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전통적인 서구 종교, 도덕, 철학에 깔려 있는 근본 동기를 밝히려 했으며, 신학자, 철학자, 심리학자, 시인, 소설가, 극작가 등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계몽주의라는 세속주의의 승리가 가져온 결과를 반성했다.
"신은 죽었다"는 그의 주장은 20세기 유럽 지식인의 주요한 구호였다.
[생애]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5살 때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나움부르크로 이사하였다.
포르타 김나지움 시절에는 음악과 그리스·로마 문화에 심취하였고, 1864년 본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古典文獻學)을 배웠으나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이 시절 동안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고, 바그너와 음악을 통해 깊은 관계를 맺었다. 69년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스승 리츨의 추천을 받아 스위스 바젤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이 터지자 위생병으로 종군하였으나 병에 걸려 제대한 뒤 평생 병고에 시달리는 몸이 되었다. 당시 유명한 작곡자로 알려졌던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했으며, 특히 비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를 듣고 매혹된 나머지 처녀작인 <비극(悲劇)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die, 1872)>을 저술하였다. 이 저서는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빌려 그리스비극의 정신이 진실한 문화창조의 원천임을 인식하고, <아폴론형>과 <디오니소스형>의 두 가지 원리로 그리스비극을 독창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그 정신을 현대에서 부흥시킨 것이 바그너의 음악임을 논하여 그의 신예술운동을 지원하려 하였다. 뒤이어 발행된 <반(反)시대적 고찰 (Unzeitgemsse Betrachtungen, 1873-76)> 4편은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는 독일 국민과 문화에 통렬한 비난을 가하는 한편 유럽문화에 대한 회의를 나타내고 천재(天才)를 위대한 창조자로서 문화의 이상으로 삼았다.
1편은 헤겔학파의 신학자 슈트라우스의 <교양(敎養)을 가진 속물(俗物)>에 대한 공격으로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2편은 역사를 기념비적·골동품적·비판적인 3종류로 구분한 역사주의에 대한 비평이었다. 3편은 쇼펜하우어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니체 자신의 실존적 결의의 표명이기도 하다. 4편은 바그너가 바이로이트에서 공연한 악극 <니벨룽겐의 반지>에 관한 찬사이다. 그러나 이 저술을 계기로 바그너와 절교하였으며, 이리하여 천재적인 재질에 의하여 새로운 게르만적 헬레니즘문화를 세우려고 한 낭만적 이상은 무너졌다.
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79년 대학에서 퇴직하고 알프스산과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해변을 전전하는 투병생활을 하면서 사색을 계속하여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1878-80)> <서광 (Morgenrte, 1881)> <기쁜 지혜 (Die frhliche Wihssenschaft, 1882)>등을 저술하였다. 이 저서들은 잠언(箴言)과 사상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속에서 종래의 낭만주의를 파괴하고 실증주의적·심리적 요소를 드러내고 있다. 83-85년에 걸쳐서는 전에 알프스 산중에서 깨달은 <영겁회귀> 사상을 기반으로 한 <초인(超人)>의 이상을 그린 철학적 서사시인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1883-91)>를 저술하였다.
이 저서에 니체의 사상이 상징적으로 모두 표현되고 있으나, 이 추상성에 불만을 품고 구체적 논문식으로 해설한 <선악(善惡)의 피안 (Jenseits von Gut und Bse, 1886)>을 저술하였다. 이 저술에서는 고귀한 정신적 귀족의 육성을 주장하고 장래의 위대한 입법자를 암시하는 한편 퇴폐적인 근대의 여러 현상과 단순히 객관에만 치우치고 있는 과학정신, 동정(同情)에 기반을 두었다는 그리스도교적 도덕, 역사의식의 과잉 등을 예리하고 독특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 후 <도덕계보 (Zur Genealogie der Moral, 1887)>가 유럽 윤리사상의 비판서로서 출판되었으며, 이때 이미 <권력에의 의지 (Der Wille zur Macht)>가 준비되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사망 후에 유고(遺稿)만이 수집되어 출판되었다. 88년에는 <바그너의 경우> <우상(偶像)의 황혼> <이 사람을 보라> <안티 그리스도> <니체와 바그너>등이 저술되었다. 그 중 <이 사람을 보라>는 그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89년 1월 정신착란 증세에 빠져 바이마르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동생의 간호 아래 여생을 보냈다.
