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해 바야 할 거는 다 해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아직도 못해 본 것이 많지만 계 중에 ‘졸도’를 못해본 것 같다. 그렇다면, 나로선 그렇게 자주 쓰지는 않고 있지만 많은 인간들이 흔히 애용하고 쓰는 ‘아, 졸도(기절) 하시겠다!’라는 말의 진짜 뜻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 말을 간혹 내가 스스로 쓸 때는 당연하거니와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 말을 이해해야 하는 고충으로 인해 부끄러움이 마음으로 물결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졸도해봤음 하는 것이 요즘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누가 날 졸도 좀 시켜줬음. 누군가가 아님 그럼 무엇이든 날 졸도 시켜줬음……
졸도의 원인은 다양한데 심장이 나빠서 그렇기도 하고 신경계 질환이나 대사성질환, 호흡기 질환 등등 무지하게 많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감정적인 스트레스에 의해 만들어지는 졸도를 말한다. 다른 원인에 의한 졸도는 극구 사양합니다.
졸도를 원하는 사람이 별난 사람인 것 같고 내가 그러고 있으니 내가 별난 사람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졸도를 원하는 사람이 이래저래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졸도 하고 싶은 것은 모든 연인들의 로망이다. 또 내 경우와는 다르지만 빨강머리 앤의 소원도 졸도를 해 보고 싶은 것이었다.
빨강머리 앤은 기절하기가 소원이었다. 앤이 기절하고 싶었던 것은 당시의 아름다운 여성은 대부분 졸도를 수시로 하곤 했는데 자신도 아름다운 여자가 돼서 낭만적인 분위기를 그리며 졸도를 하고 싶었던 이유에서이다.
당시 아름다운 여성이 왜 수시로 기절했을까 하는 것은 그녀들이 입는 코르셋의 부작용에 의해 기인되었다. 코르셋은 개미 같은 허리를 만드는데 필수적인 것으로서 이것에 의해 요즘 말하는 S라인이 완성될 수 있어 대부분의 여자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코르셋을 착용하면 복부와 흉부를 압박하게 되어 호흡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게 되어 두뇌로의 산소 공급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당시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은 소녀 시절부터 너무 과도한 착용으로 흉부와 복부 자체가 기형이 되어 조금만 흥분하면 산소 부족으로 수시로 졸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수시로 졸도하는 것이 여성성을 자극하는 한 방편이 돼 남성으로 하여금 보호본능을 일으키게 하는 것도 플러스적인 이유가 됐다. 파티에서 여성 한 명이 졸도 하면 순식간에 파티장은 썰렁 또는 그 반대의 분위기로 바뀐다. 상당히 극적이다.
내가 졸도를 원하는 이유는 물론 빨강머리 앤과는 큰 거리감이 있다. 아까 얘기한 데로 ‘졸도 하시겠다’의 근본적인 뜻을 체험하고자 하는 것부터 시작된 생각이지만 졸도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 졸도에는 대단히 극적인 반전의 요소가 있고 드라마틱한 등장요소가 되는 것이며 필요에 따라 아주 요긴한 역할을 할 수 있는 프로세서가 될 수 있다는 다소 이성적인 판단이 덧붙여진 바에 따른 것이다. 또 졸도 자체를 야기시키는 그 폭발적인 요소의 체험은 아무나 할 수 없다는 동경이 있는데 수많은 언론보도에 따르면 졸도에는 항상 극적인 요소가 있다는 사실이 강조되곤 했고 내가 그 극적인 요소를 경험해서 졸도의 상태에 이르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것이 분명했다. 한번쯤은 해봐야 되는 거 아닐까.
졸도에도 일종의 Ambivalence(양면가치 병존)의 속성이 드러나고 있다. 즉 졸도 자체로 일단락이 주어지만 동시에 곧 새로운 시작도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졸도의 대단한 매력 포인트가 되고 굉장한 에너지를 분출해 내는 역동의 시점으로 정하고 싶은 것이다. 졸도는 정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지만 언제나 정신 없이 돌아가는 세상에 구차한 존재가 아니고 적극적인 존재로 작용한다.
