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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6일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 : 다니 9,4ㄴ-10
복 음 : 루카 6,36-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바람둥이 남자가 있습니다.
워낙 여자 문제를 많이 일으킨, 어느 날 동생이 형에게 “제발 정신 차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형은 어릴 때, 동생에게 엄마의 사랑을 빼앗긴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엄마가 동생만 챙기는 바람에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었고,
결국 지금의 인간관계까지 망치고 있다는 항변이었습니다.
이 남자의 바람기가 과연 어머니 때문일까요?
어떤 형제님은 어린 자녀에게 폭력을 자주 씁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주변에서 말리자, 어렸을 때 자기 부모님께 맞았던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많이 맞은 경험이 자기 역시도 그렇게 폭력을 쓰는 사람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의 폭력성이 과연 부모 때문일까요?
이 두 사례 말고도 ‘~탓’을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과거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를 탓하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로써 자기의 문제로부터 도망가는 것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났고 절대 바꿀 수가 없으니, 자신의 문제도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나의 모든 문제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자기는 늘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지금 모습을 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탓’만 하면서 지금 모습을 계속하고 싶을 뿐입니다.
나는 문제 없으니 그냥 이대로 살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으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나의 문제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도 문제를 넘기게 되어서 모두 힘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자비로우신 아버지’라고 선포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하게 됩니다.
따라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하지 않는 삶, 단죄하지 않는 삶, 용서하는 삶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앞선 예에 등장하는 사람처럼, ‘~탓’을 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면
자기도 그러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랑의 삶을 그대로 되갚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그저 따를 뿐인데도,
그런 삶을 살 때 더 많은 은총과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탓’을 하는 삶에서 철저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비로우신 아버지’에 집중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을 보고 또 이를 따르는데 철저한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에게 문제 되는 것들을 과거의 일로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지금, 그리고 나 자신이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에 매이지 않고 올바르게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이는 단지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자비로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곧 우리는 아버지의 ‘먼저 베푸신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나아가서, 우리 안에 당신의 거룩한 형상인
‘자비의 얼굴’을 심어놓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바로 그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
이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마라.”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주어라.”
그러니 ‘자비의 실천’은 우선 심판과 단죄를 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악을 피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먼저’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듯이,
‘먼저’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먼저’ 용서하면,
저절로 단죄와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단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하면 단죄, 심판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악을 피하되 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비록 자신이 죄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나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악이 스스로 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을 베풀면 악이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러니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한 개의 촛불을 켜야 하고,
평화를 보존하려 하기보다 평화를 창조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0,21)
그러니 우리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혹은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나아가서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용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아직도 용서하지 않고 있는 자신마저도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용서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용서하시니 우리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주님!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제 안에 심어진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남을 용서하여라.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
자비는 훌륭한 덕으로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경건한 사람들에게 최고로 어울리는 덕이다.
이 자비는 하느님의 속성임을 항상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37절)
남을 심판하지 말고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의무지만,
남의 일에 참견하느라 바쁘다. 남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다른 이의 허물을 찾거나 들추는 대신 자신의 잘못을 성찰한다.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 심판하는 그대로 우리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마태 7,2 참조).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37절).
우리는 하느님을 세상에 보여주고 정의와 용서와 은총으로 심판해야 한다.
그러면 정의에 따라 심판받을 때, 은총으로 용서받을 자격을 지니게 된다.
정의에 따르지 않고 보복하려고 심판하지 말라는 뜻이다.
자신을 위해 앙갚음하는 심판은 안 된다.
심판하기보다는 훈계하거나 충고하라는 뜻이다.
“용서하여라.”(37절) “주어라.”(38절) 용서하고 베푸는 것,
이것은 기도를 싣고 하느님께로 날아가는 두 날개라고 한다.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주고, 가난한 이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선을 베풀고, 용서하며 너그럽게 베푸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자선을 받고 용서받으며 너그러운 대접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의 곳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더 많이 주실 것이며, 우리의 죄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충분히 주시는 하느님께서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38절) 하셨다.
