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관 : 경상북도 동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은 포항시, 서쪽은 영천시 와 청도군, 남쪽은 경상남도 울산광역시, 동쪽은 동해에 접해 있다. 면적은 1323.87㎢ 이며 인구는 282,955명(2003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은 4읍, 8면, 13동으로 되어있으며 시청소재지는 경주시 동천동에 있다
자연환경 : 태백산맥의 지맥인 동대산맥과 주사산맥이 남북으로 주행하여 동서의 경계를 이루며 형산강구조곡과 영천-경주간구조곡이 교차하는 지점에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침식분지가 형성되어 그곳에 시가지가 발달하였다. 명활산, 금오산, 옥녀봉, 선도산, 금강산 등이 있다.
시가지 서쪽을 남류하는 형산강의 상류인 인천이 서천에 흘러들고, 북천이 중심부를 관통하며, 반원섬을 끼고 도는 남천이 이에 합류하여 형산강 본류를 형성하여 영일만으로 흘러든다.
역 사 :
[고대]-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삼국 및 통일신라 시대에는 금성, 월성, 계림 등의 지역을 중심으로 수도로서 발전하였다.
[고려]- 935년(태조18) 읍호를 경주로 개칭하였으며 940년(태조 23) 대도독부로 승격
되었고 종전의 6부 명칭을 고치면서 신라시대의 양주지역을 경주 중심으로 개편함에 따라 경상도의 본영으로 영남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성종 때는 동경이라 고치고 개성,평양과 함께 고려 3경의 하나가 되었으나 1308년 (충렬왕34) 계림부로 개정되었다.
[조선]- 조선 초기 계림부가 다시 경주로 환원되고, 경상도의 감영은 상주로 옮겼다.
[근대]- 1895년 부에서 군으로 개칭되었다가 1896년 경상북도 경주군이 되었다.
1910년 종전의 경주군 읍내지역이 되었다가 1931년 경주읍으로 승격 되었다.
[현대]-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 황성리, 용강리, 동천리와 내남면의
답리가 통합되어 경주시로 승격된 이래 1973∼1975년에 걸쳐 시역의 확장과
면.동의 일부 통합 개편이 있었다.
1995년 경주시와 경주군이 통합, 경주시가 되었다.
민 속- 이 고장의 특징적인 민속놀이로 가배놀이와 사자놀이를 들 수 있다. 가배놀이의 전통은 신라 유리왕 때의 길쌈놀이에서 비롯되었다. 경주의 6부를 두 편으로 나누어 왕녀 두 사람이 각기 부내의 여자를 거느리고 음력 7월 16일부터 매일 길쌈을 하였다. 8월 보름이 되면 길쌈의 성과를 비교하여 승부를 가린 뒤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술과 음식을 사례하며 축제를 벌였다.
사자놀이는 흔히 주지놀이로 일컬어지는데, 이 놀이 역시 신라때부터 시작되었다. 정월 대보름에 사자 모양의 커다란 탈을 쓰고 풍물잡이들과 함께 마을을 돌며 춤을 추고 한바탕 신명을 돋우는데,이때 쓰는 탈을 주지탈이라고 하며 두 사자가 서로 싸움을 벌인다. 그래서 이 놀이를 흔히 주지놀음 혹은 주지싸움이라고 한다.
동 제- 이 고장의 부락제는 가을 단위로 제의가 이루어지는 동제와,시장의 상인들이 상업의 번영을 위해 주최하는 장굿 형태의 별신이 있다. 장굿으로 행해지는 별신은 봄, 가을 농한기에 매년 한 차례씩 하거나 3년만에 한 차례씩 행해지며 주제자는 지방의 무당들로 구성된다.
남산개요
남산은 서라벌의 진산(鎭山)이다. 북의 금오봉(金鰲峰, 468m)과 남의 고위봉(高位峰, 494m)을 중심으로 동서 너비 4km, 남북 길이 10km의 타원형으로, 한 마리의 거북이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엎드린 형상이다. 골은 깊고 능선은 변화무쌍하여 기암괴석이 만물상을 이루었으니 작으면서도 큰 산이다.
남산에는 온갖 전설이 남아 있고, 신라의 흥망성쇠를 함께 한 역사의 산이며, 선조들의 숨결이 가득한 민족문화의 산실이다.
이 산 주변에는 신석기 말기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고, 신라시조 박혁거세거서간이 탄강(誕降)한 나정(蘿井)과 초기 왕궁, 나을신궁(奈乙神宮), 왕릉이 즐비하며, 도성(都城)을 지켜온 남산신성(南山新城)을 비롯한 4곳의 산성과, 망국의 한이 서린 포석정지(鮑石亭趾)가 있어 남산은 실로 신라 천년의 역사와 함께 한 산이라 할 수 있다.
남산에는 많은 불상과 탑들이 남아 있다. 그 대부분은 석탑(石塔)과 석불(石佛)로서 특히 마애불(磨崖佛)이 많다. 이처럼 많은 유물들이 돌로 만들어진 데에는 질 좋은 화강암이 많기도 하지만,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신앙된 바위 신앙과도 관련이 깊다.
아득한 옛날부터 남산 바위 속에는 하늘나라의 신들과 땅위의 선신(善神) 들이 머물면서 이 땅의 백성들을 지켜준다고 믿 었으며,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산 속, 바위 속의 신들이 부처와 보살로 바뀌어 불교의 성산(聖山)으로 신앙되어 왔다.이러한 신앙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비파바위(琵琶巖)의 부처님이 망덕사(望德寺)의 낙성재(落成齋)에 누추한 옷차림으로 참석하였는데, 왕이 그 누추함을 업신여기자, 왕을 꾸짖고는 진신석가(眞身釋迦)의 모습으로 바뀌어 홀연히 남산 바위 속으로 숨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누추한 승복을 입고 광주리에 물고기를 담아 들고 나타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경흥국사(景興國師)의 제자가 나무라자, 말을 타며 호사스럽게 지내는 경흥국사를 크게 꾸짖고는 다시 남산 속으로 숨어버린 문수보살의 이야기도 있으며, 충담(忠談)스님은 삼화령(三花嶺) 미륵세존(彌勒世尊)에게 다공양(茶供養)을 올린 후 경덕왕(景德王)에게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올려 군신(君臣)과 백성이 서로의 본분을 다할 때 나라가 태평하다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설화들은 곧 남산과 남산 바위 속에는 부처와 보살이 머물면서 권세있는 자나, 존경받는 지식인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는 산에서 내려와 호되게 꾸짖고 가르침을 주고는 다시 산 속, 바위 속에 숨었다가, 백성들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내려와 보살펴 준다고 신앙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또한 예술로 승화되고 표현되어, 골마다 절이 세워지고, 바위마다 불상(佛像)이 조성되며, 수많은 탑이 세워져 불국토(佛國土)를 이루었다.
남산에 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다.
7세기 초에 조성된 동남산 부처골 감실여래좌상(佛谷龕室如來坐像)은 투박한 시골 할머니가 돌로 만든 집 속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고즈넉한 주변 분위기와 어울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안온하게 해주는 한국 최고(最古)의 감실불(龕室佛)이며, 7세기 중엽의 장창곡 석조미륵삼존불의상(石造彌勒三尊佛倚像)과 선방곡 석조여래삼존불(石造如來三尊佛)은 티없이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웃음으로 잘 알려져 있다.
7세기 후반에 불세계(佛世界)를 만다라적(曼多羅的)인 기법으로 새겨 놓은 탑곡 마애조상군(磨崖造像群)은 사방의 불보살과 비천(飛天)들이 시시각각 햇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나타나는 웃는 모습들은 가히 환상적인 불세계를 표현하고도 남음이 있다.
삼국통일후 남산은 불보살이 머무는 신령스런 성산(聖山)으로 신앙되어 더욱 많은 탑과 불상이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에 사방불(四方佛)을 더하여 조성한 칠불암(七佛庵) 마애조상군은 심산궁곡 바위 절벽을 부처님들이 머무는 하늘 나라로 보고 험준한 산등성이에 절을 세운 용기와 큰 바위를 쪼아 대불(大佛)들을 조성하여 화엄세계(華嚴世界)를 구현해 낸 신앙의 열정에는 그저 감격 할뿐이다.
조선초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집필한 용장계곡 용장사지(茸長寺址)의 석조삼륜대좌불(石造三輪臺坐佛)은 자연석 바위를 하대석으로 삼고 둥글둥글한 대좌를 삼단으로 놓아 그 위 연꽃 방석에 부처님을 모셨으니 바로 수미산(須彌山) 위 도솔천(兜率天)의 미륵보살을 모신 것이 아니겠는가?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불상은 유가종(瑜伽宗)의 대덕(大德)이신 대현(大賢)스님께서 염불하면서 돌면 이 미륵상 또한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남산 전체가 마애불의 보고(寶庫)이지만, 특히 냉곡은 마애불이 많다.
입가에 방글방글 미소를 머금은 채 금방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마애관음보살입상(磨崖觀音菩薩立像), 다듬지 않은 넓은 바위 면에 사바세계(裟婆世界)에서 설법하고 있는 석가삼존불과, 극락으로 왕생(往生)하는 중생을 마중 나오시는 신비스런 모습의 내영아미타여래(來迎阿彌陀如來)를 한 폭의 그림으로 새긴 선각육존불(線刻六尊佛), 얼굴은 원만상으로 조각하고 몸은 억센 선으로, 연화대좌는 부드럽고 희미한 선으로 처리하여, 기도하는 중생을 위하여 바위 속에서 모습을 들어내는 듯한 높이 6m의 상선암 마애대좌불(磨崖大坐佛) 등 남산 전체가 불보살의 세계를 옮겨 놓은 듯하다.
부처님 나라를 그리는 간절한 신앙은 탑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용장계곡의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200여m가 넘는 높은 바위 봉우리를 하층기단으로 삼아 그 위에 상층기단을 쌓고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을 얹어 삼층석탑을 쌓았으니 하층기단인 바위산은 바로 8만 유순(由旬)이나 되는 수미산이 되는 것이오. 탑 위 푸른 하늘이 수미산정(須彌山頂)의 부처님 세계가 되니, 서라벌 벌판은 부처님이 굽어보는 복된 땅이 되는 것이다.위 산을 기단으로 삼은 탑은 최근 복원한 잠늠골 삼층석탑과 늠비봉 오층석탑에서도 나타날 뿐만 아니라, 초기 왕궁지였던 창림사지(昌林寺址) 삼층석탑과 남산리 사지(寺址) 서삼층석탑에 이르러서는 상층기단부에 팔부중상(八部衆像)의 조각으로 나타나고 있다. 팔부중상은 사천왕(四天王)의 장수(將帥)이니 탑의 기단부가 수미산이 되는 것이다.
남산에 있는 불교유적의 가치는 자연과의 조화와 다양성에 있다.
편편한 바위가 있으면 불상을 새기고, 반반한 터가 있으면 절을 세우고, 높은 봉이 있으면 탑을 세우되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면서 조성하였다. 비록 바위 속에 부처님이 계신다고 믿고 있어도 바위가 불상을 새기기에 적정하지 않으면 불상을 새기지 않고 예배하였으며, 절을 세워도 산을 깎고 계곡을 메운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신라인들은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니라, 바위 속에 있는 부처를 보고, 정(釘)을 들고 바위 속에 숨어 계신 부처님을 찾아낸 것이다.
남산은 자연과 예술이 조화되어 산 전체가 보물이니 세계에 그 유례가 없다. 남산을 아니 보고 어찌 경주를 보았다 할 것이며, 몇 번 오르고 어찌 남산을 안다고 할 것인가?
남산에는 왕릉 13기, 산성지(山城址) 4개소, 사지(寺址) 147개소, 불상 118체, 탑 96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등 672점의 문화유적이 남아 있으며, 이들 문화유적은 보물 13점, 사적 13개소, 중요민속자료 1개소 등 44점이 지정되어 있고, 2000년 12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보호받고 있다.
