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깨치기도 전에 나는 미사 복사를 서던 형들을 따라 어깨너머로 발음도 어려운 라틴어 기도문을 외웠다. 그 덕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첫 영성체와 함께 곧바로 복사를 서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청량리성당 바로 옆에는 꽤나 멋진 현대식 건물의 성바오로병원이 수녀원과 함께 신축됐는데, 그 수녀원에서 매일 새벽 단체로 미사에 오시던 수녀님들 수도복이 퍽이나 멋있어 보였다. 특히 머리를 완전히 가린 멋진 흰 두건과 함께 허리에 매달려 흔들리던 커다란 묵주가 멋져 보여 나도 그렇게 멋지고 커다란 묵주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여태껏 특별히 애착이 가는 묵주는 갖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특별한 감동을 느꼈던 '나의 묵주기도' 추억이 있어서 그 추억들을 나누고 싶다.
첫 번째는 1965년 소신학교에 입학해 날마다 저녁식사 후 바친 묵주 기도다.
전교생이 350명 남짓으로,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6~8명씩 한 그룹이 되어 50여 개 그룹이 일렬로 어두컴컴한 교정을 왔다 갔다 하면서 '따름노래'으로 나눠 묵주기도를 바쳤다. 50년이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그 목소리들과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특히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나 미완성 교향곡이 은은히 흐르는 가운데 라일락꽃 향기가 코 끝을 자극하는 어스름한 저녁의 묵주기도 시간은 행복했던 소신학교 생활의 으뜸으로 기억된다.
두 번째로 나누고 싶은 추억의 묵주기도는 독일이 통일되기 전 독일 하노버대학병원에서 1년을 교환교수로 지낼 때 교포 신자들과 바치던 기도다.
당시 하노버에는 한 달에 한 번 함부르크에 계시던 한국인 신부님이 오셔서 주일미사를 봉헌해주셨는데, 미사 외엔 별다른 모임이 없었다. 그래서 카이스트, 화학연구소, 창원대학에서 오신 교수님, 박사님들과 함께 하노버 교포 신자들을 위한 묵주기도 모임을 만들었다. 교포 신자들은 대부분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에 오신 분들이다.
독일 성당을 빌려 매주 수요일 저녁 성가연습을 하고 묵주기도를 봉헌했다. 당시 새로 나온 성가 271번 '로사리오 기도 드릴때'를 내가 교포 신자들에게 가르쳤고 묵주기도 후 저녁식사를 간단히 했었다. 10여 명이 열심히 성가를 배워 아름다운 목소리로 함께 바친 다락방 묵주기도 역시 20년의 세월이 훌쩍 넘은 지금도 여전히 아름다운 장면으로 남아있다.
해외연수에서 돌아온 후에도 몇 년 동안 그곳 신자들과 연락하며 교회 서적이나 음반을 보내주면서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최근 연락이 끊어져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세 번째는 서울 백병원에 근무할 때 병원 가톨릭 신자 모임 회원들과 같이 청계산 산림욕장에 가서 바친 산상 묵주기도다. 산림욕장을 돌다가 널찍한 쉼터에서 30여 명의 신자 회원들이 원목수녀님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다. 성가 270번 '로사리오의 기도'를 소리 높여 부르며 바치는 우리들의 기도 대열에 산림욕장을 돌던 일반 신자들이 하나 둘씩 합세하기 시작했다. 묵주기도가 끝나갈 무렵엔 그 인원이 무려 50여 명으로 늘어났다.
50여 명 신자들이 합송하던 성모송과 성가소리는 10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그 이외에도 과천본당 성모의 밤 행사를 중앙공원에 로사리오 동산을 만들어 거행했을 때 신자들이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동산을 돌면서 바친 묵주기도 장면도 눈에 선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