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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서정시연구회「월인천강」대한미래교육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구름산방
정중히 월인천강론을 올리며
도란 곧 길로서 인간이 마땅히 나아가야 할 도리란 뜻입니다.
그러한 도에 신앙심과 기복의식을 덧붙여서 종교의 형태가 되고,
그것을 벗어났을 때 인간으로서 이수해가야 할 교육이 역할이 되겠습니다.
교육은 몸과 마음을 닦는 수(修)의 측면과 학업과 기술을 익히는 학(學)의
측면이 어우러져 왔었고, 종교는 어리석은 마음을 닦아가는 수(修)의 방편과
실제로 닦아갈 게 없는 도(道)의 축이 병행돼 왔었는데,
오늘날은 학(지식)의 일변도 교육과 수(외향적)의 일변도 종교로 전락하여
인간이 밟아가야 할 진수를 놓쳐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회에서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나아가야 할 인간성숙과 자아완성의 도를 교육에서 받아들여
교육과 종교, 인류사회를 천지만유의 한 근원으로 모아갈 때,
참으로 가깝고 쉽게 인류의 영원무궁한 행복시대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하루 백편 천편의 글을 읽기보다 그 한편의 글을 백번 천번 읽으며
뜻을 모아가야 진수로 모아져 사상화 되고 체질화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릇된 관념과 인습을 씻어내면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지만,
스승 없이는 만에 한 사람 얻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맨 끝에 덧붙인
5일 수련법을 여법히 이행해 보노라면 진리의 길을 반드시 체험해보시게 됩니다.
내내 청안하시고 건승 다복하시길 빕니다.
우리 교육의 새 지평을 열어갈 이정표
우리 교육의 새 지평 월인천강회 (대표 정석영)
(선림회와 한국서정시연구회 및 대한미래교육학회를 통합)
http://cafe.daum.net/ksjpenart
667-893 경남 하동군 옥종면 내촌길 49-35
이메일 : dh0014@hanmail.net
논지개요
태어난 생명은 모두가 때가 되면 반드시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태어나지 않은 것은 죽을 수가 없듯이, 우리는 본래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가을이 되면 나뭇잎은 생명이 다해 떨어지지만 나무는 살아 있듯이,
파도는 일어났다 사라져도 바다는 만고청청 그대로이듯 말입니다.
생멸하는 마음은 그 밑바탕에 절대자아가 깔려있으므로 가능한 것입니다.
생사의 삶은 절박하기 그지없고, 자아무생의 안락은 더할 데 없습니다.
그런데도 영리의 삶만을 추구하고, 인간성숙의 지향은 전무한 실정입니다.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가진다는 건 드넓은 진금천하를 메워버리는 격입니다.
빙산의 일각을 빙산으로, 바다의 물거품 하나를 바다로 여기는 꼴이지요.
형상과 영역이 있는 삼라만상은 반드시 영역만 있는 허공 속에 머물러 있고,
영역만 있는 허공은 영역마저 없는 그 무엇에 싸안겨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천억의 은하계를 싸안고 있는 가없는 허공계는 어디서 펼쳐져 나왔을까요?.
우주에는 형상과 영역의 공유체, 영역만의 존재, 무영역의 시원일 뿐입니다.
자, 보십시오! 하늘 안에는 해와 달과 별들, 그리고 지구가 살고 있지요?
지구 위에는 나무들과 짐승들, 그리고 사람들이 살고 있지요?
사람들 중에는, 그 숱한 사람들 중에는 내가 살고 있지요?
내가 살고 있어서 우주 삼라만상을 포용한 온 시공계가 담겨져 있는 겁니다.
한 점 형상도 영역도 없는 그것은 곧 나의 본성이자 우리들의 한마음자리고,
각기 그 마음에는 의식의 작용과 무의식의 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지만엽이 한 근간으로 모아지고, 천강만수가 한 바다로 모여지듯이,
일원의 자리로 모아진 절대지에서는 생사와 고락이 흔적조차 없습니다.
밝게 아는 게 의식이고 앎이 없는 자리가 무의식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의식은 대상과 맞선 분별심이고, 무의식은 그 상대성이 잠겨든 자립니다.
의식은 알 때와 모를 때가 있거니와 무의식은 한결같은 무념의 앎입니다.
그런 경지를 깨달으면 절대자아로 되돌려져 무불통지하고 무불소유 하여
배우지 않고도 전체를 다 알고 두루 갖춰져 모자람이 없는 삶을 이룹니다.