용서는 단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내 안에 미움과 분노가 있으면 바로 나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권고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면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며, 좀 더 자비롭게 용서를 베풀며
하느님과 함께 여정을 계속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성직자의 어려운 점을 농담 삼아 얘기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면 “너무 직선적이야”하고,
지적하지 않으면“너무 타협을 하는구만!”하고 말합니다.
강론할 때 원고를 보고 하면, “너무 딱딱하고 재미없어”하고
원고 없이 하면, “왠지 깊이가 없는 것 같애”하고 말합니다.
여러 예화를 들면, “성경 말씀은 도대체 하질 않는구만!”하고
예화를 안 하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않아” 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면 “인기 끌려고 그러는구만!” 하며
부자와 가까이 하면 “돈 있는 사람만 좋아하고 너무 귀족적이야!”하고 말합니다.
이래저래 한 소리 들으니, 성직자가 고집스러워지나 봅니다.
누구에게 칭찬받는 것은 자기의 역할에 관계없이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꾸중을 듣는다든지 비판을 받게 된다면
아무래도 기분이 상하며 마음에 화를 쌓게 됩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나를 부정적으로 생각한 그는 나를 바로 보게 도와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바른 인생길을 알려는 사람은
훈계를 달갑게 받고 미련한 사람은 책망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잠언12,1).
상대의 비판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운 충고로 그를 구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6,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받기 위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얼마나 넓고 깊은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국 그대로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주시지만,
담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으면 혜택을 입을 수 없습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는 이웃을 비난하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교부 푀멘은
“비난과 험담의 주제에 있어서는 그것들을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마음속에서 파헤칠 필요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마음속에서 확실하게 분별하고자 하더라도
그것이 이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난과 험담하는 입은 스스로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비방하고 험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누구에게 충고하려거든
자기 자신에게 먼저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충고를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피해를 주고 아프게 하였다면 그 사람이 악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보다 약해서 악의 세력에 이용당했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지요?
악의 세력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모두를 선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선한 능력이 크게 드러나게 되고
악의 세력은 발붙일 곳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그렇다고 선한 이라도 그를 우상처럼 섬기지는 마라.”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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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담은 무엇입니까? 남의 잘못된 점이나 흉을 들추어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험담은 진실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니며,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험담은 단 하나 상처만 깊게 남길 뿐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나무를 옮겨 심으면 몇 달은 몸살을 앓는다고 합니다.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적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뉴욕에서 댈러스로 오면서 저도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지리를 파악해야 합니다.
성당까지는 걸어서 40분이면 가기에 걸어 다니려고 합니다.
꼭 가야할 곳을 알아야 합니다.
마트, 은행, 주유소, 식당, 미장원, 병원, 차량 정비소, 산책로 등을 알아 두면 좋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입니다.
본당의 봉사자들을 파악해야 합니다.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전처럼 기억력이 좋지 않으니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직원들을 알아야 합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쁠 때 함께 기뻐해 주고, 슬플 때 함께 마음 아파해 줄 사람을 아는 것은 복입니다.
셋째는 업무를 숙지해야 합니다.
12년 만에 본당 사목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기에 미국 교회와도 소통을 해야 합니다.
33년을 사제로 지내고 있지만 본당 사목은 늘 새롭고, 긴장이 됩니다.
본당 사목은 장기계획과 단기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댈러스 성당은 3년 후면 설립 50주년이 되기에 그에 맞는 계획을 세워야 하고,
매년 본당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내년쯤에는 저도 이곳 댈러스에 뿌리를 내리고, 여유 있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한국에서 오지 않고, 뉴욕에서 왔기에 좀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민등록과 비슷한 쇼셜넘버를 이미 받았기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운전면허증도 뉴욕에서 이미 받았기에 텍사스 면허로 바꾸기만 하면 됩니다.
