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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7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이사 1,10.16-20
복 음 : 마태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래를 긍정적으로 예측하는 것은 행복 수준을 높여 줍니다.
실제로 이들은 자기 계획에 대한 성취도가 높고, 꾸준함도 갖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범죄를 저질러서 돈을 번 사람들은 부자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언제 잡혀 들어갈지 모른다’라는 불안감을 늘 간직하고 있기에,
돈을 모으지 못하고 대신 도박과 유흥, 방탕한 생활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안의 불안감을 없애고 행복감을 높이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면 무의식적으로 실패를 바라보게 됩니다.
다른 이의 말이 내 안에서 실재가 되어 나를 좌지우지 하게 됩니다.
지난겨울 중고등부 캠프 프로그램 중에 제주도 한라산 등반이 있었습니다.
힘들게 등반하는데, 한 친구가 허겁지겁 아래로 내려갑니다.
방금 지나갔던 등산객 중 한 명이 무엇인가를 떨어트렸다는 것입니다.
이 친구는 등산객이 놓고 간 검은색 봉지에 담긴 무언가를 들고 뛰어 내려가서 주고 왔습니다.
제가 “그 안에 뭐가 들었는데?”라고 물으니, “쓰레기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쓰레기는 자기가 버려야죠. 그래서 주고 왔어요.”
누가 내게 쓰레기를 넘겼습니다. 그 쓰레기를 받으면 어떨까요?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이 쓰레기를 계속 손에 들고 있으면 계속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얼른 그 쓰레기를 다시 넘겨야 합니다.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감정적인 쓰레기들도 넘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긍정적인 힘을 가지고 지금을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렇게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쓰레기들을 넘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지 실제로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옳고 자기들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모두 틀렸다면서 단죄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 단죄를 받는 사람은 결국 죄인이 되어서 제대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쓰레기를 넘기는 위선자를 따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겸손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쓰레기를 넘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이라는 귀한 선물을 건넬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통해서 높아질 것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자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갑니다.
‘누울 자리’, ‘일자리’, ‘아버지 자리’, ‘앞자리’, ‘윗자리’
높이와 위치와 순서와 역할 등등~.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음을 지적하시고,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3) 하시면서,
그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먼저, “그들은 말 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라고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라고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또 “그들은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라고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 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지만,
스승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인생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그들에게 머리 굽히지를 못하기 때문에
오늘도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나의 무지를 깨우쳐 주기를 바란다기보다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무지가 들추어지면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를 받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된 스승이 있는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인지?" 물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시작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하신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마태 23,3)는 말씀을 되새겨보게 합니다.
사실 이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비판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군중과 제자들에게 ‘배움의 자세’를 가르쳐줍니다.
곧 그들의 말과 행실이 모순되고 언행이 불일치한다 하더라도,
혹은 행실이 비록 모범이 되지 못하다 할지라도,
‘그들의 말은 실행하고 지키는’ 겸손함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않는’
분별과 지혜를 군중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자리’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나는 지금 누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또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고 있는가?
진정 ‘배우는 자의 자리’는 어디인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 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 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2절).
자리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리를 거룩하게 만든다.
자리에 앉아 훌륭히 처신하는 이는 누구든지 그로 말미암아 영예를 받을 것이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3절)
나쁘게 처신하는 지도자들 때문에 훌륭한 지도자들까지 매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선을 이루려다 의로운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기보다는
의인들을 지켜주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들의 가르침은 취하고 그들의 행실은 버릴 수 있으면 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사람들에게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워 놓고는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중에는 말하기 전에 행하고 현명하게 이야기하며
혼란에 빠진 자들을 인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자애로운 짐을 얹는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스스로 먼저 가장 무거운 짐을 진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허영을 꾸짖으신다.
이 허영은 그들을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였고,
오로지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끄는 일을 하게 하였고, 타락하게 했다.
결국 그들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들에 목을 맨다.
성구갑과 옷자락 술이 그들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직 하느님께만 보이기 위해 행하였고,
그들의 손에 묶은 유일한 장식은 선행이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8-9절).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누구도 스승님이나 아버지로 불려서는 안 된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그분만이 아버지이시다. 그리스도만이 스승님이시다.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만들어지고,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 본성상 사용하는 아버지와 스승이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11절)
먼저 우리 신앙인들이 진정으로 자기를 낮추고 세상을 위하여 섬기는 사람들이 될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 낮은 자리는 바로 봉사하기 위한 자리이다.
진정한 권위는 섬김과 봉사에서 온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그리하여 사순시기가 은총의 기간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말씀대로 살아갑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살아가면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구입니다.
그런데 높아지려고 하다가 하루아침에 낭패를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만족시켜 주면 줄수록 그 요구가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높아지려다가 오히려 푹 떨어지게 됩니다.
그들이 ‘높’자를 거꾸로 하면 ‘푹’자가 된다는 것을 생각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공자께서도 “남의 선생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 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망친다고 합니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백성을 위한 봉사자를 뽑는 것이 맞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의대 정원 문제를 두고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의료진은 환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요?
