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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인간의 삶과 사유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을 일컬어 인문학이라 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른다면, 역사학은 인문학의 대표 주자로 꼽힐 수 있지만 고등학교 교과목으로서 한국사와 세계사, 동아시아사는 온전한 인문학으로 볼 수 없다. 이 두 과목의 교육 과정은 지식의 단순한 전수, 즉 암기가 구성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 세 과목이 첫번째 소단원을 역사의 의미와 의의에 대해 탐구하는 '역사란 무엇인가?' 단원에 할애하는 중학교 역사 교과목과 비교했을 때 가지는 차이라 할 수 있으며, 더욱이 입시가 교과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간주되는 교육 현장의 현실은 고등학교 역사 교과목을 단순한 지식 암기로 치부하는 인식을 강화한다.
조금 더 상세히 들어가서, 각 단원 마다 가지는 학습 목표는 고등학교 역사 교과의 내용 하나 하나가 암기시키고자 하는 바를 제시한다. 물론 학습 목표는 말 그대로 학습 목표일 뿐, 교육의 대상인 학생이 직접 문제를 풀고 성적을 올리는 것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학습 목표는 해당 단원의 역할과 내용을 함축하고 있으며, 이를 이해하고 학생 내면에 나름의 서사와 구조를 구축하는 것은 이른바 효율적이고 생동감 있는 역사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근본적으로 교육과정이 제시하는 개념에 대한 암기를 도와주는 것일 뿐, 역동적인 논쟁과 변화로 이루어진 역사학의 본질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 글을 쓴 목적은 한국사 교육과정과 상충되는 예송논쟁(禮訟論爭)에 대한 역사학계의 일부 견해를 소개하여 고등학교 교육이 담아내지 못하는 역사학의 역동성을 소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총체적인 이해와 일반적인 역사적 지식과의 대조를 부각시키기 위해 예송에 이르는 조선 중기의 변화상을 순서대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구성하였다.
위기(Crisis)
2011 교육과정 한국사 교육 과정은 조선의 건국부터 흥선대원군의 집권에 해당하는 시기를 대단원 Ⅲ단원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단원에서 다룬다. 그런데 여기서 16세기 조선에 대한 서술은 사림파의 진출에 대한 서사와 양란에 대한 서술에 국한되며 정치사와 문화사, 경제사를 모두 포괄해야 하는 교육 과정의 특성 상 그마저도 자세한 서술이라 보기 어렵다. 이제부터 향후 조선의 정치적 변동을 이해하는 데 꼭 이해해야 할 이 시기를 조금 더 깊이 바라보도록 하자.
건국으로부터 어언 100년이 조금 넘게 지나고, 새로운 세기가 밝았을 때 왕위에 오른 조선의 군주는 연산군이었다. 흔히 폭정으로 정의되곤 하는 연산군의 재위기간은 통치라 칭하기엔 도저히 어려운 시기로, 향후 1세기 동안 조선이 겪은 커다란 위기의 시발점이자 근원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가진다. 연산군의 파행적인 국정 운영은 조선의 국가 체제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바로 선대인 성종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흑자 상태를 유지하던 재정의 건전성은 연산군 시기에 이르러 방만한 재정 운영의 여파로 곧바로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일시적으로 수습하기 위해 이루어진 신유공안은 민생에 파멸적인 부담을 안겨다주는 공납의 확대를 명시했고, 왕실의 사적 재산을 담당하는 내수사의 확대와 직계제 실시는 재정 운영의 오랜 종양으로 자리잡았다.
연산군일기 60권, 연산 11년 11월 15일 병신 8번째기사 1505년 명 홍치(弘治) 18년
◆ 다 써버린 전곡 등의 장부를 없애버리고자 하다 :
호조에 전교하기를,
"이미 다 써버린 전곡(錢穀)·포화(布貨)의 수량은 계산해 보아도 아무런 이익이 없으니, 그 장부를 없애버리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그때 용도가 너무 많아 공사(公私)가 모두 텅 비었는데도, 호조는 죄받을까 두려워 감히 모자람을 고하지 못하였다.'
