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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음악보국’·‘화필보국’ 선전
1) 싸우는 반도문화 소식 -무용, 음악
무용
반도에서 무용의 빈곤은 서술할 것도 없다.
다만 조택원의 선천전인 미모가 오직 반도에서 양무(洋舞)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할 만한 시사해주는 듯한 신작이 나오지도 않았다.
조는 정직하면서 열심인데 조택원무용단의 춘향전 등은 그 해석에 있어서 유연하고 종래 춘향전의 근저에 흐르는 정숙한 여인의 길이, 조금도 운율적 세계관 위에서 잘려지지 않았고, 편곡 등에서도 무척 신선함은없었다. 의
상은 연극적인 색채를 띠었는데 조명의 저열함 때문인지 그 색채의 율동은 무척 부자연스러웠다.
다만 마지막 장면에 진수방의 춘향과 조택원과의 춤만이 인상에 남을 정도이다.
최승희는 오랫동안 예술무용공연으로 선배들 신인 조용자 무용 발표회를 열었던 것은 그 성과는 어땠든지 하나의 수확임에 틀림없다.
나는 그녀가 걸어 온 길을 모르지만 타고난 체격은 새로운 반도의 무용계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전체적으로 산만하고 곡목의 지완, 의상에 대한 해석과 근본적인 안무의 미숙함이 처음 발표회로서는 관객 동원이 뛰어난 기획에 비해 두드러지지 못한 감.
오직 제봉체조무용, 동양의 기도에서 아름다운 무용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조용자 자신이 반도인으로반도인 자신의 생활 전통을 봄에 익숙하지 않은 듯한 슬픈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녀의 이후의 분기를 기대함이 크다.
음악
반도 악단에서 활발한 활약을 거듭해온 후생안단이 지난 번 일만(日滿)음악교류를 목적으로 그 단체의 이유성, 김생려 등 신예 제군이 용약 신경을 향해 출발했다. 언제라도 그들의 열렬한 노력에는 경의를 표한다.
그들의 공백은 현제명씨가 인수해 새로운 후생악단의 전통을 유지할 것이라 한다.
여류시인을 주재로 한 김명수가 조선희망음악연구소를 만들어 4월 3일 진무천황제를 예정하고 백의용사유가족위안회를 개최했다.
취지는 물론 가상하지만 묵묵하게 총후를 지키는 유가족에게 어떠한 희망의 노래를 보낸다는 것인가? 잡지 '여류시인'과 같은 것으로 되지 않을 것이다.
변함없이 악극은 진부하고 라미라, 반도악극단 등의 저조함은 어떻게 예능결전비상조치에 즉응시킬것인가?
지금이야말로 분기해야 할 것이다.
윤기선군의 피아노 독주회가 있었는데, 그 공부는 부족한 감. 곡목에 대한 태도도 한편 탈피해 공개적으로 발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출전 : 「戰ふ半島文化消息- 音樂」, '文化朝鮮' 1944년 12월호, 43쪽>
2) 계정식(桂貞植)
(1) 신동아음악의 건설, 대동양적 이상을 표현하여
동아신질서 건설의 날로 진행되고 시간이 경과할수록 신동아건설의 기초가 견고하여 감을 절실히 느끼게 되는 바이다. 서양의 세계는 서양인이 지배하고 동양의 세계는 동양인이 지배해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음악예술 방면에 있어서도 새로운 기초 위에서 신동아의 창조력이 점점 나올 시기가 왔다고 느껴진다.
신음악을 건설함에는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감정, 새로운 논리적 견지에서 출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지난 과거에 모든 것을 매진하여 일편으로는 정리하는 동시에 또 다른 일편으로는 신동아건설에 어떤 것이 참고가 되겠으며 어떤 음이 실천적으로 응용되려는가 하는 모든 문제가 우리들에게 짐이 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예로부터 중국 음악은 우리 극동국에 기초가 되어서 이론및 실제 음악의 대다수가 지나에서 건너온 것만은 누구나 조선음악에 관심한 분은 잘 알 것이다.
지나의 악기와 이론은 우리가 받아들이었지만은 음악 자체에 있어서는 천 여 년 동안 우리 감정에 소홀하여 흘러나온 까닭에 결국 조선음악이 되었고 내지음악은 그곳 정서의 산물이 됨에 틀림없다.
동일한 음악이론 및 음악관을 가지고도 각각 그 감정 표출에 있어서는 상이한 점을 곡의 선법과 연주 자체로 발견할 수 있으며 우리들이 역시 각각 다른 것을 느끼는 바이다.
(중략)
이런 의미에서 신동아건설이 날로 가까워 오고 교통이 번잡하여지고 문화적 교섭이 전보다 가속도로 진행되는 이때에 불원간에 신동아정신을 발휘하는 음악이 나오리라는 것은 누구나 감지하고 있을줄로 생각한다.
이 음악이야말로 내지인이나 반도인이나 중국민족에게가 구별 없이 느껴질 음악이라야할 것이다.
구주의 음악에 있어서는 독일 사람이 이태리 음악을 아무 큰 노력 없이 고심하고 느끼는 것과 같이신동아음악에 있어서도 동양인으로 누구나 대동아의 음악을 음미할 수 있게 되는 음악예술이 장래할것이라고 생각하며 이것이 이 시대에 요구되는 음악예술이라 생각한다.
이 신음악이 출현하려면 순 동양음악 이론만으로 고집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선진 서양 각국의 음악을 연구하는 동시에 동양음악 즉 인도음악, 페르시아 음악, 아라비아 음악, 남양제도의 제국의 고유한 음악을 참고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비교음악학으로 유명한 에리히 폰 호른보스텔씨는 우리 연구에 한 암시를 준다고 생각한다.
우리 동양인으로 서양인이 동양에 나와서 정치적으로 실권을 잡고 협박하는 것은 절대로 배척하지만 그들의 문화는 배척하여서는 아니 되겠다.
가급적 다방면에 유의하여 많이 배워가지고 새것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될 현상에 있다.
그럼으로 맹목적 배타주의가 아니고 지적 지배하에 모든 것을 처리함이 가장 좋은 성과를 가져올 것이다.
대동아음악으로 세계 수준에 올려놓으려면 체코의 대표적 작가인 안톤 드보르작과 같은 유명한 음악가가 나와야 하겠다. 이 작가의 모든 작품 중에 체코슬로바키아의 독특한 선율 및 절주가 나오지 않는 곳이 별로 없다.
여기에는 범위 좁게 자기의 지방색채에만 한하지 않고 전 슬라브 민족의 음악을대표하여 자기 작품으로 전 세계에 소개한 것이다.
1878년에 드보르작은 네 손을 위한 피아노곡 즉 슬라브 무곡으로 슬라브 민족의 큰 이상적 건설을 암시하였다.
금일에 와서도 슬라브 민족의 기질 및 정신의 대표작임을 인정한다. 이와 같은 작가가 조선에서 갈망되며 또 이 시기가 요구하고 있다.
즉 신동아를 건설하고 있는 동양민족의 독특한 선율과 절주를 동양의 정신으로 짜내려고 빚어낸 작품을 우리는 요구하며 또는 우리 자체에 느끼고 있다.
물론 동양적이라고 해서 동양악기를 그대로 사용하자는의미는 아니다.
서양음악이론 기초 위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과학적으로 된 서양음악을 사용하되 동양의 정서를 강하게 표출하기 위하여서는 동양악기를 쓸 수 있도록 작곡하면 미래에 발전성 있는 동양적음악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프란츠 리스트의 명작 헝가리랩소디는 순 헝가리 음악으로 작곡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성공하였다.
독일사람 브람스가 헝가리 무곡 작곡으로 맨 날 헝가리 고유 선율을 시대화하고 예술화하였기 때문에 그 가치가 일층 더 높이 평가되었다. 오늘 현시대에서도 대동양적인 이 시대의 정신과 이 환경의 산물이라야 현대인이 요구하는 요구를 만족시킬 것이며 신동아를 한데 뭉치는 예술적 건설의 완성이라야 튼튼한 것을 기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출전 : 桂貞植, 「新東亞音樂의 建設, 大東洋的理想을 表現하여」, '매일신보', 1940년 7월 7일>
(2) 음악보국의 의의
신체제 하에서 문화영역의 제 운동은 바야흐로 그 조직이 착착 진행되어 조선음악협회도 당국 지도하에서 벌써 결성된 지가 수월이 되었다. 우리 음악에 관계하는 사람들이 종래의 자유주의에 입각한 예술지상주의의 껍질을 벗어나서 어떻게 하면 우리의 조직을 합리적으로 하며 어떻게 하면 우리의 직능을 발휘하므로 말미암아 고도 국민문화 수립에 공헌할 수 있을까 하는 국민적 자각이야말로 이 협회에 결성을 촉진함에 이른 소이이다. 구체제에 있어서는 음악가는 음악가, 민중은 민중, 정치가는 정치로써 각각 방만 상태에 처하여 있었으나 고도국방국가를 목표로 하며 세계의 신질서에 의한 공영권 건설을 위한 국가로서는 보다 높은 문화를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알리어졌다.
즉 나치독일과 같은 정치와 문화의 융합일치라는 사실이 고도국방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하면 국민생활에서 떠난 문화는 참된 문화가 아니며 국민문화와 관계없이 정치는 또한 정치로서 기능이 활발치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것은 이 시대의 소리요, 세계의 부르짖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으로써 우리나라에서도 음악가는 정치와 문화에 대하여 요청하는 바에 응하여 국민 문화의 향상을 이념으로 하고서 그 사명을 다하는 곳에서 비로소 음악의 가치를 인정하게끔 되었다.
과거와 같이 순수한 예술을 즐긴다든지 이른바 예술을 위한 예술은 제 아무리 좋다고 하나 하등의 의의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체제에서의 조선음악협회의 음악보국운동은 연주회의 외양은 비록 종래와 별반 다름이 없을지언정 그 이념과 목표에 있어서 스스로 상이 되는 점이 내재하여 있다는 것을 나는 언명한다.
금번에 음악보국주간을설정하고 3일을통하여 조선음악과 방악과 양악을 연주하되 양악에있어서는 주간과 야간을 각각 작곡발표회와 명곡 연주의 2부로 나누어 종래에 보기 드문 대 연주를 준비 중이다.
물론 음악문화라는 것은 음악을 일로 삼는 작곡가나 연주가 혹은 어느 특정한 인간이 전유할 것이 아니고 작곡가나 연주자나 자기의 소화, 흡수하는 음악을 국민 일반에게 보급, 감상시킴으로써 일어나고 문화운동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그 직능을 다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일반 민중은 □□□하 감상자가 되어서 음악을 수용하여 자기의 양식을 만들고 자기의 정신적 가열을 일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반도의 국민 일반이 총력연맹운동에 참가하여 지지자가 된 것과 같이 이 문화운동에도 참가하여 고도의 문화소유자가 되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이 의무야말로 고도 국방국가의 일원으로서의 의무이다.
요약하면 음악실천운동은 다른 것이 아니고 국가의 지도정신에 입각하여서의 국민에게 일으키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조선음악이라든지 방악이라든지 양악이라든지가 모두 우리의 감정에 호소되는 바의 음악이다.
특히 국민음악의 수립이 □□□되는 금일에 있어서 양악은 외형은 양악이나 실제에 있어서 현대인의 감정생활에서 떠나지 못할 중요한 지위를 점령하고 있다.
우리 악단에 있어서는 이미 작곡의 세계에서 연구 정진을 거듭하고 있는 이가 손을 꼽고 남음에 이르렀다.
이 작곡가의 존재야말로 명일의 국민음악 수립을 위한 귀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금번 작곡연주회는 국민음악수립운동의 제1보의 의의가 내재하였다고 나는생각한다.
동일 주간의 연주는 비록 외국 유명한 작가들의 명곡이나 이것은 외국작가라 하며 배척할수 없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보다 높은 고□한 음악, 가장 우위의 음악의 이해와 감상이있고서야 음악문화의 향상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야말로 □□□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과거의 우수한 음악의 감상이 없이 돌발하는 동작은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베토벤 음악이라든지 하이든의 음악이라든지 혹은 바그너류의 음악이라든지 비록 누구의 음악이라도 우수한 음악은 우리에게 많은 음악적 인상과 예술적 감명을 주어 따라서 위대한 교훈과 자극을 받음으로써 도의적인 국민적인 도야도 있으리라 믿는다.
주간의 연주라든지 야간의 작곡발표회의 곡목이나 출연자들이 모두 협회원인 사계의 권위 제씨의 명창 역연임은 물론하고 300여 명에 가까운 대합창단의 출연이야말로 대경성의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일일 것이다.
경성음악전문, 이화여전, 세전여자사범의 작 전문 중등학교 학생과 음악협회 합창단을 총 망라한 음악 총동원의 대연창이 양악부장 히라마 분주(平間文壽) 씨의 지휘 하에서 있을 것이다.
젊음이들의 우렁차고 씩씩한 노래가 경성 창공에 높이 울릴 그 정황은 이 문화운동의 참된 지지자가 되기를 기하고 총동원하여서 참가하여 새로운 출발이 힘차게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출전 : 桂貞植, 「‘音樂報國’의 意義」, '매일신보', 1941년 6월 5일>
(3) 국민학교의 음감교육 문제
얼마 전에 문부성 안으로 결정 발표되어서 국민학교에서 현재 채용하려고 하는 음명(音名)창법은 음악교육자간에 이미 수년전부터 논의된 문제요 식자간에는 이미 음명창법의 필요를 느끼고 있는지 오랜과제이다.
때마침 신체제의 새 옷을 입고 일어나는 국민학교에서 창가교육을 청각훈련을 근본적으로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음명창법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문자가 지시하는 바와 같이 음명으로노래를 부른다는 말이다.
종래에 있어서는 우리가 과거에 있어서 학습한 방법과 같이 이동식 계명을 사용하여 도레미파솔라시도를 각조성(各調性)에 이동시켜가면서 노래 불렀다. 이와 같이 하기를 서양음악학습 초창기부터 변함없이 계속하여 왔기 때문에 어떤 악기의 음을 들을 때에 그 음으로 무슨 음인지 지적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이동식 계명으로 음과 음과의 거리를 추정하여 가면서 음악을 배우기 때문이다.
즉 일정한 악기로서 고정한 한 음을 안 후에라야 해당 음과 다른음과의 관계를 미루어서 알게 된다.
이러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이른바 음악가로서는 일정한 음 하나를 자유자재로 낼 수도 없으며 음에 대한 절대음감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지냈다. 어떤 한 음이 들릴 때 이것이 무슨 음에 해당하는지 아는 것을 이것을 절대음감이라고 한다. 이 절대음감 교육은 독일서는 음악교육이 있을 때부터 실행되고 있었다.
현금에 이르러 시행하는 음명창법이란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이 절대음감을 교육하자는 것이다. 반도에 서양음악이 들어온 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으나 아직도 유명한 작곡가 연주가 지휘가가 배출하지 못한 것이 이 음감교육에 결함이 있는 까닭이라고 본다.
음감 교육이니 음명창법이니 청각훈련이니 하며 음악교육에 신체제로서 창도되는 바는 음악 자체에 미치는 바 영향도 물론 다대하거니와 국방상 산업상으로 볼 때에 음의 고저의 기억이라든지 음의 강약의 판단, 음색의 분별 등은 황국신민으로서 반드시 소지하여야 할 것이다. 독일 같은 데서는 벌써 어릴때부터의 음감교육에 의한 청각훈련이 국민 전체에게 보급되어 있기 때문에 국민 거개가 절대음감 관심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생리적으로 음에 대한 감각이 둔한 사람도 없지 않으나 다수가 음을 기억하고 있어서 자기가 조종하는 비행기라든지 전차라든지의 음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벌써 음의 차이가 있으면 사전에 고장을 발견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알면 이 음감 교육을 이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만시지탄이 없지 않으나 우리는 예술의 창조를 위하여서 뿐만 아니라 국방상으로나 산업 상으로 더욱 필요하다.
그런 고로 아동은 물론 생도 학생 성인에 이르기까지 이 점에 유의하여 교육자는 아동생도의 중대한 이 사명을 맡은 이 만큼 황국신민으로서의 정서교육에만 유의할 뿐 아니라 불가결한 국민 청각훈련을위한 음명창법을 연구하여 하루 바삐 시행함이 급무라고 생각한다. 이제 그 실행방법의 대략을 소개하여 두겠다.
음의 고저를 자유자재로 듣고 알아낼 수 있으면 이것을 절대음감의 소유자라고 한다.
이것은 어린애 5, 6세부터 훈련할 수 있는 것인데 장성하여서는 소유하기가 어린애보다는 힘든다. 그 방법에 있어서
독일에서는 벌써부터 악기의 음명으로는 ‘아베체데’가 있고, 성악의 음명으로는 아이츠 박사의 명발명인 합리적인 ‘비토구수라휘니비’가 있다. 일본에서는 ‘하니호헤토이로’로 벌써부터 정해져 있지마는 이동식 ‘도레미’ 창법을 쓰기 때문에 이 음명의 존재가 지금까지 박약했고, 교육 상 많은 결함을 가진 한이동식 ‘도레미’에 너무도 꽉 박혀져서 나올 수가 없었다. 앞으로는 이동식 도레미를 버리고 부동식 ‘하니호헤토’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도레미의 시원이 이태리에 있느니 만치 그 명칭을 그대로 갖다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앞으로 국민학교를 위시하여 각 중학 전문까지 부동식 ‘하니호헤토’로 배우게 하여서 생도에게 절대음감을 교육치 않으면 음악 발표에도 큰 지장이 있으리라고 믿는다. # 및 b은 영변(嬰變)이 있으므로D장조 음계를 노래할 때에는 ‘니호에이헤토이로에이하니’와 같이 부를 수가 있다. 헤(F) 장조 음계 시는‘헤토이헤소로하니호헤’로 노래할 수가 있다.