은행 계좌도 이미 개설했기에 이용에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린카드를 받았기에 비자 때문에 한국에 다녀오지 않아도 됩니다.
5년 전에 동창 신부님의 초대로 2달을 지냈습니다.
그때 만났던 분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니 마치 집에 온 것처럼 낯설지 않았습니다.
뉴욕에서 자동차로 여행을 하면서 왔기 때문에 시차도 느끼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바로 옆 본당에 서울 교구에서 파견된 신부님이 있어서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사순특강을 서로 바꾸어서 하기로 했습니다.
작년부터 서울 교구에서 보좌신부님을 파견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영어도 잘하시고, 겸손하십니다.
부모님이 미국에서 살기 때문에 부모님을 만나기도 좋다고 합니다.
뉴욕에서 함께 온 신부님들이 사제관의 불편함을 모두 해결해 주었습니다.
인터넷을 업그레이드했습니다. 문도 열쇠키에서 번호 키로 바꾸었습니다.
컴퓨터의 선도 모두 정리해 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품 안에서 잘 지낼 수 있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악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하느님께로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나의 허물과 잘못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 사도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초대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간’입니다.
둘째는 ‘청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셋째는 ‘선행’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이 10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어두운 밤하늘의 별과 같습니다.
세상은 선한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아간다면
어떤 악의 세력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저희 구원의 하느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를 구하소서. 당신 이름 위하여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남을 되질할 되를 깨버린 이의 행복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남을 심판하지 않으면 나도 심판 받지 않는다는 주제입니다.
내가 자비로울 때 자비로운 기준으로 심판받습니다. 주는 대로 받습니다.
반면 남을 단죄 하면 그것으로 나도 단죄받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테네와 엘레우시스 사이의
성스러운 길에 살았던 불량 대장장이이자 산적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손님에게도 완벽하게 맞을 것이라고 주장한 침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방법은 잔인했습니다.
여행자가 침대에 비해 키가 너무 작으면 선반에 눕혀 잡아 늘여 펴곤 했습니다.
여행자의 키가 너무 크면 다리를 잘라서 몸에 맞도록 만들었습니다.
테세우스는 처음으로 아테네를 여행하던 중 프로크루스테스를 만났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자신이 다른 많은 사람에게 가했던 것과 똑같은 잔인한 대우를
테세우스에게도 가할 생각으로 테세우스를 침대에 누워 쉬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프로크루스테스를 제압하고 그를 자신의 침대에 눕혔습니다.
그런 다음 프로크루스테스를 같은 방식으로 대했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손님을 괴롭히던 바로 그 방법으로 죽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며 나는 얼마나 부자유스럽습니까?
자기도 그렇게 못하면서 남에게 하도록 강요하면 다른 사람들 눈치가 있으므로
말도 실수할까 봐 제대로 못 하고 행동도 경직됩니다.
자기 판단의 감옥에 자신이 갇히는 것입니다.
자유로워하고 싶으면 자비를 원하면 남을 판단하는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우리 속담에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 진리를 압니다.
내가 외로우면 다른 사람들을 외롭게 만들고 있고
내가 짜증 나면 분명 다른 사람들을 짜증 나게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영화 ‘셰임’(Shame)에서 주인공 브랜든은 평범한 직장인지만
성에 대한 강박적인 중독으로 비밀스러운 삶을 살아갑니다.
당연히 그는 항상 고독하고 공허하고 외롭습니다.
여자를 자기 욕구의 충족 도구로 여기기 때문에 세상도 그를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브랜든의 여동생 시씨는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브랜든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브랜든은 시씨의 삶을 응원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상사 데이비드와 술집에 들렀을 때
시씨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데이비드는 그녀를 원하게 됩니다.
데이비드는 유부남임에도 브랜든의 집에서 그의 동생과 잠자리를 가집니다.