적게 배워 많이 익히며 하나로 모아가는 교육이 되어야 인간이 성숙되는데,
요즘은 반대로 많이 아는 순위로 인생등급을 매기는 교육정책으로 인해서
아이들은 정보매체 기기남용 등으로 가슴속은 잡동사니로 빈틈이 없습니다.
인간성의 조화로 감성과 지혜의 여백이 길러져야 자아회귀가 이뤄지게 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영원무궁한 행복을 누려갈 절대자아로 환원되는 것입니다.
제 1부
월인천강론 제1편 (인생)
월인천강회
(장르가 좀 애매하여 수차 논의한 끝에, 문맥의 뼈대에다가 살을 붙이고
옷을 입혀 아름답게 감성화한 것으로 '월인천강론'으로 정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각기 저마다의 방이 만들어졌지요.
그 안에서 먹고 자고 일하며 살아가는 인식의 방이었습니다.
먹을거리와 옷가지며 여러가지 가구며 놀이기구들까지 해서
방안이 꽉꽉 메워지도록 끊임없이 배워 들이고 벌어 모아서
남들이 부러워할 삶을 꿈꾸며 열심히들 살아가고 있는 거지요.
그러나 인간이 사는 이 세상 어딘들 그렇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우리 선조들의 그 헐벗고 굶주린 생애가 더욱 뼈속깊이 사무쳐 옵니다.
그 세대가 바로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요, 할아버지 할머니였으니까요.
그런데도 요즘 우리들은 너무나 호사스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때의 그 한 그릇의 밥과 한 벌의 옷은 그리도 절박한 것이었지만,
요즘은 너무 많은 것들로 인해 더 소중한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거지요.
허리띠 졸라매고 그 어려운 시대를 건너오신 그분들의 희생으로
한맺힌 보릿고개도 벗어나고 경제성장도 이룩하여, 우리는 이제
집집마다 한두 대의 자가용을 굴릴 만큼 좋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문득, 동그란 밥상 하나에 오순도순 둘러앉은,
가난하지만 오붓했던 그때가 아련히 그리워지곤 합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무엇 때문에 왜 그러는 걸까요?
저 솔밭 언덕길로 훠이훠이 내려오는 흰옷 입은 길손만 보아도
행여 우리집에 오시는 손님은 아닐는지 하는 그, 사람 그리는 정과,
또한 칠팔월 무더위 끝, 하롱하롱 잠자리 날개 젓는 파아란 하늘 위로
두둥실 뭉게구름 떠가는 그 한 조각의 여백을 놓쳐버린 까닭이 아닐는지요.
강 맑아, 달이 물에 잠기고
산 비어, 가을빛이 정자에 가득했어라.
비어서 맑고, 맑아서 화안히 비치는
그러한 감성과 지혜의 영역을 메워버렸기 때문이지요.
그 잡다한 것들을 가득가득 채워 담느라고
우리는 정작 진금의 여백을 메워버리고 있는 셈이지요.
감성은 생각 이전의 느낌이고, 지혜는 느낌 이전의 비침입니다.
지성과 감성의 두 측면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형평을 잃어버린다면
수레가 앞으로 굴러가지 못하듯, 인간적인 성숙을 이뤄가지 못하는 거지요.
교육이 인간을 성숙시키지 못한다면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형국입니다.
인간을 살려내지 못하는 지식경제 성장과 과학문명의 발달은
누굴 위해 종을 울리자는 것인지, 우리에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요?
나무가 자라는 것은
나무가 푸르게 자라는 것은
산이 있고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새들이 노래하는 것은
새들이 즐겁게 노래하는 것은
숲이 있고 햇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굳건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땅이 있고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드높은 하늘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기들이 물속에 살면서 물을 보지 못하고
새가 하늘을 날면서도 하늘을 알지 못하듯,
우리들 또한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가지는 데만 급급하여
그 소중한 여백의 자리를 알지 못한 채 아둥바둥 살고 있지요.
그 하늘까지 포함된 것이 현상세계이고,
또 현상세계의 바탕인 실상계로 되돌려져야만
비로소 완전한 인간이고 완성된 자아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실상계가 바로 우리들 마음의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지요.
하늘도 땅도 거기서 태어난
그 하나의 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담아도 담아도 빈,
온 세상, 하늘을 다 담아도
텅 빈 그자리가 본래부터 있었기 때문입니다.
파도 아래 깔린 만고청청 그 바다는 보지 못한 채
길고긴 세월을 물결로만 밀려오고 밀려가며 부대끼다가,
드디어 하늘땅이 태어난 그 자리를 보게 된 것이지요.
