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속 캐릭터들은 대부분 실존했던 인물들입니다. 실제로 역사를 장식했던 인물의 삶에 극적인 흥미 요소를 더해 사극의 등장인물이 만들어집니다. 있는 그대로 실존 인물의 모습을 반영하면 별로 재미가 없겠죠. 실제로 극적인 흥미거리를 지니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사극에서 실제 인물에 어느 정도 허구 요소를 첨가하는 건 허용 가능한 부분입니다.
'천추태후'나 '선덕여왕' 등 요즘 방영되는 사극들도 실존 인물 그대로를 극중 캐릭터로 반영하진 않습니다. 어느 정도 극적 요소를 가미해서 재미있는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이나 족보가 꼬이는 경우도 간혹 있습니다. 웃으며 넘겨줄 수 있는 대목이긴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할 때 '천추태후'엔 정말 재미있는 캐릭터가 있습니다. 김석훈이 연기하는 김치양이라는 인물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실존 했던 인물입니다. 극적인 재미를 위해 흥미 요소가 가미된 캐릭터죠. 그런데 흥미 요소의 개입 방식이 역대 어떤 사극에서도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기발합니다. 사극 캐릭터 창조에 관한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까요.
'천추태후'에 등장하는 김치양은 역사상에 실제로 존재했던 두 인물을 절묘하게 합친 캐릭터입니다. 실제 역사상에서 천추태후의 연인이 되며 고려 황실을 좌지우지했던 김치양이라는 실존 인물에, 신라 마의태자의 후예로 신라 부흥을 꿈꿨던 김행이라는 실존 인물이 공존하고 있죠.
그런데 정말 교묘하게 합체해 놓았습니다. 두 실존 인물의 삶에서 극적인 요소들을 어쩜 그리 잘 짜 맞췄는지... 작가의 상상력에 경이감을 표하게 될 정도입니다. 게다가 합체의 요소들은 드라마 곳곳에서 암시로 남겨져 있습니다.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 합니다.
일단 두 인물의 배경에서 오묘한 합체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극중 김치양은 마의태자의 후손입니다. 고려의 신라계 중신들의 손을 피해 절에서 지내다가 여진족에 들어가 족장의 양자가 됐죠. 이후 여진 세력의 힘으로 신라의 중흥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에 의해 숭덕궁주에게 접근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천추태후의 연인으로 막강한 권세를 휘두릅니다.
그 다음엔 실제 김치양의 배경. 천추태후의 외척으로 북방계 호족입니다. 경종이 죽은 뒤 숭덕궁주가 명복궁으로 쫓겨난 이후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성종은 누이와 놀아나는 김치양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유배를 보냈죠. 절에서 승려로 지내다가 목종 즉위 후 천추태후의 곁으로 돌아와 아이까지 낳고 권세를 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김행. 마의태자의 손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라 부흥을 이끌던 마의태자의 뜻을 이어 강원도 일대에서 부흥 운동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점차 신라 부흥의 가능성이 멀어진 뒤 여진족으로 들어가 족장의 사위가 됩니다. 그 아들이 족장이 되고, 그 아들은 더 힘센 족장이 되고, 그 아들 대에 가서 금나라를 건국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마의태자의 후손이 신라 부흥을 꿈꾸는 것은 김행의 배경이고, 숭덕궁주와 교류하는 건 실제 김치양의 배경입니다. 절에서 지낸 것은 김행의 배경이 되겠고, 천추태후의 연인이 된 건 실제 김치양의 이야기네요. 여진족과 함께 한 김행의 이야기는 조금 앞당겨져서 극중 김치양의 배경을 장식하게 됩니다. 정말 오묘한 조합이 이뤄졌죠.
더 재미있는 대목은 극중 김치양이 스스로 인물 합체를 자백했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 방송에서 김치양은 최섬을 살해하면서 "내 본명은 김행이요. 마의태자의 후예요"라고 했죠. 역사를 다루는 사극의 설정으로 참 어이없는 대목이지만. 노골적으로 합체를 인정하고 나오니 뭐라고 탓하기도 힘들어졌습니다. 엄청난 왜곡인데, '그게 뭐 어때서'하는 대사에 말문이 막혔다고 할까요.
여기서 재미있는 상상이 가능해집니다. 과연 훗날 극중 김치양은 실제 김치양의 길을 따를지 아니면 김행의 길을 가게 될지에 대한 상상이죠.
실제 김치양은 천추태후와 자신 사이에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고 대량원군을 살해하려다가 실패합니다. 강조에 의해 퇴출당한 뒤 아들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