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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자유함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종교는 인간들이 심심해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종교에는 인간의 모든 꿈과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신에 의해서 이 땅에서 보살핌을 받으면서 어려움도, 고통도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항상 기쁘고 좋은 날만 있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것들을 얻기 위해 인간들은 많은 노력을 합니다. 정한수 떠놓고 빌기를 백일을 합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결국 이간이 만든 종교의 출발은 인간들의 바램과 소망입니다. 그것을 얻기위해 종교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예를 들어서 기독교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헌금하고, 헌신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힘을 통해서 자신을 보호하고, 복을 누리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면 불교에서 예불하고, 기원하는 모든 것도 부처의 자비하심을 통해서 자신의 모든 일이 잘되어 나가기를 추구하는 목적이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마태복음 9:2-3)
참람하다라는 뜻은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하나님을 모독한다는것입니까? 죄를 용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하나님이 된 것처럼 죄인을 용서를 한다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첫째 이유입니다.
두번째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이유는 아무 공로, 열심, 행함없이 단지 믿음을 보시고 죄를 용서한다는 것을 그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 행함없이 어떻게, 아무 열심 없이 어떻게, 아무 공로없이 어떻게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율법의 틀속에 넣어 정좌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 다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전에 다 중풍병자환자와 같은 죄인들입니다. 주님이 그를 용서하셔서 침상을 들고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게 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당신의 핏값으로 우리를 살리시고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은혜에 감사하며, 죄인이었으되 구원받은 죄인으로 사는 것이 성도인 것입니다. 구원받은 죄인을 다른 말로는 복음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나 자신을 살펴 보세요 율법의 정죄함에서 이제는 복음의 자유함속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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