삼릉계곡에서 용장골까지
삼릉
이 계곡 북쪽 언덕에는 많은 무덤들이 줄지어 있었던 흔적이 있는데 지금은 세 개의 릉만 남아 있어 삼릉(三陵)이라 부르고 있다. 제일 앞의 무덤은 신라 54대 경명왕릉(景明王 : 917 ~ 924)이라 전해 오는 릉이고 가운데 것이 53대 신덕왕릉(神德王 : 912 ~ 917)이라 전해 오는 릉이다. 맨 뒤의 것은 8대 아달라왕릉(阿達羅王 : 154 ~ 184)이라 전해 오고 있는데, 초기 임금님의 릉이 왜 이 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무덤들은 원래 봉분 둘레에 호석(護石)을 쌓고 큰 자연암석(自然岩石)을 둘러놓은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과 같은 양식이었는데 지금은 다 묻혀 원형토분(圓形土墳)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앞에 있는 경명왕릉에서는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삼릉 계곡을 오를 때는 다음 코스 "경애왕릉"과 "삿갓골 여래입상"은 가지 않고 "냉골 석조여래좌상"으로 바로 올라가는 것이 좋다. 코스 진행이 매끄럽지 못하다
냉골 석조여래좌상(冷谷 石造如來坐像)
삼릉에서 개울을 따라 계곡으로 약 300m쯤 가면 길 옆 바위 위에 머리 없는 석불좌상(石佛坐像)이 앉아 계신다. 현재 높이가 1.6m되고 무릎 너비가 1.56m되는 큰 좌불이다. 근년까지도 계곡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어 지금 장소에 앉혀 놓은 것이기 때문에 마멸이 없고 옷주름들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다만 머리가 없어지고 두 무릎이 파괴되어 손 모양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편안히 앉은 자세며 기백이 넘치는 가슴이며 넓은 어깨는 8세기 중엽 신라 전성기의 위풍당당한 불상이다.
특히 왼쪽 어깨에서 가사 끈을 매듭지어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영총(纓總)수실은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우리 나라의 특색 있는 장식품인 매듭은 먼 신라 때부터 전해 왔다는 것을 이 가사 끈이 말해 주고 있다. 부처님의 아래옷(裙衣)을 동여맨 끈도 예쁜 매듭으로 매어져 있다. 이 불상은 용장사(茸長寺)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처럼 가사 끈이 있기 때문에 존명을 정하기 어려우나 여래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애관음입상(三陵溪谷磨崖觀音菩薩像)
머리 없는 여래상에서 북쪽 산등성이를 쳐다보면 뾰죽한 기둥바위들이 높고 낮게 솟아 있는데 그 중 한 바위에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하계(下界)를 내려다보고 있는 관세음보살입상(觀世音菩薩立像)이 새겨져 있다. 살결이 풍만한 얼굴은 미소를 머금었고 오른손은 설법인(說法印)을 하고, 머리에 쓴 보관(寶冠)에는 화불(化佛)을 배치하여 관세음보살임을 표시하였는데 목걸이와 가사를 동여맨 끈은 나비날개 처럼 매듭을 짓고 그 자락이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발가락 끝에까지 피가 도는 듯 섬세하게 조각된 이 불상은 따스한 촉감을 일으키는 복련(伏蓮)위에 서 계신다.
그런데 이 관음상이 서 있는 자리에는 법당을 지을 만한 곳도 없고 기와조각도 떨어진 것이 없으니 처음부터 노천불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을 비바람이 치는 노천에 세운 것은 무슨 뜻일까? 산벼래에 불상을 새기고 산기슭에서 올려다 보며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소리를 듣고 하강하여 주시는 그 감격을 극적(劇的)인 모습으로 나타내려 함이 아니었을까? 광배 없이 3m 정도 뒤쪽의 비스듬한 바위를
광배삼아 보살상을 조각하므로서 방금 하늘에서 하강한 듯한 모습이다.
이 불상이 진정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순간은 석양 해질 무렵이다. 단풍이 드는 가을철 석양 때가 더욱 좋다.
선각육존불(三陵溪谷線刻六尊佛)
불두(佛頭) 없는 불상을 지나 계곡을 따라 100m 정도 오르면 서쪽으로 난 바위면에 선으로 새긴 삼존불 두 쌍이 있다. 안내판에는 '선각육존불'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육존불 형태의 불상은 없다. 삼존불, 오존불, 칠존불 등으로 만들어지는데, 이러한 고증을 거치지 않고 그저 불상의 숫자가 육이 되니 육존불이라 붙여 놓은 것이다. 이름은 불상의 성격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것이니 좀 더 신중한 배려가 필요한 일이다.
바위면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바라보아 오른쪽 바위면은 왼쪽 바위면보다 1m정도 뒤로 물러나 있고, 다듬지 않은 자연 바위면에 그림을 그리 듯 선으로 조각되어 있다. 오른쪽 바위면에 새겨진 불상은 석가모니삼존불로 알려저 있는데, 넓은 연꽃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왼손은 선정인을 오른손은 가슴 앞에 들어 설법인을 취하고 있다.
좌우에는 협시보살이 서 있는데, 석가모니의 협시보살은 사랑의 상징인 문수보살(文殊菩薩)과 지혜의 상징인 보현보살(普賢菩薩)이다. 연꽃 위에 서서 본존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돌리고 구슬목걸이와 팔뚝, 팔목 팔찌로만 장식을 하고 상의는 입지 않았다. 왼쪽 바위 면에는 특이한 모습의 삼존불이 새겨져 있다.
원만한 얼굴에 상하 몸매가 조화롭게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서 있는 본존불과 양쪽에서, 한 무릎을 꿇고 앉아(궤좌 坐) 꽃 쟁반을 들고 공양을 하는 보살의 모습은 잘 그려진 탱화를 보는 듯 하다. 불상이 새겨진 바위는, 면이 고르지 않고 자연적인 선들이 많이 그어져 있는 상태이다. 도화지로 친다면. 구겨지고 낙서가 되어 있는 도화지에 그림을 그린 것과 같다.
종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서로 성질이 다른 성분이 모여 만들어진 화강암은 쉽게 조각을 할 수 있는 돌이 아니다. 서로 성질이 다른 돌을 잘못 때리면 돌이 편으로 떨어져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어려운 작업을 마다하지 않고 조각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땅에 모신 부처님을 바위 속에 모시려는 마음이 간절했다. 신앙의 대상이었던 바위 속이 부처님의 집으로 선택이 되었다. 바위 면에 새겨진 불상보다도 부처님이 계신 바위를 더 소중하게 다루게 되었다.
마애여래좌상(三陵溪谷線刻如來坐像)
선각육존불에서 등성이로 계속 200m쯤 올라가면 높이와 너비가 각각 10m쯤 되는 넓은 절벽바위가 서향으로 서 있다. 그 암벽 중앙에 지름 2.5m쯤 되는 연꽃 위에 설법인(說法印)을 표시하고 앉아 계신 여래상이 있다. 몸체는 모두 선각(線刻)으로 나타내었는데 얼굴만은 깍아 내어 돋을새김으로 표현하였다. 두 눈썹과 눈은 아주 가깝고 코는 길고 입술은 두텁고 커서 균형 잡힌 얼굴이라 할 수 없으나 소박한 위엄이 있다.옆에는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다.
중요한 선은 굵게 그었고 옷주름 같은 것은 가는 선으로 변화를 주었다. 상 전체에서 재주를 부리지 않는 소박한 느낌을 느끼게 되는데, 남산 부처님은 바위 속에 숨어 계시다가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실 때는 언제나 누추한 차림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깊이 신앙하고 있었다. 이 마애불은 남산에서 가장 늦은 시기인 고려초기 즉 10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석조여래좌상(慶州三陵溪石佛坐像-寶物 666 號)
우연히 발견된 머리없는 부처님
삼릉골을 냉골(冷谷)이라고도 부르는데, 계곡 입구에 왕릉으로 전하는 무덤 3기가 하늘을 가린 도래솔을(護林무덤 주위에 심은 소나무 숲) 두르고 산 자락 위에 나란히 모셔져 있다. 삼릉을 지나 계곡을 지나 상선암과 금오봉 가는 갈림길에서 상선암 쪽으로 조금 오르면 바위 위에 불두(佛頭)가 떨어진 석불좌상을 만난다.
이 불상은 1964년 8월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학생들(이장수, 이원명씨)의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사연인 즉 여름방학을 이용항 여행을 다니고 있었는데, 마침 남산을 답사하던 중 상선암에서 삼릉쪽으로 내려오다가 이 불상이 있는 지점의 계곡에서 옷 자락 문양이 일부 노출된 돌을 발견하고 손으로 헤쳐보니 불상이 확실해 다음날 경주박물관에 신고하였다.
경주박물관에서는 간단한 장비를 가지고 발굴하여 지금의 장소에 안치하였는데, 불상이 안치된 장소도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 계곡은 남산에서 가장 많은 등산객이 찾는 곳으로, 계곡에 들어 처음 만나는 불상인데 불두가 없어 보는 이들이 안타까운 마음에 저마다 한마디씩 입을 대기도 한다.
"임란 때 왜놈들이 목을 잘랐다." "일제시대 일본 놈들이 목을 잘랐다." 등의 말이다. 일제의 우리 문화재 수탈에 대한 감정을 잘 보여준다. 당당한 어깨에 편단우견(편단우견 왼쪽 어깨에만 가사를 걸침)으로 왼쪽 어깨에 매듭을 지어 무릎까지 늘어뜨리고, 바지를 묶은 끈은 팔자 매듭으로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두 손은 무릎 위에 얹혀져 있는 듯 하나 무릎 부분이 깨어져 손 모양은 알 수 가 없다.
굳이 추측을 한다면, 촉지항마인(觸地降魔印마귀의 항복을 받은 수인)상으로 여겨진다. 결가부좌한 하체는 매우 든든하며, 대좌는 몸체와 한 돌로 만들었는데 깨어져 있다. 원래 앞 계곡에 엎어져 묻혀 있는 것을 발굴하여 현재의 위치에 옮겨 모셔놓았다. 자연 바위와 대좌의 깨어진 부분이 어울려 원래 제 위치인 듯 착각을 일으킨다.
상하체의 균형이 잘 맞고, 선이 분명하고, 당당한 힘을 느끼게 하는 뛰어난 불상이다. 불두가 없는 것이 더욱 아쉽다. 남산에 남아 있는 석불 중 불두가 온전한 불상은 몇 되지 않는다. 불두가 있는 불상들도 자세히 보면 다시 붙여 놓은 예가 많다. 비단, 남산뿐만이 아니라 전국의 석불들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연한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국립경주박물관 정원에 불두가 없는 불상 17체가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경주 분황사를 발굴할 때 폐우물에서 발견된 것을 박물관에 옮겨 놓은 것이다. 석굴암을 발굴할 때, 주위 땅속에 묻혀 있는 파불두가 발견된 적이 있는데, 잘못 만들었거나 파손된 불상을 땅에 묻는 것이 관례인 듯하다.
그러나 분황사에서 발견된 것은 파불두가 아닌데 우물속에 넣고 흙을 덮어버렸다. 남산의 일부 불상들 중 자연적인 붕괴로 불두가 떨어졌다면 주위에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예가 더 많다. 분황사의 예로 보아 어느 시기에 불상들의 목을 치고 몸은 우물 속에 묻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려말부터 일기 시작한 배불 논란은 조선의 개국으로 구체화되고 3대 태종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숭유배불(崇儒排佛)정책이 시작된다. 즉위년에 궁중에서의 불사(佛事)를 모두 폐지하였고, 1402년 서울밖의 70개 사찰을 제외한 모든 사찰 땅의 세금을 군자(軍資)에 소속시키고 사찰 노비를 나누어 각 기관에 분속시켰다.
1406년 3월에 전국 242개 사찰만을 남기고 모두 폐사(廢寺)시키면서 사원의 토지와 노비를 모두 국가에서 몰수하였다. 또한 국사·왕사 제도를 없앴다. 4대 세종은 더 심한 훼불(毁佛)을 강행하였다. 1424년 태종에 의해 정리된 7종파를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종단 2종파로 폐합하였고, 전국에 사찰 36개소, 토지 7,950결, 승려 3,770명으로 한정시켜버렸다.
성밖의 승려에게 도성의 출입을 금지시켰는데, 도성에 출입이 금지된 신분은 백정이나 갖바치 같은 천민들이었으니 스님의 신분이 천민으로 떨어진 것이다. 이후에도 억불정책은 계속되었고, 연산군 때에는 승과마저도 폐지되어 불교의 존재가 완전히 무시당한 시기였다. 이러한 억불정책으로 많은 절이 폐사되거나 관아(官衙)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절의 땅이 향교에 배속되기도 하였다.