국고가 텅 비고, 그걸 알리면 혼날까봐 장부를 불태워야 했던 치세;
통치 말년에는 공신 재산의 환수까지 추진하며 브레이크 없이 폭정 한 길을 걸은 연산군의 재위는 12년만에 중종반정으로 끝을 맞는다. 그러나 이것이 연산군 시기에 이루어진 모든 후퇴로부터의 복귀를 의미하지 않았다. 반대로 연산군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과도한 공납과 방만한 왕실 재정의 운영은 중종과 그 후대에 이르기까지 잔존했으며 오히려 악화된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연산군 이후 왕위에 오른 군주들에게 적극적인 의욕이 없었기때문이지만, 그 기저에는 좀 더 본질적인 당대 조선의 병폐가 숨어있었다.
연산군 연간, 조선을 지탱해온 국역 체계의 붕괴가 본격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들은 노비로 전락했으며 이들의 농지는 거대한 농장에 편입되었다. 곧 국역체제의 붕괴는 막대한 권력과 재산을 독점한 소수의 집단을 출현시켰다고 볼 수 있다. 흔히 훈구파로 불리곤 하는 이들은-오늘날 훈구와 사림의 구분이 불명확하다는 비판이 제기됨에도 불구하고- 당대 위기 상황의 수혜자이므로 자연히 이를 시정하려는 여러 노력에 보수적, 반동적 태도를 유지하였다. 16세기 조선은 뿌리 채 썩어가고 있었다.
전환(Conversion)
다행히도 이러한 상황에 문제 의식을 느끼고, 개혁을 모색하려는 집단은 있었다. 흔히 사림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비록 명확한 구분이 어렵긴 하나 유학적 이념에 충실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그 유학적 이념에 따른 조선의 재창조, 즉 경장을 모색했다. 이들이 처음 중앙정계에 진출해 사회 개혁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중종 연간으로 당시 이들을 주도하는 역할에 있었던 자가 바로 정암 조광조이다. 중종의 비호 아래 조광조는 노비종모법과 한전제를 문란해진 국역을 바로 세우는 방안으로 제시하였으나 반대파의 반발과 신임의 실추로 몰락하였고, 미완에 그친 그의 경장론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요구되었다.
거듭된 박해에도 불구하고, 예학 연구의 심화와 전파를 기반으로 소위 사림은 차츰 세력을 넓혀갈 수 있었고 선조 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반대 세력의 견제 없이 정국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당시 사상적으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역할에 있었던 율곡 이이는 경장의 실천 방안으로 대공수미법을 제안하는 등 현실 개혁에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고 류성룡 등도 이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초 이들의 의욕적인 개혁은 선조의 회의적인 태도에 좌절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7년에 걸친 전쟁은 오히려 선조의 태도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선조 재위 후반기, 세금 부담의 경감과 지출의 축소, 개간의 장려는 이제 조선 조 경제정책의 기조로 자리잡았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연이은 궁궐공사의 강행과 공납의 확대로 선조 대의 경제 정책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조치를 취했다. 국제 정치 일각에 그는 간혹 탁월한 현실 감각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모든 정치의 근간이 되어야 할 내치에 있어서 그는 명백한 실책을 범했고 무엇보다도 긴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권력 기반을 마련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광해군의 재위는 반정으로 끝났고, 새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다시 선조 대의 경제 정책을 계승하였다. 비록 양 호란의 상처가 다시 아물어 가는 조선의 경제를 날카롭게 할퀴었으나, 선조 대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충격은 기존의 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효종 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완만한 성장세를 꾸준히 유지하였으며, 이는 전후복구를 넘어 새로운 번영에 도달했다고 평할 수 있는 수준이다.
