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도 잠깐 언급하였지만, 안동지방의 정자는 대부분 방을 갖추고 있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특징은 퇴계 선생께서 끼친 성리학의 영향을 크게 받아 처사적 도덕 함양과 선현에 대한 추념의 기능이 정자에 크게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자연경관에 대한 풍류 공간, 성리학적 도덕 함양을 위한 수행 공간, 교유와 모임을 위한 사교 공간, 선조나 선현에 대한 추념 공간, 내방객을 맞이하는 접빈 공간(별당의 기능) 등으로 기능이 다양하게 분화되거나 혹은 그 몇 개의 기능이 공유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안동지방 정자가 갖는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이번 호에 답사하는 임청각의 군자정이다.
임청각은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종가로 독립운동의 역사적 산실로 잘 알려져 있다. 고성 이씨 대종가인 임청각은 영남산 기슭의 비탈진 경사면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아 안채, 중간채, 사랑채, 행랑채와 군자정 등의 건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다. 현존하고 있는 우리 건축물들은 임진왜란 때 거의 파괴되어 대부분 17세기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임청각과 같이 규모가 큰 집이 임란 이전에 지어져서 온전히 남아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 집은 오래되고 거대할 뿐만 아니라 후대의 다른 살림집과 확연히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을 갖는다. 남아 있는 부분만도 1층 50칸, 2층 12칸의 큰 규모로 후대의 한옥이라면 적어도 5채의 독립 건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 집은 별채인 군자정을 제외한 모든 살림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하늘에서 보면 마치 불완전한 용(用)자와 같이, 5개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기와지붕의 선들이 이어진다. 평면 구성만도 밀집되고 복잡한데, 경사지를 활용한 3차원적 구성은 더욱 복합적이다.
임청각이란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구절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에서 따왔다. 군자정의 정침 임청각은 건물의 규모가 워낙 방대(尨大)하여 ‘도깨비가 세운 집이다.’라고 하는 전설(傳說)과 이 집은 예로부터 삼정승이 태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정승이 태어날 동북방의 방을 특별히 영실(靈室)이라고 부른다.
임청각에 딸린 별당형 정자인 군자정은 양반가의 별당형 정자 건축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丁’자형의 지붕과 평면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건립연대는 군자정 중수기에 의하면 안동 고성이씨 입향조인 영산현감 이증(李增)의 셋째 아들이며 귀래정을 지은 이굉(李浤)의 아우인 이명(李洺)이 1515년(중종10)에 임청각을 지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정자는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1519년의 일이다.
평면구성은 ‘丁’자 형태이다. 구조는 서쪽에 1칸 크기의 마루방을 가운데 두고 앞뒤로 2칸 크기의 온돌방과 1칸 크기의 온돌방을 배치했으며, 일렬로 늘어선 이들 방과 접하여 동쪽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대청을 꾸몄다. 방과 대청 주위에는 서쪽 뒷방의 좌측과 뒷면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 툇마루를 두고 계자난간을 둘러 품격을 높였다. 건물의 주위에는 쪽마루를 돌려서 난간을 세웠다. 정자 옆에 연지(蓮池)를 조성하여 군자를 표상하는 연꽃을 심은 것이 군자정의 건립 취지를 배려한 멋진 구상이라 할 수 있다. 군자정은 안동부성의 지근거리에 있으면서 교통과 물산의 내왕이 빈번한 길목에 위치했기 때문에 내방객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모임의 장소로도 더없이 좋은 위치였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군자정이 클 수밖에 없었고 그 기능도 풍류, 회합, 접빈 위주로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자를 ‘군자정’으로 한 것은 이종악(虛舟 李宗岳. 1726~1773)이 주도한 문회계(文會契)에서 밝히고 있는데, 『논어』의 “군자란 글로써 친구와 만나고, 친구는 인(仁)으로써 서로를 북돋운다. [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란 구절과 관계가 있다. 이 글 중 문회(文會)와 보인(輔仁)이라는 명제는 군자정의 역사적 기능과 이 집안사람들의 행동양식에 감추어진 이정표로 볼 수 있다.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청각과 군자정의 옛 모습은 "허주부군산수유첩(虛舟府君山水遺帖)"에 전하고 있다. 이 그림첩은 자신의 호를 허주(虛舟)라 할 만큼 뱃놀이를 좋아한 이종악(임청각의 11대 종손)이 남긴 것이다. 선생은 1763년(영조 39) 4월 4일부터 8일까지 닷새 동안 임청각 앞에서 뜻이 맞는 집안 친척과 지인과 함께 배를 띄웠다. 뱃놀이의 여정은 임청각에서 시작하여 낙산(樂山)의 선찰(禪刹)에 이르는 왕복 60km에 달하는 반변천 주변의 12명승(안동 시내, 임하, 임동, 길안의 12명승)이었다.