1512년 중종은 대종(大鐘)을 녹여 총통(銃筒)을 만들고 경주의 동불(銅佛)을 부수어서 무기를 만들었다. 중종은 가장 혹독한 배불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이 때에 많은 석불들도 훼불을 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선각마애여래상
옆 계곡 30여m의 바위 절벽면에 머리 부분만 선각으로 새긴 불상이 있다. 이 불상은 바위 속에서 숨어있다가 살며시 그림자를 드러내 반겨 주는 듯한 모습이다
상선암선각보살상
상선암은 옛 절터에 70여년 전 사찰이 세워진 곳이다. 절 뒤쪽 파괴된 바위에 보살상의 하반신만 선각으로 남아 있으며, 완전할 경우 6미터가 넘는 대불
상선암 마애대좌불(三陵溪谷磨崖釋迦如來坐像)
거대한 자연 암반의 벽면에 6m 높이로 양각된 이 여래좌상은 남산에서 두 번째로 큰 불상이며, 얼굴의 앞면과 귀부분 까지는 원만하게 새겨진 반면, 머리 뒷부분은 투박하게 바위를 쪼아 내었다. 불상의 몸부분은 선이 거칠고 억세게 조각하였고, 좌대 부분은 희미하게 사라져 버린 듯한 모습이다. 이러한 조각 수법은 불교가 바위신앙과 습합하여 바위 속에서 부처님이 나오시는 순간을 표현하였다고 생각된다. 불상의 조각연대는 통일신라 하대로 추정된다
금송정터와 바둑바위
냉골, 암봉 바위산 꼭대기에는 자연을 잘 이용한 금송정터라고 전해오는 건축터가 있다. 또는 봉생암터라고도 한다. 그 옆 바위 벌판에는 옛날 신선들이 내려와 바둑을 두며 놀았다고 하며, 전망이 좋아 서라벌 벌판 전체와 북남산이 모두 보인다.
상사바위와 소석불
금오산신 상심(祥審)이 살고 있는 바위로서 동쪽면은 남근석과 기도처, 서쪽 면은 산아당(産兒堂)으로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아들 낳기를 기도하는데 영험이 있다. 상심은 신라 49대 헌강왕이 포석정에서 놀 때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기도 하였다. 상사바위의 동쪽에는 머리와 발을 잃어버린 작은 석불이 1구 있는데, 남산에서 발견된 가장 작은 석불이다.
금오산 정상
해발 468M로서 이곳에서 냉골, 포석계, 지바위골, 비파골, 약수골 등의 분수령이 된다. 국가 지정 문화재이며, 노천박물관이라 불리는 산의 정상에 있는 헬기장이 흉물스럽다.
삼화령 대연화대
용장계곡의 동북쪽 능선의 대암반상에 있는 거암을 그대로 대좌로 삼아 그 상면에 웅려무비한 솜씨의 대연화를 새기고 그 위에 석불이 안치되었었다. 이 연화대의 위치는 금오산정에서 남으로 산맥이 세갈래로 갈라 내려온 중앙의 산령이라 그 동으로 내려간 산령은 고위산과 연하는 분수산맥을 이루고 서편은 용장사탑이 서 있는 산령이다.앞으로는 고위산을 바로 대하고, 동으로 동대산령의 토함산 불국사까지, 서로는 단석준령을 바라보는 극히 높은 터에 자리잡고 있다.그 자리에는 앞으로 또 한 계단 만들어졌으나 겨우 7-8m 의 여지를 두고 바로 아래는 백척심곡으로 예참을 허할 수 있을 뿐 대가람을 세운 흔적이 없고 세울 수도 없는 터이다.
이를 천혜의 불영지로 보고 불상과 연화대를 새겨 그대로 예참정진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는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선덕여왕 때 중 생의는 언제나 도중사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꿈에 한 중이 그를 데리고 남산으로 올라가서 풀을 매어 표를 해 놓게 하더니 남쪽 골짜기로 와서 말했다.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은 이를 파내어 고개 위에 편히 올려 주시오. "꿈에서 깨자 그는 친구와 함께 그 골짜기에 이르렀다. 표해 놓은 곳을 찾아 땅을 파 보니 거기에서 돌미륵이 나왔으므로 삼화령 위로 옮겨 놓고 그 아래에 절을 세우고 살았는데 후에 절 이름을 생의사라고 했다. 충담스님이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이면 차를 다려서 공양한 것이 바로 이 부처님이다.(三國遺事 第二卷 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충담스님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경덕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만에 오악삼산의 신들이 간혹 모습을 나타내어 대궐의 뜰에서 왕을 모시었다. 3월 3일에 왕은 귀정문의 누상에 나아가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누가 도중에서 능력 있는 스님 한 사람을 데리고 올 수 있겠소."이 때 마침 큰스님이 위의를 갖추고 지나가고 있었다.
좌우의 신하가 바라보고 그를 데리고 와서 왕께 뵈었다. 왕은 "내가 말하는 위의를 갖춘 스님이 아니다." 하고 물리쳤다.
다시 스님 한 사람이 납의를 걸치고 삼태기를 걸치고 남쪽에서 왔다.왕은 기뻐하며 누상으로 인도하였다. 삼태기의 속을 바라보니 다구만이 가득하여 왕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충담이라 하옵니다.""어디서 왔소?""저는 3월 삼짇날과 9월 중양절이면 차를 다려서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드립니다.
오늘도 차를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나에게 차 한 사발을 주시겠소?"스님은 차를 다려 왕께 드렸는데 차 맛이 이상하고 그릇 속에 향기가 그윽하였다."내가 듣건대 스님께서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하오?""그렇습니다.""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할 노래를 지어 주오."스님은 즉시 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치었다.
왕은 그를 가상히 여겨 국사로 봉하니 스님은 두 번 절하고 굳이 사양을 하고 받지 않았다.안민가는 다음과 같다.“임금은 아버지요,신하는 사랑하는 어머니요백성들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하실 지면백성들이 스스로 사랑 받는 줄 알리이다.꾸물거리며 사는 백성들이사랑을 먹고 스스로 다스려져 이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생각한다면 나라안이 감히 되어 감을 알리이다.아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 지면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 (三國遺事 第三卷 塔像 第四 生義寺 石彌勒)
용장사지 삼층석탑(慶州南山茸長寺谷三層石塔)
용장(茸長)골은 남산 제1, 2봉인 수리봉과 금오봉 사이를 흐르는 골짜기로 흘러드는 지류가 많고 골짜기의 생긴 모습이 흡사 사슴뿔과 같다. 용장골로 흘러드는 지류중 금오봉쪽에서 흘러드는 세번째 지류인 탑상골 상류 언덕위 남산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조성된 3층석탑이 하나 서있다.
이 석탑 주변에는 용장사지와 삼륜대좌불, 폐탑지등 남산을 대표하는 유적과 조탑 흔적이 있고 탑상(塔像)골이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탑과 불상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발 350m 높이에 위치한 이 탑은 신라 전형 형식을 하고 있는 3층석탑이다.
용장사지(茸長寺址)에서 바라보면 가장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는데, 그래서 용장사지를 조성하고 탑은 절터가 아니라 절의 위 정상부분에 조성한것이 아닌가 하는 추축이 일반적이나 용장사지에는 폐탑재가 있는 걸로 보아 이 석탑은 절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세워진 탑인것으로 추축된다. 50여 미터 위에 있는 폐탑 또한 같은 성격의 탑으로 보인다.
삼국시대나 통일신라 초기에는 평지나 산 어귀에 불상이나 탑을 조성하였으나 통일 중기 이후부터는 산 정상부분에 조성을 하거나 아니면 남산리 쌍탑처럼 12지나 팔부신중을 조각하여 상징적인 높이를 표현하려고 하였다.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늘세계에 이르는 것이다. 세계의 종교 건축들이 모두 다 하늘을 지향하고 지극정성으로 높이를 다 한다.
여호와의 세계에 좀 더 가까이 갈려고 했던 전설의 바벨탑이나 서양 사원들의 첨탑들이 다 하늘에 가까이 갈려는 마음들이다. 용장사곡 3층 석탑 또한 마찬가지 마음에서 조성된 석탑이다. 이 석탑은 신라 전형 양식을 하고 있지만 특이한 것은 기단부 중 하층 기단부가 자연석으로 되어 있다. 넓적한 자연석을 정으로 툭툭쪼아 면을 거칠게 다듬어 하층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상층 기단부를 올렸다.
자연석 하층 기단부 위의 탑 높이는 4.5m정도 된다. 탑의 높이는 채 5m가 안되지만 자연석을 기단부로 삼고 있기 때문에 봉우리 전체가 이 탑의 기단부가 되어 탑의 높이는 산 높이를 넘게 된다. 자연의 높이에 인간의 재주를 살짝 보태어 구름이 걸리는, 하늘에 이르는 탑을 조성한 것이다.
땅과 하늘이 믿음으로 하나되다.
님이 주신 아름다운 자연에
님의 뜻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올랐네
이마에 땀을 기쁘게 닦으며
수천년 비바람에도 굳건히 뿌리박힌 바위
돌을 깍아 하늘이 걸리는 탑을 세웠네
애초에 약속된 자리
의심없는 믿음
님의 뜻도 그러하였음이라
조그만 재주를 하늘같이 믿었네
마애여래좌상(茸長寺址磨崖如來坐像-寶物 913號)
용장사지 삼륜대좌불 뒷편 동쪽으로 높이 5.5m, 폭 3.6m 가량 되는 암면이 남향을 하고 있고 그 바위면에 고운 연꽃 위에 결가부좌하고 항마촉지인을 한 여래상이 있다.
이 마애불은 손상이 거이 없이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얇게 돋을새김으로 되어 있는데 대좌의 연꽃은 정면 꽃잎은 비교적 크게 나타내고 양 가장자리로 가면서 차츰차츰 작게 하여 끝에서는 구름처럼 사라지도록 하였다.
불상은 풍만하고 건장한 위엄을 느끼게 하고 결가부좌로 앉은 두 무릎과 넓은 두 어깨는 당당하다.상호는 머리 깊이를 반분한 자리에 눈썹이 길게 그어졌고 양눈썹에 이어 아래로 뻗어 내린 예리한 콧등은 얼굴길이의 ⅓쯤에서 고운 코를 형성하였다.
굳게 다문 입술은 양가에 힘을 주어 긴장된 표정인데 풍성한 두뺨과 군살어린 턱의 부드러움은 자비롭기 그지없다. 육계는 얼굴과 조화롭게 덩실 솟았고 머리카락은 나발로 표현되어 있다. 옷자락은 속이 다 비칠 것 같은 얇은 느낌으로 잘게 주름을 잡아 놓고 있다.
두광은 무늬 없이 두겹의 원으로 표현되었고 신광 역시 마찬가지이다. 신광 좌측에는 명문이 3행으로 10여자 있으나 판독이 불가능하다. 9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삼륜대좌불(慶州南山茸長寺谷石佛坐像-寶物 187 號)
용장사지의 동쪽 등성이에 우리 나라에서 유래가 없는 삼륜의 대좌에 머리가 없는 좌불이 얹혀있는 석불좌상이 있다. 현재는 머리가 없어져서 존명을 알 수 없는데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지대석은 자연석을 윗면만 고르게 가공하여 쓰고 있는데 지대석이자 곧 기단으로 보여진다. 높이 1m 남짓한 이 기단 위에 둥글게 다듬은 북모양의 중대괴임을 얹고 그 위에 쟁반모양의 둥근 반석을 놓았고 다시 그 위에 중대석과 반석을 놓았고 세 번째의 중대괴임을 결구시킨 후 앙련의 둥근 반석대좌를 마련한 후 그 위에 화려한 연꽃방석 위에 결가부좌로 앉은 불상을 모셔 놓았다.
불상의 높이는 연꽃방석 밑에서 목까지가 141Cm이고 대좌의 총 높이는 2m에 달한다. 불상은 결가부좌로 앉고 오른손은 선정인을 왼손은 무릎 위에 얹은 인상을 취하고 있는데 양어깨를 덮고 흘러내린 가사깃 사이엔 승기지가 비스듬히 가슴을 가리고 매듭이 맵시 있게 조각되어 있다. 또 왼쪽 어깨에 드리워진 가사끈의 수실은 이 불상을 승상이라고 자주 거론하게 만든 이유 중의 하나이다. 흘러내린 가사의 자락들은 물결처럼 펄럭이며 무릎을 덮고 흘러내려 상현좌를 이루고 있는 것도 특이하다.삼국유사의 賢瑜伽, 海華嚴 조에 의하면, 옛날 용장ㅇ사에 유가종의 대덕이신 대현스님이 계셨는데, 그 절에는 미륵장륙석상이 있어 대현스님이 그 미륵부처님을 기도하면서 돌면, 미륵부처님 또한 대현스님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불상을 삼국유사의 이야기처럼 미륵불이라 한다면 기단석 위가 사왕천이 되고 처음의 둥근 반석 위는 도리천, 두 번째 반석 위는 야마천이 되며 마지막의 연화 원반대좌는 미륵보살이 계시는 도솔천이 된다.
용장사터 삼층대좌불
남산의 탑상(塔像)중 자연을 순수하게 배경 삼지 않는 것이 없지만, 바위를 떼어내서 조성한 형태로는 삼륜대좌불의 조화로움이 사뭇 절묘하다. 자연 바위를 배경 삼지 않았기 때문에 방향 또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데, 해가 돌아가는 서산(西山)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 극락왕생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구름 켜켜이 서산을 덮고, 햇살은 시시각각 색깔을 달리하며 넘어 가는 낙조를 향해 앉은 불상의 시각과 함께 바라 볼 일이다. 지금은 불두가 없어졌지만, 순수한 열정이 빛나는 눈이라면, 빈 불두의 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베풀지 않는다. 그저 순응하는, 그 마음 그대로 가져가도록 둘 뿐이다.