니체는 근대유럽의 정신적 위기를, 일체의 의미와 가치의 근원인 그리스도교적 신의 죽음, 즉 <신은 죽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으로 단정하고, 여기에서 발생한 사상적 공백상태를 새로운 가치창조에 의해 전환시켜 사상적 충실을 기했다. 이리하여 신 대신 초인을, 불멸의 영혼 대신 영겁회귀를, 선(善)과 참(眞) 대신 권력에의 의지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기쁨 대신에 심연(深淵)을 거쳐서 웃는 인간의 내재적(內在的) 삶으로 가치를 전환시켰다.
'신의 죽음'과 그에 따른 모든 전통가치의 상실을 선포했다. 그는 유일하게 지지받을 수 있는 인간의 반응은 허무주의적 반응, 즉 신이 없음이며, 삶의 목적과 의미에 관한 문제에는 답이 없다고 주장했다. 니체에 따르면, 신의 죽음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자신을 완성하며 그 본질을 발견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원숙한 문장과 함께 주로 문학자들에 의해 높은 평가를 받았고, 시대 변천과 함께 사상적 영향을 끼치면서 오늘날의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그들의 선구자로 불리게 되었다.
[작품]
1. 비극(悲劇)의 탄생(誕生) (Die Geburt der Trag Udie)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의 영향을 받은 니체의 처녀작. 1872년 <음악 정신에서의 비극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가 86년 <자기비판 시도>를 머릿글에 넣어 <비극의 탄생 또는 그리스정신과 염세주의>로 제목을 바꾸어 출판되었다. 고전문헌학 연구를 토대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사상을 원용하면서 그리스비극의 성립과 변천을 더듬고, 나아가 소크라테스 이후 에우리피데스 등이 전개한 주지주의의 비판을 통하여 바그너의 음악에서 근대 독일문화의 헬레니즘적 생명부흥을 기대한다는 내용이다. 종래 고대관의 중심이었던 조화로운 그리스적 청랑(晴朗)함은 아폴론적 가상(假象)에 지나지 않으며 그 배후에 더욱 근원적인 음악 정신, 충동적·파괴적인 디오니소스적 도취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역동적 그리스관을 제시하였다.
1-1.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켈트족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유명한 중세의 사랑 이야기에 나오는 2명의 주인공.이 켈트족의 전설은 실제로 고대 픽트족(브리튼 섬 북부에 살았던 고대인)의 한 왕의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현재 남아 있는 여러 가지 유사한 전설들을 파생시킨 원래의 시는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현재 남아 있는 초기 이본들을 서로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원래 시의 주요내용을 추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젊은 청년 트리스탄은 이졸데 공주의 도움을 얻어 그의 아저씨이자 콘월의 왕인 마크를 도울 목적으로 아일랜드로 모험을 떠난다.아일랜드에 도착한 그는 그 나라를 괴롭히고 있던 거대한 용을 퇴치함으로써 임무를 성공리에 완수한다.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불운하게도 이졸데의 어머니가 자기 딸과 마크 왕을 위해 준비해놓은 사랑의 묘약을 마시고 만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불후의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 사랑은 모든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고난을 이겨내지만 왕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대부분 서로 대응되는 2개의 기본 줄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마크 왕과 신하들은 두 연인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지만 두 연인은 그들을 잡으려고 꾸며놓은 함정을 빠져 나온다. 그러나 결국 마크 왕은 그들의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를 찾아내어 벌을 내린다.화형장으로 가던 트리스탄은 절벽에 있는 예배당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해 마크 왕이 나병 환자들의 무리 속에 집어 넣어버린 이졸데를 구해낸다. 두 연인들은 모뢰아 숲으로 달아나 거기서 지내던 어느날 마크 왕은 이들이 칼을 칼집에서 빼내어 두 사람 사이에 놓은 채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그후 곧 두 연인은 마크 왕과 화해를 하고 트리스탄은 이졸데를 마크 왕에게 돌려주고는 나라를 떠난다.브르타뉴에 도착한 트리스탄은 '이졸데와 이름이 같고 아름답다는 이유로' 브르타뉴 왕의 딸인 '흰 손의 이졸데'와 결혼을 한다.
