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52) 시인이 만들어낸 소리 - ① 청각적 이미지를 만드는 능력/ 시인 이형기
시인이 만들어낸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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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청각적 이미지를 만드는 능력
시인은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고 또 마땅히 표현해야 할 사람이다.
시인이 표현해야 할 대상 중에는 ‘소리’도 포함되어 있다.
이 세상, 아니 이 세계는 무수한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면 거리를 내닫는 자동차 소리, 공장에서 돌아가는 기계 소리,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말소리,
전화벨 소리,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 바람 소리, 지저귀는 새소리 등이 끊임없이 우리의 고막을 울리고 있다.
이 밖에도 얼마든지 예로 들 수 있는 소리들이 일시에 완전히 사라져버린다면
그때의 세계는 결코 정상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소리는 세계를 세계로 있게 하는 필수적이고도 매우 중요한 구성 요소 중 하나이다.
세계의 표현자인 시인이 어찌 그러한 소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소리든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소리가 자기에게 어떻게 들리고 있는가를 먼저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바람 소리를 예로 들어보자. 당신에겐 그 소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들리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망설이지 않고 즉각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시인이 되려면 그런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소리를 찾아내어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의 그 소리에 대한 언어 표현을 청각적 이미지라 한다.
이것은 이미지인 만큼 그것은 실재하는 소리가 아니라 시인의 상상 공간에 떠오른 소리이며,
따라서 개성적으로 창작된 소리이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소리의 영역에 있어서도 이처럼 개성적인 상상의 소리,
즉 뛰어난 청각적 이미지를 만드는 능력이 요구된다.
실제로 시인들은 많은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한국시의 청각적 이미지 중에서는 김광균이 쓴 ‘눈 오는 소리’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표현이 나오는 그의 시 〈설야(雪夜)〉를 보자.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찬란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김광균, 〈설야〉 전문
이 시의 4연은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을 들려주고 있다.
그 소리는 물론 시인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이미지로의 소리이다.
그리고 그 소리가 실제로는 귀에 잘 들리지 않는 한밤중에 눈이 오는
소리를 표현한 것임은 구태여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여자가 옷을 벗을 때 사그락사그락하고 소리가 난다면 그 옷은 화학섬유로 된
케주얼복일 수도 없고 풀기가 다 빠진 헌 옷일 수도 없다.
비단으로 된 한복, 새 옷인 것이다.
그러니까 옷을 벗고 있는 그 사람은 고전적 기품을 지닌 우아한 여자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한밤중에 여자가 옷을 벗는다는 것은 에로티시즘을 동반하는
어떤 종류의 낭만적 연상을 자아내는 일이다.
이처럼 내포된 의미가 다양하고 오묘한 소리를 김광균은 눈 오는 밤에 듣고 있다.
듣는다고 했지만 사실 그 소리는 객관적인 소리가 아니라
시인이 상상력을 발동해서 만들어낸 눈 오는 소리의 이미지이다.
김광균의 시 〈설야〉 자체는 내용이 너무 감상적이어서 그다지 좋게 평가할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눈 오는 소리, 즉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는 그 이미지만은 빛나는 탁월성을 지니고 있다.
이 시는 바로 그 이미지 하나 때문에 생명력을 유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는 “평생 동안 여러 권의 책을 쓰는 것보다
하나의 훌륭한 이미지를 만드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 말은 이미지의 중요성을 강조한 극단론이지만, 〈설야〉에 나오는 눈 오는 소리는
시에서 뛰어난 이미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되새겨보게 하는 하나의 좋은 본보기이다.
이미지를 중시하는 시인들을 흔히 이미지스트(imagist)라고 부른다.
그리고 세계문학사에서는 영국의 비평가이자 시인인 토머스 흄이
1908년 런던에서 ‘시인클럽’이란 모임을 만들어 이미지즘운동을 일으켰다고 보고 있다.
에즈라 파운드는 그때 그 이미지즘운동에 참가했던 지도자적 시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30년대의 모더니스트들이 이미지즘운동의 영향을 받았는데,
김광균도 모더니스트 중의 한 사람이다.
< ‘이형기 시인의 시쓰기 강의(이형기, 문학사상, 2020)’에서 옮겨 적음. (2021. 6.27.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52) 시인이 만들어낸 소리 - ① 청각적 이미지를 만드는 능력/ 시인 이형기|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