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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갇힌 불꽃
 
 
 
카페 게시글
詩의 아뜨리에,.. 애송시 스크랩 물소뿔을 불다 외 / 이선이
동산 추천 0 조회 70 14.05.07 11: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물소뿔을 불다 / 이선이


티벳을 가야겠다는
손금 같은 사연 담은 엽서 한 장
물끄러미 내다보는
오동나무 잎새 사이로
묵소 한 마리 걸어나왔다

유적지 가을하늘을 돌아나가는 바람소리 들릴 듯한 눈망울이
멀뚱하다

저 물소와 함께 산다는 히말라야 高山族은
죽음 곁에 이르러
그 흔하디 흔한
꽃 대신 눈물 대신에
물소뿔을 불어준다 한다

 

우리 사는 동안
가슴을 들이치기만 하던,
바로 그 멍들
다음 生까지는 가져가지 말자고
새로 태어날 슬픔까지를 노래로 날려보내는 것이다

 

사는 동안 한번도 넘지 못했던 얼음산을
훌쩍,
녹이며 넘어가는 것이다   

 

 

 

 

시월의 사흘 / 이선이 



겸허한 새벽이 너에게로부터 왔다
마당의 감나무 첫잎이 질 무렵
수많은 잎사귀들이 죽음에 무심한 동안
삶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올 것이 왔구나하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生에 무엇이 올 것인지
혹은 무엇이 오지 않을 것인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와서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다
말없이 내 망막에 어린 슬픔을 향해
너는 돌멩이 하나 물수제비 날리고 갔다, 나는
자서전이나 인생록을 탐독하는 인간은 아니다
묘비에 새길 글귀에 골몰하는 시인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시월의 사흘은 너의 부음을 타고 와
야윈 손가락으로 내 눈을 찌르며
설익은 푸른 감 하나를 떨구고 돌아선다
아무도 탐내지 않는
땅 위를 구르는 열매, 그 소리는
세상의 낮은 담벼락에 부딪혀
조용히 감잎사귀들을 말아올린다
가을새벽의 부음은
내 생의 어느 굽이에 오지 않을 수도,
올 수도 있다
다만
서른 여섯의 부음은 너무 이르고 낯설다

 

 

가정식 백반 / 이선이

 

 

나는 한때 밥집 여자이고 싶었다
순무를 곱게 절여 벌겋게 생채무칠 줄 아는
밥집 여자의 억척스런 순정을 흠모했음일까
그대의 붉은 목젖 닮은 서해염전
갓구운 간소금을 노오란 속배기에 철철철 흩뿌리며
내 갈기든 삶 조용히 절이고 싶었다, 부다페스트에서
돈도 국경도 바닥나 좌초된 난민이었을 때
떨어진 배낭 하나 끌어안고 도나우 강변 성벽에 앉아
내가 바라본 것은 밥내 자욱한 어떤 쓸쓸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면 숙생의 연기 자욱한 밥 한그릇 올려놓고
세상의 허기든 者들 모여앉아
조용히 들어올리는 수저질이 아니라면
젯상에 올려지는 밥 한그릇은 무엇을 위로한단 말인가
차림표 위엔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을 걸어두고
쌀통 가득 공양미 삼백석을 풀어헤친 청진동 그 집에 앉아
그대 향한 인당수를 퍼올리던 가정식 백반
아슴히 귀밑머리 쓸어올리며
물오른 두릅나물에 신초장를 곁들이는
정붙이 하나 없는 밥집 여자의 늙은 가슴이고 싶었다
나 지금도 밥집 그 여자이고 싶다 
  

 

 

 

 

마당 깊은 집 / 이선이



小寒 지날 무렵, 강원도 산골 폭설에 갇혀 보았지요
마당 안에 무덤을 들여놓은,
빈집이 된 지 오래인 그 집엔 실팍한 거미집 속 독거미만이
하얗게 으스러지고 있었지요

어릴 적, 우리집 남새밭엔
적산강산 살다 가신 감실할매 봉분이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하고 있었지만
죽어서라도 사람소리 흥성하라고 싸리울타리 기웃이 열면 보
이는 남새밭에 모셨다지만
도대체 어떤 쓸쓸함이 무덤을 마당 안까지 불러들였을까 하고
휘날리는 눈발만 그저 사납게 맞고 서 있었는데요
인적도 마을도 아득할 때, 우리 가슴에 봉긋봉긋 솟구치던 그리
움이란 것들 저리 솟아
그리움에 젖 물리다 무덤과 한 살림 차린 걸까요

