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웬의 저작들의 의미
오웬의 신학과 그의 저작들에 대한 평가
존 오웬은 17세기 명실상고하게 영국의 최고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책은 [John Owen, The Works of John Owen, 24 vols. (London: Johnston and Hunter, 1850-53), repr.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1967)]으로 남아 있다. 오웬의 신학은 한 마디로 실천적이며, 논쟁적이며, 구원론적 신학이다. 우리가 오웬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웬이 당시 알미니안주의1), 소시니안주의, 백스테리안주의, 로마 카톨릭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신학을 정립하는지 지적이며, 역사적인 정황 속에서 살펴보아야 한다.2)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이 파도와 같이 몰려오는 상황에서 그가 기독교신앙의 정통성을 수호했는지를 그의 저작들에서 살펴 볼 수 있다.3)뿐만 아니라 오웬은 조지 폭스(1624-1691)가 주장하는 ‘내적인 빛’에 의존하는 ‘퀘이커파’도 단호하게 비판하였다.
‘청교도의 황태자’로 불리며, ‘영국의 칼빈’으로 불린 17세기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의 명저 ‘삼위일체 신학’, ‘중생과 성화론’, ‘죄 죽임론’, ‘성도와 하나님과의 교제’, ‘성령론’, ‘죄와 유혹’ 등은 오늘날 목회자와 신학생들의 필독서이며, 넘어야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오웬은 개혁주의 신학자, 보다 정확히 말하면 17세기 영국 청교도 신학자인 그는 기독 신자의 삶을 강조하고, 성령론을 매우 실제적으로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오웬의 영성이 탁월했다고 주장 한다 : “개혁주의 청교도들은 이념적으로, 관념적으로 치우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인 감정과 정서를 중요시했다.”고 말한다.
문제는 청교도의 신학을 바르게 해석하고 계승해야 할 후대의 신학자들이 청교도들이 가졌던 감정과 정서를 무시하고, 계몽주의자들처럼 개념적으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오웬은 기독신자의 신앙생활에서 경험을 강조했으며, 그리하여 확신과 안정감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오웬은 당시 신비주의자들이 종교적 황홀감을 맛보기 위해서 그리스도에게 집착하는 문제에 대해서 지적한 바 있고, 합당하게 필요한 감정적 차원을 설명한 바 있다.4)
존 오웬은 격동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오웬 당시 시대상을 담고 있는 「왜 그들은 복음을 배반하는가」(Apostasy from the Gospel, 생명의 말씀사)5)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청교도 혁명의 성공과 실패, 카톨릭주의와 카톨릭의 득세를 목격하였고, 때로는 강단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당시 찰스 2세는 왕정복고 이후에 통일령을 발표하여 청교도들을 국교회 밖으로 몰아내었고, 찰스 2세는 임종 시에는 카톨릭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의 동생 제임스 2세는 카톨릭 신자들을 정부 요직에 등용하였다. 이제 영국은 카톨릭화 하기 시작하였다. 오웬은 카톨릭과 카톨릭주의를 배교라고 규정하고 복음의 진리와 복음적인 삶과 예배를 수호하기 위하여 이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오웬의 저술에서 그가 매우 분석적이고 조직적이며 탁월한 지성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그의 글은 모두 그가 심오하게 이해한 은혜의 교리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오웬의 문장 스타일은 현대인들에게는 쉽지 않다. 다행히도 로우(R.J.K. Law)의 수고에 의해서 오웬의 대표작들에 속하는 『성령론』(The Holy Spirit),『하나님과의 교제』(Commuinon with God), 『복음으로부터의 배도와 그리스도의 영광』(Apostasy from the Gospel and the Glory of Christ)이 요약되거나 현대어로 고쳐져서 나왔다. 계속해서 그의 작품들이 번역 출간되고 있어 우리들이 좀 더 쉽게 그의 신학의 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부록참조)
오웬의 신학적 배경과 이해
(1)청교도 운동
1640-1660년, 20년은 청교도의 황금기로 ‘청교도 신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다. 여기에 참여한 많은 신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존 오웬이다. 오웬의 신학은 청교도 운동의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16,17세기의 영국에서 엘리자베스시대가 허용했던 것보다 더 발전된 영국 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추구한 운동으로서 청교도를 일컫는 영어의 'puritan'은 'puritas(purity)'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교회를 깨끗하게 정화하려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puritan', 깨끗한 척하려는 사람‘, 'precisian'1)’꼬치꼬치 캐려는 사람‘이라는 조소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청교도 운동은 바로 이들 청교도들에 의해 펼쳐진 종교개혁운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세기 이상 동안 지속된 성직자와 평신도 운동이었으며, 종교뿐만 아니라 근대 서구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고 개혁을 일으킨 세계관적 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의 국교파는 그들의 기도서와 예배의식, 예복 등의 준수를 강력히 요구하였으며, 이에 대해 대륙의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들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종교생활에 있어서 이런 형식이 아니라 내면에 있음을 강조하고, 성경 중심적인 경건과 청빈사상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성경을 근거로 영국국교파와 로마 카톨릭을 비판하였으며, 성경대로 살려는 엄격한 근본주의적 입장을 고수하였던 것이다.