의식과 무의식의 실상계와 현상계를 동시에 수용하는
천만억 성현들의 생애가 구름처럼 펼쳐져 나왔던 거지요.
그리하여 우리들은 새롭게, 새 차원의 인간으로
구만리창공을 머리에 이고 육대주로 이어진 대지를
굳건히 발아래 깔고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었지요.
그래서
물결이 닿는 곳까지가 바다이고
인간의 상상이 미치는 데까지가 인생이며
의식의 작용에서 무의식의 체성까지가 마음인 거지요.
자, 그렇다면
우리들이 진정 길이길이 복된 삶을 누려 가시려면
더러는 텅 비어서 맑고, 맑아서 화안히 비치는
그런 인간성숙의 여백을 살려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높은 진리는 가장 가까운 데 있고
가장 거룩한 성과는 가장 힘들이지 않는 데서
이뤄지는 또 다른 차원이 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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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개 아는 만큼 보고 노력한 만큼 얻어서 살아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배워서 아는 지식은 이내 잊어버리게 되고
벌어서 모은 재산은 결국 흩어지게 되며
길러서 이뤄진 몸은 마침내 무너지게 되어 있는 그 꿈속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절대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주만유의 시원점인 곧 우리들 무의식의 체성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월인천강론 제2편 (교육)
월인천강회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할 수 있다는 교훈은
우리들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터이지만,
인간을 모른 채 인간을 교육하고 있다는 실책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까마득히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실책으로 인해 배가 산으로 끌어올려지고 있는 거지요.
그리하여 지식인간, 물질인간으로 전락되고 있는 줄을
다들 아는지 모르는지, 실로 이보다 큰 위기는 없을 것입니다.
산은 하늘을 이고 있어서 산의 역할을 다할 수 있고,
파도는 바다를 깔고 있어서 긴 세월을 두고
광활한 바다의 품을 지녀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ㅡ그것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무의식의 바탕을 깔고 있었기에
긴 억겁, 만유시공을 거느려 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어떻게 해서 내가 있게 되었는지
내게서 하늘땅이 태어나게 되었는지
내가 정말 누군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살고 있네요, 내가 혼자 살고 있네요
나의 내가, 너의 내가, 우리 모두의 내가.
그 「나」 속에 내가 살고,
어머니 아버지가 살고, 이웃이 살고,
해와 달과 하늘이 한 덩어리진 우주가 살고,
시작이 없는 어제와 끝이 없는 내일이
오늘 속에 겹쳐져 살고 있네요.
제각기 갖고 사는
동그란 「나」 속에.
가지를 꺾어 세우고 잎을 따 모으기보다
씨 한 톨, 나무 한 그루가 더 소중하듯이,
밖에서 배워 들이고 모아 가지는 그 많은 것들이
텅 빈채로 그득한 우리들 본래의 그 모습만 하겠습니까.
시작도 끝도 없는 우리들 절대의 그 자리만 하겠습니까.
그저 많이 배워 많이 알고 많이 모아 많이 가지는 걸 제일로 아는
오늘날의 교육체제와 사회구조를 여러분은 혹 알고 계시는지요?
퐁당 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냇물아 퍼져라 널리널리 퍼져라 건너편에 앉아서
나물을 씻는 우리 누나 손등을 간질여 주어라
아이들과 함께 손잡고 부르던 그때의 노래가
아련한 그리움의 메아리로 들려오지 않으신지요?
그리고 또한
높다란 미루나무 꼭대기에 걸린 구름을 보다가
문득 그 파아란 물빛하늘에 포옥 빠져보진 않으셨던가요?
그 하늘 안에는 해와 달이 살고, 별들이 살고, 지구가 살고
지구 위에는 나무들이 살고, 짐승들이 살고, 사람들이 살고
사람들 중에는, 그 숱한 사람들 중에는 내가,
내가 살고 있어서
내 안에 다시
우주만유가 살고 있네요.
그렇습니다.
의식일 때는 언제나 대상과 맞서있게 되고
의식작용이 쉬어질 때는 대상이 내 안에 잠겨든
무의식계로 돌아와 만유시공을 포용하고 있으니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는 거지요.
그러나 본래로
너와 나, 우주 삼라만상이 둥그런 마음거울 하나로써
거울속의 형상에 빠져 생사와 고락에 허덕이게 되고,
형상까지도 거울빛인 줄 알때 절로 유유자적하게 되지요.