썩은 서까래 밑
오소소 잔기침 재우며 죽은 듯 살고 있는
외딴 그 집 지나칠 때
오얏씨처럼 말라붙은 가슴에 꽃피는 소리, 젖 도는 소리
저렇게 올망스레 저승살림을 또 차렸구나
내 쓸쓸함까지를 몰고가는 무지막지한 눈바람
등짝을 사정없이 얼리고 말았지요

나도 그 희고 둥근 마당에 하룻밤 묵어가고 싶었지요

  

 

 

 

마흔의 빛 / 이선이 



바람이 오동의 진보라 속꽃 꺾는 소리에 놀라
잠을 놓친 새벽
진 꽃자리 밟고 서성이는 내게
꺼질 듯 떨고 있던 살별 하나가 걸어들어 왔다
그 빛이 내 꽃자리로 흘러들고 난 후부터
굳고 검붉은 내 입술에도 보랏빛 꽃빛 어려와
순한 빛으로 떠다니곤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사람들 속에 섞여 걸어도
나만의 보폭을 일정하게 유지하며 걷게 되었다
그 만큼의 거리나 틈새가 인간적이라고 믿게 되었다
잡담에 몸을 섞어도 혀가 감기지 않았다
거친 말의 덫에서 바람처럼 유유히 걸어 나와
침묵의 엷은 그늘 속에서 혼자 쉴 줄 알게 되었다
혼자 밥을 먹어도 눈치 보지 않고
온전히 밥 한 그릇의 생애에 기댈 수 있었다, 그 만큼
내 허기에 정직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내 몸의 어디에서도 옹이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제 꺾인 희망에 아파하는 일은 없으리라, 아니
옹이에 새겨진 기다림의 나이테가 아프지 않은 것이다
바람처럼 흘러들었다 돌아나가는 한 사람을
말없이 배웅하고 돌아와
조용히 내 후회의 손바닥을 매만질 수 있을 것이다
아플 때 오히려 편안한 마음이듯
나는 고요해 질 것이다

그 빛이 어디에서 왔느냐고
그 새벽이 언제였냐고
아무도 내게 묻지 않았다
세상의 후미진 곳에 홀로 서 있는 벽오동 진보라 속꽃 진 새벽
빈 몸으로 달려온 빛 하나가 내 몸 속에 사뿐히 흘러들었을 뿐

나를 다 지워버린
그토록 희미한 빛!



 

운우지정 / 이선이

 

 

뒤곁에서
서로의 똥구멍을 핥아주는 개를 보면
개는 개지 싶다가도
이 세상에 아름다운 사랑이란 저리 더러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머물러서는 마음도 미끄러진다

평생 바람처럼 활달하셔서
평지풍파로 일가一家를 이루셨지만
그 바람이 몸에 들어서는 온종일 마루바닥만 쳐다보시는 아버지
병수발에 지친 어머니 야윈 발목 만지작거리는 손등을
희미한 새벽빛이 새겨두곤 할 때
미운정 고운정을 지나면 알게 된다는
더러운 정이라는 것이 내게도 바람처럼 스며드는 것이다

그런 날 창 밖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려
춘향이와 이도령이 나누었다는 그 밤이 기웃거려지기도 하지만
그 사랑자리도 지나고 나면
아픈 마나님 발목 속으로
불구의 사랑이 녹아드는 빗소리에 갇히기도 하는데

미웁고 더럽고 서러운 사람의 정情이란 게 있어
한바탕 된비 쏟아내고는 아무 일 없는 듯 몰려가는
구름의 한 생生을 머금어 보곤 한다 


 

 

 

 

 

*******************************************************

 

마음은 먼 곳을 향해 있으면서 매인 몸을 고달파한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럴수록 더 단단히 삶 쪽에 이승 쪽에 매인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였을까? 먼 곳으로 떠나온 사람처럼, 더는 떠날 곳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기로 작정했던 때가, 그래서일까?

밖을 응시하던 눈빛이 내 안으로 향해지면서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존재가 조금 날씬해졌다.

詩란 때로 나를 향해 떠나온 마음들을 훔치는 것은 아닐까?

梵鍾이 저에게서 멀어진 종소리들을 평생 한자리에 서서 기다리듯이,

어쩌면 나를 찾아 참으로 먼 길을 떠나온 마음들을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슬쩍슬쩍 훔치며, 때로 기다리는 시간이 깊어질수록 나 또한

참으로 먼 길을 떠나왔음을 깨닫는 것이 詩는 아닐까.

 

- 시인의 말 중에서

 

 

이선이 시인


1967년  경남 진양 출생
199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서서 우는 마음>

평론집   <생명과 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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