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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마당
周時經 廣場, Ju Si-gyeong Madang(Courtyard)
이곳은 우리 말글 연구와 실천 운동에 힘쓴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주시경 선생을 기리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주시경 선생의 평소 모습을 돋을새김한 형상뿐만 아니라,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세계에는 알리는 데 앞장선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 박사의 돋을새김 형상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주시경 마당」은 주시경 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살던 집터(새문안로3길 36) 옆에 2013년 서울시의 ‘한글 마루지 사업’으로 이곳에 조성한 것이다.
「주시경 마당」 가까이에는 주시경 선생이 1908년에 세운 한글학회와 「한글가온길」 등 한글과 관련된 역사의 흔적들이 많아 함께 둘러보기에 마땅하고, 마당 안에는 ‘단말 모눈’(좋은 말을 모아 놓은 한글 조각품, 송성재 만듦)이라는 한글 숨바꼭질 조각품도 있어 한글과 우리말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다.
Ju Si-gyeong Madang (Courtyard)
This space commemorates Ju Si-gyeong, a scholar of the Korean language and a patriotic independence activist who devoted himself to the study and practical promotion of the Korean language. Here, not only is a relief sculpture of Ju Si-gyeong’s likeness displayed, capturing his everyday appearance, but also a relief of Homer Hulbert, a fellow independence activist who played a leading role in promoting the scientific nature and excellence of Hangeul to the world.
"Ju Si-gyeong Madang" was established in 2013 as part of Seoul City’s “Hangeul Maruji Project.” Located next to the very site (36 Saemunan-ro 3-gil) where Ju Si-gyeong lived until his passing—which is now the Yongbieocheonga Officetel—the area is also near the Hangeul Society, which he founded in 1908. With convenient access to public transportation, it is an easy site for anyone to visit.
Surrounding the "Ju Si-gyeong Madang" are many historical traces related to Hangeul, such as the “Hangeul Gaon-gil (Central Path of Hangeul),” making it a meaningful place to explore. Within the courtyard, there is also a sculpture titled Danmalmonun (by artist Song Seong-jae), a playful Hangeul hide-and-seek installation, offering visitors a fun and reflective way to appreciate the value of Hangeul and the Korean language.
주시경
周時經, Ju Si-gyeong
한힌샘 주시경(1876-1914) 선생은 한국어와 한글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체계화한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일찍이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며 우리 말글 연구에 힘을 쏟았으며, 서재필 선생이 창간한 독립신문 교보원으로 일하면서 ‘국문 동식회’를 만들어 한글 맞춤법의 주춧돌을 놓는 일 등 우리 말글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주시경 선생은 국어문전음학(1908), 국어문법(1910), 말의 소리(1914) 등 많은 저술로 현대 국어 문법의 기초를 세웠다. 특히 ‘홀소리(모음), ‘닷소리(닿소리, 자음)’와 같은 토박이말을 살려 쓰고 우리 글자 이름을 ‘한글’이라 하여 우리 말글 연구와 운동의 이정표가 되었다.
1907년 상동교회 청년학원에 국어강습소를 열어 민족 교육에 힘썼고, 1908년에는 국어연구학회(지금의 한글학회)를 조직하였는데 그의 제자와 후학들이 한말글 연구와 우리 말글 사랑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1911년부터는 말모이 편찬을 준비하면서 우리말 사전 편찬의 주춧돌을 다졌다. 38살의 짧은 나이로 삶을 마감했지만, 선생의 수많은 업적은 세계 속에 한국어와 한글문화가 우뚝 솟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려 1980년에 건국훈장(대통령장)을, 1990년에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Ju Si-gyeong(1876–1914)
Ju Si-gyeong(1876–1914) was a pioneering linguist and independence activist who conducted scientific research on the Korean language and Hangeul, systematizing their structure and usage. He enrolled early at Baejae Hakdang, where he studied modern knowledge and devoted himself to the study of the Korean language. He also worked as an editorial assistant for The Independent, the first Korean newspaper in Hangeul founded by Seo Jae-pil, contributing to the promotion and dissemination of the Korean script. Notably, he founded the Korean Script Research Society(Gukmun Dongsikhoe), laying the groundwork for Korean orthography.
Through works such as Grammar of the National Language(Gug-eo Munbeop), Ju established the foundations of modern Korean grammar. He was a trailblazer in coining and using native Korean linguistic terms such as holsori (vowel) and datsori (consonant), which became milestones in Korean linguistic research and activism.
In 1907, he opened a Korean language training center at Sangdong Church's youth academy to promote national education. A year later, in 1908, he founded the Korean Language Society—the predecessor of today’s the Korean Language Society(Hangeul Hakhoe)—to protect and study the Korean language. From 1911, he began preparing for the compilation of Malmoi, Korea’s first national dictionary project, laying the cornerstone for future Korean lexicography.
Though he passed away at the young age of 39, Ju Si-gyeong’s linguistic research, activism, and contributions to the independence movement continue to exert a profound influence on the development of the Korean language and culture today.
