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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창세 37,3-4.12-13ㄷ.17ㄹ-28
복 음 : 마태 21,33-43.45-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45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46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 낮에는 식당, 밤에는 술집을 운영하는 가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손님이 줄어 운영이 어려워진 것입니다.
주인은 며칠 간의 고심 끝에, 저녁에 자기 집에서 술을 마시면
다음 날 점심을 공짜로 주겠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손님이 점점 몰려들어 장사는 나날이 잘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이 가게의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글쎄 저녁 술값에 다음 날 점심값이 이미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공짜를 좋아하면 도둑놈 심보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공짜만을 좋아하고 또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주님께 어떠합니까?
우리 교회의 발전이 공짜로 이루어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봉헌이 있었고, 많은 순교자의 피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많은 신앙인 덕분에
우리 교회가 계속 발전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는 계속 공짜 인생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그 어떤 노력 없이 세속적인 자기 욕심이 채워지길 바라는
기도의 연속은 아니었습니까?
공짜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대로 더 사랑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하늘나라에서 모두 갚아주시겠다고 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포도밭을 일군 다음 소작인들에게 맡기지요.
그리고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소출을 받아 오라고 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매질하고 또 죽이기까지 합니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역시 마찬가지의 악행을 저지릅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은 존중할 거라는 마음으로 보냈지만,
‘상속자인 아들을 죽여 버리면, 이 포도밭을 차지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립니다.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많은 예언자를 죽이고, 심지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스라엘 사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당연히 많은 것을 누려야 한다는
욕심과 이기심이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과 무엇이 다를까요?
그 어떤 노력도 없이 세속적인 자기 욕심이 채워지길 바라는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못된 소작인의 모습이 아닌, 겸손한 삶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착한 소작인의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으로 인정을 받고, 주님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포도밭의 사랑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당신의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작인(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은 당신의 종(예언자)들을 여러 차례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학대 합니다.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돌로 쳐 죽이고,
결국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지만,
그마저도 포도밭 밖으로 끌어내어 죽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실감나게 해주는 노래입니다.
그 신뢰와 사랑이 너무도 커서 아들의 목숨까지도 건네주어 버리는 무방비의 신뢰와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신뢰와 사랑의 노래는 애절한 그 신뢰와 사랑이
거절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살육당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가슴 아픈 노래입니다.
이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에 우리는 울컥 눈물이 젖습니다.
한편 이 노래는 그 큰 사랑과 신뢰를 거부해 버리고 마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신 이야기입니다.
또한 고귀한 사랑과 신뢰마저도 한갓 우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짓부숴 버리고 마는,
배은망덕의 패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제들과 원로들을 고발하며 꾸짖으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꾀와 작태를 비웃으시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밝히십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 돌이 되었다’는 성경 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쳐진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께서는 버려진 돌 이셨지만,
머릿돌이 되시어 새로운 집인 새로운 백성을 세우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보장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파기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공동체에 보편적 구원이 사명으로 맡겨졌음을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사랑을 보게 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두 번씩이나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베풀어지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 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사실 도조를 바치지 않고 못된 일을 저지른 소작인들,
그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과 죄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아상입니다.
소작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는 포도밭 주인에게
여전히 우리의 권리만 주장하고 있는 완고한 우리들의 자아상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한 마음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맺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바로 오늘, 그분의 신뢰와 사랑에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며,
감춰 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저 자는 상속자다. 자, 저 자를 죽이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소작인들이 해야 했을 일들을 직접 하였다.
소작인들은 그렇게 많은 일을 해야 했던 것이 아니다.
주어진 것을 잘 지키기만 했어도 되었다. 모든 것이 다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율법을 주셨고 도시를 세워주셨으며 성전을 마련해 주셨고 제단을 준비해 주셨다.
그러고는 “멀리 떠나셨다.”(33절) 밭 주인은 “소출을 받아 오라고”(34절) 자기 종들을 보냈다.
소출은 행실로 드러나는 순종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토록 세심한 보살핌을 받고 나서도
게으름을 피워 소출을 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종들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은 아들을 보낸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37절).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소작인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은 소작인들이 아들을 죽일 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당신의 종들과는 달리 아들의 존귀함에는 경의를 표했어야 마땅하다는 의미다.
소작인들은 그러나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하고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38-39절).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소리치며,
주님을 도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40절)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 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41절) 대답한다.
그 대답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였다.
