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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님의 신부들 원문보기 글쓴이: 포도원지기
<사 56:9-12> 맹인이요 벙어리 개들이라, 이익과 향락을 추구하는 이스라엘의 파수꾼, 목자, 이사야
1. 배경설명
지금부터 4300전에 있었던 노아의 홍수에 대한 말씀이 창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홍수설화“, ”홍수신화“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설화, 신화가 아니고 실제 일어난 일입니다.
이 홍수 사건이 중국 한자에 그대로 담겨 있고 전세계에 홍수 흔적과 기록들이 있음을 볼때에 분명히 역사적 사실입니다. 왜, 노아의 홍수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은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한 작은 예표들이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홍수심판은 종말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①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는 ”무지개 언약“으로 다시는 홍수로 전 세계를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으므로 지역적인 홍수로 일부 사람들은 죽을 수도 있지만 전세계를 동시에 홍수로 심판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② 그리고 노아의 홍수를 영적으로 본다면 세상 물이 범람하여 많은 사람들이 세상 물을 먹고 영적으로 다 죽게 되는데, 방주 곧 세상 물이 들어오지 않는 구원의 배를 탄 자만이 산다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 영적으로는 세상의 물이 전 세계를 덮고 있는 이런 노아의 시대라고 봅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처럼 일부는 구원을 받고 나머지는 영적으로 다 죽은 자들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는 죽고 육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물을 먹고 영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 이십년이 되리라“ (창 6:3)
오늘날 사람들이 영적으로는 남은 ”백 이십년“의 기간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창 6:3)
언제인지 모르지만 이 긍휼의 때가 다 지나가면 영원한 심판을 맞게 될 것입니다.
▶ 이와 관련된 제가 최근에 꾼 꿈이 하나 있습니다.
이 꿈이 오늘의 말씀을 전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 물이 엄청나게 범람하여 저와 함께 산으로 피한 사람은 살고 나머지 사람들은 엄청난 물에 휩쓸려가는 간단한 꿈이었습니다.
이 꿈은 분명히 무지개 언약을 비추어 본다면 말세에 실제 홍수로 심판하는 내용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이 꿈에서의 홍수와 같은 물은 무엇일까요?
이 꿈은 하나님께서 제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세상 물에 빠져 죽는 영적인 상태, 환경을 말씀해주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 영적으로 높은 고지에 올라간자 만이 구원을 받고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짝하여 세상의 더러운 물, 영적인 죽음을 가져다주는 물을 먹고 마시면 죽는다는 꿈일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 죽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수의 사람들 만이 높은 산에 올라 사는 것처럼 소수 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꿈인 것입니다.
▶ 세상 종말이 올 때에 예수님도 ”산으로 도망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말씀은 실제 종말 때 세상 것에 집착하지 말고 피난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영적으로 세상 물을 마시지 말라는 영적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1:21]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산은 세상 물을 마시지 않는 장소인 것입니다. 오늘날 영적인 수련을 위하여 깊은 산 기도원에 들어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세상 물을 마시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달고 목마름을 해갈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떠나고 세상과 짝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문화에, 세상 조류에, 세상 사상에 빠져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모습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진 영적 죽음 상태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세상의 물을 마시고 자기가 영적으로 죽었다는 사실도 모른체 살고 있습니다. 육신의 호흡이 있음으로 그가 산 자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죽은 자를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현재 터키 지역 소아시아에 있는 2000년 전의 초대교회인 사데교회는 성령으로부터 ”죽은 교회“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죽은 교회는 육신으로는 살아 있지만 그래서 모임도 가지고 집회도 하지만 성령이 떠남으로 죽은 교회입니다. 성령이 더나면 반드시 악령이 역사합니다. 그들은 영적으로는 듣기는 들어도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영적으로 죽은 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맹인이요 벙어리 개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된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한 시대에는 히스기야와 같은 선한 왕도 있었지만 우상숭배가 극심했던 아하스왕과 므낫세 왕이 다스리던 시대입니다. (BC 791-642), 북이스라엘이 망했던 시대입니다.
히스기야, 요시야 왕과 같은 선한 왕들이 산당을 제거하고 바알과 아세라상들을 부수는 종교개혁을 단행했지만 특히 므낫세 왕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열왕기하 23:26]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남유다 왕들은 유다지파의 다윗의 후손인데 ”므낫세“라고 이름 한 것만 보아도 뭔가 아류와 같은 생각이 듭니다.
2. 이스라엘 목자들은 맹인이요 벙어리 개가 되었습니다.