하늘까지 넣어 산을 그려서 산빛이 더욱 아름답고
먼 바다를 펼쳐 배를 띄우니 노을까지 저리 고와라
우리가 진정 인간을 살리고 교육을 바로 세우려 한다면
말과 글만 배울 게 아니라, 침묵의 공간을 살려주고
여백의 둘레를 넉넉히 비워둬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인간성숙, 자아완성의 길이자,
인류의 새 지평을 열어갈 우리 교육의 방향인 것입니다.
요즘 지식일변도 교육에 밀려난 감성과 지혜의 영역을 살려내려면
배움보다 익힘의 과정이 훨씬 길어야 조화로운 인간으로 길러집니다.
부러진 한쪽 날개를 달아줘야만 만리장공을 훨훨 날아갈 수 있으니까요.
그 지식일변도가 곧 지성적이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아야 하고요.
왜냐하면 지성은 감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지성적인 거고,
감성은 지성의 바탕을 깔고 있을 때 감성적일 수 있으니까요.
또 감성이란 감정이 걸러지고 감상에서 벗어난 자리기도 하지요.
그리고 지성과 감성은 인간성의 양 축으로서
지성은 인지(人智)를, 감성은 인성(人性)을 가리킨 것이며,
인지는 곧 지혜의 안목이고, 인성은 사랑과 은혜로의 표출입니다.
또한 그 여백을 통해 걸러져야만 조화와 균형이 이뤄지게 되고,
다시 그 조화로운 중용의 삶을 통하여 인간적인 행복과 성숙,
그리고 절대자아로의 환원이 이뤄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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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편의 글에서는 직접적인 설명이나 주장은 가급적 피했습니다.
징검돌 사이사이로 비쳐진 하늘과 구름, 산과 나무의 풍경들을 보면서
징검징검 건너다보면 저절로 강의 저쪽 언덕에 가닿을 수 있도록 얽어놓았습니다.
월인천강론 제3편 (환원)
ㅡ월인천강회ㅡ
"쟤가 뭐 잘났다고 저러고만 있지?"
"누가 아니래. 조그마한 게 점잖은 척하고 말이야."
"예쁘게라도 생겼으면 말도 안하지."
"길다란 게 아무것도 없는 빈 땅바닥을 백날 비추고만 있으면 뭘 한대?"
누리네 방 문구멍으로 빠져 나간 빛조각들의 얘기소리입니다.
석류나무 잎새를 비추고 있는 빛조각들의 수다떠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그렇게 윽박질을 해도 문틈으로 빠져나간 가느다란 땅 빛조각은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소리없이 울고만 있었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이 땅바닥만 비추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얘길 해도 들은 척도 않고 있는 꼴 좀 보라지."
"글쎄 말이야, 바보 같은 게."
땅 빛조각은 죽고만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바람이 부는 것만큼이나 잎새 빛조각들의 수다도
그칠 새 없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뭐가 그렇게들 소란스러우냐?"
빨갛게 익은 석류를 비추고 있던 커다란 빛조각이 입을 열었습니다.
"나뭇잎을 비추든 땅바닥을 비추든 어둠을 밝히는 점에서는 다 같은 거야.
우리는 어둠 속에서 조그만 제 자리를 밝히며
살아가는 한빛 형제들이야. 다투지 말고 누굴 업신여기지도 말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느니라. 우리는 모두 같은 빛뿌리란다."
석류 빛조각의 점잖은 말씀에 뜨락은 엄숙하리만치 조용해졌습니다.
산들바람도 잠시 몸짓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석류나무 둥치를 비추고 있던 빛조각은 그 말뜻을 분명히 알 수는
없었지만 석류 빛조각의 말씀이 옳을 것 같았습니다.
땅 빛조각은 가슴이 찌잉 울려오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잎새 빛조각들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피이, 말도 안되는 소리야. 우린 이렇게 따로따로의 빛조각들인데
어째서 같은 빛뿌리란 말이야."
"괜히 하는 소리라구."
"어째서 우리가 저 쓸모없는 땅 빛조각이랑 한 형제란 말이야."
잎새 빛조각들은 석류 빛조각이 들리지 않는 자리에서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잠시 멎었던 산들바람이 다시 불어오자,
잎새 빛조각들은 또 신명이 난 듯 수다를 떨기 시작합니다.
"뭐니뭐니 해도 우리가 최고라고. 우리가 잎새를 키우지 않았던들
어떻게 석류가 열릴 수 있었겠니?"
"맞아 맞아."
"사실은 석류 빛조각도 우리들이 부러워서 그러는지도 몰라."