이것은 독일서 악기명 쓰는 # ‘치쓰’, ‘띠쓰’, ‘에이쓰’ 이와 같은 것보다 더 어렵지 않다.
영어 음명에는 #(샵), b(플렛)이라는 단어가 쫓아오기 때문에 ‘이로하니’ 보다 퍽 어렵고 조금이라도 속도가 빨라지면 단어 흉내도 낼 수 없다.
‘하니호헤토’는 외국 음명보다 실제적으로 보아서 떨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 확정한 인명이 있어서 이름만 부르면 그 사람의 용모를 그리지 않고도 생각해 보지 않고도 즉시로 아는 것과 같이 음명에 있어서도 한 번 정한 다음 그 음의고저는 음명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라는 음은 악기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을것이 아니고 1859년 파리국제음률협정회에서 정한 1초의 435진동수 표준의 조율된 악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는 피아노를 정확하게 조율해 두어야 할 것이다.
절대음감의 연습은 음악을 시작하는 첫 시간부터 시작하여야 될 것이다. 어린아이가 어머니한테 말을 배우는 것 같이 어린애에게 ‘하’음을 내주면서 이 음은 ‘하’음이다.
이 ‘하’음을 매일, 여러 번씩 들려주면서 이것을 몇 달 동안 계속할 것이다.
악기로서는 피아노나 오르간이 가장 유리하다.
이와 같이 오랫동안 5, 6세 된 아해에게 ‘하’음을 들려주면 애기가 ‘아버지하고’ 부르며 기억하는 것과 같이 제일 첫음 ‘하’음을 따로 외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되면 점점 다른 음표를 기억하게 하여 우선 피아노의 백건반을 다 외게 하고 다음으로 흑건반을 훈련시킨 후에는 주(主) 3화음, 부(副) 3화음을 연습시키면 유효하다.
피아노 건반상의 음이 전부 자기의 소유가 된 후에는 다른 악기 바이올린이나 첼로나 취주악기 호른과 같은 악기도 들을 수가 있다. 학습시대에서 뿐만 아니라 완성된 후에라도 무슨 음에 대하여서나주의를 시켜야 된다. 즉 초인종 소리가 울릴 때에 그 음이 음악상으로 어떤 음에 해당할지 생각해 보고 실험해 보아야 하겠다.
자동차의 경적이나 정오의 사이렌 음 같은 것이 어떤 음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독일의 후기 로만악파(낭만파) 음악가 슈만은 이와 같이 말했다. 컵을 쳐서 울려나오는 소리까지 무슨음인지 알려고 노력하라고 했다.
음악가로서 절대음감을 소유하고 자유자재로 식별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귀중한 일일까? 악성 베토벤이 관현악에 ‘팔리루-어르’이나 합창의 ‘팔리루-어르’만 보아도 곡 전체가 귀에 들린다든가 작곡하면서 악기 없이 완전히 들린다고 한 것이 절대음감으로써 의식한다는 말이다. 절대음감이 없는 지휘자는 불구자적 지휘자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것이 없는 지휘자가 수많은 멤버 중에서 약간의 음이 맞지 않는때 정당한 음으로 여하히 교정할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다른 것은 아니고 그들은 어려서부터 이동식 계명으로 노래를 부르지 않은 것이 큰 원인이 되겠다.
음명으로 노래를 부르는 동시에 그 음의 고저를 잘 기억하여 버렸다.
또 그들의 음악 교수자들은 생도들에게 음에 대한 자극과 지도를 끊임없이 계속해 준 까닭으로 어린 생도들이 속히 습득하고 말았다.
유능한 음악가가 많이 나오고 아니 나오는 것은 창가 교수자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동에게 음악 소질이 있더라도 이것을 깨워 일으켜주는 사람이 없다면 실력 있는 음악가가 현출할 이유가 만무하다. 절대음감을 가진 음악가는 무슨 곡이든지 미리 연습 없이 한번 보고도 연창할 수가 있다.
왜 그런고 하면 음의 거리를 계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현악하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점은 높은 위치에 있는 음을 하등의 곤란이 없이 자신 있게 찾을 수가 있다.
그리고 피아노나 다른 기악 하는 사람들이라도 절대음감이 있으면 곡을 암기하기가 퍽 쉽다.
시간적으로 보든지 노력적으로 보든지 능률을 낼 수가 많다. 선천적으로 음악의 소질이 많은 사람들이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이것이 재질과 병행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어린애들만 배울 것이 아니고 성장한 사람도 습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남독일 뷜츠부르그에 있는 국립음악학교 교수 한스 쉰들러씨의 부인은 음악가가 아니었고 여의사이다.
쉰들러 교수는 매일과 같이 자기 아내에게 피아노 화음을 들려주었다 화음을 . 치고는 묻는 말이 이 화음이 무슨 조성이냐 물어 보았다.
물론 처음에는 음악가 아닌 여의사가 맞힐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몇 해를 거듭하여 계속한 결과 그 부인은 모든 화음을 지적하는 동시에 자동차의 경적까지 무슨 음인지 알 수가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예를 실례로 보면 성장한 사람도 습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쉰들러 교수는 자기가 피아노에 앉아서 화음을 치고는 무슨 조성이냐고 물어본다. 그 뿐만 아니라 적은 멜로디를 여러 차례 들려주고는 생도들에게 전부 쓰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연습은 각음의 식별뿐만 아니라 한 묶임성 있는 곡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양성시키는 좋은 훈련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음악교수법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음악의 천년지계를 세우려면 구식창법이나 청음법을 완전히 버리고 유명한 음악가를 수많이 낸 선진국과 같이 절대음감교육을 하루바삐 시행하여 건실하고 유능한 세계적 음악가를 내는 한편, 일석이조로 청각훈련의 결함이 없는 황국신민을 양성함에 착안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출전 : 桂貞植, 「國民學校의 音感敎育問題」, '朝光' 1941년 7월호, 85~88쪽>
(4) 대중의 건전오락 희구, 다채한 11~12월 중의 음악회
지난 가을과 같이 음악적 활동이 왕성하였음은 반도 악단으로서는 미증유의 일이었다.
또한 그만큼일반이 지지하여 항상 만원의 불평을 사게 한 때도 처음일 것이다. 좀 더 오락적인 해석하기 쉬운 모임에는 항상 부민관 앞이 장사진을 이루었으나 언제나 음악회에는 그만하지는 못하였는데 이즈음의 음악회에는 광화문통 네거리까지 장사진을 쳤다가 쓸쓸히 돌아가는 사람이 수백 명인 때가 많았다.
물론 여기에는 어디까지 원인이 내재하여 있을 것이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총후의 국민이 얼마나 건전한 오락을 가지려고 요구하고 있는가, 씩씩하고 청신한 그리고 또 평화하며 때로는 사기를 돋우어주는 음악이 총후의 멸사봉공에서 하루의 위로를 주는데 얼마나 가치 있다는 것을 자각하였는가를 알 수 있으며 음악 하는 사람들도 직역봉공의 대강령 앞에서 총후의 사명을 다하겠다는 의기를 보여준 것도 반가운 일이다.
이러한 모임이 한 번, 두 번 거듭하여 한 번 두 번 청중이 음악 가운데서 참으로 숨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이는 두 말 없이 그 건전한 음악을 청중이 수용하였으며 이 쪽에서 말하면 보급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지난 가을의 음악회 내용을 일별하면 대체로 별로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있으나 그 의의에 있어서 특수한 것이 수회 있었다는 것이 우리의 주의를 환기한다. 악성을 추억하는 모차르트의 기념음악인 ‘소나타의 밤’이라든가 대화숙(大和塾) 주최의 국민음악의 밤이라든가 반도 악단 건설의 공로자에게 바치는 사은음악회 등은 올 가을의 성사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박태현(朴泰鉉) 씨 지휘의 경성취주악단의 탄생은 실로 시국을 인식한 쾌사이다.
그러나 벌써부터라도 이러한 단체가 있어야 하였을 것이며 또한 한 번 울림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앞으로 앞으로 애국의 행진을 할 의기를 돋우어 사기를 배양하며 군국정신을 진흥케 할 대관현악이 필요한 중에서도 더욱 더 절실히 요구되는 이 시국이다.
그러나 병참기지인 대경성이지만 그런 음악을 일반에게 들려 줄 기관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우선 참괴를 느끼는 바이다. 유감스러우나마 작추에 열린 음악회는 보다 더 시국적인 색채는 못띠었으나 건전한 음악의 향상 보급이라는 의의에서는 벗어남이 없으리라고 하는 자신이 일종의 자위를준다.
11월 5일 필자와 김원복(金元福) 여사 공연인 ‘주명곡(奏鳴曲)의 밤’은 맹방 독일이 낳은 위대한 악성 모차르트 사후 백오십년제를 기념키 위하여 모차르트 소나타만 연주하였다. 물론 소나타 곡만을순서로 한 음악회는 첫 시험인 만큼 좀 모험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모차르트곡이니만큼 명랑성이 청중을 그다지 지루하게 하지는 않았을 터이나 소나타라는 곡 자체의 형식이 결코 듣기 쉬운 곡 즉 이해하기 쉬운 곡도 아니며 소곡들과 같이 달콤한 효과적인 매력을 요구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연주에,모험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많은 순서의 편성된 음악회와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하여 준데 대하여 사의를 표하는 동시에 건전한 음악향상의 걸음을 게을리 말 것과 청중의 이해에 일종의 희망과 환희를 느끼게 된다.
<출전 : 桂貞植, 「大衆의 健全娛樂希求, 多彩한 11, 12月中의 音樂會」, '朝光' 1942년 2월호, 78~79쪽>
(5) 가정과 음악
가정이라는 곳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니고 집합된 형식 내에서 살고 있으니만치 그곳에는 가정인들의 조화가 있어야 될 것이고 다음으로는 서로 서로가 양보하며 이해해 주어야 원만한 가정생활을 이룰 수 있다.
부부생활이 가정에서 어린 자녀들로 말미암아 일층 더 친근해지고 결합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생활에 있어서 드믄 가족을 조화시키고 융화시키는 데는 가정음악이 위대한 힘을 가졌다고 하지않을 수 없다.
우리들의 가정 내에는 어른과 아이들 사이에 서로서로 주고 받고 하는 정서생활에 가장 중요성을 띤 가정음악이 성(盛)치 못함을 큰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대저 음악이라면 우리들은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기악가나 성악가만이 하는 줄로 인정하는 영향이 않지 않은 모양이다. 음악은 누구나 다 학습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구속이 없는 예술이다.
전문가에게만 의뢰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음악을 못하니까 축음기와 레코드를 많이 사서 세계적 명곡이나 유행가를 듣는 것이 제일 좋은 것으로 알고 위로를 받고 있다. 물론 기계를 통하여 나오는 레코드 음악으로도 재미를 많이 보며 음악적 상식을 넓힐 수도 있지만 레코드 음악은 언제나 기계음악에서 지나지못할 것이다.
아무리 기계가 앞으로 발달되더라도 실연을 따를 수가 없다. 그리고 축음기가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음색은 불완전한 음색이요, 우리의 청각을 속인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가령 간단한 실례를 들어 말한다면 피아노 음악을 축음기에서 들을 때에 피아노 본질적 음이 나오지 못하고 고장 난 피아노처럼 응앙웅앙하는 각(各)음을 듣게 된다. 귀가 어느 정도로 예민한 사람은 저것이 피아노 소리인가하고 의심한다.
할 수 없는 형편시에는 부득불 듣는 것이 기계음악의 목적이 되겠으나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레코드 음악만으로 만족한다면 음악 감상력을 향상시킬 수 없을 것이다. 구라파 각국을 조영(祖寧)해보면 가정음악이라는 것이 매우 보급발전이 되어서 집집마다 밤이나 일요일 휴일 시에는 가정적안락과 하모니를 음악으로 꾸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곳은 우리나라와 같이 레코드 음악이보급되어 있지 않다.
이유는 자기 자신들이 잘하거나 못하거나 음악을 하기 때문이다.
레코드 연주가 제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잘하고 재미나게 한다고밖에 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반면 자신이 음악을 실연할 때에 그 얼마나 미적 감정을 배양시키며 심정을 강장케 하는가! 예를 들면 애국행진곡을 자기가 부르지 않고 타인들이 연창하는 것을 들을 때와 자기가 열심히 부를 때의 느끼는 바는 전혀 다를 것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이 부를 때에는 도취와 감격을 금치 못할 것이다.
옛날 스파르타인들은 벌써 음악의 효과를 잘 알고 많이 장려했다. 조국을 사랑하는 정열은 음악으로부터 온다고했다.
물론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도저히 되지 않을 것을 알고 실제로 각각 개인의 실연으로 힘 있는 국민을 양성했다고 한다. 건실한 음악을 각 개인이 항상 실연하면 고상한 자존심이 발전될 것이고 비겁하고 노예적인 생각이 없어질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당국에서도 센티멘털한 연약한 음악을 금지하려고 건전오락 음악을 장려시키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가정 음악을 실시할 수가 있는가 하면 먼저 가정의 주인이 되는 이가 굳은 의지의 소유자라야만 될 것이다.
자식에게 음악을 배우게 하려면 아버지나 어머니가 다소 음악을 알아야만 격려할 수도 있고 지시할 수도 있다. 음악에 취미가진 부모는 연령여하를 불문하고 개인교수를 받아서 음악지식과 기술을 어느 정도까지 연습해 놓아야 할 것이다.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음악 전문가 아닌 아마추어가 개인교수를 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전문가 되기 위한 공부도 아니고 다만 자기 자신 취미가 있어서 또는 생활을 좀 더 미화시키기 위하여 연령이 사십 내지 오십 된 사람들까지도 배우고 있다.
독일은 특히 개인 교수가 심히 발달된 나라로 유명하다.
그 민족의 특징의 하나는 무엇이든지 지도자의 지시 하에서 공부하겠다는 정신이 강한 점이다.
그것은 그네들 자기 맘대로 허투로 장난을 하며 배우지 않았던 것보다도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그 이상 손해는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선생의 말 잘 듣는 사람이 공부 잘하는 사람이고 속히 진보할 사람이니까! 독일 민족의 특수성이 여기 있고 탁월한 인물이 많음도 여기에 있다.
배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나이가 많은 사람보다 적은 사람에게 배우는 것은 수치가 결코 아니라고 부르짖는 것은 벌써 옛날 독일 문호 쉴레르(쉴러?)의 명언이었다.
‘불치불문(不恥不問)’이란 공자의 말씀도 있는 것과 같이 가정악기로 좋은 것은 피아노, 오르간, 기타,만돌린, 그 외 무슨 악기든지 좋다. 다만 한 개의 목관이나 금관이라도 가정의 유익한 역할이 되겠다.
현악기 외에는 고정한 음정을 낼 수가 있으므로 음의 거리를 측량하는데 불가결한 악기들이다.
음악은 문학이나 미술과 달라서 자습으로는 성과를 낼 수 없고 오히려 전에 말한 바와 같이 불량한 습관만 남아 있게 되는 수가 많다.
음악을 단기일에 잘 해보려고 하면 결코 되지 않을 것이다 가정 내에서 음악으로 인한 평화와 안락이 늘 있기를 바란다면 장기건설적으로 음악 선생의 지도를 받아야 하겠다.
장기건설이 말로는 쉽지만은 실제에 있어서는 매우 힘든 일이다. 장기건설은 정신적 지구전이다.
이와 같은 정신적 지구전이 계속되어야만 가정 내 아름다운 음악, 창조적 음악, 대동아의 음악이 빚어 나올 것이다.
결국 가정음악이 철저히 보급되어 가정 내가 화기유색하게 지내는 것이 선량한 국민의 생활이라고할 수 있다.
선량한 국민생활이라는 것이 일본문화 수준을 높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본 문화를 광채있게 하는 것이 국민의 책임이다.
백 만 인구가 훨씬 넘는 대 경성에 밤이 되면 이곳저곳 가정에서 합창과 독창이 피아노와 바이올린소리가 나와야 될 터인데 듣기가 퍽 희귀함을 보아 반도인의 문화생활이 너무 무미건조하지 않은가 생각된다.
부모 된 사람은 어린 자식들과 같이 노래하며 즐겨 놀 것이고 자식 된 자들은 부모와 같이 음악을 통하여 서로 사랑하고 화락하여야 할 것이다. 음악은 가정 내에 슬픔을 위로하고 쾌락을 같이 하는 귀중한 역할을 하는 필수품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음악 배울 기회를 주어야겠고 자식 된 사람은 음악으로 부모 은덕을 보답하여야 원만할 것이다.
모처럼 배운 자식의 음악을 부모로서 감상할 수 있어야 하겠고 노력의 가치와 연주의 성과를 칭찬하여 줄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명예욕이나 야심을 자식에게 두고 비인도적 교육을 시키는 것은 인간이 할 소행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음악은 본래 감정의 언어이므로 지적 언어가 그치고 표현 부족을 느낄 때에 음악은 시작되느니 만큼 음악의 시작이 인간과 인간이 서로 서로 감정을 통하자는 의미에서 발생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가정생활이 지적 생활보다 기분과 감정의 행동이 많음에 비추어 음악이라는 것이 가정에 얼마나 적합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효과에 있어서 지극하다는 것을 우리가 각성해야겠다.
<출전 : 桂貞植, 「家庭과 音樂」, '朝光' 1942년 10월호, 128~130쪽>
(6) 음악경연회를 앞두고
금 10일 및 11일에 예선이 박도한 조선음악협회 주최인 음악경연회의 존재는 경연자에게나 일반 호악가 제씨의 경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음악협회가 당국의 지령 하에 설립된 이래 가장 중대하고 가장 의미가 깊은 평소 중의 하나이다.
근래에는 종래의 경연회에서 보던 제금, 피아노, 성악 이외에 음감경기라는 것이 있어 이 부분을 합한 4종목의 경연회라는 것은 금년이 처음인 것이다.