주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 이것을 암시하셨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동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42-43절).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에게 하는 이야기인 줄 알고
예수님을 죽이자고 마음먹었지만,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46절)
그 군중들에게 변을 당할까 두려워한 것이지만 그 군중들도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외칠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금 어떤 소작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노총각이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임신을 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났고, 노총각은 의사인 친구에게 찾아가서
아이와 자신이 닮은 곳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의사인 친구는 아이와 아빠의 발가락이 닮았다고 이야기 해 줍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얼굴도 닮았다고 이야기해 줍니다.
노총각은 자신에게 허물이 있음을 알면서도
아내가 자신의 아이를 출산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요즘이야 유전자 검사라는 간단한 방법이 있지만
예전에는 닮은 곳을 찾으면서 나의 자식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체질과 성격을 닮았습니다.
아버님은 일찍 머리가 하얗게 되었고, 치아가 좋지 않았고, 혈압이 높았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닮아서 40이 되면서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었습니다.
치아가 좋지 않아서 질긴 음식을 잘 먹지 못합니다.
혈압이 있어서 늘 조심하고 있습니다.
어머님은 유순한 성격입니다. 싫은 소리를 잘 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남을 이끄는 편도 아닙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의 성격을 닮았습니다.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아도 저는 부모님의 자식이 확실합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야곱의 아들 요셉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요셉은 예수님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어떤 부분들이 있을까요?
첫째,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형들이 요셉을 질투하고, 시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았습니다.
둘째, 은전에 팔렸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은전 스무 닢을 받고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유다는 은전 서른 닢을 받고 예수님을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에게 팔았습니다.
셋째, 요셉은 이집트 관리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유혹을 물리쳤지만,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넷째,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풀이하였고,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가족들은 이집트로 와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십니다.
다섯째,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을 용서하였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나의 어떤 모습이 예수님을 닮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나의 어떤 모습이 예수님을 닮지 않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있다면 분명 예수님을 닮은 것이 아닙니다.
욕심과 탐욕으로 이웃을 괴롭힌다면 분명 예수님을 닮은 것이 아닙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삶이 우울하다면 분명 예수님을 닮은 것이 아닙니다.
욕심과 탐욕 때문에 주인이 보낸 소작인을 죽이고,
주인의 외아들까지 죽인 소작인들은 분명 예수님을 닮지 않았습니다.
겸손과 인내로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면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나눔과 희생으로 이웃에게 봉사한다면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긍정의 마인드와 희망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면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들의 구원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앞서서 예수님을 닮은 길을 걸어갔던 요셉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 은혜로운 회개의 때인 사순시기를 지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어리석음
박상대 마르코 신부
어제 루카복음 단독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에 이어
오늘 복음은 ‘악독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태 21,33-46)를 들려준다.
두 편의 비유에서 처참한 라자로의 삶을 무관심하게 넘겼던 부자와
포도원 지주의 아들까지 죽이고 포도원을 독차지하려 했던 악독한 소작인들은
모두 유다인들의 지도층, 즉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비유된 것이다.
그리고 비유의 내용, 특히 비유의 결말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선고하는 판결문과도 같은 것이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는 마태오복음뿐 아니라
다른 두 공관복음에도 실려있다.(마르 12,1-12; 루카 20,9-19)
이 비유는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1부(33-39절)는 비유자체의 내용을 들려주는 것으로 전개된다.
지주와 지주가 만든 포도원, 울타리, 확, 망대가 언급되고
포도원을 맡아 일할 소작인들이 등장한다.
포도원은 구약성서가 즐겨 사용하던 표현으로서
하느님이 손수 이루어 낸 이스라엘과 그 백성을 암시한다.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이사 5,7a)
울타리는 율법을, 망대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킬 수도 있다.
포도철이 되자 지주가 도조징수를 위해 종들을 보내지만, 족족 죽어 나가는 현상은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이사 5,7b)
라는 이사야의 말에 비추어 볼 때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유혈과 아우성’을 수습하려고 보낸 예언자들이 맞이하는 운명과도 같다.
결국 지주는 자신의 아들을 도조징수를 위해 보낸다.
그러나 이 아들이 상속자임을 바로 알아차린 소작인들이
포도밭을 통째로 가로챌 의도로 그를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 죽여 버린다.
이 대목은 예수의 운명에 비유된 것이다.
포도원 밖이란 예루살렘 도성 밖, 골고타를 암시한다.
이것으로 비유는 일단락된다. 그러나 사건이 종료된 것은 아니다.
