때 남은 배는 겨우 12척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녀자들에게 강강술래를 시켜서 군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고는 적의 전함을 울돌목(명량)으로 유인했어요.
물살이 빠르고 물길이 좁은데다 곳곳에 암초가 있어 왜군의 배가 많을수록 자기들끼리 부딪혀 공격도, 도망도 쉽지 않을 거라 본 거지요.
이 전투에서 적의 배 133척 중 30여 척을 격파시키며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게 바로 명량 대첩이에요.
3. 노량진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왜군은 조선에서 철수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저는 돌아가는 왜군도 격파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일본군 전함 500여 척과 노량에서 최후의 해전을 벌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하며 최후를 맞이했어요.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