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조봉암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꼭 47년째 되던 지난달 31일. 죽산과 함께 진보당 창당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정태영씨(75·사진)는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의 죽산 묘를 찾았다. 이 자리에 함께 한 문성현 민주노동당 대표에게 정씨가 한 마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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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영씨가 지난달 31일 죽산 조봉암의 47주기 제사에 참석한 뒤 자신이 쓴 ‘조봉암과 진보당’을 펼쳐 보며 감회에 젖고 있다. /김정근기자 | “민주노동당은 진보당의 실패에서 배우길 바랍니다. 지금처럼 내부 파벌 다툼에 치중하고 투쟁중심 노선만 고집해서는 국민들에게 외면받다가 수십년 내에 그 소중한 진보정당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정씨가 15년 전 출간된 ‘조봉암과 진보당’을 수정해 이번에 새로 펴낸 것도 최근 민노당을 비롯한 진보진영의 위기와 무관치 않다. “절판이 되기도 했고, 젊은 사람들이 읽기 쉽도록 고쳤어요. 나이 든 사람들은 읽어봐야 소용 없고, 세상 바꿀 사람들이 읽어야죠.”
그는 구체적으로 민노당을 독자로 지목했다. 정씨는 요즘도 민노당 행사장의 청중석 어딘가에 앉아 있는 모습이 목격될 정도로 민노당에 애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진보정당 1세대로서 후배들을 보는 심정은 불안하기만 하다.
“민노당 지도부는 ‘나름의 집권 스케줄을 갖고 있으니 20년만 애정을 갖고 지켜봐 달라’고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해요. NL(민족해방)-PD(민중민주) 계열 간의 주도권 싸움에, 비현실적인 얘기만 하는데 어떻게 국민들이 미더워 하겠어요. 당장 당원들의 부인들조차 민노당에 투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씨는 이 책에서 선배들의 진보정당이 어떤 길을 걷다가 소멸했는지 보여주려 했단다. 그가 보기에 현재 민노당을 비롯한 진보진영은 과거 진보운동의 전철을 되밟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진보운동은 정권의 탄압이나 냉전 같은 외적 요인에 의해 좌절됐다고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게 모든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진보운동이 현실에 기초를 튼튼히 둔 이념적 좌표를 세우지 못하고, 당내 정파들의 조급한 헤게모니 투쟁으로 분열해 대중에게서 유리됐기 때문입니다.”
그는 조봉암이 처형되면서 진보당이 저항 하나 없이 소멸된 것은 단일 이데올로기를 기초로 한 단일 조직이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4·19혁명 이후 자유롭게 진보정당을 조직할 수 있게 된 여건에서도 지도부를 놓고 여러 정파가 자신들의 이념만 강조하고 서로 타협하지 못하면서 군부의 탄압을 초래해 분해됐다는 것이다. 조봉암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56년 대선에서 23.8%를 득표, 이승만(52%)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기세등등했던 진보운동이 그로부터 5년도 안돼 자취도 없이 사라졌던 것을 체험한 정씨 입장에서 10% 지지율에 그치면서도 부족함을 깨닫지 못하는 듯한 민노당의 모습은 안타깝기만 하다.
“민노당은 의회정치에서의 경쟁력을 더욱 강화해 자본가로부터 사회적 대타협을 이끌어내는 데 주력하고, 노조는 기득권 수호 쪽으로 가는 대신 적극적인 ‘일 나누기’를 통해 비정규직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정씨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대안으로 택했던 조봉암의 노선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말한다. 아울러 스웨덴 등 유럽 복지국가들에서는 사민주의 진보정당 당원들이 함께 가는 식당이 있을 정도로 진보정당 문화가 생활 속에 뿌리내려 있음을 강조했다.
끝으로 정씨는 “몽양 여운형도 복권된 마당에 죽산이 여전히 ‘거물간첩’으로 남아 있는 것은 대한민국의 수치”라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진보당 사건을 조사하는 것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
정태영씨는? = 서울대 문리대 중퇴 후 56년 진보당 창당 당시 서울시당 상무위원을 맡았다. 동양통신 외신부 기자로 위장취업해 조직 확장에 나섰으며 58년 진보당 사건 때 ‘북측과 교신했다’는 등의 혐의로 체포됐으나 3심에서 무죄 선고됐다. 4·19 직후 사회대중당 창당에 참여했고 3선개헌 반대특위 위원, 신민당 노농국장 등으로 활동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