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국가 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했던 야자시 이야기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사이며 문헌 중에서 가장 신뢰할만한 기록입니다. 여기에 역법에 관한 기록 중 야자시를 측정한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조선 시대에는 역법의 시간 측정을 굉장히 중요시했습니다.
다음은 야자시로 표기가 된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세종 19년(1437년) 기록에 ‘성구환’을 사용하는 법은 첫해 동지 첫날, 새벽 전 야반 자정을 시초로 하여
(用星晷環之術。 初年冬至初日晨前 夜半子正 爲始...)...
▶ 야반을 자정으로 표기하고 있다[야반=자정]
야자시의 또 다른 기록을 보면
영조 즉위년(1724년) "황해감사가 장계하기를....., 11월 22일 야자시에 뇌성이 크게 울렸다.
(黃海監司狀啓... 十一月二十二日, 夜子時 , 雷聲大作)“
▶ 12월22일 야자시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 "야자시에 뇌성이 크게 울렸다"라는 원문에서 번역자들이 "야자시"를 "자시"라고 잘못 번역함.[이와같이 번역가들의 야자시에 대한 무지에서 혼란이 오게 된다]
▶ 12월 4일에 조선실록을 보면 "11월 22일 야자시에 대한 장계"가 기록이 되어 있다
▶ 그래서 당일 11월 22일 실록을 찾아보니까 1724년 11월 22일의 일진은 임술일이다
▶ 11월22일의 일진은 임술이 되고 그 다음 날 11월 23일의 일진은 계해일이다
설명
본문 글 황해감사의 야자시와 관련이 된 글의 일진(日辰)을 보면, 1724년 11월 22일 야자시는 임술(壬戌)일 입니다. 1724년 11월 23일은 계해(癸亥)일이고요. 그런데 야자시이므로 23시에서 24시까지를 말합니다
11월 22일의 23시에서 24시전까지의 일진을 뽑아 보면
그 시간대의 일진이 어디에 소속이 되어 있는지 확인이 가능한 겁니다
즉 정자시를 사용했다면 23시부터는 그 다음 일진에 소속이 되는 것이니까
계해일진이 나와야 하고
만약 아쟈시를 사용했다면 임술일진이 나와야 정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실제로 11월 22일 야자시를 임술(壬戌)일로 기록했습니다.
즉 야자시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도사폰 만세력에서 1724년 11월 22일 야자시(23시에서24시)를 뽑아보면 다음 아래와 같습니다.
일진이 임술이 나오죠.
이러한 기록은 실록을 찾아 보면 확인 할 수 있습니다.
1724년 11월22일 야자시(23시~24시)는 임술일이 됩니다 (조선왕조는 음력 사용함)
그 다음 일진인 계해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정자시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되는 셈입니다
만약 정자시로 뽑게 되면 다음 아래와 같습니다
그런데 만세력으로 11월 22일 야자시(23시에서 24시)를 정자시로 바꾸어서 뽑아보면 계해일로 나오게 됩니다. 곧 정자시에서는 23시부터 그 다음 일주로 넘어간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므로 임술(壬戌)일(日)이 아니라 그 다음 일인 계해(癸亥)일(日)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 아래 자료 참고하세요
그렇게 되면 조선왕조실록에서는 11월 22일 야자시를 임술일로 기록이 분명한데 정자시로 뽑은 계해일이 되면 조선왕조실록과 날짜가 완전히 틀려지므로 거짓된 자료가 됩니다 그러므로 11월22일 야자시는 임술일이지 계해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록에 의하면 조선관료들은 일상적으로 23시에서 24시 전까지를 야자시로 사용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사관들이 기록할때 참고한 역서가 만세력입니다 곧 만세력이 현대의 달력인 겁니다.
그 만세력으로 현재 우리가 사주팔자를 뽑는데 사용하는 달력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