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10.26 사건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던
부마사태 현장 이후 박대통령 시해 사건,
이 사건의 후폭풍인 12.12사건
그리고 5.18 광주사태까지
장기적으로 취재를 해왔습니다.
이런 취재는 결국
박대통령의 정기집필로 이어졌습니다.
제가 10.26사건을 취재하면서
개인적 호기심을 풀려고 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박대통령이 과연
가슴 관통상을 당하고도
계엄사 합동 수사본부
전두환 소장 발표대로
“난 괜찮아‘ 라고 말을 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0.26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을 거의 만났습니다.
물론 최후의 만찬장에 있었던
세 생존자도 포함됩니다.
김계원(고인) 대통령비서실장,
그리고 심수봉 신재순, 이들 중
신재순씨 증언이 가장 정확했습니다.
신씨는 대담한 성격인 데다가
기억력과 표현력이 대단했습니다.
하느님이 그녀를 박정희의 최후 목격자로
선택한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45분
김재규의 권총 발사로 가슴을 관통당하여
등에서 피를 콸콸 쏟고 있던
박정희를 혼자서 끝까지
안고 있었던 이가 신재순씨였습니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팔에 중상을 입고 화장실로,
김계원씨는 바깥 마루로,
심수봉씨는 김재규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달아난 이후 신재순씨만이
피범벅인 대통령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최후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김재규는 합동 수사본부에서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 차지철을 거꾸러뜨리고
(그러니까 차지철이 화장실에 갔다가 나와서
바깥으로 도망가려 할 때
바로 감재규가 들어왔다.
거기서 김재규가 차지철을 쐈다)
앞을 보니대통령은 여자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있어 식탁을 왼쪽으로 돌아
대통령에게 다가가자
여자가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각하의 머리에서 권총을
50센티 거리에 두고 쐈습니다.
이 순간을 1997년에 제가 만난
(그때는 40대 중년의 여성이 되어있었습니다)
신재순씨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저한테 한 이야깁니다)
─ 그 사람 김재규와 마주쳤을 때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의 눈이 아니라
미친 짐승의 눈이었어요.
그가 총을 대통령 머리에 대었을 때,
다음에는 나를 쏘겠구나,
생각하고 후다닥 화장실로 뛰었습니다.
저의 등 뒤로 총성이 들렸습니다.
(박정희 머리에 총을 쏜 소리)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도 손잡이를 꼭 뒤고 있었습니다.
바깥이 좀 조용해지자 신재순씨는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대통령은 실려 나갔고 문 앞에는
차실장이 하늘을 보고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일으키려고 손을 당겼습니다.
차실장을 일어서려고 몇 번 힘을 써보다가
포기하는 눈빛으로 말했습니다
’난 못 일어날 것 같아.
그러고는 다시 쓰러져 신음하는데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날 밤 그는 김부장을 약 올리고
자극하고 막말을 했습니다.
이게 이 사건(10.26)의 도화선입니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김부장을
몰아세우는데 옆에 있던차지철이 가담하여
김재규를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래도 차실장이 고마운 것은
제가 대기실에서 면접을 볼 때
술을 못 마신다고 했더니
그분은 옆에 깡통을 갖다 놓을 테니
거기에 부어버리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서
신재순씨에게 여러모로 물어보았습니다.
신재순씨의 설명은 일관성이 있었습니다.
─ 그날 밤 대통령께서는 좀 취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말이 헛나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인자한 아버지 같았어요. 피를 쏟으면서도
‘난 괜찮아’라는 말을 또박또박했으니까요.
그 말은 난 괜찮으니 자네들은
어서 피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이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난 괜찮으니 자네들은 어서 피하게.
역시 절박한 순간에도 우리를 더
생각해 주시는구나. 생각했었죠.
그분의 마지막은 체념한 모습이었는데
허무적이라기 보다는
해탈한 모습 같았다고 할까요,
총을 맞기 전에는 ‘뭣들 하는 거야’ 하고
화를 내셨지만, 총을 맞고서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였어요.
어차피 일을 벌어졌으니까요.
이 마지막 목격담은 얼마나 감동적이고
(조갑제 울컥) 소설적이고 문학적입니까.
해탈한 모습으로 운명을 받아들인
박정희. 총성과 비명이 오고 가는
아수라장 속에서
피하지도 머리를 숙이지도
애원하지도 않고 담담하게
‘난 괜찮아’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사람.