서산을 함께 넘어야 할, 빈자리의 꿈을 기다리며, 삼층석탑과 용장사지의 중간쯤 되는 등성이 평평한 곳에 자연석 바위를 받치고, 그 위에 삼층의 둥근 받침을 놓은 불상을 모셨다. 특이한 모양으로 산객들의 시선을 잡기도 한다. "탑이야 불상이야?" 가로로 길쭉한 자연석의 가운데 부분에 굄 1단을 만들고 북모양의 돌을 놓아 원반형 돌을 받고 있다.
2∼3층도 같은 방법으로 복모양 받침석과 원반형 돌을 차례로 쌓아 조성하였다. 북모양 받침돌과 원반석 돌은 위로 갈수록 지름이 작아지고, 자연석 기단에서 시작하여 거칠게 다듬어 투박하게 하다가 점점 곱게 다듬어 연꽃대좌에 연결되도록, 한번에 쑥 뽑아 올린 것처럼 잘 표현되어 있다. 3층의 북모양 돌의 지름이 가장 작게 만들어 시원한 상승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꼭대기의 불상을 받치는 힘을 표현하기 위해 북모양 돌의 가운데 배를 잔뜩 부풀리게 만들어 지름은 가늘지만 퉁겨져 오르는 힘이 있어 불상을 받치기에 적당한 힘을 가지고 있다. 3층 위에 다시 연화대좌를 놓고 가사가 대좌 앞을 가리고 있는 상현좌(裳懸座)를 취하였다. 기단 못지 않게 특이한 것은 손 모양이다. 무릎과 배 앞에 한 손씩 놓고 있는데, 이런 수인을 촉지항마인이라 한다.
촉지항마인은 왼손을 배 앞에 두고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늘어뜨리는데, 여기서는 손을 반대로 두고 있다.
용장사터
용장골 어귀에 있는 마을 이름이 용장리이고 계곡 이름도 용장골이니 모두가 용장사에서 기인된 이름들이다. 용장사는 이 계곡의 주인격일 뿐 아니라 남산 전역에서도 손꼽는 대가람이었다.
용장골의 남쪽면은 수리산을 정상으로 하여 흘러내린 여러 갈래의 계곡들로 되었는데 열반골의 기암과 괴암들이며 은적암 부근의 삼각봉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 비해 금오산에서 뻗어내린 여러 산맥들로 구성된 북쪽면에는 이렇다 할 잘생긴 봉우리들이 별로 없다. 하지만 용장사가 자리잡은 그 봉우리만이 거대한 바위들로 첩첩이 솟아 있다.
용장사는 어느 시대에 폐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초기 설잠스님(김시습)이 이곳에 오래 머물고 있으면서 금오신화를 썼다고 하니 조선초기까지는 절이 있었고, 지금은 절터 축대들과 기와 조각들만이 폐허를 뒹굴고 있다.
탑재와 석등대석
현재는 탑 기단갑석과 석등대석만 남아있다. 이 탑재로 보아 이곳에도 석탑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석등대석은 밤에 이곳을 찾는 사람을 위한 등대로서의 석등이다.
이곳에서 올려다보는 삼층석탑은 하늘나라의 부처님나라를 우러러보는 듯한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절경이다.
용장계 절골 석조약사여래좌상
용장계 절골을 올라가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무너진 축대가 2개 있고 좀 더 올라가면 큰 축대가 나타난다. 법당터 한가운데 남향으로 앉으신 이 불상은 1940년 당시에는 산에서 흘러온 모래와 자갈돌에 묻혀 있었던 것을 발굴 조사한 것인데, 머리와 배광은 찾지 못하고 대좌와 몸체만 발견되었다 한다. 이 불상의 대좌는 당시 보고서에 의하면 삼단으로 된 남산에서 셋밖에 없는 희귀한 방형대좌라 이다
남산
1
산을 오른다.
자욱한 솔숲을 지나고 바위 너설 넘어 끊어질 듯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
일찌기 화랑도 원화도 오르내리던 그 오랜 길에 나의 발도 놓으며
불국을 오른다. 구름 한 점 없는 희맑은 가을날에.
2
예사로 반야심경을 읖조리는 산새, 산새들...
취하여 걷다 문득 눈을 들면, 자연과 인공은 어디쯤서 나뉜다더냐.
솔 푸른 등성이마다 바위는 부처처럼 서고, 부처는 바위처럼 앉고.
3
정상 부근,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죽어, 그 중 몇은 선 채로 촉루가 되다.
드센 비바람에 가사 장삼 다 찢긴 오오, 노을 속 고행승의 모습...
뼘 남짓한 아기 솔들은 그 곁에서 또 한 세대를 천천히 일으키고 는데.
4
밤에도 오히려 산은 잠들지 않는다.
날이 날마다 목욕재개하고 찾아와 촛불을 밝히는 사람들.
천 년이 가도
연꽃같은 마애불과 단풍잎만큼이나 곱고 밝은 원(願)이 한데 어우러져,
산은 밤마다 깊고도 고요한 법열을 이룬다.
먼저 깬 새벽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나직이 흔들 때까지.
"신라문학대상" 수상작
물소리를 들으며 -경주 남산 정일근
돌은 어둔 밤 물이 길을 잃을까
길을 잃고 제 갈 길 찾아가지 못할까
자신의 몸을 때려 소리를 낸다
돌이 내는 소리가 물의 길이 되는 밤
물소리가 그분 등불처럼 환하다
안압지(사적 제 18호)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고려 태조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의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 "안압지의 서에는 임해전이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자리를 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보상화(寶相華) 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調露 二年,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때 만들어진 것임 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으로서 연못 가장자리에 굴곡을 주어 어느곳에서 바라보아도 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고안한 것으로 신라인들의 예지가 돋보인다.
불국사
부처님 나라를 땅 위에 옮겨 놓은 불국사
울산으로 가는 7번 국도를 따라 시내를 벗어나면 꽤 높은 산이 동편에 나타난다. 신라인들이 동악이라 부르며 신성시하던 토함산이다. 이 산에는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인 8세기 중엽 경덕왕 때 건립된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다. 석굴암에서 동쪽 산비탈을 곧장 내려가면 장항리를 지나, 위대한 통일군주 문무대왕이 잠든 대왕암이 있는 동해로 이어진다.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는 재상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만들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과연 재상의 신분으로 불국사와 석굴암 같은 큰 토목공사를 할 수 있는 재력이 있었을까는 의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경덕왕 때인 751년 공사를 시작해,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했다 한다. 총 공사기간은 24년이다.
토함산의 유래
첫째, "안개와 구름을 삼키고 토하는 산"에서 토함산이라 부른다. 동해에서 불어오는 습기 많은 바다바람의 영향으로 산 정상 부근에 안개가 머무는 날이 많다. 둘째, 토함산의 산신령이 된 석탈해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탈해를 토해라고도 한다."는 기록에 근거한다. 셋째, 토함산지역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불을 뿜어내는 모습을 보고, 토함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견해 등이 있다.
부처님 나라를 만든 신라인의 자신감 - 불국사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자신감은 사람들이 사는 땅위에 부처님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로 표현된다. 신라사람들은 옛날부터 신성시 한 토함산에 부처님 나라를 만들었다. 불국사(佛國寺) 이름을 그대로 해석하면 부처님 나라가 된다. 불국사는 토함산 서쪽 경사진 곳에 축대를 쌓고 절을 세운 산지가람의 성격을 띠고 있다.
불국사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천왕문을 통해 들어오면 정면에 보이는 백운교, 청운교, 자하문, 범영루, 좌경루가 있고 안쪽에는 석가탑, 다보탑, 무설전으로 구성된 대웅전영역과 이보다 조금 낮은 축대 위에 세워진 연화교, 칠보교, 안양문 등으로 구성된 극락전영역이다. 불국사를 정면에서 살펴보면 석가정토의 대웅전이 아미타여래의 극락전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신라 삼층석탑의 기준 - 석가탑(국보 21호)
석가탑(석가여래상주설법탑)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높이는 8.2m, 아무런 조각이 없는 2층 기단 위에 3층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양식이다. 석가탑은 통일신라 초기에 만들어진 감은사 탑과 고선사 탑이 지닌 무거운 석탑양식에서 벗어나 날씬한 비례를 적용함으로써 더욱 추상적이고 간결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후 신라석탑의 기준이 된다. 1966년 석가탑을 해체하였을 때 세계 최고의 목판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나왔다.
신라석공의 솜씨 자랑 - 다보탑(국보 20호)
다보탑(다보여래상주증명탑)은 석가여래의 설법을 찬양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다보탑은 높이 10.4m로 석가탑 보다 조금 높다. 4개 계단이 있는 정사각형의 기단 위에 1층은 속이 보이게 네 기둥을 세웠고, 지붕은 사각으로 기와집의 처마를 달았다. 2층은 사각난간이 있고 지붕은 팔각이다. 3층은 팔각난간과 연꽃이 활짝 핀 원으로 된 지붕을 하고 있다. 여러 가지 도형을 통해 많은 변화를 주었다.
다보탑의 복잡하고 화려한 장식 및 독특한 구조와 표현법은 어느 나라에도 없는 것으로 단단한 화강암을 이용해 목조건축처럼 만든 신라석공의 솜씨가 놀랍다. 대웅전영역을 하늘에서 보면 탑과 축대의 배치 또한 절묘하다. 단순 소박한 석가탑은 복잡 화려한 범영루 뒤에, 복잡 화려한 다보탑은 단순 소박한 좌경루 뒤에 두어 3차원적인 균형과 대비를 이루고 있다.
석가탑과 다보탑이 지닌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범영루와 좌경루의 모습이 다르게 된다. 불국사 축대에는 건축의 기본원리인 좌우대칭의 미를 따르지 않는 독창적인 멋이 숨어 있다. 다보탑에는 돌사자가 한 마리 있는데 원래는 네 마리가 귀퉁이마다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때 세 개는 사라지고 얼굴이 깨어진 한 마리만 남아 있다.
서방정토 극락세계 - 극락전 금동아미타불(국보 27호)
연꽃다리와 일곱 보석다리를 올라 안양문을 지나면 아미타부처님이 계신 극락세계다. 이곳에는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금동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원만한 얼굴에 오른쪽 어깨는 가사를 벗었고 오른손은 가볍게 다리 위에 얹었다. 곧은 몸과 단정하고 인자한 얼굴 모습은 전체적으로 자비롭고 존엄한 느낌을 준다. 극락전 아미타불은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가장 크고 훌륭한 불상으로 비로전의 비로자나불과 백률사의 약사여래상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3대 금동불이라 불린다.
부처님의 본체 - 비로자나불(국보 26호)
비전은 관음전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는 곳에 있다. 화엄경 사상에 따르면 비로자나불은 모든 부처님의 본체로 '빛을 인간세계에 널리 비쳐 준다'는 뜻이다. 수인은 지권인으로 오른손은 부처의 세계를 표시하고 왼손은 중생계를 표시하는 것이다. 이런 형상으로 손가락의 모습을 취하여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는 깊은 뜻을 나타낸다. 비로자나불의 얼굴 모습과 옷의 처리 등 세련된 수법은 지극히 아름다운 형상을 나타내어 신라인의 탁월한 솜씨를 보여 준다.
연화교·칠보교(국보 22호)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 ·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청운교·백운교 (국보 23호)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가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즉, 다리를 통해 깨달음에 다다르고자 하는 '희망의 다리', '기쁨과 축복의 다리'로의 표현의지인 것이다.
아래로는 17단의 청운교가 있고 위로는 16단의 백운교가 있는데,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 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신라시대의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 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여지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석굴암
[우주를 상징하는 석굴암 구조]
석굴암은 입구에 네모꼴 공간이 있으며 여기서 좁은 통로를 통해 둥근 공간에 이른다. 둥근 공간의 중앙에는 대불이 있고, 그 위 천장은 반원형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석굴암의 평면구성은 천원지방(天圓地方 :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다)이라는 동양의 우주관을 반영한 것이다. 입구의 네모꼴 공간은 사람이 사는 땅을 상징하고 통로 저편에 있는 둥근 공간은 신들의 나라, 즉 부처님의 나라이다. 부처에 예배하는 사람들은 네모꼴 공간에 서서 해야 하며 둥근 하늘 안으로는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한다.