땅 빛조각은 그러한 잎새들의 얘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따금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습니다.
‘우리는 다 한빛 형제들이야. 우리는 모두 같은 빛뿌리란다.’
땅 빛조각은 지금까지 어둠 쪽으로 비춰나가기만 하던 것을
자기 안쪽으로 되비추어 보았습니다.
땅 빛조각은 순간, 놀라운 사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땅바닥에 깔려 있는 작은 빛조각인 줄로만 알았던 자기가
길게 빛줄기로 이어져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는 너무 놀라워서 얼른 제 자리로 빛을 되돌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한참 뒤에, 다시 용기를 내었습니다.
땅 빛조각은 자기의 빛줄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저만큼 방안에는 번쩍이는 빛뿌리가 얼핏 보이기도 했습니다.
땅 빛조각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빛줄기를 타고
좁다란 문지방 틈새로 들어가 방안에 이르렀습니다.
방안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그만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깨어났을 때는 이미 땅 빛조각이 아닌 커다란 빛뿌리였습니다.
어디에도 조그만 빛조각의 자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정말 꿈만 같습니다.
그러나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자기도 다른 빛조각도 없고
방안 하나 가득
커다란 한빛으로 채워져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 저만큼 잎새 빛조각들이랑 석류 빛조각이랑
그리고 땅바닥을 비추고 있는 제 빛조각까지 이렇게
한빛으로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여러 빛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진 커다란 빛뿌리였습니다.
아! 놀라워라, 신비해라, 거룩하여라
둥근빛 한뿌리에서 그 모두가 나퉈졌고, 나퉈진 그 자리에서 다시 하나로 모아져도
그 모습은 항상하여 변함이 없는, 내 이제 그 뿌리로 돌아왔으니
근심걱정 온갖 시름 다 놓았어라
이렇게 읊고 나서 석류 빛조각의 은혜를 생각하자,
그 은혜의 빛 속에서 이런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장하다 너는 이제 한빛의 뿌리
한빛의 빛뿌리로 빛을 뿌리며
모두를 보살피어 키워 나가리, 모두를 빛뿌리로 키워 나가리
너는 지금 빛뿌리로 돌아왔지만
와서 보면 본래의 너의 그 자리
거기서 빛나라로 다시 간대도 가나오나 그 자리가 본래 한자리
빛뿌리가 된 땅 빛조각은
조용히 다른 빛조각들의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옛 그대로 조그만 땅 빛조각으로서 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는 세상 다하도록 빛조각들의 생애가 다할 때까지
그렇게 살아갈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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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요즘 너무 많은 지식정보며 놀이문화에 노출돼 있어서
우리들의 해맑은 마음자리는 잡다한 관념들로 뒤덮여 있습니다.
주인노릇 하는 나그네를 내보내야 본래의 주인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곧 관념의 나를 떠나보내야 본래사람이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거지요.
선가에서 견성오도라고 하지만 요즘은 옛날 같지 않아서 부지하세월이 되고 있습니다만,
이 ㅡ월인천강론으로 5일간의 정진을 제대로만 하신다면
여실히 거기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제 2부
월인천강론에 대해서
두 가지 이야기
김 재 은 이화여대 교육심리학 명예교수
문학박사, 월인천강회 고문
이번「월인천강론」은 전반적으로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이 돋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히 앞부분의 두 가지만 제기하려고 합니다.
ㅡ그 하나, 제각기 가지고 있는 방의 의미
태어나면서부터 각기 저마다의 방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고귀한 가치는 다른 어떤 사람과도 바꿀 수 없는, 곧 교환 불가능한 자기만의 색깔과 의미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 할지라도 사형수 아들을 대신해서 죽을 수가 없습니다. 교육은 특히 좋은 교육은 개개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개인적 소망이나 목표, 삶의 의미, 개성, 적성 같은 것을 살려주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누구나 자기나름의 방을 갖고 있다는 개념은 훌륭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그 방의 의미를 살려주어야 합니다.