그러나 그는 단지 이졸데와 이름이 같다는 점에서만 그녀를 자기 아내로 여길 뿐이었다.독이 묻은 무기에 부상을 당한 트리스탄은 원래의 이졸데에게 전갈을 보내 그녀만이 자기를 치료해줄 수 있으며 만약 자기를 치료하러 올 생각이라면 타고 오는 배에 흰 돛을 달고 그렇지 않으면 검은 돛을 달라고 말한다.그러나 그의 비밀을 알아챈 질투심 많은 트리스탄의 아내는 옛 애인을 도울 생각으로 서둘러 오는 이졸데의 배를 보면서 트리스탄에게 배가 검은 돛을 달았다고 거짓말을 한다.트리스탄은 얼굴을 벽을 향해 돌린 채 죽고, 너무 늦게 도착해서 연인의 목숨을 구하지 못한 이졸데도 마지막으로 트리스탄을 껴안고 죽고 만다. 이들이 죽고 나자 기적이 일어난다.두 그루의 나무가 그들의 무덤으로부터 솟아나와 서로 가지를 뻗쳐 얽히더니 다시는 풀리지 않게 되었다.
1-2. 디오니소스형과 아폴론형 (Dionysisch·Apollinisch)
그리스신화의 주신(酒神) 디오니소스의 도취적·창조적 충동과 태양신 아폴론의 형식·질서에 대한 충동과의 대비에서 유래한 용어.디오니소스적·아폴론적이라고도 한다.셸링은 내용이 형식에 우월하는 시와 양자가 조화된 본래의 시와의 대립을, 니체의 스승 리츨은 피리와 하프의 음색의 대비를 이러한 대립개념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이런 대립개념이 확산된 계기는 니체의 <비극의 탄생(1872)>이다. 여기서 니체는 그리스조각의 맑고 밝으며 사물을 관조하는 분위기를 아폴론적, 음악의 격정적인 약동을 디오니소스형이라고 표현했다. 온갖 것을 가상(假象) 속에 형태화·개체화하는 조형예술의 원리로서의 아폴론적인 것이, 개체를 도취로써 영원한 삶 속에 해체하는 음악예술의 원리로서의 디오니소스형인 것과 결합되어 그리스 비극이 탄생한다. 이 비극은 일단 낙천적·이론적인 소크라테스주의 탓으로 멸망했지만, 바그너의 악극(樂劇) 속에 재생한다고 젊은 니체는 생각했다. 다만 훗날의 니체는 이 대립개념을 쓰지 않고 영원히 창조하고 파괴하는 생(生)의 긍정이라는 그의 철학의 핵심을 <디오니소스형>이라고 규정했다. 그리스예술의 발전에서 추출해 낸 니체의 이러한 개념은 훗날 예술체계적 구분의 원리 및 역사원리 혹은 예술제작의 전형으로서 널리 채용되었다.
2.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니체의 저서. 4부로 된 철학적 산문시로 1883-85년에 저술되었다.
니체 자신의 이상적 분신(分身)인 차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를 통해 초인(超人), 권력을 향한 의지, 영원회귀(永遠回歸) 등 니체의 중심사상을 교설한 설교집의 모습을 띠고 있다. 서설(序說)과 제1부에서는 10년간 산상(山上)의 고독한 생활을 보내던 주인공이 <신은 죽었다>는 깨달음을 얻고 인간세계에 내려와 초인의 이상을 논한다. 제2부에서는 영원회귀의 사상이 그의 내면에서 성숙해가나, 이를 세계에 전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함을 느끼고 더욱 성숙한 인식을 위해 산으로 되돌아간다. 제3부에서는 영원회귀사상의 성숙을 기다리며 삶의 절대적 긍정을 노래한다.
제4부에서는 동굴생활을 하던 중 7명의 더 높은 사람을 만난 차라투스트라가 초인도, 대중도 아닌, 고뇌하는 인간들에게 동정을 가진다.그러나 이러한 동정은 그에 대한 새로운 유혹이요 시련이다. 그는 결국 동정이라는 마지막 시련을 이기고 성숙한 영원회귀사상을 알리기 위해 홀로 산을 떠난다.