기득권을 유지하고 높아지려고 애쓰며 남을 가르치려 하기보다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스승이요, 지도자로 행세하고
남들이 그렇게 인정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권위는 자기가 내세우기보다 남들이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2-3).고 하셨습니다.
높이 오르면 더 멀리, 더 많이 볼 수 있고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을 채워줄 수 있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넉넉해지고 자상한 어른이 되어야 하거늘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부끄러움만 더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지만 나와는 무관한 말씀으로 듣고 살아갑니다.
대접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 길을 서슴없이 가는지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스승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8).고
말씀 하신 대로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삶으로 사랑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하신 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누가 먼저 인사하기를 바라지 말고 먼저 인사할 수 있는 날,
누구에게 무엇을 시키기보다는 솔선수범하는 날,
무엇을 기대하기보다 먼저 베푸는 은총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난 2월 2일 서울대교구 사제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외국에 있어서 가지는 못했지만, 새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 하였습니다.
서품식 직후에 교구장님은 새 사제들에게 첫 임지를 발표합니다.
제가 아는 새 사제의 첫 임지를 보았습니다.
새 사제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장소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본당의 규모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새 사제가 함께 살아야 할 본당 주임 신부입니다.
신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배우지만 본당사목의 대부분은
첫 본당의 주임 신부에게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새 사제가 부임하는 첫 본당의 주임신부님은 잘 아는 후배 신부님입니다.
사목자로서 모범을 보이는 분입니다.
열정과 헌신을 보여주는 분입니다. 합리적인 결정을 하는 분입니다.
앞으로 2년 동안 새 사제가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면 좋겠습니다.
첫 시작이 잘 되었으니, 새 사제의 앞날에도 하느님의 축복이 늘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3년 전에 저도 서품을 받고 새 사제로 첫 본당으로 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이 부족한 저를 위해서 좋으신 본당 신부님을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신부님은 제게 긍정의 마인드를 보여주었습니다.
컵에 물이 반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하는 대신에
아직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빈말이라도 남의 허물을 탓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남의 장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형식과 율법에 억매이지 않았습니다.
매일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교우들의 가게를 찾아보았고,
길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제게 한 번도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늘 먼저 저의 의사를 물어보았습니다. 제가 결정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젊은 사제가 더 필요하다면서 넉넉하게 예물을 주었습니다.
잘 먹어야 한다며 가끔 고기도 구워주었습니다.
신부님 사목의 모든 힘은 기도에서 나왔습니다.
신부님 방에 있는 기도 초는 눈물을 흘려서 작아졌습니다.
제 방에 있는 기도 초는 눈물 흘릴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제게 사목의 모범을 보여주신 첫 본당의 주임신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목자가 하지 말아야 할 것과
사목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말씀하십니다.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청개구리처럼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골라 하는 사목자가 있다면 공동체는 갈등과 아픔을 겪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죽기까지 실천하는 사목자가 있다면
공동체는 믿음의 줄기에서 사랑이 꽃피게 될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목자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교만하고, 게으르고, 대접받기만 바라는 사목자가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목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사제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겸손한 사제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독서는 늘 부족한 제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비록 나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비록 나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걸어온 길을 돌아봅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보여주고 싶어 하는 위선적인 마음, 겸손을 가장한 교만을 배척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높은 자리에 앉아 지도자 행세를 하지만,
구체적인 삶이나 인성이 조금도 뒷받침되지 않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이 꽤 엄중합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 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예수님의 강한 경고 말씀에 저 역시 섬뜩한 느낌이 들면서도,
요즘 저는 조금 나이가 들면서, 이런 측면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저는 요즘 시골에 살다 보니 주로 입고 다니는 옷은
명품 메이커와는 거리가 먼 태안 재래 시장표 만 원짜리 작업복이나 추리닝입니다.
시골이다 보니 어깨 힘줄 일도 없고 폼 잡을 일도 없습니다.
요즘 와서 결심한 것이 제일 힘든 일, 제일 궂은 일,
제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은 내 일이다, 생각하고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시키지 않고 제 스스로 뭐든 하니 세상 편하고 자유롭습니다.
자리에 앉을 때도, 피정오시는 손님들을 가장 뷰가 좋은 자리로 안내하고,
저는 제일 구석 자리로 가서 앉습니다.
가급적 앉아 있지 않고 하루 종일 서서 돌아다닙니다.
식탁 세팅하고 주방에서 조리하고,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니 정말 편하고 부담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오늘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바처럼
내가 이렇게 산다며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위선적인 마음,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 스며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롤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 23세 교황님께서
주교품에 막 오르셨을 때, 당신의 가족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교황님께서 저를 교황청의 고위 성직에 임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저에게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매우 영예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교만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앞으로 저는 사제 때와는 달리 저는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수단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의복 색깔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에 인도된 영혼들의 아름다움입니다.”
황금률을 능가하는 하느님의 자비로움
박상대 마르코 신부
마태오복음 21장부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가 보도된다.
갈릴래아 활동(4,12-18,35)을 접고, 예루살렘 상경기(19,1-20, 34)를 거쳐,
수많은 군중의 환호와 갈채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는
곧바로 성전을 정화하셨다.(21,12-17)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가 화려한 입성과 성전정화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상당한 의미를 제공한다.