ㅡ그 둘, 감성과 지성의 조화에 대하여
“감성은 생각 이전의 느낌이고, 지혜는 느낌 이전의 비침이다”라는 대목과 “지성과 감성이 조화와 균형을 이뤄 가야만 인간적인 성숙에 이른다”는 주장 또한 공감이 갑니다.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에게 지성은 발달되어 있는지는 몰라도 감성은 사그라져 가고 있음을 봅니다. 아름다움에 접해도 감동이 없습니다. 그저 따지기만 합니다. 스마트시대가 가져온 비극적 상황입니다. 들꽃 한 포기에도 눈길이 가고, 유심히 들여다보면 눈이 휘둥그레질 그런 감성이 없어졌습니다. 옛날, 우리가 없이 살았을 때는 그러한 감성이 반짝였습니다. 지성과 감성의 양 축은 수레의 두 바퀴처럼 함께 굴러가야만 진정한 인격의 성숙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크게 공감합니다. 교육에서는 꼭 이 점을 강조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까지 넣어 산을 그려서 산빛이 더욱 아름답고
먼 바다를 펼쳐 배를 띄우니 노을까지 저리 고와라‘
참 아름답습니다. 그러한 월인천강의 새 시대가 열려오기를 학수고대 기다려 봅니다.
나를 떠나서 나를 보는 즐거움
이돈희 : 전 교육부장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월인천강회 고문
우리 월인천강회의 이번「월인천강론」에서는
여백의 빈자리를 통해 이뤄가게 된다는 인간성숙의 길을
나는 스스로 ‘나를 떠나서 나를 보는 것’으로 간주하여
평소의 소신한 바대로 간략히 서술해 보려고 합니다.
요즘 내 마음에 혼자 되뇌어 보는 말이 있습니다.
“건강하게, 보람되게, 너그럽게, 그리고 즐겁게”
거기서 나의 이 혼잣말을 더 분명히 해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의욕이 찰수록 모든 순간을 바쁘게 살고자 합니다.
우리는 항시 즐겁게만 사는 것은 아니지만, 어려웠던 때나 괴로웠던 때나
지난날들을 다시 살펴보면 그 순간 나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순간에 나는 착하고 좋은 삶을 그리게 됩니다.
그러는 순간에 나는 오직 착한 사람이 됩니다.
친구나 이웃과의 겨룸도 없어지고, 헛된 욕심도 없어지고, 부모나 형제나
자식을 탓함도 없어지고, 나를 원망하는 일도 없어지고 .....
그러면서 내가 누구인가,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가끔 나를 떠나서 나를 보는 것, 착한 나를 보는 것,
그래서 무엇인가 하고픈 일이 있는 나를 보는 것은 즐거움이지요.
하지만 그냥 내가 보이지는 않습니다. 보고자 애써도 보이지는 않지요.
그래서 나를 품고 있는 자연을 보고 나를 보고, 지나간 세월을 보고 나를 보고,
다가오는 세상을 상상해 보고 나를 보고..... 그러면 조금씩 내가 보입니다.
때로는 나무를 보고 나를 보고, 새들을 보고 나를 보고, 하늘을 보고 나를 보고,
대지를 보고 나를 보고, 바다와 파도를 보고 나를 보고 ...
그러면 내가 좀 더 잘 보일 수 있습니다.
외롭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고, 맑게 그리고 밝게 내가 보입니다.
나를 보는 습관은 좋은 습관인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나를 보는 습관을 보여주는 것은 어른이 된 도리일 줄로 압니다.
걷다가도 나를 보고, 놀다가도 나를 보고, 슬퍼서 울다가도 나를 보고,
공부하다가도 나를 보고, 일을 하다가도 나를 보고, 어쩌다가 욕을 내뱉거나
싸움을 하다가도 그 순간에 나를 보고 ...
그러면 언젠가는 바른 길을 찾게 될 나를 보며 즐거워하고,
너그러움에 흡족함을 느끼고, 보람과 건강도 뒤따를 것입니다.
그 글에서 나를 보는 지혜를 고운 이야기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읽고 또 읽고 그러는가 봅니다. 고맙습니다.
굽이굽이 산자락처럼이나
박 경 윤 : 서양화가, 본회 발기인
스님....
오랜만에 스님의 글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어서 매우 기쁩니다.
까마득한 옛날이었지요. 그때, 함양의 서상 상원암에 계실 때
지금 제가 살아온 세월의 반을 접은 20대 중반에 스님을 처음 뵈었고,
그 후, 다시 뵐 때마다 간간히 들려주셨던 법문, 해맑은 시세계
또한 스님께서 다시 정리하신 그 글들을 대하며 얼마나 행복해 했던지요.
마치 햇살 따뜻한 상원암 마당에서 바라본
굽이굽이 산자락처럼이나 아련하고 포근한 분위기에서
절로 저의 헛된 마음을 내려놓게 해주셨지요.
그러나 왜 그랬는지, 그땐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그냥
마냥이었던 것 같았는데..........