대개 음악의 생명이라는 것이 양호한 연주에 있는 것은 부인치 못할 사실이다. 아무리 악성 모차르트의 곡이 좋다하더라도 악보만으로는 아직 음악이 아니고 생명이 없다. 기록된 악보가 실연으로서 표현될 때에 그곳에 음악예술성을 느낄 수도 있고 맛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최량의 연주는 음악의 최고 청화라고 할 수 있다.
음악경연회의 □□는 연주자의 힘으로 총후 국민에게 가장 위로를 줄 수 있고 가장 힘찬 생명을 부어 넣을 수 있는 힘차고도 고상한 음악가를 만드는데 있고 우수한 음악을 □□하는데 있다고 본다.
금년 지정곡은 전에 보지 못하던 난곡으로 각 부분을 통하여 수준이 훨씬 높은 것은 벌써 신문지상이나 과제곡 발표로 알게 될 줄 안다.
그 이유는 조선악계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선택된 것이고둘째는 제도와 보조를 같이하여 도쿄 악단에서 인정받을 자격을 양성시키려고 한 것이다.
셋째는 난곡인 지정곡을 마스터하여 입선됨으로써 일반 사회가 인정하고 음악가라고 불릴 자격을 주기 위함이다.
물론 1등의 상을 받는다는 것은 지원자 중 제일 양호한 자에게 수여될 것이 결코 아니고 음악가의 격을잃지 않고 자격이 충분하다는 자에게 수여될 것이다.
우리 일본서 최초로 실시하는 음감경기는 외국서는 예를 볼 수 없는 음악사업인 만치 국방상으로나 산업 상으로나 청각훈련이 얼마나 필요하다는 것을 일반은 확실히 인정하여 줄줄 안다.
따라서 그 효과가 막대할 것을 확신한다.
끝으로 경연자들에게 충고하고 싶은 것은 당일에 신체의 조화가 회복하여 자기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되겠다. 경연 일에는 연습이 지나치면 좋지 않다는 것을 한마디 알릴 겸 부탁하고자 한다.
<출전 : 桂貞植, 「音樂競演會를 앞두고」, '매일신보', 1942년 11월 10일>
(7) 후생실내악단 제2회 공연평
반도악단에서 유명한 연주가나 성악가는 많은 모양이나 실천에 있어서는 유명무실한 점이 있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 원인의 전부를 연주가에게만 책임을 돌릴 것이 아니겠지만 여하간 연주 상태가 활발하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조선악계의 장래를 위하여 섭섭히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이의미에있어서후생실내악단의발생은쌍수를들어경하하는바이며특히금번제2회연주회를듣고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감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리라고 확신하다.
필자가 제일 □□한 것은 후생
실내악단의 연주가 합주로서 완전히 마스터한 점과 열과 애정을 경주하여 휘연히 음악적 분위기 속에서음악을끌어내어준점등이다. 여러사람이공연할때에1인이연주하는것같고한사람이호흡하는느낌을얻은것은처음으로체험하였다.
이와같은□□□한앙상블연주의효과는우연지사가아니고동악단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음악예술을 위하여 불타는 젊은이들의 꾸준한 열의의 결정품이라고 본다.
당야 곡목 중 실내악 반주의 효과는 미증유의 성과를 거두었다.
기혼을 담뿍 실은 매력 있는 현과피아노가 융화되어 독창자들의 고운 음색을 일층 더 광채 나게 하였다. 이와 같은 훌륭한 실내악 반주로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독창자는 참으로 행복을 느끼리라고 생각한다.
이만한 단원의 실력과 연주로서 만약 후생실내악단이 구라파에서 연주회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손색없으리라고 단언한다.
그럼으로써 이 후생실내악단은 조선의 자부요, 자랑이라고 생각한다. 연주 프로에 있어서 처음부터끝까지 변화와 박력으로 일관되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 시간 이상 긴 연주였으나 조금도 권태로느끼지 않게 하고 끝까지 긴장리에 종연하게 된 것은 전례 없는 특기할 만큼 사실이었다.
편곡에 있어서도 능란한 수법으로 수적은 악기로 충분한 효과를 내게 하였으며 특히 민요접속곡은 깊은 인상을 주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편곡의 곡이 많이 발표되기를 바란다.
악단 행적의 통계를 보면 금년 5월 1일부터 12월 24일까지 연주 회수가 112회라 하며 그 중 일반 야간 연주 공연이 36회, 학교 학생음악회가 46회, 산업전사위안연주회가 19회, 육연□□□연주회가 4회,기타 7회에 총 청중이 7만 8천 7백 50명이라 한다.
조선 방방곡곡에 다니며 이와 같은 많은 연주회를 가지고 이와 같은 많은 청중에게 좋고 건실한 음악회를 들려주었다는 것은 명일의 조선악단을 위하여 큰 업적을 남겨 놓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다니는동안에 가장 곤란과 싸우며 □□노력한 눈물겨운 일화도 많거니와 이들의 연주에 감탄한 청중이 이들을둘러싸고음악예술의굶주림을토로하며비□한악수로다시올기회를갈망한장면도많았다고한다.
이와 같은 열과 성의를 가지고 조선 문화운동의 일선에 나서서 노력하며 공헌한 바가 많은 후생실내악단에 대하여 일반사회 유지의 절대적인 지지와 후원을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이 악단은 조선교향악운동에 봉화를 들고 정신하여 나오는 단체이다. 그들의 각오와 □□성은 방관하지 못할 뜻 깊은 것인줄로 안다.
하루바삐 노력과 희생이 결실되어 조선악단의 큰 지주가 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듣건대1943년 상반기 경성 중앙공연 일정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3월 초순 국민음악의 밤(제3회), 3월 중순 김천애 독창회, 4월 초순 실내교향악의 밤(제4회), 5월 중순작곡 발표회, 6월 상순 이인형 피아노 독주회, 6월 하순 김생려 바이올린 독주회, 7월 초순 제5회 발표회 명년도에 이와 같은 종래에 없던 풍부한 음악회를 제공하는 동 악단에 감사하는 바이며 음악애호가 제씨의 기대를 바라는 바이다.
<출전 : 桂貞植, 「厚生室內樂團第2回公演評」, '매일신보', 1942년 12월 31일>
(8) 개병의 노래 모집, 참된 사랑의 노래, 계정식 씨 담, 길이 빛날 군국의 노래로
반도에는 아직껏 숭엄하고 사랑이 가득 찬 어머니를 찬미하는 노래가 없었고 내 귀한 아들 국가의 용사인 청년을 위해 부르는 노래가 없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자애에 가득찬 국가의 초석이 될 아들을 위하여 마음속 깊이 기원을 올리고 계신 분들이다.
우리는 어머니를 위해 삼가 노래를 드려야 할 것이며 우리 국군의 청년은 국가를 위해 한 생명을 받칠 결의를 드는 노래를 다같이 불러야만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아름다운 노래를 반드시 불러주셔야 할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매일신보에서는 1944년도부터 실시될 징병제를 앞두고 반도개병의 노래를 널리 모집하게 된 것은 실로 경의와 찬하를 받치는 바이다.
이 감격과 이 광영을 어찌 필설로 다하리요마는 오직 이 사무친 정성을 노래로 읊어야 할 것이니 누구나 그 뜻이 높고 경건한 구상으로 2천 5백만이 다 같이 부를 노래를 지어 국민 된 적성을 다할 것이다.
좋은 가사에는 좋은 곡을 붙여 국민의 감격을 자아내고 영원히 이름난 노래로 전해져야 할 것이다.
가사의 내용으로는 우수한 가사가 많이 응모될 것을 나는 믿으며 또 이 가사가 악곡화 될 때 우수한 작곡가가 나와 주기를 나는 기대한다.
<출전 : 桂貞植, 「皆兵의 노래 모집, 참된 ‘사랑’의 노래, 桂貞植氏談, 길이 빛날 軍國의 노래로」,'매일신보', 1943년 2월 27일>
(9) 후생실내악단을 듣고(음악월평)
총후 국민생활을 위안하며 풍부하게 하기 위하여 또는 건전 음악이 영미 재즈 음악으로 인하여 머리를 들지 못하고 있는 음악적 사정을 분개하여 음악가 유지 몇 사람이 합심해 가지고 후생실내악단을조직한 지 벌써 반년이나 지나갔다.
그들의 음악 운동이야말로 최후의 이념 하에서 모든 물질적 곤란을돌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돌파해 왔다 .
혹은 공장에 가서 직역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연주함으로 능률 증진시키고, 혹은 학교에 가서 음악 감상회를 열어 생도들에게 음악 교육적 기회를 제공해 왔다.
그외에는일반시민에게고상한곡목을선택하여열과애정이많은실연으로정신적양식을주었다.
이와같이다방면적활약은다른음악단체에서는찾아볼수가없다. 반도에유일한순수음악단체로지금까지 단시일 내에 음악회 회수에 있어서나 질적 연주로 보아서나 전례가 없는 단체이다.
그러고 단체행동에 있어서는 부족이 없이 진행된다니 단원들이 수양이 있고 인격이 고매함을 자연히 알게 되었다.
제1회 공연은 사정으로 듣지 못했지만 제2회 공연을 듣고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근래 드문희유한 음악회였다.
음악회다운 음악회였으므로 2천여의 청중을 감격시키고 도취시켰다.
그만한 실력으로 구라파에 가서 연주해도 과히 손색없겠다고 단언한다. 물론 완전무결하다는 것은 아니다.
부족하다면 소소한데 그치고 일반적으로 보아서 예술적으로 완벽에 가깝다고 본다. 각 단원이 솔리스트의 실력과 자격으로 완전히 합주의 호흡을 맞추면서 열연하는 것은 다른 음악회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먼저 국민의례 및 국민가요 연곡(聯曲)이 있은 후에 제1부 순서로 들어갔다.
제1번 후생실내악단의 합주, 칼마리아, 본, 베버작인 무도회의 권유가 연주되었다.
이 곡은 연주상 난곡으로 유명한 것인 것에도 불구하고 무난히 종연한 것이 벌써 그들의 진실한 태도의 연습이 있었다
는 것이 설명되었다. 다만 피아노 반주가 적은 감이 있었다.
제2번 용궁천애(龍宮天愛) 여성독창 산전경작(山田耕筰)인 탱자꽃과 베버곡의 아가페의 독창이었다.
두 곡 다 현악사중주 및 피아노 반주로 연창되었다. 용궁양은 필자와 연주여행을 많이 같이 한 일이있어서 그의 해석이나 창법을 많이 감상할 기회를 가졌었다.
인간적으로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이며 그위에 종교적이어서 음악예술에 대한 태도는 양심적이며 책임적이었다.
악곡을 언제나 연구적 태도로취급하고 파악하여 자기가 완전히 소화하여 청중에게 전달하는 성악가이다.
첫째로 음량이 가장 풍부하며 표현력이 강하여 사람 심중에까지 충동을 준다. 어떤 다른 성악가와 가히 청각만 자극시키는 악인과는 다른 가수이다.
아직 연령이 어려서 장래의 기대가 많이 보인다. 자기의 천부적인 성악사명을 잘아는 용궁양은 조선 악단의 보석과 같은 존재를 영원히 보전해 줄 줄로 믿는다. 도쿄 악단에서도 이런 존재는 들어보지 못했다.
제3번 양금독주 의본인형(義本仁亨) 브람스 곡인 2번의 사시(史詩)곡이었다. 수년 전 신인음악회 시에 리스트 곡인 헝가리 랩소디가 아직도 필자의 귀에 쟁쟁하고 있다. 당시에 우수한 연주엔 일반의 환영이 컸었다.
의본 군은 육체적으로 피아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체격이 크고 피아노 악기의 적당한 수완을 소유했기 때문에 다른 피아니스트보다 유리한 점이 많다고 생각된다.
그럼으로 브람스 곡과 같은기술적으로 곤란한 점을 손쉽게 연주할 수 있었다. 곡 해석에 있어도 만족을 느꼈다.
제4번 실내악 금성성태(金城聖泰) 편곡 민요 접속곡은 일반이 다 잘 아는 멜로디로서 편곡자의 우수한 작곡기교로 연락시켜놓은 곡이다. 금성 군은 반도 작곡가에서 가장 실력 있는 창작가로 여러 번 자기의 실력을 작곡 발표회시에 발휘하였다.
필자가 제일 애호하는 작곡가이다. 후생실내악단은 금성군과 협력하여 수많은 작곡이 발표될 줄 믿는다. 소산유성(小山有聖)군의 트럼본 독주, 비제곡인 신의 소양(小羊) 부드러운 트럼본의 발음과 아름다운 가요적인 레가토 연주는 청중을 황홀케 했다.
제5번은 의본인범(義本仁範)군의 남성독창, 연전 재학시부터 미성의 소유자로서 유명했었다.
도쿄가서 미숙한 부분을 전부 원숙시켜버렸다. 음성에 탄력이 있고 맺힌 소리가 났다.
강약의 조절이 명확하였고 음악 감정이 충만하였다.
제6번 제금(提琴) 이중주 바흐곡인 두 개의 제금을 위한 콘체르트. 이 곡은 필자와 김생려 군, 처음으로 실연한 것인데 본래 일반 취미를 느껴줄 곡이 아님으로 좀 주저했으나 음악예술의 최고 양식인 대위법 음악곡을 들려 줄 의무감이 강해져서 계몽적 의미에서 시연했다. 우리 조선 음악계에서는 요한세바스티안 바흐의 곡을 음악사상으로만 유명하다는 것을 알 뿐이고 실제 음악생활과는 떨어져 있는 형편이다.
도쿄 수준과 떨어진 점이 바흐를 연주회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너무도 호모후오니 음악에만 잠겨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음악을 자주 들려줄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중주 용궁천애, 의본인범 양 연창은 청중을 극도로 흥분시켰다. 베르디 곡 ‘수도를 떠나서’ 및 ‘축하의 노래’는일반이 같이 느낄 수 있었다.
경성후생실내악단이 장래 음악적으로 무난히 발전하려면 정신적 후원자들도 필요하겠거니와 물질적도움도 급선무로 필요하다.
그 젊은이들이 심혈을 경주하여 음악예술을 위하여 또는 총후 국민 위안을위하여 열연을 들려줄 때에 음악인의 일인으로서 침묵을 지킬 수 없다.
그날 밤 그 단원의 연주를 듣고아무 자극이나 감동이 없었다면 무감각적 인간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겠다.
우리 음악인들이나 비음악인들을 막론하고 사회인으로서 이와 같은 건실한 연주를 위하여 내외적으로 원조하여 주지 않으면 안될 줄로 생각된다.
후생실내악단을 경제적으로 반석 위에 튼튼히 기초 세워놓아 주어야 그 귀한 예술의 생명이 영원히 계속될 줄로 믿는다. 사회유지 제씨들이여 하루 속히 이 악단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인사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신성한 음악예술을 위하여. (1942년 12월 27일)
<출전 : 桂貞植, 「厚生室內樂團을 듣고(音樂月評)」, '朝光', 1943년 2월호, 136~137쪽>
3) 김관(金管)
(1) 동아의 신정세와 음악문화의 재출발
사변하 세 번째 오는 기념일을 맞이하고 우리는 현전의 세계적 정세에 대한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할일이겠지만 사변처리를 위한 신동아건설로 출발한 것이 이제 신동아건설을 위한 사변처리로서 급진하고 있는 위대한 역사적 사실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새로운 미를 요청하는 일, 즉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감각과 감정이 새로운 건전한 생활과 새로운 사상적 지반 위에서 싹 돋는 것은 여하한 시대를 불문하고 있어온 일이다. 이를테면 오늘날 우리들의 템포에 대한 감각이 변한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예술에 대한 감각도 변한 것이 사실이다 새로운 문화라든지 새로운 미란 것은 비약에서 오는것이 아니고 엄연한 객관적 정세가 준비하여 놓은 당연한 무브먼트(movement)로서 작동하는 것이다.
옛 정조와 전통 가운데만 부동의 미의 형식이 있다고 보는 견해에는 물론 반면의 진리가 있다고 하겠지만 신생활 신사상체제의 건설기에 봉착한 새로운 예술관계의 구축에는 당연히 새로운 국민적 심정이반영될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일체의 문화적인 것에서부터 예술에 이르기까지에 변용은 우선 무의식 가운데서 사람들의 감정을 변케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구라파에 있어서 □기되고 있는 신흥문화의 발전 -그것의 정치적인 대응점에서 생기는 몇 가지의 방식에 좇아서 구분할 수 있지만- 이 대담하고 치밀한 매소드로 진행되는 것과 병행되어 우리들의 주변에는 또한 새로운 문화와 예술이 심도를 깊이하고 있는 것이다.
대저 전쟁이 국가에게 있어서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인가의 문제는 '손자' 첫머리에 쓰여 있는명구대로 병자국지대변, 생사지지, 존망지도다.
그런 이상 정신문화의 하나인 음악 같은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연히 후퇴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취해지기 쉽다. 그렇지만 전쟁에 의한 음악적 활동의 위축이 문화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문화 -음악창조의 출발점으로 비로소 의의를 갖게 된다.
전쟁에 있어서 교향악단보담도 한 대의 비행기가 유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전쟁이 정신문화를 경시한다거나 추락케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나사변 처리가 오늘날에 있어서 신동아건설 -신문화건설이란 일대 이념에 도달한 이상, 장차 새로운 음악에의 여 명을 우리는 기대하게까지 되었다.
전쟁에 따르는 군가는 전혀 일□공리적인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것이겠지만 사변 이래 무수의 군가가 풍성했고, 따라서 그것으로서 다분히 정신 고무의 효과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변에 따른 군가가 대두한 것은 저널리즘 현상적이고, 그것이 정작 예술적인 또는 우리가 논의하는 새로운 문화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그보다도 사변 이래 예술로서의 음악이 오락으로서의 음악으로전위된 것에 도리어 중대한 관심을 갖게 한다.
지난번 문부성에 설립된 국민오락개선위원회의 취지라든가, 또는 작금 음악후생운동에서 제창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그러한 음악의 추락을 저지하고 국민생활 위에 높은 음악적 교훈을 세우려는 운동이 일어난 것은 경하해 마지않는다.