데이비드는 구토가 날 정도로 직장 상사가 밉지만, 그 화풀이를 동생에게 합니다.
오빠에게 쫓겨난 동생은 오빠에게 계속 전화하다가 자살 시도를 합니다.
동생을 품어줄 수 없었던 이유는 유부녀를 막론하고 흑심을 품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가 직장 상사와 동생에게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이유는 자기를 먼저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이 갈등의 굴레 안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받고 싶거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영화 극한 직업에서는 형사들이 잠복근무하기 위해 치킨집을 차렸는데
의외로 장사가 잘된다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왜 장사가 잘됐을까요? 사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돈 벌려고 한 게 아니니 아무 생각 없이 퍼주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주방장이 주인이 미워서 양념을 팍팍 썼더니 장사가 더 잘되더라는 것입니다.
더 주려 하니까 더 받습니다.
이 진리를 알면 세상에서 인정받지 않을 수 없고 가난할 수도 없습니다.
남을 건강하게 하는 트레이너가 몸이 안 좋아지기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돈을 떼먹으려 하고
남의 명예를 도둑질하며 남을 아프게 합니다.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몇 배로 돌아올 줄 모르면서 말입니다.
행복해지고 싶거든 우리 안에 사랑을 방해하는 남을 심판하는 되를, 깨버립시다.
저절로 심판하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죄와 싸웁시다.
이웃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할지만 생각합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세상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받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황금률을 능가하는 하느님의 자비로움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이 전하는 황금률이다.(38절)
이는 마태복음이 산상설교(5장-7장)의 결론에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으로 제시하는 황금률(7,12)과 같은 것이다.
마태오 복음의 산상설교가 루카 복음에서는
평지설교(6,20-49 참조)에 해당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루카 복음의 황금률도 평지설교의 결론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완성하는 방법으로
피력하시는 산상설교나 평지설교에서 그 가르침을 꿰뚫는 정신은 황금률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므로
‘너희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것이다.
사실은 황금률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복음에 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마태오 복음 : 마음, 목숨, 뜻; 마르코복음: 목숨, 생각, 힘; 루카복음: 마음, 목숨, 생각)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라”(신명 6,5)는 하느님 사랑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아껴라.”(레위 19,18)는 이웃사랑, 즉 사랑의 이중 계명이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으로 제시하고 있으나(마태 22,36-40; 마르 12,28-33),
루카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10,25-28) 제시하고 있다.
요한도 하느님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새 계명’으로(13,34) 제시한다. 물론 다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황금률의 정신을 가지고 첫째가는 계명인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한다면
신약의 모든 율법을 준수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사랑은 늘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하며,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사랑의 표면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숨겨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남을 비판하지 않는 것, 남을 용서하는 것, 남에게 주는 것’ 등이다.
오늘 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황금률의 정신을 지키는 수준에 모물거나
단순한 사랑 실천으로 만족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거래의 법칙이 있다.
그것은 준 만큼 받게 되고, 받은 만큼 주게 되는 법칙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칙은 다르다.
하느님께서는 받은 만큼만 돌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38절) 우리에게 안겨주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처사는 하느님의 자비로움 때문이다. 따라서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는
예수님의 요구가 평지설교의 새로운 핵심으로 부각된다.
이는 마태오복음이 율사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옳게’ 사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5,48)는
엄청난 요구와도 같은 것이다.
이는 또한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13,34)는 새 계명과도 같다.
하느님의 자비로움과 완전함,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은
모두가 원수까지도 예외 없이 사랑하는
무조건적이고 끊임없는 하느님의 사랑에 기인한다.
오늘은 하느님의 厚德한 자비로움에 받은 것보다 적게 돌려주려 하고,
준 것보다 은근히 더 받으려는 우리의 간사한 마음을 비추어 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이 보나벤뚜라 수녀
오늘 복음은 짤막하다.