(2)칼빈주의 수호자
개혁주의 신학자 패커(J.I.Paker)는 ‘성경적 신앙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가르쳐 준 사람이 다름 아닌 오웬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스펄전 역시 오웬을 칼빈과 칼빈주의를 잇는 가교 역할을 감당하였다고 보았다. 오웬의 저작들에는 펠라기안 이래로 면면히 흐르는 소시니안, 알미니안주의와 같은 이성주의, 인간 중심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하였으며, 로마 카톨릭의 형식주의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의 어조는 마치 하나님의 정염(情炎)에 불타는 구약의 선지자와도 같이 분노로 격앙되어 있었다.
(3)성경에 근거한 탁월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
청교도 신학의 최정상에서 거의 모든 주제들을 다루고 재정비한 신학자이며, 탁월한 저술을 가장 많이 발표한 오웬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오웬의 신학함의 깊이와 방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지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일 것이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기독교강요] 1권 첫 소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두었던 것은 그 중요성 때문이었다. 오웬의 신학 속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에 관하여 얼마나 분석적이며, 통찰력 있고, 해박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오웬의 저작 가운데 인간 안에 내재하고 있는 ‘내면의 죄’, ‘죄 죽이기’는 매우 세미한 것을 살피는 통찰력을 볼 수 있고,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스도의 영광’과 ‘삼위일체’, ‘기독론’, ‘성령론’은 하나님에 관한 그의 지식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오웬은 이 모든 것을 성경에서 찾았으며,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그가 하나님과 인간에 관하여 경험한 모든 것을 다시 성경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오웬의 신학체계는 칼빈을 넘어 어거스틴과 교부들의 작품, 그리고 유대 랍비문서를 넘나들며 방대한 신학을 섭렵함을 통하여 세워진 거대한 저수지와 같다.
그는 성경을 근거로 목회적 경험을 치밀한 논리로 펼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인간에 관한 지식을 정초(定礎)하였다. 젊은 시절 오웬의 자신의 회심 폭풍 전야의 경험이 그를 더욱 겸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제6권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겸손하게 하는데 적합한 두 가지 사항이 있으니, 하나님에 대한 바른 사고와 인간에 대한 바른 사고(思考)이다. 즉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을 생각하고, 인간의 초라함과 비천함을 숙고해야 한다.”고 했다.