[용어]
초인 (超人 ubermensch)
인류의 존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뛰어난 인간.
'초인'이란 말은 괴테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사용했지만, 프리드리히 니체가 특별히 그의 저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1883~85)에서 의미심장하게 사용한 용어이다.이 뛰어난 인간은 오랜 진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초인은 우수한 잠재력을 지닌 어떤 사람이 완전히 자기 자신을 지배하고 인습적인 그리스도교의 '대중도덕'을 말소하고 자기의 고유한 가치를 창조할 때 나타난다.이 가치는 내세가 아닌 현세의 삶에 깊이 뿌리 박고 있다. 니체는 결코 '독일 나치스'라는 잔인한 초인을 예상하지는 못했다.왜냐하면 니체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영혼을 가진 카이사르'였기 때문이다.
니체 관련사이트
http://www.pitt.edu/~wbcurry/nietzsche.html
http://www.cwu.edu/~millerj/nietzsche/index.html
http://www.usc.edu/~douglast/nietzsche.html
http://armdown.net/
http://myhome.shinbiro.com/~conanoc/Nietzsche/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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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의 철학 (15/09/03)
Peter Kunzman, Franz-Peter Burkard et Franz Wiedmann, Atlas de la philosophie, trad, fra. Zoé Housez et Stéphane Robillard, Livre de Poche, (불어판)1993(1991) (원판 독어판 1991). pp.176-179. (278) - 우리는 불어판을 읽었다. - 국내 독어판 번역 (『그림으로 읽은 철학사』, 홍기수/이정숙 번역, 애경출판사, 1999(1991 독어판)이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관념의 역사에 강한 인격의 인상을 남겼다. 정열적인 참여와 새로운 급진적 의지, 첨예한 혜안과 언어적 마술이 그의 저작의 특징이다. 니체의 작품활동은 (서로 맞물려 있는) 세 번의 창작 시기로 나누어질 수 있다.
첫 번째 시기 (1869-1876)
루터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니체는 고전 문헌학에 대한 교양을 쌓고, 발(Bâle, Basel)에서 고전 문헌학 교수가 되었다. 1871년 그는 『비극의 탄생: (부제) 음악의 정신으로부터(La Naissance de la tragédie: A partir de l'esprit de la musique, 1871)』을 저술한다. 니체는 그리스의 원초적인 힘인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고대 그리스의 비극에서 융합되어 조화로운 종합에 도달했다고 풀어나간다.
'아폴론적인 것' 이성적인 척도를 대표하고, '디오니소스적인 것' 은 도취적이고 열광적인 것을 가리킨다.
비극의 몰락은 특히 소크라테스(Socrate)에 의해 구체화된 그리스의 이성적 철학의 발생과 연관된다. 유리피데스(Euripide, Euripides, Salamine 480- Macedoine 406)에게서 이미 이 같은 이행이 진행된다.
"그(유리피데스)를 통해 이야기되는 신성이란 디오니소스도, 아폴론도 아니고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완전히 새로 태어난 다이몬(démon)이다."
니체는 새로운 문화를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에게서 보았다. 그의 음악과 개성이 이 시기의 니체를 매료시켰던 것이다.
1871-76년에 니체는 당대의 문화에 논쟁의 길을 열었다. 그는 네 개의 논문으로 이루어진『반시대적 고찰』을 썼다.
교육받은 속물의 전형인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 1808-1874, 저술 『예수의 생애(La vie de Jésus, 1835)』)에 대해서; 역사적 사유의 지배라는 '역사적 질병'에 대해서(헤겔: Hgel, 1770-1831, 하르트만: Karl Robert Eduard von Hartmann 1842-1906); 비극적 사유에까지 올라간 철학자의 전형으로서의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1860)에 대해서; 그리고 바그너(R. Wagner)에 대해서 고찰하고 있다.
두 번째 시기(1876-1882)
니체는 자신의 철학이 발전한 이 시기를 스스로 '아침의 철학'이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부와 2부), 『여명』, 『즐거운 학문』 등 네 권의 저작이 탄생한다.
문체상으로 니체는 이제부터 경구(aphorisme)를 최상의 언어적 형식으로 생각한다. 이 네 가지 텍스트에서 내용의 깊이에는 무엇보다도 '퇴폐성(décadence)', 퇴폐성의 도덕, 퇴폐성의 종교(크리스트교)에 대항하는 논쟁이 들어있다.