예수님은 대뜸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
이미 그 앞 말씀부터 요구사항이 심상치 않았다.
우선 원수를 사랑하라로 대표되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인내와 감내, 수용과 포용 시리즈를 요구하신 다음(6,27-30),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라고 하신다(6,31).
남이 해준 걸 봐가면서가 아니다.
남이 해주든 말든, 내가 그렇게 바라는 만큼 남에게 해주라는 것이다.
내가 받기를 원하는 것이 남에게 해주는 기준이니 결코 야박할 리가 없다.
또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잘해주지 말고
모두에게 잘해주라 하시면서 죄인들의 예를 끌어오신다.
그들보다는 나아야 하지 않겠니?
그러면서 죄인들이 할 수 없는 일로 여겨지는 원수 사랑이 계속 요구된다(6,35).
안 해요! 아니 못 해요! 하려는 찰나
예수님은 하늘에서 받을 상을 내거시면서 우리를 끌어당기신다.
원수는 당연히 너희의 노력에 보답하지 않겠지만
그 보상은 하늘에서부터 올 것이라고 말이다.
뿐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분(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이런 강력한 보상에 대한 기대는 내 뇌의 도파민 분비를 자극해서 행동을 하도록 만들겠지만,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던져 놓은 숙제 앞에 흠칫한다.
바로 아버지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바로 오늘 복음 말씀이다.
이번에는 원수고 죄인이고 좋아하는 사람들이고 간에
모든 남들을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리고 용서하라고. 마치 이것들이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필수 팁처럼 나열된다.
적어도 이렇게 하면 자비롭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분량의 말씀만 읽어도 매우 불가능한 걸 나에게 바라시는구나... 싶은데,
이렇게 앞의 말씀과 이어서 읽으면 하느님은 내 좁아터진 마음 구석을 잘 모르시고
이런 걸 말씀하시는 건가... 싶어 미안해질 지경이다.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롭고 싶지 않다...가 솔직한 심정이다.
이건 찐 하느님의 아드님인 예수님만 하실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때때로 적당히 안 자비롭고 싶다. 아직 원수랄 것까지는 없지만
살다 보니 내 마음속에서 심판하고 단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되도록 멀리 두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한 개 더 주고 뭐 그럭저럭 살고 싶다.
38절에서 약속해 주시는 후한 보상에 혹하기에는,
내가 남을 심판도 단죄도 하지 않고 다 용서하면서 자비로워지기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기 때문에 도파민이 나오다가 멈춰 버린다.
문제는 예수님이 하신 이 요구사항들이
이미 하느님과 나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이 하신 일들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나에게 자비롭지 않으셨다면... 나를 심판하셨다면...
나를 단죄하셨다면... 나를 용서하지 않으셨다면...
내 수많은 마음의 잘못들과 그 외적 표현이나 결과가 하나하나 심판의 대상이었다면
그 누적치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하느님의 이러한 마음 씀씀이 덕에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또 유아독존처럼 사는 것 같지만, 내가 자비롭지 않았어도 나는 하느님의 자비를 이미 닮은
누군가의 자비로, 희생으로, 양보로, 용서로 살고 있었다는 말이다.
바로 하느님이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수 많은 사람들 덕분에 말이다.
내가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벽하게 자비로울 수는 없겠지만,
내 열 개만큼의 자비에 언제나 한 개를 더 보태려는 노력을 할 수 있어야겠다.
이거야말로 이미 나에게 주었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넘치도록 받을, 내 주위의 알 수 없는 '누군가'들이 나에게 주는 깨달음이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가없는 자비에 힘입어 이만큼 된 사람들이고,
그만큼은 못되겠지만 아버지를 따라 어색하게 서로 자비 한 개씩 나누는 이들이 되면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우리를 심판도 단죄도 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우리의 실패한 자비 나눔을 용서하시면서 계속하라고 격려 하실테니까 말이다.
출처 :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