[부처님 나라를 지키는 조각상들]
네모꼴 공간 주위 벽에는 팔부중을 조각했다. 이들은 원래 인도의 악신들인데 불교에 수용되면서 불법을 수호하는 착한 신으로 바뀌어 땅을 지키고 있다. 입구 좌우에는 금강역사(인왕상)가 조각되어 있다. 불법을 수호하는 한 쌍의 힘센 신으로 하체는 치마만 둘렀고, 벗은 상체는 근육의 아름다움과 불끈 솟는 힘을 느낄 수 있다.
정면에서 보면 왼쪽의 금강역사상은 주먹을 굳게 쥐고 입은 약간 벌린 모습이다. 소리를 내면 "아!" 라는 기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아금강역사'이다. 오른쪽 상은 입을 다문 채 손을 펴고 있는데, 소리를 내면 "흠!"이라는 기합 소리가 들릴 듯 한 '흠금강역사'이다. 열린 세계와 닫힌 세계, 즉 음과 양의 조화는 서로 다른 손 모습에서 완전함을 이룬다.
금강역사의 치마끝에서도 힘찬 기운이 뭉쳐있는 느낌이다. 치마 아래 드러나 있는 디딤발의 발가락을 자세히 보라! 엄지 발가락만 강조해 조각하고 나머지 발가락은 바위에 붙여 버리고 세부를 표현하지 않았다. 운동선수가 디딤발에 힘을 줄 때 엄지발가락에 힘이 집중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움직이는 자세를 자세히 연구하지 않으면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천년 전 지혜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대의 과학기술]
석굴암 현재의 모습은 본래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이는 1913년 일본인들이 석굴암을 완전히 해체해 수리할 때 외벽을 모두 시멘트로 발랐다. 그 결과 동해로부터 불어오는 습기가 많은 바람이 석굴 안과 밖의 기온차이를 유발해 석굴암 내부에 이슬이 맺히게 된다. 이슬 맺힘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1961년 또 한차례의 철근콘크리트로 이중 돔을 씌우고 유리창으로 입구를 막고 공기의 흐름을 차단하였다.
우주선을 타고 달에 가는 과학기술시대에 천 삼 백년 전에 해결한 습기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조상들의 지혜에 놀랄 뿐이다. 부처님이 계신 둥근 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 좌우에는 사천왕이 있다. 사천왕은 동서남북 사방을 다스리는 수호신으로 온몸을 화려하게 무장하고 무기를 들고 있다.
[석굴암 주실]
하늘나라를 상징하는 둥근 공간에는 가운데 당당하고 원만한 석가모니 대불이 앉아 있고, 주위 벽둘레에는 범천, 제석천, 보살, 십대제자와 십일면관음보살 등이 있다. 다시 그 위로 열개의 감실을 만들고 여덟 분의 보살들을 모셔 놓았다. 석굴암의 조각상을 모두 합치면 본존을 포함해 38체가 된다. 둥근 법당 한가운데에는 높이 3.5미터의 본존불인 석가여래가 동쪽을 향해 앉아 있다.
오랜 세월동안 크게 깨어진 곳 없이 온몸에 피가 흐르는 것 같은 생생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긴다. 얼굴과 어깨, 손, 무릎 모든 신체 부분이 원만하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옷에 나타난 옷 주름은 생동감이 있다. 얼마나 간결 한 옷 주름인가, 진실로 세상 이치를 모두 깨우친 이의 모습이다. 석굴암 주실의 천장은 반원형으로 크기가 다른 108개의 돌이 질서 있게 짜 맞추어져 있다. 둥근 천장은 고대의 천문관과 불교의 우주관을 상징한다.
감실 위쪽부터 5단의 천장석은 위로 갈수록 좁게 쌓아 둥글게 만들었는데, 제3단부터는 방사선 형태로 30개의 주먹돌(돌못)을 끼워 기하학적 구성을 보인다. 주먹돌의 역할은 천장 돌의 무게를 분산시키는 역할과 함께 주먹돌(돌못)의 머리가 각각의 천장석을 잡고 있어 무너지는 것을 막고 있다.
감은사지
신라 왕경 동쪽에 우뚝 솟아 해를 받아넘기고, 물길을 내어 쇠등이내와 남천을 흐르게 하고, 또 한 줄기는 동으로 흘러 동해구(東海口)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감은사는 경주에서 보문을 지나 덕동 호수를 굽이돌아 추령재를 넘어 동해구로 흘러가는 큰 물길을 따라 가다가, 바다에 거의 다다라 왼쪽 언덕에 쌍탑이 우뚝 서 있다. 시내버스가 입구에 선다. 주차장과 슈퍼, 도자기 집이 있다.
주차장 한 쪽에 안내판이 있고, 그 왼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절은 남북으로 놓여 있는데, 아래를 보면 남문터가 남아 있고 그 앞으로 네모난 웅덩이가 보이는데, 용담(龍潭)이라 부르는 연못이다. 용이 들어와 돌아다닌다고 '용담' 이라 부르기도 한다. 호국용이 된 문무왕이 대종천을 거슬러 올라 용담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절에 있는 연못은 대개,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는 과정이다. 반야용선(般若龍船)을 타고 극락으로 간다. 구품연지(九品蓮池) 연못을 건너면 극락이 나온다.
감은사지는 문무왕의 마지막 호국사업으로 왜구의 출몰이 잦았던 대종천과 동해가 만나는 동해구(東海口)가 바라보이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처음에는 '진국사(鎭國寺)'라 이름 지었는데, 왕은 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687년 7월 1일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왕자 시절 수많은 전쟁을 치렀으며, 아버지 태종무열왕과 함께 660년 백제의 항복을 받았고, 661년 왕위에 올라 668년 고구려의 항복을 받고 이후 7년간의 대당 전쟁을 승리로 이끈 통일의 주역이었다.
평생을 전쟁으로 보낸 문무왕의 일관된 호국의지는, 진국사의 창건으로 아들 신문왕에게로 이어졌다. 선왕의 유언에 따라 화장 후 동해에 장례를 지내고, 선왕이 창건한 절을 이듬해 완성하고 이름을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의 '감은사(感恩寺)'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아버지 문무왕은 평생을 받친 호국일념으로 절을 짓고 아들은 지극한 효심으로 절을 완성하였다.
[절의 구조]
절은 남북으로 놓여 있는데, 입구 문을 남문이라고 부른다. 남문 앞에는 용담(龍潭)이라는 네모 난 연못이 있었다. 용담은 용이 된 문무왕이 감은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연못으로 생각된다. 바다물의 높이가 지금보다 높았으며, 용담의 물이 바다로 흘러들었다고 하니, 바다의 용이 물을 타고 용담까지 거슬러 오를 수 있을법 하다.
남문 다음에는 가파른 언덕을 올라 중문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는데, 계단은 복원하지 못하고 경사진 언덕으로 되어 있다. 중문에 서면 3층 쌍탑과 정면에 금당이 보인다. 중문 좌우로는 금당으로 가는 회랑(복도)터가 보이고, 금당 뒤에는 강당 터가 복원되어 있다.
[금당(金堂)]
금당이란 주로 절터에서 사용하는 말로써, 금색인(金色人)을 모시는 집을 말하며, 금색인이란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문경 봉암사에 금색전(金色殿)이라는 건물이 있다. 감은사지를 발굴할 때 가장 큰 관심은, 삼국유사에 '동해에 용이 되신 문무왕께서 지친 몸을 편히 쉴 수 있도록 금당 동쪽에 용혈(龍穴)을 두었다.' 는 기록이 있다. 발굴 결과 용혈은 남아 있지 않았으나 금당 바닥 밑에 빈 공간을 발견하였다.
이 공간이 바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었던 바, 용이 들어와 쉴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전설 같은 이야기가 현실로 증명이 된 것이다. 현재 금당의 모습은 1956년 복원된 것이다. 허물어진 계단과 금당 바닥에 깔았던 장대석과 주춧돌이 드러나 있고, 장대석 밑으로 빈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금당 계단 좌우에는 태극무늬가 새겨진 장대석이 하나씩 놓여 있다. 태극은 도교(道敎)의 상징으로, 감은사는 불교를 바탕으로 화룡사상과 도교 등 나라를 지키는데 필요한 모든 사상이 포함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서 삼층석탑]
삼국시대 창건한 흥륜사, 황룡사, 기림사는 탑을 배치할 때 목탑을 기본으로 절의 중심부에 탑을 하나 배치하는 일탑식 가람이었으나, 삼국통일 후 석탑을 기본으로 두 개의 탑을 배치하는 쌍탑식(이탑식) 가람 배치로 변한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일탑식에서 쌍탑식으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였다.
석탑의 발생은 삼국시대 분황사에서 전탑을 모방한 석탑인 모전석탑을 만들면서 시작이 되었던 것이 삼국시대 말에서 통일 초, 신라식 모전석탑과 목탑 모양으로 만든 석탑인 백제식 모목석탑 - 모목석탑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 의 두 형식이 하나로 합쳐져 새로운 형식의 한국식 석탑이 발생하게 되었다. 위의 탑들은 우리나라가 만들어 낸 독창적인 양식의 탑이다.
국보 제112호인 동서 3층 석탑은 전체적인 형식에서 치수까지도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탑은 노반까지의 높이가 9,85m, 상륜부를 끼웠던 철제 기둥인 찰주의 높이 3,49m로 총 높이가13,34m 에 달한다. 682년 감은사 창건 당시에 만들어진 탑으로 건립 연대가 확실하고 거대한 규모의 석탑으로서 우리나라 석탑을 대표하는 귀중한 유적이다.
각 석탑에 사용된 부재는 기단석 44점, 탑신석 13점, 옥개석 24점, 노반석 1점 등 총 82점의 석재가 사용되었다.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붕괴의 위험성이 높아 1960년 서탑, 1996년 동탑을 각각 해체 복원하였다. 동서탑 모두 3층 탑신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장엄구 ]
서탑 3층 탑신 사리공에 청동제 사각함과 그 속에 담은 청동제 사리기가 발견되었다. 청동제 사각함 각 면 중앙에는 사천왕상을 하나씩 새겨 붙였고, 사리기 안에는 사리병이 들어 있다. 사리기와 함께 함속에 사리를 담을 때 사용했던 물건으로 짐작되는 집게(17cm)와 숟가락(12cm)이 들어 있었다. 동탑 3층 탑신 사리공에서는 54과의 사리가 봉안된 금동제 사리함이 발견되었으며, 탑을 복원하면서 재봉안하였다.
토함산을 넘어 대종천을 따라 동해로 가는 길. 바다가 가까워지면 신작로 왼쪽편에 우뚝 솟은 2기의 3층석탑이 보인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일생을 보낸 문무왕이 나라사랑하는 마음으로 터를 닦고 그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682년에 완성한 절이다.
왜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막고자 절의 이름을 진국사(鎭國寺)라 하였으나, 절이 완성되기 전에 문무왕이 죽는다.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되겠다" 고한 유언에 따라 화장한 뒤 대왕암에 안장했다.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 현재의 모습은 1979년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절의 구조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중문-쌍탑-금당-강당 순으로 되어 있는 쌍탑일금당 양식으로 최초의 것이다.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에 회랑이 있다. 금당의 동쪽과 서쪽에 회랑(익랑)이 연결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금당의 바닥은 H자형의 받침돌을 놓고 긴 돌로 마치 돌마루를 얹어 놓은 것 같이 만들고, 그 위에 기초를 두고 건물을 세웠던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다. 돌마루 밑의 빈 공간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감은사 금당에서 몸을 쉴 수 있도록 한 상징적인 것이다. 이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한다.
남쪽 언덕 아래에는 작은 연못(용연)이 있고 신라시대 쌓은 석축이 일부 남아 있다. 당시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감은사가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 것은 높이 13미터의 동서3층석탑이다.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라의 넘쳐나는 힘을 느낄 수 있다. 신문왕이 쌓았던 이견대는 없어졌지만 1970년 발굴로 건물지를 추정하였으며, 1979년 신라의 건축양식을 추정하여 이견정을 새로 지었습니다.
이견대
대왕암을 의미 있게 눈여겨 볼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있다. 대본초등학교 앞쪽에 있는
이견대와 동해구(東海口)라는 표지석 아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기념비가 서
있는 자리이다. 이견대는 화려한 능묘를 마다하고 동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
겠다고 한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였다는 곳이며 그의 아들 신문왕이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배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유서깊은 곳이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주
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현재의 건물은 1970년 발굴조사 때 드러난 초석에 근거하여 최근에 지은 것이다.
동해구 표지석 아래로 내려가면 우현 고유섭선생의 반일 의지를 기리기 위해 1985년 제
자들이 세운 기념비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가 보인다. 일제 시대 명백한 침략을 내
선합일이라는 명목으로 정당화하려는 일본의 우격다짐에 쐐기를 박듯, 이미 통일신라시
대에 왜구의 침략을 경계한 문무왕의 호국의지를 돌이켜 생각하며 고유섭이 지은 '대왕
암'이라는 시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기념비가 대왕암이 바라다 보이는 자리
에 나란히 세워져 있어 뜻이 더 깊다.