더욱 음악후생운동은한 사람의 우수한 음악가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고 국민전체의 힘을 만들기 위한 저수지를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우수한 사람을 나오게 하고 또는 국한된 범위를 떠나서 노동자 국민전체에 이르기까지 음악을 보급시킴으로써 탄력성을 가진 정신을 □득케 하고 이어서 문화적 수준을 높이도록 하려는 것이다.
새로운 음악단체에의 길은 우선 국민생활 가운데 만연된 음악의 농도 여하로 속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과거의 전쟁이 음악문화의 발달을 저해한다고 했고, 기실 그렇기는 했지만 우리가 당면한 신동아건설을 위한 사변처리와 병행되면서 영위되는 새로운 음악건설에의 의욕과 운동은 도리어 사변 전에 꿈도 못 꾸었던 광대한 음악보급과 그 수준을 높이기 위한, 즉 음악문화의 발달을 촉진케 하고 있음을본다.
과거의 우리들의 음악적 근거는 서구음악에 의존함으로써 존재했었고,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음악을 해갈 수 없을 만큼 빈약도 했었다.
그러나 맹목적인 추종과 무의미한 모방에서 떠난 오늘날에 있어서는 물론 아직도 전도가 요원하다고 하겠지만 새로운 지경에 들어선 것만은 사실이다.
사변 이래 전시 경제상 불가피한 요구에서 제기된 모든 □□□□에 좇아서 이를테면 악기□제조의 가공판매 폐지라든지 수입제한 등에 의하여 음악활동이 받는 영향도 다분히 있다 하겠지만 요컨대 이 문제는 패시이브(passive)의 형태로 취할 것이 아니고 도리어 적극적으로 건설적으로 국민생활의 체제를 구축하는 한조건으로 취할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출전 : 金管, 「東亞의 新情勢와 “音樂文化의 再出發”」, '매일신보', 1940년 7월 7일>
(2) 국가의 신체제와 신음악의 건설(1~3)
1
신체제란 말은 오늘에 있어 하나의 시대적인 용어다. 근래 내각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는 신체제의 이념을 쉽게 말하자면 쇼와유신(昭和維新)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정치의 성격에 새로운 개화를 시도하려는 곳에 신체제 이상의 기초가 놓여지는 것이고, 새로운 성격이란 것이 본래의 정치가 휴머니티의 표현인 점에 있어서는 모든 다른 인간활동과 관련되고 철학이나 과학 혹은 예술의 원리와 한 가지의
생성 발전을 하는 것이므로 오늘날 우리가 구상하는 신정치체제 밑에서는 첫째, 새로운 도덕과 결합된일에 따라 그 원리가 철학 과학 예술 등의 원리로서도 공통될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서 우리가 □흥하고 있는 음악에 대해서도 신체제에 응하기 위한 새로운 질서와 개혁이 당연히검토 논구되지 않아서는 아니 될 근거가 있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음악의 각 부면에 걸쳐 그 구성의 정리 통합이 수행되어야 할 것은 물론 또한 전체주의적인 견지에서 노력의 경제, 일의 분담도 개변될여지가 다분히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도 우선 먼저 음악자의 시대적인 각성과 정신문제가 중대하다고 생각된다.
신체제의 근원적인 이면은 개인주의적 사고의 배경에 있는 것이지만 전체주의적인 입각점에서 국가의 모든 부면이 처리되어 가려는 오늘날 과거의 음악가가 탄식하고 있는 악단의 체제를 국가의 신체제에 즉응키 위하여 정리통합하고, 다시 이것을 조직화하는 일은 당면한 긴급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유래로 음악가의 최대결점은 협동정신의 결여, 개인주의적인 행동이 종래 여러 많은 음악적 사업이나 회합을 궤멸 분열시켰고, 따라서 음악의 발전에 방해케 하여 왔다. 다시 말하면 과거에 있어서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직악자(職樂者)가 그 직능에 있어서 봉임(奉任)할 상대가 항상 국민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른바 예술지상주의를 내걸고 생활에서 유리(遊離)한 예술 삼매 교양의 고만(高慢)을긍지하려는 것에 파탄은 있었다.
예술은 결코 자기목적이 아니다. 예술은 국민을 위하여 존재하고 따라 행동적인 것이다.
음악이 다른 예술과 매한가지로 국민적 의식에 뿌리를 박고 국민에 의해서 지지되고 그리고 국민을 위해서 행해지는 예술적 음악이 아니어서는 아니 된다. 누구를 위한 음악인가?
국민을 위한 음악이 아니냐는 상식적인 이념에서부터 우리는 신체제의 방향으로 출발해야 한다.
음악문화가 국민의 문화생활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선 음악은 공공성을 수위에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개인주의적인 행동과 허세가 단연 배제되어야 할 명확한 이유를 들쳐 낼 수가 있게 된다.
간혹 개인주의와 개성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지만 원래 예술가(음악가)의 개성이 존중시될 것은 췌언을 요치 않으나 개인적 자유 -사리사욕에 빠져버린 개인주의와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고, 동시에 자유주의적인 인생관, 예술관은 모두가 배격되어야 할 일이다. 새로운 음악과 악단의 체제를 조직하는 것은 이미 전체주의국인 독일 같은데 있어서는 정부가 통제정책으로 행하고 있어 착착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은 오늘날 주지의 사실이다.
저번 영화령(영화법)의 실시 같은 통제는 앞으로 다른 예술방면에 대한 통제의 시금석으로 볼 수 있으나 요컨대 신정치체제의 확립과 아울러 추진력이 강한 음악통제책이 행해질 것을 요망하고 있다.
2
신체제와 음악재건 문제는 물론 정치와 관련되고 있지만 그것이 금일과 같은 시대의 대전환기에 당면하여 음악가에게 과제된 하나의 시련으로서 본다면 음악가 각개의 생활태도와 윤리의 문제로서도 막대한 것이 있다. 시대에 추종한다든가 국가에 순종한다든가 하는 소극적인 태도는 결국 예술가의 의욕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능동적인 기백과 정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내가 시대를 지도한다는 의욕만이 창조정신을 낳게 하는 것이다. 음악의 신체제는 요컨대 음악의 재탄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는 취하고 싶다.
그러므로 이를테면 퇴폐적인 말초적인 음악 같은 것은 자연 소멸할 것이겠고, 음악가의 생활만 하더라도 개인적인 방종은 허용되지 않을 것인 줄 믿는다. 새로운 윤리 위에서 탄생할 음악만이 우리가 요청하는 새로운 방향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점에 있어서 새로운 음악가의 형태가 생길 것도 의심할 여지는 없다.
관념론적 비시대적인 음악관의 시정부터가 신체제하에 있는 우리에게 맡겨진 출발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음악문화의 재구성은 여기서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는 대단 곤란한 일이므로 일일이 예를 들지는 못하나 작곡, 연주, 국민일반 관중의 연쇄 관련에 있어서 포함된 제 문제를 재검토함으로써 우선 음악 그것의 철학적인 미감을 비판하여야 될 줄 안다.
어떠한 것이 좋은 음악이고, 어떠한 것이 좋은 연주인가를 묻는 것은 한 때 독일서 멘델스존을 말살한 데 비추어 보아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로 되었다.
비근한 예를 들면 사변 이래로 항간에 유포된 유행가가 일견 시국영합적인 체제를 갖추기는 했어도 곡조에 있어서는 에로티시즘과 센티멘탈리즘을 포함한 것이 대부분인 것을 보면 작곡자의 비시대적인 정신과 산만한 시국적 불비(不備)가 노출된 것을 지적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른바 종래의 순수음악 작곡가 제군 역시 외국작품을 가위와 풀로 개편하다시피 한우충동(汗牛充棟)한 비예술적인 비사회적 자기도취 취미는 또한은 유행가 작곡가 제군의 태도에 비해서 나을 것이 없는 것이다.
신체제하의 작품은 일본정신에 입각한 독창적인 것, 따라서 사회성과 예술적 의욕의 고도한 것을 우리는 요구한다.
일부의 의견으로 양악말살론 같은 무의미한 의논이 있지마는 음악의 신체제화라고 해서 국민전체에게 척팔(尺八)이나 가야금을 키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서양의존과 모방을 배제하자는 데 있는 것이다.
작곡문제는 필경은 국민음악 수립을 목표로 하고 매진해야 될 것이다.
이밖에 모든 음악전문 부문 즉 연주에 있어서나 교육의 분야에 있어서도 모두가 자기비판에 출발한 창조적인 방법이 고구(考究)되어야 할 것이다.
3
신체제하의 작곡 기준이 일본정신에 입각한 독창적인 것이라야 될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은 다시국민음악의 수립을 목표로 한 창조정신의 □□를 가져야 할 일이다. 그리고 또 국민음악의 모태라고할 수 있는 입장과 관련되는 일이지만 금시와 같은 신체제하의 생활 위에서 요망되는 건전한 오락의 하나로서 음악이 등장할 경우 음악은 음악이 가진 모든 면을 활발하게 전개시켜야 될 것이다.
이를테면합창운동이라든가 교향악단 운동 혹은 브라스밴드 등 집단적인 음악운동과 그것의 연장으로서 이른바음악후생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음악이 국민 전원에 침투토록 하지 않아서는 안 될 일이다.
그리하여 민중 -국민 가운데 뿌리를 박고 국민전체를 공부할 수 있는 음악만이 오늘날 우리가 요망하고 기획하는 똑바른 길이라고 사유한다.
그러고 보면 음악의 연주와 음악의 형식도 종래의 그것에 비하여 개혁될것은 필연 된 일이고 연주회가 일종의 기업적인 것이었던 데서부터 실질적인 순수성을 가지게 될 줄로상정된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음악의 연주는 단순한 감상이라든가 연구적인 것에만 그치지 않고 좀 더 적극적인 생생한 음악을 체험토록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연주회 형식의 제 검토문제가 제출되는것이다.
다음은 라디오 음악의 재검토 긴요한 문제의 하나로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국민의 음악으로서 재조직되어야 할 마당에 있는 것이다.
라디오가 가진 위대한 계몽 -후생에의 힘은 그것을 공교하게 이용하는데서 백, 천의 연주회보다도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생각할 것은 음악이나 악단이 앞으로 통제될 것은 음악가 자신의 자각과 협동에 의해서 수행될 일이므로 악단을 진행해 나아갈 새로운 조직을 확립하는 일이 말하자면 악단의 재조직 개조라는 현실문제로서 파악되는 것이다.
아무런 주의신념도 없고, 그때그때에 따라서 날뛰는 공리주의자나 성의없는 거짓말로 명사 연(然)하려는 이른바 음악명사는 이미 소용이 없이 되었다.
앞에서 말한 악단의 중심기관의 조직을 수립함으로써 음악운동의 이원화는 오늘날의 신체제에 즉응하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이상 종래의 구락부 풍의 모임은 단연 개편하지 않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요컨대 악단혁신 -신체제의 추진력이 될 수 있는 혁신그룹 구성이 오늘날의 우리가 요구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가져온 음악의 이념은 모든 음악 사업에 크나큰 통제를 가져올 것이겠지만 그 통제는표면적인 일시적 정책이 아니라 근본적인 모럴과 통합된 데서 출발한 새로운 것의 창조정신과 정열이아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출전 : 金管, 「國家의 新體制와 新音樂의 建設(1~3)」, '매일신보', 1940년 9월 21·23·24일>
(3) 음악획기의 년(1~5)
1
1개년간의 음악을 회고하고 비판함으로써 총결산을 하게 될 때마다 생각하는 것은 하필 1년이란 시간적 구간을 설정하고 그 가운데서 이러한 새로운 경향이라든가 풍조를, 또는 문제가 될 만한 작품이나 연주를 평가하는 일로서는 그리 중대한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매너리즘의 관례로 되어 있을 뿐더러 특히 올해와 같이 여러 가지로 의미로서나 여러가지 면에서 획기적인 역사상의 전환기라고 할 수 있는 때를 당면했을 경우에 금년 1년 동안에 걸어온음악에 대한 관찰과 비판을 행한다면 어찌 의의가 크다 하지 않을 것이랴!
정치나 경제 부문은 물론 문화부문에 있어서도 작년과 금년을 비교해 볼 때 격단의 차이가 있다.
작년이나 금년이나 하는 먼 시간의 거리를 두고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7·7금지령 이후의 음악에 대해서 비추어 생각하여 족하다. 거기에 끌려서 7·7금지령과 때를 같이하여 일반에는 새로운 지도정신이 확립된 것이다.
즉 정치상의 형태로 대대공□□□를 생각게 한 신체제의 운동이다.
그리하여 이 신체제의 실천이 국민운동이라고 해도 가령 빈번한 국민적 관심과 아울러 상하에 항한 국민 재조직으로서의 코스를 밟게 된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예술 각 분야도 발밑에 불이 붙듯이 방향전환을 기획하고 재출발을 하지 않으면 아니될 사태에 당면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국가 각반에 향하여 신체제 확립에 의한 신지도정신의 절규가 들려져 있는 오늘날 조선의 음악계도 역시 그것이 걸어갈 방향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동시에 정성적으로 틈에 지녔던 구체제적인 잔해를 깨끗이 벗어버리지 아니 하면 아니 될 필연적인 영광스러운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사실상 늦어진 감이 있는 것은 큰 유감이지만 음악가가 대동단결해서 새로운일원적인 음악단체를 꾀하고 신체제하에 있어 음악을 통하여 신도 실천의 철저를 기하는 동시에 국민총력운동에 매진하기로 한 것은 비단 금년 1년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할 것이 아니고 역사상의 위대한빅 포인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널리 국민생활에 대해서 비할 때도 그렇지만 음악가의 생활 악단 사회에 있어서도 위에 말한 바와 같은 큰 전환기에 그 합리화를 꾀하고 따라 문화계의 향상을 가지게 하는 일은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이를테면 장래할 국민음악의 창조라고 하더라도 악단사회가 생활의 존재양식에 뒤처져 있고 음악가의 생활이 언제까지든지 구각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어찌 새로운 국민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랴!
일일이 여기서 과거의 결함을 추구하지 않겠지만 요컨대 음악가 자신들의 연대책임 연대감정의 부족이 모든 회□를 유명무실화로 만든 중요 요인이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가 크게는 고도국방국가의 신체제 밑에 있어서의 음악가의 임무와 의무를 자각하게 된 것은 1년 설계에 앞서서 가장 중대한 의미 깊은 반향이라고 할 것이겠다.
이상으로 개론적인 것을 마치고 다음 회부터 구체적인 비평으로 들어갈 작정이다.
2
사변 이후 음악은 그런 문화부문에 비하여 자기 비판에 대한 열의가 특히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종래의 악단사회의 지반 위에서 있어 국책이라든가 정치에서 초연 고립하였고 국가나 정치면에서도 음악은 무용의 한 가지 일로서 간과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현재와 같은 시국에 도달하면서부터 국가의 이상 달성에 대해서 모든 직역에서의 노력이 요망되자 음악도 직능으로 하는 바 그 사명과 역할에 있어서 국민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큰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변 이후 일시적인 시국영합권의 음악생활에 비해서 자각 밑에서 의식적으로 정치와의 접근을 가지게 된 자태는 금년 음악계의 주요한 경향의 하나로서 손꼽을 수 있는 일이다.
이상에 의해서 간단하지만 1943년도 음악계의 주된 특징과 또는 현재가 어떠한 시대이고 이 시대에 놓여진 음악의 가치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한 셈이다.
그러면 그런 전환기에 당해서 구체적으로 음악가는 여하한 활동을 보였고 또 어떠한 작품이 나타났느냐는 문제가 당면 논점으로 되겠지만 유감한 일이라서 음악 작품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해도 과언은아니다.
다시 말하면 금년도에 한해서 작품 운운하는 것이 아니라 종래도 음악 작품의 빈곤은 조선음악계의 파행적 결함을 말하는 하나의 중대한 요인이 되고 있는 노릇이지만 -작품활동의 빈약은 작곡가의 영성 그리고 그것은 결국 음악적 수준과 그 밑에 흐르는 전통(양악)의 성쇠에 다름없으므로 암만작품이 나오라고 떠든다 해도 그것이 도로에 그칠 것이다.
요컨대 현 악단의 위치에서는 우리가 희망하는 훌륭한 작품, 우리가 이상하는 국민음악의 지점에 다다르기까지는 아직도 요원한 꿈에 속하는 일에지나지 않는다.
현재 작곡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의 수효가 불과 수 명, 그것도 그들 자신은 대개 장담을하는 모양이나 첫째, 기술부족 -음악문법을 마스터하지 못한 데다가 세계의 정세와 자기의 율동과 호흡 등을 융화시켜가면서 창작하기까지는 여태도 일반의 내성과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동일 대매(大賣) 주최 콩쿠르에 입상한 임동혁 군과 이건우 군이 신진이라고 하겠으되 일시적인 공명이나 허실적 □□
에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
과거 조선의 이른바 음악 명사의 소위 무책임한 저널리즘의 상책과 음악가 자신들의 우수양에서 생겨진 것이었지만 앞으로는 결코 그러한 포스적인 음악가를 허용할 시대가 아닐 줄 믿는다.
특히 임, 이양군에게 고언을 또 하는 이유는 그들이 작곡이란 조선서는 가장 드문 음악분야를 개척할 선발된 전사인 때문에 있다.
물론 어떠한 시대 정세 가운데 있어서라도 비평가는 자기의 천직에 대해서 충실해서야 되겠지만 금일과 같은 위대한 전환기에 당면해서는 특히 비평가의 새로운 지도적 임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저널한 연주회 비평을 가지고 평론의 전부라고 오식하기 쉬운 악단 제군에게 자기 변호도 앞으로의 비평활동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요망하기를 말해 둔다.