호머 헐버트
Homer B. Hulbert(A.M., F.R.G.S.)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박사는 1886년 육영공원의 교사로 한국에 온 미국인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한국의 근대 교육 발전과 한국의 언어, 문화, 역사 연구와 아리랑 채보, 한국의 독립운동 등 한국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헐버트 박사는 한글과 우리 문화 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889년 한국어와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글을 뉴욕트리뷴에 기고했고, 1891년에는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출간했다. 그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5년 최초의 종합 역사서 한국사를, 1906년 한민족의 정체성을 파헤친 대한제국의 종말을 출간하였다.
일제 침략에 맞서 헐버트 박사는 1905년 을사늑약 저지를 위해 고종 황제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했고, 1907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활약하며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주장했다. 그는 일본의 박해로 미국에 돌아가서도 계속하여 38년을 한국 독립에 헌신하였다.
누구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 박사는 “나는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려 1950년에 건국공로훈장(태극장)을, 2014년에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Homer Bezaleel Hulbert(1863~1949) was an American educator and independence activist who came to Korea in 1886 as a teacher at Yukyounggongwon(Royal College)-the first state-run modern school in Korea.He devoted his entire life to Korea, contributing to the development of modern education, exploring Korea’s language, culture, and history, transcribing “Arirang” into Western musical notation, and supporting Korea's independence movement.
Hulbert made lasting contributions to the advancementof Hangeul and Korean culture. In 1889, he wrotean article forthe New York Tribune highlighting the excellence of the Korean language and Hangeul. In 1891, he published Saminpilji, the first textbook written in Hangeul. He also played a vitalrole in introducing Korean history and culture to the global audience. In 1905, he published The History of Korea, the first comprehensive history book on Korea, followed by The Passing of Korea in 1906, a work that deeply examined Korean identity.
To counter Japan’s imperial ambitions, Hulbert visited the United States in 1905 as Emperor Gojong's special envoy to prevent the Eulsa Protectorate Treaty. In1907, heserved as a special envoy of the Korean Emperor atthe Hague Peace Conference, seeking to nullifytheProtectorate Treaty. Though forced to return to the U.S. under Japanese threat, he continued to advocate for Korean independence for the next 38 years, until Korea’s liberation in 1945.
Hulbert, who loved Korea more than anyone, left a heartfeltfinal wish: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His unwavering dedication and profoundaffection for Korea inspiredmany, and he was posthumously awarded the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in 1950 and the Order of Merit for Culture and Art-Gold in 2014 by the Republic of Korea.
한힌샘 주시경 선생 해적이
1876년(단기 4209년, 고종 13년) 11월 7일(음력) 황해도 봉산군 무릉골에서 태어남(어릴 때 이름은 상호, 호는 한힌샘).
1882년(6살) 11월부터 1887년(11살) 5월까지, 가정에서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움.
1887년(11살) 5월 큰아버지의 양자로 경성에 올라와 6월부터 1889년까지 한문을 배움.
1890년(14살) 국문을 처음 배워 우리 말글을 연구하기 시작함.
1893년(17살) 6월부터 1894년(18살) 2월까지, 배재학당 강사 박세양, 정인덕에게 산술, 만국지지, 역사, 한문을 배움.
1893년(17살) 7월부터 국어문법을 저술하기 시작하여 1898년(22살) 12월에 완성함.
1894년(18살) 8월 경성 정동 배재학당에 입학함.
1895년(19살) 7월 인천 관립 이운학교 속성과 관비생으로 뽑혀 입학하여 1896년(21살) 3월에 속성과를 마치고 배재학당에 재입학함.
1896년(20살) 4월부터 경성 정동 독립신문사 회계사무(뒤에 총무로 전보) 겸 교보원으로 일함.
1896년(20살) 5월 국문동식회를 설립함.
1896년(20살) 5월부터 배재학당 서재필의 만국지지 연속강의를 수학하기 시작하여 1900년(25살)
6월에 보통과를 졸업함.
1897년(21살) 12월 독립협회 위원으로 선정됨(이즈음에 상동사립청년학원 총무로 선임됨).
1898년(22살) 6월 배재학당 만국역사지지 특별과를 졸업함.
1899년(23살) 10월 남대문 안 제국신문사 기자로 3개월 근무함.
1900년(24살) 1월 정동 영국인의 한어 교사로 초빙되어 1905년(29살) 9월에 사퇴함.
1900년(24살) 2월부터 상동사립학숙에 국어문법과를 개설, 교수하여 1901년(25살) 2월에 마침.
1900년(24살) 4월 흥화학교 야간양지과에 입학하고 이해 11월에 졸업함.
1904년(28살) 3월부터 1905(30살)까지, 정동 스크랜톤 목사의 병원 간호원양성학교의 교사 겸 사무를 맡음.
1905년(29살) 2월 경성 상동 사립청년학원 교사로 임명되고 같은 해 9월에 학감으로 임명되었다가 1907년(31살) 6월에 사임함.
1906년(30살) 1월부터 8월까지, 이화학당 사무의 일을 맡음.
1906년(30살) 5월 상동 공옥학교 교사를 맡음. 이달에 가정잡지 교보원으로 임명됨.