1) 9절을 보면, ”짐승들아 와서 먹으라“ 하나님께서 짐승과 같은 주변 나라들을 이스라엘의 심판을 위하여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짐승들과 같은 나라들은 어떤 나라들일까요? 역사적으로 본다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멸망시킨 앗수르와 바벨론 입니다. 우리들이 영적으로 맹인이되고 벙어리 개가 되면 짐승에게 먹히는 것입니다.
▶ 짐승은 이성이 없습니다. 인격도 없습니다. 자비도 없습니다. 무자비하게 죽이고 뜯어 먹습니다. 앗수르, 바벨론을 통하여 행할 심판이 짐승의 행동과 같이 무자비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범죄하여 침략을 당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는 사례는 참으로 많습니다. 가나안 땅도 죄악이 가득차서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일제 신사참배를 했던 우리나라도 그 죄값으로 북한을 통하여 6.25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 실제 짐승과 같은 나라들, 이웃들도 있지만 영적인 짐승도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목자들처럼 맹인이요 벙어리 개와 같이 되면 짐승과 같은 어둠의 영들이 침략해 들어옵니다. 그래서 삶을 쑥대밭으로 만들게 됩니다. 완전히 영적인 짐승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또 계13장에 기록된 사탄의 조종을 받고 있는 두 짐승과 같은 것들과 그 하수인들이 우리들을 점령하여 괴롭히는 것입니다.
2) 10절입니다. 10절에서는 짐승에게 잡아 먹히게 되는 이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① 먼저 파수꾼들은 맹인이기 때문입니다.
파수꾼은 적군이 어디서 오는지 언제 오는지를 잘보고 사람들에게 나팔을 불어 경고해 주어야 하는 사명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잘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보지 못하는 맹인이니 적군이 앞에 다가와도 소리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 실제로 육신의 맹인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영적인 맹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입니다. (사 6:9, 마 13:14, 막 4:12, 행 28:26)
▶ 육의 눈이 있고 영의 눈이 있음을 우리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신체적 장애로 실제 육의 눈을 뜨지 못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영의 눈을 뜨지 못하는 자가 더 많습니다.
계 3:14-18절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의 눈이 멀었습니다. 그래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하라고 했습니다.
영이 눈이 멀면 영적으로 캄캄한 암흑 가운데 사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 어둠속에 있으면 육의 눈은 떠고 있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빛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눈 먼자의 눈을 떠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많은 눈 먼자를 고치시는 실로암의 기적을 베푸신 것도 (요 9:7,11). 육의 눈도 고치시지만 영의 눈을 뜨게 하는 예표인 것입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눈을 떠게 하여 밝게 보게 하는 ”창조의 근본“ 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왜, 창조의 근본으로 나타나신 것일까요? 태초에 천지가 창조될 때의 땅은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창 1:2). 땅은 영적으로 본다면 흙으로 창조된 사람입니다. 창조시에 가장 먼저 빛을 만드신 이유가 땅이 흑암 가운데 있기 때문에 빛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어두워진 세상에 오셔서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이 세상에 빛이 되시는 일입니다. 창조의 근본이시기에 가능했습니다.
→ 그래서 영적으로 어두운 눈을 가진 자들은 빛되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볼 수 있습니다.
육의 눈도 시력만큼 볼 수 있는 것처럼 영의 눈도 영적인 시력만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시력만큼 남의 영적인 상태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언적인 기도를 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들여주시고 감동주시는 것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는 아직 맹인인 것입니다.
②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들이기 때문입니다.
▶ 성경적으로 개는 경멸의 대상이요 그리스도의 원수요, 거짓 선지자요, 무가치한 자요, 미련한 자요, 악한 사람들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동물입니다.
오늘날도 사람에게 개라고 하면 가장 싫어하는 욕입니다. 전세계 공통적입니다.
▶ 지금은 조금 다르지만 당시에 개를 기르는 목적은 집을 지키거나 양 떼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지키는 방법은 도둑이나 짐승이 오면 짖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개가 짖지 아니하면 일부 나라의 경우에는 보신탕 집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개는 짖어야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과 도둑을 정확히 구분하여 짖어야 합니다. 아무나 짖는 것도 문제입니다. (아무나 짖는 우리 아파트 옆집 개)
짖어도 적군인지 아군인지를 구분하고 짖어야 합니다.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 10절에 보니가 짖지 못하는 이유가 “무지해서” (히, 로 야다)입니다.
무지해서, 알지 못해서 짖지 못하여 벙어리 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구분이 안되는 것입니다.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모릅니다. 사탄의 전략도 모릅니다. 무엇이 우상숭배인지도 잘 모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도 잘 모릅니다. 짖어야 되는 기준인 하나님 말씀도 잘 모릅니다.