3
금년 1년 동안 열린 음악회는 예년과 다름없는 대등수였지만 대체 연주자의 활동이라는 것이 우선 현재까지 해 내려오고 있는 연주회의 개최라는 형식으로 행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것이 연주가로서의 유일한 연주형식인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최근의 지세를 볼 때 국민의 문화적 무기의 견지에서 우리들의 음악활동의 형식을 재음미할 것 같으면 첫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연주회와 같은 한정된 좋은 모임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고 직접적으로 국민과 접촉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이 당연히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혹은 라디오나 레코드도 광범한 음악을 흡수하는 한 강력 수단이라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도 불충분하다. 즉 기계를 통하지 않은 생생한 음악하는 정신을 직접으로 국민에게 부여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건전한 국민음악과도 관련이 있고 특히 근로자를 대상으로 하는 문화적 후생운동의 일익으로서도 연주가의 자각과 활동은 요망되는 것이다.
연주회적인 제한된 팬을 대상으로 하는 콘서트도 특히 필요하지만 한편 대중적인 광범한 계몽적 육성이 없어서는 진실된 음악활동이라고 하기 어렵게까지 이르게 된 금일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것 같으면 금 일년 동안에 열린 각종의 음악회는 모두가 협소한 콘서트에 지나지 않았고 종래의 구체제적인 예술지상주의 예술 삼매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음은 심히 유감된 일이다. 단지 한 가지 특기할 것은 본부 사회교육과 후원으로 부민음악회가 매일신보사 주최로 26일개최키로 된 것인데, 이 모임은 종래의 상업주의적 음악연주형식을 벗어나서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우선 일종의 특정계급의 전용물이라고까지 보게 되던 음악회장을 국민적인 □신재로서 제고하려는데 있으므로 그 진의는 앞서 말한 계몽적 육성의 일조로서 획기적 출발을 꾀한 것이다.
앞으로도 매월 정기적으로 개최함으로써 마치 비다 마이야 시대가 시민적인 중간 계급에 있어 예술이 큰 역할을 하듯이
우리들의 예술이 바야흐로 국민주의적인 소유로 되려는 새로운 코스를 투시하는 마당에 있어 한 개의 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연주가 자신의 각성과 역할 시대에 대한 감격과 열정만이 오직 음악하는 정신의 적절한 표현인 것은 물론 조선문화의 새로운 열매를 복돋우는 한 개의 힘이 될 것이다. 여기에 부기할것은 음악문화운동이 취할 건전한 수단은 □□주의를 채용하는 것이다.
이 □□주의의 음악운동만이 근로자 교육의 제일선에 음악이고 크게는 국민을 위한 음악, 거기에 건전한 오락과 새로운 건설적 의기를 배양시키는 원동력이 있는 것이다. 앞으로 그러한 운동의 실천으로서 취주악, 관현악, 합창 같은 집단 음악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야 할 일이다.
연주 부진의 한 원인은 연주가 자신의 매너리즘에 기인되지만 그것은 시대적 센스에 대한 미급과 관념적으로 접근되어버린 속물로서 계산할 수밖에 없고 그리고 그들 자신의 공부 부족에서 오는 파경이 다른 하나의 원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3, 4년이 가도 헌신짝 위하듯이 동일한 레퍼토리를 반복하는 무진보는 새로운 체제로 정비하고 새로운 걸음을 밟으려는 이 마당에 있어서 깨끗이 청산할 급선무가 아닐까 생각하는 바이다.
4
연주회 부진에 비하면 라디오는 그 본래의 특수한 기구를 가진 관계도 있지만 가장 풍부한 음악방송을 가져왔다.
그러나 방송국의 음악 편성에는 가지가지의 불만이 있다.
이를테면 방송인의 인선이라든지 레퍼토리 등에 만전을 기했던 것이냐고 묻게 될 때도 천편일률적인 매너리즘이 심하다 하지 않을수 없다.
라디오 음악은 당연 음악문화 신체제 위에서나 국민문화 예술을 비춰보아 절대로 필요한 것은 재언할 바도 아니지만 더구나 조선과 같이 미약한 현악단에 있어서 라디오의 사명은 중대한 음악계발의 일획으로서 중요한 부문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방송국 간행 '조선의 방송' 지상에서 이야기한 바 있지만 이른바 밤마다 방송되는 가정가요 같은 것만 하더라도 그 기획과 음악의 거리가 너무나 심한 것을결국 방송국의 책임으로 돌릴 수밖에 없이 된다.
즉 시국적인 가요음악을 보급시키려는 취지는 시의에 적절한 기획이었을지 모르나 기실 가정가요가 자미가 적고 불러지지를 않아서야 문제는 간단치 않아진다. 새로운 기획도 좋고 방송수효를 늘리는 것도 좋다.
그렇지만 확적한 방송 플랜이 없이는 국민적인 음악으로서 재조직을 요망하는 음악방송의 사명을 금으로 들리는 것이나 다름없이 된다. 이 기회에 부언할 것은 비단 음악에 의한 문제가 아니고 연주방송 일원에 대해서 개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방송당국이 종래와 같은 철온적인 이지고잉(easy going)을 고집할 리도 만무하겠고 당연 방송신체제의 중요한 이 부문으로서 음악 연주에 대하여 개혁안을 연구하기를 기대한다.
방송국과 악단이 원활하게 제휴해 나가지 못해 온 원인이 일방적
인 것은 아니라 해도 음악방송의 무질서는 방송국의 멘트(comment?)에 관련될 문제인 줄 안다.
사변 이래 조선 레코드계를 볼 것 같으면 그 무정견 또 무질서는 두 말할 것도 없고 창도하는 기염?과 실제의 상위가 심한 것은 결국 악자(음악가)의 일시적 도□에서 영리추구에만 급급한 태도에 역연한것이 있다.
시국영합권이라든가 혹은 시국하란 미명 아래서 태연자약하게 □□적 곡조를 연가조로 만들어 유포시킴을 볼 때 이른바 대중음악 다수의 국민을 상대로 하는 오락음악 -일개 이윤을 탐내는 음악에만 일임해 왔다는 종래의 방법에 큰 실책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레코드 사업이 문화사업인 것은 물론이다. 한 때의 레코드 자□문제 같은 것은 무정견한 사람들에게 레코드 사업을 일임해 온 사회가 요구하는 특히 미소한 사죄에 불과한 일이다.
음악생산기구의 개혁(개선)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모든 생산기구가 신체제로 재조직되는 오늘날 레코드만이 구태의연이어서는 우스운 노릇이다.
그리고 레코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이른바 악극류가 금년 들어서서 우후죽순처럼 속출하는 것을 보더라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문화사업이란 미명하에서 숨바꼭질을 하는 격이다.
앞으로 남겨진 문제는 레코드 일본 경음악의 신체제에의 구체책이다. 우선 악자의 자각만이 오락음악 전면에서 데카탄(Decadent : 퇴폐주의적 사조)한 망국조를 일소하고 나아가 건전한 경음악을 창조할 수 있는 노릇이겠지만 현재의 레코드 기구 하에서는 도리어 악자의 안전지대인 피난처가 되어있는 만큼 근본적인 변혁을 바라지 않고서는 하등 효과가 없을 줄로 보여진다.
생산기구의 조정쇄신이 그러고 나서 기 구체적 실천행동을 음악문화 지도자와 당국이 지도해 나가는 길만이 우선 소극적이기는 하나마 경음악 전반을 구해낼 길인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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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음기의 제작 금지, 레코드의 재료 배급 금지, 악기제조의 최소 제한 등 음악기업의 전면적 후퇴는전시하 경제의 조치인 만큼 이의를 내세울 여지가 없는 일이겠지만, 그것의 문화적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특히 비상시에 대한 국민정신을 함양하는 최상의 건강한 오락을 조장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만큼 연구할 문제가 다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국민정신진흥을 위주로 해서 음악을 장려하고 있고, 더구나 예술과의 시간을 추가시켜 창가회를 중요시하고 있고, 추천 레코드 제도를 만들고 있는 이상 그러한 음악보급에는 반드시 피아노나 축음기가 필요해지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결국 계획과 실천이 □□하고 있는 감을 갖게 되는 것인데 이 델리케이트한 문제를 타개할 방법을고구하는 것만이 앞으로 남겨진 길이다. 일반으로 예술 -더욱 음악을 사치시하는 경향이 아직까지도 없다할 수는 없다.
예부터 음악을 일종의 신비주의로서 존중시해 온 기록도 있다시피 음악의 사회적 역할과 중요성을 망각해 온 것이다.
그러나 십수 년 이래로 라디오나 레코드의 보급과 거기 따라서 생긴 청중층의 확대와 연주의 중앙표준화는 오늘 목격할 수 있다시피 음악의 사회화 국민화의 경지로까지 만들게 된 것이다.
악기제조 금지가 가져온 영향은 환경적인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악기가 없이 음악은 성립되지 못한다 할 만큼 중대한 문제로까지 되어버렸다 .
목하 음악이 사치품이냐 아니냐는 명제를 내걸고 운운할 시기는 아니겠지만 결국 그 물적 조건에 대한 위정당국의 판단에 따를 수밖에는 다른 도리는 없을 것 같다.
이상으로 금년도 음악계의 주요한 □세를 일견한 셈이고 나머지 지면도 없고 해서 개개의 음악적 활동에 대해서는 언급치를 못할 것 같지만 전후를 가리지 않고 이상에 남은 몇 개의 기억을 적음으로 이고를 끝맺으려 현다.
이인범 독창회 -이군은 콩쿠르 입상자란 호 레테르인 선전재를 가진 만큼 일반의 기대는 컸던 것같지만 단색조로 된 이군의 독창은 아직도 곡조를 자기의 것으로 해서 자기의 생명을 표현해 갈 만한 경지에서 본다면 거리가 먼 가수인데 실망을 가졌다. 쉽게 말하면 그런 의미에 있어서 아직 자신이 독립할 만큼 성장된 성악가는 되지 못한다. 이군의 보체는 기실 아름답지만 그 아름답다는 것이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 다시 말하면 자기의 천부로 가진 미성을 연마해서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하지를 못하고 단지 아름답다는데 만족하려는 이지한 태도가 역력하다.
노래마다가 마치 죽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듯이 맥이 없고 물론 뉘앙스가 없는 원인은 거기에 있다.
앞으로의 정진을 위하여 고언을 올리는 바다.
학교음악회는 몇 개 줄었지만 성은 음악부문인 학교거나 아니거나 간에 학교음악회에서 첫째 느끼는 것이 학교마다의 훈련과 교풍이다. 이 점에서 제일 감복한 것은 여자사범이다. 그리고 말하자면 타이시카나이한 것은 여기다가 열거치는 않겠으나 요컨대 기량의 교졸이라든가.
예술의 양부를 묻지 않고 단지 노래(음악)하는 일에 환희를 가질 것만이 학원 음악의 극치인 만큼 이 기회에 학교당국자의 숙고를 구하는 바다.
<출전 : 金管, 「音樂劃期의 年(1~5)」, '매일신보', 1940년 12월 19~21·23~24일>
(4) 국민·문화·음악(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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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정책의 확립은 하루바삐 시급을 요하는 과제로 되어 있지만 현재와 같이 아직까지 상업주의적인 아나키가 완전히 일소되지 않고 있는 한 문화 활동에 의식적인 지도 관리에 이르기까지에는 허다한 곤란이 포함되고 있는 것 같다. 문화정책은 문화적 부면에 대해서는 정책인 이상 본래적으로 국가적 정치성을 구유(具有)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정치가 높은 의미의 문화성을 가질 것, 즉 정치 플러스 문화에 발을 버티고 행해지는 문화정책만이 정(正)한 것도 무론(無論)이다. 그러므로 문화정책은 그 대상면에 한해서 언제나 문화적일 것으로 정책 자체가 정치적 범위를 초월한다거나 □□할 바 아니므로 항상 문화정책은 국가적인 것으로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구라파풍인 정치가 퇴조되고 새로운 일본풍인 정치개념을 가지게까지 된 이상 국가의 본질적 기능으로서 국가적 공동생활체 가운데 있는 문화적 부문에 대한 정책으로서 문화정책의 확립을 기대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최근 대체의 윤곽만을 가지게 된 일반문화 부문의 재편성을 원칙적으로 고증한다면 과거의 문화기구가 주로 개인 개인의 재능을 높이는 데 일관했고, 혹은 각각의 전문 부문의 발전향상만을 꾀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 메커니즘이었는데 결점이 있으나 금일의 문화의 현상에 비춰볼 때 거기에는 목적에 추종할 수 있는 영역이 각각 전문 부문에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일을 하는데 심히 불편한 것, 또한 가지는 국민생활을 직접 향상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능력이 거기서 발휘할 수 없는 것, 이 두 가지가 큰 결함일 걸로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개인의 재능을 향상시키고 한 개의 전문적인 부분에 있어서의 기술을 향상시킬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국가목적에 결부시키거나 또는 국민생활에 결부시키는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단체기구로서는 전연 무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전체적인 기구를 만들지 않을 수 없는 필연적인 요망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앞으로 문화재의 보급을 비롯해서 문화의 지역적인 편재의 광정(匡正) 등이 실행될 때 문화정책의 적극화와 병행되어서 시정될 것으로 보여진다.
대체로 문화라는 개념은 첫째, 인간 일체의 가치 창조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정치·경제·산업·교통까지를 포괄하는 것과, 둘째로는 과학·도덕·예술·종교 등 인간의 정신적 노작에 의해서 현현되는 진·선·미·성(聖)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문화라는 용어가 다종잡다의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의 관념의 혼효는 문화자체가 가진 건전한 발달까지를 조상하는 데까지 영향되는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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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라는 말이 씌어지기 전에는 문명이라는 말이 주로 서양의 물질문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었지만 현금 우리가 문명이라고 하면 금시 물질적인 면을 의미하는 것으로 취하려는 낡은 망□(亡□)을 회상하는 관념이 없지 않지만, 또한 문화라고 할 것 같으면 어딘가 사상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기실 문명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는 일은 결코 그릇된 노릇이 아닐 뿐더러 완전한 종합체를 이룬 일체의 사회가 그 자신의 생활을 □상점(□相點)에 가져다 놓았을 때는 문명의 각도는 주로 생활의 물질적인 면에 투영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문명관은 한 시대 전의 이른바 문명관보다는 넒은 의의를 가지고 있다.
또는 국한된 서구문명에 대하여 다른 새로운 문명을 의식하는 가운데 가미하고 있는 점에 특징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현금 우리가 쓰고 있는 문화라는 말에는 그러한 문명의 물질적 형태의 훌륭한 부분을 가미시킴으로써 단순한 특수적 국□건에 멎어 있지 않고 새로운 □□의 철저케 하려는 데 있어서 새로운 □□의 관념에 비교케 하려는 데 있어 새로운 문화의 의의가 명백해진 것인 줄 안다. 그런즉 이른바 문화세계라고 해서 전 세계를 한 개의 종합체로 보려는 그것은 현실로서는 정당한 인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같이 문명과 문화가 서로 상대되어서 씌어지는것이 정당하지만 다만 편의상 문명을 인류의 사회화와 □□화를 포괄한 것으로, 그리고 문화를 그 위에 다시 창조적 □□의 경험을 플러스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탓으로 현금 우리가 문화의 요소로서 윤리성과 과학성, 그리고 예술성의 세 가지를 들게 되는 것에 문화개념으로서의 새로운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
현대의 조선문화가 전반적으로 봐서 결한 것이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그 세 가지 요소의 어느것인가가 희박한 데서 원인을 찾게 되는 것으로, 이를테면 윤리성이라는 것이 민족이거나 국가를 떠나서는 추상론에 흐르고 말 것인지만 예술에 있어서도 윤리 자체의 목적인 개인의 완성과 동시에 국민으로서의 개인의 완성이 또한 강조되어야 할 것이겠다.
이제 새로운 예술, 새로운 예술가의 이념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그 단순한 윤리적 □술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민적인지향이 각 국민을 통해서 □□적인 사상 고취로 되었고, 각 국민사회가 자애적으로 자기의 생존권을 주장하게 된 때문에 의식적인 심화가 있던 것이지만 오늘날 우리들이 지향하고 있는 새로운 문화의 건설과 병행되면서 나타난 국민정신에의 그것은 결코 금차 □□에 대해서 나타난 우연적 지향이 아닌 것이 명백하다.
다시 말하면 금일의 국민예술의 치열한 지향은 현대문화의 새로운 형태로 달리는 코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국가가 직면한 역사적 현실 가운데서 국민생활의 진실을 파악하고 민족발전의 역사적 필연의 과정과 일치되어야 국민정신을 진흥시키고 따라서 최고의 문화국을 꾀하기 위하여 예술 -음악은 또한 민족정신을 □□케 하고, 아름다운 국민음악을 창조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음악가가 민족의 성격을 그린다든가 국민정신을 표현한다던가 하는데 있어서 의식적인 지향과 노력만으로는 □□히 민족의 성격이나 국민정신을 파악할 수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요컨대 한 사람이 민족의 성격을 가장 강하게 체험하고 국민정신을 심신에 가득 채우고 있는 예술가라면 그가 제작한 작품이야말로 틀림없는 국민음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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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적으로 국민음악을 만들려는 것은 도리어 역효과를 낳기 쉽다. 이를테면 국민적이 되려고 민속적인 선율을 사용하는 실례가 음악에 있어서 왕왕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러한 민요 같은 민속적 선율은 그 자체가 이미 독자적인 선을 가진 완성된 예술작품이므로 그러한 선율적인 운용은 마치 커다란 모터 가운데 □□로서 작은 모터를 쓰려는 무모한 짓에 비할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바흐의 음악이 당시 듀른적인 음악이기는 했어도 결코 의식적인 독일음악은 아니었다. 도리어 국제적인 음악에 의식을 두고 있었다. 음악사상에서 의식적인 국민음악의 제작은 19세기에 시작된 일이고,이른바 러시아 국민음악파의 거장 글링카의 작품에서 엿보게 되는 것이지만 오늘 러시아 국민음악파라는 것은 이미 과거의 존재다.