1906년(30살) 6월 「대한국어문법 국문강의」(유인본)가 이루어짐.
1906년(30살) 11월부터 1909년(33살) 12월까지, 창동 정리사에서 수학함.
1906년(30살) 11월 8일 서우학회 협찬원으로 선출되어 1910년(34살) 9월에 사임함.
1907년(31살) 1월 훈동의학교 내 국어연구회 회원으로 들어가, 2월에 연구원 겸 제술원으로 선출됨. 이 회는 설립한 지 4개월 뒤에 폐지됨.
1907년(31살) 1월 서우학교(나중에 협성학교) 속성반 국어 교사로 선출됨.
1907년(31살) 7월 대한제국학부 국문연구소 주임 위원으로 임명되어 1910년(34살) 여름에 안남망국사를 저술, 같은 해 11월에 발행함.
1907년(31살) 여름에 상동 청년학원 내에 국어강습소를 세우고 강사를 맡음(제1회).
1907년(31살) 11월 상동 청년학원 내에 국어 야학과를 개설하고 1909년(33살) 12월까지 교수함.
1908년(32살) 3월 대한협회 교육위원으로 선정됨.
1908년(32살) 7월 7일 제2회 국어강습소를 엶.
1908년(32살) 8월 31일 상동교회 청년학원 국어강습소 제자들과 국어연구학회를 세움.
1908년(32살) 9월 1일 국문연구소의 전임위원으로 선출됨.
1908년(32살) 11월 국어문전음학을 펴냄.
1908년(32살) 11월부터 12월까지, 이화학당 강사를 맡음.
1908년(32살) 12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원을 맡음.
1909년(33살) 2월부터 1911년(35살) 3월까지, 사립흥화학교 강사를 맡음.
1909년(33살) 2월 15일 국문초학을 발행함.
1909년(33살) 2월 28일 사립기호학교 교사로 초빙됨.
1909년(33살) 3월 안동 사립중앙학교 강사를 맡음.
1909년(33살) 4월 10일 사립휘문의숙 강사를 맡음.
1909년(33살) 4월 「고등국어문전」(유인본)이 이루어짐.
1909년(33살) 7월 10일 제3회 국어강습소를 엶.
1909년(33살) 11월 7일 국어연구학회 제1회 강습소를 상동사립청년학원 안에 개설하여 가르침.
1910년(34살) 1월 보성중학교 강사를 맡음.
1910년(34살) 4월 국어문법을 발행함.
1910년(34살) 4월부터 11월까지, 수동 사립융희학교 교사를 맡음.
1910년(34살) 6월 10일 보중친목회보(제1호)에 「한나라말」을 발표함.
1910년(34살) 6월부터 1911(36살) 1월까지, 수동 사립 사범강습소 강사를 맡음.
1910년(34살) 7월부터 8월까지, 재녕 나무리강습소 교사를 맡음.
1910년(34살) 9월 정동 배재학당 강사를 맡음.
1911년(35살) 광문회에서 「말모이」 편찬을 시작함.
1911년(35살) 12월 29일 국어문법의 제목을 조선어문법으로 고쳐 발행함.
1914년(38살) 말의 소리를 마지막 저서로 완성함.
1914년(38살) 7월 27일 수창동(지금의 내수동) 자택에서 38세의 나이로 돌아가심.
198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됨.
1990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됨.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박사 해적이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븐시에서 태어남
1884년 다트머스(Dartmouth) 대학 졸업, 유니언신학대학 입학
1886년 7월 5일 육영공원(Royal English College) 교사로 내한
1888년 9월 메이 한나(May B. Hanna)와 결혼
1889년 미국 뉴욕트리뷴에 「조선어(The Korean Language)」 기고
1891년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 출간
1893년 10월감리교 선교사로 재내한. 배재학당 교사/삼문출판사 책임자/동대문교회 목회자
1897년 한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 책임자/대한제국 교육 고문
1900년 관립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 교관
1903년 YMCA 창립총회의장-YMCA 창립선포
1905년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 출간
1905년 고종의 특사로 을사늑약을 저지코자 미국 방문
1906년 대한제국의 종말(The Passing of Korea) 출간
1907년 고종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활약하며 일본의 불법성 폭로
1907년 일본의 박해로 미국으로 돌아가 스프링필드(Springfield)에 정착
1907년~1945년 셔토쿠어(Chautauqua)강좌 등 미국 전역에서 한국의 독립을 역설
1919년 미국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 ‘한국 독립 호소문 「What about Korea?」’ 제출
1942년 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에서 한국 독립 주장
1949년 7월 <스프링필드유니언> 회견 - 한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고 증언
1949년 7월 29일 대한민국 국빈으로 초청되어 40년 만에 한국으로 귀환
1949년 8월 5일 내한 일주일 만에 여독으로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서거
1949년 8월 11일 대한민국, 사회장 영결식 거행. 양화진에 안장
1950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태극장)’ 추서
2014년 10월 9일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추서
2015년 10월 7일 (사)서울아리랑페스티벌, 제1회 ‘서울아리랑상’ 추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