니체는 회의적 합리성의 입장을 취하고, 진지하고 정열적 의지에 집착한다.
니체는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 설정에 반대하여 늘 새로운 세부적 관찰을 통해 다음의 문제를 제기한다.
- '언어'의 의미
언어는 사실에 가면을 씌운다. 인간이 말과 더불어 현상적으로만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뿐이며, 실제로는 첫 번째[사실] 세계 옆에 두 번째[현상] 세계를 발명해 낼뿐이다.
그래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러면, 진리란 무엇인가? 한 덩어리 유동적인 은유......[이다]. 인민은 그 은유를 오랫동안 사용하고 난 후에 확고히 되며, 법령적[계명적]이 되고 그리고 신앙으로 되어 버린다. 이 진리는 환상[착각]일 뿐인데 우리는 다만 진리가 그런 환상임을 잊어버렸다."
- 존재와 '가치'의 허용될 수 없는 결합
합리적 판단의 가치에 대한 신뢰는 그 자체로 도덕적 현상이다.
- 도덕의 '상대성'
도덕적 판단은 무시간적이지도 절대적이지도 않고, 역사와 사회에 상대적이다.
니체는 도덕 철학이 사실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 도덕의 실천적 모순들
- 도덕의 역사성
니체는 인습적인 편견을 오랫동안 실행함으로써 어떻게 덕목이 생겨나는지에 대한 주제를 더욱 발전 시켰다.
- '계보학적 논증'
[도덕의] 동기(motif)의 탄생에 대한 역사적이고 심리학적인 기준을 세우면서 전통적인 가치와 규범을 거부한다. 그는 덕이 있으면서 종교적인 인간, 그리고 덕이 있거나 또는 종교적인 인간에게 덧씌워진 가면을 부수고, [거짓을] 폭로하고, 가치의 객관적 근거에 대한 주장을 반박한다.
"도덕은 또한 정서의 연결부호(code)일 뿐이다."
인식에 대한 그의 비판은 또한 『즐거운 지식』에서 견고하게 되고, 특히 오류와 착란이 인식하는(생성하는) 존재의 조건이라고 더욱 분명하게 말한다. 그는 학문의 신앙(foi dans la science)을 단칼에 쳐내어 버리고, 그는 결정적인 진리에 이를 길을 비상식적(insensé)으로 꿈을 꾼다. 이 결정적 진리란 필연적으로 처음에는 '삶, 자연, 역사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욕망(소망)하고 결국에는 '이 세계, 우리들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어쩌자는 것인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요; 그것은 과학에서 신앙이 근거가능 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신앙'에서 이다."
니체는 쾌락을 획득하려는 목적을 가진 실용적인 반성만이, 비록 우회로를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연민은 자기 보호이며, 이웃 사랑은 자기애(amour de soi, 이기심은 amour propre이다)라고 폭로한다.
크리스트교에 대해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
- 크리스트교는 인간을 나약하게 하는 데에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
- 크리스트교는 고대의 역설적인 관념 세계에 대해 믿을 수 없는, 독단적인 유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 크리스트교는 존재하지 않는 저 세상에 위안을 삼지만, 저 세상을 아무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 크리스트교인들은 자신이 믿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에 따라서 살지 않는 위선자들이다.
이러한 공격은 『즐거운 지식』에서 신을 찾는 미친 사람을 묘사하는 데에서 절정을 이룬다. 여기서 니체는 지평도 없고 위도 아래도 없이 뒤집히기(chavirer) 시작하는 세계의 미래상을 그리고 있다. 왜냐하면 신을 죽었기 때문이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
세 번째 시기(1883-88)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85)』와 『선악의 피안』, 『도덕의 계보』, 『권능의 의지』(1880년대 쓰여진 텍스트인데 1901년에 처음으로 출판되었다)의 저작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를 선포하는 데에서 니체 철학은 정점에 이른다.
비판적 계기는 보존된다. 하지만 새로이 탄생한 니체의 사유세계를 통해 진단의 뒤를 이어 치료법이 제시된다.
니체는 정신이 겪는 세 가지 변신을 본 따서, 이 새로운 것(치료법)을 표현한다.
