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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어소에 전시된 밀랍인형.
어린 왕을 찾아온 신하가 절을 할 때에는 이렇게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고 한다.
왕은 고개를 떨구고 용안을 마주 볼 수 없는 신하는 더 송구스러워,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울음을 감추었을 것 같다.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가슴 또한 아파지는 장면.
<단묘재본부시유지비>
'이곳은 1457년 6월 22일 조선왕조 제6대 임금인 단종대왕께서 왕위를 찬탈당하고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계셨던 곳으로, 당시이곳에 단종대왕의 거처인 어소가 있었으나 소실되고,
영조 39년(1763년)에 이 비를 세워 어소위치를 전하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이곳에 단종이 거처하였으며 이 옛터를 기리는 후대 왕의 마음이 전해지는 비각이라 하겠다.
<금표비>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 그외 진흙 쌓여있는 곳까지 일반 백성들이 함부로 땅을 쓸 수 없다는 금표비를 세웠다.
단종이 계셨던 곳을 귀하게 여기는 영조 임금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산책로를 따라 걸어 들어가면 소나무가 길을 연다.
그 삼엄한 경계의 몸짓들이 나쁘지 않다.
언제나 소나무 숲으로 들면 우리나라 소나무에 대해 감탄을 잣게 된다.
이 늠름하면서도 우아한 뒤틀림, 충절의 표본으로 소나무 만한 것이 없으리라는 생각에
우리나라의 나무를 소나무로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본다.
이 멋드러진 소나무들 사이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소나무가 바로 이곳에 있다.
'관음송'
한결같이 우아하거나 시원시원한 노송들 사이에서 알싸한 공기를 뿜으며 더욱 우뚝 선 존재.
남겨진 전설에 의하면 단종에게 거의 유일했던 벗이 바로 이 관음송이었다.
왕은 가지가 갈라지는 윗부분 둥치에 앉아 나무가 마련한 시름 떨치는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마치 훗날의 쓸모를 알고 몸을 뒤틀어 자리 하나 마련한 것 같은 어른의 깊은 혜안을 보는 것 같다.
그 관음송을 만나기 직전 느꼈던 아주 오소소하던 공기를 기억한다.
신하들이 왕에게 닿는 길을 인도하듯 몸을 비껴서는 것이랄까. 그 사이에 주위를 물리고 홀로 선 소나무.
한때의 왕이었던 이가 쫓겨와 제 한몸 의탁하기론 이만한 어른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다.
자연은 들어주고 품어주는 위대한 어른이란 걸 어린 왕이 어떻게 알았을까 생각해본다.
상실 끝에 남는 건 결국 자연의 품이었으니.
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에 단종의 애상이 서려있어서인지 더욱 고아하게 느껴졌던 것이리라.
어린 왕은 회한어린 통곡을 쏟다가도 이 나무에 오르면 신기하게 위안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왕의 울음과 웃음, 그리움과 한맺힘 하나하나까지 새기고 기억하다, 숱한 세월동안 주위의 나무를 아우르게 된 소나무.
저 솔의 둥치에 올라 한많은 그리움에 사무쳤을 왕을 그려본다.
그 숱한 세월 어느덧 600년이 넘었다.
역사는 살아가는 동안 꾸준히 회자되나 나무는 제 기억 속에 역사를 심는 것임을 불현듯 느껴 본다.
관음송은 단종을 품었던 그 자세 그대로 지금까지 이어 왔다.
무슨 일념으로 그토록 수많은 세월을 버티었을까, 자못 경건해진다.
나무가 된 어른의 마음이 그 속에 계실까, 새삼 눈물나게 고마워지는 한 그루 어르신, 아니 충신.
아니 그냥 왕이라는 것을 새기게 하였다.
관음송을 배알하고 나면 왕이 그리워했던 한 사람을 생각하는 곳으로 발길을 이끈다.
그곳엔 애절한 사랑으로 차곡차곡 쌓은 단종의 유일한 유품이 있는 곳.
그리운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주위에 흩어져 있던 돌을 모아 직접 쌓은 '망향탑'이 그것이다.
불과 이십여일 머물렀으니, 탑은 그리 높지 않다.
오직 허물어지는 마음으로 끌어 모았기에 쌓은 흔적에서도 서툰 몸짓이 역력하다.
그러나 돌 속에는 잊지못할 얼굴이 있었으니 사랑의 탑이자 유일하게 남긴 정한의 표식이다.
왕비의 신분에서 평민의 신분이 되어 궐 밖으로 쫓겨났던 정순왕후는 단종이 영월에서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에
날마다 영월을 향해 통곡을 하였다지.
애닯은 그리움에 목이 아파지는 곳이 이곳 망향탑인지, 탑 앞에 멈춘 순간 그 허허로운 모습에 잠시 말을 할 수 없었다.
번듯하게 닳고 닳은 모습이었다면 그 슬픈 감상은 희석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중간중간 제법 오래 되어 보이는 거미줄이 없었다면 자세히 들여다보는 긴 순간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부분은 검은 돌끼리 한 덩어리진 모습이었는데 꽁꽁 그리움을 숨겨둔 완강함 같았다.
그건 슬픔도 화석이 될 수 있다는 걸 말하는 것이리라.
망향탑과 노산대(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머물렀던 바위언덕을 그렇게 불렀다.)는 멀리로 바라보던 그리움이
더이상 갈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게 하는 복종의 상징 같았다.
섬 아닌 섬 안에 절해고도의 땅이 숨겨져 있어 그 절망의 깊이를 실감나게 하는 곳이었다.
그 망향탑 바라보며 내려오는 길엔 아까의 키 큰 소나무가 배웅을 한다.
바람소리 울음소리 그것 모두 이곳에 오면 통곡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그 모든 슬픈 징표들.
우리는 돌아보며 다시 나룻배를 타고 나오는 자유로운 몸짓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