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떠나는 계절이라면 가을은 돌아와 차분히 생각하는 계절 아닌가 싶습니다.
돌아와 다시 시작하려 하니 자신을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하고 집중하게 할 일상의 할 일에 대해서 생각 해 볼 때 아닌가 싶습니다.
비록 동물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긴 합니다만 개체의 간절한 하나의 희망이 어떻게 열정을 불태우며 집중하는 능동적인 힘으로 전환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욕심 많고 항상 배가 고픈 늑대는 전생애를 통틀어 단 하나의 프로젝트에만 집착해왔다. 늑대의 유일무이한 희망은 같은 숲 속에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분홍색의 살찐 아기 돼지 세 마리를 잡아 요리해 먹는 것이었다. 그래서 늑대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값싼 오트밀로 때우는 스파르타식 아침을 먹고 아기 돼지를 사냥할 계획을 세웠다. 늑대는 지팡이를 짚고 걷는 노부인으로 변장하고 꽤 복잡한 함정을 만든 후 나무 뒤에 숨어서 돼지들이 그 위를 지나가기 만을 끈기 있게 기다리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명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돼지들은 늑대보다 항상 한수 위였고, 교묘하게 늑대의 술수를 피했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늑대는 세 마리 돼지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었다. 돼지들을 한 대 묶고 커다란 냄비안에 넣은 다음 물이 더워지기 시작하자 늑대는 당근 등 채소들을 냄비속에 넣었다.
군침을 삼키며 돼지고기 요리로 배를 채울 생각을 하고 있던 늑대에게 아들 늑대가 다가와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아버지 내일은 뭘 하실 생각인가요?”
늑대는 아들의 질문에 잠시 멍 해졌다. 도대체 뭘 하면 좋을 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늑대는 얼른 돼지들을 풀어주었다. 늑대가 돼지를 풀어준 이유는 자명하다. 자신의 시야내 또는 가능성의 지평선내에 존재하던 돼지들이 사라진다면, 그에게 아침에 일찍 눈을 떠야 할 이유가 사라지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위의 예화에서 늑대의 행동은 개체의 능동성과 집중의 두가지 키 워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먼저 능동성에 대하여. 스피노자는 이성의 주도하에 일시적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피상적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할 수 있는 능동적 힘을 강화해 가는 삶을 자유인의 삶으로 보았습니다. 집중에 관하여. 자신이 설정한 꿈에 도취되어 구멍이 없는 항아리에 물을 채우듯 그가 소유한 에너지를 일편단심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데 쏟아 붇는다. 일반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은 보통사람들보다 자신의 삶에 훨씬 더 집중적으로 노력을 투하합니다.
세상 살이 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여간 멘탈이 강하지 않으면 정체성과 자존을 지키며 자신이 의도하는 생의 행복을 추구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위 늑대의 예화에서 보듯이 사람마다 살찐 분홍색 돼지 포획 project이 삶 속에 녹아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실천되어야 할 당위성은 여기서 재론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희브리서 6장 19절에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다(an anchor for the soul)”이라고 희망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또 코린토 1서 13장 13절에서 희망(hope)을 믿음(faith) 그리고 사랑(love)과 더불어 인간생존의 세가지 필수 조건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시인 버튼 브랠리(Berton Braley)는 “기회(Opportunity”)라는 자신의 시에서 저마다 자신의 전성기를 구가할 희망을 펼쳐보라고 의기소침한 시중의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게 아래와 같이 아름다운 언어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For the best verse hasn’t been rhymed yet,
가장 아름다운 시는 아직도 운율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The best house hasn’t been planned,
가장 좋은 집은 아직 설계되지 않았다.
The highest peak hasn’t been climbed yet,
가장 높은 봉우리는 아직정복되지 않았다.
The mightiest rivers aren’t spanned,
가장 큰 강에는 아직도 교량이 설치되지 않았다.
Don’t worry and fret, faint hearted,
걱정하지 마라 초조하고 소심한 자들아
The chances have just begun
기회의 창이 이제 막 열리기 시작했을 뿐이다.
For the Best jobs haven’t been started,
최상의 과업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The best work hasn’t been done.
최상의 성취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인 버튼 브랠리는 아직 정복되지 않은 전인 미답의 신천지가 각분야에서 개척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으니 시야를 미개척지로 돌려 무사안일에서 탈피하고 새로운 차원의 성취에 도전 해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좀 거칠게 표현하면 희망은 아침에 눈을 뜨면 개체가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 일입니다. 그일 이 개체의 삶에서 왜 그토록 중요 할까요? “생명을 에너지로 보는 관점에 의하면 집중할 수 없는 정신은 에너지가 담길 수 없는 정신과 같다. (다시 말하면) 에너지가 없으면 생명도 없으므로 집중할 수 없는 정신은 곧 생명이 부재한 정신과 같다.”
“집중할 수 있는 정신”에 대해서 위에서 결론 부분만 인용했습니다. 오늘 제가 쓴 글의 취지는 “희망은 각개체의 정신적인 집중을 요구하고, 각개체의 한가지 분야에 정신적인 집중은 의외로 일상의 행복을 동반한다는 선순환으로 연결된다 고 설명을 드리고자 전개하고 있습니다.