처음에는 정신이 인내하며 옛 도덕의 짊을 짊어지고 가는 낙타[퇴폐를 상징]가 되고, 그 다음에는 이 같은 가치를 상징하는 용(과거의 가치 [너는 해야한다: 칸트?])에 대항하여 싸우는 사자(자유정신 [나는 하고자 한다: 루소?])가 된다.
"자유를 창조하고 의무 앞에서도 성스럽게 거부하는 것 … 이를 위해서 사자는 필요한 것이다."
마침내 정신은 놀이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아이가 된다. [미셀 뚜르니에의 어린이 찬미 - 들뢰즈의 미친 생성의 존재적 근거는 배아(수정란)?]
니체는 허무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서구 문화를 진단한다.
"가치, 의미, 소망(le désirable)을 그 뿌리까지 거부하는 것"
최고의 가치는 평가 절하되고, 나약한 크리스트교적 사유의 거짓 세계와 소크라테스의 유산을 계승한 철학의 거짓 세계는 그 자체로 무너지고 있었다. 니체가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그리스-크리스트 전통은 자기 속에 허무의 씨앗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니체는 그 씨앗의 결과를 확인한다. 그는 이러한 비전을 창출한 점에서 동시대인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한다.
'약자'는 이러한 사실에 직면하여 절망하며, '강자'(초인)는 이러한 사실에서 새로운 질서의 등대, '가치의 전환'을 위한 등대를 발견할 것이다.
『권능의 의지』를 중심으로 집약되는 니체의 치료법은 이러한 선포에 있다.
"니체 철학은 초인과 영겁회귀라는 이중의 미래상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그의 철학의 핵심 개념은 권능의 의지이다."(발터 카우프만, W. Kaufmann)
특히 짜라투스트라에서 니체는 초인을 찬미한다.
전통적 가치에 대항하는 총체적 자유에 의해 초인이 구별된다. .
초인의 행위는 지상의 규범에도 부합한다.
초인은 강과 생명력과 권능을 추구한다.
초인은 (고안되어진) 신의 독재에 복종하며 약자와 연민의 도덕을 섬기는 무리속의 인간들과 대립힌다.
[무리 속의 인간은 약하고 비겁하고 덕[목]있고 노예적이고 복종적이고 동정적이며, 이들은 수에 있어서 너무나 많다. 이에 비해 초인은 생명이 충만하고 용기 있고, 활동적이고 권능이 있고 자유롭고 근심이 없는 자이며, 그런데 그는 매우 드물다. ]
초인은 소수일지라도 자유와 거칠고 생명적인 방향에서 오는 쓰디쓴 귀결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다. 그들의 최종적인 시금석은 영겁 회귀 사상을 지탱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니체는 『즐거운 지식』에서 동일한 것의 영겁 회귀에 '가장 큰 비중'을 두면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러한 삶을..... 너는 또 한번 그리고 또 셀 수 없이 많이 살아야만 할 것이다. ......현존재의 영원한 모래 시계는 끊임없이 뒤집기를 반복하고 - 그리고 너도 그 모래시계와 함께, [모래시계 속의 모래처럼] [너도] 티끌 중에서도 티끌일 뿐이다."
니체는 마치 '다이몬(démon)'처럼 그를 엄습했던 영겁 회귀에 직관적인 확실성을 가졌다. 그 표현은 복잡하다. 그는 반복의 관념을 사건과 사실의 동일자(l'identique)로 번역하지 말하고 하고, 단순히 역사과정의 '순환'운동(나선형의 비유가 이것을 매우 잘 특징화 할 수 있다)의 존재를 지적한다고 주장한다. 계속해서 그는 안정된 개념적 기초 위에 관념[자기생각]을 확신하려고 논리적이고 자연 과학적인 논증을 이용하였다. 영겁 회귀의 의미는 초인을 최종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있다.