당시의 러시아 음악의 진보에 형식상의 진보가 극히 유치했던 탓으로 그러한 결점은 국민음악의 생래(生來)로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기성의 형식과 화성을 구사해가면서 그 가운데 전혀 민요 같은 선율을 쓰지 않고 감정과 정신에 있어서 극히 개인적인 동시에 국민적인 작품(교향곡)을 제작할 부문의 시벨리우스 같은 작곡가는 러시아 국민음악파의 의식적 태도에 비해서 우리들이 당면한 국민음악에의 문제인 다대한 시사를 제공하고 있다.
즉 외국적인 분위기와 음악형식을 습득한 작곡가라손 치더라도 그가 □□되고 있는 민족의 성격이라든가 생활감정을 그리려고 할 때에는 족히 그것으로써 국민성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일본의 교향곡이 아니라 일본인이 제작한 교향곡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을 쓸 때 비로소 정작 국민음악의 구체적 □□이 맺어지는 것인 줄로 생각한다. 이 점에 즉 민족의 피의 숙명이라든가국민성의 각양이 □□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러므로 후천적인 학문이나 교양보다도 첫째로 피(血)고,그 피의 □□이다. 국민이라는 말은 외국의 예를 들면 분명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그 음악에 역사적 개념이 따르고 있음을 본다.
국가관념이나 국민의식이 참된 □□을 가진 것은 독일 같은 나라에 있어서도 근세(낭만주의 시대)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한 국가관념이나 국민의식은 일본인에 있어서는 역사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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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역사의 추이 상에 있어서 국민의식이 비상히 높아지는 시대와 심히 침잠하는 시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독일이나 기타 외국과 달리 우리에게는 국가의 통일성이 강고한 근원인 황실이 증□□□존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기회만 있다면 이를테면 메이지유신, 일□전쟁 당시 -곧바로 강력적인 국가관념과 국민의식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국민문학들 가운데서 고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하고 있는 것을 보지만 어떠한 국가, 어떠한 시대에 있어서든 문화가 그 다원성을 파악하고 일원적인 자기통일을 꾀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복고의 자태를 취하는 것은 사실로서 □시되어 온역사의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금일까지 불통일한 문화의 □□에 대해서 황홀했을 뿐이었지만 거기서 자립적인 문화형태의 자기통일이 요구되고 그것을 위하여 우선 □□의 통일이 □되지 않아서는 아니 될 마당에 □해서 고전이 문제에 오르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음악에 한해서도 보더라도 얼마 전까지 고전으로 숭배되고 있는 바흐나 베토벤 같은 이른바 고전의 국제성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금일과 같이 인터내셔널리즘의 정치와 함께 민족의 운영에 의해서 그 자주성을 강화하려고 하는 마당에 있어서는 일견 무색해질 것이 이유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금시로 자기의 고전음악에 □지된 고전을 발견해 낼 수가 있느냐 할 것 같으면 그것도 어려운 이야기인 것 같다. 다시 말하면 금일의 우리들의 음악이 우리들의 고전의 전통보다도 더 많이 서구의 고전의 전통을 지배적인 것으로 배워 온 일과 거기 □□되어서 우리들의 음악의 정통에 대한 바른눈을 갖지 못한 두 개의 불행을 가지고 있는 것을 다할 수는 없다.
문화의 창조가 개성적인 때 비로소 구체적이 될 수 있다 할 것 같으면 역사적 자□에 인식하지 않고서는 아닐 될 일이다. 고전의 국제성에 관한 □□가 자국의 문화 성장에 큰 기여가 있어 온 것은 인정하겠지만 자국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또는 고전의 전통에 대한 무지가 비판에 옮겨지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 와서 보면 확실히 무모한 짓이었다고 뉘우쳐지는 것이었다.
<출전 : '金管, 「國民·文化·音樂(1~4)', '매일신보', 1941년 7월 23~26일>
(5) 음악시평 여러 가지(1~3)
1. 음악비평에 대해서
자주 말해지는 것처럼 비평은 창작과 대응적인 작용이 아니라 비평은 제작 활동의 전 과정을 통해서 관여하는 것이고 오히려 제작의 상반신이다.
스스로 제작에 종사하기도 하는데 그 가운데 비평의 영위의 계속과 긴장이 의식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제작에 접해서 작용하는 비평에 있어서도 다만 그 내측을 비춰줌에 따라 이른바 이전에 존재하고 있던 아름다움을 향해서 그 작용과 가치를 추구할 뿐 아니라 제작을 통해 새로운 의미와 세계를 발견하고 설계하는 것이다.
제작에 있어서 더욱 어떤 경우는 제작 자체마저 잘 알지 못하는 새로운 의미와 세계를 건립하려는것이다 그때 비평은 어떤 . 기성 제작을 □□하는 제작의 작용인 것이다. 고전작품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조건에서 우리들 앞에 소생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 비평적 제작이 작용하는 것에 의해서이다.
□통에는 음악비평은 영감에 기초한 아름다움의 창조물인 작품과 그 재현(연주)에 대해서 아름다움의 가치를 추구하는 기술이라고 말해진다. 대체로 발생적으로는 음악비평이 그러한 효용성에 편승해 작품과 연주에 추수하는 듯한 형태로 발달하고 처음으로 그 제□특 형태로 기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점차로 저널리즘의 발달과 함께 확고한 성격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음악적인 의미에 있어 비평이현대 작곡가와 연주가의 활동상에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대의 여러 문화 활동을 통해 현저한 지적 작업의 분화적 경향에 기초하는 비평의 종합적 역할인 것이다.
예를 들면 한사람의 작곡가, 한 사람의 연주가와 같이 한 작품, 혹은 한 작가의 전체를 이끄는 것이고 따라서 비평가는 그 주관의 의미지움과 가치지움 등의 이론적 역할에 의해 작곡자, 연주자의 음악상의 작업에 협력하고 보좌하는 것이 된다. 즉 작곡자와 연주자에 있어서 일어나기 쉬운 자의식상의 결함과 작품 혹은 연주상에서 나타나는 의도의 오류를 방지하고 그 길의 전문가에 의해 구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 개의 총명한 음악비평은 항상 엄밀하게 음악표현의 내부에 육친이 되어 침투하는 것이다.
이른바 음악의 현인이 되려는 몸에 어디까지나 음악 이전의, 음악 이상의 세계로 멀리 멀리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른바 음악의 아마추어인 사람에게도 그 두개의 사이에 미묘한 알모니를 가지고 서게 된다.
어쨌든 비평의 본래적인 성격과 반성에서 음악비평의 실제에 있어 그 세대의 여하와 민족적인 마음의 태도 여하에 따라 비평적 태도가 두 가지 가운데 어딘가로 기울어짐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에 음악비평은 단순하게 음악문화에 대한 좁은 시야만으로는 완수될 수 없다. 적어도 비평인 한은 우리나라의 모든 문화, 정치, 경제 등과의 긴밀한 연관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국가가 직면한 역사적 현실 속에서 모든 것이 협력 익찬해야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때 음악비평의 정치성과 모럴리티는 단지 한편의 이론으로서 만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널리 정치, 경제, 문화로시야를 넓히고 그들과의 관련에서 비평의 근거를 구해야 할 태도야말로 절대 필요하다.
2. 국민음악에 대해서
국민예술론이 요즘 무척 성행한다. 예술작품의 창작에 종사하고 있는 자 혹은 지도적 입장에 있는당국자에게, 또는 국민 자신들 사이에 국민예술에 대한 열의와 요망 등이 어느 정도로 찬연한 것인가를 알 수 있는데 어쨌든 무엇에 의하지 않고 국민적으로 혹은 국민 중심으로 판정하는 것이 □□하고 진면목스럽게 논의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번 사변에서 민족 발전의 역사적인 필연의 과정과 일치된 모든 면에서 새로운 국민사회의 운영을 방향 짓는 때이기 때문에 국민예술의 확립을 도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기세라 하지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기세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시태세에 제약된 특수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것이 아니다.
즉 국민적 예술로의 불꽃은 전번의 세계대전 이후 각 국민을 통해 보편적이 된 사상 동기였고, 세계의각국민사회가자각적으로우리생존권을주장하는데이른이래심화되고있는것이었다.
무엇보다 음악에 대해 생각한다면 음악이라는 형식에 의해 어디까지나 국민에게 친숙한 것을 만들에 내는데 대해서는 여러 가지 곤란한 제약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지금까지 음악이 특수한 계급의 전용물에 머무른 이유의 하나로서는 당연히 외국 음악재(財)의 수입의 방법과 그 소화의 방법 등으로부터온 제약을 들 수 있는데 그 때문에 일시적으로 내용에는 어느 정도 보편적인 국민의 마음이 가득 차
있는 것도 그것을 감상할 수 없는 것에서는 어떻게 해도 안 된다.
음악을 국민의 모든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평이화와 음악의 청취에 운동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면 음악가가 국민음악 제창에 힘을 기울일 이유의 일부분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음악은 표현형식으로 보아도, 감상형식으로 보아도 문학이 가지는 제약은 하나도 없다.
인텔리도 농민도 하나의 음악에 감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영화와 함께 음악이 갖는 문화면의 톱을 달릴 수 있는 넓은 가능성을 가진 것이다.
에누리해서 말하면 지금까지 조선에서 음악은 목욕탕에서 유행가를 부르고 레코드 회사의 소비자를 기다리는 듯한 것이었다.
그들은 동경되기 때문에 그들의 아름다움을 가진 것뿐이고 그 때문에 그들의제작적 미숙함과 공상적 이념의 과잉으로 초치된 비극적 고립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음악활동에 대한 요구는 단순한 우연으로 개방되어 현실과 연결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이에 따라 높은 리얼리티로 이른바 현실을 일정 범위 안에서 확실하게 파악하는 그 존대함과 고귀한 빛 등을 문화적으로 결정하여야 하며 건설□으로 돌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에는 우선 음악가 한 명 한 명이 국민으로서의 공고한 자각과 신념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유행가와 같이 자본가가 구하는 대로 대중의 약함에 비위를 맞춘 작품을 계속 만든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술적인 작품을 만들어 온 것도 돌이켜 보면 과연 국민성을 가진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음악의 가능성이 국민문화 위에 차지하는 사명의 중대함을 생각한다면 음악에 이르는 모든 것은다 국민음악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더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3. 새로운 출발
무릇 음악에 종사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그 여러 가지 전문가가 혼합되어 하나의 악단을 이루는 것이기도 한데, 그들 인간과 인간의 언어가 좀처럼 통하기 어렵다는 것은 확실하다. 음악을 위해서라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데 작자와 연주자의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평론가와 연주자의 말이 통하지 않는다.
10년을 하루같이 외치거나 투덜거리는 사이에 서로 무기력해져 버리고 있는 것이 오늘의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진실로 일본적인 예술이 나올 리 없다. 어떠한 음악상의 문제를 들어보자, 우선 음악의 일본적 현실(조선적 현실)이 정당한 이해를 결여할 때에는 바르게 구체적인 발전을 보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자주 지적해왔지만 조선 악단은 실로 어수선하다. 연주가의 대부분은 무계통한 레파토리로 오직 쉽게 희희거리는 한편 작곡가는 낮은 예술적 의욕과 자기의 제작력의 약점을 알지 못한다.
게다가 가장 나쁜 것은 이런 상태가 비판받지 않는다는 것으로 오늘까지도 묵과되어 온 것이다.
게다가 사변하의 오늘, 아무런 음악적 반성도 갖지 않은 채 다만 시국편승형의 □□로 전락해서 우쭐거리는 무리가 득실득실한 것이다.
우리들 음악가는 스스로 음악적 창의를 어떻게 발휘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여서 단순한 시국 추수나 영합은 진정한 음악가의 태도로서는 용납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뭐라고 해도 오늘날의 음악 상태는 음악문화사적으로 보아 심히 낮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한 상태하에서 전체의 수준을 끌어 올려가는 일은 여러 가지 곤란을 수반한다.
음악가가 시대의식을바르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제로는 음악을 통해 음악상에서 음악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그러한 의미의 인식으로는 아직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엉거주춤 분절형 음악가의 경우에는 음악과 떨어진 자기로의 적합성만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것으로 실제는 시국에 편승하고 있는 양상이다.
이른바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역시 조선 음악의 상태는 문화적으로 전개되어 있지않은 것만으로도 불필요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대인식의 부족, 문화적 낮은 수준 등이 오늘날 조선 음악가의 약점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을 확실히 자각하지 않으면 음악가 자체가 문화의 전체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가 되기 쉬운 것이다.
그리고 여러 음악 부문, 특히 예술 부문과 밀접하게 관련, 교류하는 것에서부터 음악의 독자성이 강력하게 발휘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부언한다.
<출전 : 金管, 「音樂時感いろく(1~3)」, '京城日報', 1941년 7월 4~6일>
(6) 예술은 격려되어야 한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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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시대에는 예술과 오락은 숭고한 이상에 매진하는 것이고, 생활하는 것 자체가 민족의 생명을살아나게 하고 밝고 광영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이 절실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의 음악문화 건설의 지도 원리인 대동아전쟁이 가지는 진정한 실체를 파악하고 이로써 우리들의 음악에 □□하는 사고방식과 태도를 결정하고, 그리고 일본이 이루려고 하는 새로운 세계관의 수립과 세계 신질서의 건설 등에 협력해야만 하는 것이다.
거기서 비로소 새로운 음악적 지반의 구축이 이루어진 듯하고 그것이 바로 국민음악으로의 힘 있는 발판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선 생활적 지반에서 유리되었던 관념적 음악적 토양을 버리고 국민대중 위에 개방해야만 한다.
예술에 있어서 인기와 프로페셔널리즘은 운동 경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주 손을 잡고 함께 가는 것인데 대중은 가수이든 연기자이든 혹은 마라톤 선수이든 무릇 꽃다발을 좋아한다.
단지 실제적 비평의 초점이 적극적으로 있을 경우에만, 이런 경향이 어느 정도로 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단순히 볼거리라고 하는 현상 속에서 위대한 예술이 나올 수는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출 것인가를 문제로 하는 이른바 명인□주의는 개개의 것이 개개의 존재이어서 그 □□을 보인 19세기 이후의 개별주의적인 사회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 음악의 생활적 기반이라면 극장음악회장, 객간(客間), 거기에 어두운 사원 등에 한정되어 있어 공동적인 생활이 영위되어가는 가정, 직장, 읍내, 마을 등은 별도로 남겨졌고 문화권 외의 음악 지대였던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에 □□적 기업가에 의해 비속한 음악이 유행하게 된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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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형식만의 음악으로 한 때 기쁨에 넘치고 있던 극장과 음악회장의 팝(포크스?)은 환상적인 동물원에 지나지 않고, 철책을 둘러싼 정원에 지나지 않는, 라스킨의 유명한 말 ‘도둑은 밖, 혹은 광인은 안’이라는 것을 떠올린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들의 음악은 이들의 옛 □□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맹으로 이동해 가는 역사의 필연이 모든 음악적 행위를 □□하는 것이다.
국민생활을 비롯한 산업 생활의 새로운 상태에 대응해 □□해 비책을 강구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 가장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음악이라는 것의 의의를 중시한다는 것은 결국 음악에 관련된 여러 문제를 푸는 공통분모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이다.
진정으로 좋은 음악이라는 것의 기초가 우리들의 학문 세계나 생활상에서 절대로 필요한 것이라는것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종래 우리들 음악분야는 정치의 면에서는 어느 정도 도□한 접촉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 이제부터 □□ 가야할 길은 다른 예술 부문과 비교하여 아득하지만 크다고 생각한다.
음악정책을 통일적, 종합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물론 적정한 지도목표와 그것의 지도기관이 요망되는 것이지만 이 적정하다는 말 속에는 어떤 악단적인 문제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보다는 종래의 문화주의적인 관점에서 추구된 자기목적을 지양하고 이른바 음악군수품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이념적으로 새로운 지도관념을 기초로 해야 하는 것이 보다 중대한 사항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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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오늘날의 음악 방향은 결정되어 있다. 음악만이 아니라 무엇이든 모든 문화 기능의 목표는 하나이고 그것은 불과 같이 명료하다.
다만 음악의 실천이 그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해야 할 현실의 변화에 눈을 돌리지 않아서 낮고 미미할 뿐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음악문화정책이라고 해도 그것은 정치의 문화성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원래 모든 문화활동은 그 자신의 독자적인 활동 분야를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항상 그것은 정치의 원리상에서 성장 발전하는 것으로서 가장 정상적으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음악을 단순한 하나의 수단으로 한 음악정책이어서는 안 된다. 즉 음악의 효용성의 이용에 머무르지말고, 우리들의 음악으로서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데에 가능한 지반을 정비해야만 한다.
대동아전쟁이 가지는 진정한 의의는 이미 서술한 대로 우리들의 음악문화 건설의 지도 원리인데 첫째로 그것은 새로운 세계관에 기초하는 것이고 그리고 둘째로 그것은 세계적 규모를 가지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바꿔 말하면 지역적 문화에 머무르지 말고 세계문화로 넓혀가야만 하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관에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세계를 감득시켜 주는 음악양식으로의 희구가 우리들에게 제출된 문제라고 한다면 그 확고한 음악관을 기반으로 한 음악문화정책의 수립은 나아가서는 대동아공영권내의 모든 음악적 문제를 일본의 국가 의사에 기초해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출전 : 金管, 「藝術は鞭たれる(1~3)」, '京城日報', 1942년 7월 25·28·30일>
4) 김생려(金生麗, 金山生麗)
(1) 반도에서 후생음악의 문제
결전 하 생산 확충의 필요는 국민의 노동력 향상과 보강을 요청하는데 따라서 후생시설의 일익을 담당하는 문화생활도 역시 당연히 생발화(生潑化)시켜야만 하는 발전적 인과율을 낳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생각할 때 국민후생문제의 일익을 담당하는 음악활동도 전시에 그 실질적 기능을 발휘하고 국가총력전에 있어서 문화의 사명을 직재여실하게 수행하기 위해 평시에 편성된 유기적 결합을 다시 확충 강화해야만 한다.