모색과 결론(Groping and Conclusion)
그러나 별다른 수정 없이 60년을 존속하던 경제 정책의 모델은 정확히 효종 치세의 종식과 맞물려 파국에 이른다. 국가 개입의 축소와 민간 영역의 자율은 1650년대에 이르러 상민층의 생활 수준 악화와 지배층의 사치와 향락이라는 양극화 문제를 초래하였고, 이 와중에 들어닥친 기후변화의 재앙은 경신·을병 대기근으로 절정을 맺었다. 이제 현재까지의 체제가 더 이상 위기 상황을 관리할 수 없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를 극복하고 다시 번영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해줄 대안은 무엇인가? 그 대안을 현실에 구현할 적임자는 누구인가? 이러한 맥락 속에서, 예송논쟁이 발발하였다.
잠깐 시간을 돌려보자. 사림의 우세가 확정되고 새로운 경장론이 분출되던 선조 연간. 사림은 대략 두 개의 정파로 분열되었다. 정과 사의 엄연한 구별 대신 이론에 대한 존중을 표방한 조제보합론 아래 이이·성혼 일파는 구척신계까지 폭넓게 포괄하는 서인 일파가 그 중 하나이고, 순수성과 명확성을 중시한 범후진계가 주축이 된 동인 일파가 나머지 하나이다. 이 두 붕당의 차이는 경장의 실시에 있어서도 두드러지는데 동인이 보다 적극적인 개혁을 표방했으나 구척신계 일파까지 포함한 서인은 보다 점진적인 개혁의 실시를 선호했다. 한편 개혁의 주체 차원에서도 두 붕당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차이를 드러냈는데, 동인들은 개혁의 주체로 기존의 국역 체제로 지탱되는 국가 대신, 향촌에서 엄격한 성리학적 질서를 구현할 수 있는 사족을 제시한 반면 서인은 기존 국역 체제의 복구와 정상적인 가동을 제시하였다.
동서분당에서 예송논쟁까지, 100년에 조금 못 미치는 오랜 세월 동안 현실 정치와 예학 이론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렇지만 양 분당간의 기본적인 틀은 유지되어, 동인을 계승한 남인은 여전히 사족 주도의 엄격한 신분 질서를 지향하였고 서인은 국가의 정상적인 작동을 목표로 삼았다. 그 대표적인 예시로는 노비 종모법을 꼽을 수 있다. 국왕의 의사에 따라 정국이 급변하던 숙종 연간, 서인이 집권하면 노비종모법이 실시되고 남인이 집권하면 다시 혁파되기를 반복했다. 이는 당시의 붕당이 현실과 마냥 동떨어진 형이상학적인 담론을 주고 받는 사교 클럽이 아니라 원시적인 형태의 당론을 가진 원시적인 형태의 현실적인 정치 집합임을 방증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다시 한국사 교육과정과 예송논쟁으로 돌아가보자. 한국사 교육과정은 조선 후기의 정치 변동이라는 커다란 틀 안에 정치사적인 차원에만 집중해 예송논쟁을 붕당의 악화 및 변질의 사례로만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예송은 민생과 동떨어진 다른 차원의 일이다. 그러나 보다 총체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 이전의 국가 체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외적의 위협과 흔들리는 사회 체제, 위태로운 민생. 이러한 문제들은 당장 코 앞에 산적해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질문이 던져졌다. 국왕은 다른 사대부들의 예법이 통하지 않는 특별한 존재인가? 이를 긍정한 남인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사적 질서를 해결책으로 제안했다. 한편 이를 부정한 서인은 국가 체제를 통한 보편 법칙의 확산과 일괄적인 적용을 극복 방안으로 제시했다. 결론적으로 예송논쟁은 위기 상황 앞에 저마다의 대안을 놓고 벌인 정치 과정이었던 것이다.
물론_이에_대한_고찰과_비판도_역사학의_일부입니다.