니체가 자신의 철학을 가장 잘 파악한 것으로 보는 공식은 '권능의 의지'에서이다. 그는 쇼펜하우어와 스피노자(Spinoza, 1632-1677)의 철학 그리고 당시의 생물학에 영향을 받아 인간의 행동과 모든 생명체의 지도 노선에 자기 보존의 의지가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모든 사유와 행위의 '동기'는 의지이며, 이 의지는 쇼펜하우어와 반대로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보존', '삶의 감정과 능력의 증대', '힘과 권능'의 획득
이라는 여러 목적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가 도처에서 인간을 지배하기 때문에 니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이 세계는, 힘[자연적 힘 또는 물리적 힘]의 괴물이며, 시작도 끝도 없으며, 견고하고 완강한 거대한 힘이고.... 이 세계는 권능의 의지[생명과 심리의 힘]이지 -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니다!"
이러한 배경을 정의하면서 니체는 모든 가치의 전환을 시도한다.
옛 가치들은 빛이 바래지고 새로운 가치들은 권능의 의지라는 원리에 따른다.
선과 악을 미래에 규정하려면 어떤 행위가 '활력'을 얻는데, 또는 그 활력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을 획득'하는 데 '유용(utilité)한가 아닌가'에 따라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 유용성의 개념에서 공리주의- 실용주의의 접근 방식을 보는 경우가 있는 데 그것은 잘못이다. 영국의 공리(utile)과 미국의 실용(pragmatique)인간이 사물에 대해 적용과 그 귀결에서 인간에 맞게(합목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생명과 심리(영혼)의 유용성은 생명의 자기보존을 의미하며, 자기 생산성(스피노자의 naturante)을 말한다. 이 생산성이 자기에 의한 자기 생산(신즉 자연의 자기 생산)일 경우에 선하고 행복하다. 이런 의미에서 아래 글은 매우 스피노자적일 수 있고, 생각보다 니체도 스피노자의 『윤리학(Ethique, 1661-1675)』을 수학적으로 읽기보다 생명과 심리의 자기 풀림으로 읽었을 것으로 보인다. - 또한 이런 생각(idée)은 베르그송이 『창조적 진화(1907)』에서 말하는 생명의 엔트로피 역행과 같은 맥락이며(제3장), 의식의 자기 생성(제1장)과 같고, 『물질과 기억(1896)』에서 기억의 확장도 같은 맥락이다.]
"무엇이 좋은 것[선]인가? - 권능의 감정을, 권능의 의지를, 인간 안에 있는 권능 자체를 고양시키는 모든 것은 좋은 것[선]이다. 무엇이 나쁜 것[악]인가? - 약함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나쁜 것[악]이다. 무엇이 행복인가? - 권능이 성장한다는 감정이 [행복이다]...... 만족이 아니라 더 많은 권능이, [일반적]평화가 아니고 전쟁[치열한 생존경쟁-다윈의 관점?]이, 덕목이 아니고 열렬함이 [행복이다]"
1888년 니체는 특히 『반크리스트교인』과 『이 사람을 보라』와 같은 일련의 비장한 글을 작성하였다. 첫 번째 글에서 그는 또 한번 크리스트교에 분노를 터뜨린다. 두 번째 글에서는 그가 자신을 과대 평가하고 있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과거를 회고하면서 그는 "왜 나는 이토록 영리한가", "왜 나는 이토록 좋은 책들을 쓰는가" 등의 표현을 하고 있다. 1889년에 니체는 정신 나간 상태(ailénation)에 빠진다. (ms3609)
**** 참조:
니체 사상의 주요 단락과 그에 상응하는 주요저술들
*소크라테스, 아폴론-디오니소스 대립시기
『비극의 탄생(La Naissance de la tragédie, 1871)』,
*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1860)과 와그너(Wagner, 1813-1883)의 영향
『반시대적 고찰 (Considérations inactuelles, 1873-1876)』
* 도덕, 예술, 종교, 철학에서 퇴폐(décadence)에 대한 급격한 비판 [우리는 여기서 루소의 사상이 들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 루소의 볼테르류에 대한 비판과 첨가적 진보에 대한 비판이 있을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Humain, trop humain, 1878)』,
* '아침의 철학'의 시기
『여명(Aurore, 1881)』
『즐거운 지식(Le Gai savoir, 1882)』,
* 영겁회귀, 신의 죽음의 발설 시기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inssi parlait Zaratustra, 1883-1885)』,
* 초인, 권능의 의지, 가치의 전환, 허무주의 시기
『권능의 의지(La Volonté de puissance, 1884-1886)』, 879999
『선과 악을 넘어서(Par-delà le bien et le mal, 1886)』,
* 문화와 종교의 마지막 담판
『도덕의 계보(La Généalogie de la morale, 1887)』,
* 자기에 대한 과대 평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1888)』.