그러나 조선에 있어 후생음악활동의 현상을 볼 때 유감스럽게도 많은 어려운 문제가 쌓여 있다.
어떻게 이들 문제를 해결할까 어떻게 이 운동의 적극화를 도모해야 하는 것인가? 진지하고 정밀한 태도로 연구하고 그 실현에 노력하는 것은 음악문화운동에서 가져야 하는 필수적인 것이다.
근로자는 국가총력의 근원이다.
문화 발전의 모태이다. 이 근로대중에게 생명 넘치는 예술의 양식을 주어 그 활동을왕성하게 하는 것과 함께 그들의 생활 예술의 순수성을 침투시켜 예술에 대한 보편 향수적인 애정을가지게 할 때 여기서 비로소 우리들이 요망하는 흔들림 없는 문화세계의 실천적 발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후생음악은 “국민의 사기의 고무와 노동력의 위안을 위한 음악‘이다. 즉 민중에게 건전명랑한 정신의 함양을 주어 사기를 고무하고 노동자의 위안이 되는 음악을 일반적으로 후생음악이라고한다.
또 이 후생음악은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음악가에 의해 근로자에게 제공되는 경우와, 근로자 자신이 취주악단이 되거나 합창단이 되는 아마추어 단체를 조직해 연주하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필자가 지금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자의 경우이다.
우선 어떠한 음악을 후생음악으로서 근로 대중에게 줄 것인가? 건전한 내용을 가지고 또 근로자의위안을 제공하는 음악은 어떠한 것인가?
그 질적 내용의 규정은 연구를 요하는 어려운 문제이다.
중국사변 발발 이래 일세를 풍미한 감상적인 유행가는 거의 그림자를 감추고, 그것을 대신한 군가시국에 기인한 속악이 거리에 범람했다. 그러나 그들은 문구만을 바꾼 편승적인 음악이면서 유행가의대체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소수를 제외하면 건전한 음악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그것을 후생음악으로서 그들에게 제공할 수는 없다. 그 건전성이 결여된 가장 현저한 징후는 선율의 빈약에서 나타난다.
무엇인가 부를 수 있는 곡조만 있어 그것이 단일한 리듬(율동)에만 익숙하고, 상투적인 화음의 카덴스(종지)에 짓눌려 끙끙거리거나 외치거나 할 뿐이다. 선율은 노래의 생명이다.
명랑하고 조성이 좋은 선율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거기에 음악 전체의 생명력이 압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악성 베토벤의 주명곡,교향곡의 주제를 이루는 선율은 겨우 2, 3 소절, 수개의 음만으로 이루어졌지만, 영롱한 구슬과 같이 혼연한 자극을 보인다.
이 두 세 소절의 선율이 뿌리가 되고 토대가 되어 울창한 큰 나무의 위대한 건축이 되는 것이다.
음악은 추상적, 입체적 구성감 위에 성립된 것으로 그것이 전체의 균형이라는 점에서 빠질 수 없는데, 아무리 부분적인 미감이 있다고 해도 음악으로서의 가치는 상실되어 버리는 것이다.
음악은 하나의 건축이다.
그러나 음악은 실제 건축과 다른 무형적인 존재가 공중에서 떠돌고 있는것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불균형인 것이 있어도 묵묵하게 그대로 통용된다.
조잡한 음악이 아무렇지않게 거리에 넘쳐흐르는 것은 얼마나 걱정스러운 일인가? 그들 유행가(속악)에 비할 때 독일, 이탈리아의 사소한 군가나 행진곡은 얼마나 풍부하고 웅혼한 음조를 띠고 있는가? 청년이 행진할 수 있는 간단한 선율 속에 위대한 베토벤과 바그너와 베르디의 영혼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공자는 “속악(俗樂)을 듣지 마라”고 말했다.
그처럼 인간의 천성에 기초하는 재능과 정열의 육성에 민감했던 사람은 왜곡된 음악이 얼마나 약한 귀를 가진 민중과 젊은이의 감수성을 해치는지, 그 생활을 타락시키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 순간 베토벤의 주명곡과 바그너의 음악을 후생음악으로서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다 그것은 건전, 오히려 교육적인 입장에서 수궁할 수 있지만 위안성에 있어서는 박약하다.
한번 그들의 귀를 빼앗은 선정적인 유행가의 선율은 강력한 접착력을 가지고 그들의 말초신경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고상한 음악의 세계는 현재 그들에게 있어서는 아직 너무 거리가 먼 세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저속한 유행가를 듣게 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다, 일시적위안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들에 대한 영원한 모독이고, 그들의 정신세계에 대한 아편 주사인 것이다.
여기에 고심이 있다. 즉 이 건전성과 위안성의 차이에 대한 해결 방법은 없는 것인가?
지금 □□해서 위안이라는 재래의 관념을 정정할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지금까지 위안이라면 위안을 위한 위안이었고 그로 인해 생활리듬과 사회 규율과 윤리 등과 유리되지 않았던가라는 의구심이 든다.
지금 우리들의 새로운 인생관으로 위안은 생활의 일부를 형성하는 것으로, 위안이 약해짐에 따라생활의 윤리규율을 파괴시키는 것은 아니어야만 한다. 따라서 금후 가능한 한 위안음악은 반드시 재미있으면 좋다, 웃을 수 있으면 좋다라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거기서 일종의 지도성을 가진 것이어야만한다.
즉 어떠한 음악일까 혹은 작곡가가 누구일까에 관계없이 그것은 지도적이고 건전한 내용을 갖추고 있는 것을 제1요건으로 하고 그들이 재미있다, 즐겁다 라고 하는 것은 둘째 요건으로 선곡해야만한다.
그러한 점에 입각해 생각할 때 다수의 악곡 가운데 이상이 요건에 적용될 수 있는 약간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구체적인 곡목을 나열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이 방면에 . 있어서 철두철미한 연구와 애정 충만한 노력으로 적합한 선택이가능할 것이다.
과거 1년여 동안 필자는 경성후생실내악단과 함께 벽촌산지에서 음악을 할 기회로, 혜택을 받지 못하는 광부를 위해 혹은 노무자를 위해 많은 연주회를 가졌다. 전원 모두 곤란과 싸우며 작은 곳에까지 마음을 다해 헌신적인 연주를 했다.
그 연주 곡목은 물론 위와 같은 제1요건을 중요시해 선곡되었다.
처음에는 재래의 통속적인 유행가에 물들어 있었던 그들의 기대에 어긋났다는 생각을 품었지만 그러나 한 곡 두 곡 프로그램이 진행됨에 따라 완미(頑迷)한 그들로서도 이윽고 호기심에 이끌려 다소라도 음악의 분위기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인간은 정도의 차이야 있지만 천부적으로 자연의 법칙에서 나오는음의 움직임에 대한 감동력을 갖추고 있다.
한 번도 악극단의 유행가를 접할 기회가 없어 순수한 귀를가지고 있는 무교육한 노무자들이 유행가나 재즈에 물들어 가던 중 어느 정도의 노무자들이 아주 기쁘게 음악을 들으며 즐거워하지 않았던가?
지금 민중은 조잡한 음악에 의해 자연스런 감수력을 왜곡당하고 있다. 그러나 아름답고 균형이 잡힌 건전한 음악에 자주 접함으로써 그 음악이 가지는 자연스러움은그들의 왜곡된 감수성을 바로 잡을 것이다.
이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면 저 낯간지러운 거리의 유행가는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복잡하고 정교한 교향곡도 그 정수는 간단한 주제를 이룬 선율에 있는 것이다.
이 자연스러운 선율에 익숙해지고, 철저해짐에 따라 그들도 고상한 음악을 이해할 열쇠를 쥘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다시 연주단체의 문제에 대해 서술해보자. 아무리 좋은 음악과 지도 원리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실천으로옮길 연주단체가 없다면 그것은 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도쿄 악단의 현상을 볼 때 그 활동의 활발함과 적극성에는 정말 놀라울 뿐이다.
70여 명의 전속악단을 가진 교향악단이 3개, 그 외에 크고 작은관현악단이 10여 개나 있고, 특히 일류 음악인들로 최근 새롭게 조직된 연주단체가 후생음악운동을 위해 공장에서, 극장에서 혹은 지방에서 대중들에게 기염을 토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로 약진하는 일본문화의 찬연한 장래를 약속하는 것이다.
만주국에도 국영 교향악단이 3개나 있고 매년 4~50만 원이라는 거액을 투자해 민중교화를 위해 쉼 없이 활동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조선의 현상을 볼 때 교향악다운 것은 하나도 없는 상태이다.
이 대규모 교향악단의 존재가 순수음악예술의 표출에 절대적으로 필요할 뿐 아니라 그 연주가 대중에게 주는 영향이 얼마나 큰 가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근래 경성후생실내악단이 장래 반도 교향악기성운동의 봉화를 들고 공장에서는 후생음악운동을 위해 학원에서는 음악교육을 위해, 일반 민중을 위해서는 국민정신작흥을 위해 헌신적인 맹활동을 계속하고 있는데, 그것도 독립무원의 상태이다.
눈물 없이는 보기 어려운 상태이다. 그러나 처참한 정세에서 어떻게 후생음악운동의 적극성을 말하고, 반도 음악문화의 향상을 운운할 것인가.
바꾸어 말하면 당국의 적극적인 지지와 사회 유력인사의 원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없다.
그러나 그 보다도 중요한 것은 악단인의 자각이고, 새로운 세계관의 파악이다.
지금 음악가답다는 것은 꿈을먹고 사는 것이 아니고, 서재의 창을 버리고 널리 민중 속으로 들어가고, 그 생활을 몸에 익혀, 그 몸에 익힌 생활이 스미어 나오는 음악을 생산하고 연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새로운 세계관은 개개의 자발적 의지에 기초해 전체에 대한 헌신으로 나타나는 정신의 우위의 기초 위에서 성립하는 개인의 자발성에 의해, 인간성을 소극적으로 해방시키고 적극적으로 건설시켜 전체에 대한 헌신은 그것에 의해 비로소 윤리적 가치를 완전하게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들의 음악은 정신의 우위에 기초를 두고, 그 근저에서 우리들의 정신적 가능성을 만들어 냄으로써 널리 또 깊이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음악가답다는 것은 지금까지 틀어박혀 있던 자기만족의 아성을 탈피해 가두로 나와야만 한다.
극장에서 은 공장에서, 각설하고 민중에게 좋은 음악을 준다는 신념하에 펼쳐지는 연출이라면 그 어떠한 장소를 불문하고 나와 싸워야만 한다. 지금 일반 민중은 음악에 배고파하고 있다. 한 달에 1회나 2회밖에 열리지 않는 부민관 음악회에 운집하는 청중을 보라. 그에 반해 매일 밤 거의 빠지지 않는 2, 3개의 음
악회가 열리는 도쿄 악단의 활약을 생각할 때 그것은 반도 음악인으로서 너무나도 부끄러운 사실로서대조된다.
이상에서 반도 후생음악의 문제에 관해 모든 것을 말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이 후생음악운동의 적극화는 지금 서술한 불리한 여러 조건을 극복하고 충실하게 함에 의해 비로소 철저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음악문화의 집단적 결합체의 실질적인 기능이 발휘되는 사회, 풍성한 음악활동이 펼쳐지는 사회야말로 후생음악운동의 여러 문제도 병행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출전 : 金生麗, 「半島に於ける厚生音樂の問題」, '文化朝鮮' 1943년 10월호, 66쪽>
5) 박경호(朴慶浩)
(1) 사은음악회의 의의
금월 27일 조선음악협회 주최 사은음악회는 그 개최의 동기와 내용으로 보아 의미심장한 호화판의모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과거 30년에 □□하여 조선악단의 수립 성장에 공로자인 이상준, 오바 유노스케, 김형준, 김인식 4씨의 공로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현 악단의 악인 총동원으로 각원의 일기(一技)를봉공하기로 된 것이다. (중략)
이상은4 선생의 과거 공적의 한두 가지 예에 불과하나 실로 그들의 과거사를 자세히 고찰함에는 흥미 있는 사실이 무한한 것이다.
당시에 □□주의를 줄여 1억 국민의 혈을용솟음치게 하고 애국심을 고취할 때 제국의 군함행진곡, 보국행진곡 만큼 주효한 자가 없었을 것이다.
아국군의 은인들 일본동지이라 할 것이면 국민정조의식의 은인은 위 2곡의 작자인 순호옹을 제1인자로들 것이다.
(중략)
지은(知恩)의 정은 일본대국의 자원이다. 지은의 도가 없이 황도의 정신과 우국의 정신을 탐지할 수 없다.
요컨대 금일 □□□에 입각한 범백의 문화음악은 반드시 지은논공의 정신으로충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대변하는 악인은 흔히 선배를 무시하기 쉬운 경향이 없지 아니 구석기시 과거 □□단에서도 선배의 신임은 상호 병립상태가 되어 일시 □연을 시하였었으나 □□□에□□한 금일에 음악협회운동으로 전기 4씨의 사은음악회를 개최하게 된 것은 적이 만족한 행사인 동시 당야 음악회의 내용도 음악협회 탄생 이후로 □□적인 대연주라 하니 일반 문화인의 기대가 절대한 바있다.
끝으로 이 음악회를 기하여 선배□의 □□노력을 빌며 이미 고인이 된 백우, 김강, 홍난파 선배를삼가 흠모한다.
<출전 : 朴慶浩, 「謝恩音樂會의 意義」, '매일신보', 1941년 11월 27일>
(2) 후생음악의 실제
후생이란 말을 사전에 찾아본 즉 ‘생활의 도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록 하였고, 이용후생이라는 숙어구가 있어 인민의 물질적 생계를 풍부히 만든다는 의미의 말로 사용된다 하였다.
그러나 금일 전시 하 우리나라에서 성히 운위하는 바 후생운동이라 함은 물질적인 뜻 이외에 심신의 보건 향상 재건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을 지칭하는 것이니 스포츠, 문학, 예술, 오락 등에 속하는 모든 부문이 이 후생운동의 제1선이 전사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모든 부문은 국가초비상시에 임한 금일에 반드시 국민 후생을 최고 목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재언을 불요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활에는 개인이나 단체를 물론하고 긴장과 이완의 두 가지 상태가 있다.
특히 총동원령 하에 있는 전시 국민의 생활은 최대한도의 긴장을 요구한다.
국민 노무는 정신적 육체적임을 물론하고 질적으로 양적으로 최대한도까지 증대함에 따라서 이완을 요구한다.
그런데 영적으로 축소된 이완은양적으로 증대된 긴장을 지지하기 위하여는 질적 효과를 증대시키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이것이 후생운동의 근본적 사명이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호미를 들고 땅을 파는 사업전사나 바이올린을들고 건전한 1곡을 켜는 음악가이나 그 중요성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시평 후생음악이라는것이 등장한다.
음악이 인간의 정신과 육체에 주는 위안의 정도를 다른 부문의 오락이 뒤따르지 못한다.
위안뿐 아니라 긴장을 촉진시킴에도 음악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고로 음악은 무리가는 명언이있다.
특히 전시하의 음악은 국민의 호흡이다. 음악이 없이 총후 국민을 이끌고 나아갈 수 없다.
불행히도 구시대의 음악운동이란 개인을 중심으로 한 예술지상주의에 입각하였었기 때문에 국민생활과는그 거리가 상당히 먼 것 이었다. 그러나 금일의 음악운동은 180도의 경향으로 오로지 국민의 정신 함양위안 내지 국민의 음악교육을 목표로하는 후생 □□의 일종이어야 한다.
국민의 오락□□의 왕좌를 점하는 영상상설관에서는 필름의 부족으로 소위 악극단이라는 대용품을 등장시켜 일시는 악극단 범람시대를 생하였다.
그들의 대부분은 단시일의 연습으로 서투른 재즈풍의 가요 발장단 등 무낮 그대로 패□을 □한 망국색을 발로하였으나(물론 악극단 전부가 그랬었다는 말은 아니다) 금일에는 이들도 국책의산하에 들어왔다.
그러나 기실 실연□이라는 것을 보면 아직 전도요원한 감이 불무하다. 이따금 국민가요을 부른다고 일부의 의장을 국민복으로 하였다고 이것을 건전하다고 할 수 없음은 흙탕물에 꿀을 한술 떠 넣었다고 그것이 꿀물이 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드시 흙탕물을 전부 쏟아버리고 그 용기를 깨끗이 씻은 후에 꿀을 담아야 할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악극단 뿐 아니라 일전의 라디오 순서중에 조선어로 하는 재담이라는 것을 들어 보았다.
중간체 크레히돌, 황군 등의 단어가 당치도 않은 대목에 한두 번 나오고 다른 수작은 전부가 구태의연한 익살 익담에 불과함에 실로 적면을 불금하였다.
크레히돌이니 싱가포르란 단어삽입 한다고 반드시 시국의 띄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반드시 건전한 오락이 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싱가포르, 황군의 단어는 오락의 재재로는 적이 부적절할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경조부박, 야비 저열한 노래 대사 몸짓을 보일 필요는 더욱이 없는 것이다.
즉 위에 말한 바와 같이 흙탕물을 근본적으로 청산하고 꿀물을 새로 담지 않으면 안 된다.
후생운동은 언제나 대중을 상대로 한다. 일전 국민정신총력조선연맹 문화부에서 현상 모집한 가곡에 응모한 작품이 백여 편 되었으나 모두가 대중성이 결핍함에 심사상 무쌍한 곤상을 □하였다.
언제나 이 대중성을 무시하여서는 불가하다. 조선의 대중이란 현실상 그 취미의 정도가 매우 저급하다 하여 많은 □□폐가 없을줄 안다.
아직 그들은 □□하나 베토벤을 음미하지 못한다.