장항리 절터
토함산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두 계곡과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는데, 이계곡 물은 대종천을 따라 흘러 감은사를 지나 동해에 이릅니다. 계곡의 높은 절벽 위에 절터를 닦고 중앙에는 불상을 모시기 위한 금당을 마련하였는데, 남아 있는 초석으로 미루어 볼 때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으로 금당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상을 놓았던 대좌가 남아 있는데 아래/위 두 개로, 아래 돌은 여덟 방향에 창 모양의 안상(眼象)을 만들어 네 곳에는 동물을, 다른 네 곳에는 신장(神將)을 조각하였고, 위에 얹은 돌은 아래/위로 붙은 연꽃을 16송이씩 조각하였습니다. 이 곳에 깨어진 불상이 있었는데 1932년 서탑을 복원하면서 국립경주박물관 정원에 옮겨 세웠습니다. 금당의 좌우에 5층 석탑이 15m 거리를 두고 서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절 배치에 보이는 중문이나 강당, 회랑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장항리는 경주에서 덕동호를 지나 가내고개 넘어 범골 다음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산의 산등성이 생김새가 노루의 목같다고 노루미기, 노루목인데 한문으로 장항(獐項)이라고 부른다. 장항리사지는 장항석굴로 제4교 오른쪽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신라시대 절터이다. 이 계곡은 토함산의 동쪽에서 흘러 나와 감은사 앞을 흐르는 대종천의 상류가 된다.
장항리사지(獐項里寺址)는 사명(寺名)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장항리(獐項里)'의 동리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절터는 두 계곡이 만나는 합수점 위 높은 언덕에 있고, 금당 자리와 석조불상을 안치했던 불상대좌, 5층 서탑과 파괴된 동탑이 남아 있다. 금당 안에 안치되었던 석조불상은 현재 경주박물관 고분관 북쪽 정원에 상반신만 남은 채 전시되고 있다.
금당터 오른쪽에 5층 서탑과 파괴된 동탑이 나란히 서있다. 서탑의 높이는 약 10m로 파괴된 동탑의 규모도 서탑과 거의 동일하다. 가람배치에 있어 탑의 위치는 금당 전면 좌우에 나란히 배치되어 금당과 삼각형 구조를 이루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장항리사지에는 금당 전면에 탑을 배치할 공간이 없기 때문에 금당 측면 좌우에 배치하였는데 금당 왼쪽 언덕이 큰물에 무너지면서 탑도 붕괴되어 흩어져 있는 것을 현 위치에 옮겨 세워 놓았다.
산지(山址) 가람을 조성할 때는, 평면 공간을 충분하게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적인 가람배치를 따르지 않는 절터가 많이 있다. 서탑은 1925년 일본인 도굴범이 탑 속에 있는 사리장치(舍利藏置)를 훔치기 위해 폭파함으로써 파괴되어 있던 것을 1932년 복원하였다. 동탑은 폭우로 금당 동쪽 골짜기가 무너지면서 계곡에 떨어져 있던 것을 1950년대 들어와서 서탑 옆에 현재의 모습으로 옮겨 세워놓았다.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이중기단을 갖추고 있고, 전형석탑의 층수가 3층인데 비해 나원리 탑처럼 5층의 구조로 되어 있어 층수는 나원리 5층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나원리 5층석탑은 하층기단의 기둥 수가 5개인데 이 탑에서는 기둥이 4개로 되어 있는데 이는 황복사지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상층 기단의 기둥 수는 두 탑이 4개로 동일하다. 몸돌의 수도 나원리 탑은 4개의 판석을 맞추어 세웠는데 이 탑은 한 개의 돌로 몸돌을 만들었다.
신라 탑의 일반적인 전형은 기단의 기둥 수와 탑부재의 수가 많을수록 시대가 오래된 것이고 규모 면에서도 대형이다. 하층기단의 수가 4개로 줄어들고 몸돌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것은 이전의 탑들보다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1층 탑신 각 면에 문비(門扉:문 모양을 조각)를 새기고 문비 좌우에는 금강역사상을 배치하였다. 문비를 새긴 석탑으로는 고선사지 석탑이 처음인데, 문비를 새긴 것은 목탑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써 문안에는 부처님이 계시다는 뜻이고, 금강역사상은 부처님 세계를 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고선사지 석탑의 문비에는 손잡이를 만들어 끼웠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서탑(西塔)의 문비에는 귀면 문고리를 돋을 새김 해 놓았다. 신라 탑에서 금강역사의 배치는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처음 등장을 하고 석탑으로써 금강역사를 배치한 것은 장항리사지 석탑(西塔)이 처음이다. 분황사 석탑의 금강역사상은 암좌(岩座) 위에 상을 세웠는데 비해 서탑(西塔)에서는 복련(伏蓮) 대좌 위에 금강역사를 배치하였다.
연꽃 위에는 여래상과 보살상만이 오를 수 있는데 특이하게 연꽃 위에 배치를 하였다. 탑신부 각 면에 새긴 여덟의 금강역사상들은 저마다 자세와 바라보는 방향을 달리하고 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호통치는 듯 벌린 입, 불끈 쥔 주먹과 상반신의 울퉁불퉁한 근육들은 강한 움직임을 느끼게 한다. 석불 대좌 중대석에 새겨진 신장상과 사자상들도 큰 동작을 취하고 있어 장항리사지의 조각들은 전체적으로 매우 활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장항리사지 5층 석탑은 나원리 5층석탑과 황복사지 3층 석탑의 양식을 잘 따르고 있고 천군동 동·서 쌍탑과 함께 쌍탑의 전형을 확립한 탑이다. 이 탑에서 주목할 변화는 탑신부에 금강역사 조각이다. 탑에 불교상(12지신상·금강력사·팔부신중·사천왕 등)을 조각하는 것을 장엄(장엄)이라고 하는데 이 같은 형식의 장엄은 이 석탑이 시초가 된다.
골굴사
함월산 기슭의 골굴암에는 수십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회암에 12개의 석굴이 나있으며, 암벽 제일 높은 곳에는 돋을새김으로 새긴 마애불상이 있다. 법당굴은 굴 앞면은 벽을 만들고 기와를 얹어 집으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도 벽도 모두 돌로 된 석굴이다. 북쪽벽에 감실을 파고 부처를 모셨으나 마멸이 심해 얼굴 표정은 알 길이 없다. 법당굴과 다른 굴들은 한사람이 겨우 들어앉을 수 있는것부터 서너명이 들어앉아도 넉넉한 큰것에 이르기까지 크기가 다양한데 귀여운 동자승부터 위엄이 넘치는 노스님까지 여러 형태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굴과 굴로 통하는 길은 바위에 파놓은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정상에 새겨진 마애불로 오르려면 자연 동굴을 지나게 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 [골굴 석굴도] 에는 마애불상과 12처 석굴이 모두 목조와가로 그려져 있으나 현재 전실은 모두 소실되고 바위굴만 남아 있다. 절벽 꼭대기에 새겨진 높이 4m, 폭 2.2m 정도의 마애불상은 보물 제 581호로 지정돼 있다. 모래기가 많이 섞인 화강암에 새긴 터라 보존상태가 썩좋지 않고 오랜 풍화 작용에 의해 훼손이 심해 유리 지붕을 씌어 놓았다. 근래에 이르러 골굴사에 는 불가의 전통 수행법인 선무도 수련원이 개설되어 국내인은 물론 외국인들도 많이 참가하고 있다.
분황사
[천년을 밝힌 법등(法燈)]
분황사는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 만든 절로 천삼백년 넘도록 법등이 끊이지 않고 내려오고 있다. 북쪽으로는 이차돈의 목이 떨어졌다는 금강산과 육부촌장이 봄에 물길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알천(지금 북천)이 있고, 남쪽 바로 앞에는 대국찰 황룡사터가 있는 신라 왕경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분황(芬皇)의 뜻은]
절 이름은 자리잡은 땅이나 산천, 절을 짓게 된 인연이나 경전 내용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보통이다. 황룡사는 황룡의 출연으로 붙은 이름이며, 불국사는 부처님 나라의 건설을 뜻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芬皇寺'의 이름에는, 전해오는 얘기나 해석이 아직 없다. '향기롭고 아름다운 절'이나 '세상의 괴로움과 번뇌에 물들지 않는 분다리(연꽃)와 같은 부처님의 도량' 이라는 뜻으로 해석 할 수 있다고 한다.
[분황사는]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에 창건된 절이다. 신라 전불시대 칠처가람(前佛時代七處伽藍) 중의 하나로 '용궁 북 분황사(龍宮 北 芬皇寺)'라고 불렀으며, 국가차원의 절로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중요한 절이다. 전불시대 칠처가람은, 석가모니불 이전의 부처님인 가섭불 시대에 신라 수도 서라벌에 만들어진 일곱 절터에 다시 지은 절을 말하는데, 신라가 인도보다 불교와의 인연이 깊다는 자주적인 종교관이다.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장과 원효스님(화쟁국사)이 주석하였던 절로도 유명하며, 차화쟁국사지비적(此和諍國師之碑跡)이라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이 새겨진 비석 받침이 남아 있다. 신라 때 창건된 절 중에서 지금까지 법등을 이어 내려오는 절은 분황사와 백률사, 불국사, 기림사 정도로 유서 깊은 사찰이다.
끊이지 않은 절의 역사를 말해주 듯, 창건 당시 우물인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은 지금도 맑은 물을 솟아 내고 있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있었고, 금당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했다. 가람배치는 '品자형'으로 가운데 모전석탑을 두고 둘레에 금당(金堂)을 品자형으로 세 군데 배치한 1탑 3금당 형식으로 밝혀졌다. 삼국시대에는 탑을 중심으로 절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근처 황룡사의 가람배치도 1탑 3금당 형식으로 되어 있다.
모전석탑 - 국보 30호
중요 유물로는 국보 제30호인 모전석탑(模塼石塔)이 있다. 모전석탑이란, 전탑(벽돌탑)을 모방하여 만든 석탑을 말한다. 전탑은 흙으로 구운 벽돌을 쌓아서 만드는데 분황사 석탑은 안산암이라는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만든 석탑이다. 우리나라 석탑의 시작이 된다.
[기단부]
호박돌과 다듬은 돌을 오벌대(다섯 단) 정도로 막 쌓고, 그 위에 다듬은 긴 돌을 한단 올려 마감하였다. 호박돌을 막 쌓았기 때문에 윗단이 수평이 아니다. 그래서 다듬은 돌을 올려 마감할 때, 호박돌의 생긴 모양대로 다듬어 맞추어 올려놓았다. 이런 돌의 맞춤을 '그랭이질'이라고 한다. 불국사 축대에서 자연미를 살린 이런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다. 기단부 모서리 네 곳에는 사자를 세워 탑을 지키고 있는데, 동쪽은 암사자로 갈퀴가 없다. 생긴 모습이 물개처럼 보이지만 탑을 지키는 동물로 물개를 배치한 예는 없다. 서쪽 것은 갈퀴가 달린 수사자이다. 사자는 인도에서 맹수의 왕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동물로 여겨졌다. 부처님의 목소리를 사자후(獅子吼)라고 한다.
[탑신부]
원래 9층이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 있다. 무너진 벽돌들은 절 마당 구석에 쌓아 놓았는데, 삼성문화재단에서 남은 벽돌 개수를 층수로 환산해 본 결과 9층임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임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승려가 개축하였고, 1915년 일본인들이 해체 수리하였는데 현재의 모습은 그때 복원한 것이다. 이때 제2층과 3층 사이 돌상자(석함)속에서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1층 네 면에는 문과 방(감실 龕室)을 만들었다. 감실이라고 부르는 방에는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므로 문 좌우에 금강력사(인왕상) 2체가 방을 지키고 있다. 전탑은 중국의 전통적인 가옥인 벽돌집 모양이므로 내부로 출입이 가능한데 이러한 공간을 상징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지금 감실 안에 안치된 머리가 없는 불상은 원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감실 안을 들여다보면 자연석을 쌓아 탑 속을 채웠고, 벽돌은 담을 세우듯 쌓았다.
분황사 석등
황룡사와 담장을 같이하고 있는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되었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지장이 거쳐간 절이다. 신라 서라벌내 7개 가람중 하나에 속하며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어른 키만한 담장위로 석탑의 윗부분만이 보이는 자그마한 절이 된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 석탑과 화쟁국사비편, 삼룡변어정이라는 우물이 있으며, 석등과 대석깉은 초석들이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모양의 돌들이 쌓여있다. 석등 지대석은 석탑 발굴당시에 석탑앞에서 발굴 후 보존을 위해 다시 그 자리에 묻었다. 현재 석탑 왼쪽 담밑에 하대석, 상대석 부재가 남아있다.