『반크리스트교인(Antéchriste, 1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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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의 연표 (ms 22/04/03)
1844 라이프찌히(Leibzig) 가까이 있는 뢰켄(Röcke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프로테스탄트 목사였다.
1860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1860)사망
1864 사회주의 제 1 인터네셔날 창설
[1864경] 학업 성적이 뛰어났으며, 처음에는 신학을, 그리고 나서 문헌학(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을 공부했다. 철학과목은 공부하지 않았다.
1869 그리스 문학에 관한 그의 작업으로, 25살에, 발(Bâle)대학에 교수로 지명되었다.
* 그의 진정한 욕망은 독일의 문화와 문명에 새로운 충격과 새로운 목표 및 이상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1870 그의 철학 작품의 대부분은 1870년 프랑스-프러시아 간의 전쟁에서 승리한 프러시아(독일)가 만족할 만한 영광에 젖어서 자만에 빠진데 대한 실망, 독일의 새로운 정신을 드라마를 통하여 불어넣는다고 생각하는 와그너가 과거와 종교로 방향을 바꾼 것에 대한 실망, 독일 대학이 비판 정신도 창조적 열정도 없이 고전 문화의 회복에 만족하는데 대한 실망 등을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1871 Ⰶ 파리꼬뮌
1872 『비극의 탄생(La Naissance de la tragédie, 1872)』. 이 작품은 문헌학자들에게서 커다란 비난을 불러일으키다.
1873 『반시대적 고찰(Considérations intempestivese, 1873-1876)』여기서, 그는 그 시대의 과학 문화 지식에 대한 믿음을 공격하였다.
1876 그는 대학에서 무기한 휴가를 얻다. 신체적 병으로 고생하다.
[그는 이후로 죽을 때까지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중부 등을 떠돌아 다녔다]
1878-1880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Humain, trop humain, 1878)』
1881 『여명(Aurore, 1881)』
1882 『즐거운 지식(Le Gai savoir, 1882-1885)』,
[위 세 작품은 자비로 출판하였으나, 그 당시에는 거의 읽혀지지 않았다.]
1883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사망.
1883-1885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inssi parlait Zaratustra, 1883-1885)』,
이 유명한 작품은, "다섯 번째 복음"처럼, 새로운 성경으로 표현되었다.
1884-1886 『권능의 의지(La Volonté de puissance, 1884-1886)』,
1886 『선과 악을 넘어서(Par-delà le bien et le mal, 1886)』,
1887 『도덕의 계보(La Généalogie de la morale, 1887)』 여기서 니체는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앞선 작품에 대한 좀더 정교한 비판으로, 또한 "도덕"과 "형이상학"의 공통 과제를 수록하였다.
『모든 가치의 재평가(La réévaluation de toutes les valeurs. 1887 미완성)』그는 많은 주를 달면서 체계적 작품을 시도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1888 『반크리스트(AntiChrist, 1888)』에서, 그는 고대(플라톤과 크리스트의)의 모든 가치를 백지화하고, 가치의 기초부분을 만들려했다.
『와그너에 반대한 니체(Nietzsche contre Wagner)』, 『와그너의 경우(Le Cas Wagner)』의 작품은 독일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상징적 음악과 상징적 작곡가를 공격한다.
『황혼의 우상(Crépuscule des idoles, 1888)』에서도 현대만큼이나 고대의 이상을 공격한다.
여전히 니체는 자신의 개인을 변호한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1888, 1906년 발간)』을 작성하다. .
[그는 이해 말부터 정신착란의 증세를 보였다]
1889 1월 정신착란에 빠지다[이는 슈만(Schumann), 반고호(Van Gogh), 모파상(Maupassant)에서 일어 났던 현상과 같다.)
그의 누이, 미래에 나찌주의자가 될, 그녀는 니체의 병력에 관한 모든 기록을 제거하였다.
1890년 이후 죽을 때가지, 그는 온전한 문장을 기록하지 못하고, 병마에 시달렸다.
1900 사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