→ 그리고 짖지 못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10절에, 그들은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지해서와 같은 맥락이지만 영적으로 잠자고 있음을 세가지 표현으로 한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영적으로 잠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개가 정신없이 잠을 자고 있는데 어떻게 짖겠습니까?
개는 소리에 예민해야 하고 냄새에 예민해야 합니다. 그래야 알고 짖을 수 있습니다.
소리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탄의 음성도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의 코를 가져서 사탄의 더러운 냄새를 맡아야 합니다. 실제 영의 코를 가지신 분들은 어둠이 다가오면 역한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아무튼 잠은 영적인 예민성을 떨어뜨립니다.
너무 깊게 잠이 들어 누가 메고 가도 모를 정도입니다. 사탄. 더러운 귀신이 들어가도 나가도 모르고 있습니다. 깊은 잠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라고 하셨습니다 (마 24:42, 25:13, 막 13:33, 눅 21:36)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깨어 있어야 상황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은 영적인 시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특히 목자들, 주의 종들이 잠을 자고 있으니 본인도 짐승에게 잡혀갈 뿐만 아니라 따르는 성도들도 다 잡혀갑니다. 영적인 이리들에게 잡혀 먹힙니다.
그래서 수많은 이단에 빠져들어가고 있습니다. 귀신의 역사인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때에 거짓 선지자기 기적을 행하면 다 넘어가는 것입니다.
▶ 오늘날 애완견은 대부분 집을 지키기 위해서 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짖어도 되고 안 짖어도 됩니다. 오히려 짖으면 시끄럽다고 싫어합니다. 그저 꼬리 흔들고 따라다니면 됩니다.
애완견을 넘어 이제는 짐승들까지도 애완동물이라 하여 기르고 있습니다. 돼지도 기르고 뱀과 같은 파충류도 기르고 곤충도 기르고 서로 분양까지 해줍니다. 성경적으로 대부분 부정한 동물들입니다. 어떤 것들은 독이 있어 치명적입니다. 사람을 물어 죽일 수도 있습니다.
→ 저는 짐승과 파충류들을 키우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을 욕하거나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저도 강아지를 무척 좋아합니다. 동물들도 사랑합니다. 더구나 죽이거나 잡아 먹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개를 사람처럼 대하지는 않습니다. 개를 내 자식이라 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절대 유산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장례식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들의 엄마, 아빠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개는 사랑스럽지만 그저 개로 대할 뿐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동물을 사람처럼 대하는 이런 현상을 보면서 오늘날 영적인 상태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짐승들과 함께 친밀하게 침대에 자고, 먹고, 입맞추고, 아이들을 태워야 하는 유모차, 포대기에 개를 태우고 넣고 다니는 모습은 영적인 짐승들과 친밀해진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짐승들이 적군인지 아군인지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짖을 수도 없고 짖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 성경에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이 나옵니다. 짐승들입니다. 그것들은 죽거나 멸망당하는 자들의 시체를 띁어 먹는 존재들입니다 (삼상 17:44, 왕상 14:11, 16:4, 렘 7:33, 15:3, 19:7, 겔 32:4)
영적으로 본다면 그들은 사탄이요 귀신들입니다. 시체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의 살입니다. 뱀이 먹고 사는 흙입니다 (창 3:14)
그래서 공중의 새와 짐승들과 가까이 하는 모습은 영적으로 죽은 자의 시체를 먹는 모습으로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짐승과 하나되어 짖지 않는 개가 된다면 그는 영적으로 죽은 자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주의 종들은 사탄의 역사에 대해 계속 짖어야 합니다. 짖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짖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축복 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하면 저주가 있음도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리심 산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신 11:29)
큰일 났습니다. 지금 시대는 ”평안하다, 평강하다“의 시대가 아닙니다. (살전 5:3, 렘 6:14)
다 무지하니 사명을 잃어 버리고 짖어야 하는 이유도 모르고 짖을 때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짐승과 함께 사니 적군이 아니라 같은 편입니다. 그래서 짖을 필요가 없게 보이는 것입니다. 지금은 짖을 때입니다.
이스라엘 목자들은 개는 개인데 짖지 못하는 개인 것입니다. 오늘날도 영적으로 무지하여 짖지 못하는 주의 종들은 당시의 이스라엘 목자들과 같은 것입니다.
▶ 종말에는 짐승들이 활동하는 시대입니다.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와 같은 사람 짐승 뿐만 아니라 영적인 뱀들이 우글거리는 시대입니다.
사탄의 전략이 무엇인지 아세요. 악에게 점점 익숙하게 하는 만드는 전략입니다. 죄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 실제 짐승들과 친밀하고 익숙하게 하여 영적인 짐승들을 경계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편인 줄로 알게 하는 것입니다.