② 2부(40-41절)는 지주의 행동을 들려주는데, 이 행동은 거의 보복차원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예수께서 지주의 보복적 판단을
질문과 청중의 대답으로부터 끌어내는 점이 독특하다.(마태오; 루카) 청중들은
“그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제때에 도조를 바칠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41절)이라고 대답한다.
마르코 복음에는 포도원 주인이 스스로 내린 판단으로 언급된다.
아무튼 여기서 ‘다른 소작인’들은 구약의 이스라엘을 초월한 세상의 모든 백성,
즉 신약의 새로운 하느님 백성을 의미한다. 이것으로 사건은 종결된다.
물론 포도원의 새로운 소작인들도 포도 철이 되면
제때에 도조를 납부해야 하는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③ 3부는 비유를 통해 추론되는 결론 부분이다.
청중들과 더불어 이미 명쾌한 대답을 내렸던 유다인의 지도층 인사들은
비유의 악독한 소작인들이 바로 자신들임을 깨닫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예수께서 인용하신 성서구절(시편 118,22-23)에서 모퉁이의 머릿돌은
비록 구약의 건축가들에게서는 버려진 돌이지만,
‘제때에 도조를 납부하는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을
구축하는 초석이 될 그리스도 자신을 암시한다.
이 돌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걸림돌(로마 9,32-33)이 될 것이며,
느부갓네살 왕이 꿈속에서 본 난데없이 날아 들어와
기존의 모든 능력을 쳐부수는 돌(다니 2,34)이며,
새로이 건설되는 신령한 하느님 성전의 중심을 잡는 모퉁이 돌(에페 2,20-22)이 될 것이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구원역사 가운데 아주 중요한 핵심 내용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또 다른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첫째는 포도원의 소작인들이 자기 것도 아닌 포도원을
통째로 가로채고자 하는 무시무시한 욕심이요,
둘째는 도조 징수를 위해 파견된 종들이 가는 족족 죽어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상속자인 자기 아들을 死地로 몰아붙이는 포도원 지주인 아버지의 어리석음이다.
소작인의 욕심은 바로 우리 인간의 끝도 없는 욕심이요,
지주의 어리석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내려지는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어리석음이다.(1코린 1,22-25)
여기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그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든가
‘기준 없는 마구 퍼주기’ 식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무엇보다 ‘정의로운’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이 맡겨주신 것을 깡그리 자기들의 것으로 登記하려는
악한 자들에게서는 그 목숨까지도 앗아가는 분이시며,
예정된 당신의 나라까지도 다른 새로운 백성에게 넘겨주시는 분이심을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때에 도조를 잘 내고 있는가?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21,38)
푸시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라고 읊었습니다.
지금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꿈을 잃지 않고 살라고 노래한 것이겠죠.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간직하고 꿋꿋이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존재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물론 그 꿈이 이루어지기까지 때론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함께 그로 인해 많은 삶의 시련과 고난을 겪게 되겠지만,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21,42)라고
노래할 날이 기어이 오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시105,5) 하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로부터 배척과 거부를 당하시자,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그들의 속내를 들추어 내보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예수님을 붙잡으려 합니다.
그런데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처럼 모든 일은 일어났으며
다만 그들의 악행을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 또한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일의 결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빼앗겠지만,
그 나라는 죽음으로 새롭게 태어날 하느님 백성의 몫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말씀을 보충합니다.
“그들의 잘못으로 다른 민족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고,
그들의 잘못으로 세상이 풍요로워졌습니다.” (로11,12)
우리 역시도 삶의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의 꿈을 마음에 간직하며 신뢰를 주님께 두고 살아갑시다.
예수님은 제자들 곧 우리 모두와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요15,15)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요15,20) 라고
분수 넘는 행동을 자제하도록 다짐하셨습니다.
일은 종이 하지만 종은 단지 주인의 뜻에 따라
충실히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실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자칫 주인의 뜻이나 의도보다 자신의 의도나 뜻이 우선할 때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이 잘한다, 참 잘한다, 했다고 해서 요강 씻어서 찬장에다 엎어놓으면 되겠어요?
행주 빨아서 부엌 바닥 훔치면 되겠습니까?