존 오웬은 "내가 익힌 학문과 '저 대장간의 힘'과 바꾸고 싶다" 고 할 정도로 존 번연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시대에 겸손과 지성을 가진 목회자, 하나님의 말씀에 해박한 지식과 영혼을 해부하여 치료하는 영적이며 탁월한 하늘의사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성화론
오웬은 그의 『성령론』제4부에서 “성화”1)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중생(regeneration)하고, 회심(conversion)을 한다. 이는 성령의 새로운 창조에 있어서 두 번째 부분(part)라고 할 수 있다.2)성화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the God of peace)은 우리의 본성과 인격을 성화시키셔서 하나님과 평강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 본성(whole nature)을 성화시키셔서 완전한 영과 완전한 혼과 완전한 몸을 가지게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평강 안에서 흠 없이 우리를 완전하게 보존하신다는 말이다.3)성화는 그의 신학적 학문의 탐구와 지식은 다른 청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위한 실제적인 지식이었다. 그는 칼빈과 마찬가지로 이 땅을 사는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성화라고 보았다. 그는 말하기를 “성화는 신자들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로 그들의 본성을 죄의 오염(汚染)과 부정(不淨)으로부터 정결케 하고,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함으로 그들이 은혜의 신령하고 습관적인 원리를 따라 하나님께 순종을 바칠 수 있게 하는 것이다.”고 했다. 그러므로 성화는 죄의 오염으로부터 죄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4)
그러나 성화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있어서 포괄적인 주제인 ‘하나님과의 교통’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사실 하나님과의 교통 사상은 청교도 신학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주제는 다른 모든 신학적 주제들과 연결되는 중심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인간의 문제에 방대하고 치밀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모두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해서였으며, 성화는 이 목적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1.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오웬은 여전히 죄가 신자 안에서도 지배하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바로 여기서 그의 성화론이 출발한다. 죄는 결코 신자를 지배할 수 없지만, 신자가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한 것은 아니다. 즉 죄의 지배에 대해서는 자유하지만, 죄의 지배하려는 속성에 대해서는 자유롭지 않다. 이 속성과 신자는 싸워야 한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은혜 아래 사는 존재이다. 그리하여 신자의 마음은 전쟁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죄를 이길 수 있는 계속적인 은혜의 공급으로 생명과 능력을 준다.
성경은 내재하는 죄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미 그 지배권을 잃었음을 선포한다.5)간단히 말해서 신자는 은혜의 지배아래 있다. 그리고 불신자는 죄의 지배 아래 있다. 오웬의 성화 교리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죄의 지배는 무너진다.”는 토대 위에 세워진다. 그의 성화 교리에 있어서, 죄와 은혜라는 이 두 가지 지배력 안에 모든 인류를 가둔다. 모든 인류는 죄와 은혜라는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에 속한다. 둘 다 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전히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는 잔존하여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 죄는 신자 안에서 신자를 지배할 법적인 근거를 잃었으나, 그것은 여전히 살아서 그 힘과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것은 계획을 세우고, 신자를 유혹하되, 열렬히, 광기(狂氣)를 가지고 신자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조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배할 수 없는 신자를 지배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의 논문 ‘죄와 은혜의 지배’는 바로 내재하는 죄의 속성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내재하는 죄는 계획하고, 충동하여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는 인격으로 의인화되어 묘사되고 있으며, 이것은 로마서를 기술한 바울의 관점에서 일치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들어오기 전 불신자를 지배하던 죄의 지배아래 있었으나, 그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힘입는 순간 죄의 지배는 완전히 무너졌다. 그 내면의 원리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은혜로운 틀(frame)이 구축되었다. 그리하여 신자는 죄를 범할 때, 불신자와 다르게 그 것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죄의 영향력과 힘은 여전히 신자에게 존재한다. 은혜와 죄 사이에는 항상 싸움이 있다. 은혜는 우리 영혼을 살찌게 하고 건강을 증진시키고 필요한 것이지만, 죄는 우리 영혼을 약화시키고 부패케 한다.6)
오웬은 바울이 설명한 롬7:21을 근거로 내재하는 죄를 “한 법”이라고 하였다. 신자가 은혜의 지배아래 있으면서도 또한 동시에 신자 안에 잔존하는 죄의 세력, 곧 그것의 힘을 축소시키지도 않는다.7)그것은 인간 안에 계속 존재해 온 어떤 내재적이고 습관적인 원리이다. 오웬도 바울처럼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곧 신자의 적인 죄를 인격과 같이 의인화하고 있다. 이 내재하는 죄의 본질은 ‘거룩한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반감(反感)이다. 싫어함(aversion) 또는 혐오, 진절머리 내는 것, 증오(憎惡) 마음이다. 이것은 반드시 신자가 자신 안에서 역사(役事)하지 못하도록 죽여야 할 원수이다. 왜냐하면 신자 안에 내재하는 그 죄는 반드신 신자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도록 파멸하도록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오웬에 의하면, “죄는 자신의 지배 자체를 빼앗겼을 뿐, 그 속성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의 파렴치한 속성들 중, 하나는 죄는 항상 악(惡)을 지향하되, 그것도 최대치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죄의 최종적인 목표는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아무리 작게 남아 있더라도, 죄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죄의 속성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지배권을 향한 그것의 열렬함은 죄의 속성으로써, 죄는 틈만 나면 그의 통치구조(frame)를 재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남겨두면 내가 죽는 것이고, 죄를 죽이면 내가 사는 것이다.8)
죄가 계속해서 약화되지 않고서는 죄는 죽지 않는다. 우리는 죄의 힘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죄의 요소와 죄의 활동을 주시하여야 한다. 이것이 신자의 의무이고, 이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우리는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 우리의 육체를 죽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것을 할 수 없다. 이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in) 또는 성령에 의해서(by)서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있는 죄의 세력과 치세는 성령에 의해서 약화되고 손상을 받아 마침내는 멸망 받고 만다.
