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곧 숨을 거둘 것 같았다. 올해 80세인 할머니는 폐암 4기로 그간 항암 치료를 받다가 최근 중단했다. 폐렴이 점차 심해졌고 열이 났다. 혈압이 떨어졌고 의식이 흐려졌다. 호흡은 불규칙해졌고 소변량이 줄기 시작했다. 승압제(혈압을 인위적으로 높여주는 약)로 근근이 버티고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오늘을 넘기기 힘들어 보였다. 급히 가족들을 불러 모았다.
환자 가까이 살던 막내딸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던 자녀들은 모두 각자의 일상을 팽개치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회사에 연차를 내고 왔고, 가게 문을 닫고 왔고, 학교에서 오는 딸의 간식을 만들다가 왔다고 했다. 한데 모인 가족이 이제 곧 숨을 거두려는 엄마 옆에 모였다.
“폐렴이 나빠지며 패혈증이 심해졌는데, 이제는 얼마 못 버티실 것 같아요. 승압제, 항생제, 피검사 모두 중단하겠습니다. 의미 없는 연명 의료에 불과해요.”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 자식들은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우리 엄마가 돌아가시는가 보구나. 엄마… 엄마… 자식들은 울며 엄마 곁을 지켰다. 하지만 상황은 반대로 흘러갔다. 그토록 보고 싶던 자식들이 한데 모이자 할머니는 기운이 났는지 오히려 좋아지기 시작했다. 승압제를 쓸 때는 속절없이 떨어지던 혈압이 승압제를 중단하자 좋아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지 않았다. 모든 연명 의료가 중단되었는데도 괜찮았다. 할머니가 얼굴을 봐야 할 사람들은 다 봤다. 자식들은 장례 준비도 모두 마쳤고 어머니 임종을 지킬 마음의 준비가 다 됐는데도 할머니는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식들이 모두 모인 그 순간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시간은 계속 흘렀고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윽고 눈물을 흘리던 자식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안 돌아가실 것 같다는 말이 나왔고 의사들이 잘못 판단한 것 같다고도 했다.
이쯤 되면 의사들도 머쓱해진다. 환자가 곧 돌아가실 거라고 했는데 돌아가시지 않은 채 상황이 지속하면 의사는 양치기 소년이 된다. 회진 가서도 의사라고 딱히 할 말이 있지 않다. 그래도 안 돌아가셔서 다행이지 않냐, 하루라도 더 얼굴 볼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된 것이 어디냐, 이런 말도 하루 이틀이다. 그렇다고 환자가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랄 수도 없으니 그저 말없이 회진을 끝낼 때도 있다.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환자의 혈압이 조금 더 떨어져서 당직 의사가 다시 확인하고 ‘이제는 정말 돌아가실 것 같습니다’라고 말해도 더는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다. 예, 알겠습니다, 끝까지 잘 부탁합니다, 정도로만 짧게 말하고 만다.
하루는 회진을 돌고 나오는데 아들이 병실 밖으로 조용히 따라 나왔다. 그리고 공손한 태도로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 저희 어머니 말씀인데요… 제가 내일까지 연차여서 삼일장을 치르려면 우선 회사에 다시 복귀했다가 다시 연차를 내야 장례를 치를 수 있어서요. 절대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 선생님 보시기엔 언제 돌아가실 것 같으세요?
점잖은 아들은 오해하지 말아 달라며 예의 바른 태도로 여러 번 이야기했다. 동생도 딸아이가 이제 곧 중간고사여서 집을 너무 오래 비울 수 없다고 했다. 다른 아들도 중요한 거래처와의 약속을 더 미룰 수 없다고 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들에게는 그들을 기다리는 삶과 일상이 있었다. 회사도 가야 했고 아이의 학원 일정도 챙겨야 했으며 거래처 마감 일정도 지켜야 했다. 그들이 삶의 시계는 어머니 임종이 지연되는 것과는 별개로 째깍째깍 돌아가고 있었다. 이는 불효가 아니다. 그저 할머니 임종의 시간과 자식들 일상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갈 뿐이다. 허둥지둥 달려온 자식들은 각자의 일상을 챙겨야만 했다. 내가 보기에는, 할머니께는 죄송하지만 할머니가 이제 그만 돌아가셔야 자식들이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어 보였다.
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자리를 지키던 자식들은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한 채 하나둘씩 각자의 일상으로 잠시 돌아갔다. 그들은 ‘다시 올게, 네가 수고 좀 해줘라’, 하며 막냇동생에게 뒤를 부탁하고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평소에 늘 엄마와 함께 있던, 할머니의 막내딸만 혼자 있게 되자 할머니는 그제야 새벽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결국 어머니의 임종을 지킨 것은 막내딸 혼자였다.
사진 게티이미지
20년간 방송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활동해 온 홍영아 작가가 ‘KBS 파노라마: 우리는 어떻게 죽는가’를 만든 이후, 죽음 가까이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펴낸 책 『그렇게 죽지 않는다』에도 똑같은 사연이 나온다. 그 책에서 박영준 상조 팀장은 말했다. “임종을 보여주는 자식이 따로 있나 봐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임종을 나에게 보여주기 싫으셨던 것 같아요.” 나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부모가 임종을 보여주는 자식은 따로 있는지 모르겠다. 부모에 대한 사랑의 크기와 임종을 지키는 현실은 별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이 여럿이어도 다 같은 자식은 아니지 않던가.
생각해 보면 부모에게는 동네에 자랑하는 자식이 있고, 부모가 끌어안는 자식이 있다. 알아서 챙겨 먹는 자식이 있고 부모가 한술이라도 더 떠먹여야 하는 자식이 있다. 힘들 때 내가 의지하는 자식이 있고, 힘들 때 내가 의지처가 되어줘야 하는 자식이 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지만, 유난히 아픈 손가락은 있기 마련이고 유난히 편한 손가락도 있기 마련이다. 내가 힘들 때 내 속 모습까지 다 보여줄 수 있는 자식은 정작 또 따로 있다.
어쩌면 할머니는 정말 마음을 줄 수 있는 자식에게만, 내 속 모습까지 다 보여줄 수 있는 자식에게만 임종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자식들이 임종을 못 지킨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임종을 보여주기 싫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자식이 여럿이라고 해도 부모가 제 임종을 보여주는 자식은 정작 따로 있는가 보다. 그런데 임종을 지킨다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오히려 평소에 잘하는 일은 훨씬 간단해 보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