분황사 당간지주
분황사 정문에서 남서쪽으로 약 50m 떨어져 있다. 2개의 화강암 기둥(지주)이 68m간격으로 서 있는데 밑 부분의 크기는 42cm × 67cm이며, 상부는 29cm × 48cm로 의로 올라갈수록 줄어들면서 끝은 바깥쪽으로 둥그렇게 마무리 되어 있다. 이 양 지주의 높이는 땅에서 3.75m로 상부와 중간 및 하부에 지름 15cm인 간공(杆孔)3개가 마주보고 뚤려 있다. 간대(竿臺)는 거북모양으로 정면의 우측과 뒤쪽의 좌측부분이 파손되어 있는데 크기는 높이 0.55m, 길이 1.6m, 넓이의 경우 완전하다고 생각하면 1.4m 정도로 되어 있다. 거북의 등은 당간을 세우기 위해 방형의 홈이 파져 있으며 빗물이 빠져 나갈 수 있도록 배면 부분으로 길 게 홈이 나 있다.
간대인 거북의 방위가 동향을 하면서 간주가 남북으로 서있는 까닭에 분황사의 당간지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으나 지금의 방위 이외에 분황사의 전체배치와 진입로의 관계가 밝혀져야만 이 당간지주의 성격이 분명해질 것이다. 현재는 분황사의 당간지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황룡사터 (사적 제6호)
글 하나
황룡(黃龍)이 출현하다 -黃龍則皇帝也
(黃龍寺를 皇龍寺라고도 하니 황룡은 곧 황제를 말함이다.)
- 발주처 : 신라국 조정
- 발주인 : 진흥왕
- 공사시작 : 553년
- 도목수 : 200명 동원
- 사찰넓이 : 25,000평
- 공사기간 : 82년(진흥왕-진지왕-진평왕-선덕여왕)
신라 수도 금성의 중심을 포근히 감싸 않고 왕경을 지키는 네 산이 있다.
동쪽-명활산(명활산성), 서쪽-선도산(선도산성), 남쪽-남산(남산신성), 북쪽-금강산 이 산들 안쪽으로 남천(南川), 서천(西川), 북천(北川)이 흐르고, 그 안에 신라의 정궁인 월성(지금의 반월성), 월지(지금의 안압지), 첨성대, 대형고분들, 분황사, 황룡사 등 신라사의 중요 역사가 모두 모여 있다.
그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곳은 황룡사이다. 황룡사터 금당과 목탑터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위의 네 산의 한가운데 있음을 알게 된다. 황룡은 중심을 의미하는데, 황룡사는 신라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의 건설이라 할 수 있다. 제24대 진흥왕이 21세 되던 553년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짖게 하였는데, 그곳에서 황룡이 나왔으므로 절을 짓고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
전불시대 칠처가람(前佛時代七處伽藍) 중의 하나로 '용궁 남 황룡사'라고 불렀다. 558년에 절의 배치를 마치고, 574년에 장육존상(丈六尊像, 16척 높이 불상으로 4.8m 정도 높이)을 만들고, 584년진평왕때에 장육존상을 안치할 금당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645년 선덕여왕에 이르러 호국대탑인 9층목탑을 완성하였다.
황룡사는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까지 4대에 걸쳐 83년간의 대역사로 신라의 최대의 국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국제 사회의 질서였던 불교의 수용은, 신라가 지역성을 벗어나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기회였으며, 화백 귀족들이 하늘에 대한 제사권을 극복할 수 있으며, 고등종교의 수용은 왕권 강화의 좋은 명분이 되었다. 진흥왕의 아버지는 신라에 불교를 공인하게 한 23대 법흥왕이었다. 이차돈의 순교로 어렵게 공인된 신라의 불교, 황룡의 출현과 황룡사의 창건은 불교를 통한 새로운 국가 건설의 의지였다.
[장육존상(丈六尊像) - 이상세계 건설]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아쇼카왕의 발원으로 금동불을 조성하려고 하였으나 실패를 거듭하다가, 인연이 없음을 알고 금동과 불상의 그림을 배에다 실어 띄워 보내며 부디 인연 있는 나라에 닿아 불상이 완성되기를 빌었다고 한다. 그 배가 500여 년 바다 위를 떠 다니다가 신라에 와 닿고, 신라에서 불상이 완성이 된다. 그 불상이 바로 신라 삼보 중의 하나인 황룡사 장육존상이다.
장육이란 16자 높이로 약 5m 정도 높이를 말한다. 불상의 높이가 장육이 넘으면 대불(大佛)이라고 한다. 불교의 발상지 인도, 그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아쇼카왕이 실패한 불상이 삼국 중 열세에 있던 신라에 의해 완성이 된다. 이는 신라가 불교와 인연이 깊다는 불국토 사상과 삼국일통의 꿈을 나타낸 것이다.
불교 수용과 발전의 극단적인 방법은 신라 사회가 처한 대내외적인 어려움과 극복의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후 진흥왕의 독자적인 연호 사용이나 삼국간의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신라 건국이래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으며,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장육존상과 구층목탑은, 진평왕 천사옥대(天使玉帶)와 함께 신라 삼보(三寶)이며, 신라 최고의 화가인 솔거가 금당에 늙은 소나무를 그려 놓았는데, 새들이 날아가다가 나무인줄 알고 앉으려다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고 하는 노송도가 있었다. 황룡사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와 기술자들에 의해 완성이 된 삼국시대 신라 정신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9층목탑-삼국일통의 꿈]
- 발주처 : 신라국 조정
- 발주인 : 선덕여왕
- 총책임자 : 이간 김용춘(伊干 金龍春), 제25대 진지왕의 아들
- 도목수 : 아비지(阿非知), 백제 기술자
- 공사기간 : 643∼645년
- 층수 : 9층
- 높이 : 225척
진흥왕 때 삼국간의 우위를 차지했던 신라가 제27대 선덕여왕 때 들어서, 백제 군사가 신라 서울 근교까지 쳐들어오는 등 백제와의 전쟁에서 열세에 빠지게 된다. 이 때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자장법사의 청에 의해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는 9층 목탑을 세운다. 신라 주위의 아홉 나라를 모두 항복시키겠다는 강력한 호국의지가 담긴 탑이었다.
목탑 조성의 총책임자는 제25대 진지왕의 아들인 이간 김용춘 이었으며, 기술 공사의 책임자는 백제 기술자 아비지였다. 9층목탑의 건립 의도를 알아차린 아비지는 공사를 중단하려고 했으나, 꿈속에서 신인이 내려와 탑을 완성하는 것을 보고, 하늘의 뜻으로 생각하고 탑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탑의 높이는 226척(尺)으로 80m에 이르는 큰 탑이었으나, 고려시대 몽고의 4차 침입(1238)으로 당시 민족의 종교적 지주였던 황룡사가 불탈 때 구층목탑도 함께 불타버렸다. 이후 다시 복원을 하지 못하였고, 지금은 빈터만 남아 옛날의 기상을 짐작하게 한다.
[목탑의 모습은]
경주 남산(南山) 탑곡 마애조상군 바위 북면에 7·9층 마애탑이 새겨져 있다.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가 완전한 모습이며, 탑신부 지붕에는 층마다 풍경이 달려 있다. 마애탑의 모습에서 당시 황룡사 구층목탑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두 마애탑 중 9층탑을 황룡사 9층목탑이라고 소개하는 책자가 있는데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른쪽 7층 마애탑의 모델이 된 탑도 언급이 되야 할 것인데, 신라의 탑 중에 7층탑은 기록에 없다. 고구려 탑 중에는 7층탑이 있다.
[목탑은 왜 9층이었을까?]
80m 높이를 지금의 일반적인 건물로 환산하면 약 25층의 높이가 되는데, 목탑의 9층 지붕 용마루까지 높이는 63m 정도가 된다. 경주지역의 문화재 보호구역인 대릉원 주변에는 건축규제가 심한 곳이다. 이곳에 허가가 나는 건축은 '높이 7m 단층 기와집'이라는 조건이 있다. 7m 단층 기와집에 9를 곱하면 황룡사의 9층 지붕까지의 높이인 63m가 나온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조 에는 '황룡사에 구층탑을 조성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천하가 와서 조공하며 나라의 복이 길이 편하리라.' 해동 명현 안홍의 저서 [동도성립기]에는 '신라 제27대에 여왕이 임금이 되니 도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서 구한(九韓)이 침범하니 만일 용궁 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의 재난을 막으리라.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제주도), 5층은 응유(鷹遊 중국 강소성 동해현 둥북쪽 섬),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거란(契丹), 8층은 여진(女眞), 9층은 예맥(穢貊)이다.' 아홉 나라 중 일본과 중화, 탁라는 신라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 나라였다. 선덕여왕 재위 시 신라에 가장 큰 위협은 백제국이었고, 아비지의 얘기에서도 그 사실이 나타나고 있는데 목탑 9층에 해당하는 적국에는 백제가 빠져 있다.
구한(九韓)의 항복을 받는 다는 것은 실제 아홉 나라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신라 주변의 모든 나라로부터 항복을 받는 다는 의미로 해석을 해야 한다. 목탑의 층수인 9 또한 가장 많다는 뜻이 될 것이다.
[구층목탑 찬]
육신이 보호하여 서울을 진압하니
나는 듯한 처마에 단청도 휘황하다.
올라가 굽어보면 구한(九韓)만이 항복하랴
건곤(乾坤)이 모두 평정됨을 깨닫게 된다.
<일연>
글 두울
달빛 기둥, 별빛 지붕, 은하수 찻물 터뿐이건만 이곳에 오면 옛 황룡사 나름대로 멋들어지게 세워보곤 한다. 자연을 거스르지 앉은 채 보다 자연스레 주춧돌을 투박하게 쪼아 거기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려 부처를 모시고 종을 울렸다. 서양 같았으면 부처나 신을 억지로라도 모셔오기 위해 돌을 좀 더 매끄럽게 다듬고 갖가지 장식을 덕지덕지 붙였을 것이지만, 부처와 신과 자연과 인간이 둘이 아님을 알았던 신라인들은 보다 자연에 가까운 건축물을 생각했던 것이리라.
돌을 쪼개다만 흔적이 있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침돌로 쓰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모양이 제대로 나오지 않은 돌도 그대로 모양으로 승화시켜 웅장함이 땅과 괴리되지 않았음이니, 과연 세상 누가 그런 과감하고도 자연친화적인 기법을 사용할 수 있었겠는가? 청마선생께서 맨 처음 공중에 매달 줄 아는 이를 사모하셨듯이 '아 - 누구일까? 이렇듯 과감하고도 파격적이며 이미 우주의 이치를 깨닫고 땅에서 황룡사를 솟아오르게 한 이는?'
바위덩어리 초석과 불상대좌에 굳이 천년 전의 건축물이 그대로 서있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거대한 달빛기둥을 세우고 별빛 지붕을 얹어 은하수를 끌어다가 차를 다릴 수 있다. 황룡사지에서 느끼는 각자의 감흥은 아마도 천차만별 일게다. 비슷한 감흥이야 있겠지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황룡사지의 오묘함만큼 변화 무상한 느낌이란, 언어의 부족함을 여실히 드러내고야 만다. 황룡사지 진정한 정취는 영감과 상상력을 두루 지닌 각자에게 맡겨 두고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문헌에 나타나는 황룡사를잠시 들여다보기로 한다.
[황룡사의 창건과 소실]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즉위하고 14년 후인 553년에 용궁(龍宮) 남쪽에 대궐을 지으려 하니, 황룡(黃龍)이 나타났으므로 이것을 불사(佛寺)로 고쳐 황룡사(黃龍寺)라 하고, 이 후 17년만인 569년에 이 절을 완공했다. 또한 황(黃)은 황(皇)과 같고 또 이 절의 주지나 출입자 또한 황족이요, 당시 사정을 보더라도 왕의 권위가 필요했으니, 자연스레 황룡사(皇龍寺)라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황룡사에는 신라 당시 삼보 가운데,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장육존상, 황룡사9층목탑)가 이곳에 있었으니 황룡사를 신라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히 여겼으며 신라를 부처님의 인연이 깃든 땅 위의 불국토로 인식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라 거찰 황룡사는 고려 고종 몽고군의 6차 침입 때(서기 1238년) 모두 불타 없어졌다.
[황룡사 장육(丈六)]
장육이란 1장 6척의 높이를 말함이니, 일장은 10척이고 한 척은 약 30cm이므로 이 곳 불상의 높이는 대략 4m 80cm 이다. 석굴암 본존 높이가 3.42m(연화대를 포함하면 5.05m)이고 보면 이 곳 불상의 위용을 가히 짐작할만 하다. 황룡사 장육존상을 비롯한 삼존불의 조성에 관한 기록 또한 눈길을 끈다. 황룡사를 완성하고 얼마되지 않아 지금의 울주군 곡포 앞 바다에 큰 배 한 척이 닿았다.