그래서 저는 박정희가 참으로
잘 죽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가 보통사람처럼 행동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차지철 실장처럼 화장실로 달아나
숨어있는 것을 김재규가 문을 차고 들어가
박정희를 사살하는 모습이었다면
우리는 지금 박정희를
어떻게 기억해야 될 것입니까.
박정희의 비범한 죽음과
그 증언자 신재순씨로 해서 우리는
영웅을 잃지 않게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탈한 초인의 모습으로 죽은 박정희의 국장.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영전에
건국훈장을 바칠 때 국립교향악단은
교향시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작곡)를 연주했습니다.
독일 철학자 니체가 쓴 동명의 책
서문을 음악화한 이 곡의 선정은
얼마나 상징적입니까,
니체는 이 서문에서
‘인간은 실로 더러운 강물일 뿐이다’
라고 썼습니다.
그러한 인간이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이 강물을 삼켜버리려면 모름지기
바다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덧붙였습니다.
한 시대의 청탁을 다 들여 마시고도
끝까지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죽어간
박정희를 저는 서슴지 않고
초인이라고 부릅니다.
무자비한 권력욕의 화신이 아니라
부끄럼타는 초인이었습니다.
하나 우스운 것은 김재규의 지령을 받아
두 대통령경호원을 사살하는 등,
이날 궁정동 작전을 지휘했던
박선호 중정 의전과장이 부하를 시켜
일대 학살극을 끝낸 뒤,
두 여인 심수봉, 신재순에게 20만원이 든
봉투를 주고 집으로 보내주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이 10.26 사건의 성격을 이야기해 줍니다.
과감하지만 치밀하지 못한
김재규의 지리멸렬함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권력을 잡지 못하고
전두환의 등장에 길을 열어주었던 것입니다.
10월 2일 밤의 행동에 의하여 상처받고
의심받은 요인들과 이 약점을 이용한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은 그 뒤 10여 년의 한국역사를
상당 부분 결정하게 됩니다.
계엄사령관으로 등장한 정승화 장군은
김재규의 계략에 의하여
대통령 시해현장에 초대받아
와 있다는 점에 의심을 받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결정적 순간에 서서 지도자의 용기와
결단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전두환 국군 보안사령관은
그날 밤, 상황대치가 기민했습니다.
두 핵심 인물의 권위가 약하된 틈을 타서
정규 육사 출신 장교단을
대표 격인 전두환 장군이
정보 수사권을 독점하면서
권력 공백을 채우게 된 것입니다.
10월 26일의 하루는 박정희 18년을
마무리하면서 그 뒤의 두 정권
전두환, 노태우 정권 13년의 시대를 연
스물네 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 노태우 대통령이
오늘 별세를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10.26 그날 밤에 있었던
역사의 한 장면이
오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별세로
마무리되는 느낌도 있습니다.
결국, 하루가 31년의 역사를
결정한 게 10.26 사건입니다.
조갑제
자기 나라를 지킬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을 써보지 못하고 남한테 구하려고
손을 내미는 것은 노예근성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자들은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다.
조갑제 시국강연회 강연 中
대한민국의 언론인. 극우 논객이라는
인식이 넓게 퍼져 있지만,
정확히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노선과
살짝 다른 민주주의와 애국주의 사상을 가진,
고전적인 애국주의 논객에 가깝다.
정확하게는 완고한 반공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좌우 대립보다는 남북 대립에
더 신경이 예민한 경향을 보인다.
청년 때부터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저지른 비리와 조작을 파헤쳤고,
다른 민주화 투사처럼 안기부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한 뒤에도,
취재를 포기하지 않을 만큼 집념이 강했다.
나중에는 안기부에서 고문을 받은 사람들 및
당시의 고문 기술자를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전두환 정부를 비난하는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이라는
책까지 작성했다.
그가 진보진영에 심한 말을 할 때마다,
언론인 후배들이 반박은 하더라도
조갑제가 기자로서 남긴 업적이
대단하기에 아주 심하게
공격을 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를 보고 장래희망을
기자로 정한 사람도 많다.
지금도 비록 조갑제와는 입장과
노선을 달리하지만, 언론인으로서 보여준
조갑제의 업적과 취재력,
글쓰기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만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딴지일보,
안티조선 우리 모두에서 파생된
소위 진보진영 및 노빠, 문빠 성향의
네티즌들은 조깟제 등의 멸칭까지 써가면서
인신모독과 비난을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