이런저런 싸움판에 한 명이 갑자기 졸도 해 버리면 그 판은 일단 끝을 맺게 된다. 이 경우 졸도는 강력한 속도조절 또는 완급기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천연장치가 될 수 있다. 이것을 잘 이용한다면 불리한 상황에서 역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고 또 억지로 상황을 종료시키기까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졸도를 유의 적절하게 잘 운용한다면 곳곳에 벌어지는 요즘 같은 개떡 분위기를 적당히 극복할 수 있는 좋은 윤활제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계에도 졸도는 적절한 면에서부터 극적인 경우까지 다양하게 응용되고 있다. 집에서 키우는 개와 함께 너구리를 잡은 적이 있다. 너구리는 적당한 시점에 이르러서 완전히 죽어버린 것 같은 제스처를 썼는데 개와 나는 완전히 속았다. 죽은 줄 알고 잠깐 한 눈을 판 사이 너구리는 재빠르게 사라지고 말았다. 너구리는 죽은 척하는 졸도의 상태로 들어갔고 상황이 좋아지자 깨어나 재빨리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다. 파리도 마찬가지의 행태를 보인다. 파리는 죽은 척하다가 순간적으로 틈을 노려 날라가 버린다.
그래서 간혹 필요하면 가끔 씩 졸도를 하는 거죠. 특히 개 거품 물어야 하는 개떡같은 상황일 때 개 거품 물지 말고 깨끗이 졸도해 버리고 마는 거죠. 그 상황을 무력하게 만들고 멋있게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 되지 않을까.
다시 빨간머리 앤에게로 돌아간다. 그렇게도 기절하고 싶어하던 앤은 드레스입고 폼나게 파티를 하다가 연약하게 졸도하는 것이 아니고 조시 파이에게 지기 싫어서 위험한 게임을 하다가 지붕에서 떨어져서 기절하고 만다. 어쨌거나 경축, 앤 소원성취!
정말이었다. 앤은 고통을 참지 못해 소원을 빌고 소원을 이루었다. 졸도시켜주소서! 앤은 죽은 듯이 기절하게 됐다. 그러나 앤의 마음은 이후로 달라진다. “... 게다가 절 불쌍히 여기실 만큼 충분히 벌을 받았어요. 아줌마. 기절하는 것은 전혀 좋지 않았어요. 의사 선생님이 내 발목을 치료할 때 까무러치게 아팠거든요.” 이제 앤은 기절해봤기 때문에 이제 마음대로 “졸도 하시겠다”는 말을 뇌까릴 수 있다.
앤처럼 졸도를 하지 않았는데도 졸도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하는 중 급변화가 일어났다. 내가 졸도를 하고 마는 것은 결코 상선약수(上善若水)가 아니라는 점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경우에 따라 어떤 사람을 졸도 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 졸도하시겠다’가 아니라 속으로 주문을 왼다. ‘이놈아 졸도하라!’고 하면 이놈이 졸도해 버리고 마는 파워 그걸 얻는 것이지 싶다. 상대에 의해 내가 졸도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꼴 보기 싫은 놈들을 졸도시켜 팍팍 바닥에 철썩 떨어뜨리고 싶은 것이다. 일갑자 이상의 내공이 필요할 것 같다. 이걸 무슨 초식이라 불러야 하나. 얼마나 멋진 신세계일까.
드디어 내가 그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이 카페에 다시 올릴 테니까 내게 부탁해라 내가 당신이 지정하는 년 놈 들을 모조리 졸도 시켜버려 줄게. 수고비? 그럼 수고비는 내놔야지. 아무리 그래도 일단 나 스스로의 졸도는 한 번 해보고 싶다. 물론 최고의 경우는 천년공주의 품에서의 졸도겠지만……
졸도할 만한 음악 하나 올린다~~~
첫댓글 끊임없이 처마밑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느껴지는군요. 이 곡이 졸도할 만 한지에 대해서는 좀 더 들어보고.....
졸도하는 것과 필름 끊기는 것의 차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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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근깨 빨강머리 앤의 추억이 새록새록합니다. 길버트가 테리우스보다 제게 먼저 왔었죠. 두 남자를 놓고 심각한 비교와 갈등을 겪었던 그 시절이 떠오릅니다. 졸도할 만큼 순수했던 그 시절요. 졸도 졸도 주문하면 진짜 졸도 하는 수가 있습니다.
전 테리우스보다 그 안경낀 귀여운 남자,이름이 뭐드라...좋아했었는데.
동영상...정말 아름다운 입맞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