이번에 스님께서 새로 쓰신
그「월인천강론」을 읽으면서 알았습니다.
우리들의 원초적인 고향으로 우리 다함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러한 인류의 새 지평을 열어갈 그 막중한 과업을
우리 함께 뜻을 모아 받들어 가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러러 존경합니다.
저는 50평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앞으로는 또 어딜 향해
어떻게 달려가야 할 것인지..... 참 막막해 하던 때,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향해 가야 할 탄탄대로를 이 짧은 글로써
이렇게 명료하게, 이렇게 아름답게, 흐트러짐 없이 제시해 주고 계십니다.
스님은 이 각박하고 메마른 세상에 촉촉이 단비를 뿌려주고 계시는 겁니다.
저희는 늘, 적게 배우고 적게 가져서 행복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왔는데,
너무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지려는 그 욕심 때문에 행복하지 못했던 세월을
이 늦게나마 되찾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스님, 거듭거듭 감사드립니다.
동료교사들과 아이들과도 소중히 공유하겠습니다.
당장 저희네 식구들과 함께 나누어야겠습니다.
이 추운 계절에 부디 따뜻하게 보내시며
스님, 내내 건강하시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 가운 이정표 □
손 광 세
월인천강회「월인천강론」의 그 오페라 같은 구성 형태로 짜여진 세 편의 글을 읽었다. 어찌 그처럼 깊은 내용을 그리도 간결 명료하게 짚어낼 수 있었는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거기엔 물질적인 풍요에만 집착하지 말고, 정신적인 풍요도 함께 누려가야 한다는 충고가 담겨 있다. 물질적인 여유와 정신적인 성숙이 조화를 이뤄가야만 진정 행복한 삶을 실현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나에게도 보릿고개를 넘던 뼈아픈 시절이 있었다. 칡뿌리와 나무열매를 찾아 골짝 골짝을 헤매고 다녔다. 내 누이가 홍역에 걸렸는데 약 한첩 지어 먹여보지 못하고 겨우 네 살, 그 어린 나이로 먼 세상을 떠나보내야 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커서 공을 할 테니 살려달라고 애원하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우리 온 가족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부디 가난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없기를, 가난으로 목숨을 잃는 불행은 더욱 없기를 꿈을 꾸듯 바라며 살아왔다. 그런데 요즘은 과정이야 어떻든 부만 축척하면 된다는 경제논리가 굿판을 벌이고 있다.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에 떠밀려 인간성과 가치관이 상실된 아픈 세상으로 변모하였다. 제 부모를 길가에 내다버리는가 하면, 보험금을 노리고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살해하는 세상이 돼버린 것이다.
그리고 “...돌아온 고향”은 그 옛날 누리네 방, 숭숭 뚫린 문구멍으로 빠져나간 빛조각들의 세상사는 이야기다. 수다쟁이 잎새 빛조각들과 듬직한 둥치 빛조각, 그리고 석류 빛조각과 가느다란 땅 빛조각... 그러한 가운데, 실바람만 일어도 쉴새없이 이어지는 잎새 빛조각들의 수다와, 있는 듯 없는 듯이 땅바닥만 비추고 있는 땅 빛조각의 침묵ㅡ그 양자 구도를 이루고 있다. 의연하면서도 내심 여리기도 한 땅 빛조각은 쉽게 상처받기도 하고 감격하기도 곧잘 하는 화자 자신일 것이다. 그래서 정작 석류 빛조각의 말씀을 깊이 새겨듣고 제 빛줄기를 타고 들어가 내면의 세계를 발견하고.... 마침내 큰 깨달음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그 충만한 빛뿌리에서 다시 빛조각들 세상으로 돌아와 의지를 굳히고 있는 땅 빛조각의 자세에서 궁극적인 인류의 향방이 그려지고 있는 매우 의미 있는 동화였다.