아니 이 보다도 한층 떨어저서 모루히네와 같은 재즈식 오락에 중독이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정세가 이런 시라 가장 고급의 수완과 기□□을 가진 모든 예술가가 총동원할 절호의 기회일 것이니 과거에 고급의 음악회가 아니면 연주를 않던 음악가도 지금에는 가두로 공장으로 농촌으로 극장 진출하지 않으면 음악의 후생운동은 실현될 수 없다.
금번 김성태, 김생려씨외 몇 분으로 조직된 후생음악단은 비로소 금야의 제1회의 공연이 있다하니 아직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그 명칭과 주지만으로도 많은 기대를 갖게 된다.
입장료를 받은 공연회뿐 아니라 명실공이 후생□□에 정신하여 음악의 최고이상을 발휘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출전 : 朴慶浩, 「厚生音樂의 實際」, '매일신보', 1942년 6월 11일>
(3) 후생실내악단의 공연 후감
전시 하 후생음악을 목적하는 음악 행사라면 구체제식의 그것에 비하여 적어도 아래와 같은 대조의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즉 1. 예술지상주의에서 국가지상주의로 2. 연주자 본위에서 대중 본위로 3.개인중심주의에서 전체공영주의로 4. □명영리주의에서 멸사봉공주의로, 등인 바 물론 이 네 가지 조건에서 합당하지 못하는 음악행사는 현시 하에서는 용납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행에 있어서 결코 □□구한 문제는 아니다. 우선 단원의 생계 문제만으로도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악의 경비 등에도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
이 때 우리 음악인 등은 여하한 □□을 돌파하면서 용아□진하지 않으면 불가하다.
금반 후생실내악단의 공연회를 통하여 나는 무엇보다도 악단의 행적을 □감하는 동시에 아직도 전도에 보르네오 밀림지대 이상의 음지가 놓여 있다는 것을 동 악단의 상대방이 되는 일반 민중에게 알리고 싶다. 동 악단은 우선 5인조의 실내악으로 발족을 했다. 앞으로 적어도 수십 명의 소관현악단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후생이라는 대사업을 충분히 수행키 어려울 것이다.
현악이란 것은 예술적으로 보아 극히 고상한 종류의 음악이나 그 음악이 너무 융연하기 때문에 대중에 주효하는 힘이
부족하다.
장소가 실내가 아니고 □명 이상이 군집한 야외인 경우에 도저히 그 능력을 실현치 못할 것이다.
반드시 관악기를 보충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믿어마지 않는다.
관악기는 전시 음악인 동시에 행사용 악기이다.
관악기 없이 전시국민의 인식을 고취키 어렵다.
동 악단의 책임자는 누구보다도 이런 점을 더 잘 알 터이나 특히 사회유지의 일□□하는 바이다.
사오십 명의 악극단, 연희단을 할 수 있는 형편이라면 하필 후생악단만이 불령이라는 법이 어디 있으랴! 이렇다고 하여 그날 밤 공연에서 손색이있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피아노를 가한 4중주는 아무리 음악을 이해 못하는 아마추어라도 진□한 흥미를 느끼게 할 뿐 아니라 특히 방아타령과 같은 것은 민중에게 가장 효과적인 재료일 것이라고 믿는다.
김성태 군의 편곡의 수법이 대단히 묘하고 때로는 능란하다.
한 가지 주문이 있다면 방아타령과 같은 민요를 편곡할 시는 좀 더 풍토적 일본민속적 감흥을 주는 리듬을 주로 사용하기 바라고 곡목도양곡보다 일본 조선 지방의 민요를 많이 취급하기 바란다.
솔로이스트의 김생려, 이인범 양씨는 이미정평이 있는 일대의 악인으로서 다시 사족을 가하지 않거니와 □□ 김천애, 이인형 두 분의 솔로는 실로 근래에 들어보지 못한 쾌연이었다.
김천애양의 □□한 천재는 선일 독4창회 시에 알리어 진 바 있었으나 실로 선배 어느 악단에서라도 일류에 참가할 만한 실력을 가진 소프라노라고 단언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 □□□□한 음량과 음색, 그리고 특히 정확한 음정과 퍽이나 극적인 해석에는 무한히 감탄하였다.
당야 내 옆에 앉아계신 모 여사가 나에게 말하기를 ‘참 잘도 합니다.
제발 결혼만은 하지 말았으면’ 나는 ‘무슨 비상식적인 말씀이냐’고 나무래 놓고 한 번 생각하니 그 말씀에 일리가 있음을 발견했다.
결혼은 연애의 무덤이라 하지만 조선 여성 음악가의 결혼은 ‘□□의 화□장’인 듯한 감이 있다.
그렇듯이 성량이 풍부하던 이도 한번 큐피트의 화살을 맞으면 만사가 휴안인 것이다.
이러므로 해서 김천애양과 같은 여성의 천재를 대할 □□는 일종의 비애를 느끼게 된다. 김양만은 이후에 반드시 결혼은 □□ 그대로 꾸준하시기를 빌고 또 빈다. 난파의 곡 「봉선화」때는 많은 사람이 울었다.
우리 악단에는언제나 피아니스트의 반주가 있다. 많으면서도 없는 것이 피아니스트다.
더구나 남자로서는 전선을 통하여 5명 이내 들 것이다. 이때에 이인형씨의 □□와 같은 출연은 □반을 들어마저 하는 바이다.
그의 힘 있는 터치와 명□한 톤 더욱이 깨끗한 테크닉이 좋다.
들을수록 자극하여 꾸준한 노력이 있기를 바란다.
대체로 장편의 난곡보다 대중에게 쉽게 호흡할 만한 산뜻한 소곡에 많이 유의하시라고 특히 주문하고 싶다.
김생려, 이인범 씨의 앙코르 곡을 □□일반이 매우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출전 : 朴慶浩, 「厚生室內樂團의 公演後感」, '매일신보', 1942년 6월 16일>
(4) 악단의 행적(상·중·하)
- 음악은 무기라는 명구가 있거니와 음악은 양식이다는 구절을 만들고 싶다.
무기와 식량은 전쟁태세에 가장 위대한 요소가 되듯이 □□ 국민의 □□가 □대한도 없는 것이다.
국민의 정신통일 시킴에는 음악에서 더한 □□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전쟁 문화에 연연히 국가가 특히 □□하는 바의 목적을달성키 위한 문화 운동일 것이고 과거에 흔히 보고 느끼던 □□의 공리, 허영, 자아 등의 사욕적 행위같은 것은 허용할 □□지로 발전치 못한다. 대동아전쟁 이후 즉 작년 1년의 악단은 어떠하였는가?
지난1년간의 악단의 상태를 논하기 전에 우선 일반이 악단에 대하여 기대하는 바는 무엇이냐 하면 대강 아래와 같은 주문을 하여 무리가 아닌 듯 하다.
1. 국가의식·시국의식 고취
2. 제 방면의 영역에서 봉공하는 총후의 전사에게 가장 건전하고 가장 효과적인 정신적 아스피린(정화제)과 비타민(영양제)의 제공
3. 국민음악의 수립과 발전
4. 국민음악의 훈련과 향상 이렇거늘 조선음악의 1년간 행적은 실로 전도요원한 감이 불무하다.
당국의 오락□□으로 재즈가 초연되고 음악예술의 자유주의적 색채와 구미 숭배사상이 일소된 감이 유하고 그밖에 다소의 □□적 운동의 형세도 없는 바 아니다. 대체적으로 보아 악단의 운동은 문단, 연극, 연예 가티 부문의 활동에 비하여 가장 □□하다고 봄이 가(可)할 것이다.
악단의 □□는 의례히 □□□의 연주회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 조선 악단의 태도이다. 과거 1년간의약간의연주회 발표회 등이 있었으나 이것 역시 그 의의와 성과에 있어서 □□연한 □□을 벗어나지 못하였고그 밖에는 하등의 활동이 없었다.
1억의 □□을 □□□끌게 할 만한 한 □□□의 노래가 조선에서 나온일이 있는가 훌륭한 음악가와 연주가가 제각기 제일이라고 재는 일이 있으나 일본의 □□□□에라도견줄 만한 □□□이라도 있는가? 음악 출판물이라도 또 한 가지가 있는가?
전선을 통일할 만한 권위있는 음악학교가 한 곳이라도 있는가라고 하기 전에 눈을 감고 깊이 깊이 반성해 볼 필요를 □□□하지 않으면 비양심적일 것이다.
조선은 일종의 풍토적 구□□이라고 하든지 사람들이 도□합하지는 못한다.
조선인 음악가는 독주와 독창을 잘하여도 합주와 합창을 못한다는 것은 조선의 스포츠계를 외인이 평하여 왈 조선인의 축구단이 농구단은 개인 개인의 기술은 우월한 자가 많으나 팀워크가 부족한고로 전체적 실력이 □□하다는 것과 꼭 같은 말이다. 팀워크의 부족 이것은 악단에 있어서도 큰 치명적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 고로 금년에 고맙게도 발표된 징병제는 우리 악단에도 일대 개혁을 가져올 줄로 나는 확신한다.
조선의 악인은 근본적으로 무교육하고 따라서 무질서하다. 어떠한 큰 노력에있어 인습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대일본제국 국민으로서의 받아야 할 모든 교육과 훈련의발휘를 하루바삐 조선인 모조리 받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상 상>
관현악 취주악 합창 등과 □□을 생명으로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개 관현악단이 관현악다운음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연습(훈련)하는 그 과정이란 군대의 훈련 그것과 흡사한 바가 있으니 절대복종하는 정신 전체적인 성과를 위하여 질서적인 있는 □□□을 □□□에서의 조선 악단들이 □□□에성공치 못하는 원인이 보다도 □□□의 결핍이라 단정하여도 좋을 것이다. 조선인의 □□□에는 언제나 이 제일□□ 정신방면의 □□□에 부족한다. 복종할 줄도 모른다. 전향할 생각이 없다.
언제나 나는일개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 일개인의 이익을 위하여는 단체의 □□도 불원한다.
행동의 질서가 없다.
□□□을 □□일줄 모른다. □□히 기반하다. 자기 눈의 티끌은 보지 못하고 남의 티만 보고 시비를 한다. 이런 현상은 10인이 1인의 자리에 가보아도 이후로 무수한 음악단체가 생겼었다.
그 중에는안일한 □□□으로 창립을 운영하고 제1회 일본2회의 □□연주회를 남기고도 으레 죽어버리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상태는 단체 뿐 아니라 개인도 그러하니 □□□간에 독창회 독주회를 대서특필 발표한 이가 40명이나 되지마는 2회 이상의 발표를 준비한 이는 4, 5인에 불과하다.
이렇듯이 조선악단에유아사망율이 높은 것은 조선악단의 미□성을 여전히 노출하는 것으로 실로 부끄러운 현상이라 아니할수 없다.
이런 현상은 그 단체이나 개인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단체와 그 개인이 상대로하는 대중에게도 반분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예술가는 대체로 □□□하다. 그 중에도 음악가는 더욱이그러한 듯하다.
그들에게 전유물이 있다면 이상에 말한 □□□과 □□□ 그것뿐일 게다.
그러나 이 양자만으로 □□은 □□□□할 수 없으며 반드시 금전이 요구된다. 여기에서 대개의 □□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대중은 이 □□에 대하여 □□인 냉정하고 무관심하다.
사회는 일하는 예술가를 먹여 살릴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를 책임이 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음악가가 먹을 수 없고음악가가 유지해 질 수가 없다.
이렇거늘 음악인만을 나무라는 것은 실로 불공평한 일이 아니다.
일본의 활동을 보라, 년□□ 경비를 쓰는 교향악단의 □□는 어떠한가. 다양한 음악출연을 음악□□□은 얼마나 씩씩하고 훌륭한가. □□에는 작년에 교향악단 같은 □□의 합창단이 생겨났다가 유야무야 중에 단일개만 있던 경성음악전문학원이 폐교되어 버리고 말았다.
언제까지나 이런 현상이 조선에 □□될것이냐 모름지기 조선의 악단과 조선의 대중은 이때에 맹성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상 중>
지난 1년 중에 토막토막으로 개최된 연주회 중에는 연주회로서의 불만한 것이 불무하였고 단체로서의 □□한 이가 또한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경성음악학교의 내방 연주, 조선음악협회의 음악보국연주행사, 후생실내악단 연주회, 음악경연회 등이 있었는데, 단체로는 경성실내악단이 문자 그대로고군분투하고 있는데 창립 반년여에 전체 50여개 소의 직장, 병원, 학교 등에서 연주회를 개최하고 명실상부의 성과를 거둔다 함은 실로 반가운 소식이다.
앞으로 군의 노력을 빌어마지 않는 바이다.
음악협회의 음악으로는 작년 중에 수회에 음악연주회 보국 주간 행사로 연주회·창작발표회, 계정식, 김원복 양씨의 모차르트의 밤, 김천애양의 독창회·음악 연주회 등의 주최물이 있었다. 음악협회 역시 □□한 봄 □□진행의 □□□태인바 동회 자체의 배전 노력과 사회로부터의 다대한 이해와 지원이 있기를바란다.
지난 여름 도쿄음악학교 지방 연주회에서 베토벤 협주곡을 동수의 □□과 함께 □□한 윤기선씨는 실로 조선악단의 희망의 □□이 될 만하다. 그의 황홀한 □□과 원숙한 □□은 조선이 낳은 양금가로는 실로 일찍이 보지 못한 천재라 하여 여러 가지 호조건을 구비해 가진 악인임으로 그가 충분히□□해가지고 조선에 □족하는 날에는 반도악단에 큰 지주가 될 줄 믿는 바이다.
그 밖에 한 분 □□한 재질이 있으니 금번 음악협회 주최의 경연회에 입상된 소프라노의 유은경 여사이다.
아직 유에 있어서다소 □□한 음색 □□한 기교와 아울러 극히 정확한 음정은 순조선산의 자랑이라 할 만하다.
이미 없어진 음악전문학원의 명예는 유 여사를 통하여 영구히 남아 있게 됨은 불행 중 다행으로 여기는 바이다.
전시하의 예술은 어디까지나 건전함을 한다 함은 항용하는 말이나 이 건전이라는 형용사는 무엇을의미하는가?
이 역시 정신 기교의 양 방면의 우수성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출연하는 기술이 열등하면 예술로서의 효과를 완전히 상실함은 물론이고 긴장되어 있는 비상시 국민의 정서생활에 해되는 바 적지 않은 것이다. 발표욕이란 인간의 본능이라 하되 이 본능은 노력의 결과가 없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발표부터 하겠다는 것은 본말을 전도한 허영적 행위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재래에 흔히 보던 데뷔식의 연주회 즉 학교 음악회, 제자 발표회와 같은 □□물 중에 왕왕 이런 것도 볼 수 있는 바 지금에 그 예를 □하거니와 □□중에는 한심한 것도 불무하다.
주최자 측과 연주자 측의 □□□유감은 하는 바이다. 또 전에 일본에서 조선으로 파견되는 순사가 조선에는 호랑이가 많다는데 대구에는 호랑이가 없겠느냐 근심스레 한 일이 있단 것을 신문지에서 읽은 일이 있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연주 방문을 오는 이 중에도 이와 같이 반도의 인식이 제대로 □인문이더러 있는 것을 본다.
그들이 조선악단의 수준을 덮어놓고 얕게만 보고 허잘 데 없이 저급의 작품을무책임하게 팽개치고 가버리는 일이 지난 수년 내에도 수삼 차 있었음을 기억한다.
물론 그들이 무책임한 소이라 하겠으나 기실은 반도악단의 책임이라 할 것이니 모름지기 반도의 악인은 □□□에 분기하
여 문화 일원 위에 손색이 없게 되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이상 하>
<출전 : 朴慶浩, 「樂團의 行蹟(上·中·下)」, '매일신보', 1942년 12월 25~27일>
(5) 송(送) 히라마 분주(平間文壽)
히라마 분주(平間文壽) 씨가 학무국의 촉탁으로 조선에 온 이후 조선음악협회의 탄생을 비롯하여 종종의 음악사업으로 결전체제 하 조선악단의 생색을 내일 뿐 아니라 악단 자체에 있어서도 실로 미증유의 진보와 향상이 있었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이러한지 이미 3년, 비교적 단시일이지만 다채색각(多彩色角)한 활동상으로 음악□연회, 음악감상회, 음악강습회, 합창제, 작곡제, 신인소개음악회, 국민개창운동, 학생음악운동, 사은음악회 등을 때때로 개최하여 공전의 대성과를 거둔 것은 물론 악단 제원의 노력도 노력이겠지만 이들 음악대중의 솔선 지도 실천의 대장인 히라마 씨의 눈물겨운 분투를 인정치 않을 수 없다.
히라마 씨는 일본에서도 성악가로서 일류일 뿐 안라 동작의 범위가 심히 넓은 □□가 이었고 겸하여그는 일본에 있을 때부터 조선을 잘 이해하는 악인 중에 제일인자였음으로 조선의 악단을 일본의 그것과 불가분의 유기적 관계를 맺어 문자 그대로 악단적 ‘내선일체’를 실현함에 최적절한 인물이 아니었던가!
이렇거늘 지금에 그를 보내지 아니치 못하게 된 반도의 악단은 명장을 보내는 군대와도 같이 실로딱한 느낌을 준다.
일본 민족 중에 특히 조선인은 성악적 자질이 풍부하여 조선에서 다수한 제일류 성악가가 배출된 것도 사실이다.
성전 하의 음악은 어시호(御是乎) 그 사회적 효용을 □칙하게 되었다.
건전한 가요는 국민의 사기를 고양하고 국□일치의 정신을 함양함에 있어서 그 가치를 인정케 된 것임으로 그 지도자의
역을 담당할 우수한 성악가의 배출은 현 조선악단의 급무이다. 실로 히라마씨 내조(來朝)의 때에는 조선의 젊은 음악가들 중에 이와 같은 대역의 장래를 꿈꾸는 자 허다하였거늘 아직 그 음악이 완□되기에 씨가 일본으로 돌아가게 됨은 참으로 유감천만이다.(후략)
<출전 : 朴慶浩, 「送平間文壽」, '매일신보', 1943년 7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