첫댓글 붕당은 학문적 지향을 공유하는 공동체로 각 붕당은 자신의 세계관에 맞춰 현실을 주조하고자 이에 맞는 정책을 펼쳤죠. 예송과 민생이 동떨어지는가에 대해서는 현대에 와서 비판은 많겠지만 당대 조선사회의 어떤 풍토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가는 한 번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조선전기와 후기사회를 구분할 수 있는 기점을 양난이라고 하는데 임란은 조선 안팎의 경제사회적 혼란을 야기했고 호란 이후 명의 멸망은 조선의 세계관을 흔들었죠. 조선은 경제사회적 혼란 뿐 아니라 세계관에 대한 붕괴에 대처해 새 사회를 재건해야 했죠. 한국전쟁이 한국의 잔존했던 신분질서를 일소하는데 도움이 되었듯 양난은 조선사회의 비유교적인
사회질서를 일소하고 유교화된 사회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죠. 조선 전기만 해도 제사 지내는 법부터 결혼식에 이르기까지 고려사회의 유습이 이어져 오고 있었고 사림과 국가가 단속하려 하지만 쉽사리 수용되지 않았고 정절을 중심으로 했던 가치관도 상위 신분층에게만 영향을 미쳤지 일반민들은 자유혼이 이루어지고 있었죠. 양난 이후 새 조선을 재건하는데 있어 어떤 세계관으로 어떤 정책을 펼치느냐가 논쟁이 되는데 내수외양론을 주장하는 산림들의 예학을 중시하는 경향이 설득력을 얻게 되죠. 그러면서 문제시되지 않던 예송이 갑자기 사회의 중심이슈가 될만큼 파급력을 미치게 되는 것이었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꿀잼글
삭제된 댓글 입니다.
서당 설치와 교육 기회의 확대는 조선 중기 이래 꾸준한 추세였습니다. 성리학에 민주주의 운운하는 아나크로니즘도 건전치는 않지만, 극단적 환원론 역시 의미 없는 허무주위로 귀결될 뿐입니다.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들어서면 교주적인 성리학이 등장하고 남송도 똑같이 예송논쟁으로 돌입하게 됩니다. 전쟁으로 무너진 기존의 질서와 사상을 복구시켜야 하는데 전란으로 타격을 받아서 복구 될수없는 부분이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이적(당시의 금나라 조선은 만주족과 일본인)과 다른 사상적 도취를 고취시키는 과정에서 전시대의 사상보다 더 억압된 사상을 발전 시켰다고 볼수 있지 않을 까 합니다. 그리고 당시대의 유교는 이미 북송의 멸망과 원,명,청으로 이어지면서 신유교의 교조주의가 발달했고 청나라때 그런 교조주의도 탄압이 심해 아예 훈고학이라고 옛 금석문을 연구하는 이질적인 유파도 등장했으니 이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닌 당시 중국적 가치관을 가진 국가의 공통된 이념이지 않을까 합니다. 명나라의 멸망으로 일본, 베트남, 조선이 다 소중화를 자처한 것도 그시대의 맹락에서 볼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내외적 사항과 시대적 흐름일 것입니다. 이는 비단 동아시아만의 문제도 아니고 오스만제국의 붕괴로 수니 와하비즘이 대두된 것처럼 생존의 위기에 처했을때 사상의 왜곡이나 사회의 유습이 어떻게 변하는 가에 중점을 두어야 하지 않을 까 합니다.
재밌는 점은 남송조에 들면서 여성들의 정절을 강조하고 수절을 넘어서 자살하도록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양난후 조선시대의 여성들의 정절과 수절을 강요한 것과 같은 것으로 지금의 항주지역(남송의 수도)엔 그 정도가 심해서 남편이 임종하면 여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강요하는게 두드려져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죠.. 열녀문이란게 남송시대에 각도처에 생기고 각가문에서(남송의 사류-사대부) 그런 수절자살 부인이 나오지 않는 것을 수치라고 할 만큼 억압이 되었다는 것이죠. 아마도 조선후기와 남송시대의 사상적 왜곡을 연구해 보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