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차도 많지 않고 전차도 주행속도가 느려, 사람은 아무 데서나 길을 건널 수 있었는데 아이들은 전차 레일에 큰 못을 갖다 놓아 납작하게 만드는 장난을 했습니다. 전차가 지나간 다음, 조금 있다가 가서 집어 와야 하는데 금방 잡으면 뜨거워서 손을 데기 때문입니다. 이 납작해진 못은 일시적으로 자석의 성질을 띈 것으로 기억됩니다.
구멍가게와 영화포스터.
뻥튀기. 경상도 말로는' 박상'튀기기라 그랬죠. 펑소리 직전 두 손은 귀로 가고 가슴은 콩닥콩닥... 냄새만으로도 구수했죠.
60년대의 신발장수
60년대의시장의 사기전
60년대서울 도봉동의 소달구지
60년대 서울종로거리
모든 것이 궁핍하고 어려운 시절에 식수도 귀하였다. 초기엔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 60년대의 서울 공동수도
동네꼬마들 유일한 놀이
60년대의 찰살떡
60년대의 제주 모슬포 빨래터
60년대의 대구 거리
60년대의 서울역앞
1950년대 전쟁 직후
우산고치는 아저씨
굴뚝청소부
60년대 부산광복동 거리
60년대 대구서문시장
60년대의 시발택시의 행렬[서울역]
60년대의 창경원
60년대 서울역앞의 전차
60년대 명당성당
60년대의 명동거리
60년대의 남대문로
그 시절엔 비가 오면 진창길이 되어 양말은 말할 것 없이 바지 가랑이는 흙투성이가 되었다.
집집마다 땔감인 장작을 쌓아 놓는 것도 중요한 일과였다.
그 시절에 기와집이 있던 곳은 부자 동네였다. 잘차려 입은 아낙들이 나들이 가는 모습.
그 시절의 헌책방. "아저씨, 표준전과가 좋아요? 동아전과가 좋아요?" "손때 덜 탄게 존거지 머!"
중절모에 군화를 신은 노점상. 노점 손수레의 바퀴는 드럼통의 뚜껑을 잘라 사용했다.
그 시절의 싸전.
곡마단 선전. 그 시절에 서커스단이 들어오면 곡마단 이동선전대가
손님들을 끌어 모으려고 요란하게 북치고 꽹가리치고 색소폰 구성지게 연주하였다.
瑤池鏡(요지경) 요지경 속에 세상은 있었다.
그 시절, 서울 파고다 공원의 사진사.
아래의 사진은 1968년도 안양 석수동
어른이 건 꼬마들이 건 여름 최고의 즐거움
미군들이 주는 쵸코렛 기다리는 꼬마들
오빠가 여동생을 위하는 마음
누나가 남동생을 위하는 마음
엄마가 아들을 업고 동네 나들이
나물케어 집에 가는 아낙네들
동네 수동 공동펌프
동네 야산 빨래터
깨끼는 싸고, 하드는 고가
돈 모자르니 깨끼 먹을수 밖에~ㅋ
아낙네들의 유일한 즐거움인 잡담
야시장 가는길
부자가 이사와 집 헐고 새집 짓기
동네시장 맘씨착한 장사하는 아줌마
개봉박두
홀애비 애 태우고 장보러 가기
아래 사진은 60년대 최고의 오락문화
약장수
무료극장
60년대의 아동만화
김정호 사진
김인순
교련발표회
통키타 여행
서수남 하청일
임국희
롯데껌 선전
60년대 선풍기 광고
65년대 해운대
지금으로 부터 40여년 전만해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현재 50대 전후로 아련하게 생각 나던 어린시절 모질게도 가난했던 그 시절이였지만 그래도꿈도 많았던 그 시절의 이야기 지금 생각하면 그시절이 그리워라. 어렵던 그 시절 서민들을 울리고 웃겼던 변사의 목소리. 마을 어귀에 유랑극단이나 서커스단의 북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마을은 이내 축제분위기에 휩싸인다.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스러져간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두 주먹 불끈 쥔 우리 서민들에게 유랑극단이나 서커스단의 북소리만큼 반가운 소리가 또 있었을까. TV도 없고 영화도 흔치 않던 그 시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희미한 불빛 아래 모여 앉아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정이 넘치고 희망이 가득한 시기였다. 그리운날 저녁에..
첫댓글 우리 어렸을때 그모습 그대로구만아 옛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