이 배에는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阿育王]이 보낸 공문과 함께 황금 3만 푼과 구리 5만 7천근이 실려 있었다. 공문에는 '이 금과 구리로 석가삼존상을 모시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배에 실어 보내니 부디 인연있는 국토에 가서 장륙존상을 이루어 주기를 바란다'고하면서 1체의 불상과 2체의 보살상 모형도 함께 실려 있었다.
신라에서는 배가 닿은 근처 좋은 자리에 동축사(東竺寺)를 짓고 모형으로 보낸 3존을 봉안하였으며, 금과 구리는 서울로 가져와 장육존상을 만들었는데 불과 6개월도 걸리지 않아 금새 완성(진흥왕 35년, 서기 574)을 보아 황룡사에 모셨다 한다. 이듬해 이 불상에서는 눈물이 흘러 땅이 한자나 젖어, 임금의 승하를 미리 알았다고도 한다.
불상이 이루어진 뒤 동축사에 봉안했던 삼존불도 황룡사로 옮겨왔다 한다. 장륙존상에 관한 내용 가운데 단연 일연스님의 讚揭가 눈길을 끈다.
속세 어느 곳인들 참 고향이 아니랴만
향화(香火)의 인연은 우리 나라가 으뜸일세
이것은 아육왕(阿育王)이 착수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월성(月城) 옛터를 찾느라고 그랬던 것 일세
[황룡사 9층목탑]
이 탑은 황룡사가 지어진 74년 후인 신라 제27대 선덕왕 12년(서기 636년)에 백제 장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건립에 착수한 10년 후인 645년에 완성되었고, 높이는 약 80m(상륜부 약15m, 탑신부 약 65m)의 대탑이였다. 이 후 고려 고종 25년(서기 1238년) 몽고군의 침략으로 탑이 소실되기까지 신라와 고려 두 왕조에 걸쳐 여섯차례 중수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고구려 왕도 '신라에는 삼보가 있어 신라를 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했다는 기록이 있듯이 당나라, 왜구, 고구려, 백제를 비롯한 이웃 아홉나라의 침략을 불력으로 막기 위함도 함께 한 탑이기도 하다. 이렇듯 웅장하고 중후하며 왕조가 바뀌는 과정에서도 홀대받지 않았던 황룡사 9층목탑은 현재 64개의 초석과 1개의 심초석만 남겨둔 채 우리 겨레의 가슴에 자리할 뿐이다.
1974년 故 박정희 대통령이 황룡사 발굴현장을 방문하고 콘크리트로 황룡사 9층목탑을 복원하라는 지시가 있은지 몇 해 간이나 복원과 이를 반대하는 입장이 대치하다 결국은 제반 문제로 후손에게 넘기기로 했으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라 생각된다. 행여 콘크리트로 80m(아파트 25층 높이 이상)의 탑을 복원했다면 그나마 남아있는 기단부는 모두 파헤쳐지고 지하 3층쯤 파서 기초를 다졌을 것이다.
이는 천부당 만부당 한 일 일뿐 아니라 신라의 한 부분을 상식 없이 지워버리는 것이었으리라. 지금 콘크리트 건물의 폐해를 보라! 석굴암을. 신라 북악 금강산을 막아 버티고 있는 여러 고층 아파트를. 지금 우리나라 최고의 목수가 오더라도 목조건물로 그 자리에서 5층 이상 올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하니, 이는 80m나 되는 건축물을 지하 없이 바로 지상에서 쌓아올린 당시 선조들의 기술과 지혜를 오늘을 사는 우리가 따라가지 못함이다. 훗날 자랑스런 후손들이 해내주기를 기다리는 편이 훨씬 현명할 것이다.
황룡사 탑의 환란은 비단 과거뿐만 아니라 근래에 와서도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계속되었으니, 참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분개할 일이다. 1976년부터 10년간 황룡사지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이 곳 목탑터도 세밀하게 발굴되었다. 발굴이 있기 전인 1964년 이 곳 심초석 위로 민가의 담장이 있었는데 정부에서 민가를 철거하면서 담장까지 철거를 해 도굴꾼들에게 먹이를 노출 시켜준 셈이 되었다.
도굴꾼들은 심초석 속에 마련된 사리장엄구를 보존하기 위해 올려놓은 10여톤이나 되는 방형대석을 자키를 이용해 틈을 내고 사리공 안에 간직되어 있던 사리장 엄구를 몽땅 가져가 버렸던 것이다. 2년이 지나서야 기적적으로 회수할 수 있었다. 중요한 사리장엄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간략한 발굴 내용이 기록된 전돌과 동전 몇 개를 넣고 다시 심초석(무게 약 30톤)을 얹고 그 위에 방형대석을 얹어 놓았다. 도굴꾼은 윤사만(尹四萬)이란 사람을 비롯한 일당인데, 과거 국립경주박물관 수위로 근무한 경력의 소유자이기에 더욱 가증스럽다.
[황룡사대종(皇龍寺大鐘)]
삼국유사에 '신라 경덕대왕 때(서기 754년) 황룡사 종을 만드니 길이가 1장 3촌이고 두께가 9촌이며 무게가 49만 7천 5백 81근이었다.'고 전한다. 성덕대왕신종이 구리 12만근이라 전하고 있고 보면 무려 4배가 넘는 큰 종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몽고군이 동해를 이용해 가져가려다 동해바다 어디엔가 빠뜨렸다.', 감은사근처 마을사람들은 '큰 파도가 치고 풍랑이 일적에는 간혹 종소리를 듣기도 한다.'고 하고, 추령재를 넘어 감포 앞바다까지 흐르는 강 이름 또한 대종을 옮겨갔다 하여 '대종천'이라 부르고 있는 등 일관된 기록과 신빙성 있는 자료를 토대로, 얼마 전 황룡사대종을 탐사하기 위해 해군에서 감포 앞 바다 일대를 수색한 적이 있으나 종을 찾는데는 실패했다.
어쨌거나 바람 많은 날이나 비가 내리는 날은 한번쯤 동해를 찾아 신라인이 남겼던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역사의 소리에 가슴을 힘껏 열어 젖혀둘 일이다.
첨성대
경주에서 가장 많은 유적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 대능원주변이다. 천마총이 대릉원 안에 있고 맞은편에 계림과 반월성이... 반월성에서 야트막한 야산을 넘어서면 국립박물관과 안압지가 지척에 놓여있다.
또한 대능원에서 계림으로 가는 길목 넓은 들판 한가운데 연통모양의 우뚝쏫은 돌탑 한기가 홀로 서 있으니 바로 첨성대다. 그 이름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초라하고 내 팽개쳐진 모양새다.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632~647)때에 만들어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다. 전체적인 외형을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맨 아래쪽은 사각형의 2중 기단이 깔려있고, 그 위에 화강암을 벽돌처럼 일정하게 가공한 다음 원주형으로 돌려 27단을 쌓아올렸다. 그리고 꼭대기에는 기다란 돌기둥을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두겹을 엮어놓았다. 네곳의 모서리는 아래의 기단 밖으로 나와 있다.
중간을 쌓아올린 벽돌모양의 돌은 각 돌의 높이는 약 30cm이고 화강암 하나하나가 같은 형태이지만, 각 단을 이루는 원형의 지름이 점차 줄면서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13단과 15단의 중간에 남쪽으로 네모난 창을 내었는데 그 아래로 사다리를 걸쳤던 흔적이 남아있고 그 높이까지 안쪽에 흙으로 채워놓은 것으로 보아 이 창을 통해 출입하면서 하늘을 관측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첨성대를 쌓은 돌의 수는 모두 361개 반. 이는 음력으로 따진 일년의 날수와 같다. 또한 원의 둘레모양으로 쌓은 석단은 27단인데, 맨 위의 정자모양의 돌까지 따지면 모두 28단으로 기본 별자리 28개를 상징한다. 뿐만아니라 석단 중간의 네모난 창을 기준으로 아래위가 각각 12단인데 이는 12달 24절기를 의미하고 첨성대 꼭대기의 井자모양의 돌은 신라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으며 각 면이 정확히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욱 신비롭게는 석단 중간의 창문이 정확히 남쪽을 향하고 있어 춘분과 추분 때에는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치고, 하지와 동지에는 아래 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져 춘하추동을 구분하는 기준점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첨성대는 높이 9.17m, 밑 지름이 4.93m, 위 지름이 2.85m로 생각만큼 크진 않지만 그 짜임새만큼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빛의 움직임에 따라 둥근 원통을 따라 명암이 변해가는 모습 또한 신비롭다.
첨성대의 쓰임에 대한 의견은 여럿이다. 정설로 통용되는 것이 천문관측대였다는 것이나 어떤 사람들은 나침반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방향을 가리키는 표준석 이었다고고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재단이었다고도 한다. 또 다르게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불교의 성산인 수미산 대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어쨌거나 분분한 의견에 상관없이 첨성대는 그 자체가 매우 과학적인 건축물이며 돌 하나하나에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데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이로 인해 첨성대는 현재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반월성
이곳은 서기 101년 파사왕 22년에 신라의 왕성으로 축성되어 신라가 망하는 서기 935년까지 궁궐이 있었던 곳이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新月城)' 또는 '월성(城)'이라 불렸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부터 반월성 (半月城)이라 불려 오늘에 이른다.
월성의 성은 돌과 흙을 섞어 싼 토석축성인데 길이가 1,841m이며, 성내 면적이 193,585제곱 미터이다. 동에는 동궁인 임해전과 안압지와 연결되고 북으로는 첨성대가 있으며 남에는 남천의 시내가 하나의 방위선 역할도 하게 되어 있다.
기록에는 문으로 남문, 귀정문, 북문, 인화문, 현덕문, 무평문, 존례문과 임해문이 있었으며 누각으로 월상루, 망덕루, 명학루, 고루가, 전으로는 조원전, 숭례전, 평의전, 남당, 월정당, 우사록관, 좌사록관, 영각성이 있었으며 궁으로는 내성, 영명궁, 월지궁, 영창궁, 동궁, 내황전 등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월성지하에는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부터 통일신라 시대의 토기, 기와, 건물초석 등이 깔려 있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瓠公)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석탈해왕(昔脫解王)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석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 후 파사왕(婆娑王) 22년(101)에 여기에 성을 쌓고 옮긴 다음부터 역대 왕이 이 월성에 살게 되었다.
남쪽으로는 남천이 흘러 자연적인 방어 시설이 되었고, 동쪽·북쪽·서쪽으로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넓은 도랑인 해자(垓字)를 팠다. 4월 경 아래 들판에는 노란 유채꽃이 만발해 고적도시의 여수를 만끽하게 해준다
계림
이 숲은 첨성대(瞻星臺)와 월성(月城)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경주 김씨의 시조 알지(閼智)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사적 제19호)
신라 탈해왕(脫解王) 때 호공(瓠公)이 이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나뭇가지에 금궤(金櫃)가 빛을 내며 걸려 있었다.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어 왕이 몸소 숲에 가서 금궤를 내렸다. 뚜껑을 열자 궤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하여 성(姓)을 김(金), 이름을 알지라 하고, 본래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 하던 이 숲을 계림(鷄林)으로 부르게 되었다. 계림은 신라의 國號(국호)로도 쓰이게도 되었다. 펑퍼짐한 숲에는 느티나무 등의 옛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지고 북쪽에서 서쪽으로 작은 실개천이 돌아흐른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박씨 왕족인 파사왕에게 왕위가 계승되어 왕이 되지 못했고, 후대 내물왕대부터 신라 김씨가 왕족이 되었다.
경내의 비는 조선 순조(純祖) 3년(1803)에 세워진 것으로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신라 왕성 가까이 있는 신성한 숲으로 신라 김씨 왕족 탄생지로 신성시되고 있으며 지금도 계림에는 왕버들과 느티나무가 하늘을 가릴 듯하다. 대릉원-계림-반월성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옆에는 봄이면 노란 유채꽃이 유적지의 운치를 더 깊게 해준다.
첫댓글 우리가 진행하는 답사 코스별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공부하고 오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
공부 하고 안가도 되지요? 혹시 누가 냉겨놓은 답사자료(경주) 있으면 담에 한부 부탁 드릴께요.....(제본비는 물론 드려야죠). 즐거운 답사들 되시기 바랍니다. 좋은자료 감사 드리구요...
제가 우린 두 부 받으니 하나 드릴께요. 방앗간꺼루요.
다 읽으신분 ^^^ 손 들어보세여^^.
안양참새님 아니, 인덕원참새님 고마워유! 잘 댕겨오시구요. 모놀가족 여러분의 배꼽 다빼지 마시고 좀 냉겨 두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