(1)성령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좋지 않은 습관적 요소, 성질, 행동 등을 뽑아 버리시고, 정반대의 마음을 주시고 좋은 습관, 요소, 행동 등을 심어 주신다. 육체의 욕심을 갖지 않는 것이 죄를 죽이는 일이다. 그리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죄를 죽이는 것이다.
(2)성령께서는 죄를 죽이는 사역을 그의 은혜를 통하여 실제적으로 공급하고 지원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도우시는 힘으로 실천적으로 죄를 죽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도와주시는 은혜를 따라 부지런히 주님의 은혜를 갈망해야 한다. 그럴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우리들이 갈망하는 것을 주신다.
(3)우리를 지도하시고 도와주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박멸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고, 죄를 죽이는 사명을 또한 주셨다. 일반적인 훈련을 통해서 감당하는 우리의 의무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죄를 죽이기 위해서 용의주도하게 계획된 속에서(in) 또는 계회에 의해서(by) 각각의 독특한 경우에 알맞게 우리는 대처하고 적용해야 한다.9)
성령께서는 이 사역의 목적을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들 가운데 성취하신다.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이러한 죄 죽임의 의무를 성취케 한다.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고, 교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하고, 일치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과가 우리에게 유효하여 죄 죽임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10)
2. 은혜 언약의 핵심 :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
오웬의 언약신학11)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기초가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오웬의 생각은 엄격하게 칼빈주의적이며, 동시에 청교도적인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라는 틀 속에서 구성되었다. 일반적으로 언약적 관계가 시작되면서 인간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들어간다. "이제 이 언약은 진지한 고려 가운데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아브라함의 씨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오직 한 씨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언약을 받게 된다. 바로 그리스도를 향해 언약의 약속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 연합은 성령을 통해서이다. 이 연합은 신자에게 모든 유익을 가져오는 통로이다. 다른 청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오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 교통을 위한 기초이다. 그것은 그분의 인성에 성도가 동참함으로써 얻는 구속의 효과이며, 나머지 하나는 바로 성화이다. 즉 오웬은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칭의와 성화를 밀접하게 연관시키면서 동시에 구별한다. 그러므로 오웬에 있어서,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자의 구속과 성화를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요소이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과의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신 성육신 사건 속에서 발생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이다. 은혜언약 안에 거하는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속의 모든 효과가 그에게 붙어있는 신자에게 전달되고, 그리스도께 있는 하나님의 형상(거룩함과 은혜)도 신자의 것이 되는 것이다.
3. 성화의 목표 :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우리의 전 본성(whole nature)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상으로 지은 아담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셨다.12)그는 초자연적인 생명(Supernatural Life)의 소유자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향해(to God) 살아드리도록 창조되었다.13)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은 손상을 입었고, 그리고 그것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우리 영혼의 어떠한 하나의 능력이(one power) 소멸된 것이 아니고, 한 부분(part)이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며, 기능이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본성(whole nature)을 잃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말한다.14)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의 형상은 말할 수 없는 손상을 입게 되어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아갈 길이 전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제 외부적인 도움이 없다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복음을 주셨다. 세상에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의 공로를 죄인들에게 덕 입게 하셔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다. 이러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말미암는 중생과 성화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서 회복되게 하셨다. 오웬에게 있어서 성화의 본질은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복원하는 것, 곧 재창조의 사역이다. 그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회복이다.
