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45장 1절 ~ 46장 12절]
1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에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이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니라 그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2 바룩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3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 4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5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 이방 나라들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 애굽에 관한 것이라 곧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에 유브라데 강 가 갈그미스에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패한 애굽의 왕 바로느고의 군대에 대한 말씀이라 3 너희는 작은 방패와 큰 방패를 예비하고 나가서 싸우라 4 너희 기병이여 말에 안장을 지워 타며 투구를 쓰고 나서며 창을 갈며 갑옷을 입으라 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본즉 그들이 놀라 물러가며 그들의 용사는 패하여 황급히 도망하며 뒤를 돌아보지 아니함은 어찜이냐 두려움이 그들의 사방에 있음이로다 6 발이 빠른 자도 도망하지 못하며 용사도 피하지 못하고 그들이 다 북쪽에서 유브라데 강 가에 넘어지며 엎드러지는도다 7 강의 물이 출렁임 같고 나일 강이 불어남 같은 자가 누구냐 8 애굽은 나일 강이 불어남 같고 강물이 출렁임 같도다 그가 이르되 내가 일어나 땅을 덮어 성읍들과 그 주민을 멸할 것이라 9 말들아 달려라 병거들아 정신 없이 달려라 용사여 나오라 방패 잡은 구스 사람과 붓 사람과 활을 당기는 루딤 사람이여 나올지니라 하거니와 10 그 날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대적에게 원수 갚는 보복일이라 칼이 배부르게 삼키며 그들의 피를 넘치도록 마시리니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북쪽 유브라데 강 가에서 희생제물을 받으실 것임이로다 11 처녀 딸 애굽이여 길르앗으로 올라가서 유향을 취하라 네가 치료를 많이 받아도 효력이 없어 낫지 못하리라 12 네 수치가 나라들에 들렸고 네 부르짖음은 땅에 가득하였나니 용사가 용사에게 걸려 넘어져 둘이 함께 엎드러졌음이라
[설교]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상이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단락인 예레미야 45장에서는 바룩을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둘째 단락인 예레미야 46장에서는 애굽을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룩과 애굽?! 서로 대조되는 대상이죠. 대조된다는 것은 바룩과 애굽이 서로 다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먼저 예레미야 4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바룩에게 말씀하실 때, 주로 ‘구원’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때 바룩은 앞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역 때문에 큰 고통을 호소합니다. 본문 3절,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 여기서 바룩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역을 일컬어 ‘고통’이라고 부릅니다. 왜 고통일까요? 자기 민족에게 닥쳐올 심판을 전한다는 게, 자신에게는 언제나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고통에는 어김없이 슬픔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보통 예레미야를 일컬어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르지만, 바룩도 역시 마찬가지로 ‘눈물의 사람’입니다. 바룩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큰 괴리를 느꼈고, 그 괴리를 눈물로서 승화시킨 사람이죠. 때문에 바룩은 하나님께 늘 탄식하며,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역의 중함에 대하여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바룩을 향하여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본문 4절,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분께 탄식하는 바룩에게 당신의 뜻을 거두기는 불가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한다! 또한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결정한 남 유다의 심판을 결코 무를 수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물론 이때 하나님의 뜻은 결코 매정한 게 아닙니다. 사실상 하나님도 역시 마찬가지로 바룩과 같이 자기 백성을 위하여 늘 탄식하는 분이십니다. 매정하고 자기 백성을 저버리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역시 진정으로 자기 백성이 그분께로 돌아오길 원하시는 분이시지요. 그렇기에 더더욱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저들의 죄에 대하여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진정으로 죄로부터 돌이키도록,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저들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탄식하는 바룩을 향하여 이러한 약속을 주시지요. 본문 5절,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바룩에게 자신의 뜻이 결코 변치 않음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당신 앞에서 애곡하며 탄식하는 바룩에게 이런 약속을 더하시지요.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의 생명을 지키리라!”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바룩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노략물 주듯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어떻게든지 바룩의 생명을 지키시겠다는 강한 어조의 약속입니다. 노략물은 아시다시피 다른 이들에게서 빼앗은 물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노략물처럼 바룩의 생명을 지키시겠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어떻게든지 하나님께서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바룩의 생명을 지키시겠다는 강한 약속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내가 지킨다!’ 이러한 약속을 지금 바룩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바룩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전해진 것이죠.
이와 달리 예레미야 46장의 애굽을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서두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예레미야 45장의 바룩과 46장의 애굽은 서로 대조됩니다. 말하자면 바룩은 앞서 보았듯이, 하나님께서 어떻게든지 ‘내가 너를 지키겠다!’라고 말씀하셨다면, 반대로 애굽은 하나님께서 어떻게든지 ‘내가 너를 심판하겠다!’는 말씀으로 귀결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왜 이토록 공고하게 애굽을 향한 심판을 선고하셨을까? 그 이유에 관해서는 여러 성경이 여러 측면에서 그 이유를 밝혀줍니다. 예를 들어 에스겔 29~32장을 보면 무려 네 장에 걸쳐 애굽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선고됩니다. 거기서 애굽은 한 결 같이 하나님 앞에서 목이 뻣뻣하고 마음이 교만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애굽은 자신이 바벨론보다 더욱 강한 나라라고 여기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요. 이에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선고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교만으로 인하여 반드시 패망할 것이다! 너희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멸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대적하는 원수인 애굽을 기어코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바룩과 애굽, 결국 둘은 이처럼 서로 확연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뜻에 합당하게, 자기 백성을 위하여 탄식하는 바룩을 끝내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뜻에 어긋나게, 늘 하나님 앞에서 목을 꼿꼿이 세우는 애굽을 어떻게든지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처럼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단코 우리 인간의 의지처럼 애매모호하지 않습니다. 확실합니다. 그러니 이처럼 단순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과연 어느 편에 서야 할까요? 바룩과 애굽, 우리는 둘 중 언제나 한 자리에만 서야 합니다. 애매모호하게 중간에 걸쳐 있다간, 정말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우리는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로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분명히 나타내실 때, 그 뜻이 설령 내 마음을 불편케 하는 말씀이라도, 우리는 꼭 그 뜻을 좇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곧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이죠. 이러한 교훈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오늘 하루도 언제나 주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시는 복된 성도님들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