“집중할 수 있는 정신의 중요성” 에 대한 개념정리를 위해 제가 이글을 쓰면서 참고한 책의 전문을 추가로 인용 합니다. (이경임 저 ‘영혼의 약 상자’ 252 쪽)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과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은 정신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게 되면 무언가 몰두할 거리를 찾는다. 지식을 추구하거나, 이성을 사귀거나, 여행을 하거나, 취미 활동 등을 통해 우리는 산만한 정신을 한방향으로 집중시킬 수 있다. 실용적인 일이든 무용한 일이든 상관하지 않고, 어떤 일에 마음이 끌려 그 일에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집중할 대상이 없는 정신은 공기처럼 허공에 흩어져 아무런 작용을 하지 않는다. 갈등과 소요와 혼돈이 가라 앉아 있는 무심한 마음조차도 그러한 무심함을 유지하기 위한 집중이 요구된다. 무(無)조차도 무(無)에 의해 집중을 요구하는 것이다.”
◎희망에 관한 다양한 관점에서 내린 정의들:
○할 수 없다고 불평하기보다는 가능한 것부터 하나씩 해 나가는 것이다.
○절망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능력이다.
○어둠속에서 절망하기보다는 하나의 초에 불을 켜는 것이다.
○커다란 목표를 세우고 그것 때문에 어려움이 닥칠 때라도 좌절하지 않는 것이다.
○적든 크든 간에 모든 문제나 시련을 도약을 위한 또다른 기회로 생각한다.
○역경 때문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정신으로 자신이 세운 목표를 향해 꾸준히 밀고 나가는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한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다.
- 크리스토퍼의 하루에 3분 묵상 2 중에서
희망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어떤 일을 이루기를 바람”이다." 그러나 희망이란 단어의 정의가 처한 상황과 쓰이는 문장의 전후 맥락에 따라 폭넓게 해석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는 사실에 공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여러가지 상황에서 대체로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나 희망이 고민과 결합하여 희망 고민이라는 합성어로 쓰일 경우 “거짓된 희망으로 오히려 괴로움 주는 경우”라는 뜻의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사회 철학자 에릭 호퍼(Eric Hoffer, 1902-1983)는 아주 가까이 있는 희망과 멀리 있는 희망을 구분하여 아주 가까이 있는 희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을 유발하는 계기로 작동하지만 너무멀리 있는 희망은 마취제의 역기능을 한다고 희망실현의 멀고 가까움에 따라 장단점을 뚜렷이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국내정치의 경우 아주 가까이 있는 희망의 경우 최소 3년을 시한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현 대통령의 임기가 5년 단임이고 실제적으로 레임덕 없이 일할 수 있는 기간은 취임 후 3년 정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논어 제 11편 선진(先進) 제 25장에서 공자가 제자인 증석과 염유에게 등용시켜준다면 어떻게 정치를 해 나가겠느냐 고 공자가 묻자 제자들이 각각 3년내에 성과를 내겠다고 아래와 같이 대답했습니다. (지면관계로 원문 생략)번역은 김석원 역해 “논어”에서 인용했습니다:
자로와 증석과 염유와 공서화가 공자를 모시고 앉았는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보다 나이가 조금 많다 하나 어렵게 생각마라. … 만일(너희들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 등용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자로가 서슴치 않고 대답했다. ‘천승의 제후국이 큰 나라 사이에 끼어서 대군의 침범을 받고 기근으로 시달린다 해도, 이 유가 정치를 한다면 삼년 정도에서 백성으로 하여금 용감하게 만들고, 의의 방향을 알게 할 것입니다. 공자께서 들으시고 빙그레 웃으셨다.
‘구야(염유의 이름)!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 구가 대답하였다. ‘제가 사방 육칠십리 혹은 더 적은 오육십리의 작은 나라를 다스린다면, 삼년 정도에서 백성들을 잘 살게 만들 수 있으나 예악에 있어서는 군자의 힘에 의하겠습니다.’ 이하생략.
민생이란 의료, 주택, 일자리, 교육, 물가, 살림살이, 치안, 사회기강 그리고 보건 위생과 환경 등 을 포함하는 국민 삶의 질과 직결되는 종합적이고 광범위한 국민의 일상생활여건과 환경요인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총선이 실시되는 내년 4월쯤 에는 국민들이 윤석열 정권의 미래 비젼이 “hopeful’인지 반대로 ‘hopeless’인지를 피부로 체감할 성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2024년 총선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여당이 국민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려면 지금부터 민생에 대한 실적 챙기기에 전념해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과 정부 여당의 책임은 대통령을 견제하고 반대하는 야당의 무책임한 지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크고 무겁 습니다. 자신들의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지 않는 정부와 여당은 국민들은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내년 총선에서 압승한다면 국민의 희망을 잘 받들며 취임 후 잘 보낸 시간의 보람을 누릴 것입니다. 반대로 만일 내년 총선에서 국회의석 과반확보에 실패한다면 잘못 보낸 시간에 대한 국민의 응징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낸 총선 결과에 대하여 아직은 예측하기가 좀 빠릅니다만 정부와 여당은 긴장감을 가지고 더 늦어지기 전에 현재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민생문제 해결에 올인 할 때라고 생각 합니다. 비록 민생의 성과와 실적이 국민의 눈높이에 못 미치더라도 국민들은 윤석열정부와 여당의 태도를 민생 실적 못지 않게 눈 여겨 보고 있음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국민에 대한 봉사자로서 각료들이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고 또한 목소리의 tone을 싸움박질이 아닌 설득조로 가져 가면 정부 여당이 하는 일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와 연민도 지금보다는 한 차원 더 높아 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겉 똑똑이 국무위원과 건달 정치인의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추한 대결의 모습을 보면서 뜻이 있는 국민들은 실망을 넘어서 절망하고 있음을 통촉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권자들의 정치혐오와 정치적인 냉담을 증폭시키는데 불쏘시게 역할을 한 이런 수준 이하의 분들의 무책임한 언행을 여기서 따갑게 지적하고 성토하지 않을 수 밖에 없습니다.