→ 게임을 통해서 총으로 쏘고 미사일 쏘고 칼로 죽이고 하는 이런 익숙함에 빠져 있으면 실제로 전쟁에서 사람들을 직접 총으로 쏘는데 주저함이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 컴퓨터, 큐알코스, 바코드 등에 익숙해지면 마지막 때 짐승에게 받을 666표를 거부감 없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익숙함으로 우리들의 경계를 무너뜨립니다.
→ 차량 네비게이션, 핸드폰 위치 추적장치 등도 적그리스도 짐승이 운용하는 대형슈퍼 컴퓨터로 여러분들을 감시하는데 익숙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 동성애만 보더라도 벌써 우리들은 많이 익숙해 졌습니다.
과거에는 당사자가 부그러워하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떳떳하게 자신을 나타내 보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해 지고 말았습니다. 종말에 동성애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 사람처럼 만연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해 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에게 익숙한 그것이 종말에 있는 행동, 생각, 현상이 아닌지 생각이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3) 11절입니다. 더구나 개들은 탐욕을 좋아합니다.
개들에게 고기 한덩어리 던져 보십시오. 서로 먹고자 어르렁 거립니다. 어미 개와 새끼 개에게 주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투며 이익을 위해 사는 모습인 것입니다.
족한 줄을 알지 못합니다.
▶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을 들어 쓰시는냐 하면 지금 어떤 상황속에서 자족하는 자를 들어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자기에게 이것도 부족하고 저것도 부족하고 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의 일을 맡겨도 자기의 부족함을 채우기에 급급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지금 만족하는 사람을 들어 쓰신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사역을 통해 자기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어떤 상황 속에서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으며 디모데에게도 자족해야 경건이 큰 이익이 된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디모데전서 6: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자족으로 경건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목자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기 때문에 다 제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익을 추구하다보면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는 길이 아니라 자기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몰지각해서 그런 것입니다.
몰지각은 무지하다는 말과 같이 ”로 야다“입니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4) 12절 입니다, 더구나 오만 향락에 빠져 있습니다.
포도주에 취해서 말입니다. 독주를 잔뜩마셔 취해서 말입니다.
노아의 시대에,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에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살았습니다 (눅 17:27). 종말에도 그렇 것입니다.
술이 취하여 제 정신이 아닙니다.
성령에 취하지 않고 세상 술에 취했으며 향락에 취했으며 세상 유흥에 취한 것입니다. 그러니 영적으로 이제는 아무 감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라고 하는 것입니다. 취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소주 세병 마셔도 안취히십니까? 한잔 마시면 한잔만큼 취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둔해지는 것입니다.
세상 향략에 빠져 있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생가하지 않고 오직 오락을 위해 좇아다닙니다. 교회에 간혹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모아서 여기 저기 놀러다닐 생각만 하고 맛집만 검색하고 다닙니다. 교회를 위하여 성도를 위하여 염려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 탐욕과 향락은 영적인 잠자는 자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맹인되고 벙어리 개가 된 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의 좋지 않는 열매요 현상인 것입니다.
<맺는 말>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이 당시의 이스라엘 목자들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에도 영적인 맹인되고 벙어리 개가되면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어 누구나 짐승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짐승들아 와서 먹으라“ 하나님께서 짐승들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과 그 쫄개들, 귀신들이 우리들을 완전히 점령하여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육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잠을 자면 파수꾼이 될 수 없습니다.
→노아가 술이 취해서 결국 함의 후손인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창 9:25)
→ 예수님의 제자들이 깨어 있지 못하니 시험에 들어 예수님 십자가 지는 순간에 다 도망갔습니다 (마 26:40-41)
성경은 끝임없이 ”깨어 있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 24:42, 벧전 5:8)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삼길 자를 찾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렇지 않으면 오늘 이스라엘 목자처럼 맹인이되고 벙어리 개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의 삶이 맹인이요 벙어리 개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주님 안에서 새롭게 될 소망이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도 이방인을 ”개“로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이방인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자들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로 하나님 보실 때에는 개와 같은 자들입니다.
→ 이방 땅인 두로와 시돈지방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들려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마 15:2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개와 같이 취급을 받았음에도 예수님이 유일하게 자기 딸의 구원자임을 믿고 부스러기 은혜라도 구했을 때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 이와 같이 비록 영적으로 오늘 말씀처럼 개와 같은 자라 할지라도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이 예수님 앞에 다시 나아와 믿음을 보인다면 그는 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빛 되신 예수님께 나아오면 그 빛으로 인하여 다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바다“ 의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 다시 온전히 나아옴으로 맹인에서 보는 자로, 짖지 못하는 자에서 짖는 자로 참된 파수꾼, 목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