살다 보면 모자라는 것도 지나치게 넘치는 것도 사실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더욱 남의 집 일을 맡아서 할 때는 그러해야겠지만,
하느님의 집일을 할 때는 특히 일의 결과보다 더 중요한 점은
얼마만큼이나 하느님의 뜻에 충실했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본래 종이란 남을 위해서, 남 밑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을 듣고 그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순종하면 되는데,
이처럼 순종은 종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종의 축복은 그냥 주인이 시키는 일을 잘하면 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주인이 질 것이기에 근심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인의 명령 곧 자신에게 맡겨진 일만 충실히 하면 되지 책임은 주인의 몫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의 축복이라고 느껴집니다.
주인이 자신에게 맡긴 일을 충실히 할 때
그 종에게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처럼 신뢰하고 더 큰 일을 맡기겠지만,
반대로 주어진 일을 충실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하는 종을 향해서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요13,16) 라고 일침을 놓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곧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이며 실제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주인님의 종인데,
‘불충한 종이기보다는 충성스런 종이 되어야 주인이신 주님의 사랑과 총애를 받지 않겠느냐?’
이게 오늘 복음의 요지입니다.
주님은 소작인들을 당신 친구이며 종으로, 당신 자녀이며 일꾼으로 그들을 선택하시어,
포도원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나라의 포도밭을 그들에게 맡겼습니다.
콩 심어라, 팥 심어라, 하고 일절 관여하지 않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다 맡겼습니다.
주인은 소작인들을 믿고 맡겼는데, 그들은 그 주인의 신뢰와 믿음을 저버리고 배반했습니다.
자기 몫의 소출을 받으러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려주고 심지어는 죽였습니다.
주인은 소작인들의 불충한 행동에도 마지막까지 그들의 신뢰를 기대하면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21,37)하며 자기 아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인의 기대를 저버리고 상속자인 아들마저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21,38) 버리고
상속 재산인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리하였습니다.
이 포도밭과 소작인의 비유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너무도 명백해서
해설이고 뭐고 할 필요가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님께서 하신 이 비유의 이야기를 들은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를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고,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고
그들이 두려워서 손을 대지 못했다고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21,45~46참조)
오늘 복음을 함께 묵상하면서, 하느님께서 믿고 맡긴 일에 열심히 일했을지는 모르지만,
종이란 신분을 망각하고 도를 넘어서 자신들에게 주어질 몫에 욕심을 부리거나,
심지어는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장사하는 악한 교회 안의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교회 봉사자들의 처신과 행동을 반성하게 합니다.
물론 교회 안의 일꾼으로 불린 어떤 분들은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압니다.
만일 그런 지탄받고 있다면 마음으로부터 깊이 반성하고 뉘우쳐야 하리라 봅니다.
저는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나라의 포도밭을 가꾸는 일을 부족한 저에게 맡기셨고,
그 일을 하면서 헤아릴 수 없는 은총과 사랑을 베푸셨으며
지금 누리는 이것도 제게 과분한 특은입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부당하게 많은 소출을 내라고 강요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의 뜻대로 최선을 다해서 충실히 일하도록 바라실 뿐
사실 소출은 결코 염두에 두시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사순 3주일의 복음인 성전 정화를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더 깊이 이해되리라 생각됩니다.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전락시키고 그에 따른 이득을 취하는
장사꾼들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향한 예수님의 통렬한 꾸짖음의 반향으로 들려옵니다.
“주님, 저를 당신 포도밭에 일꾼으로 불러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제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최선을 다하여 수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일에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다만 당신 뜻만을 마음에 새기며
성실하고 충실하게 일하겠나이다. 아멘.”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오늘 복음은 포도밭 주인의 행동을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공들여 포도밭을 일구었는지 잘 드러내 주는 표현들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묘사가 확인하여 주는 것은
이 밭의 소유자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주인’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에게서 저항과 반역의 움직임이 생겨납니다.
주인이 자기 몫의 소출을 받으려고 종들을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을 죽여 버립니다.
주인은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종들을 보내지만, 같은 소행이 되풀이됩니다.
주인은 끝까지 사랑과 신뢰로 자기 아들을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아들이야말로 소유권자이기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며 죽여 버립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을 죽이려 하는데,
그가 자신들을 제치고 아버지의 상속자가 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받는 사람에게
학대받거나 조롱당하는 일이 일어나니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세상을 만드셨고 살기 좋은 곳,
포도 열매가 잘 맺히는 곳으로 일구시어 우리에게 내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진심을 조롱하고 그분의 사랑을 회피하여 온 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이 중심을 잃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러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우리 포도밭의 주인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반역과 저항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를 되찾는 것이 사순시기에 우리가 다시 세워야 할 삶의 질서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