화첩은 출발지인 임청각 앞을 그린 제1도 동호해람(東湖解纜)에서 마지막 반구정 앞에서 선유를 마무리하며 그린 제12도 반구관등(伴鷗觀燈)까지로 반변천의 명승을 12폭 화폭에 남긴 귀중한 자료이다. 원소장자는 고성이씨 임청각 종중이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위탁하여 관리하고 있다. 원본의 형태는 첩책(帖冊)이며, 규격은 가로 25cm 세로 35cm이다.
산수유첩을 남긴 허주(虛舟) 이종악(李宗岳) 선생의 자(字)는 산보, 호는 허주, 본관은 고성이다. 1726년 고성이씨 대종택인 임청각에서 이선경(李善慶)과 학봉고가에서 시집온 문소김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난 선생은 1773년 4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학문과 예술로써 자오(自娛)했던 강호의 처사였다.
임청각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은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이다. 선생은 이 가문의 가장 혁신적인 인물이다. 퇴계학파의 정통을 이은 안동의 큰 유학자로서 을사늑약 때부터 의병 활동과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11년 노비를 해방하고 조상들의 위패를 묻은 뒤 서간도에 망명, 만주 땅에서 74세로 운명할 때까지 무장 독립 투쟁에 헌신했다. 노비 해방과 제사 철폐는 정통 유림에게 있을 수 없는 패륜이다. 심지어 종손으로서 종가인 임청각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그러나 그는 군자정의 주인답게 진정한 ‘군자’였다. 군자란 누구인가? 세상의 문제와 해답을 깨달은 사람, 더 나아가 깨달음을 온몸으로 행하는 지행합일의 인간이다.
去國吟 조국을 떠나며 |
山河寶藏三千里 더없이 소중한 삼천리 우리 산하여 冠帶儒風五百秋 오백년 동안 예의를 지켜왔네. 何物文明媒老敵 문명이 무엇이기에 노회한 적 불렀나. 無端魂夢擲全甌 까닭없이 꿈결에 온전한 나라 버리네.
已看大地張羅網 이 땅에 그물이 쳐진 것을 보았으니 焉有英男愛髑髏 어찌 남자가 제 일신을 아끼랴. 好佳鄕園休悵惘 고향 동산에 잘 머물며 슬퍼하지 말지어다. 昇平他日復歸留 태평성세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물리라. |
『허주부군산수유첩』의 제1도인 ‘동호해람(東湖解纜)’이다. 허주 일행이 임청각 앞 동호에서 선유를 시작하는 1763년 4월 4일의 장면을 그린 것이다. 산과 나무에 봄기운이 완연하다. 그림 뒤로는 고성이씨 대종택인 임청각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고, 오른편에 보이는 탑은 법흥사지 7층 전탑이다. 동호 드넓은 백사장과 낙동강에 나룻배가 닻을 내리고 도포에 갓을 쓴 허주 일행이 출발하기 직전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이 그림은 선유의 출발을 묘사한 것이지만 임청각과 법흥사지 7층 전탑 등 주변의 경관을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어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배를 띄운 곳이 견항(개목나루)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