예루살렘 활동기는 예수님 生과 가르침(복음선포)의 마감을 의미하며,
구약에 대한 궁극적인 종지부를 의미한다.
특히 성전 정화 사건은 구약의 모든 제사,
즉 구약의 제관과 제단과 제물을 파기하는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구약제사의 파기를 통하여 신약의 제사를,
즉 예수님 스스로가 제관이요 제단이요 제물이 되시는
새로운 제사의 제정을 목전에 두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루살렘 활동기는 예수께서 구약의 제사를 파기하고
신약의 제사를 제정하시려는 의도에 따라 연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를 파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구약의 祭儀를 파기해야 하며,
이스라엘의 대사제와 제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모든 조직과 기능과 사상 등을
전체적으로 瓦解시켜야 하며, 나아가 그 사람들까지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예루살렘 활동기 안에는 예수님의 과감한 파기와 제거 작업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지금껏 서서히 준비되어 온 이 작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 셈이다.
파기와 제거작업에는 심한 반대와 갈등과 논쟁이 따르기 마련이며,
파기하고 제거하지 못하면 스스로 파기되고 제거되는 법이다.
이 법칙을 예수께서도 잘 알고 계신다. 허나 그분은 당신의 길을 포기하시지 않을 것이다.
이미 성전정화사건 때문에 예수의 이런 권한을 놓고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심한 논쟁이 있었다.(21,23-27)
이어지는 ‘두 아들의 비유’,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21,28-22,14)들과
세금 논쟁(22,15-22)과 부활토론(22,23-33)은 모두가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층 인사들을 단죄하기 위한 목적으로 언급하신 것들이다.
또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로서 사랑의 이중계명을 새롭게 선포하여(22,34-40)
신약의 유일한 계명으로 제시하셨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자신이 肉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靈으로는 다윗이 이름 불러 칭송했던(시편 110,1) 주님이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유다교의 공적 지도자들 앞에서 계시하셨다.(22,41-46)
이 계시는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마지막 자기 계시이다.
구약의 파기와 제거 작업은 유다교의 지도층인 대사제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총체적이고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질책으로 전개된다.
그들이 총체적으로 예수님의 질책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모세의 律座에 앉아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막중한 권한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행동은 말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율법의 근본정신은 저버리고 태만하였으며,
권위를 과시하고 남에게 과도한 짐만 지우는 “위선자”들이었다.
아직은 아니지만, 곧 예수님의 입술에 “위선자”라는 단어가 오르게 될 것이며,
이들에 대한 불행이 선포될 것이다.(23,13-33)
사실 마태오 복음 23장은 이들에 대한 책망과 불행 선언으로 가득 차 있다.
구약의 파기와 그 관계자들의 제거를 위한 작업으로 제시되는 책망은
거꾸로 우리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 복음은 유다교의 지도층을 포함한 군중과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지만,
유다교의 지도층을 간접적으로 책망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날 우리 교회의 지도층에 만연한
바리사이적 조직과 기능과 태도를 책망하는 말씀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율좌에 앉아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으며,
무거운 짐을 백성에게만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이마나 팔에 聖句 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달고 옷단에도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니며
잔치에서 맨 윗자리와 회당에서 제일 높은 자리를 즐겨 찾았고,
거리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사람들로부터 스승이다, 지도자다 하는 말을 즐겨 들으려 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하지도 되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스승과 지도자는 그리스도 예수 한 분뿐이시며,
믿은 이들은 모두 한 형제자매이다.
으뜸가는 사람일수록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자신을 낮추어 타인을 섬길 때애 비로소 참으로 높은 자가 되는 것이다.
신약의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스승도 지도자도 없다. 권위도 없다.
있다면 오로지 職分과 섬김과 봉사만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하는 사람은 늘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는
聖句를 자신에게 매어두어야 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기 여호수아 수녀
오늘 복음을 계속 보며 두 단어가 눈에 들어와 한자의 뜻을 찾아 보았습니다.
실행實行 실제로 행함
행실行實 실지로 드러나는 행동
다닐 행行 과 열매 실實이라는 같은 한자를 쓰고 있지만
순서가 바뀌니 이렇게 뜻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실제로 행하라)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실지로 드러나는 행동)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 12,3)
이렇게 보니 떠오르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언행일치(言行一致) '말과 행동이 하나로 들어맞음. 말한 대로 실행한다.'는 뜻이지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언행일치를 이루지 못한 것 처럼 언행일치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실행'과 '행실'의 글자 순서가 바뀐 것처럼
우리도 말과 행동의 순서를 바꿔 보면 어떨까요?
말보다는 행동 먼저!
내가 행한 것을 말한다면 언행일치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보이기 위한 행동들이었지 모세 가르침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는 것보다 '행하는 것'
그리고 제대로 행하기 위해서는 말 보다는 잘 '듣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오늘도 예수님 복음말씀을 제대로 잘 듣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기쁘게 실행하시는 날이 되시길 기도하며 저도 노력해 보겠습니다.
출처 :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