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밝게 더 기쁘게
오늘 복음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일단 시간을 나타내는데 직역을 하면 “안식일 후 첫날”이니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곧 주님의 날, 더 줄여서 말하자면 주일입니다. 이날 새벽에 막달레나는 빈무덤을 보고 제자들에게 전한 다음 제자들도 비어있는 무덤을 봅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그 소식을 전하려하니 이미 시몬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전하는 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일들을 다 겪고서 저녁 8시 즈음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인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만 이 인사말이 세 번 나옵니다. 평상시에 인사하는 샬롬이지만 이때의 의미는 아주 다릅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이기시고 진정한 평화를 누리시는 예수님께서 나누어주시고 인사하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미사 중에 사제는 주님의 기도를 하고 나서 평화의 인사 전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입니다. 욕설과 모욕, 배반과 배신, 수치와 수모, 매질과 가시관, 못박힘과 창찔림, 십자가와 죽음이 가져다주는 모든 것을 참아 받고 이겨내어 담대함과 의연함으로 나누어주시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성령과 이어져 있습니다. 성령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원래 ‘입김, 숨결’이란 뜻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숨을 불어넣으면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그리고 이 성령은 일단 “용서의 성령”입니다. 용서하고 용서 받으며 하나되고 일치되는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다른 보호자, 진리의 영, 성령”(요한 14, 16-19)을 약속하셨고, 오늘 복음에 그 성령의 약속을 다시 확인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약속하신 성령을 실제로 보내시면서 성부, 성자, 성령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저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뚫린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가 새삼 의문스럽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왜 죽음의 흔적이 남았을까... 우리는 연옥에 있는 정화의 불로 죄로 얼룩진 때를 씻고 상처를 치유하여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하여 저 하늘로 오를진데, 예수님의 몸은 왜 못에 뚫린 손과 발, 옆구리의 창자국... 상처를 계속 가지고 있을까... 상처는 죄의 흔적이고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그 상처가 없어야 맞지 않는가... 찾아보니 많은 교부들, 성인들, 순교자들도 이렇게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토마 사도의 불신이 저의 이런 의문을 없애줍니다. 주님의 다섯 상처, 즉 오상은 못 믿는 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손과 발의 못자국,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고 손가락을 넣어보라 하십니다. 의심의 손가락, 의구심이 들어갈 구멍을 비우십니다. 그리고 당신께 대한 믿음으로 오라 하십니다.
이 상처는 더 이상 죄의 흔적,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어찌보면 구원의 훈장과도 같습니다. 신체의 결함이 아니라 영예의 표시이고, 어머니의 손이 쭈글쭈글해도 더없이 거룩한 손, 기도의 손, 키워낸 손이듯이 예수님의 뚫린 손과 발, 옆구리는 우리의 죄를 대신한 상처, 구원을 이룬 아름다운 상처입니다. 이 구멍들은 우리를 믿음으로 부르시는 거룩한 비움입니다.
첫댓글 오상은 못 믿는 이를 위한 것이었음을... 아멘...
담대함과의연함으로
성령의힘을 입고...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