우리들은 마땅히 그런 깨우침을 거울삼아 자신의 내면을 비춰보며 인간적인 성장을 해가야 한다. 물질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자면 요란한 성토보다는 침묵을 가르쳐야 하고, 잡다한 지식과 물욕으로 가득 채워진 내면을 비움의 여백으로 걸러져 새로운 차원으로 성숙돼 가야 한다고 일러주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길이길이 복된 삶을 누려갈 영원불멸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다시한번 간추려본다. 지성과 감성의 조화로운 중용에 의해 행복과 성숙은 저절로 이뤄지게 되는 것이다. 그 성숙이란 끊임없는 채움의 연속이 아니라, 결국 비움의 여백을 통해 본래 완성된 인간의 자리로 환원되는 것이므로.... 그것은 우리 인류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일로서 인간교육의 새 시대를 열어갈 그 시발점이 되리라 확신한다. 외진 산길에서 만난 반가운 이정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함께 크게 경하할 일이다. 월인천강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 필자 메모 □
*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월간문학 신인상 시조 당선, 시문학 시 천료
* 한국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조선문학상, 한하운문학상, 대한아동문학상 수상
* 시인나라 발행인, 홈페이지 : http://danyss.wo.to, 이메일 : danyss@hanmail.net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정석영 : 월인천강회 대표, 시인
고맙게도 하늘과 땅 사이에 내가 태어났노라.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인생을 살다가
미련 없이 죽어가야 한다는 관념들에 깊숙이 각인돼 있습니다.
인간의 자존심과 존엄성 같은 건 다 어디다 잡혀놓고
마치 눈을 뽑힌 것처럼 가엾게 죽음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사람들......
설령 배고픈 학으로 살아갈지언정 배부른 돼지에게
제 몫의 자존심을 팔아넘기지는 말아야 하지 않았을까요?
또 설령 많이 배우지는 않더라도 하늘땅보다도 소중한
인간의 존엄성만큼은 반드시 지켜가야 하지 않을까요?
천만 개의 별을 모아서 드넓은 하늘 한 자락 펼쳐낼 수가 없고,
그 억만의 하늘을 포개도 우리들 마음 하나 지어낼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인 까닭이지요.
의식과 무의식의 현상계와 실상계가 우리들의 한마음 자리이자,
너와 나, 우주만유의 시작과 마침일 뿐, 다시 다른 시종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꺾어 세운 가지와 따 모아온 잎들ㅡ그 뿌리 없는 교육에다
씨 한 톨, 뿌리 하나 심어보세요. 하루사이 만리성을 쌓게 될 테니까요.
잎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듯 비우고 모아지면 근원으로 되돌려집니다.
당장 아이들까진 어쩔 수 없더라도 어른들부터 시작해 가야 합니다.
하나로부터 전체가 이뤄지고, 천리원정도 그 한 걸음부터 시작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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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ㅡ월인천강론으로 낡은 관념의 때를 씻어낼 수 있습니다.
혼자면 혼자, 둘이면 둘이서 며칠간의 수련을 시작해 보시지요.
그 며칠간은 평상시대로 밥을 먹고 평상시대로 잠을 자고....
평상시와 다르게는, 다른 글 읽지 말고, 다른 말, 다른 생각,
보고 듣고, 받고 보내는 기기사용까지 가급적 피하시고,
편안히 쉬면서 생각 빈 마음으로 비쳐보기만 하십시오.
그렇게 그 한편씩을 한두 번씩 읽고 나서 좀 쉬었다가
한 부분씩을 읽으며, 읽는 자신을 되비쳐 보십시오.
그러면서 차도 한 잔 하시고, 골목길도 한 바퀴 돌아오시고,
산책을 하다가 낮은 산도 오르며 아름다운 자연도 감상하시며
문득문득 그것을 생각나는 대로 떠올려보고 되새겨 보십시오.
하루나 이틀을 그렇게 이어가 보면 ‘아하’ 그렇게 느낌이 올 겁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러 있지 마시고, 연이어 사흘 나흘을 지나
편안히 쉬면서 말가니 비쳐보며 닷새째를 맞이해 보십시오.
그릇된 관념들이 사라지게 되면 차츰 실상의 세계가 드러나 보입니다.
미지의 그 세계로 깊숙이 가닿아 있음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함께 모여서 행하는 수련회 같은 것이면 더욱 좋겠지만
온라인상으로 모여서 날짜와 규약을 정하고 해 갈 수도 있겠지요.
그냥 그렇게 한두 번 읽고서 다른 것들에 휩싸여 지나쳐 버린다면
읽은 거나 안 읽은 거나 다를 바가 없는 무의미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 모처럼의 기회를 부디 놓쳐버리지 마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첫댓글 좋은 생각들이시네요.
허나 시대의 흐름만 모았으면,
좋은 지적 고맙습니다.
허나 세상의 흐름에 따라가는 형이 있고
그 흐름을 끌어올려 가는 형이 있습니다.
천지만유는 한 근원이 있는데 그 일원의 자리를 등져버리고 시류에 편승하지 못하여
천신만고를 겪고 있습니다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역대조사가 한결같이 그러했으니까요.
그러나 그 방법을 알려주신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