4. 성화의 과정
오웬은 “성령론”에서 성화를 씨에 비유한다. 오웬에게 있어서 중생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인 반면에 성화는 신적인 사역인 동시에 여기에 순종하는 인간적인 반응을 요하는 인간적인 사역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화의 주체는 성령이시오, 인간은 그분에게 피조물로서 마땅히 드려야할 순종을 드린다는 의미에서 인간적인 사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과 협력하여 무엇을 이루어 간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성화는 하나님의 영의 직접적인 사역이다(Sanctification is an immediate work the Spirit of God)’15)라고 그는 성화의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께 마땅히 순종해야 하며, 성화는 그 순종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구원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다. 인간의 순종이 결코 인간의 공로가 될 수 없다. 이것마저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순종이 결코 공로가 될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으로 반응하는 선한 행위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이 개혁주의 성화론의 놀라운 신비이다.
5. 신자의 의무 : ‘죄 죽인다’는 의미
성화는 계속적인 의무 수행을 필요로 한다. 의무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 또한 성도들에게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책임 전체를 말한다. 사람의 의무와 성도의 의무는 동일하다. 그러나 이러한 의무를 순종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성도뿐이다.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이 의무는 성도의 새로운 본성과 일치하며, 성령의 도움 없이는 실천될 수 없는 것으로서, 반드시 믿음으로만 시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복음은 신분의 자유와 내적 자유를 동시에 준다. 이로써 영혼 위에 역사하던 죄의 권세나 영혼 안에 역사하는 죄의 권세는 모두 파괴된다. 내재하는 죄는 완전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영광의 단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성경과 오웬이 동시에 주장하는 바이다. 내재하는 죄가 여전히 한 법으로서 그 내부에서 역사하고 있는 신자의 실존이 그에게 죄 죽임(Mortification)이라는 중대한 의무를 요구한다. 그러나 동시에 있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이 이미 신자에게 죄의 지배를 파과하고 자유를 주었다는 사실이며, 이 사실이 신자로 하여금 그 의무를 자유롭고 담대하게 이행하게 하는 촉진제 역할을 한다.
오웬은 우리에게 신자가 어떻게 성화를 위한 삶의 지침으로 ‘죄 죽이기’를 말한다. 그는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에서 이 교리를 이끌어 낸다. 그리고 신자는 일평생 죄를 죽이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아한다고 말한다.
오웬이 죄를 ‘죽인다’는 말은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안에서 죄가 역사하지 못하도록 그 힘을 약화시킴으로써 죄의 세력이 신자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죄를 억제하는 것을 말한다.
죄 죽임의 필요성에 대해 오웬은 매우 강하게 말하고 있다. “이 죄 죽임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은혜는 고갈되고 욕망은 충만해지며 마음의 구조는 점점 더 악해진다. 주님은 이런 상태가 어떤 절망적이고도 두려운 일들을 일으키는지 잘 알고 계신다. 죄 죽임을 무시함으로써, 죄가 거대한 승리를 거둔 곳마다 영혼의 틀은 파괴된다.(시31:10) 그리고 인간을 약하게 하고 아프게 하며 죽게 만든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은 고개 들 수도 없게 될 것이다. 연약한 피조물이 고난과 실패와 상처 속에서 그들 자신을 일으켜 활발한 대적을 할 수 없을 때, 그들은 죄의 속임으로 인한 굳은 마음 이외에는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고 그 결과 그들의 영혼은 피 흘리며 죽어갈 것이다. 태만(怠慢)에서 오는 이러한 일은 정말 슬픈 일이다.
신자는 죄의 정체와 그것의 전략을 파악하고, 죄가 신자가 마땅히 수행해야할 영적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기위한 노력들을 무너뜨리려 침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죄가 신자 안에서 역사하지 못하고 죽어있는 증거이다. 이러한 일은 오직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죄를 죽이는 일이 가능하도록 신자 안에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일하심에 신자의 순종이 뒤따라야 한다. 신자는 총체적인 순종 곧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방편들 - 기도, 말씀, 묵상, 하나님과의 교제(사귐) 등 -을 부지런히 활용하여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피 흘리기까지 자신과 싸워야 한다. 이 싸움에서 승리할 때 비로소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어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통’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